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온 지 불과 몇 달 만에 드러난 건강 이상은 갖가지 노력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회복이 잘 되지 않았다. 하루 살아가는 것도 힘든 한국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또 다른 짐이 된다는 부담감에, 그는 주교와 합의하여 미국으로 요양을 떠나기로 결정했다.
본격적인 활동을 위해서는 신속하게 병을 고쳐야 하기에 결정한 조치였지만, 교구 재정이 넉넉하지 않아 미국행 항공료를 마련할 여력이 없자, 알로이시오 신부는 부산에 있던 어느 미국 선박회사 사무실을 찾아가 미국인 선장에게 자신의 딱한 사정을 설명하였다. 그리하여, 비록 여객선은 아니었지만 샌프란시스코행 화물선에 무임 승선할 기회를 얻었다.
13일간의 태평양 항해 도중, 고르지 않은 날씨와 태평양의 거친 파도와 씨름할 때는 과연 무사히 도착할 수 있을지 걱정도 했지만, 그는 하느님의 계획을 믿으며 화물선의 너른 갑판 위를 즐겼다.
미국에 도착한 후, 마음이 초조한데 건강은 잘 회복되지 않아 예상보다 오래 머물게 되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이 시기는 세상을 큰 안목으로 바라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고 새로운 차원의 하느님 시업을 구상하기에 좋은 시간이 되었다.
그는 너무나도 가난한 한국 사람들과 부러울 것 없이 모든 것을 누리는 미국 사람들과 비교하며, 온 세상의 구원을 바라시는 하느님의 마음을 생각하였다.
‘어떻게 하면 이들을 한 형제로 묶을 수 있을까?’
그는 미국에서 무력하게 보내는 시간이 무척 아깝게 느껴졌다. 그래서 한국 사람들에게는 외부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호소하기 위해, 한국에서 찍어 온 사진들을 모아 서둘러 모금 활동을 시작하기로 결심하였다. 모금이야말로 미국에 있으면서 한국을 돕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사제품을 받은 워싱턴대교구에서는 모금을 금지하는 바람에, 먼 거리에 있는 다른 교구의 성당과 수도원, 학교 등을 ,돌며 자선을 호소하였다.
모금 여행의 성과는 기대보다 훨씬 좋았다. 타고난 열정으로 한국에서 보았던 가난한 생활을 실감 나게 소개한 알로이시오 신부의 이야기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 그들의 지갑을 열게 했다.
부유한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 모두에게 사랑의 통로가 되었던 이 모금활동은 미국사람들에게도 하나의 새로운 신앙적 사건이 되었다. 그러면서 순식간에 ‘한국 자선회’라는 조직으로 발전 되었고, 이 자선회 후원금은 알로이시오 신부의 구호 사업에 가장 튼튼한 기초가 되어 주었다.
한편, 적극적인 모금 활동은 미국 주교들의 비판 적인 의견을 불러 일으켜, 급기야 교황청으로부터 모금 중지 명령 통보를 받게 되었다. 이에 알로이시오 신부는 교황청에 가서 이 일의 의미를 직접 설명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고는 로마로 찾아가 교황청 포교성성 (현 인류복음화성)장관을 만났고, 이 면담을 통해서 성령의 이끄심을 따라 행동하는 선교 사제의 참된 열정을 보여 주었다. 그래서 오히려 의외의 지지를 받는 정반대의 효과를 얻게 되었다. 무엇을 말할지 어떻게 말할지 오직 기도로써 성령께 의탁하려한 그의 자세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참으로 닮아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의구심을 품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당당히 자신의 길을 갈 수 있었던 것이다.
2년간의 미국 생활을 통해 그의 건강은 다시 좋아졌다. 그동안 열심히 모은 통장을 들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당시 부산교구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 중 하나였던 송도 성당의 사목을 자원하여 본격적으로 가난한 이들에게 사랑을 전하기 시작하였다. 도움이 필요한 곳은 수없이 많았으나, 우선 순위를 결정하는 기준은 언제나 엄격하고 분명하였다. ‘가장 가난한 자에게 가장 먼저’지속적인 사업 전개를 위해서는 후원금 확보가 선결조건이었다. 미국에서 만났던 그레이샨 씨의 제안으로 시작된 우편 모금은 알로이시오 신부의 아이디어가 더해져, ‘자수사업’이라는 이름의 기발한 사업으로 재탄생했고, 그 성과는 실로 기대 이상이었다.
‘자수 사업’이란 후원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가난한 사람들이 직접 수를 놓은 손수건을 우편 모금 안내서와 함께 등봉하는 방식이었다. 이로써 자수 작업에 참여한 사람들은 후한 작업비를 받아 생계에 보탬이 되었고, 이것을 받은 수취인들은 더 많은 관심과 후원금을 보내 주었다. 덕분에 가난한 이들은 가난한 대로 부유한 이들은 부유한 대로, 그렇게 서로에게 기쁨이 된 일석이조의 사건을 만들어 낸 것이었다. 알로이시오 신부가 사목했던 부산 송도 성당은, 후에 아프리카 수단에 병원과 학교를 설립하여 원주민을 위해 헌신한 이태석 신부가 다녔던 성당이다. 이태석 신부는 이 성당에서 처음으로 오르간이라는 악기를 보았고, 그런 악기들을 연주하는 법도 배웠다. 그리고 이태석 신부의 어머니는 알로이시오 신부의 ‘자수 사업’에서 손수건 수놓는 부업으로 생활비를 보탰다. 이태석 신부는 알로이시오 신부에게서 받았던 사랑을 아프리카 수단에서 그대로 실천하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