경주김씨 영분공파
영분공이 경순왕 아들이 아니라는 논리적 증거 1
생물학적인 년대가 성립되지 않는다
경주김씨는 2013년 6월부터 영분공이 경순왕의 아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논증해 왔다.
어떤 주장이든 객관적 공감대가 형성되고 설득력을 얻으려면 논거(논리적인 근거)가 있어야 한다.
이미 수 년 전부터 영분공은 경순왕의 아들이 아니라고 주장해 왔던 장본인으로서 영분공이 경순왕의 아들이 될 수 없다는 논리적인 근거를 하나씩 시리즈로 제시하고자 한다.
오늘은 그 첫 번째로 생물학적인 년대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근거를 대겠다.
경순왕은 978년(경종3년)에 승하하셨고 흔히 천수(天壽)를 누렸다고 한다.
경순왕은 언제 탄생하셨까? 그리고 몇 세까지 사셨을까?
역사에는 경순왕이 언제 탄생하였다는 기록이 없다.
그렇지만 경순왕의 생년이 언제인지 추측해 볼 수 있는 근거를 삼국사기 <효녀지은(孝女 知恩)이야기>에서 찾을 수 있다.
[효녀지은(孝女 知恩)은 한기부 백성 연권(連權)의 딸이다.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웠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홀로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나이 32세 되도록 시집을 가지 않고
아침저녁으로 문안드리며 곁을 떠나지 않았다.
봉양할 것이 없으면 때로는 품팔이도 하고,
또는 돌아다니며 밥을 빌어다가 봉양하였다.
그러한 날이 오래 되어 고달픔을 이기지 못하여
부잣집에 가서 몸을 팔아 종이 되기도 하여
쌀 10여 섬을 마련하였다.
온 종일 그 주인집에 가서 일을 하여주고
저녁에는 밥을 지어 가지고 와서 봉양하였다.
이와 같이 하기를 3~4일이 지나자 그 어머니가
딸에게 묻기를,
"지난날의 식사는 거칠었으나 밥맛이 좋았는데
지금은 식사는 좋으나 맛이 옛 같지 않으며
간장을 칼날로 찌르는 것 같으니 이 어쩐 일이냐?" 하였다.
이에 딸이 사실대로 아뢰니 어머니가 말하기를
"나 때문에 너를 남의 종으로 만들었구나!
차라리 빨리 죽는 것이 낫겠다" 하고
소리를 내어 크게 우니 딸도 울어
그 슬픔이 길가는 사람을 감동시켰다.
그때 효종랑(孝宗郞)이 놀러 나갔다가 이를 보고
집에 돌아와 부모에게 청하여
집의 곡식 100섬과 옷가지를 실어다 주었다.
또 종으로 산 주인에게 보상하고 양인으로 만들어 주니
그의 낭도 수천 명이 각각 곡식 한 섬씩 내어 도와주었다.
대왕이 이 소식을 듣고 조(租) 500섬, 집 한 채를 내려주고
잡역을 면제시켜 주었다.
집에 곡식이 많았으므로 빼앗거나 훔쳐 가는 자가 있을까 염려하여
담당 관청에 명하여 군대를 보내 교대로 지키게 하였고
그 마을을 표하여 효양방(孝養坊)이라 하였다.
이어서 표를 올려 그 아름다움을 당나라 왕실에 알렸다.
효종(孝宗)은 당시 제3재상 서발한 인경(仁慶)의 아들로
어려서의 이름은 화달(化達)이었다.
왕이 말하기를
"그는 비록 어린 나이라고는 하지만 문득 인격이 완성된 어른처럼 보인다"
하고 곧 자기의 형 헌강왕(憲康王)의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삼국사기 효녀지은(孝女 知恩) 이야기는 본문에서 보는 것처럼 헌강왕의 동생 정강왕 때 있었던 일이고 여기 등장하는 효종은 경순왕의 아버지이다.
이 기사대로라면 경순왕의 아버지 효종은 정강왕 제위기간(886년~887년)에 헌강왕의 딸과 혼인을 한 것이다.
헌강왕(재위 875년~886년)에겐 아들(서자)과 두 딸이 있었는데 아들은 진성여왕에 이어 왕위에 오른 효공왕(제 52대, 재위897~912년)이고, 두 딸 중 한 명은 신덕왕(제53대, 재위 912~917년, 박경휘)의 왕비가 되었고 다른 한명은 경순왕의 어머니가 되었다.
삼국사기에는 경순왕 할아버지의 이름이 인경으로 되어 있는데 경주김씨족보에는 실홍으로 기록되어 있다.
경순왕의 어머니가 헌강왕의 딸이므로 경순왕의 할아버지 인경과 실홍은 동일인으로 봐야 한다.
경순왕의 아버지 효종의 혼인이 정강왕 제위기간인 886년~887년이었으므로 경순왕의 생물학적 생년은 886년 이전이 될 수 없다.
경순왕의 생년을 887년으로 본다면 경순왕은 978년(경종3년)에 승하하셨으니 향년 91세라는 추정을 해 볼 수 있다.
<경순왕 주요 년대>
927년 신라를 침공하고 경애왕을 죽인 후백제의 견훤에 의해 신라왕이 됨
931년 경순왕의 두 번에 걸친 요청으로 태조 왕건은 경주를 내려와 알현함
935년 11월 신라를 고려에 양위함, 태조 딸 낙랑공주와 혼인, 신란궁에 거처함
935년 11월 태자보다 높은 위치의 정승이 됨. 경주를 식읍으로 받음
975년10월 경종 정승 김부를 상보 도성령으로 올려 식읍 1만호 하사
978년(경종3년) 4월 김부 승하. 경종이 시호를 경순(敬順)으로 내림.
1070년 문종24년 평장사로 치사(퇴임)한 김의진이 졸하였다는 기록이 고려사절요에 있는데 고려시대엔 대게 퇴임(치사)하는 나이가 70세였으니 김의진이 돌아가신 년도인 1070년을 기점으로 생년을 추정하면 998~1000년 사이일 것이다.
그렇다면 경순왕의 셋째 아들 명종은 몇 년도에 탄생했을까?
이는 어디까지나 가정이지만, 경순왕이 죽방부인 박씨 사이에서 16세에 일(鎰)을 낳고 18세에 황(湟)을 낳고 20세에 명종(영분공)을 낳았다고 어림잡아 본다면 명종의 탄생년도는 907년이 된다.
(영분공파에서는 명종을 영분공으로 보니까 편의상 명종=영분공으로 가정하고 논의를 진행함을 이해하기 바란다.)
영분공에서부터 김의진에 이르기까지는 907년부터 998년까지이다.
91년만에 8대가 태어났다는 이야기다.
907년(영분공)
920년(임흥공)
933년(억종)
946년(계옹)
959년(아개공)
972년(예겸)
985년(주정)
998년(의진)
대한민국 모든 계보를 통틀어 90년 만에 8대가 태어난 예가 없다.
영분공~주정까지 모두 12세에 혼인을 하고 무조건13세에 첫 아들을 낳아야
하고, 그들 중 하나도 병에 걸려 죽지 않고 모두 건강하게 성장해야 성립될 수 있는 계보다.
사람이 태어나서 배필을 정하고 혼인을 하고 자식을 낳는 과정은 그리 간단치 않다. 이건 누가 봐도 상식적으로 성립될 수 없는 계보다.
그러므로 영분공은 생물학적으로 경순왕의 아들이 될 수 없다.
2018년 8월 22일
경주김씨
경주김씨 영분공파
영분공이 경순왕의 아들이 아니라는 논리적 증거2
역사적 년대가 성립되지 않는다
영분공이 경순왕의 아들이 될 수 없다는 논리적인 증거 두 번째로 오늘은 영분공~아개공에 이르기까지 고려시대 관직이 보이지 않고 오히려 신라시대관직이 보인다는 점과 김예겸이 삼한벽상공신 내사령이란 점을 들어 영분공이 경순왕의 아들이라는 역사적 년대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논거를 대보겠다.
족보에 기록된 조상들은 역사 속에서 실존적으로 살았던 인물이므로 그 관직을 보면 어느 시대, 어느 나라 사람인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예를 들어서, 먼 훗날 남북통일이 되고 우리의 후손들이 경주김씨족보를 들여다 볼 때 김○○ 인민무력부장이라고 쓰여 있다면 남북통일 되기 전에 북한에 살았던 분이라고 짐작할 것이고,
김○○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이라 쓰여 있다면 통일이 되기 전 남한에 살았던 분이라고 추측할 것이다.
인민무력부장 김○○의 족보기록을 가지고 남한에서 살던 사람이라고 우긴다면 어떻게 될까?
만일 그런 사람이 있다면 인민무력부장이 북한의 관직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일 것이다.
영분공파 계보를 보면, 경순왕→영분공(永芬公)→임흥공(林興公)→파간(波干) 억종(嶷宗)→ 파간 계옹(季邕)→아개공(阿蓋公)까지 5대를 내려 동안 고려관직이 보이지 않는다.
더욱 이상한 점은 파간(波干)이라는 신라 관직이 두 분(억종, 계옹)에게 보인다는 사실이다.
경순왕이 신라를 고려에 양위한 것은 935년이고 고려 성종(재위 981~997년)이 2성 6부제로 중앙관제를 개편하기 시작한 것은 982년부터다.
경순왕의 4세, 5세라면 고려시대 경종~문종 시대에 살던 인물일 텐데 어째서 신라시대 관직인 파간(波干)이 두 분의 이름 옆에 붙어있을까?
관직은 그 사람이 살았던 시대를 반영한다.
위에서 예를 들었던바, 남북통일 이후 조상의 족보를 만든다 하더라도 북한 사람에겐 북한의 관직이 남한 사람에겐 남한 관직이 붙는 법이다.
인민무력부장은 북한의 관직이고 경제부총리 기획제정부장관은 남한의 관직이니 그 관직을 보고 어느 시대 어느 나라 사람인지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경순왕의 후손이라면 마땅히 고려시대를 살았을 4세 억종(嶷宗), 5세 계옹(季邕)의 파간(波干)이라는 신라 관직명이 보인다는 것은 역사적 년대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을 영분공파족보 스스로가 자명(自明)하는 셈이다.
우리는 지난번에 영분공이 경순왕의 아들이라는 생물학적인 년대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밝혔거니와 영분공파 계보는 이와 같이 역사적 년대도 성립되지 않는다. 영분공은 경순왕의 아들이 아니라는 논리적인 증거다.
경순왕의 후손으로서 영분공(永芬公)→임흥공(林興公)→파간(波干) 억종(嶷宗)→파간 계옹(季邕)→아개공(阿蓋公)으로 이어져 내려오면서 응당 고려시대 관직이 보여야 하는데 엉뚱하게 신라 관직인 파간(波干) 억종(嶷宗)과 계옹(季邕) 두 분에게 보이니 이들을 통일신라시대인으로 보는 것이다.
영분공파에서 가장 오래된 족보라 할 수 있는 1702년 임오보를 보면 흥미로운 기록을 읽어볼 수 있다.
김예겸 옆에는 삼한벽상공신 내사령이라 기록되어 있고 그 아들 김주정 옆에는 태자소보 충렬왕 때 사람이라는 문구(太子少俌 忠烈王時人)가 있다.
그리고 김주정의 아들 김의진 옆에 高麗 文宗時平章事 興 文憲公 崔沖 文和公 崔惟善 門下侍中 金元鼎 文安公 金良鑑 一代之人 文宗 二四年 八月 辛未卒 諡 良慎公 (고려 문종 때 평장사이다, 문헌공 최충, 문화공 최유선, 문하시중 김원정, 문안공 김양감과 함께 흥했던 한 세대 사람이다. 문종24년 8월 신미일에 돌아가셨다. 시호는 양신공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양신공 김의진의 옆에 기록된 문구는 역사와 일치하며 아주 잘 된 기록이다.
특히 김양감(金良鑑)이 문안공(文安公)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사료다.
그런데 태자소보 김주정이 과연 충렬왕 때 사람일까?
<고려왕조>
고려태조-혜종-정종-광종-경종-성종-목종-현종-덕종-정종-문종(재위 1046~1083년)-순종-선종-헌종-숙종-예종-인종-의종-명종-신종-희종-강종-고종-원종-충렬왕(재위1274년 6월~1298년 1월, 1298년 8월 복위~1303년)-충선왕-충숙왕-충혜왕-충목왕-충정왕-공민왕-우왕-창왕-공양왕
김주정의 아들 김의진은 문종 때 사람이라고 써놓고 김의진의 아버지 김주정은 200년 후대인 충렬왕 때 사람이라고 써놓은 이 1702년 임오보의 기록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두 개의 고려묘지명을 통해 이 기록을 고증해 보기로 하자.
황보양처김씨묘지명(皇甫讓妻金氏墓誌銘, 1149년, 의종3년)
부인의 성은 김씨로, 그 선조는 신라왕(新羅王)의 후예이다. 증조부 주정(周鼎)은 태자태보(太子太保)이고, 조부 의진(義珎)은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이다. 아버지 후덕(侯德)은 감찰어사(監察御史)이고, 어머니 계양군부인 김씨(桂陽郡夫人 金氏)는 형부시랑 좌간의대부(刑部侍郞 左諫議大夫) 구현(九鉉)의 딸이다.
(부인은) 검교우복야 수어사잡단(檢校右僕射 守御史雜端) 황보양(皇甫讓)군에게 시집갔다.
김유규묘지명(金惟珪墓誌銘, 1158년, 의종12년)
군의 이름은 유규(惟珪)이며 경주 사람이다. -중략-
증조는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郞) 주정(周鼎)이고, 조부는 호부시랑(戶部侍郞) 의선(義先)이다. 아버지는 내원령(內園令) 후백(侯伯)이고, 어머니는 청화군부인(淸化郡夫人) ▨씨이다.
황보양처김씨묘지명(皇甫讓妻金氏墓誌銘)(1149년, 의종3년)과 김유규묘지명(金惟珪墓誌銘 1158년, 의종12년)을 가지고 고증해 본 결과, 두 개의 고려묘지명이 모두 김주정이 김의진-김의선의 아버지로 밝히고 있어서 김주정이 김의진의 아버지라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고, 1702년 임오보의 김주정 옆에서 충렬왕 때 사람이라는 기록(太子少俌 忠烈王時人)은 오기(誤記)로 판명된다.
김유규묘지명(金惟珪墓誌銘, 1158년, 의종12년)에는 경주김씨족보에는 찾아볼 없는 김의선의 계보가 등장하는데 김의진의 동생으로 보인다.
영분공파족보는 김의진의 후손들이 만들었으므로 직계 조상인 김의진만 계보에 올라 있다.
김의진의 동생 김의선이 있었다는 사실은 경주김씨영분공파 문중에서는 모르던 일이었고 김유규묘지명(金惟珪墓誌銘, 1158년, 의종12년)을 통해서 알려진 것이다.
김의선의 계보는 오늘날 김유규묘지명(金惟珪墓誌銘, 1158년, 의종 12년)이 발견되어 판독을 거쳐 학계에 발표됨으로 인하여 되살아난 경우이다.
고려묘지명은 고인이 돌아가신 년대에 제작된 것이므로 계보의 신빙성이 매우 높다.
그런데 대게 1600년대부터 기록된 족보는 고려시대와 수 백 년의 갭(간격)이 있기 때문에 후대로 내려오는 동안 기록에 있어서 오류가 있을 수 있으므로 고려묘지명 또는 고려사를 통해 역사고증을 해봐야 한다.
영분공이 정말 경순왕의 아들이라면 흔히 모든 대안군파 후손 계보가 새겨진 고려 묘지명에서 보는 것처럼. 그 후손들에게 고려시대 관직이 보여야 한다.
특이한 것은 영분공(永芬公)→임흥공(林興公)→파간(波干) 억종(嶷宗)→ 파간 계옹(季邕)→아개공(阿蓋公) 5대를 내려오는 동안 고려관직이 보이지 않다가 김예겸에 이르러 갑자기 고려관직이 보이기 시작한다는 점이다.
삼한벽상공신 내사령 김예겸
태자소보 김주정
중서시랑평장사 김의진
감찰어사 김후덕
위에서 논하였지만, 파간(波干) 억종(嶷宗)→파간 계옹(季邕)은 신라시대 관직이므로 영분공~아개공까지의 인물은 모두 통일신라인으로 간주되고, 고려 관직의 김예겸부터는 고려인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겠다.
김예겸의 삼한벽상공신 내사령에 대해서는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삼한벽상공신(삼한공신)은 태조 때 제수가 끝난 공호(936~940년)이고 이후 다른 왕으로부터 이 공호를 받은 이는 아무도 없으므로 김예겸은 태조, 그리고 경순왕과 동시대인이다.
둘째 내사령은 경종 원년인 976년에 이미 있던 관직이고 경순왕(978년 승하) 생전에 존재하던 관직이므로 시대적으로 삼한벽상공신(삼한공신)과 충돌을 일으키거나 모순되지 않는다.
삼한벽상공신을 태조 이후 다른 왕에게 제수 받은 사람이 있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고, 내사령이 성종 때 관제 개편으로 생긴 관직이라는 것 역시 사실이 아니다.
그러므로 삼한벽상공신 내사령 김예겸은 경순왕과 동시대인이다.
경순왕과 동시대인인 삼한벽상공신 내사령 김예겸은 경순왕의 7세손이 될 수 없다.
김예겸이 경순왕의 7세손이라면 응당 역사연대가 일치해야 마땅하거늘 역사연대가 도무지 일치하지 않는다.
이처럼 1479년 허백당 성현이 김가구로부터 전해 받아 쓴 김인경 시집서의 계보 이래 영분공을 경순왕 아들로 만들어 놓은 모든 영분공파족보는 생물학적 년대는 물론이고 역사적 년대가 성립되지 않는다.
2018년 8월 25일
경주김씨
경주김씨 영분공파
영분공이 경순왕 아들이 아니라는 논리적 증거3
영분공의 이름은 명종(鳴鍾)이 아니다
1702년, 1711년, 1785년 등 오래된 경주김씨족보에는 영분공의 이름이 없다. 영분공파에서 가장 고전적인 근거로 삼는 1479년에 작성된 김인경시집서의 계보에도 영분공의 이름은 물론 없다.
경주김씨족보에 영분공의 이름을 명종으로 쓰게 된 것은 1785년(정조9년)에 경순왕의 넷째아들 시중시랑 고려 평장사 대안군 김은열 묘지명(1028년)이 발견된 그 이후부터다.
[兄은 일(鎰)이고 다음은 황(湟), 다음은 명종(鳴鍾)이다. 아우는 중석(重錫), 건(鍵), 추(錘)이다. 아들은 강릉군 태화(江陵君 泰華)이다].
-고운당필기에 수록된 유득공의 대안군 묘지명 판독문 중에서-
영분공파족보에 영분공의 이름이 명종(鳴鍾)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대안군 묘지명이 발견된 이후부터니까 영분공파에서 “대안군 묘지명에 경순왕의 셋째 아들 이름이 명종(鳴鍾)이니 영분공의 이름은 명종(鳴鍾)일 것이다”라고 하여 영분공 이름을 명종(鳴鍾)으로 쓰기 시작한 것 같다.
대안군 묘지명(1028년)을 발견했던 사람은 장단부(長湍府)에 사는 사람인데 당시 대안군의 후손이라고 자처하던 김사목(1740~1849, 계림군파 경은부원군 김주신 증손)이 돈을 주고 입수하여 금석학자인 유득공(1749~1807)에게 대안군 묘지명 판독을 의뢰하였던 것 같고, 유득공의 대안군 묘지명 판독문은 [고운당필기]에 수록되어 있다.
2015년 7월 박철상이 그의 저서 [나는 옛것이 좋아 때론 깨진 빗돌을 찾아다녔다]에 추사 김정희에게 금석학의 영향을 끼친 유득공의 위상을 소개하면서 유득공이 판독한 대안군 묘지명을 공개하였다(박철상, “나는 옛것이 좋아 때론 깨진 빗돌을 찾아다녔다”, 65~66쪽).
“乙巳年間, 長湍府人, 於山谷間得石一片, 刻云, ‘新羅敬順王金溥第四子, 侍中侍郞, 有高麗平章事, 殷說, 卒于戊辰三月初四日. 己丑, 葬于城北十里鍾巖下, 五龍山南麓, 雙龍合金壬坐之原. 兄則鎰, 次湟, 次鳴鍾, 弟曰重錫, 曰鍵, 曰鎌, 曰錘. 子江陵君泰華, 後其子孫者, 或有昭考之意, 采誌於自墓上正北五步之地.’ 凡一百二字, 字體端正, 石色如玉, 近千年物也. 大冢宰金公, 爲殷說後, 從湍民得之, 搨藏一本, 埋其石.”(위의 책, 각주 17), 322쪽.)
乙巳(1785, 정조9년)년간에 長湍府 사람이 산골짜기에서 돌 한 조각을 얻었는데 이렇게 새겨져 있었다.
‘신라 경순왕 김부(新羅 敬順王 金溥)의 넷째 아들 시중시랑 고려 평장사 은열(侍中侍郞 高麗 平章事 殷說)이 무진(戊辰)년 3月 4일에 돌아가셨고 기축(己丑)일에 성 북쪽 10리에 있는 종암(鍾巖) 아래의 오룡산(五龍山) 남쪽 기슭 쌍룡합금(雙龍合金)의 북쪽[壬坐] 언덕에 장사지냈다. 兄은 일(鎰)이고 다음은 황(湟), 다음은 명종(鳴鍾)이다. 아우는 중석(重錫), 건(鍵), 추(錘)이다. 아들은 강릉군 태화(江陵君 泰華)이다. 훗날 자손 중에 소고(昭考)의 뜻이 있을까 하여 묘위로부터 정북으로 다섯 걸음 되는 곳에 지석을 둔다.”
모두 102자인데 자체가 단정하고 돌의 빛깔은 옥과 같았으며 거의 1,000년이나 된 물건이었다. 대총제(大冢宰, 이조의 으뜸벼슬)이신 김공(金公, 金思穆)이 은열(殷說)의 후손이므로 장단 사람으로부터 이를 구하여 탁본을 떠서 한 본을 수장하고 돌은 묻었다.
참고로 위의 [무진(戊辰, 1028)년 3月 4일(己亥)에 돌아가셨고 기축(己丑, 4월 24)일에] 이 부분은 김용선(2006년), 박철상(2015년) 해석의 오류를 지적하고 경주김씨가 2016년 9월 19일 제시한 간지 해석이다.
대안군 묘지명(1028년, 현종 18년)은 고려묘지명 가운데 가장 먼저 발견된 묘지명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김용선 교수도 2006년 [역주 고려묘지명집성 上] 펴내고 대안군 묘지명을 맨 앞에 소개했던 것이리라.
대안군 묘지명(1028년)과 함께 그 즈음 발견된 김경보 묘지명(金景輔墓誌銘, 1150년, 의종4년)은 경주김씨 대안군파 계보 정립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당시 경주김씨 문중은 족보를 만들 때 이 두 개의 묘지명에 나타난 계보를 그대로 반영하기 시작하는데 경순왕(傅)-은열(殷說)-태화(泰華)-○○-계삼(繼蔘)-한공(漢公)-경보(景輔)의 계보를 확립하게 되고, 각 문중마다 그 전에 없는 경순왕의 첫째 아들 마의태자의 이름을 일(鎰)이라 쓰게 된다.
김경보묘지명(金景輔墓誌銘)
新羅敬順王金傅七世孫檢校太子少保金景輔父工部侍郞漢公祖追封工部尙書繼蔘外祖禮部員外郞金台器以年八十二於大金皇統十年庚午歲四月十七日癸亥卒于家以七月十七日乙酉葬于五龍山男儒林郞監察御史賜緋魚帒作雯長女壻靜州使試殿中內給事尹裕延二女壻典獄署丞柳冕
〔출전:『慶州金氏族譜』(1985)〕 [김용선, 고려묘지명 집성]
신라 경순왕 김부(敬順王 金傅)의 칠세손(七世孫)인 검교태자소보(檢校太子少保) 김경보(金景輔)는 아버지가 공부시랑(工部侍郞) 한공(漢公)이고, 조부는 공부상서(工部尙書)로 추봉된 계삼(繼蔘)이며, 외조부는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郞) 김태기(金台器)이다. 나이 82세로 금(大金) 황통(皇統) 10년(의종 4, 1150) 4월 17일 계해일에 집에서 돌아가시니, 7월 17일 을유일에 오룡산(五龍山)에 장례지냈다. 아들은 유림랑 감찰어사(儒林郞 監察御史)로 비어대(緋魚帒)를 받은 작문(作雯)이고, 맏사위는 정주사 시전중내급사(靜州使 試殿中內給事) 윤유연(尹裕延)이며, 둘째 사위는 전옥서승(典獄署丞) 유면(柳冕)이다.
김용선 〔출전:『역주 고려묘지명집성(상)』(2001)〕
영분공파에서는 대안군 묘지명(1028년)에 경순왕 셋째 아들이 명종(鳴鍾)으로 새겨졌으니 족보에다 영분공의 이름을 명종이라고 썼고 이것이 지금까지 족보를 만들 때마다 대물림하여 내려오고 있다.
오늘날 거의 대부분의 영분공파 후손들이 영분공의 이름이 명종(鳴鍾)인 줄 알고 있다.
2010년 한국의 성씨를 펴낸 정복규(성씨 전문 기자)의 “한국의 성씨를 찾아서”라는 글에도 영분공의 이름이 명종으로 되어 있다.
인터넷을 검색해 보면 영분공의 이름이 명종(鳴鍾)으로 도배가 되어 있다.
그러나 영분공의 이름은 명종(鳴鍾)이 아니다.
앞서 우리는 [영분공이 경순왕의 아들이 아니라는 논리적 증거1]에서 생물학적 년대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밝혔고, [영분공이 경순왕의 아들이 아니라는 논리적 증거2]에서 역사적 년대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논거를 통해 증명하였다.
영분공이 경순왕의 아들이라는 생물학적 년대 및 역사적 년대가 성립되지 않으니 영분공의 계보를 경순왕 밑에다 갖다 붙여서 경순왕의 아들로 만들어 놓은 족보라는 것이다.
게다가 1479년 김양경시집서 계보, 즉 허백당 성현이 김가구(김미)로부터 전해 받아 쓴 계보로부터, 1702년, 1711년, 1785년 등 경주김씨 영분공파족보에 하나같이 영분공의 이름이 없다는 사실은 영분공의 이름을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1785년(정조9년) 대안군 묘지명이 발견되고 나서 대안군 묘지명의 경순왕아들 서차를 따라서 영분공을 명종으로 쓰기 시작한 것은 영분공을 경순왕의 셋째 아들로 갖다 붙여 놓은 것에 이어서 영분공의 이름을 명종(鳴鍾)에 붙이기일 뿐이라는 것이다.
만일 명종이 정말 영분공의 이름이라면 대안군 묘지명 발견 이전에 영분공을 명종이라 쓴 족보나 계보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대안군 묘지명 발견(1785년, 정조9년) 이전에 명종이라 쓴 족보는 내가 아는 한 그 어디에도 없다.
그리고 족보에 등장하는 조상들은 역사 속에 실존적으로 존재했던 인물이기 때문에 영분공이 경순왕의 아들이라면 당연히 생물학적 년대 및 역사적 년대가 맞아야 하는데, 생물학적 년대와 역사적 년대가 도무지 성립되지 않으니 영분공이 경순왕의 셋째 아들 명종(鳴鍾)일 수가 없는 것이다.
영분공을 경순왕의 아들이라고 족보에 갖다 붙인다고 영분공이 경순왕의 아들이 될 수 없으며, 영분공의 이름을 명종이라고 족보에 갖다 붙인다고 영분공의 이름이 명종이 될 수 없다.
이는 우리가 영분공을 경순왕의 아들이 아니라고 보는 이유이고, 영분공의 이름이 경순왕의 셋째 아들 명종(鳴鍾)이 아니라고 보는 이유다.
2018년 8월 26일
경주김씨
경주김씨 영분공파
영분공이 경순왕 아들이 아니라는 논리적 증거4
영분공 후손의 고려묘지명에
경순왕의 후손이라는 언급이 하나도 없다
내가 경주김씨 영분공파 파조 영분공이 경순왕의 아들이 아니라고 확신하게 된 이유에는 생물학적 연대 및 역사적 연대가 맞지 않는다는 등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영분공 후손의 고려묘지명에 경순왕의 후손이라는 언급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 결정적이었다.
진짜 경순왕의 후손인 경우 고려묘지명에서 경순왕의 자손임을 언급하고 있다.
350여점 넘는 고려묘지명을 일일이, 수없이 들여다 본 나로서는 고려묘지명의 특성상 경순왕의 후손이라면 반드시 간략하게나마 언급이 있기 마련인데 일절 언급이 없다는 것은 경순왕 후손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판단하게 되었다.
고려묘지명에는 영분공의 후손으로 김자류 묘지명(1146년, 인종24년), 황보양 처 김씨묘지명(1149년, 의종3년)과 김유규 묘지명(1158년, 의종12년)이 있다.
이 묘지명은 인종~의종 사이에 작성된 것으로 시대적으로 고려 중기에 해당한다.
김후덕의 딸 황보양 처 김씨 묘지명(1149년, 의종3년)은 주정-의진-후덕의 계보가 새겨져 있고 영분공파 족보의 계보와 일치하는데, 김양경시집서의 계보(1479년)보다 330년 앞서고, 후백의 아들 김유규 묘지명((1158년, 의종12년)은 321년 앞선다.
이러하니 황보양 처 김씨묘지명과 김유규 묘지명은 조선시대 김양경시집서 계보의 출처로 보이는 김가구(김미)의 가승 계보보다 훨씬 신빙성이 높은 것이다.
김자류 묘지명(金子鏐墓誌銘1146년, 인종24년)
[조산대부 검교상서우복야 판장작감사 김공의 이름은 자류이고 자는 숙보이다. 신라왕의 후손으로 삼한공신 대광 시중 김예□(김예겸)의 7세손이다.]
황보양처김씨묘지명(皇甫讓妻金氏墓誌銘, 1149년, 의종3년)
[부인의 성은 김씨로, 그 선조는 신라왕(新羅王)의 후예이다. 증조부 주정(周鼎)은 태자태보(太子太保)이고, 조부 의진(義珎)은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이다. 아버지 후덕(侯德)은 감찰어사(監察御史)이고, 어머니 계양군부인 김씨(桂陽郡夫人 金氏)는 형부시랑 좌간의대부(刑部侍郞 左諫議大夫) 구현(九鉉)의 딸이다.
(부인은) 검교우복야 수어사잡단(檢校右僕射 守御史雜端) 황보양(皇甫讓)군에게 시집갔다.]
김유규묘지명(金惟珪墓誌銘, 1158년, 의종12년)
[군의 이름은 유규(惟珪)이며 경주 사람이다. -중략-
증조는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郞) 주정(周鼎)이고, 조부는 호부시랑(戶部侍郞) 의선(義先)이다. 아버지는 내원령(內園令) 후백(侯伯)이고, 어머니는 청화군부인(淸化郡夫人) ▨씨이다.]
이처럼 영분공의 후손인 김자류 묘지명(1146년), 황보양 처 김씨 묘지명(1149년), 김유규 묘지명(1158년), 3개의 묘지명에 경순왕의 후손이라는 언급이 없다.
왜 경순왕의 후손이라는 언급이 하나도 없을까?
그 이유를 경순왕의 후손이 아니기 때문으로 보는 것이 가장 설득력이 있다.
나는 이 3개의 고려묘지명을 오랫동안 뜯어보면서 영분공은 경순왕의 아들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영분공 후손의 고려묘지명에 경순왕의 후손이라는 언급이 하나도 없으므로 영분공은 경순왕의 후손이 아니라는 이 결론은 생물학적 년대 및 역사적 년대가 성립되지 않음과 연결되어 있다.
황보양 처 김씨 묘지명(1149년)은 부인의 조카인 보문각교감(寶文閣校勘) 황문통(黃文通)이 지었는데, 당대 명문장가라 원증승통덕겸묘지명(1150년), 윤포묘지명(1154년), 정각수좌의광묘지명(1158년)도 찬하였다.
황문통이 황보양 처 김씨 묘지명(1149년)에서 마지막 읊은 애시(哀詩)가 천하의 명문이다.
명(銘)하여 이른다.
아, 조물주(造物主)시여, 부인은 어디로 갔습니까.
무덤[壽宮]의 숲 무성한데 흰 구름 그 위를 나네.
허공에 기대어 기운을 타서 티끌 같은 세상,
허물 벗듯 벗어나 희미한 세상으로 갈 줄을 어찌 알았으리요.
자손은 천 년을 이을 것이니 그 덕은 길이 빛나리라.
銘曰嗟乎造物夫人將安歸壽宮欝欝白雲其飛庸詎知憑
虗馭氣蟬蛻乎塵垢之境而深造乎希微子孫千祀德其有餘輝
<해석자: 김용선, 고려묘지명집성>
경순왕의 후손 고려묘지명은 대안군 김은열 묘지명(1028년, 현종 18년), 김경보 묘지명(1150년, 의종4년), 김봉모 묘지명(1209년, 희종5년), 홍경 처 낙랑군대부인 김씨 묘지명(1317년, 충숙왕 4년), 수녕옹주 김씨 묘지명(1335년, 충숙왕 복위 4년)이 있다.
<대안군 김은열 묘지명(1028년, 현종 18년)>
[신라 경순왕 김부(新羅 敬順王 金溥)의 넷째 아들 시중시랑 고려 평장사 은열(侍中侍郞 高麗 平章事 殷說)이 무진(戊辰)년 3月 4일에 돌아가셨고 기축(己丑, 4월 24일)에 성 북쪽 10리에 있는 종암(鍾巖) 아래의 오룡산(五龍山) 남쪽 기슭 쌍룡합금(雙龍合金)의 임좌[壬坐]에 장사지냈다. 형은 일(鎰)이고 다음은 황(湟), 다음은 명종(鳴鍾)이다. 아우는 중석(重錫), 건(鍵), 추(錘)이다. 아들은 강릉군 태화(江陵君 泰華)이다.]
-유득공 대안군 묘지명판독문 박철상 역, 경주김씨 수정번역-
<김경보묘지명(1150년, 의종4년)>
[신라 경순왕 김부(敬順王 金傅)의 칠세손(七世孫)인 검교태자소보(檢校太子少保) 김경보(金景輔)는 아버지가 공부시랑(工部侍郞) 한공(漢公)이고, 조부는 공부상서(工部尙書)로 추봉된 계삼(繼蔘)이며, 외조부는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郞) 김태기(金台器)이다. 나이 82세로 금(大金) 황통(皇統) 10년(의종 4, 1150) 4월 17일 계해일에 집에서 돌아가시니, 7월 17일 을유일에 오룡산(五龍山)에 장례지냈다. 아들은 유림랑 감찰어사(儒林郞 監察御史)로 비어대(緋魚帒)를 받은 작문(作雯)이고, 맏사위는 정주사 시전중내급사(靜州使 試殿中內給事) 윤유연(尹裕延)이며, 둘째 사위는 전옥서승(典獄署丞) 유면(柳冕)이다.]
<김봉모 묘지명(1209년, 희종5년)>
[경순왕(敬順王)에 이르러 우리 대조(大祖, 太祖)가 군복자락을 휘날리며 장차 통일하려고 하니, 왕은 형세가 힘껏 싸우지 못할 것임을 알고 곧 나라를 들어 귀부하였다. 태조가 덕스럽게 여겨 상부 정승공(尙父 正承公)으로 봉하고, 지위를 태자(太子)보다 위에 두었으며, 장녀 신란공주(神鸞公主)를 처로 삼게 하였다. 이전에 만일 경순왕이 죽음을 무릅쓰고 힘껏 싸워 임금의 군대에 저항하고 세력이 다하여 굴복하는 지경에 이르렀다면, 반드시 그 종족이 짓밟히고 무고한 백성들은 참살당하여 간과 뇌가 땅바닥에 으깨어졌을 것이다.
왕이 이에 하늘의 뜻과 사람의 일이 속한 곳을 있음을 알고 싸우지 않고 항복을 약속하였으니, 나라에는 큰 공을 세우고 인민들에게는 음덕을 주어서, 그 후손이 이 나라에서 반드시 관작과 복록을 누리게 되었다.
공은 그 후손이니, 공의 증조부 한공(漢公)은 공부시랑(工部侍郞)이고, 조부 경보(景輔)는 북면도감판관(北面都監判官)이었으나 일찍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 세린(世麟)은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을 떨쳤으며, 여러 차례 추증되어 사공 상서좌복야(司空 尙書左僕射)가 되었다.]
<홍경 처 낙랑군대부인 김씨 묘지명(1317년, 충숙왕 4년)>
[신라의 정순왕(경순왕) 김부가 나라의 운수가 이미 다하였음을 알아 국토를 우리 태조대왕에게 바치고 백관을 이끌고 조정에 들어오자 신성(태조)이 크게 기뻐하며 신란숙의공주와 짝을 지어주었다. 자손들이 번성하여 벼슬을 계속 이어가면서 세상에 뛰어난 가문이 되었으니 부인은 정순왕(경순왕)의 12대손이다.
아버지 혼(琿)은 추성익대공신 삼중대광 수첨의정승 계림부원군이며 충선공으로 시호가 추증되었다. 조부 경손(慶孫)은 은청광록대부 지추밀원사 상장군이고, 증조 태서(台瑞)는 금자광록대부 문하시랑평장사 문장공으로 시호가 추증되었다.
어머니 언양군부인 김씨는 수태위문하시랑평장사 판이부사이며 익대공으로 시호가 추증된 김전의 딸이다.]
<수녕옹주 김씨 묘지명(1335년, 충숙왕 복위 4년)>
[경순왕 부(敬順王 傅)에 이르러 우리나라의 시조인 신성왕(神聖王, 太祖)이 태어나 흥할 때를 만나자 천명이 돌아가는 것을 알고 나라를 바쳐 스스로 귀부하였다. 그 집안의 친족들도 많이 고려로 옮겨와 은혜를 입고 벼슬을 하였으며, 대대로 충성스럽고 성실함으로 알려졌는데 세월이 갈수록 더욱 크게 번성하였다.
근래에 유명한 분으로 재상 봉모(鳳毛)가 있으니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이다. 그는 문하평장사 태서(台瑞)를 낳고, 평장(平章)은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 경손(慶孫)을 낳았으며, 지주사는 밀직승지(密直承旨) 신(信)을 낳았다. 승지가 윤씨(尹氏)의 딸을 맞이하니, 아버지 번(璠)은 판대부감사(判大府監事이고 작고한 수령옹주(壽寧翁主)는 막내딸이다.]
<해석자: 김용선, 출전 고려묘지명집성>
위에서 보는 것처럼 고려묘지명은 경순왕의 후손에게는 반드시 경순왕의 후손임을 밝히는 글을 새겨 넣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묘지명은 고인의 이름, 자, 성씨, 본향(본관), 가문, 조상의 계보, 생애, 향년, 돌아가신 날짜, 행적, 공적, 처 및 처가, 자녀 이름과 혼인 여부, 장일, 장지, 찬자 애시(哀詩) 등을 산문형식으로 사실대로 기록하여 정방형으로 납작하게 다듬은 돌에 새긴 석각문(石刻文)이다.
명문장가가 찬하는 것이 기본이고, 고인의 유골을 화장하여 고인이 즐겨 쓰던 유품과 함께 묘지명을 땅에 묻는 고려시대 장례문화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보면 된다.
이런 의미에서 고려묘지명은 영분공이 경순왕의 아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언급 없음’으로 단호히 증명하는 셈이다.
생물학적 년대도 맞지 않고 역사적 년대도 맞지 않고 고려묘지명 어디에도 영분공 후손이 경순왕의 후손이라는 언급이 일체 없다는 사실은 영분공이 경순왕의 아들이 아니라는 논리적인 증거인 것이다.
2018년 8월 31일
경주김씨
경주김씨 영분공파
영분공이 경순왕 아들이 아니라는 논리적 증거5
삼한공신 김예겸과 경순왕은 동시대인이다
내가 영분공이 경순왕의 아들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데는 여섯 가지 논리적인 근거가 있다.
삼한공신 김예겸과 경순왕은 동시대인이므로 삼한공신 김예겸이 경순왕의 7세손이 될 수 없다는 것도 여섯 가지 논리적인 근거 중의 하나이다.
내가 논증으로 이미 밝혔다시피 1. 생물학적 년대가 성립되지 않으며, 2. 역사적 년대가 맞지 않으며, 3. 영분공의 이름은 명종이 아니며, 4. 고려묘지명 어디에도 영분공 후손이 경순왕 후손이라는 기록이 등장하지 않는다.
삼한공신은 936년 삼한통일 후 고려개국과 후삼국(삼한)통일에 공이 있는 자들에게 태조가 준 것이고 고려태조는 940년 신흥사를 중건하여 삼한공신들의 초상화를 그려 붙이게 하였다. 이를 삼한 벽상공신이라 한다.
고려태조는 943년에 죽었다.
그래서 고려사학계에서는 936~940년 사이에 삼한공신 제수가 끝난 것으로 결론지었다.
나는 박천식 교수가 학술논문에 발표한 삼한공신 명단 100명가량을 일일이 한 달 동안 분석해 보았다.
그들에 대한 기록은 90%이상 고려사-고려사절요-고려묘지명에 등장하였다.
아직도 기록을 발견하지 못해서 남겨둔 이름이 몇 명 있지만.
삼한공신 명단 90%이상 기록이 현존한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었다.
삼한공신의 명단은 나의 글에서 여러 차례 올렸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한다.
삼한공신들은 1)개국공신그룹, 2)개국초기공신그룹, 3)지방의 성주로서 귀의한 그룹, 4)신라양위의 그룹, 5)백제멸망에 공을 세운 공신으로 나눌 수 있다.
내가 김자류 묘지명(1146년), 김지우 묘지명(1152년), 고려사절요, 동사강목을 분석해 보니 경주사람인 김예겸은 신라양위그룹(김억렴, 김유렴, 김예겸, 김인윤, 이금서)에 속해 있었다.
경주김씨대종친회카페 유경만리는 고려사절요의 홍군상 공호 기록(1295년)과 권준 묘지명(1352년)을 들고 와서 “김예겸은 태조 때의 삼한공신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는데 이는 근거가 되지 못한다.
김예겸의 손자 김의진이 평장사로 퇴임하여 돌아가신 년도가 1070년이니 생년은 998~1000년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김예겸이 고려조정에서 활동한 년대는 최대한 늦춰 잡아도 손자의 죽음 이전일 것이다.
논리적으로 따져볼 때 김예겸이 김의진의 할아버지이므로 손자가 70세 전후에 돌아가셨던 1070년에 비추어 고려조정에서 활동 가능한 년대와 생존 가능한 년대의 기록이라야 근거가 된다.
김예겸이 고려조정에서 활동 가능한 년대와 생존 가능한 년대는 어디까지 일까?
태조 이후 다른 왕이 제수했다면 혜종(2대)-정종(3대)-광종(4대)-경종(5대)- 성종(6대, 재위 987~997)-목종(7대)-현종(8대)-덕종(9대)-정종(10대)-11대(문종)까지의 기록이라야 유경만리의 주장의 근거가 된다.
먼저 두 가지를 살펴봐야 한다.
첫째 삼한공신을 줄 만한 정치적 상황이 있었는가?
둘째 이들 왕 중에서 삼한공신(삼한벽상공신)을 제수한 왕이 있는가?
혜종은(재위 943~945년) 끊임없는 권력다툼에 시달리다가 제위한지 3년 만에 죽었고 신명순성왕후의 아들이던 정종(재위 945~949년)은 삼촌 왕식렴의 도움으로 왕규와 박술희를 제거하고 비교적 탄탄한 세력의 기반 위에 있었으나 서경천도에 여념이 없었다.
정종은 개성의 호족들과 백성들의 반발에 부딪혀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는데 정종의 뒤를 이은 동생 광종(재위 949~975년)은 왕권강화를 위해 경주김씨를 제외한 상당수의 삼한공신들을 죽이고 억압했으며 과거제도를 실시하여 삼한공신들의 후손이 아니더라도 학문이 있으면 과감하게 등용하는 개혁정책을 폈다.
정승 김부의 딸(헌숙왕후)을 왕비로 맞은 경종은 즉위하는 즉시 김부의 벼슬을 상부 도성령(尙父都省令) 식읍1만호로 올린다.
경종은 978년 4월 장인 김부가 승하하셨을 때 시호를 경순(敬順)이라고 내렸다. 경순왕이라는 호칭은 이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고려사를 살펴볼 때 혜종(제2대)에서부터 경종(제5대)에 이르기까지 공신호를 하사한 왕은 없었다.
공신호를 하사한 왕은 제 6대 성종(6대, 재위 987~997)이었는데 982년 최지몽에게 내린 것은 홍문숭화치리공신(弘文崇化致理功臣)이었다. 삼한공신(삼한벽상공신)이 아니었다.
993년 거란의 손소녕과 담판을 벌여서 강동 6주(장흥진, 통조, 귀화진, 곽주, 귀주, 홍화진)을 되찾아 영토를 넓힌 장위공 서희는 동사강목의 기록에 따르면 그의 공호는 추성순화수절보의공신이었다.
삼한공신(삼한벽상공신)이 아니었다.
현종 10년(1019년) 거란의 3차 침략 때 귀주대첩의 승리를 이끈 강감찬은 추충협모안국공신(推忠協謀安國功臣)호를 받았다. 역시 삼한공신(삼한벽상공신)이 아니다.
거란이 쳐들어와서 남쪽으로 도망가면서 온갖 고생을 다한 현종은 전란이 어느 정도 수습되자 거란군사 만 명 이상 죽이고 고슴도치처럼 화살이 박혀 죽은 양규(楊規)와 김숙흥(金叔興)에게 현종 10년(1019년) 공신녹권을 내려주었고, 현종15년(1024년) 삼한후벽상공신(三韓後壁上功臣)을 제수한다.
현종은 양규와 김숙흥에게 삼한후벽상공신을 제수할 때 왜 후(後)를 넣었을까?
삼한공신(삼한벽상공신)과 구분하기 위해 후(後)를 넣어서 삼한후벽상공신(三韓後壁上功臣)을 제수한 것이다.
고려사에서 태조 이후 나라의 안위와 관련한 공신들에게 내려진 삼한후벽상공신(三韓後壁上功臣)은 현종 15년 (양규, 김숙흥, 1024년)-선종 원년 (박성걸, 1084)-인종 6년 (최사전, 1128년)-명종23년(두경승, 1193년)때까지 계속 이어져 내려온다.
태조(삼한공신:삼벽상공신)-현종(삼한후벽상공신)-선종(삼한후벽상공신-인종(삼한후벽상공신)-명종(삼한후벽상공신)-고종(벽상삼한)
특히 최사전 묘지명(1140년)은 최사전(1077~1139년)이 삼한후벽상공신을 제수받은 이유에 대해 자세히 기록했고 고려사절요의 기록과 최사전 묘지명의 기록이 일치한다.
인종이 해가 미칠까 두려워 이자겸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하자 최사전은 간곡히 만류하면서 꾀를 내어 이자겸의 심복 척준경과 이자겸 사이에 틈이 벌어지게 하고 마침내 척준경이 이자겸을 제거하게 만든 인물이다.
["삼한(三韓)은 삼한의 삼한이지 폐하의 삼한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선황 태조께서 부지런히 힘써서 국가를 이루셨으니 청컨대 소홀하게 하지 마옵소서" 임금(인종)이 오랫동안 울면서 말하기를 "그대가 만약 회복시킬 수 있다면 생사를 같이 한 피붙이와 같을 것이오" 하였다.
공이 머리를 조아리고 두 번 절한 뒤 저 무리의 우두머리를 회유할 비책을 아뢰었다.
흉악한 무리들이 소탕되자 임금은 "삼한을 다시 바르게 하고 사직과 종묘를 받들어 편안하게 한 것은 모두 공의 힘이오"라고 하고 특별히 조서를 내려 삼한후벽상공신(三韓後壁上功臣)으로 삼고 자손에게 벼슬을 주어 관리가 되게 하였다.] -최사전 묘지명(1140년) 중에서-
그러면 고려사전체의 맥락이 밝히고 있는 삼한공신과 유경만리의 주장을 한번 비교해 보자.
삼한공신(태조)-삼한후벽상공신(현종, 선종, 인종, 명종)-벽상삼한(고종)-삼한벽상공신(충렬왕)-벽상삼한(충숙왕)-벽상삼한(공민왕)-벽상삼한(우왕)
-고려사전체맥락-
삼한공신(태조)-------------무신정권--------------충렬왕
-유경만리의 주장-
유경만리는 고려사절요에 기록된 삼한후벽상공신을 제수받은 사실(현종 15년(1024년) 양규, 김숙흥, 선종 원년(1084년) 박성걸, 인종 6년(1128년) 최사전, 명종 23년(1193년) 두경승)을 모르고 있다.
그러니 삼한공신은 무신난 이후에도 제수했다는 황당한 주장을 하는 것이리라.
태조 때는 삼한공신을 현종 때부터는 삼한후벽상공신을 제수하였으므로 충렬왕 때 나타나는 홍군상의 삼한벽공신 공호와 연속성이 없고 공신호의 성격이 태조 때의 삼한공신과 판이하게 다르다.
그러므로 홍군상과 권준의 삼한벽상공신에 대한 기록과 김예겸의 삼한공신(삼한벽상공신)은 아무런 관련성이 없다.
아래의 공신호를 보면 고려시대 무신정권부터 말기까지 공호의 제수에 있어서 어떤 흐름이 있었던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최충헌 벽상삼한 삼중대광(壁上三韓 三重大匡) 익성정국 동심좌명 치리우모 일덕안사 제세희재 찬화협보 익량상즙 주번한주당경 광찬우익 복벽재조 격천관일 늑정기상 문경호위 향리조안 선기촉물 전주결승 한광한림 악강천수 평형보아 정전획일 금려갱매 연사득체 선▨명▨ 질진타초 대외소회 반국정세 제뇌인사 보상광구 총관▨사 종덕화민 계옥재성 제천보곤 섭리미륜 촉유정원 공신(翊聖靖國 同心佐命 致理訏謨 逸德安社 濟世熙載 贊化夾輔 翼亮商楫 周藩漢柱唐鏡 光贊羽翼 復辟再造 格天貫日 勒鼎紀常 文經虎緯 嚮理措安 先機燭物 轉籌決勝 寒纊旱霖 嶽降天授 平衡保阿 定典畫一 金礪羹梅 練事得體 先▨明▨ 叱秦吒楚 大畏小懷 磐國鼎世 帝ꜹ人師 輔相匡救 摠管▨事 種德和民 啓沃裁成 濟川補袞 燮理ꜹ綸 燭幽定遠 功臣)이고, 특진 금자광록대부 수태사 개부의동삼사 중서령 상주국 상장군 판어사대사 식읍 10,000호 식실봉 3,000호(特進 金紫光祿大夫 守太師 開府儀同三司 中書令 上柱國 上將軍 判御史臺事 食邑 一萬戶 食實封 三千戶)로 진강공(晉康公)이며, 추증된 시호가 경성(景成), <1219년 최충헌 묘지명>
출처: 한국금석문종합영상정보시스템.
(조부 충헌(忠獻)은 벽상삼한 삼중대광 익성정국 동심좌명 치리조안 희제찬화 협보익량 안사제세 공신(壁上三韓 三重大匡 翊聖靖國 同心佐命 致理措安 熙載贊化 夾輔翊亮 安社濟世 功臣) 특진 금자광록대부 수대사 개부의동삼사 중서령 상주국 상장군 판이·병부 어사대사 대자대사 진강공 식읍 3,000호 식실봉 1,000호(特進 金紫光祿大夫 守大師 開府儀同三司 中書令 上柱國 上將軍 判吏兵部 御史臺事 大子大師 晉康公 食邑 三千戶 食實封 一千戶)이며 시호는 경성공(景成公)으로 추증, <최항 묘지명 1257년>
고려사절요 제13권 / 명종 광효대왕 2(明宗光孝大王二)
정사 27년(1197), 송경원 3년ㆍ금 승안 2년
최충헌을 정국공신 삼한대광 대중대부 상장군 주국(靖國功臣三韓大匡大中大夫上將軍柱國)으로 삼고, 충수를 수성제란공신 삼한정광 중대부 응양군대장군 위위경 지도성사 주국(輸誠濟亂功臣三韓正匡中大夫鷹揚軍大將軍衛尉卿知都省事柱國)으로 삼고, 충헌의 아버지 원호(元浩)에게 증직하여 영렬우성공신 삼중대광 문하시중(英烈佑聖功臣三重大匡門下侍中)으로 삼았다.
홍군상, 삼한벽상공신 삼중대광 익성후 책봉(충렬왕 21년 1295년)
정가신, 벽상삼한 삼중대광 문하시중 수문전대학사감수국사
판이사부 한림원사(대령군부인 최씨 묘지명, 1316년, 충숙왕3년)
김방경, 선충협모정난정국공신 벽상삼한삼중대광 충렬공
(김순묘지명, 민지, 1321년)
윤석, 벽상삼한십자공신 충혜왕1년 1331년
이공수, 추충수의동덕찬화공신 벽상삼한삼중대광 익산부원군
문춘공(이공수묘지명,1336년)
민지, 추성수정보리공신 벽상삼한삼중대광 판도첨의사사 우문관대제학
감춘추관사 상호군 여흥부원군(민지 처 신씨묘지명 1339년, 충숙왕복위8년)
김영돈, 추충병의익찬공신 벽상삼한삼중대광 상락부원군
(김영돈 묘지명, 1348년 충목왕4년),
권준, 삼한벽상공신 삼중대광 길창부원군(1352년 공민왕1년)
이군해, 추성수의동덕찬화익조공신 벽상삼한삼중대광 철성부원군
(이암묘지명 1364, 공민왕13년)
신돈, 이순논도섭리보세공신 벽상삼한삼중대광 영도첨의사사 판감찰사사
취성부원 제조승록사겸 판서운관사 (공민왕3년 1365년)
김륜, 수성수의협찬보리공신 벽상삼한삼중대광 언양부원군
(언양군부인 김씨묘지명)
이제현, 추성양절동덕협의 찬화공신 벽상삼한삼중대광 계림부원군
(이색, 동문선 126권, 계림부원군 시문충 이공 묘지명)
한악, 선력좌리 벽상삼한삼중대광 상당부원군(한수 묘지명, 이색, 1392년),
염재신, 충성수의동덕논도보리공신 벽상삼한삼중대광 곡성부원군
(이색, 동문선 127권)
홍자번, 진충동덕좌리공신 벽상삼한 삼중대광 도첨의중찬 상호군 경흥후 충정공(홍경 처 김씨 묘지명, 1317년)
벽상삼한 삼중대광(壁上三韓 三重大匡)을 쓴 이들은 이 외에도 더 있지만 생략하기로 한다.
벽상삼한 삼중대광(壁上三韓 三重大匡)을 처음 쓴 자는 최씨무신 정권의 시초인 최충헌(1149~1219)으로 보인다.
최충헌의 공호를 보면 다 읊기도 힘들 정도로 길다. 공호만 보더라도 최충헌의 권력이 얼마나 막강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벽상삼한 삼중대광(壁上三韓 三重大匡) 익성정국 동심좌명 치리우모 일덕안사 제세희재 찬화협보 익량상즙 주번한주당경 광찬우익 복벽재조 격천관일 늑정기상 문경호위 향리조안 선기촉물 전주결승 한광한림 악강천수 평형보아 정전획일 금려갱매 연사득체 선▨명▨ 질진타초 대외소회 반국정세 제뇌인사 보상광구 총관▨사 종덕화민 계옥재성 제천보곤 섭리미륜 촉유정원 공신]
모든 권력을 틀어쥐고 자기 마음대로 왕을 폐하고 세우고 정치, 군사, 인사, 행정 모든 면에서 뜻대로 하던 최충헌도 삼한공신이나 삼한후벽상공신의 공호를 쓰지 않았다.
그는 그 대신 벽상삼한 삼중대광(壁上三韓 三重大匡)으로 살짝 고쳤다. 이때부터 고려사 후기에는 전통적으로 벽상삼한 삼중대광 ~~공신이 따라붙게 된다.
홍군상의 삼한벽상공신 삼중대광의 공호에 기록이나 공호의 착오가 아닌가라고 보는 이유는 최씨무신정권의 시초인 최충헌도 고종 때 삼한벽상공신을 쓰지 않고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 三重大匡)을 썼고,
고종 이후 많은 공신들이 벽상삼한 삼중대광(壁上三韓 三重大匡)을 쓰던 시대적 흐름이 있었기 때문이다.
유경만리는 “고려사에 김예겸은 아예 나오지 않는다. 삼한벽상공신은 전체적으로 3200명이나 되는데 삼한벽상공신이란 용어는 태조 때가 아니라 고종 45년 1258년에 처음 등장한다. 그리고 삼한벽상공신이 어느 시대에 책록된 지도 분명히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940년경인 태조 때만을 삼한벽상공신이라고 단정하는 근거가 무엇인가?”라고 하였다.
고려사에 김예겸이 등장하지 않는다고 실존하지 않은 것은 아니며, 고려사보다 기록 년대가 훨씬 앞서는 것이 고려묘지명이다.
경순왕 네째 대안군 김은열과 김인위의 할버지 김인윤은 고려사에 등장하지 않지만 고려묘지명에 등장한다.
김예겸도 마찬가지로 고려사에 등장하지 않지만 고려묘지명에 등장하고 삼한공신 명단에 등장하고 경주김씨족보에 등장한다.
경주김씨계보를 밝히는데 있어서 말할 수 없을 만큼 큰 공헌을 한 것이 고려묘지명이다.
1785년(정조9년) 대안군 묘지명과 김경보 묘지명이 발견되었을 때 경주김씨문중은 이 묘지명을 따라 경순왕의 서차를 정하였고, 족보를 만들 때 이 계보를 따랐다.
고려묘지명은 학계에서 고려사 연구 방법에 있어서 귀중하고 매우 사료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 받고 있다.
고인이 돌아가신 직후에 당대 명문장가가 만드는 것이 바로 고려 묘지명이다.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쓸 때 고승비문을 많이 참고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유명한 이야기다.
현종 때 거란의 침략으로 사초가 불에 탔고 사라졌기 때문에 고려사 전기의 기록은 대체로 부실한 편이다.
그래서 김예겸, 김인윤, 김신웅, 김은열 등이 고려사에 나타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간혹 어떤 이는 삼한공신의 숫자가 전체적으로 3,200명라고 하는데, 삼한공신이 몇 명인지에 대해서는 학자들의 의견이 분분하다.
3,200명이라는 것은 고려사절요 제4권 / 문종 인효대왕 1(文宗仁孝大王一) 갑오 8년(1054년)
[유사가 태조의 공신 대광(大匡) 천명(千明) 등 3천 2백 명에게 차제직(次第職)을 추증하도록 청하니, 따랐다]에 근거한다.
여기서 대광(大匡)은 고려초 최고의 관직으로 삼한공신에게 주던 관직이다.
김자류 묘지명(1146년)에 따르면 김예겸의 관직은 삼한공신 대광 시중이다.
유경만리는 “삼한벽상공신이라는 용어는 고종45년 1258년에 처음 등장한다”고 주장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삼한공신=삼한벽상공신, 삼한벽상공신=삼한공신으로 바꿔 쓴다는 것이 정설이다.
삼한공신이라는 용어는 고려사에서 성종 원년(982년) 상주국(上柱國) 최승로(崔承老)가 올린 시무 28조에 가장 먼저 등장한다.
<동사강목 임오년 성종 문의왕(成宗文懿王) 원년(982년)>
[“우리 삼한 공신(三韓功臣) 자손은 매양 특사(特赦)의 왕명이 있을 적마다 반드시 포상하여 녹용(錄用)한다고 하면서도 관작을 받지 못하여 천인 속에 섞여 있습니다. 신진(新進)의 무리가 방자하게 업신여기는 일이 많아서 이로 하여 원망과 한탄이 일어납니다. 또 광종은, 말년에 근신(近臣)을 죽이고 쫓아내어 세가(世家)의 자손들이 가계(家系)를 잇지 못하였습니다.
청하옵건대, 여러 차례의 은사(恩赦)에 좇아 그 공신의 등급에 따라 그 자손을 녹용하고 알맞게 헤아려 품계와 관직을 준다면 원통함과 억울함이 풀어질 것입니다.]
유경만리는 삼한공신이라는 용어가 성종 때 그 유명한 최승로의 시무 28조의 기록에 나온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삼한공신이라는 용어는 고려사절요 문종 10년(1056년)과 문종25년 (1071년)에 두 번에 걸쳐 등장한다.
고려사절요 제4권 / 문종 인효대왕 1(文宗仁孝大王一) 병신 10년(1056)
○ 2월에 유사가 아뢰기를, “오랑캐에게 붙잡혔던 사람인 염가칭(廉可偁)은 삼한공신(三韓功臣) 형명(邢明)의 손자로서 경술년에 거란 군사가 경성에 밀어닥치자 가칭이 부모를 모시고 피난하다가 적을 만나 포로가 되었다가 청녕 원년(1055) 정월에 그 자식을 데리고 도망해 왔으니, 그 아비와 할아비의 영업전사(永業田舍)를 모두 돌려주어야 마땅합니다." 하니, 따랐다.
고려사절요 제5권 / 문종 인효대왕 2(文宗仁孝大王二) 신해 25년(1071)
○ 안공(鞍工) 송유(宋由)는 삼한공신 태부 소격달(蘇格達)의 현손(玄孫)이므로 특별히 그 신역(身役)을 면하고, 벼슬하도록 허락하였다.
문종10년(1056년) 염가칭은 삼한공신 염혁명의 손자라는 것이 입증되어 할아버지-아버지의 소유 영업전사(永業田舍)를 돌려받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문종25년(1071년) 소송유는 삼한공신 소격달의 현손이므로 신체적 노역을 면하게 되었고 벼슬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문종 때 이런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이미 태조 때부터 전해 내려온 삼한공신록이 있었고, 그리고 자손이 누구인가에 대해서도 고려조정에서 판단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문종 대의 염가칭은 삼한공신 혁명의 손자, 소송유는 삼한공신 소격달의 현손이라는 기록에서 삼한공신과 그 후손 사이의 생물학적 년대를 짐작할 수 있다.
삼한공신 염혁명-손자 염가칭→할아버지-손자관계
삼한공신 소격달-현손 소송유→증조할아버지-현손관계
삼한공신 김예겸-손자 김의진(~1070년, 문종21년)은 할아버지와 손자관계다. (김예겸-김주정-김의진)
따라서 고려사절요의 이 기록만 보더라도 삼한공신 김예겸과 손자 김의진의 가족관계가 성립된다는 사실이다.
문종 때 삼한공신 염혁명과 그 손자 염가칭의 가족관계가 입증되어 영업전사(永業田舍) -땅과 집을 되찾은 기록, 그리고 소송유가 삼한공신 소격달의 현손이므로 신체적 노역을 시키지 못하게 하고 벼슬도 할 수 있도록 하였다는 기록은 삼한공신은 태조 때 제수가 된 것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정인지가 쓴 치평요람 제98권에 이런 기록이 나온다.
[명종(明宗) 천성(天成) 4년] 권행은 본래 신라 종성(宗姓)인 김행(金幸)이었다. 김선평 및 장길과 함께 고창군을 지켰는데, 이때에 고려왕이 왔다는 말을 듣고 두 사람이 이르기를, “견훤은 무도(無道)하여 우리의 군부(君父)를 살해하였으니 이는 불공대천의 원수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힘이 부족하여 그 원수를 갚을 수 없었다. 또 이 고창군은 반드시 서로 엿보아 다투는 곳에 위치하고 있으니, 형세로 볼 때 우리는 온전할 수 없다. 그러니 어찌 왕공(王公)에게 귀의하여 저 역도(逆徒) 견훤을 섬멸하여 위로는 임금의 원수를 갚고 아래로는 백성의 목숨을 구제하지 않겠는가?”라고 하고, 마침내 함께 와서 항복하였다. 고려왕이 기뻐하여 이르기를, “김행은 천명이 돌아가는 곳을 잘 알아서 온 고을을 들어 항복하였으니, 권도(權道)를 잘 취했다고 이를 수 있겠다.”라고 하고, 권을 사성(賜姓)하고 또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의 칭호를 하사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42권 / 황해도(黃海道)
문화현(文化縣)
【인물】 【고려】 유차달(柳車達) 태조가 남정(南征)할 때에 유차달이 거마(車馬)를 많이 내어 군량길을 통하였다 하여, 그 공으로 대승(大丞) 벼슬을 봉하고, 삼한 공신(三韓功臣)의 호를 주었다.
삼한공신, 삼한벽상공신이라는 용어는 고려묘지명과 비명에 많이 나타난다.
<삼한벽상공신>
오원경 묘지명(1181년, 명종 11년)
<삼한공신>
조모처 황보씨 묘지명(1161년, 의종 15년)
최정묘지명(1163년, 의종17년)
최홍재 묘지명(1135년, 인종13년)
최당묘지명(1211년, 희종7년)
김지우 묘지명(1152년, 의종6년)
김자류묘지명(1146년, 인종24년)
이인실 묘지명(1153년, 의종7년)
허재 묘지명(1144년, 인종 22년)
박인석 묘지명(1212년, 강종1년)
양원준 묘지명(1158년, 의종 12년)
박경산 묘지명(1158년, 의종 12년)
이보여 처 이씨묘지명(1158년, 의종 12년)
유경만리는 한 시대 이상 차이가 나므로 태조와 김예겸은 동시대인이 될 수가 없다고 주장한다.
김의진은 문종 대에 조정에서 병부상서-평장사를 역임하고 퇴임이후 1070년에 돌아가셨다.
위에서 살펴봤던 대로 삼한공신 염혁명-손자 염가칭→할아버지와 손자관계가 성립되었는데, 삼한공신 김예겸-손자 김의진(1070년, 문종21년)의 할아버지와 손자관계가 왜 성립되지 않는단 말인가?
삼한공신 김예겸-태자소보-김주정-평장사 김의진의 관계도 성립될 뿐만 아니라, 삼한공신 소격달-현손 소송유→증조할아버지와 현손관계가 성립되었듯이 삼한공신 김예겸-삼한공신 김인윤-김신웅-김인위-김원정(문하시중, 1063년 문종 17년)의 관계가 성립된다.
김예겸이 김인윤을 비교적 일찍 낳고, 김예겸이 김주정을 나이가 늙어서 얻은 젊은 아내를 통해 낳았다고 보면 얼마든지 성립되는 가족관계인 것이다.
유경만리는 당시 사람들의 수명이 짧았을 것이라고 단정하는데 그렇지 않다.
동사강목 현종4년(1013년)의 기록에 보면 송능, 유손은 태조를 섬기던 사람이고 나이가 백세에 이르렀다.
동사강목 제6하 계축년 현종 4년(1013)년
9월 대장군 송능(宋能)ㆍ유손(庾孫) 등에게 벼슬을 올려 주었다.
이 두 사람은 태조를 섬길 때 종군(從軍)하여 공로가 있었고 나이 이미 1백 세(歲)에 이르렀는데, 각각 대광(大匡)의 관계를 주게 하였다.
10월 공신당(功臣堂)을 수선하였다.
이는 당시 사람들이 수명이 짧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최충 84세(984~1068년)
김경보 82세(1068~1150년)
김경용 84세(1041~1125년)
강감찬 83세(948~1031년)
최사추 79세(1036~1115년)
김부식 76세(1075~1151년)
경순왕 (~978년)
대안군 김은열(~1028년)
김의진 72세 추정(998~1070년)
김자류 80세 (1065~1145년)
고려 묘지명을 보면 이 외에도 오래 살았던 사람들 많다.
고려사에 김의진이 돌아가신 년도와 기록이 있으니 유경만리도 김예겸의 손자가가 70세가 넘은 것을 인정하고 있다.
한 세대를 20년으로 가정하든지, 30년으로 가정하든지 그건 어디까지나 가정이고, 김예겸-김주정-김의진으로 이어진 것은 확실하다.
그렇다면 사람이 자녀를 낳을 때 천편일률적으로 20~30세에 낳는 건가?
이른 나이에 자녀를 낳을 수도 있고 나이가 늙어서도 자녀를 낳을 수 있다.
남자는 여자와 달리 늙어서도 얼마든지 자녀를 낳을 수 있다.
고려시대엔 여러 명의 부인을 두는 시대였으므로 여러 가능성이 존재하는 것이다.
삼한공신 김예겸-태자소보 김주정-평장사 김의진의 생물학적 년대는 얼마든지 성립한다.
유경만리는 앞 7대 문제는 관여할 바가 아니라고 하면서 김의진의 사망 년(1070년)도로 봐서 김예겸이 태조 때의 공신일 수가 없다고 주장한다.
위에서 문종 10년(1056년)기록에서 보았던 대로, 삼한공신 염혁명-손자 염가칭, 할아버지와 손자관계가 성립됨이 입증됐고, 그렇다면 마찬가지로 삼한공신 김예겸-손자 김의진(1070년, 문종21년)은 할아버지와 손자관계가 성립된다. 그런데 왜 김예겸이 태조 때의 공신이 아니란 말인가?
유경만리는 자신의 주장이 옳다면 적어도 첫째 김예겸이 어떤 관계로 내사령이 되었는가와 둘째 경순왕 후손이기 때문에 내사령이 되었다고 한다면 과연 김예겸의 손자가 1070년에 돌아가셨는데 경순왕 7세손이 성립이 되는지에 대한 질문에 답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유경만리는 이에 대한 답을 아직까지 내놓지 못하고 있다.
앞의 7대 문제는 관여할 바가 아니라고 하면서 어물쩍 넘어가려고 한다.
나의 질문에 답을 하지 못한다면 자신의 주장은 논리에 맞지도 않고 사실이 아니란 이야기다.
유경만리가 삼한공신에 대한 기초지식이 없으니 이런 주장을 하는 것으로 솔직히 논박할 가치도 없다.
삼한공신 제수는 936년 삼한통일부터 940년 신흥사 중건 후 공신들의 초상화를 그려 붙인 때까지로 보는 것이 고려사학계의 학문적 결론이다.
나의 삼한공신 분석에 의하면, 경주사람이었던 김예겸은 태조 때 신라양위의 공을 인정받아 삼한공신이 된 것이다.
삼한공신 김예겸과 경순왕은 동시대인이므로 김예겸은 경순왕의 7세손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영분공은 경순왕의 아들이 아니다.
2018년 9월 23일
경주김씨
경주김씨 영분공파
영분공이 경순왕 아들이 아니라는 논리적 증거6
김양경시집서의 계보는 김가구의 가승 계보를 가지고
허백당 성현이 옮겨 쓴 것이다
경주김씨대종친회카페 카페지기와 운석은 김양경시집 서문의 계보를 김양경이 쓴 것이라고 오래전부터 주장해 왔었다.
이 두 사람은 김양경 시집 서문에 수록된 경주김씨 영분공파 계보는 정숙공 김인경(김양경, 1168~1235년)이 쓴 것이고 따라서 이를 보건대 영분공은 경순왕의 아들이라는 증거라는 것이다.
사실인즉 몇 년 전 경주김씨대종친회 카페지기는 나에게 전화를 걸어 “김인경 할배가 직접 쓴 계보가 있다”고 하였다.
내쳐 캐물으니 “김양경시집서〔金良鏡詩集序]에 김인경 할배가 직접 쓴 계보가 있다”는 것이었다.
김인경 할배가 직접 쓴 계보가 있다는 대종친회 카페지기의 말에 순간 깜짝 놀라서 “그런 것이 있었느냐?”고 물으면서 “만일 김인경 할배가 직접 쓴 것이라면 고증 가치가 매우 높다”고 하면서 내 메일로 보내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리고 나중에 내가 한국고전종합DB을 뒤져서 허백당 성현의 문집에 수록된 김양경시집서〔金良鏡詩集序]을 찾아 읽어보면서 그 계보는 정숙공 김양경이 직접 쓴 것이 아니라 허백당 성현이 쓴 것이고, 정확하게는 김가구가 전해준 가승 계보를 가지고 허백당 성현이 그대로 옮겨 적은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딱하게도 카페지기는 김양경이 직접 쓴 것이라고 잘못 읽고 잘못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 운석이란 닉을 쓰는 자도 김양경시집서〔金良鏡詩集序]의 영분공파 계보는 김양경이 쓴 것이라는 이 주장에 편승해 있다.
경주김씨대종친회카페 자유게시판 대문에는 아직도 [金良鏡詩集序(김양경시집서)를 부정하는 이들은 여기를 떠나라]글이 걸려 있다.
내 글을 읽어본 독자들은 알고 있겠지만 나는 이미 운석의 글을 조목조목 반박하여 김양경 시집서 서문의 계보를 누가 썼는지를 밝혀서 운석의 그릇된 주장을 논박하였다.
김양경시집서〔金良鏡詩集序]는 말 그대로 김양경(金良鏡) 시집(詩集)의 서문이다.
고려 고종 때 왕경유수병마사, 정당문학 이부상서 감수국사, 중서시랑평장사를 역임하였고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한 당대 유명한 문인이었던 김양경(1168~1235년)의 친필 시를 묶은 시집을 말한다.
이 시집의 서문은 조선 초기 학자인 허백당 성현(1439년~1504년)이 고려 고종 때 인물인 김양경(1168~1235년)의 시집에 붙인 서문인데 김양경의 후손 김미(金楣, 김가구)의 요청에 의해 허백당 성현이 사헌부 대사간으로 있던 1479년(성종10년)에 쓴 글이다.
김양경 시집서에 수록된 계보는 허백당 성현이 쓴 것이 틀림없는데 그렇다면 성현은 남의 집 계보를 어떻게 알고 썼을까?
허백당 성현은 도대체 이 계보를 누구로부터 받은 것일까?
김가구(김미)가 준 가승 계보를 가지고 허백당이 썼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상소문의 초안을 작성하는 여가에 정원(庭園)의 정자에 앉아 있었더니, 소매에서 책 1권을 꺼내 보여 주었는데, 바로 공의 유고(遺稿)였다. 손수 쓴 글씨가 완연하고 시어가 청신하여 진실로 명불허전이었다. 가구 씨가 “여기에 실려 있는 시가 거의 수십 수이고 《문감(文鑑)》에 실려 있는 것도 4, 5수 되니 모두 모아 문집으로 만들어 목판에 새기려고 합니다.” 라고 하면서 나의 글을 구하여 책머리에 얹기를 청하였다.]
여기서 유고(遺稿)라는 단어를 가지고 경주김씨대종친회 카페지기는 수년전부터 김양경이 직접 썼다고 주장했고 이에 더불어 운석도 김양경이 직접 쓴 것으로 댓글을 달아 왔었다.
운석이 의기양양하게 올린 글[金良鏡詩集序(김양경시집서)를 부정하는 이들은 여기를 떠나라]의 재목과 내용을 볼 때 허백당 성현이 김가구로부터 받아 그 계보를 쓴 것이 아니라 김양경이 가지고 있던 유고(遺稿)의 계보를 배겨 썼다고 이해하고 있는 모양이다.
경주김씨대종친회카페의 운석은 허백당 성현이 쓴 김양경시집서〔金良鏡詩集序]에서 바로 공의 유고였다는 부분을 똑똑히 보도록 빨간색에 가까운 짙은 분홍색으로 색칠을 했다.
운석이 왜 이 부분 공의 유고를 강조했을까?
공이란 정숙공 김양경을 가리키고 있으니 곧 김양경의 유고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더 정확히 표현하면, 김양경 시집서의 영분공파 계보는 김양경의 유고에서 나온 것이란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내가 지적하는 것은 김양경 시집 서문의 문맥 어디에도 이 계보는 김양경이 썼다는 내용이 없다.
유고(遺稿)라는 것은 고인이 남긴 원고나 글을 뜻한다.
김양경이 남긴 유고(遺稿)는 그가 손수 쓴 시(詩)였다.
허백당의 서문을 읽어보면 문맥에서 말하는 유고(遺稿)의 범위는 3가지다.
1) 김가구가 소매에서 책 1권을 꺼내 허백당 성현에게 보여준 것.
2) 김양경이 손수 쓴 글씨가 완연하고 시어(詩語) 청신하여 진실로
명불허전이었던 것
3) 김가구가 허백당에게 말하기를 “여기 실려 있는 시가 거의 수십 수이고 《문감(文鑑)》에 실려 있는 것도 4, 5수 되니 모두 모아
문집으로 만들어 목판에 새기려고 합니다.” 라고 한 것.
이를테면, 김가구가 전해준 책 한권은 바로 김양경이 손수 쓴 글씨의 시(詩)의 유고였고 이 유고 시집에는 명불허전의 정숙공의 청신한 시(詩)만 있었지 김양경의 계보가 실려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런데 이것을 가지고 경주김씨대종친회 카페지기와 운석은 잘못 읽고 잘못 해석해 왔던 것이다.
어떤 글이든 문맥에서 문장을 파악하고 단어의 의미를 유추해내는 문해력(文解力)을 갖추고 있지 않으면 잘못 읽고 잘못 해석하게 된다.
인문학적 소양은 이래서 중요하다.
최근 경주김씨 대종친회카페 자유게시판에서 영분공은 경순왕 아들이 아니라는 주제로 난상토론이 벌어졌을 때 카페지기와 운석은 김양경 시집서의 계보를 또 꺼냈다.
김양경이 직접 쓴 영분공파 계보가 있는데 무슨 쓰잘떼기 없는 소리냐는 식이었다.
그때 나는 김양경시집서의 계보는 김양경이 쓴 것이 아니라 허백당 성현이 김가구(김미)로부터 전해 받아 쓴 것이라고 반박했다.
사람은 때때로 어떤 글이나 문장을 잘못 읽고 잘못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런데 경주김씨대종친회카페 운영자 운석은 나의 반박 이후에도 자신이 잘못 읽고 잘못 이해하고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바로 이것이 문제다.
인문학적 소양이 부족한 자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경주김씨대종친회카페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카페지기와 운석은 자신이 무엇을 연구해서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거의 대부분 남이 써 놓은 것을 복사해서 붙여놓기만 하고 있다.
솔직해 말해서 그런 것은 요즘 초등학생들도 할 수 있는 일이다.
이들이 김양경 시집서 서문의 유고의 의미를 엉뚱하게 해석하는 것을 보면,
남이 연구해서 써놓은 글을 경주김씨대종친회카페에 옮겨놓으면서 과연 그 내용을 이해하고 제대로 해석할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종종 든다.
운석의 글의 제목이나 문장의 문맥을 보자면 즉 김양경의 유고(遺稿)이기 때문에 김양경이 계보를 직접 썼다는 주장을 하려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은 지금까지 경주김씨대종친회 카페지기와 운영자 운석이 계속 주장해왔던 바다.
요컨대 카페지기와 운석은 김양경시집서(김양경시집의 서문)를 잘못 읽고 잘못 해석했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다.
그리고 그 시집의 서문은 바로 허백당 성현이 쓴 것인데, 운석도 이제야 “허백당은 (계보를) 배겨 썼을 것이다”라고 썼다. 그렇다면 허백당 성현은 무엇을 보고 배겨 썼단 말인가?
내가 보기엔 운석이 지금까지 주장해 왔던 대로 표현하면, 김양경이 직접 쓴 계보를 허백당 성현이 배겨 쓴 것이란 해석이다. 대종친회카페 자유게시판에다 공지 글로 띄워 올린 글 재목과 글 내용도 꼼꼼히 뜯어보면 물론 맥락을 같이한다.
운석은 자신이 쓴 글 <김양경시집서를 부정하는 자는 여기를 떠나라>에서 경주김씨, 제갈량과 사마의, 서울경기님을 특정하여 지목하였다.
아니, 누가 김양경시집서를 부정한단 말인가? 김양경시집서를 부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나는 다만 김양경시집서의 계보를 김양경이 직접 썼다고 주장해 왔던 카페지기와 운석의 주장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논리적으로 반박했을 뿐이다.
운석이 말하는 소위 [김양경시접서를 부정하는 자는 여기를 떠나라]는 [김양경이 쓴 계보를 부정하는 자는 떠나라]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운석이란 자는 글 읽기와 문맥파악능력이 부족하고 논리전개 능력이 떨어지니 이런 황당하고 가당찮은 표현을 쓴 것이다.
아래는 2015년 김양경시접서를 번역한 김종태 고전번역원이 번역한 계보와 이에 대한 각주이다.
<이에 마침내 그 세계(世系)에 따라 차례대로 기록해 본다.
공은 본관이 경주(慶州)로 신라 왕족 김씨의 후예이다. 경순왕(敬順王) 이후로 영분공(永芬公), 임흥공(林興公), 파간(波干) 억종(嶷宗), 파간 계옹(季邕), 아개공(阿蓋公), 내사령(內史令) 예겸(禮謙), 소부(少傅) 주정(周鼎), 평장사(平章事) 의진(義珍), 급사(給事) 후덕(候德), 판관(判官) 수지(壽之), 지후(祗侯) 영고(永固)가 대를 이었는데, 영고가 공을 낳았다. 공은 초명이 양경(良鏡)인데 뒤에 인경(仁鏡)으로 고쳤다>.
-김양경시집서〔金良鏡詩集序] 중에서-
[주-D013] 파간(波干) …… 계옹(季邕) : 대본에는 ‘波干嶷宗干季邕’으로 되어 있는데, 《경주김씨수은공파세보(慶州金氏樹隱公派世譜)》(1991년 回想社 간행)에 실린 세계도(世系圖)와 《이현실기(二賢實記)》(1924년 간행)에 실린 〈명암정숙공실기서(明庵正肅公實記序)〉에 억종(嶷宗)과 계옹이 모두 파간을 지낸 것으로 되어 있어 대본의 세계와 일치하므로 ‘宗’ 뒤에 ‘波’를 보충하여 번역하였다(김종태 번역원의 각주).
문해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김양경 시집서의 영분공파 계보는 김양경의 후손으로서 김양경 시집을 목판인쇄를 하려는 김가구(김미)가 준 가승 계보를 가지고 허백당 성현이 쓴 것이라고 볼 것이다.
카페지기와 운석에 의해 김양경 시집서의 영분공파 계보가 마치 김양경이 직접 쓴 것으로 오해, 곡해 되어 온 점은 심히 유감스럽다.
김영경시집서의 계보는 카페지기와 운석이 영분공은 경순왕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던 하나의 근거였다면 근거였으나 나의 반박으로 인하여 이들이 지금까지 주장하던 바의 그릇된 근거가 안개 걷히듯 말끔히 사라졌다.
그러므로 영분공은 경순왕 아들이 아니다.
2018년 9월 25일
경주김씨
첫댓글 경주김씨대종친회카페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카페지기와 운석은
자신이 무엇을 연구해서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거의 대부분 남이 써 놓은 것을 복사해서 붙여놓기만 하고 있다.
솔직해 말해서 그런 것은 요즘 초등학생들도 할 수 있는 일이다.
이들이 김양경 시집서 서문의 유고의 의미를 엉뚱하게 해석하는 것을 보면,
남이 연구해서 써놓은 글을 경주김씨대종친회카페에 옮겨놓으면서
과연 그 내용을 이해하고 제대로 해석할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종종 든다.
동사강목의 저자 순암 안정복 (1712-1791)의 조선시대 보첩(譜牒)의 기록에 오류가 많다는 지적을 소개합니다.
순암선생문집
제 13권 잡저 상헌수필 하(橡軒隨筆下) 호유잡록(戶牖雜錄)을 함께 덧붙임
[보첩(譜牒)의 기록에 오류가 많음]
보첩이란 파계(波系)를 밝히고 소목(昭穆)을 분별하기 위한 수단이다.
따라서 그 내용이 진실되어 거짓이 없도록 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만일 사실과 틀리는 곳이 있다면 이는 곧 선조(先祖)를 욕보이고 속이는 죄에 떨어지게 되는 것이니, 보첩처럼 엄격하고 막중한 것이 없다 하겠다.근래에 집집마다 보첩을 만드는 것이 풍습을 이루었는데 그에 따르는 폐단도 또한 여러 가지이다.
무식한 무리들은 먼 시골 구석의 한미(寒微)한 집안으로부터 뇌물을 받고는 그 내력이 어떤지도 모르면서 곧장 선대 중에서 이름만 있고 자식이 없는 사람에게 붙여서 그 자손이라고 하면서 군역(軍役)을 면제받도록 하려고 한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영악스러운 자는 성(姓)과 이름이 같은 사람의 돈을 받고는 사사로이 보첩을 발간하여 그 속에다 이름을 끼워넣어 주는데, 그것도 기어코 현조(顯祖)에게 붙이고야 만다. 참으로 통탄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심지어는, 대왕(大王)의 자손과 공신(功臣)의 자손에게 군역(軍役)을 부과하지 말라는 하교가 있었던 것을 기화(奇貨)로 하여 보계(譜系)를 위조해서 종실(宗室)의 후예니 공신의 후예니 하면서 종친부와 충훈부에 뇌물을 바치면, 실무를 맡은 하리(下吏)는 문안(文案)을 만들어서 당상관의 수압(手押)을 받은 후에 이를 발급한다.
이와 같은 간악한 버릇들을 통렬히 응징해야만 명분이 확립되고 군정(軍丁)의 형편도 어느 정도 나아질 것이다. 또 하나 허무맹랑한 일이 있다.
더러 시조 이상에 대하여 터무니없는 말을 조작하여 자기 조상이 어느 명산(名山)의 바위굴에서 나왔다고 하면서 사람들을 속이려 들면, 무식한 자들은 정말 그런 줄 알고 믿기도 하는 것이다.
나라에서는 이에 대한 법령을 엄격히 세워서 옛날의 씨족지(氏族志)의 예에 따라 대처해야 할 것이다.
경주김씨대종친회카페에서 드디어 어제 오후에 <경주김씨>를 강퇴시켰네요.
영분공파 계보를 임의대로 해석했다는 것이 강퇴의 이유군요.
카페지기,운석, 유경만리 이런 자들은 '영분공은 과연 경순왕 아들인가?'라는
주제에 있어서만큼은 앞으로도 계속 쥐 잡듯이 잡아놓을 작정입니다.
백기를 들고 투항할 때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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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분공파가 계속 경순왕 후손이라고 주장하고 다니든 말든 관심없습니다.
영분공의 이름을 명종이라고 쓰고 다니든 말든 관심없습니다.
남의 할배를 자기 할배로 믿고 자자손손 대물림하며 살든 말든 관심없습니다.
불볕 더위의 연속입니다
나이는 시간과 함께 달려가고
품은뜻은 세월과 더불어 사라져 갑니다.
무더위와 코로나로 힘든 요즘
회원님들 힘내시고 오늘도 건강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