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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 100장면 1
누구나 쉽고 재미있게 읽는 동안에 중국의 역사, 중국인, 중국 문화에 대한 구체적이고 풍부한 역사상을 간직하고, 나아가서 중국사 전체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도록 하는 책은 없을까? 이러한 욕구를 충족시키자는 의도 속에 이 책을 씌어졌다. 중국의 선사시대부터 현대까지 중국사에서 전기를 이루었다고 생각되는 역사적인 사건을 정리, 100장면으로 나누어 누구나 가볍게 손에 쥐고 읽을 수 있도록 한 권의 책에 담았다. 그러나 지금 완성된 이 책이 어느 정도 그 의도에 부합하였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우리가 중국사에 대해 관심을 갖는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그것이 우리의 역사를 보다 온전히 이해하는 하나의 방안이 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세계사의 보편적인 흐름이 올바로 규명되는 속에서 한국사도 제 위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며, 일찍부터 한국사의 전개에 깊은 연관을 가졌던 동아시아, 그 중에서도 특히 중국의 역사를 제대로 이해해야 하는 당위성은 새삼스레 논할 필요조차 없이 우리 모두가 공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갖고 있는 중국사에 대한 지식, 이해도는 어느 정도일까? 우리는 최소한 중국의 몇몇 왕조나 위대한 개인들의 이름, 혹은 이들과 관련된 일화나 고사성어 등을 알고 있으며, 아마도 중국의 고전 한두 가지 정도를 접해보지 않은 사람은 드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지식의 단편들이 서로 연관되어 중국사의 전체상을 인식하는 데 도움이 되지 못하는 까닭은 각각의 사실들이 시대와 결합되어 설명되지 못하고 따라서 역사적 생명력을 결여했던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을 쓴 두 사람은 이러한 점들에 유의하면서 이 책을 써나갔다. 그러나 우리는 전문적인 역사학자도 아니고, 단지 이 나라의 중등교육을 여러 해 동안 담당했던 역사교사들로서, 그 의의와 한계가 따로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는 기존의 학계의 성과물들을 가능한 대로 망라하여 참신하고 진보적인 시각을 채택, 쉽게 풀이하고자 노력했다.
역사적 사실에 대한 새로운 자료의 발굴이나 해석 등은 처음부터 배제되었고, 사실 그러한 일은 우리의 역량 밖이었다. 따라서 이 책이 중국사에 대한 대중적 인식을 높이는 역할을 조금이라도 한다면 그것은 모두 학계, 출판계의 공로임을 밝혀둔다. 아울러 일일이 주석을 달아 출처를 밝히지 못하고 참고문헌으로 대체한 것에 깊은 양해를 구하며, 마음으로부터의 감사를 표시하고 싶다.
차례
1. 중국대륙의 구인류 - 북경원인
2. 황화, 중국문명의 원천 - 앙소문화
3. 남성의 시대로 - 용산문화
4. 하왕조는 실재했는가 - 중국의 전설시대
5. 신에게 묻는다 - 갑골문이 안내한 은허의 세계
6. 주의 봉건제도 - 은왕조의 멸망
7. 춘추 5패, 열국의 각축전 - 춘추시대의 개막
8. 철기의 확산과 군사기술의 변혁 - 제 2의 농업 혁명
9. 백가가 쟁명하다 - 제자 백가의 출현
10. 후진국 진의 대약진 - 상앙의 개혁
11. 진시황, 중국을 최초로 통일하다 - 중화제국의 시작
12. 여산릉 병마용 허수아비의 노래 - 진승, 오광의 난
13. 항우와 유방의 대결 - 한 제국의 성립
14. 살아 있는 듯한 한나라의 여인 - 마왕퇴의 한묘
15. 토끼가 죽으면 사냥개는 삶아지고 - 오초 7국의 난
16. 유교가 제국의 이념으로 - 유교의 국교화
17. 동서교역로의 좁은 문 비단길 개통 - 장건의 서역탐험
18. 사마천, (사기)저술을 위해 태어나다 - (사기)의 완성
19. 와망의 이상적 토지개혁 - 신 왕조의 명암
20. 호족 연합정권의 대두 - 후한의 성립
21. 장형, 지진을 탐지하다 - 채윤의 종이 발명
22. 황제의 옆자리, 외척과 환관 - 황건적의 난
34. 천하 삼분의 적벽대전 - 삼국시대
24. 민족 대이동과 강남 개발 - 5호의 침입과 동진의 성립
25. 도교와 불교의 융성 - 도교의 성립
26. 예술을 위한 예술의 탄생 - 문벌 귀족사회의 성립
27. 대륙의 동맥 대운하의 건설 -수나라의 재통일
28. 고구려와의 전쟁 - 수나라의 멸망
29. 동아시아 세계의 완성 - 당 태종의 정치
30. 전무후무한 여황제 측전무후 -무주혁명
31. 서역으로의 관문 돈황 - 당삼채와 신라 사신
32. 이백과 두보 - 귀족문화의 절정
33. 절도사들의 시대 - 안사의 난
34. 구전체제의 붕괴 - 양세법의 실시
35. 9세기 중국의 생활상, 신라방, 견당사 - 일본승려 엔닌의 일기
36. 소금 장수 황소 - 황소의 난
37. 채소를 사 먹는 농민 - 산업의 대약진
38. 문치주의와 군주 독재체제의 확립 - 송의 건국
39. 과거제의 정착과 사대부 계층의 성장 - 지주, 전호제의 확대
40. 유목민족의 각성 - 최초의 정복왕조 요
41. 신법당과 구법당 - 왕안석의 개혁
42. 상업도시의 발달과 도시문화 - 지폐 교자문자의 공인
43. 화약, 나침반, 인쇄술 - 심괄의(몽계필담)
44. 송, 중국회화의 황금시대 - 문인화의 세계
45. 여진족의 화북 지배 - 북송의 멸망
46. 초원의 폭풍 칭기즈칸 - 몽고의 유라시아 제패
47. 약탈자에서 지배자로 - 원 왕조의 성립
48. 일본원정과 고려의 고뇌 - 2차 일본원정
49. 마르코 폴로의 중국여행 - (동방견문록)의 완성
50. 희곡과 소설의 개화 - 원대 서민문화의 발달
1. 중국대륙의 구인류(북경원인 - 약 50만년 전)
그때 우리나라에서는 -
* 250만년 전/한반도의 윤곽 형성
* 70만년 전/구석기 문화시작
1929년 12월,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북경 교외의 탄광 마을 주구점, 그 서남쪽 산, 일명 '용골산'에서는 일단의 학자들이 혹한을 무릅쓰고 작업에 열중하고 있었다. 이산은 석회암 산지였긴 때문에 수많은 동물의 뼈가 화석화되어 남아 있었고, 중국 사람들은 이 뼈를 '용골'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용골은 살마들 사이에 만병통치약쯤으로 여겨져 고가로 팔려가고 있었다. 그 약용의 뼈 중에 사람의 뼈가, 그것도 까마득한 옛날원인의 뼈가 포함되어 있으리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스웨덴의 지질학자 앤더슨이 처음으로 새로운 시각으로 이 산에 접근하기 시작했다. 그는 본래 원세개 정권이 재정난을 타개하기 위해 서방에서 초빙한 광공업 고문이었으나, 광맥을 찾는 일보다는 그 속에서 인류의 화석이나 고대의 유물을 발굴하는 데 정열을 바침으로써, 1920년대 중국 고고학에서 가장 빛나는 업적을 이루어냈다.
앤더슨 일행은 이미 1927년에 인류의 것으로 보이는 어금니 뼈를 찾아냈으나, 학계의 인정을 받지 못했다. 보다 확실한 유골을 찾기 위한 작업이 계속되었지만, 그 작업은 성과를 확실히 예견할 수 없는 지난한 작업이었다. 앤더슨은 고고학적 발견의 어려움을 '마치 공원에서 잃어버린 핀을 찾는 것과 같다'고 표현했었는데, 그야말로 산을 거의 허물어내는 기나긴 노고 끝에 북경원인의 화석이 발굴되었다.
동굴을 파 들어가던 사람들이 30m 깊이의 동굴 밑바닥에 도달했다. 그들이 손에 들고 있는 도구는 대나무 주걱. 고고학이 현대 과학의 성과라고 하기에는 그들이 사용하는 도구는 너무나도 보잘것없는 것이었다. 밑바닥에는 겨우 한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작은 구멍 2개가 나 있었다. 중국인 젊은 학자 배문중이 희미한 불빛에 의존하여 구멍 끝까지 들어갔을 때, 순간 그는 숨을 멈추었다. (앗! 두개골이다!)
그것은 거의 완전한 모습의 인류의 두개골이었다. 어찌된 일인지 서양인 학자들에 의해 시작되고 미국의 록펠러 재단의 지원 속에 진행되었던 이 발굴에서, 원인의 유골은 중국이 학자에게 그 첫 모습을 드러냈다.
협화의학원의 해부학 교수로 있던 블랙은 이 유골이 50만년 전, 즉 구석기 전기에 활동했던 인류의 유골임을 확인했다. 그가 두개골을 손상시키지 않고 부착된 단단한 흙을 제거하는 데 걸린 시간만도 4개월, 북경원인에 매료되어 실체를 규명하고자 애쓰던 그는 끝내 과로로 숨졌다.
북경원인은 같은 단계의 자바원인과 달리 거의 완전한 상태로 발굴됨으로써 학계를 흥분시켰는데, 2차 대전의 와중에서 증발, 세계적인 수수께끼로 남게 되었다.
북경원인과 같은 지층에서 불에 탄 뼈와 다량의 사슴, 코뿔소, 호랑이, 하이에나 등의 동물 뼈, 그리고 인공을 가한 석기들이 발견되었다.
이들로부터 추정하건대, 그들은 지금보다 훨씬 따뜻한 기후에서 직접 제작한 도구를 이용하고, 위대한 고동 노동을 통해서 자신보다 훨씬 거대한 짐승들을 사냥하며 삶을 영위하고 있었다. 그들의 집은 자연이 만들어놓은 동굴이었다.
특히, 그들은 불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불의 사용은 인류가 자연계의 거인으로 탄생하게 되는 첫걸음인 도구 사용 다음으로, 인류의 발달사에서 아주 의미 깊은 일이었다.
번개나 지진 등 자연적 현상 속에서 불을 관찰하기 시작한 인류도 처음에는 다른 동물들처럼 불을 몹시 두려워했으나, 점차 그 위대함을 깨닫고 생활에 적극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불은 생존을 위협하는 맹수들의 침입과 엄습하는 추위로부터 인간을 보호해주었으며, 식량을 익혀먹기 시작하자 인류의 신체는 더욱 튼튼해졌고 두뇌는 더욱 발달하기 시작했다.
북경원인의 발굴을 시작으로 최근가지 발굴된 중국의 구석기 유적은 무려 200여 곳에 달한다.
중국의 구석기 문화는 이미 북경원인이 살았던 시기보다 백만 년을 훨씬 앞선 시기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운남성 원모현에서 발굴된 원모인은 이미 17만년 전에 생활했음이 확인되었고, 섬서성 남전에서 발굴된 남전인은 약 60만년 전에 활동했다.
홍적세 말기, 북중국에서는 다시 추위가 시작되었다. 몽고고원에서 불어오는 세찬 바람은 고원의 석회석 가루로 중국 북부를 덮기 시작했으니, 이것이 바로 중국의 중원을 상징하는 황토 퇴적층의 형성이다. 기후가 다시 다듯해지면서 신석기 문화가 열리고, 이때에 새로이 등장한 주인공이 현재 중국인의 조상이다.
중국의 전설에 의하면, 여와가 황토를 빚어서 인간을 만들었다. 처음에는 한 사람씩 만들었는데, 그 작업이 너무 더뎌서 나중에는 아예 새끼줄을 끌고 황토를 달렸다. 그 줄에 붙은 무수한 흙들이 모두 인간으로 변했다고 한다.
2. 황하, 중국문명의 원천
만일 현대인이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떠난다면, 아마도 그 생존의 상한선은 신석기 시대에서 멈추게 될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1만년 전, 지구상에는 오랜 빙하기가 끝나고 현재와 대차 없는 지형과 기후가 만들어졌다. 인류는 수백 년간 인류를 지배했던 '깨뜨리는 문화'에서 탈피, '가는 문화'로의 기술상의 대혁신을 이룩했고, 자연현상의 배후에 있는 원리를 깨달은 만큼 성숙한 정신력을 갖게 되었다.
신석기 시대에 인류는 야생하는 동, 식물을 사냥, 채집하는 일에만 의존하지 않고, 전혀 새로운 생활방식을 터득했는데, 그것은 농경, 목축의 시작이다. 이는 산업혁명에 견줄 만큼 인류 역사상의 대 사건으로, 우리는 이를 신석기 혁명, 혹은 농업혁명이라고 부른다. 이제 인류를 비로소 스스로 필요한 작물을 생산하고 조정하는 생산경제에 돌입, 문명의 기로를 마련하기 시작했다.
참으로 오랜 떠돌이 생활을 마치고 한 곳에 정착, 인공의 '집'을 만들어 생활하게 되었으며, 바늘을 발명하고 결박의 기술을 터득, 걸치는 옷이 아니라, '꿰매어 만든 옷'을 만들어 입기 시작했다. 마을이 이루어지고, 마을사람들의 공동의 의식과 문화가 자리 잡기 시작했다.
중국에서는 약 6천 개소의 신석기 유적이 발굴되었는데, 그 이른 시기의 유적은 기원전 7천년경까지 소급된다. 그 최초의 터전은 황화. 중국 북부에 널리 발달한 부드럽고 비옥한 황토 퇴적층과 거대한 황하의 물줄기를 탯줄로 중국인들의 새로운 생활 곧 원시농경이 시작되었다. 오늘날은 남부의 양자강 유역이 최대의 농작물 지대로 알려져 있지만, 문병발생 초기의 생산기술로는 도처에 가득한 늪과 습지, 삼림을 개간할 수는 없었다.
중국의 신석기를 대표하는 앙소문화는 첫 발굴지인 하남성 승지현 앙소촌의지명을 따라 붙여진 이름으로, 1921년 역시 앤더슨에 의해 처음 발굴되었다 대체로 기원전 5000년경부터 기원전 2500년까지 존속, 뒤의 용산문화에, 계승되었다.
앙소인들은 현 중국인의 조산으로 확인되었다. 앙소인의 골격은 모두 몽고인종에 속하며, 현재의 화북 및 중앙아시아계보다는 남중국인계와 더 유사하다. 화북인은 이후의 역사 전개과정에서 북방민족과의 융합이 빈번해 체질사의 변화가 일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대표적인 유적은 섬서성 서안시의 반파 유적으로, 1953년 서안에서 발전소를 건설하던 중에 발견되었다. 현재 유적 자체가 반파 박물관으로 조성되어 일반에게 공개되고 있는데, 중국에서는 유적 자체를 박물관으로 개방하는 예가 적지 않다.
앙소기의 마을은 대개 강가의 약간 높은 언덕에 자리잡고 있었다. 마을의 규모는 약 20채에서 100채 정도. 집은 땅을 약간 파고 짚이나 이엉으로 엮은 원추형 지붕을 얹었다. 크기는 대략 직경 5m로 5명 내외의 사람들이 기거할 수 있는 면적이다. 집안의 중앙에는 화로를 두어 난로나 조명의 역할을 하게 했고, 집 부근에는 저장굴을 두어 곡물을 저장하기 시작했다.
오랜 경험으로 야생곡물의 생장이치를 깨닫고 농경을 시작한 이들이지만, 그것이 처음부터 풍부한 산물을 안겨주었을 리는 없다.
초기의 원시농경은 여성들에 의해 전담되었다. 신체적인 조건상 임신, 육아를 담당해야 했던 여성들은 집 근처에서 간 돌도끼, 돌호미 등으로 수수, 조, 배추 등의 농사를 지었고, 수확물은 갈아서 토기로 된 시루에 가는 등 요리를 했다.
사람들은 멀리 나가 말, 사슴, 들소 등을 사냥했으며, 낚시와 어망으로 물고기를 잡았다. 우리를 쳐서 개, 돼지, 소, 양 등의 가축도 기르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는 남녀 간의 분업은 있었으나, 아직 남녀의 차별은 없었으며, 빈부의 차나 그로 인한 사람간의 차별도 없었다. 경험이 풍부한 지도자는 있었을지언정,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지배자는 아직 출현하지 않았다. 마을사람들은 살아서는 그만그만한 크기의 집에서 살았으며, 죽어서도 함께 씨족 공동묘지에 묻혔다. 죽은 이의 발밑에 몇 개의 토기를 껴묻어, 사후 세계에 대한 관심을 나타내었는데, 씨족장이라 할지라도 널빤지를 댄다거나 약간의 비취를 장식하여 그의 생전에 노고에 대한 감사를 표했을 뿐 보통사람들과 별다른 것은 없었다.
이들은 마을 중앙에 있는 커다란 집에서 마을 공동의 일을 함께 논의하고 결정했으며, 공동으로 생산하고, 그 산물은 평등하게 나누어 가졌다. 이들의 관계는 서로 평등했다.
그렇다고 대자연 속에서의 신석기인들의 평등한 공동체적 삶을 낭만적으로만 바라볼 수는 없다. 마을 주위에는 5~8m의 도랑을 파서 맹수들의 침입을 방어했으나, 아직 인간은 맹수로부터도, 그리고 무엇보다도 굶주림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인간의 사망률은 매우 높았으며, 유아의 사망률은 더욱 높았다. 앙소인들은 유아가 죽었을 때 멀리 공동묘지에 내다묻지 않고, 질그릇에 넣어 집 부근에 매장함으로써 아이의 죽음에 대한 애틋한 감정을 표현했다.
인류가 굶주림에서 해방, 자연의 정복자로 등장하기까지는 좀 더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나 그 문제가 극복되는 순간, 인간 사이의 억압과 지배의 새로운 관계도 시작될 것이다. 어찌됐든 신석기인들은 그 서단을 열었고, 신석기를 대표하는 정착, 농경의 상징물은 바로 토기다.
토기는 요리에도 응용되었지만, 본래는 저장을 위한 용기다. 토기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는 것은 인류가 잉여생산물을 낳을 수 있는 생산력 단계에 도달했음을 말해준다. 사람들은 오랜 관찰을 통해 진흙을 햇볕에 말리면 매우 단단해진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태양열보다 더 강한 불에 굽는다면 더욱 단단해질 것이다.
앙소의 채색토기는 붉은색, 검은색, 흰색 등의 반탕에 다양한 무늬가 새겨져있다. 별, 파고, 사선 무늬 등 기하학적 무늬도 있고, 물고기, 뱀, 새 등 동물무늬도 많다. 그중에는 사람의 얼굴을 한 물고기도 있고, 초기 글자 같은 부호도 보인다.
신석기인들의 이러한 감각은 사물을 사실적으로 재현해내는 데 치중했던 구석기인들과 구별되는 것으로, 사물의 배후원리를 찾아내고 추상화하는 데 치중하는 신석기인들의 정신세계의 확대를 반영하는 것이다.
3. 남성의 시대로
용산문화는 원시공동체 사회가 신석기 말기에 이르러 어떻게 계급사회로 이행했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농경기술이 더욱 발전, 광대한 황하유역이 모두 농경지대로 바뀌어갔고, 이를 기초로 중국문명의 원형이 탄생했다.l 풍부한 수확물은 인구를 증가시키고, 인간의 정신문화를 보다 풍족하게 해주었으나, 이의 획득을 놓고 씨족 내부의 갈등이 생겼고, 다른 씨족과의 전쟁 또한 빈번하게 이루어지게 되었다.
1930년 황하 하류의 산동성 용산현 성장애에서 용산문화의 유적이 처음으로 발굴되었다. 그곳에서는 다량의 석제 농기구와 함께 검게 빛나는 흑색 토기가 발굴되었는데, 이것은 너무 인상적인 것이었다.
학자들은 이를 양소의 채도와 대비, 웅대한 가설들을 세워나갔다. 용산유적의 발굴에 참여했던 부사년은 황하 중류를 채도 문화권으로, 황하 하류를 흑도 문화권으로 대별하고 이른바 화이 동서설을 주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마치 빙산의 일각을 보고, (여기에 앙소가 있고, 저기에 용산이 있다)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았다. 최근까지의 고고학적 발굴은 이들이 물 밑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안양시 후강의 한 유적에서는 최하층에 앙소문화, 중간층에 용산문화, 최상층에 은의 문화층이 발굴되었고, 묘저구 제2문화층에서는 앙소에서 용산문화로 이행하는 과도기적 형태의 토기 유형이 발굴되었다.
용산문화는 앙소문화와 동시대의 이질적이 문화가 아니라, 이를 계승, 발전시킨 신석기 후기의 문화였다.
그렇다면, 채도에서 흑도로의 변화는 일종의 유행의 변화로 보면된다. 중국의 신석기인들은 다양한 색깔과 무늬를 넣어 토기를 장식하는 것에 싫증을 내고, 무늬가 없고 기형이 보다 충실한 토기를 만드는 것을 좋아하기 시작했다. 기술도 진전되어, 앙소인들은 대개 손으로 빚어서 토기를 만들었는 데 비해, 용산인들은 회전대를 사용했으며, 달걀껍질같이 얅고 광택 나는 토기를 제작할 수 있게 되었다.
한편, 앤더슨은 앙소의 채도가 서아시아의 것과 비슷한 것에 감탄, 서아시아 전래설의 심증을 굳히고, 서쪽으로의 낭만적인 고고한 여행을 감행했다. 그러나 그는 앙소 서쪽의 채도가 오히려 더 후대의 것임을 확인했을 뿐이다. 그의 가설이 황당한 것은 아니었으나, 서로 교류가 없는 상태에서도 지구상의 여러 곳에서는 비슷한 문화현상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용산 시기의 문화유적은 현재까지 약 300곳이 발굴되었는데, 그 문화의 정수는 산동지역에서 꽃피었다.
용산 문화기에 이르러 농경은 더욱 확대되었다. 화석화된 벼껍질, 토기에 박힌 낟알 자국 등은 이 시대에 벼농사가 행해졌음을 말해준다. 반달모양 돌칼이나 돌낫, 나무 보습 등 새로운 농구가 개발되었다. 농경은 보다 확실한 생활수단이 되었으며, 가축사육도 보다 높은 수준에 달했다.
이제 농경에 남성들의 근력이 더욱 중요하게 되었고, 그 수확물이 확대될수록 남성의 권력이 점차 강화되었다. 남성의 묘에서는 생산도구가, 여성의 묘에서는 물레틀이나 머리 장식품 등이 출토되었다. 방직을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생산활동에서 남성의 역할이 더욱 중요시되면서 여성의 지위는 점차 남성에게 종속되게 되었다.
저장할 곡식이 더욱 많아졌고, 사유재산의 개념이 출현했다. 남성들은 사유재산을 자신의 아이에게 상속하기를 바랐다. 분명한 자기아이임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어느 여성을 독점해야 했고, 이에 다라 일부일처제의 혼인제가 성립하게 되었다. 가끔 남녀 합장묘가 발굴되는 것은 이러한 현상을 알려준다.
세습적인 지도자가 출현했고, 씨족간의 평등한 관계도 깨어지기 시작했다. 묘지들은 이제 모양과 크기가 일정하지 않았으며, 부장품의 수와 종류에서도 큰 차이를 보이기 시작했다. 부장품이 1점 출토되는 묘가 있는 반면, 160점이 발굴되는 경우도 있다. 지도자는 점차 지배자로 변해갔고, 세상은 지배자와 피지배자로 갈라지기 시작했으며, 빈부의 차이가 심해지기 시작했다.
사회는 더욱 확대되어 앙소기의 5배 혹은 10배의 큰 마을이 생겨났다. 집은 앙소기와 큰 차이가 없었으나, 한 간짜리 움집 외에 두간짜리 집도 발견되고 있다. 주거지 주위에 서서히 성벽이 출현하기 시작했다 도랑으로는 맹수는 피할 수 있었으나 다리를 놓고 건너오는 외적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성벽은 두 쪽의 판자 사이에 흙을 넣고 물을 부은 다음, 발로 짓이기는 우너시적 시멘트 공법, 즉 판축 공법으로 구축되었다. 성은 전쟁의 거점이 되었고, 각 부족 간의 치열한 전쟁이 시작되었다.
광대한 중원, 황화 유역에는 방, 읍, 국으로 불리는 성읍도시가 출현하기 시작했다. 바야흐로 청동기 시대에 이르면, 이들 무수한 성읍국가 중에서 강성한 국가가 출현, 최초의 고대국가를 창출하게 될 것이다. 중국의 초기 국가 전설은 이들이 부족 간의 빈번한 항쟁 속에 도읍을 무수히 옮기고 있음을 알려준다.
4. 하왕조는 실재했는가
현재까지 밝혀진 학문적 성과로는 중국 최초의 국가는 은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금세기 초까지도 은의 실재를 의심하고 있었으나, 은나라는 전설 속에서나 존재하는 나라일 뿐이었다. 그러나 갑골문자는 은 후기의 도읍지인 은허를 우리의 코앞에 들이대면서 지구상에 이렇게 훌륭한 청동문물을 본적이 있느냐고 외쳐댔다. 놀랍게도 (사기)에 기록된 은 왕실의 세계표는 거의 오차가 없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은의 갑골문자, 주의 청동기에 새겨진 금문 등의 문자기록을 통해 우리는 보다 풍부하게 과거의 사실들을 만날 수 있다. 문자는 분명 인류가 오랜 원시시대를 마감하고 새로이 문명의 새벽을 준비하는 중요한 발명품이다. 인류는 문자를 통해 축적된 경험을 후세에 전달하게 되고, 이제 인류의 역사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뛰어 넘어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미 구석기 이래 인류는 공동노동의 과정에서 언어를 사용하여 서로 의사를 소통하고 있었으며, 언어에 의한 문화계승을 지속하고 있었다. 할아버지에서 아버지로, 다시 그 아들로,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오던 오랜 전승의 세계에서 우리는 어쩌면 더욱 귀중한 역사의 파편을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마치 독일인 슐리만이 어린 시절 읽었던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와(오디세이)의 감동을 잊지 못해, 마침내 트로이의 발굴에 나서고 또 성공했던 것처럼.
중국의 전설에 의하면, 천지의 창조주는 반고이다. 태초에 우주에 가득 찼던 기운이 점차 거대한 바위로 변했다. 반고는 그 바위 사이에서 생겨났는데, 그가 점차 자라남에 따라 바위는 두 쪽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그 한 조각은 하늘이 되었고, 다른 하나는 땅이 되었다. 반고가 이 일을 마치고 숨을 거두자, 그의 눈은 태양과 달이, 그가 내쉰 숨은 공기가, 그의 뼈는 산이, 그의 육체는 흙이, 그리고 그의 피는 강과 바다가 되었다.
오랜 세월이 흘러서 미개한 사회가 개화되었는데, 그 위업은 뛰어난 성인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 문화적 영웅들이 바로 삼황오제이다. 삼황오제의 전설은 국가 출현 이전의 역사적 발전 과정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삼황오제는 기록에 따라 약간 다르게 나타나지만, 삼황은 상서의 수인씨, 복희씨, 신농씨를, 오제는 사기의 황제, 전욱, 곡, 요, 순을 따르는 것이 일반적이다.
수인은 불을 발명함으로써 화식하는 법을 알게 했으며, 인류를 추위로부터 보호했다. 혹희는 사냥의 기술을 창안했고, 신농은 쟁기와 괭이를 발명, 농경시대를 열었다. 이들이 삼황이다. 삼황은 다소 괴기한 모습을 한 초인적 영웅이다. 복희는 머리는 사람이지만 몸은 뱀이며, 신농은 머리는 소지만, 몸은 사람이다.
반면, 오제는 보다 인간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사마천은 이때부터를 역사시대로 파악, (시기)의 저술을 오제로부터 시작했다.
황제는 무력으로 중국을 처음 통일했으며, 문자, 역법, 궁실, 의상, 화폐, 수례 등 중국문물의 기초를 마련한 중국 문명의 창시자요, 중국민족의 공동조상이다. 다음의 전욱과 곡에 대해서는 뚜렷한 기록이 없다. 다음의 요와 순은 매우 높은 덕망에 의해 중국을 통치했으며, 자기 자식을 제쳐두고 현자를 지명하여 후계로 삼았다. 이것이 유명한 선양의 시작이다. 요는 효자로 이름난 가난한 농부 출신의 순을 찾아내 그의 덕망과 능력을 여러 차례 시험한 다음, 그를 사위로 삼고 위를 물려주었다.
순의 선정으로 백성들이 편안했는데, 대홍수가 일어나 사람들을 괴롭혔다. 이때 관리 우가 13년간의 노고로 훌륭히 치수의 사업을 이루었다. 순은 역시 자기의 아들을 제치고 우에게 제위를 넘겼다. 우도 훌륭한 선정을 폈다. 그가 죽자 백성들은 그가 지명한 후계자를 제치고 우의 아들을 후계로 삼았다. 이때부터 세습적인 왕조가 출현했으니, 이것이 중국 최초의 왕조 하나라다.
이 전설을 통해서 우리는 인류역사를 획기적으로 변화시켰던 불의 발명, 사냥의 발명, 농경의 시작, 국가의 발생 등의 대사건들을 만나게 된다. 요와 순이 현자에게 선양을 한 것은 원시 씨족 공동체 사회에서 추대에 의해 지도자를 뽑았던 역사적 사실은 반영하는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신석기 말에 씨족 공동체 사회가 깨지고 세습왕조가 출현하는 모습이 하왕조의 출현으로 나타나고 있다. 중국인들이 스스로를 하족으로 부르듯이, 전설상의 최초의 국가 하는 과연 실재했을까? (죽서기년)과(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하는 18대 472년간 존속했다. 각 왕들의 통치기간이 백년을 넘는 등의 허무맹랑함이 없어 매우 사실성이 있어 보인다. 서주 시대의 청동기 명문에서도 하왕조와 우의 명칭이 확인되었다. 최근 중국 최초의 청동기 유적인 하남성 언사현 이리두 유적이 하의 유적이 아닐까 추론되고 있으나, 하나라의 실체는 아직도 안개에 싸여있다. 초기청동기나, 왕의 출현을 알리는 궁전, 대묘, 거대한 성벽 등이 발굴되어야 할 것이고, 그것이 은의 초기유적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는 명확한 증거가 확인되어야 할 것이다.
중국인들은 과거에 투영하여 자신의 이상을 펼치기를 좋아하는 민족이다. 도가에서는 황하문명의 창시장인 황제를, 묵가에서는 절검과 노동을 중시하는 우를, 유가에서는 인애를 근본으로 선정을 펼친 요와 순을 강조했다. 전통적 유교에서는 요, 순, 우를 삼성으로 받들고, 하, 은, 주로 이어지는 삼대를 왕조의 모범으로 설정, 삼대의 이상적 도덕정치로 돌아갈 것을 주장하곤 했다. 어찌됐든, 전설은 중국인의 의식 속에서 지속적으로 살아 움직이고 있다.
5. 신에게 묻는다
총 말기인 1889년 어느 날, 갑골의 파편이 한 병든 학자의 집에 찾아들면서 3천년이 넘도록 땅 속에 감추어져 있던 은나라의 신비가 밝혀지게 되었다. 그 학자의 이름은 왕의영. 그는 당시 유일한 국립대학이었던 국자감의 제주, 즉 대학총장으로 있었는데, 금석학 등 고학문에 조예가 깊어서 그의 문하에는 많은 젊은이들이 모여 있었고, 그중에는 유철운도 있었다.
왕의영은 말라리아라는 지병이 있어서, 특효약으로 소문난 용골을 갈아서 약재로 쓰고 있었다. 용골이란 북경원인의 발굴에도 단서를 제공했던 바로 그 동물의 뼈이다. 용골이 막 빻아지려는 순간, 마침 그곳을 지나던 유철운이 문득 범상치 않은 글자의 흔적을 발견했다. 4년 후 그는 (철운장귀)라는 기념비적인 책을 발간, 세간에 갑골문의 존재를 널리 알렸다.
용골의 출처를 찾아 나섰던 왕의영과 유철운에게 비자의 기업비밀을 쉽사리 알려줄 약재상은 없었지만, 이제는 골동품상을 통해 글자가 있는 용골이 고가에 거래되게 되었다.
그러던 중 하남성 안양현 소둔촌에서 하천이 범람, 갑골의 파편이 대량으로 발굴되었다. 이 지역은 1928년부터 10년간 본격적인 발굴이 진행, 기원전 15년경부터 은이 주에게 멸망되었던 기원전 1,100년경까지, 즉 은 후기의 도읍지 은허였음이 확인되었다.
은나라의 본래 이름은 상, 황하연변의 수많은 성읍국가 중의 하나였던 상읍이 주변의 성읍국가들과 연합, 주도권을 구축해나갔다. 아직 대규모 수리공사도 없었던 시절, 농경지는 제한되어 있고, 주변에는 수렵을 위주로 하면서 호시탐탐 농경민을 약탈하고자 하는 종족들이 있었을 것이니, 농경민들은 서로 연합하게 되고 은족은 그 중심적 위치를 차지했다. (사기)의 은 본기에 의하면, 탕왕에 이르러 하나라의 걸왕을 쓰러뜨리고 주변국 위에 군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지위는 불안정하여 수도를 다섯 번이나 옮긴 후에야 은허에 정착하게 되었다.
거대한 도시유적 은허에서 가장 중요한 발굴은 역시 수만 편에 달하는 갑골편이다. 갑골은 점복에 사용되던 귀갑과 수골을 줄인 말로, 귀갑은 거북의 등껍질보다 배 껍질이 많고, 수골은 소의 어깨뼈가 많다. 이제 겨우 한자를 배우기 시작한 초보자의 눈으로도 갑골문 몇 자는 확인할 수 있듯이, 갑골문자는 한자의 원형이면 문장의 구조도 오늘날의 중국어와 같다. 세계의 고대문명 중에서 중국처럼 일관된 문화를 유지해온 나라는 없다.
갑골문의 연구는 왕의영, 유철운을 이어 나진옥과 그의 제자 와국유에 의해 집대성되어 은대의 사회를 보다 풍부하게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런데 이들의 삶이 모두 비극에 끝나 사람들은 이를 갑골문의 저주라고 부르기도 했다.
왕의영은 의화단 사건 이후, 외국 군대가 중국에 진주하게 되자 이에 분노, 자결했고, 백화문으로 사회를 풍자한 (노잔유기)를 남기기도 하고 기인으로 유명했던 유철운은 백성들의 참상을 보다 못해 정부의 허가 없이 관곡을 풀어 나누어준 죄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유철운의 친구였던 나진옥은 일본에 망명했다가 만주 괴뢰정권에 관련, 두고두고 지탄을 받았다. 청말의 대표적인 학자로 유명한 왕국유는 언제나 전통복장을 하고 변발을 허리께까지 드리우고 다녔는데, 청의 마지막 황제 부의에게 제왕학을 강의하기도 했다. 그는 청조의 몰락을 바라보다가 이를 비관하여 자살로써 인생을 마감했다.
은의 왕실은 국가의 행사를 결정할 때마다 갑골로써 점을 쳐서'신의 뜻'을 묻고는, 갑골에 언제, 누가, 어떠한 내용으로 점을 쳤으며 그 결과는 어떠했는지를 기록했는데, 그것이 바로 갑골문인 것이다. 그런데 당시의 국가의 중대사란 기상이나 자연현상, 농사의 풍흉, 자연재해, 제사, 전쟁, 수렵, 임신, 질병 등 온갖 것이 다 포함되며, 갑골은 일회용으로 사용된 것이기 때문에 은허의 한 갱에서는 한꺼번에 1만 7천 7백 편의 귀갑이 출토되기도 했다.
우선 갑골의 뒷면에 구멍을 내어 단상에 올려놓고 제사를 지낸 다음, 이곳을 불로 지지면 균열이 생기게 된다. 이때의 균열의 형태나 수, 주변의 색깔 등으로 신의 뜻을 판단했다. 그것을 판단하는 자가 바로 왕이다. 왕은 신과 인간사회를 매개함으로써 권위를 인정받았다.
이러한 신정정치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자연의 위대한 힘 앞에서 끝없이 무력감을 느껴야 했던 초기국가의 일반적인 정치형태다.
은나라 사람들은 10개의 태양이 땅 속에 있다가, 매일 하나씩 교대로 천상에 나타난다고 믿었기 때문에 열흘 간격으로, 도 다음 태양이 떠오르는 밤마다 일상적으로 점을 쳤다. 그 열 개의 태양의 이름이 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 즉 10간이다.
그들은 절대신인 상제로부터 10개의 태양신, 각종 자연신을 숭배했으면, 조상들이 이들에게 자신들의 간절한 바람을 전해줄 것으로 믿었기 때문에 조상숭배를 각별히 했다. 제사를 게을리하지 않는 것은 왕의 가장 중요한 업무의 하나였다.
신을 즐겁게 하기 위해 화려한 제단이 마련되고 술도 빚어졌다. 제단에는 수백 마리의 양, 소 등의 동물과 함께, 피정복민이 적게는 몇 명, 많을 때는 수천 명씩 목이 잘려진 채 제물로 바쳐졌다. 제사의 제물을 바치기 위한 전쟁이 수행되기도 했다.
은왕은 수천 명의 귀족 전사와 함께 대규모 원정을 수없이 감행했는데, 은나라에 복속된 연맹부족들은 공물을 바치고, 유사시에 병력을 제공하는 한편, 은의 제사를 공동을 받들었다. 즉, 당시의 제전은 은의 지배력을 확인하는 유일한 의식 절차로서 커다란 의미가 있었다.
은허에서 갑골문 다음으로 찬탄의 대상이 되는 것은 세계 최고 수준의 청동기들이다. 그 제작기술은 흔히 서양의 르네상스기에 비견되는데, 특히 청동제기의 정교함과 세련미는 따라갈 것이 없다. 제기는 반드시 하나씩만 만들어졌으니, 제사에 바친 그들의 정성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청동기는 지배층의 독점물이었고, 그들에 의해 무기나 제기로만 사용되었다. 그들은 청동무기로 무장, 지배력을 주변지역으로 확대해나갔으며, 신의 후예임을 자처, 화려한 제사의식으로 백성들을 위압해나갔다.
생산활동은 오로지 평민들이 전담하게 되었지만, 생산기술에는 커다란 진전이 없었다. 그들은 청동문명의 혜택에서 소외되어 여전히 토기나 목기, 석기를 사용하고 있었고, 반지하기 움집에서 기거하고 있었다. 그러나 왕을 살아서는 회랑으로 둘러싸이고 다시 토성으로 둘러싸인 거대한 궁궐에서 사치스런 생활을 하고, 죽어서는 청동기, 옥기 등이 대량으로 부장된 화려한 무덤에 매장되었으니 이는 백성들에 대한 가혹한 수탈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었다.
특히, 우리에게 충격을 주는 것은 대규모 순장의 풍습이다. 대형 묘에는 수백, 수천에 이르는 사람들이 왕의 사후 생활을 편의를 위해 생매장되었다. 아마도 이들은 전쟁포로이거나 피정복민 노예였을 터였다. 훗날, 진시황의 무덤에서는 수천의 도용들이 이를 대신하게 되니, 생산력의 발달은 지배와 전쟁의 목적을 단순히 수확물을 얻기 위한 것에서, 토지와 백성의 획득을 위한 것으로 변화시켰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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