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렵, 강과 계곡에서 즐기는 우리의 여름 풍속
이학주(강원대 교양교육원 글쓰기 담당, 한국문화스토리텔링연구원 원장)
1. 추억으로, 눈앞에 아른거리는 이상향
<고향 생각을 더 일으키는 천렵의 매력>
천렵(川獵)은 그 소리만 들어도 기분 좋다. 힘든 농사일과 업무로 시달리던 일상을 벗어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은 천렵이라는 글자를 보면서 벌써 환상으로 빠져들 것이다. 경관이 빼어난 강언덕, 그리고 자갈이 곱게 깔린 장광(場廣), 또는 푸른 나무가 그늘을 만들어주는 시원한 계곡이 눈에 아른거린다. 이 풍경은 모두 우리가 어린 시절 함께 했던 고향의 향수로 남은 장면들이다. 정말 꿈만 같았던 순간들이었다.
<즐겁고 행복했던 날>
사람은 추억을 먹고 산다는 말이 있다. 힘들었던 과거는 잊고 즐겁고 행복했던 순간들만 기억하려는 사람들의 심리적 효과를 그려낸 말이다. 이 가운데 우리를 가장 즐겁게 했던 추억 중 하나가 천렵의 장면이다. 지금 생각해도 천렵은 참 신났다. 신바람이라는 말은 아마도 이때 쓰는 말일 게다. 어린이부터 어른까지 다들 천렵하는 순간에는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 있었다. 그야말로 얼굴에 드러난 표정은 싱글벙글이었다. 그 얼마나 즐거운 하루였던가.
<고기잡이의 추억>
남자 어른들은 반두와 지렛대를 들고 고기를 잡고, 아이들은 종다래끼를 들고 따라다니면서 잡은 고기를 넣었다. 그러고 보니, 그때 그 시절에는 물고기도 참 많았다. 꺽지, 빠가사리[동작어], 탱수[탱가리], 모래무지, 메기, 참지르미, 수수지르미, 말지르미 반문, 장어, 피라미, 괘리, 돌박가, 쇠리, 돌고기[뚜꾸], 용고기[미꾸라지] 등등. 어린 시절 잡았던 물고기 이름들이다. 종류도 많았다. 물론 다 기억나지는 않는다.
<마을 사람들과 함께 먹는 고깃국의 참맛>
남자 어른들은 그렇게 잡은 물고기 배를 따고 손질하였다. 그리고 큰 솥을 걸고 불을 지펴 원반죽[매운탕]을 끓였다. 원반죽은 매운탕의 일종인데, 우리 고향에서는 음식 이름을 원반죽이라 했다. 손질한 물고기에 밀가루를 입히고, 고추장을 풀어 넣고, 호박을 썰어 넣었던 기억이 난다. 솥에다 팔팔 끓인 후 한 그릇씩 떠서 먹었다. 간은 여자 어른들이 맞추었다. 아무래도 음식을 주로 하는 어머니들이 간을 맞추는 데는 도인이니 당연했다. 그렇게 끓인 원반죽을 한 그릇씩 들고 둘러앉아 배를 채웠다. 먹을 게 흔치 않던 시절 물고기이지만, 고깃국을 먹을 수 있다는 사실 자체로 즐거웠다.
<낙원의 참모습, 술과 노래와 춤으로 보내는 격양가 타령>
이렇게 흥겨운 날 어른들은 술이 빠질 수 없었다. 막걸리를 담가서 동이 째 강가로 가져와서 마셨다. 주거니 받거니 그 풍경도 아름다웠다. 얼큰하게 술이 오르면 얼굴이 붉어지면서 자연스럽게 노랫가락이 흘러나왔다. 누구랄 것도 없이 노래를 시작하면 연달아 다른 사람이 불렀다. 특히 정선은 소리[아라리]로 유명한 지역이다. 요즘은 <정선아라리> 또는 <정선아리랑>이라 하지만 예전에는 그냥 “소리 한 자락 하시오.”하면 곧바로 정선아라리 가락이 흘러나왔다. 신이 난 사람들은 어깨를 들썩였다. 배부르고 술 취하고 노래하고 춤추니 이 어찌 이상향이 아니랴. 어른들의 소리는 강바람을 타고 먼 산까지 강물처럼 흘러 종일토록 흥겨움을 더했다. 요순시절의 격양가(擊壤歌)가 이보다 나을 리 없다.
어른들의 소리와 춤이 이어지면 아이들은 그 광경을 구경하든가, 소리를 따라 하며 춤을 추기도 했다. 또 강물 속에 뛰어들어 물장구치고 수영하면서 놀았다. 배가 부르니 기분이 좋았고, 그렇게 함께여서 또 기분이 좋았다. 이것이 참 낙원이 아니고 무엇이랴.
2. 화전놀이에서 호미씻이까지, 빛바랜 사진이 보여주는 우리의 유토피아
<빛바랜 사진을 타고 떠나는 추억여행>
농촌 어르신들이 가지고 있는 낡은 사진첩 속에는 꼭 천렵 사진 한 장씩은 들어있다. 물론 화전놀이, 천렵, 관광, 농사 장면, 환갑잔치, 결혼식, 약혼식, 돌 사진 등은 어느 집에 가든 사진첩 속에서 볼 수 있다. 참 정감이 간다. 사진첩 속 빛바랜 사진은 시간이 멈춰 있다. 사람은 늙어도 사진은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늙지 않는다. 다만 색이 바랠 뿐이다. 어쩌면 사진으로 전해주는 역사가 아닐까. 사진으로 기록한 역사이다. 그러나 얽힌 사정을 모르는 사람은 그냥 누군가의 천렵 사진일 따름이다. 그 천렵에 얽힌 사랑과 우정과 돈독한 정은 찾을 수 없다. 그래서 사진의 주인공에게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시시콜콜 사진 이야기를 듣다 보면 어느덧 우리도 사진 속 시공(時空)으로 빠져든다. 빛바랜 사진을 타고 떠나는 추억여행이 시작된다. 타임머신[시간여행 기계]을 타고 스페이스머신[공간여행 기계]을 탄 기분이다. 그 이야기는 빈 도화지[화이트 스페이스] 위에 새롭고 멋진 그림으로 그려진다. 빛바랜 사진 속에서 추억의 그림이 그려지는 순간이다.
<여인들이 그리는 추억의 꽃 그림>
천렵이 가족이나 친구나 동네 단위로 행해진 것만은 아니었다. 진달래 예쁘게 피고 햇살 곱게 비추는 봄이면 여인들끼리 화전놀이를 가기도 했다. 화전(花煎)은 꽃전이다. 진달래 꽃잎을 찹쌀가루에 얹어 부쳐 먹는 떡이다. 이때 닭이며 생선이며 맛있는 음식은 골고루 싸간다. 그리고 장고와 북을 가져간다. 물론 술도 한잔하면서 시댁살이 어려움을 소리로 풀어놓는다. 당연히 소리 잘하는 사람이 최고이다. 꽃 속에서 꽃보다 더 아름답게 그들의 노래와 춤이 섞여 가슴에 뭉친 속앓이를 치유하는 장면이다. 그래서 이를 화전놀이라 한다. 천렵놀이 중에서도 가장 으뜸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같은 천렵이지만 사람들은 구분하여 불렀다. 이때 찍었던 사진은 언제나 진달래꽃 속에서 찍는다. 꽃 이야기의 슬픈 사연은 여인들의 꽃놀이에도 묻혔으리라.
<한 해 힘든 농사일을 일단락 짓는 호미씻이>
마을에서 큰 천렵은 호미씻이였다. 농사에서 가장 힘든 장면은 김매기이다. 정말 잡초는 매고 또 매도 돌아서면 그 자리에서 솟아난다. 잡초가 곡식 보다 웃자라면 곡식은 삭아 없어진다. 그래서 곡식을 지키려면 잡초를 제거해야 했다. 그 옛날에는 잡초를 없애려고 요즘처럼 제초제를 뿌리지도 않았고, 비닐을 씌우지도 않았다. 오로지 김매기를 해야 했다. 논매기, 밭매기는 농사일 중에 가장 힘든 일이었다. 한여름 무더위에 몸은 온통 땀으로 범벅이 되고, 모기는 한순간도 멈추지 않고 피를 빨았다. 풀잎은 살갗을 긁어 땀과 섞여 쓰리게 했다. 그 고통을 느껴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렇게 세(勢)를 부리던 잡초도 세 벌 김을 매고 나면 더 기세를 드러내지 않았다. 아이 김, 두 벌 김, 세 벌 김을 매는 고통은 멈추었다. 이때가 음력 7월 15일 백중 때이다. 양력으로 8월 말쯤 되니 이제 말복도 지낸 때이다. 그러면 농부들은 김매던 호미를 씻어 건다. 이를 호미씻이라 한다.
호미씻이를 하는 날이면 마을 단위로 <호미씻이>라는 행사를 했다. 호미씻이는 열심히 일한 사람이 누릴 수 있는 일종의 보상이었다. 이때 하는 행사가 곧 천렵이었다. 마을 사람 모두가 참여하는 정말 큰 행사였다. 제사를 지내 신(神)을 강림하지 않으니, 원론적 축제(祝祭)는 아니다. 그러나 술과 음식과 춤과 노래가 있으니, 종합예술이 벌어지는 축제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때는 남녀노소 누구나 강가로 나왔다. 큰 천렵은 음식으로 물고기가 아니라, 돼지나 개를 잡았고, 소를 잡아 지내는 행사를 열기도 했다. 호미씻이의 의미가 어떤지를 짐작할 수 있는 규모이다.
<풍속은 세월 따라 변하지만 왜 그 시절 민속놀이 천렵은 기억에서 변하지 않을까>
세월 따라 문명은 변하고, 천렵의 풍속도 변하고 있다. 강가에서 하던 마을 단위 천렵은 이제 보기가 어렵다. 물론 그 변이형태로 읍면 단위 체육대회, 마을 단위 어버이날 행사, 효도 잔치 등이 열린다. 어쩌면 당연한 일일 수 있다. 변화는 자연의 순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월이 아무리 가고 문명이 달라져도 그리움으로 남은 천렵 풍속은 마음에서 사라지지 않고 있다. 아마도 가족과 마을이 함께 정을 나누고 놀이를 즐겼던 우리의 심상으로 남아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리움으로 마음에 간직한 사람이 오직 나만일까. 아직도 낡은 사진첩 속 빛바랜 사진으로 남은 추억은 사라지지 않으니 나만 그리워하는 풍속은 아닐 것이다. 조선조 때 화가 김홍도와 신윤복의 그림에도 나타나니 그 역사 또한 오래되었다.
우리의 여름 풍속 천렵을 올여름 다시 해보면 어떨까.(문화통신, 2023, 여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