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날 이야기 : https://m.cafe.daum.net/jayuschool/HC6M/928?svc=cafeapp
지난 이야기에 이어 둘째 날 이야기를 들려드리기 위해 다시 왔습니다 ㅎㅎ
첫째 날 광주로 이동해서 국립518민주묘지, 옛 전남도청, 전일빌딩245를 함께 다닌 뒤 모둠별로 흩어져서 광주 곳곳을 다녔는데요.
첫 날부터 바빴던 일정 덕분에 그 날 밤 아이들은 일찍 잠이 들었습니다.
둘째 날 아침, 아이들은 떠지지 않는 눈을 부비며 일어나 공터에 다같이 모였습니다.
힘찬, 하루와 함께 스트레칭을 하며 웅크려있던 몸을 쭉쭉 펴며 새로운 하루를 맞이할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오늘의 일정도 듣고 모둠별로 식재료도 받아갔죠. 아침은 짜장밥, 점심은 오월 항쟁을 상징하는 오월주먹밥, 저녁은 카레!
자는 것도, 밥 먹는 것도 모둠끼리 함께하며 6,7,8,9 모두 섞여서 서로 더 친해지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밥까지 든든하게 먹고 일정을 위해 움직였는데요. 둘째 날은 꿈터가 다같이 활동하는 날이라 40명이 대이동을 하는 날이었죠.
그래서 고양 모둠, 학교 모둠 / 자유 모둠, 꿈터 모둠 이렇게 2 모둠씩 따로 버스를 타고 움직였습니다.
힘겹게 버스를 타고 도착한 첫번째 장소는 바로 <오월어머니집> 입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다시피 오월을 보낸 어머니들이 계시는 공간인데요.
이곳은 오월 항쟁에 참여하셨던 분들, 자식이나 부모 혹은 형제 등 가족을 잃으신 분들, 부상을 입으셨던 분들 등 오월을 겪은 ‘여성’분들로 이루어진 곳입니다.
실제로 거주하시는 곳은 아니지만 누구든 집처럼 편하게 오고 갈 수 있도록 ‘집’이라고 이름 붙이셨다고 해요.
이곳에서 어머님들은 서로의 상처를 나누기도 하고 518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투쟁을 이어가거나 여러 봉사활동을 하기도 하고,
혹은 그림 그리기나 요가 같은 취미활동을 즐기기도 하며 공동체를 이루고 계셨습니다.
이곳에서 아이들은 어머님들의 이야기를 직접 듣는 귀한 시간을 가졌는데요.
오빠를 잃었는데 엄마가 자식을 잃은 설움에 돌아가시기 전까지 오빠를 찾으며 우셨다는 이야기,
남편을 잃고 그 시절 여자 혼자 아이들을 키우며 고생하셨던 이야기,
아빠를 잃고 아버지의 정을 알지 못하고 살았던 이야기,,,
모두가 가족을 잃은 채 외롭고 악착같아야 했던 그때의 이야기들을 해주셨습니다.
이토록 많은 이들에게 상실을 경험하게 만든 잔인했던 오월에 다시금 분노하고 슬퍼할 수밖에 없던 시간이었습니다.
아이들의 질문을 받는 질의응답 시간도 있었는데요.
사실 꿈터 아이들이 아무래도 적극적인 나이대는 아니잖아요...? 그렇다보니 질문이 없어서 교사들이 대신 질문을 하기도 했는데요.
힘겨운 세월을 버티고 이겨내신 어머님들에 대한 존경과 감사를 표하며 아이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를 묻기도 했고요.
저는 광주 살면서 어렸을 적 와봤던 경험을 이야기하며 아이들이 오월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지를 묻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한 친구가 질문을 했는데요.
실제 경험하신 분들과 이야기만 듣는 우리는 받아들이는 게 다를텐데, 우리가 어떻게 오월을 알고 인식하고 배우면 좋을지 물어보았습니다.
어머님은 아이들의 질문을 너무 반가워하며 답해주셨는데요.
오월을 궁금해하고 묻는 자세만으로도 충분하다고 하셨습니다. 그 다음에는 나에게 오월이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보라고 하셨습니다.
외우거나 따라 읽는 게 아니라 내가 생각하는 오월은 무엇인지 스스로가 정립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셨습니다.
저에게도 참 어려운 질문이었는데요. ‘나에게 오월이란?‘ 묵직한 질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아이들에게도 어려워서 엄두가 안 나는 질문이었을 수 있겠다 싶습니다. 그렇지만 이번 들살이를 통해 오월을 깊이 들여다보는 경험이 남는다면
굳이 질문을 던지지 않더라도 각자의 몸과 마음에 자연스레 스며드는 나만의 오월이 만들어지리라 생각합니다.
대화의 시간을 마치고 어머님들께 우리가 준비한 선물을 드렸는데요. 아이들이 직접 손으로 만들어낸 수세미, 배지, 팔찌 같은 선물과 정성껏 작성한 편지까지.
크고 화려하지는 않지만 아이들의 정성이 담긴 선물을 어머님들이 더 크고 값진 마음으로 기쁘게 받아주셨습니다.
이후 공간을 둘러보고 어머님들이 직접 그리신 그림도 구경하며 시간을 마무리했습니다.
아쉽지만 오전 일정을 마무리하고 다시 길을 떠났는데요. 지하철을 타고 운천역으로 갔습니다.
운천저수지 공원에서 동글동글 싸 온 오월주먹밥을 먹고 잠시 쉬는시간을 가진 후 <광주트라우마센터>로 향했습니다.
광주트라우마센터는 국가폭력 피해자와 그 가족의 트라우마를 치유하기 위한 곳으로서 일반적인 상담센터와는 성격이 다른데요.
518 뿐만 아니라 여러 국가폭력으로 피해 입으신 분들을 대상으로 치유프로그램이나 강좌를 열고
더이상 이런 국가폭력이 벌어지지 않도록 예방 교육이나 증언 프로그램, 기록물 제작과 보관 등을 하는 곳입니다.
최근 국립으로 전환되면서 국군광주병원 터(518사적지) 주변으로 새롭게 건립 중에 있습니다.
아직 건물을 옮기기 전이라 저희는 원래 건물로 갔는데요.
트라우마센터는 40명을 한꺼번에 수용하기에는 공간이 좁아서 같은 빌딩의 대강당을 미리 대관해주셨습니다.
강당으로 들어가자마자 아이들이 감탄을 쏟아냈습니다. 미리 자리마다 간식과 기념품을 준비해주시고 직원분들이 나와서 직접 맞아주셨습니다.
너무 크게 환영해주시고 많이 준비해주셔서 괜스레 죄송할 정도였는데요.
쉬는시간에 따로 감사하단 말씀을 드렸더니 “멀리서 와 준 것만으로도 감사하다, 아이들이 좋은 기억으로 가져갔으면 좋겠다.” 말씀해주시더라고요.
덕분에 아이들이 자리에 앉는 순간부터 기쁜 기억으로 남길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트라우마센터에서는 크게 2가지 활동을 했는데요. 국가폭력 트라우마와 관련된 강의, 그리고 518희생자 증언이었습니다.
강의에서는 팀장님이 직접 나와서 아이들에게 재미있게 그리고 너무 무겁지만은 않게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일상에서 만나는 폭력과 국가폭력의 차이점, 트라우마란 무엇인지, 트라우마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대처할 수 있는지 등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리고 스트레스 받고 몸과 마음이 지칠 때 스스로를 어떻게 돌보면 좋을지, 그럴 때 할 수 있는 스트레칭도 가르쳐주셨답니다ㅎㅎ
강의를 마치고 잠시 쉬는시간을 가진 후 증언 프로그램이 시작되었는데요.
이 날 아이들에게 증언을 들려주기 위해 시간을 내주신 분은 김길자 여사님이셨습니다.
아이들과 1학기 때 518 수업을 진행하며 읽었던 책 <소년이 온다>의 실제 주인공인 故 문재학 열사의 어머님이자
자식의 죽음 이후 518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투쟁한 또 한 명의 열사이기도 하십니다.
여사님은 일부러 아이들을 만나기 위해 정장치마를 입고 오셨는데요. 일찍부터 오셔서 아이들이 강의 듣는 모습부터 옆에서 지켜봐주셨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되자 앞으로 나와 자리에 앉으셨고 떨리지만 힘있는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하셨습니다.
재학이가 집에 안 들어와서 나중에 찾으러 가봤더니 친구를 찾더라,
가자고 했더니 친구(초등학교 동창) 이름을 대며 “OO이가 죽었는데 어떻게 그냥 가요?” 하더라,
그 말이 맞기도 해서 차마 못 데려왔다,
계엄군이 쳐들온다던 날 오늘은 와야된다 했더니 “학생은 손 들고 나가면 괜찮다 해요.” 말하더라,
담담히 그 날의 이야기를 풀어내셨습니다.
그 날 밤 총성이 광주 전역을 휩쓸었던 이야기,
다음날 선생님이 찾아와 시신이 모여있는 곳에 가보자던 이야기,
그곳에서 재학이 시신을 찾았는데 본인이 보기에는 아무리 봐도 재학이가 아닌데 다들 재학이가 맞다고 했다는 이야기,
그렇게 재학이를 하루아침에 땅에 묻었던 이야기,
정부에서 나와서 희생자들에게 배상금을 주는데 재학이는 폭도로 참여한 거라 돈을 받을 수가 없다고 했다는 이야기,
그 말을 들은 남편분이 그깟 돈 줘도 안 받는다며 왜 우리 아들이 폭도냐고 맞서 싸우셨다는 이야기.
사실 이 때 들은 이야기는 어떻게 옮길 수 있을지, 제가 어떤 미사여구로 옮겨도 감히 그래서는 안 될 것 같아서 글을 쓰면서도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아들의 이야기를 하시면서 여사님은 작게 한숨을 쉬셨습니다.
잘 들리지도 않을만큼 작게, 마치 속으로 들이키듯 힘겹게 토해내는 한숨을 쉬시면서도 끝까지 이야기를 이어가셨습니다.
아들을 묻고 난 이후 여사님은 달라지셨다고 합니다. 길 걷다가도 남자들이 있으면 수줍어하실 정도로 여린 성격이셨는데 그 날 이후 달라졌다고.
시위에 나서서 여기저기 다니다가 경찰차에 실려 어느 시골에 버려지기도 하고, 그럴 때면 함께 간 다른 어머님들이나 희생자 가족들과 다시 또 돌아오고,
서울까지 나가서 직접 쓴 현수막을 펄럭이며 경찰서에 끌려가기도 하고, 그 때 경찰서에서 무전기에 맞아서 피를 흘리는 사진을 보여주시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지금 우리의 삶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경험을 직접 전해듣는 시간이었습니다.
국가로부터 안전할 수 없던 시절, 국가에 맞서 싸워야 했던 시절, 돈도 권력도 없지만 어머니이기에 뭐든 할 수 있었던 시절.
그 시절을 보내고 돌고 돌아 다시금 아들의 이야기를 하는 지금. 여사님이 전해주신 이야기는 우리 모두에게 오래 남을 것 같습니다.
여사님의 짧고도 긴 이야기가 끝이 나고 마무리를 하며 저희들의 선물을 전해드렸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감동받아하시면서 기꺼이 받아주셔서 너무 감사했습니다.
선물 전달까지 마치고 단체사진을 찍었는데 감명깊게 들은 몇 몇 아이들은 먼저 여사님께 달려가 인사하고 안기기도 했습니다.
할머니~라고 친근하게 부르며 말을 거는 친구도 있었고, 펑펑 울며 감사하다면서 한참을 안겨있는 친구도 있었습니다.
모든 아이들이 같은 반응, 같은 감정은 아니었겠지만 각자의 방식과 감정으로 이야기를 듣고 가슴에 남긴 것 같습니다.
슬픈 이야기에 슬퍼하고 분노할 이야기에 분노하는 것. 스스로를 드러낸다는 것도 아이들에게 중요한 과정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알차고 바쁘게 지나갔던 하루를 뒤로 하고 아이들 모두 숙소로 돌아왔습니다.
아침과 마찬가지로 두 모둠씩 나눠서 움직였는데 고양 모둠과 학교 모둠이 탄 버스가 노선이 꼬이면서 한참을 늦게 도착하는 상황이 되고 말았습니다.
준비했던 공동체 놀이를 취소해야 하나, 아이들 저녁은 어떻게 먹나, 고민이 많았는데 다행히 옆 모둠에서 남은 카레와 밥을 보태주었습니다.
늦게 온 모둠도 씻는 친구, 음식 준비하는 친구, 뒷정리하는 친구 나눠서 빨리빨리 움직인 덕분에 무사히 저녁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두 모둠이 늦은 저녁식사를 하는 동안 관리사무소에서 밤이 깊었으니 조용히 해달라는 당부를 들었는데요.
캠핑장을 뛰어다니며 시끄럽게 놀고 있는 아이들의 에너지는 멈출 줄 몰랐죠ㅎㅎ
아이들을 데리고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 위해 작전을 좀 썼습니다~ “담력훈련 할 사람?” 외치자마자 “저요,저요” 하면서 따라오더라고요ㅎㅎ
마치 피리부는 연두와 딸기가 된 심정으로 아이들을 이끌고 캠핑장 구역 너머에 있는 산책로를 따라 걸었습니다.
그냥 산책만 했을 뿐인데 알아서 서로를 놀래키기도 하고 나무 그림자에 혼자 놀라기도 하며 아이들은 잘 놀았습니다^^
그렇게 한바탕 담력훈련을 빙자한 산책을 마치고 돌아오니 다른 모둠의 저녁식사도 끝이 났습니다.
비록 시간은 늦었지만 광주 들살이의 마지막 밤을 그냥 보내기에는 아쉬워서 꿈터 다같이 모였습니다.
서로 고생했다 박수도 치고 마무리하는 소감도 짧게 발표하고. 무엇보다 우리 모두 기다린(?) 공동체 놀이를 했습니다.
바로 보물찾기! 각자의 이름이 적힌 쪽지를 가장 많이 찾아 온 모둠이 이기는 것이었는데요.
아이들은 공동체놀이 하기 싫다면서 엄청 귀찮아했는데 막상 보물찾기를 시작하자마자 엄청난 집중력으로 쪽지를 찾기 시작했습니다ㅎㅎ
우승은 고양 모둠!! 고양 모둠에게는 상품으로 샤인머스켓이 주어졌습니다 ~
모든 모둠이 저녁 간식으로 사과를 나눠먹었고, 고양 모둠이 나눠준 샤인머스캣도 먹으며 광주 들살이를 마무리했습니다^^
2박동안 꿈터 40명이 다함께 광주를 다녔던 이번 들살이는 무척 특별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시끌벅적 특별했던 2박을 마치고 두레별로 작게 떠난 남은 들살이는 더 허전하기도 하고 익숙하기도 했을 것 같습니다.
셋째 날 아침, 8학년이 새벽에 가장 먼저 떠나고 아침에 9학년, 7학년, 6학년 순으로 정들었던 캠핑장을 떠나왔습니다.
두레 들살이에서도 아이들이 광주 들살이에서의 일들을 계속 이야기하더라고요. 그만큼 아이들에게도 기억에 많이 남는구나 싶었습니다.
소중했던 이틀로, 즐거웠던 이틀로 아이들 마음 속에 남았기를 바라며 드디어 광주 들살이 2박 3일의 이야기가 끝이 났습니다!
하지만.... 누리집에 올리는 글은 아직 하나가 더 남았습니다...ㅎㅎ
미처 못 나눴던 아이들 남은 사진들과 들살이 전후 준비 작업과 마무리 작업까지. 한 편의 글을 더 이어서 올리려고 합니다.
마지막 글까지 많이들 읽어주세요~ 감사합니다^_^
첫댓글 절이고 먹먹한 마음으로 읽었어요.
친구, 선후배, 선생님들과 함께라 더 오래 기억될 값진 시간이었을것 같습니다.
오늘따라 쌤들과 아이들이 더 자랑스럽네요^^
감사합니다!!
오월어머니집에서
세월호 당시 팽목항을 찾아가시고 10.29 참사 희생자 어머니를 만나 안아주고 함께 울어주셨던 이야기가 기억에 남아요.
오월 어머님들만 할 수 있는 공감과 위로의 시간..
트라우마센터 김길자 어머님의 증언은..
글로(책과 기사) 읽었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그 숨소리, 걸음과 표정 하나하나
그 자체로 역사인 분의 이야기 들으며
숨 쉬는 게 어색, 어려워지는 먹먹함을 느꼈습니다..
저 또한 더 깊게 5.18을 만난 2박 3일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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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정에 특히 연두, 고생 많으셨습니다! 고마워요~~
어머님들의 이야기를 듣고, 짧지만 진심인 이야기를 드리며. 어머님들께서는 우리 아이들이 광주에 찾아와주고, 이후에도 기억해줄 것을 고마워하셨는데 그 장면이 오래 기억에 남아요. 김길자할머니께서 전해주시던 이야기들. 광주에서 내내 아이들 사진과 영상을 담았는데, 들살이 마치고도 여러 번 김길자할머니의 이야기를 다시 틀어보게 되었고.. 아이들이 준비했던 작지만 정성이 담긴 선물을 받고 웃으시던 모습들도 오래 기억에 남을 겁니다..
함께 들살이의 마지막 밤, 짧지만 그래도 우리끼리의 놀이 시간을 가질 수 있어서 그것도 좋았네요.(들살이에서 상품으로 샤인머스캣을 먹을 수 있어서 너무 너무 좋다며 해맑게 웃던 임모군 미소도 그립네요~ ㅎㅎ) 이제 광주 이야기를 뒤로 하고 3일차 새벽부터 해남으로 떠난 8학년 이야기도 곧 올려야겠어요.
아이들에게도 그렇겠지만 제게도 특별했던 광주 들살이, 함께 다녀온 쌤들께도 참 고마웠습니다.
저도 재작년인가 5.18 교사 연수를 갔을 때 트라우마센터에서 들었던 생존자 증언이 가장 머릿속에 오래 남았었어요. 정신 이상증세까지 겪게 된 분이셨는데 온몸으로 실감을 느끼고 같이 울컥하기도 했던….
글을 읽으면서 옆에 있던 아이에게 “오월엄머니집에서 어땠어?”, “광주트라우마센터에서는 어땠어?” 라고 물었더니 “그냥 그랬어.” 라고 대답하는 무뚝뚝한 아이에게도 뭔가 찡하게 다가오는 것이 분명 있었겠죠? 있었을 거예요. 있어야만 해요…ㅠㅠ
들살이 직후 꿈터 참관을 시작해서 아이들의 소감 발표와 이야기를 들었었는데, 연두께서 자세하게 정리해주신 글을 보니 더 많이 와닿습니다:) 광주의 이곳저곳을 보고 듣고 느끼며 아이들이 많이 채워지는 시간이었을거 같아요. 1편도 2편도 이야기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연두:)
광주에서 제법 가까운 거리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는데… 성인이 되서야 광주 이야기를 들었었죠… 얼마나 무서웠을까… 들살이에서 들은 이야기를 아이들 가슴에 잘 간직하고 잊지 않길~
어찌 잊을수 있겠습니까..
아직도 기억나는것은 그분들의 상처와 아픔들이...그 분들에게 끝나는 것이 아니라..다른 사람들의 상처와 아픔을 공감 할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이 아직도 기억에 남습니다..
오월 어머니회 어머니들 께서도 그 이후로 다른 아픔을 지닌 사람들을 위로해주고 찾아가는 일들을 지속적으로 하고 계시다는 것이...
감동이 되었고 많은것을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김길자 어머니의 육성 또한.....또렷이 기억이 납니다... 그 아픔을 그 트라우마를 이겨낼수 있는 힘을 찾으셨다는 것 힘들지만, 용기를 내고 이야기 함으로 아픔도 치유 될 수 있었다는 말씀..
... 함께 해줘서 너무 감사합니다...고양자유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