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인들이여. 어깨를 펴라
한때는 ‘한 우물만 파라’는 말이 진중하게 들렸다. 한 곳에 집중하지 못하고, 정신이 산만한 사람에게 자주 들려주는 말이기도 했다. 이 말은 제대로 된 전문가를 요구하는 시대상을 대변한 말일 게다. 되지도 않게 사방팔방으로 나대는 사람에게 경계를 치는 의미도 있겠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한 우물을 파서 좋은 점이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취약한 점도 제법 있을 듯하다. 우물은 파 들어갈수록 안이 좁아지고 밖의 모습은 바라볼 수 없게 된다. 그 좁은 우물 안의 세계에 대한 정보는 정확하고 깊어서 신뢰할 수 있다 쳐도넓은 우물 밖의 정보는 전혀 접할 수 없는 맹점이 있다.
학문도 그런 게 아닐까. 전에는 대학의 전공이 깊이에 초점을 두고 세분하기에 분주했다. 과거의 전공 하나가 서너 개로 쪼개진 적도 있었다. 세분화하면서 교수도 늘고, 학생들도 다양한 학문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이러한 세분은 다시 통합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고 만다. 너무 세분하다 보니 현실을 바라보는 눈에 질병이 생긴 거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에 편협이 둥지를 틂으로써 착시의 결과를 초래했다. 정확한 현실 인식에 허점이 있는 학문은 탁상의 세계일 뿐이다. 실용적 학문의 처지에서는 뭔가 채워야 할 부분이 생겼다. 현실을 종합적인 안목으로 본래의 모습을 인식하려면 통째로 지켜봐야 한다.
예술도 처음에는 한 덩어리였다. 원시인이 사냥하고, 그 즐거움을 표현하기 위해 포획한 짐승을 어깨에 둘러메고 깡충깡충 뛰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동굴로 돌아와 자랑하고 벽에 짐승의 크기를 남겼다. 여기에서 무용과 음악과 문학과 미술이 태동한다. 모든 예술은 발라드 댄스로 표출되었다. 상고시대의 무천(舞天), 영고(迎鼓)와 같은 제천의식은 자기표현을 통째로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이 훗날 세분화하여 다양한 분야의 예술로 성립하였다가, 지나친 세분이 아쉬움이 있어 다시 통합 욕구도 나오게 되었다.
수필은 다양한 장르의 예술을 하나로 집약하는 데에는 선구적 체질을 소지하고 있다. 그것은 수필이 갖는 특성이기도 하다. 구태의연한 구절일지 몰라도 ‘생각나는 대로 ‧ 붓 가는 대로’는 아직도 명함처럼 내놓을 만하다. 작가의 머릿속에서 생각한 모든 것은 수필의 내용으로 삼을 수 있다는 점은 확실히 특권이다. 어떠한 형식이든 활용할 수 있다는 것, 또한 수필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이다. 타 장르들처럼 내용에, 형식에 제약을 받지 않음은 세상 어디에든 돌아다니며 떠들어댈 만하다.
그래서 수필과 시, 수필과 소설, 수필과 희곡, 더 나아가 수필과 음악, 수필과 미술, 수필과 무용, 수필과 영화, 수필과 사진, 수필과 만화. 어느 장르든 함께 할 수 있는 장점을 소유하고 있다. 이를 최대한 활용한다면 새로운 형식의 발굴도 가능할 것이다. 예를 들어 수필의 예시 단락에서 글감을 내놓으며 마당극의 대사를 끌어들인다면 얼마나 재밌을까. 수필가들이 이렇게 시작하여 새로운 형식을 창안해 낸다면, 수필의 영역은 한없이 넓어질 것이 분명하다.
가끔 옹색한 마음으로 수필은 허구가 들어와선 안 된다고 고집하는 경우를 본다. 진정 수필이 문학이라면 정신적인 작용으로 이루어지는 창작 활동에 어찌 허구가 끼어들지 않을 수 있을까. 작가의 체험이 글의 뼈대가 됨은 인정하더라도 주제의 예술적 형상화와 미적 감동을 창조하기 위해서는 수필에서도 허구가 용납되어야 하지 않을까. 수필을 창작할 때 지엽적이기는 해도 수필의 구성 단계와 표현 단계에서 허구가 자주 보임은 어쩔 수 없는 현상이라고 보고 싶다.
예술가들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영역을 넘나들면서 소재를 찾고,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숱한 밤을 지새우며 피 울음을 운다. 그로 인해 오랜 역사에 남을 작품을 생산해낼 수 있다. 그런데 작가의 체험만을 가지고 창작하라고 고집하는 수필이라면 어쩔 수 없이 ‘미래’라는 영역은 떼어내야 한다. 왜 수필가들은 바보처럼 그 소중한 미래의 영역을 칼로 도려내고 답답하게 글을 써야 할까. 참으로 어리석다는 생각이다. 우리가 기억할 것은 수필이 문학의 한 장르라는 점이다. 오히려 수필이 가지고 있는 유연성을 활용하여 다른 예술 장르와의 교류에 매진할 일이다. 그리고 영역을 넓혀갈 일이다.
우물은 밑으로만 파 들어간다. 그래야 장애를 만나지 않고 수직으로 두레박질을 할 수 있다. 직선은 장애를 만나면 꺾이고 만다. 하나에 묶이어 몰두하다 보면 경직되어 좌절하기 쉽다. 앞뒤 옆을 바라보며 현명한 판단을 요구하는 세상을 우리는 살고 있다. 함께 어울리며 어깨동무하고 사는 게 슬기로운 삶이다. 오늘날과 같이 다양하게 급변하는 곳에서는 접하지도 못하고 스쳐 지나가는 일도 많다. 이런 삶을 끄집어내어 하나의 문학작품으로 형상화하기에는 수필만 한 것이 없다.
수필인들이여. 어깨를 펴라.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 장르론을 쓸 때와 지금은 완연히 다르다. 이젠 한국 문단에서도 수필가들이 시인 만큼 많다. 이 숫자는 선호하는 사람이 많음을 의미한다. 다만 구태에 빠져 자기의 경험을 줄글로 나열해 놓고 수필을 썼다고 하는 작가는 되지 말자. 늘 주제의 예술적 형상화와 미적 감동을 창조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일 때다. 수필인들이여. 진정한 작가의 길을 고민하라.
교수님 수필 이론
첫댓글 깊이 생각하겠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수필의 발전방향에 대하여 공감가는 글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