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월회원(望月懷遠) 지리동부 영랑대
▣ 일 시 : 2023년 07월 01일(토)~02일(일)
▣ 코 스 : 새재-상류암터-청이당-영랑대-하봉(소년대)-하봉헬기장(해유령)-선암-치밭목산장-새재
▣ 인 원 : 3명(청이당 합류 2명)
▣ 날 씨 : 흐림
화개에 사는 지리산 사진작가 여명(黎明) 님에게 연락이 왔다. 일기예보를 보니 토요일 비, 일요일 맑음, 음력으로 5월 14일이다. 쳇바퀴를 돌듯 또다시 영랑대로 향한다. 김종직의 유두류 기행시 숙고열암에 '송도비명월(松濤沸明月)'이라는 시구가 있다. '소나무 물결 달빛에 들끓는다.'라고 풀이된다. 달빛 아래 들끓는 영랑대의 바람 소리는 마치 파도 소리를 연상케 한다. 시나브로 바람이 잦아들고 둥근 달빛 아래 영랑대에 홀로 서있으니 그리운 사람이 간절히 생각나는 밤이다.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고 이른 새벽 영랑대에 나가니 운해가 펼쳐져 있다.
■ 지리동부 영랑대 망월회원(望月懷遠)
밝은 달은 천왕봉 위에 떠오르고/하늘 끝에서 이 순간을 함께하고 있겠지요./그리운 님 긴 밤을 원망하리니/밤새도록 그리움만 피어오릅니다./등불을 끄니 달빛은 Zelt 가득 서러운데/옷을 걸치고 영랑대에 나가니 옷은 이슬로 축축합니다./달빛을 손에 담아 보낼 수 없으니/다시 잠들어 꿈속에서나 만나렵니다. 끝
■ 望月懷遠 : 달을 바라보고 멀리 있는 사람을 생각하며
張九齡(678~740) : 중국 당(唐) 때의 시인
海上生明月 : 밝은 달은 바다에서 떠오르고
天涯共此時 : 하늘 끝에서 이 순간을 함께하고 있겠지요.
情人怨遙夜 : 그리운 님은 긴 밤을 원망하리니
竟夕起相思 : 밤새도록 그리움만 피어오릅니다.
滅燭憐光滿 : 촛불 끄니 달빛은 방안 가득 서러운데
披衣覺露滋 : 옷 걸치고 뜰에 나가니 옷은 이슬로 축축합니다.
不堪盈手贈 : 달빛을 손에 담아 보낼 수도 없으니
還寢夢佳期 : 다시 잠들어 꿈속에서나 만나렵니다.
■ 박여량의 두류산 일록에 나오는 상류암터
■ 청이당과 점필재가 쉬어간 계석(溪石)
우로부터 권달용(權鐽容), 박응종(朴膺鍾), 양화용(梁華容) [위치: 대원사 앞 계곡 바위]
☞ 박응종(朴膺鍾, 1893~1919) : 字 경우(景愚) 號는 이당(易堂), 곽면우(郭俛宇, 곽종석)와 하회봉(河晦峰, 하겸진) 先生의 門生으로 한말 유학자. 파리장서운동의 숨은 협력자 논문에 나옴.
* [密陽朴氏世譜] 字景愚號易堂。一八九三癸巳生。郭俛宇河晦峰先生門生。文學夙就。不幸短命。世皆惜之。有文集二卷行干世。河晦峰先生序。一九一九年己未四月三日卒。享年二十七。○墓望椒亭後谷巳坐。有石物。碣濟南河經洛撰。行狀滄溪金銖撰。墓碣銘重齋金榥撰。<자료제공 : 남사마을 이사재 박우근님>
[密陽朴氏世譜] 자는 경우(景愚) 호는 이당(易堂) 곽면우(郭俛宇, 곽종석)와 하회봉(河晦峰, 하겸진) 先生의 門生으로 '문학(文學)을 일찍 성취하였으나 불행하게도 단명하여 세상 사람들이 모두 슬퍼하였다.(文學夙就。不幸短命。世皆惜之). 문집 2권 간행하였다. 1919(기미) 4월 3일 졸하였다. 향년 27세이다. 묘는 망초당 후곡 사좌이다. 비문은 제남(濟南) 하경락(河經洛)이 짓고. 행장은 창계(滄溪) 김수(金銖)가 짓고, 묘갈명은 중재(重齋) 김황(金榥)이 지었다.
우로부터 金榥(김황), 柳寅響(유인향), 吳政植(오정식), 朴贊殷(박찬은), 權虎鉉(권호현), 金昌浩(김창호)
■ 김황(金榥, 1896~1978)
본관 의성(義城)이며 자 이회(而晦), 호는 중재(重齋)이다. 일명 우림(佑林)으로도 불리며 동강 김우옹의 후손이다. 그의 부친은 유학자였던 매서(梅西) 김극영(金克永)이다. 경상남도 의령(宜寧) 어촌리에서 출생하였다. 1910년 국권이 피탈되자 아버지를 따라 경상남도 산청군 황매산(黃梅山) 만암(晩巖)이라는 산골로 이사하여 독서에 전념하였다. 당시 한주학파(寒洲學派)의 주리학(主理學)을 대표하던 면우 곽종석(郭鍾錫)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문명을 떨쳐 그 학통을 계승하였다. 1919년 고종의 인산(因山)에 참여하였다가 김창숙(金昌淑)을 만났고, 파리강화회의에 파리장서(巴里長書)를 보내기로 결의하였다.
그러나 김창숙이 장서를 가지고 상하이[上海]로 떠난 후 일본 경찰에게 발각, 제1차 유림단사건(儒林團事件)으로 옥고를 치렀다. 1926년 동문들과 『면우집(俛宇集)』을 간행하면서 독립운동자금을 적극적으로 모았다. 그들이 김창숙에게 건네준 거액의 자금이 동양척식주식회사 투폭(東洋拓殖株式會社投爆) 등 독립운동에 사용된 것이 드러나 제2차 유림단사건으로 9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1928년 산청군 내당촌으로 이사하여 강학(講學)을 시작하였는데 그 후 50년 동안 1,000명의 문도(門徒)를 배출하였다. 8·15광복 후에도 대학생·교수들이 몰려와 내당서사(內塘書舍)는 한때 전국 유림의 중심이 되었다.
그는 동서고금의 모든 학문을 광범위하고 치밀하게 섭렵, 한주학파의 ‘심즉이설(心卽理說)’을 기반으로 하는 도학(道學)을 정립하였다. 일제강점기에 창씨개명을 단호히 거부하고 끝내 보발(保髮)하여 끝까지 도학의 전통을 지키는 마지막 유종(儒宗)의 모습을 보였다. 1978년 12월, 그가 죽자 조객이 운집하였고, 장례는 유월장(踰月葬)으로 지냈다. 저서로 《쇄기(鎖記)》 《사례수용(四禮受用)》 《동사략(東史略)》 《익붕당총초(益朋堂叢鈔) 》 등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김황 [金榥]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첫댓글 오랜만에 그리운 산친구들을 만나 시상에 빠지셨군요.
여유로움과 편안함이 없으면 나올수 있는 시상이 아닙니다~^^
여명 도사님의 숙제는 인문산행으로 채우셨겠네요.
먼길 수고하셨습니다♡
그리운 님을 청이당에서 만났습니다.
저와 산행하면 밥솥을 가지고 온다고 하시네요.
전날 비가 오지 않아 운해는 만족스럽지 못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