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9월 28일 목요일 [(녹) 연중 제25주간 목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성 벤체슬라오 순교자, 또는 성 라우렌시오 루이스와 동료 순교자들 다리우스 임금 제이년 여섯째 달 초하룻날, 주님의 집을 지으라는 주님의 말씀이 하까이 예언자를 통하여 내린다(제1독서). 헤로데 영주는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전해 듣고 몹시 당황하여,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하며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한다(복음). <집을 지어라. 그러면 나는 그 집을 기꺼이 여기리라.> ▥ 하까이 예언서의 시작입니다. 1,1-8 1 다리우스 임금 제이년 여섯째 달 초하룻날, 주님의 말씀이 하까이 예언자를 통하여 스알티엘의 아들 즈루빠벨 유다 총독과 여호차닥의 아들 예수아 대사제에게 내렸다. 2 만군의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 백성은 ‘주님의 집을 지을 때가 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3 주님의 말씀이 하까이 예언자를 통하여 내렸다. 4 “주님의 집이 무너져 있는데, 너희가 지금 판벽으로 된 집에서 살 때냐? 5 ─ 만군의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 너희가 살아온 길을 돌이켜 보아라. 6 씨앗을 많이 뿌려도 얼마 거두지 못하고 먹어도 배부르지 않으며 마셔도 만족하지 못하고 입어도 따뜻하지 않으며 품팔이꾼이 품삯을 받아도 구멍 난 주머니에 넣는 꼴이다. 7 ─ 만군의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 너희가 살아온 길을 돌이켜 보아라. 8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집을 지어라. 그러면 나는 그 집을 기꺼이 여기고 그것으로 영광을 받으리라. ─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9,7-9 그때에 헤로데 영주는 예수님께서 하신 7 모든 일을 전해 듣고 몹시 당황하였다. 더러는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났다.” 하고, 8 더러는 “엘리야가 나타났다.” 하는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났다.” 하였기 때문이다. 9 그래서 헤로데는 이렇게 말하였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그러면서 그는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수님의 소문을 들은 헤로데의 불안은, 권력에 집착한 나머지 양심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고 진리를 외면하는 한 인간의 어리석음을 대변해 줍니다. 헤로데는 자신의 비행을 지적했던 세례자 요한을 눈엣가시처럼 여기고 걸림돌로 생각했으면서도 그를 함부로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헤로디아의 딸 앞에서 공언한 허세를 이용해 세례자 요한을 처형합니다. 헤로데는 진리 앞에서 양심의 가책과 두려움을 감추려고 했지만, 예수님의 등장은 그에게 또 다른 걸림돌이 되어 불안의 늪을 벗어나지 못하게 합니다. 성경에서 ‘죄’는 단순히 윤리적인 악행이나 법과 계명을 지키지 않는 무질서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죄의 본질은 나의 삶의 바탕이자 근거인 하느님을 잊고 살아가는 데 있습니다. 신앙인이라면 하느님께서 선으로 우리를 인도하시고, 모든 악행과 폭력으로부터 벗어나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라고 가르치신다는 것을 모르지 않습니다. 나의 행위와 생각들이 세상의 논리와 관점에서 정당화되고, 사람들 때문에 나도 어쩔 수 없다는 식의 합리화의 유혹에 빠질 때, 하느님의 말씀과 그분의 계명은 나에게 걸림돌이고 불안과 두려움의 대상이 되고 맙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에는, 진리에 눈을 감을 때 죄의 유혹과 불안감이 내 삶을 지배한다는 지혜가 담겨 있습니다. 헤로데에게 예수님은 불편한 진리였습니다. 나를 숙명처럼 지배하고 있는 죄의 근원들을 벗어 버리지 못한다면, 비록 내가 세상에서 인정받고 부유함의 안락을 누린다 하더라도, 내 영혼의 참된 평화와 안식은 없습니다. 고해성사를 통해 우리가 죄를 씻을 수 있는 기회를 교회가 주는 것은, 하느님과 맺는 관계가 불안과 두려움이 아니라, 기쁨과 평화여야 한다는 점을 가르쳐 주기 위함입니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
초라하고 보잘 것 없는 하까이 예언자의 한탄은 오늘 우리 인간의 구체적인 현실을 잘 반영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살아온 길을 돌이켜 보아라. 씨앗을 많이 뿌려도 얼마 거두지 못하고, 먹어도 배부르지 않으며, 마셔도 만족하지 못하고, 입어도 따뜻하지 않으며, 품팔이꾼이 품삯을 받아도 구멍 난 주머니에 넣는 꼴이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죽을 고생을 다하지만 손에 쥐게 될 결실은 너무나 초라하고 보잘 것 없습니다. 늘 뭔가 아쉽고, 부족하고, 충족되지 않아 슬픕니다. 기를 쓰고 채우려고 노력하지만 ‘완전한 충만감’ ‘완벽한 충전’을 느끼지 못합니다. 뿐만 아니지요. 목숨 걸고 노력한 끝에 뭔가 손에 넣었다하면, 그것도 한 순간입니다. 순식간에 우리 손에서 빠져나가고 맙니다. 결국 이 땅위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인간만사는 유한합니다. 오래가지 않아 연기 사라지듯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맙니다. 절대적인 가치를 부여할 수 없습니다. 결국 믿을 곳이라곤 하느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만이 영원하시며 그분의 나라만이 절대적인 가치관을 부여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헤로데왕, 비록 로마 식민지 체제하에 제한된 권력만을 행사할 수 있었던 속국의 왕이었지만, 그래도 그의 권력은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세례자 요한 참수 사건’을 통해서 볼 수 있듯이 헤로데의 한 마디에 한 사람의 목숨까지 왔다 갔다 할 수 있었습니다. 그가 원하면 아무리 값진 것이라 할지라도 즉시 손에 넣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도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손에 쥔 그였지만 그 역시 늘 허전했습니다. 늘 뭔가 모자랐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세례자 요한의 당당함, 예수님의 진리 앞에 큰 혼란과 불안, 두려움에 빠지게 됩니다. 껍데기뿐이 헤로데의 실체, 권력 뒤에 숨어있는 인간적 나약함과 한계는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께서 지니고 있었던 진리 앞에서 낱낱이 드러나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런 헤로데 왕이었지만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을 한번 만나보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을 만나 뵙고자 했던 것은 신앙의 대상으로서의 하느님, 우주만물을 다스리시는 전지전능하신 절대자 하느님 앞에 승복하기 위한 만남이 절대로 아니었습니다. 지극히 자기중심적이었고, 신앙의 진리 앞에 지극히 폐쇄적이었던 헤로데에게 있어 예수님은 그저 호기심의 대상일 뿐이었습니다. 하느님을 찾아나가는 여행길을 걷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우리가 찾고 있는 하느님은 절대로 호기심의 대상이 아닙니다. 우리 생애 전체를 걸 가치가 있는 신앙의 대상으로서의 하느님이십니다. 이 세상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최고의 가치, 최고의 선으로서의 하느님이십니다.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호기심과 관심의 차이
개신교는 교황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또한 한 사람 베드로 위에 교회가 세워졌다는 것도 믿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베드로의 역할을 하는 사람은 개신교에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단지 교회가 베드로가 아닌 그의 신앙 위에 세워졌다거나, 아니면 베드로가 그냥 모든 신앙인을 대표해서 불림을 받았을 뿐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가톨릭은 예수님께서 시몬 바르요나를 부르시고 그의 이름을 반석이라는 의미의 케파, 즉 베드로로 새로 지어주셨다고 믿습니다. 베드로라는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실 계획을 처음부터 가지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그에게 당신을 온전히 알아볼 수 있는 믿음의 성령을 부어주셨음을 보고는, 그를 기초로 그 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그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시며 이 땅에서 죽음의 힘도 그 교회를 누르지 못하게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하늘나라의 열쇠는 구체적으로는 죄를 용서하는 권한인데, 이 세상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끔찍한 일입니다. 하늘나라의 열쇠는 이 땅에서 매고 푸는 것이기에, 하늘나라로 가져가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구원의 열쇠를 이 땅에 맡기고 가신 것이기에, 그 권한을 꾸준히 행하며 또한 교회 일치의 중심이 될 베드로의 후계자들이 이어지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개신교는 성 베드로 대성당이 베드로의 무덤 위에 세워졌다는 것도 인정할 수 없습니다. 물론 성 베드로 성당 밑에 베드로의 유해가 있다고 말로만 전해져 내려왔지 거의 2,000년 동안 확인을 하지 못한 ‘물음표’였습니다. 그래서 대성당 지하를 발굴해 보자는 말이 나왔습니다. 물론 일부는 반대했습니다. 팠다가 유해가 발굴되지 않으면 가톨릭의 정통성 자체가 의심받을 수도 있는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교황은 “사도 베드로의 무덤이 나와도 진실이고, 나오지 않아도 진실이다. 진실은 밝혀져야 한다.”라며 발굴을 명했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헤로데가 단순히 예수님이 자신이 죽인 세례자 요한이 살아난 것인지 아닌지만을 알기 위해 만나보기를 바라는 모습과는 차이기 있는 것입니다. 또한 진리를 증언하기 위해 세상에 오셨다는 예수님께 “진리가 무엇이냐?”라는 질문만 던지고 나가버린 빌라도와도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호기심’으로 바라보기는 했지만, ‘관심’은 없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성 베드로의 무덤은 1939년 교황 비오 11세의 시신을 성 베드로 대성전 지하 묘지에 안장할 때 중앙 제대 밑 갈라진 벽 틈에서 발견되었습니다. 그의 무덤에는 서기 150년경에 만들어진 천개(덮개)가 세워져 있었고, 그 옆 벽에는 ‘여기 베드로가 있다.’는 문구가 발견되었습니다. 교황 비오 12세는 1949년 8월 이 무덤에 대한 본격적인 발굴을 시작했습니다. 성당 제대 밑에서는 한 유골이 발굴 되었는데 조사 결과 그 유골은 1세기경 골격이 큰 발목이 잘린 60대 중반 남자의 뼈로 밝혀졌습니다. 전해 내려오는 바에 의하면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사형을 당한 베드로를 내리기가 어렵게 되자 병사들이 그의 발목을 끊어서 시체를 내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바티칸에 대성당을 세우도록 지시한 이유는 당시 바로 그 곳에 베드로가 묻혀있었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황제는 당시 7개의 대성당을 세우라고 했는데 각 성당에 합당한 유물이 없이 세워진 성당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다시 한 번 베드로 성당은 베드로라는 반석 위에 교회가 세워져 죽음의 힘도 그 것을 누르지 못하고 있음을 증명하게 된 것입니다. 이쯤 되면 이것은 호기심이라기보다는 관심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헤로데는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아직 관심은 없습니다. 호기심은 자신의 궁금증을 채우려는 것이지만 관심은 내가 그 궁금증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호기심은 아무 노력도 하지 않고 그것을 위해 아무 투자도 하지 않지만, 관심은 많은 노력과 투자와 희생을 요구합니다. 따라서 호기심은 구원을 주지 못하지만, 관심을 가지고 파고드는 사람에게는 당신의 정체성을 보여주십니다. 헤로데가 관심만 있었어도 본인이 찾아나서는 노력쯤은 했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성탄 트리는 무엇입니까? 왜 장식하는 것입니까? 만약 그것을 호기심만으로 보았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관심을 가지고 파고든다면 그것이 바로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이 나무를 먹지 못하도록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만든 생명나무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 즉 몸이 생명나무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당신 몸과 피를 먹고 마셔야만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먹어야만 영원히 살 수 있게 되는 바로 그 생명나무가 태어나신 날이기에, 그리스도의 몸을 상징하는 생명나무를 장식하는 것이 바로 성탄트리인 것입니다.
과연 우리들은 그리스도에 대해 호기심을 가지고 있습니까, 아니면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까? 참으로 관심이 있다면 성경책이 너덜너덜하게 닳아 있을 것이고, 조금이라도 더 알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나를 움직일 수 있어야 관심이고 믿음이고 사랑입니다. 그러나 호기심만 있다면 그리스도를 더 알기 위한 특별한 노력은 하지 않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헤로데나 빌라도도 예수님을 보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그 호기심이 관심으로 성장하지 못했기에 구원을 받지 못했음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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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버지 하느님께 찬미와 영광을 바치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