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도 임당리 김씨고택(淸道林塘里金氏故宅/중요민속문화재 제24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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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씨고택배치도(자료출처:청도 임당동 내관가에 대한 연구)
임당리 김씨 고택은 일반 집과는 다른 내용이 있는 집이다. 이 집은 내시 집안의 집이다. 내시 집안의 집이다보니 다른 곳과는 다른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주목받는 집이다.
조선이 개국되자 내시에 대한 규제를 하자는 상소가 들어온다. 이것은 고려시대 원나라를 등에 업고 내시가 횡포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어쨌든 조선조에 들어와 내시의 권한은 매우 약화된다.
내시는 최고 우두머리는 종 2품 상선尙膳으로 경국대전 규정으로는 2명이다. 조선시대 내시는 자하동파와 관동파로 나뉘어 다투었다고 한다. 관동파는 동대문 밖에 살면서 창동과 월계동을 근거지로 삼았고, 자하동 파는 서대문밖, 양주 삼상리 인근을 근거지로 삼았다고 한다. 이 두 계파 중 관동파가 좀 더 우세하였다고 한다.(청도 임당동 내관가에 대한 연구)
내시들도 결혼해서 가정을 꾸린다. 그런데 내시는 어떻게 가계를 이어갈까. 일반인들은 같은 집안에서 양자를 들이고 있다. 그러나 내시의 경우는 다른 집안일 경우도 가능하다고 한다. 상기 논문에 의하면 이 가문의 세계世系 중 같은 성씨를 입양한 적은 없다. 어쨌든 이 집안은 이곳을 세거지로 삼아 20대를 살아왔다.
앞서 언급한 논문을 살펴보면 17세인 김문선(1881-1953)까지는 타성으로 이어져온 내시집안이었다. 그러나 18세인 김진우(1901生)부터 20세까지는 의성 김씨로 이어진다. 김진우는 의성 김씨인 김호은의 四男으로 조카인 판득을 19세로 입양하였고, 20세인 김수훈은 김판득의 아들이라고 한다.
이를 보면 조선 왕조가 무너진 이후인 18세 부터는 내시집안이 아닌 정상적인 일반인 집안으로 가계가 이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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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니동 내시집(자료출처:한국주택건축)
논문에 의하면 1800년대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가계를 보면 15세 김병익(1842-1925)이 상선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 집도 이때에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당시에는 서울 돈암동(22칸)에도 한 채, 종로에 두 채가 있었다고 한다. 이 집 외에도 <한국주택건축>에 의하면 서울 운니동에도 내시 집이 있었다.
이 집은 북서향을 하고 있다. 이것에 대해서 <청도 임당동 내관가에 대한 연구>에서는 “왕을 근시近侍하는 내관으로서 서울의 궁궐을 향한 그의 단심丹心이 건축적 표현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했다. 또한 이 논문을 인용한 것으로 보이는 문화재청 사이트에서도 같은 의견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데 전체적인 마을의 배치 그리고 앞에 흐르는 동창천의 흐름과 뒷산의 흐름을 볼 때 지금의 배치가 안정적 배치로 보인다. 주변 마을의 집도 이런 흐름을 보이는 집이 몇 있다. 그러므로 임금을 향하는 마음이라기보다는 배산임수에 맞춘 배치가 아닌가 한다.
이 집 사랑채 배치에서 일반 집과는 다른 점이 보인다. 보통 사랑채는 안채전면에 배치한다. 사랑채를 전면에 一자로 배치하고 뒤에 안채를 배치하거나 안채와 평행되게 두고 안채 앞에 행랑채를 두고 뒤쪽에 안채를 배치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이 집에서는 중문 옆에 중사랑채를 배치하고 안채를 중사랑채 뒤쪽에 중사랑채와 직각으로 배치했다. 문제는 이 집의 얼굴이라고 할 수 있는 큰 사랑채이다. 큰 사랑채는 본채와 떨어져 대문간채를 바라 볼 수 있는 위치에 배치했다. 그리고 안채는 담으로 완전히 감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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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채/중문/중사랑채(마당에 물이 차있는 모습이 보임)
사랑채 배치는 다른 집과는 달리 드나드는 사람을 감시하려는 배치라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일반 집에서 사랑채는 중문 옆에 있는 것이 대부분이고 중문과 평행으로 배치하기 때문에 앞마당을 지나 중문을 들어간다는 의미 밖에는 없다.
그러나 이 집에서는 대문과 중문을 제대로 살펴볼 수 있는 배치이다. 즉 내시가의 배치는 결국 여자에 대한 단속에서 그 특징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내시라서 부부관계를 가질 수 없으니 그것에 대한 단속이 가장 중요했을 것이다.
안채 배치는 ‘ㅁ자’ 배치이다. 안채는 전면 다섯 칸 반 측면 두 칸 반의 규모이다. 몸채측면은 두 칸이고 전면에 퇴칸을 두고 뒤쪽으로는 부엌 쪽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에 반 칸을 더 내었다.
조선 후기 들어 점점 집 규모가 커 가는데 주로 건물의 깊이를 더해가는 것이 특징이다. 이런 점에서 이 집도 조선후기의 특징을 보이고 있다.
논문에 의하면 88년도 조사 때는 분합문 없이 유리 창문이 달려있었고, 처마에 아연도 처마홈통을 설치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것은 다 철거된 상태이다. 그리고 현재 대청 문이 지금은 이분합문인데 과거 조사에는 삼분합문의 흔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삼분합문이 가운데는 열리지 않고 양옆만 열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논문에서는 이런 개폐방식이 안채의 폐쇄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어쨌든 지금의 형태가 과거의 모습을 정확히 반영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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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채 전경
안채는 맞배지붕이고 간략화된 직절익공집에 삼량이고, 대공은 원형이다. 이런 대공이 조선 후기에 유행하는데 일반 판대공과는 구조가 다르다. 판대공은 판재 여러 개를 붙여 만드는데 이렇게 만드는 것은 큰 판재는 쉽게 변형되므로 변형을 적게 하기 위해 작은 판재를 여러 개 붙여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이 집의 대공은 아래는 반원형 위는 원형이 붙어있는 형태인데 한판으로 만들었다.
큰 사랑채는 팔작지붕으로 안채와 같이 간략화된 직절익공집이다. 오량집으로서 기둥은 원기둥이다. 정면 4칸 측면 한 칸 반으로 전면은 퇴칸을 두고 후면에는 반 칸 정도의 툇마루를 두었다. 4칸 중 두 칸은 대청이고 두 칸은 방으로 만들어졌다.
사랑채에서 방 앞쪽 퇴칸에는 반자가 있다. 다른 집에서는 보기 힘든 모습이다. 이렇게 반자가 있는 것은 그리 흔치않다. 반자가 있는 경우가 기억나는 것은 고성의 어명기가옥, 근대에 지어진 윤보선생가정도이다. 이렇게 반자를 올리는 것은 천정을 넓게 쓰기 위함일 것이다.
이 집에서 중사랑채는 전면 3칸 측면 두 칸의 겹집구조이다. 중문쪽 2칸은 안채 쪽으로는 방을 꾸미고 전면 두 칸은 마루로 만들었다. 그러나 사당 쪽 한 칸은 이와 반대로 되어 있다. 이렇게 된 것은 논문에서는 후면에 있는 안채를 감시하기 위함이라고 했다. 그러나 문의 위치나 깊이로 보면 안채를 감시할 목적으로 만들었나 하는 생각이다.
중문 쪽 방은 안채로 통하는 쪽문이 있다. 그러나 사당 쪽에 배치된 방까지 이렇게 만들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사당쪽 방을 뒤로 물려 전면 3칸을 모두 마루로 만들면 사당이나 다름없는 구조이다. 입면의 변화를 위해서도 방이 앞으로 나올 필요가 있다. 또한 뒤쪽 마루로는 중 사랑채에 있는 두 방에서 모두 나올 수 있게 문이 설치되었다.
(현재 큰 방에서 나오는 문은 논문에 의하면 막혀있던 것인데 다시 복원하면서 설치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모습으로 볼 때 중문 쪽에 있는 방 뒤쪽에 있는 문은 간단히 다과상을 들이는 목적으로 사용된 것이라고 볼 수 있고 뒤쪽에 있는 마루는 중사랑채에 있는 두 방에서 편하게 안채로 이동하게 위한 목적으로 설치된 것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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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문/중사랑채 담장/사당
중사랑채 중문 쪽에는 나지막한 담이 있다. 외부에 중사랑채를 보지 못하기 하기 위한 목적이라고 보는데 사랑채의 성격상 이런 담이 설치되어 있는 의문이다. 내가 본 중사랑채에 이런 담이 설치된 것을 보지 못했다. 내외담도 아닌 것은 분명한데 왜 이렇게 담을 만들었는지 모르겠다.
이 집에서 눈에 띄는 부분은 곳간이다. 안채는 두 채의 곳간이 있다. 안채 전면의 곳간은 4칸인데 깊이가 깊다. 다른 건물로 보면 측면이 한칸 반 규모이다. 그리고 맨 끝 한 칸은 디딜방앗간이다. 디딜방아를 놓은 받침대가 돌로 만들어졌는데 정확하게 치석한 모습이 인상적이다. 이렇게 잘 만들어진 받침대는 처음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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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딜방앗간
측면에 있는 곳간은 정면 6칸 반, 측면 두 칸 규모이다. 좌측 끝 부분 반 칸은 측간이고 4칸은 곳간이고 나머지 두 칸은 뒤주와 고방으로 되었다. 측면 고방은 측면이 두 칸이니, 전체로 보면 곳간만 11칸이다. 이렇게 곳간이 넓다는 것은 이 집이 대단한 부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눈에 띄는 것은 부지가 건물 규모에 비해 너무 넓다는 것이다. 솔직히 이렇게 넓을 필요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넓다. 안채의 안마당도 넓다. 안마당이 넓은 것은 이해하지만 마당이 이렇게 넓을 필요가 있는지.... 그렇다 보니 전체적으로 집배치가 짜임새가 없어 보인다. 사랑채는 덩그러니 혼자 외톨이같이 서있다. 뒤쪽에 담이라도 있었다면 이렇게 허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뒤쪽이 무엇으로 쓰였는지는 모르겠지만 텃밭이라도 이렇게 만들 필요가 있었을까.
이 집을 돌아보면서 내시가로 시집온 여자들의 삶이 어떠했을까 하는 점이다. 내시와 결혼한다는 것은 여자로서의 많은 것을 포기한다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남녀관계를 포기해야 하는 삶이었다. 그리고 자기 핏줄도 아닌 사람을 부모로 모시고 그리고 자식으로 거느려야 한다. 이렇게 사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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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 못
추 기 :
1. 지금 이 집은 관리상 심각한 문제가 있다. 현재 대문간에서 중문으로 들어가는 곳에는 돌로 징검다리를 놓았다. 마당은 온통 물구덩이다. 내가 간 때 비가 오락가락했지만 주변에 둘러진 구거마다 물이 넘쳐난다. 마당보다 낮은 곳에 위치한 안채 부엌은 물이 가득 차 있었다. 이런 현상은 지하수위가 변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하수위는 비가 많이 오는 때는 올라간다. 앞마당에 물이 괴인다는 것은 지하수위가 거의 마당 높이까지 올라왔다는 것이다. 왜 그랬을까. 이 집을 지을 당시는 전혀 이런 일이 없었을 것이다. 일제 강점기까지... 아니 앞서 말한 논문 때문에 이곳을 답사했던 88년까지 사람이 살았으니 그때까지 지하수위가 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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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이 찬 부엌
이런 지하수위의 변화의 이유를 살펴보면 운문댐으로 인해 만들어진 운문호때문일 가능성이 제일 높다. 운문댐은 1996년에 완공되었다. 운문호의 수위가 이곳보다 높으니 주변 지하수위를 높이는데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댐을 만드는 것은 좋다. 그러나 댐이 주변 환경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살펴보아야 하지 않았을까...
이 집을 보면서 사대강 주변에 습지가 많아진다는 뉴스가 떠오르는 것은 웬일일까...
2. 논문에 의하면 18세 김진우는 우체국을 기증하고 또 면사무소와 지서를 건축할 대지를 기증하는 등 금천면의 발전에 공헌하였다고 한다. 김진우는 1901년생이다. 이 땅을 언제 기증했는지 모르지만 일제강점기때 기증했다면 무슨 의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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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주변 항공사진(자료출처:다음지도)
참고 문헌
淸道 林塘洞 內官家에 관한 연구/김일진, 이호열/대한건축학회논문집 4권6호 통권 20호/1988년 12월
韓國住宅建築/주남철/일지사/1980년
문화재청 사이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내시편
인터넷 조선왕조실록
첫댓글 중사랑채 중문옆 낮은 담? 바로 옆 판벽에 구멍을 내어 자신을 감추고 사랑채를 출입하는 사람을 살피기 위한 것 아닌가요?
자신을 감추고 살피기 위한 것이라면 판벽 정도로도 충분하다고 봅니다. 높이가 너무 애매해서...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축구얘기 고건축 얘기 읽어도 머리에 쏙쏙 안들어오니 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