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트((elite)”는 ‘어떤 사회에서 우수한 능력이 있거나 높은 지위에 올라 지도적 역할을 하는 사람’의 뜻을 가진 말입니다.
일반 사회에서 엘리트란 특정 분야나 과제에서 타인에 비해 우수한 능력이나 자질을 갖춘 사람을 주로 가리키는 말로 쓰입니다. 라틴어로 뽑다, 가려내다 등의 뜻을 가진 Eligo, Eligere가 어원인데, 어원을 보면 알 수 있겠지만 말 그대로 뛰어난 사람을 가려 뽑았다는 뜻입니다.
정치학과 사회학에서 엘리트란 사회의 대다수 구성원들에 비해 불균등하게 많은 권력이나 정치적 영향력, 특권 등을 가진 소수 집단을 가리킬 때 쓰는 말이니, 이 말이 서양에서 들어온 것은 맞지만 이미 동양에도 이런 집단은 선사시대부터 존재했다고 보여집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신라시대에는 골품제로 성골이나 진골이 권력과 관직을 독점했고 고려시대에는 귀족들이 그러했습니다. 조선시대에 와서 과거로 관리를 뽑았지만 그 조상이 공이 많으면 음서(蔭敍)제도를 통해 관직으로 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 관리들이 바로 엘리트이고 조선시대의 양반이었습니다. 임진, 병자난 이후에 과거에 급제하는 사람들이 특정 가문이나 특정 지역에 집중이 되고 한 번 밀려난 가문은 고위 관료가 될 수가 없다보니 이름뿐이 ‘양반’만 많아졌던 것입니다.
왜정시대와 혼란기 대한민국을 거치면서 ‘양반’이 몰락하고 선거와 공무원 시험으로 대통령, 국회의원, 공무원들이 새롭게 등장하면서 이들이 곧 대한민국의 엘리트로 자리매김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이들이 ‘양반’인 셈입니다.
그런데 정말 80년대부터는 제대로 된 국회의원이나 장관 별로 본 적이 없고 책임과 의무감을 가진 고위 공직자를 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즉 양반다운 양반을 찾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한국의 엘리트들은 그리 훌륭한 유산을 물려받지 못했다.
조선조 말 한국을 방문한 외국인들은 당시 양반 지배계층을 통렬히 비판했다. 1894년부터 수차례 한국을 방문해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1898)이라는 매우 흥미로운 여행기를 남긴 영국인 비숍 여사는 당시 조선의 양반지배층을 거머리와 같은 존재들이라고 묘사했다.
생산적 활동은 전혀 하지 않고 양민과 노비계급의 근로에 의한 생산물을 철저히 착취하고 사는 존재라는 것이다. 관리들은 백성들이 조금이라도 곳간에 쌓아둔 것이 있으면 관아에 불러 ‘네죄를 네가 알렸다’고 족치며 재물을 빼앗아가 당시 백성들은 저축을 할 인센티브가 없었고 따라서 자본축적과 경제발전이 없었다고 관찰하고 있다.
세계 어느 나라를 다녀 보아도 자신이 탄 말고삐조차 직접 잡지 않고 하인에게 잡히는 존재는 한국의 양반밖에 없다는 것이다. 양반은 군역도 하지 않고 세금도 내지 않았다. 다산의 목민심서에서도 “백성들은 흙으로 밭을 삼았고, 관리들은 백성을 밭으로 여겼다”고 했다.
이는 전쟁이 나면 제일 먼저 전선에 달려가 목숨을 걸고 양민을 보호하는 서양의 귀족이나 기사 계급의 행동양식과는 달랐다. 우리는 과거 나라의 안위가 위태로워졌을 때 의병을 일으켜 나가 싸운 이들은 주로 일반 백성들이었으며 천민 대우를 받던 승려들이었다.
그런 조선이 망하고 일제 35년을 겪고서도 한국의 지배계층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던가 보다.
고 정주영 회장의 회고록 『이 땅에 태어나서』(2002)를 보면 북한의 6·25 남침으로 피난 중 정 회장은 그래도 나라를 위해 군인들 사기진작에 일조라도 하려고 자청해서 일선 정훈부대로 가는 신문을 배달했고, 작은 배로 해안선 도시와 섬들을 돌아다니며 뱃멀미로 왝왝 토해가면서 민심 동요를 막기 위해 정훈활동을 하고 다녔다고 한다.
그런데 7월 어느날 피난지 부산에서 전황이 궁금해 정치인들을 만나면 새 소식이라도 들을 수 있겠지 하여 민주당 사무실에 들렀더니 “전쟁터에서는 하루에도 무수히 많은 젊은 목숨들이 쓰러져가고 있는데, 정치를 한다는 사람들은 웃통을 벗고 맥주를 마시면서 전쟁은 남의 일인 듯 한가하게 바둑을 두고 있는 것을 보고 환멸을 느꼈다”고 한다.
당시 소문으로는 그들을 비롯해 소위 힘깨나 있다는 사람들은 만약 부산이 점령될 것 같으면 자식들과 일본으로 도망칠 배를 대놓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한국 엘리트들이 늘 실패한 것은 아니었다. 가장 제대로 역할을 한 기간은 아마도 1960년대에서 1980년대까지의 한 세대에 걸친 기간이었을 것이다. 산업화, 민주화를 이루어낸 이 시대의 도약이 오늘날 세계 10위 규모의 한국을 가능케 한 발판이 되었다.
물론 이는 한국민 모두가 참여해 이뤄낸 결과다. 그러나 어느 사회나 그 사회의 방향을 잡고, 개혁을 단행하며 끌고 나가는 것은 10%내의 엘리트들의 몫이다.
지금의 한국 엘리트들은 어떤가? 지난 30년간 한국사회가 걸어온 길을 보면 엘리트들이 제 역할을 충분히 해왔다고 보기 어렵다. 지금 우리 사회의 운용체계는 이미 많이 낡았다. 곳곳에서 파열음을 내고 왜곡된 결과를 가져오고 있다.
탈제조업이 시작된 지 30년 가까이 되고 고령화와 디지털 혁명이 빠르게 진행되지만 노사관계, 임금체계, 인사제도·관행, 교육시스템은 제조업 고성장 시대와 별로 변하지 않아 생산시설의 해외이전, 노동시장 2중 구조 심화, 조기 명예퇴직제도의 일상화, 일자리 수급불균형 등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
우리의 정치, 관료, 기업, 교육 엘리트들은 이를 수수방관해왔고 고칠만한 능력과 용기를 가지지 못했다.
우리 사회의 보상·징벌제도, 유인 구조도 마찬가지다. 이대로는 인재를 키우기 어렵고, 사회 전반의 전문성과 효율성을 끌어올릴 수 없다. 과거 개발시대와 달리 지금 한국 엘리트들의 경쟁 상대는 선진 열강들의 엘리트들이다. 그들만큼의 지식수준, 전문성, 도덕성, 안목을 갖추어야 지금의 한국을 제대로 끌고 갈 수 있다.
지금은 또한 세계적 대전환기이다. 우리의 생존에 무엇보다 중요한 미중간 패권 경쟁, 동서양의 세력 재균형, 국제질서의 재편성이 진행되고 있다. 국제정세에 대한 안목과 통찰력을 갖추는 것이 지금 한국 엘리트에게 기본적 요건이다.
이제 우리가 따라가야 할 모델은 없다. 스스로 길을 개척해 나갈 창의력을 갖추어야 하며 이는 과거와 현재에 대한 치밀한 분석, 강인한 연마와 끊임없는 학습에서 나올 수 있다.
과거의 경험을 돌아보면 한국 엘리트들이 제 역할을 한 시기는 엘리트 계층이 고착되어있지 않고 경쟁에 넓게 열려있을 때였다. 1960년대 지배 엘리트들은 그 이전의 엘리트 계층이 아니었고, 빈농 출신들이 대부분이었다. 따라서 엘리트 계층의 고착화야말로 우리가 크게 경계해야 할 일이다.
한 달만 지나면 아무 의미도 없을 논쟁과 정쟁에 매일을 허송하는 지금의 엘리트들은 이 시대 자신들의 위치와 역할에 대해 깊이 성찰해 보아야 한다.>중앙일보. 조윤제 서강대 명예교수·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
출처 : 오피니언 중앙시평, 한국 엘리트들의 성공과 실패
김영삼(YS) 전 대통령은 1993년 2월 취임 후 첫 국무회의에서 자신과 직계가족의 재산을 자진 공개했는데 17억7822만6070원이었습니다.
YS는 대선 기간에 국회의원과 1급 이상 고위공직자의 재산공개도 약속했는데 공직사회의 부정부패 척결을 강조하기 위한 차원이었습니다.
YS 취임 직후 불거진 공직자 재산공개 파동은 1981년 제정된 공직자윤리법의 전면 개정으로 이어져서, 여야는 만장일치로 정무직 공무원의 재산공개와 4급 이상 공직자의 재산등록을 의무화했습니다.
같은 해 9월 헌정사상 처음으로 입법·사법·행정부의 1급 이상 고위공직자 1167명의 재산이 고시되면서 후폭풍이 이어졌는데, 각각 27억 원과 19억 원을 신고한 대법원장과 검찰총장이 투기 의혹을 받아 사흘 간격으로 사퇴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지난날 왜 우리 정당이 국민의 신뢰를 받지 못했습니까. 국민은 겉과 속이 다른 정당과 정치인을 믿지 않습니다.” 공직자 재산공개 파동이 한창이던 1993년 4월 YS가 한 말입니다. 그랬지만 30년이 흘러도 정치의 속성은 나아진 것이 없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지금 엄청 떠들고 있지만 김남국만 탈당시키면 또 이 사건은 넘어갈 것이라는 것이 이재명과 더민당의 생각일 것 같습니다. 희생양 한 마리면 백성들이 잠잠해진다는 것이 역사에서 얻은 꼼수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국회의원, 고위공직자 중에 대다수가 엘리트가 아니고 양반도 못 되는 것이 우리나라의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時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