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주영 회장(1915~2001)
현대그룹을 창업한 기업인이자 정치인이다.
1915년 강원도 통천군에 6남 2녀로 태어났다. 통천소학교를 졸업했으며 그의 최종학교이다.
그는 가난에서 벗어날려고 가출을 시도했다. 첫 번째 가출은 철도 공사판에서 흙을 나르고 두 번째 가출에서 금화에 가서 일했고 세 번째 가출에서는 경성실천부기학원에서 공부하다 덜미가 잡혀 다시 집에 돌아왔다. 네 번째 가출에서는 인천항에서 부두하역과 막노동을 하다가 경성으로 상경해 쌀가게 배달원으로 취직을 했다. 부기를 할 줄 아는 정주영에게 쌀가게를 물려주었다. 가게이름을 복흥상회로 이름을 바꾸고 2년 후 중일전쟁으로 일제가 식량배급재를 실시하였기에 폐업을 했다.
1940년 당시 경성부에서 가장 큰 경성서비스공장의 직공으로 일하던 이을학에게서 경영난에 처한 아도 서비스라는 자동차 수리공장의 소식을 접하고 인수를 시작한다.
일제말기인 1941년 빚을 내어 아도 서비스의 사업을 맡기도 하였으나 1달도 채 지나기 전에 불에 타버렸다. 다시 빚을 내어 신설동 빈터에다 다시 자동차 수리 공장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 공장도 1942년 5월 기업정리령에 의해 공장을 빼앗기다시피하고 새로운 일거리를 찾아 떠나게 된다. 홀동광산의 광석을 평양 선교리까지 운반하는 일을 3년간 하다가 1945년 5월 그 일을 다른 사람에게 넘겼는데, 3개월 후 일본의 패망으로 홀동광산은 문을 닫고 그 곳에 있던 사람들은 소련군 포로로 잡혀갔다. 이때 그는 이미 타인에게 광산업을 인계하였으므로 극적으로 피랍을 모면한다.
이후 서울 돈암동의 스무 평 남짓한 집에서 동생들, 자녀들과 함께 벌어놓은 돈으로 살다가 해방 후인 1946년 4월에 미군정청의 산하기관인 신한공사에서 적산을 불하할 때 초동의 땅 200여 평을 불하받아 현대그룹의 모체라 할 수 있는 현대자동차공업를 설립하였다. 또한 1947년 5월에는 현대토건사를 설립, 건설업에도 진출하였다. 1950년 1월에는 자신이 운영하던 두 회사인 현대토건사와 현대자동차공업사를 합병하여 현대건설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 이때 자본금은 삼천만원이었다.
그러나 그해 한국 전쟁으로 서울이 인민군에게 점령되면서 모든 것을 버리고 가족들과 부산으로 피난한 정주영은 동생 정인영이 미군사령부의 통역장교로 일하던 덕에 서울에서 하던 토목사업을 계속 할 수 있었으며 서울 수복 후 미8군 발주 공사를 거의 독점하였다.
현대건설 내 시멘트공장을 확장하여 1970년 1월 정식으로 현대시멘트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 이후 현대건설과 현대시멘트의 사주로 해외건설시장 확보와 낙찰 등을 이끌어내며 한국 국외의 건설시장으로도 진출하였고 울산 조선소 건설, 서산 앞바다 간척사업 등을 성공적으로 추진하면서 기업을 확장하게 된다.
1971년 1월 현대자동차, 현대건설, 현대시멘트회사 등을 총괄한 현대그룹을 창립하고 대표이사 회장에 취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