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은 변안열의 충절과 「불굴가」의 시조사적 의의
이광녕(문학박사, 시조시인)
1. 머리말
대은(大隱) 변안열(邊安烈)은 고려말 충신이요 시조「불굴가」의 원작자로 인정되고 있다. 그의 충절(忠節)은「불굴가」에 나타나 있는 바와 같이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와 대등한 충신불사이군(忠臣不事二君)의 충신(忠臣)임에도 불구하고 역성혁명(易姓革命)으로 이어진 새로운 왕조의 어두운 그늘에 가려 간신으로 낙인 찍혀서 빛을 보지 못하고 묻혀 있었던 안타까운 인물이다.
그의 충절과「불굴가」에 대한 논의는 그간 학계의 일부에서만 재조명을 해온 터라 그에 대한 폭넓은 이해나 정론화(定論化)된 학설은 아직까지 미흡한 상태이다. 이에 필자는 최근 여러 가지 뒷받침할 만한 학술 자료와 원주변씨 문중의 세보(世譜) 등 관계 자료를 확보하고 대은공의 충절과 그가 남긴 유작인「불굴가」에 대하여 학술적 이론적으로 재조명하여 그의 절신(節臣)으로서의 충정과 「불굴가」의 시조 문학사적 자리매김을 확고히 하고자 한다.
2. 불굴당(不屈堂) 대은(大隱) 변안열( 安烈)의 생애
변안열(邊安烈)은 1334년(고려 충숙왕 3년) 중국 심양(瀋陽)에서 출생하였는데, 호는 대은(大隱)이며 자는 충가(忠可)이고 별칭은 불굴당(不屈堂)이다. 부(父)의 휘(諱)는 량(諒)이고 모(母)는 곽씨(郭氏) 부인(夫人)이며 3남1녀 중 차남이다.
그는 어릴 때부터 지조가 청고(淸高)하며 의기(義氣)가 빼어나 1351년(18세)에 중국 원(元)나라 무과인 호방(虎榜)에 장원급제하였다. 그의 벼슬은 형부상서(刑部尙書)였는데 고려의 강릉대군(후에 공민왕)이 노국공주(魯國公主)와 혼인하여 환국하게 되자 원조(元朝)의 수장(首將)이 되어 함께 고려에 입국하였다. 그는 1352년 판추밀원사(判樞密院事) 원주 원의(原州元顗)의 딸을 부인으로 맞이하여 임금의 명을 받들어서 원주(原州)로 본관(本貫)을 삼는 원주변씨(原州邊氏)의 시조(始祖)가 되었다.
대은공의 일생은 주로 임금에 대한 충절과, 호국 용장으로서의 격전지 임무 수행으로 점철되었다. 특히 외세의 침략에 맞서 공이 이루어 놓은 혁혁한 전과로는 그 세세한 기록을 다 열거하기 어려우나, 그중 두드러진 전투 기록만을 거론한다면, 공민왕 11년(1362년)에 홍건적을 토벌하였고, 이듬해 경도(京都)를 수복하는데 공훈을 세웠으며, 동왕 23년(1374년)에 최영과 더불어 탐라의 적(敵)을 토벌, 평정하였고, 우왕 원년(1375)에 동북면 원수가 되어 심왕(瀋王) 숭(嵩)을 격파하였고, 동왕 2년(1376년)에는 양광, 전라 지휘사 겸 원수가 되어 부령(扶寧)에 침입한 왜구를 격퇴시켰고, 동왕 3년(1377년)에는 최영과 더불어 서강(西江,), 수원, 해주, 해평에 침입한 왜구를 격파하였고, 동왕 6년(1380년)에는 양광, 경상, 전라 삼도 도체찰사를 제수 받고 이성계와 더불어 역사에 길이 빛날 황산대첩(荒山大捷, 남원군 운봉 전투)으로 큰 전공을 세웠으며, 동왕 8년(1382년)에는 도원수가 되어 단양, 안동에 침입한 왜구를 크게 격파하였다.
이러한 수많은 외세의 침략을 오직 호국충절의 의기로 막아내고 승승장구하자 나라에서는 그에게 공훈 1등의 책훈과 함께 공훈의 단계에 따라 녹전(祿田)과 백금(白金)과 같은 상급(賞給)을 내리고 예의판서(禮儀判書),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 판삼사사(判三司事), 영삼사사(領三司事), 원천부원군(原川府院君)과 같은 공훈 작위를 제수하니 출장입상(出將入相)으로서 이성계가 시기할 정도로 그 명망이 대단히 높았다.
우왕 14년(1388년) 요동정벌 때에는 의(義)를 내세워 이성계와 함께 회군하였는데, 회군하여 왕을 폐위하고 역성혁명을 도모한 이성계 일파에게 대은은 반기를 들고 1389년 목은 이색(李穡) 등과 함께 우왕의 복위를 꾀하다가 이성계를 없애려던 김저(金佇), 정득후(鄭得厚)의 모의 기밀이 탄로되어 그와 연루되었다는 죄목으로 한양으로 유배되었다가 이성계 일파에 의해 1390년 정월 16일에 피화, 순절하였다.
변안열은 역사의 그늘에 가려진 고려말 최고의 절신으로 정몽주와 더불어 충신불사이군의 충의를 지켜낸 충신이요 용장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혁혁한 공적이나 국가 보위 공훈과는 반대로 조선조 정인지(鄭麟趾) 등이 편찬한 <고려사>에서 그를 간신으로 등재하여1) 역사의 그늘 속으로 밀어 넣은 것은 이성계의 왕국 찬탈에 대해 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2)
이러한 대은의 파란만장한 일생과 무고(誣告)와 희생은 그가 고려말의 유신으로서 끝까지 절의를 지킨 정치적 입지 때문이며, 이러한 그의 의지는 그가 남긴「불굴가」에 잘 나타나 있다. 본고는 대은 변안열의 일생을 추고하여 그 업적을 되새김은 물론, 그가 남긴 문학적 자취를 재조명해 보고자 한다.
3.「불굴가」에 대한 연구사 검토
대은(大隱)과 「불굴가」에 대한 연구는 그 연구 성과물이 적고 연구역사도 비교적 짧은 편이다. 1968년 황패강(黃浿江) 교수가 우연히 경북 봉화의 변우룡(邊雨龍)씨로부터 <대은선생실기(大隱先生實記>3) 를 구득(求得)하여 본격적으로 연구4) 된 이래, 강전섭5) , 이동영6) , 조규익7) , 황충기8) , 이성무9) , 김학성10) ,등과 김종, 정구복, 고혜령, 박종기, 박한남, 변승구, 서동진, 정소열 등에 의해 논문이나 학술지가 나온 바 있다.
「불굴가」에 대한 연구는 대은 공의 행장을 집성한 <대은선생실기(大隱先生實記)>를 황패강 교수가 입수하고 나서부터 활발히 전개되었다. 이 실기에는「불굴가」가 한역되어 있는데, 기사년(己巳年, 공양왕 1년) 1389년 10월 11일 이성계의 생일날, 이방원이 제재(諸宰) 앞에서 하여가를 지어 뜻을 물었을 때 포은은 단심가(丹心歌)로 화답을 하고, 뒤이어 대은은 불굴가(不屈歌)로 화답을 하여 이것이 훗날 피화(被禍)의 빌미가 되었다11) .
「불굴가」에 대한 자료는 정조때(1800년) 간행된 <경신보>(庚申譜,원주변씨세보)와 <고려부원군양절공실기(高麗府院君亮節公實記)>에 비교적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경신보> 잡록(雜錄) 중에 대은 5세손 귀계(歸溪) 변희리(邊希李)의 <전가록(傳家錄)> 운(云)이 있는데, 여기에 포은(圃隱)의 단심가(丹心歌)12) 와 대은(大隱)의「불굴가」13) 가 한역으로 부기(附記)되어 있다. <전가록>의 기록자 변희리(邊希李)는 대은의 5세손으로 세조 때(1462년) 28세에 중생원시에 1등, 성종 때(1486년)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다음 해에 사헌부 감찰에 이어 형조좌랑을 지낸 인물이다. 그는 연산군 때(1498년)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예천군에 내려가 은거하고 이후 다시는 출사하지 않았고, 그후 중종반정 이후에도 누차 제명(除名)이 내렸으나 부임하지 않았다고 한다14) .
황패강 교수는,「불굴가」에 대한 논의는 포은의 「단심가」도 후손의 기문(記聞)에 의하여 유전(遺傳)하였던 것15) 처럼, 「불굴가」도 대은의 5세손 변희리( 希李)의 <전가록(傳家錄)>을 인(引)한 경신보 잡록기문에 의한 것이 타당하다는 견해를 밝히면서, 단지, 「단심가」가 널리 민중에게 구계구승(口繼口承)되어 온 것과는 달리, 「불굴가」는 민중들의 구기(口氣)어린 전승을 바랄 수 없었던 까닭은, 포은은 충신전(忠臣傳)에 도열(堵列)되었고 대은은 간신(姦臣)조(條)에 재적(載籍)되었기에 그의 자취조차 요요(寥寥)하여 「불굴가」가 인구(人口)에 오르지 못한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고 하였다.16)
「불굴가」에 대한 논의는 아직 정론화(定論化)되지 못하고 그 진위(眞僞)를 두고 학자 간에 의견이 엇갈리는 부분이 있다. 그러한 이유는 그 연구 역사가 일천할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결정적 단서가 주로 원주변씨 문중의 소장문서에 의해 밝혀지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지금까지의 연구실적에서 드러난 쟁점은「불굴가」의 작가에 대한 문제이다. 황패강, 이동영, 조규익과 같은 학자는 여러 가지 자료를 검토하여「불굴가」가 대은공의 작품이라고 긍정적 입장을 취한 반면, 강전섭은 「불굴가」의 한역본이 ‘불종(不從)’과 ‘불굴(不屈)’의 2종이 있음을 지적하고 <전가록> 등 「불굴가」 전설이 담겨진 문헌들도 대은의 후손들이 선조의 사적을 빛내기 위하여 부연 각색한 것17) 이라고 안작론(贋作論)을 내세우며 반론을 폈다.
이러한 찬반론은 아직 정론화(定論化)되지 못한 단계(段階)에서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쟁점이라고 본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에 의한 정론은 새로운 결정적 단서가 발견되면 언제든지 변할 수 있는 부분으로서, 어디까지나 발견된 문헌적 근거를 토대로 하되 당시의 시대적 정황과 학술적 타당성을 참고로 하여 진단하여야 한다. 신빙성 없는 자료 하나만을 가지고 독자적 의견만을 고집해도 안되며, 여러 정황이나 사료(史料)가 뒷받침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한 부분의 결점만을 들어 혼자만의 추측성을 갖고 일개 가문을 빛내기 위한 것이라고 간주하여, 신빙성이 없다고 추론하여 부정하는 태도는 옳지 않다고 본다, 이동영이 지적한 대로 「불굴가」는 대은 변안열의 작품이라는 기록은 있고 아니라는 기록은 없다.18) 「불굴가」는 <경신보(庚申譜)>의 변희리(邊希李)의 <전가록(傳家錄)>이 현재까지 가장 믿을 수 있는 자료이다. <대은선생실기(大隱先生實記)>19) , <변대은안열유사(邊大隱安烈遺事)>20) , <선조전행장(先祖傳行狀)>21) , <고려부원군양절공실기(高麗府院君亮節公實記)>22) 등도 뒷받침할 만한 자료이다. 특히, 제문(祭文)기록의 대은을 호칭하는 말에서 길재는 ‘불굴당(不屈堂)’이라 하였고, 이숭인은 ‘불굴지가(不屈之歌)’로, 이방번은 ‘불굴유가(不屈遺歌)’ 로 표현하여 「불굴가」의 존재가 대은(大隱)임을 확실히 드러냈으므로,「불굴가」의 작가 진위에 대한 시비는 문헌상의 검토 결과로 일단 인정하는 수밖에 없다.
① <원주변씨세보(首卷)>에 기록되어 있는 정몽주 찬(撰)의 전(傳)에는,
己巳陞領三司事王室有恃朝望甚隆李侍中忌之使子邀飮酒䟽歌
試曰 此亦何如彼亦何如城隍堂後垣頹落亦何如我輩若此爲不死亦何如
安烈和曰 穴吾之胸洞如斗貫以藁索長又長前牽後引磨且戞任汝之爲吾不辭
有欲奪吾主此事吾不屈 이라 하여, 창작 시기(己巳년, 1389년)와 試驗者(李侍中 즉 이성계가 그것을 시기하여 아들을 시켜서)와 和答者(安烈)와 그리고 작품명의 근거 '不屈'이 분명히 명시되어 있다.
② 동(同) 서(書) 야은 길재(吉再)의 유사(遺事)편에는,
使子置酒邀 圃隱及公試歌曰,
此亦何如彼亦何如城隍堂後垣頹落亦何如我輩若此爲不死亦何如
圃隱和曰 此身死了一百番更死了白骨爲塵土魂魄有也無向主一片丹心寧有改理也歟
公又和曰 穴吾之胸洞如斗貫以藁索長又長前牽後引磨且戞任汝之爲吾不辭
有欲奪吾主此事吾不屈 (이후에는 己巳金佇夜詣~로 이어짐)
여기에도, 창작 시기(己巳년,1389년)와 試驗者(子 이방원)와 和答者(圃隱 및 大隱公) 그리고 작품명 근거인 ‘不屈’이 잘 드러나 있다.
③ 또 목은 이색(李穡)의 행장(行狀)에서도,
使子邀圃隱及公肴酒歌曰 此亦何如彼亦何如~, 圃隱和曰~, 公又和曰~ 己巳十一月~등으로 위 ②번 길재의 유사(遺事)와 유사한 기록으로 나온다.
이러한 근거(강조점 참고)로 보아 이성계가 아들을 시켜 베푼 주연 자리에는 포은과 대은이 함께 있었다는 것이 확실하고, 그 자리에서 포은은 위와 같이「단심가(丹心歌)」를, 대은은「불굴가(不屈歌)」를 불렀음도 확실하다.
주연을 베푼 자리가 언제이냐 하는 문제를 놓고 강전섭(姜銓爕)은 ‘심광세(沈光世)의 <해동악부(海東樂府)>와 홍만종의 <순오지(旬五志)>등에는 포은이 연회석상 귀로에서 피살되었다라고 되어 있는데, 포은보다 2년 전에 피살된 대은이 2년 후에 다시 부활한 것인지 어찌 그 자리에 동행할 수 있었느냐’고 반박하며 그것은 “허무맹랑한 일종의 전설이고 어불성설의 허구”라고 하였다23) . 필자는 이점을 놓고 오랫동안 여러 자료들을 검토하며 탐색을 거듭해 보았다. 그 결과 <해동악부(海東樂府)>24) 와 <순오지(旬五志)>25) 는 실록이 아니라, 각각 악부 형태의 시가집과 일종의 문학평론집이기에 다소의 문학적 허구성(虛構性)이 가미될 가능성도 있을 뿐 아니라, 포은은 이름 높은 충절의 표본으로 숭앙되었으나 대은은 간신으로 매도되어 말하기조차 꺼릴 정도의 존재였었기에 대은은 역사 속에 가려지고 포은만의 화답가로 미화되어 전승되었을 것이라는 가능성으로 추론하여 보았다.
「불굴가」창작에 대한 신빙성은 현전하는 문헌자료에 준거하는 수밖에 없다. 문헌의 기록을 믿는다면 포은과 길재의 전(傳)과 유사(遺事), 그리고 목은 이색의 행장(行狀)과 같은 사료들을 통해서 연회석상에서 포은과 대은이 함께 있었다는 사실은 긍정해야 된다. 길재(吉再)와 이색(李穡)의 유사(遺事)와 행장(行狀) 기록26) 에 의하면, 대은은 김저(金佇)의 모역 사건에 연루되어 파직되어 한양으로 유배되었다가 이듬해인 경오년(1390) 정월 16일에 피화(被禍)되었다.
이러한 여러 가지 문헌 자료나 근거들로 보아 「불굴가」의 원작자는 대은공이며, 그 창작 시점은 기사년(1389년) 10월 11일이고27) , 대은공의 순절 시점은 경오년(1390년) 정월 16일이다. 다만 역사적 사실이나 근거는 영구히 고정된 것이 아니고 새로운 확실한 자료나 논거가 발견되었을 때에는 언제든지 변화될 수 있다는 여지가 있음도 밝혀둔다. 필자는 이런 부분을 염두에 두고 본고에서는 그 진위 여부를 가리는 논지는 더 이상은 지양하고, 아직까지 「불굴가」의 문학성 연구가 소홀하였다는 점을 인식하여 「불굴가」의 국문학적 가치를 중점적으로 재조명하여 보고자 한다.
4. 「불굴가」의 국문학사적 가치
1) 「불굴가」의 장르 설정 문제
「불굴가」의 국문학사적 가치를 논하기 앞서 제기될 수 있는 문제는 「불굴가」가 어느 장르에 속하느냐는 문제이다. 장르면에 있어서 「불굴가」는 본래부터 한역가인가 아니면 구어체인 우리말 노래인가? 또 우리말 노래이면 변형된 평시조인가, 아니면 당초부터 사설시조인가 하는 문제다. 이를 위하여 <경신보(庚申譜)>의 한역「불굴가」와 진본(珍本) <청구영언(靑丘永言)>의 우리말 노래를 참고로 제시하여 본다.
穴吾之胸洞如斗 가슴에 궁글 둥시러케 고
貫以藁索長又長 왼기를 눈길게 너슷너슷 와 그궁게 그 너코
前牽後引磨且戞 두 놈이 두 긋 마조자바 이리로 훌근 져리로 훌젹 훌근훌젹 져긔
任汝之爲吾不辭 나남즉 대되 그는 아모로나 견듸려니와
有欲奪吾主 아마도 님 외오 살라면
此事吾不從 그 그리 못리라
첫째로 주목해 봐야 할 곳은 한역가의 강조점 찍힌 不從이다. 강조점 찍힌 “不從”은 <경신보>의 변희리의 <전가록(傳家錄)>에는 위와 같이 ‘不從,’으로 되어 있지만, 길재(吉再)의 <유사>, 이색(李穡)의 <행장>, 정몽주의 <전>, 이숭인,이방번의 제문(祭文)과 <야은선생언행속집(冶隱先生言行續集)>권3에 수록되어진 <변대은안열유사>와 <선조전행장(先祖傳行狀)>과 <대은선생실기> 등 여타 기록에는 모두 ‘不屈’로 되어 있다. 이에 대하여 강전섭은 “1자의 윤색이지만 의미의 변화를 가져왔으므로 개작으로 보아야 한다28) 고 하였으나, 필자가 판단하기에는 ‘不從’이나 ‘不屈’이나 의미의 큰 변화는 없으며, <전가록>의 기록은 기록상의 오차로 보인다. <전가록>을 제외한 여타 기록에는 ‘불굴’로 기록되어 있기에, 황패강 교수도 ‘불굴가’로 명명하였다고 본다.
둘째로 상고해 봐야 할 문제는 이 「불굴가」가 당초에 한문시가에서 비롯되었나 아니면 우리말 노래로부터 비롯되었나 하는 문제이다. 이동영은 「불굴가」는 당초에 그 원전(原典)이 한시(漢詩)였다29) 했지만, 이 문제는 이 노래를 지을 당시의 정황을 상고해 보아야 한다. 이방원(李芳遠)이 베푼 연회석상 앞에서 하여가에 대한 화답가로 불렸던 것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문어체(文語體)인 한문보다는 즉흥적 화답의 우리말 구어체(口語體)로 읊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는 언문일치가 안되었던 시절이라는 점을 상기하면 이해가 간다. 따라서 필자는 한문시가로 시작되었다는 설은 설득력이 약하고 우리말로 노래한 것을 그 뜻을 보전하고자 한역으로 기록해 두었다고 본다.
세 번째는 우리말 「불굴가」의 장르문제이다.
황패강 교수는 그의 첫 번째 논문(1968)에서는 「불굴가」 한역본만을 중심 논제로 다루다가 그것을 임의로 국역하여 3행으로 된 평시조형으로 작시하여 보기도 했는데30) , 두 번째 논문인 「대은의 불굴가 補攷」(1970)에서는, 첫머리에 ‘국문가사(國文歌詞)의 발견’이라고 하였다가 뒤엔 ‘국문시조(國文時調)의 발견’이라고 하면서 「불굴가」가 엄연히 국문시조로 현전하고 있음을 알고 큰 기쁨을 표시하였다. 이러한 표현은 아마도 청구영언에 실려 있는 「불굴가」를 발견해 냈기 때문일 것이다. 정철의 「장진주사」도 일부 학자들에 의해 시조 아닌 가사로 인정되고, 황패강의 ‘국문가사’란 표현도 ‘國文歌辭’로 곡해하기 쉬운 일이기에, 논거에 입각해서 확실한 장르적 기준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
우리말 「불굴가」를 시조(時調)로 보느냐 가사(歌辭)로 보느냐는 문제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불굴가」는 주연(酒宴) 자리의 화답가로서 「하여가」가 단가(短歌)라는 점을 고려할 때 불굴가도 단가(短歌)의 형태를 지녀야 했었고, 가사문학(歌辭文學)의 효시가 조선성종 때 정극인(丁克仁)의 「상춘곡(賞春曲)」31) 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가사로 보는 관점은 시기적으로나 정황으로 보아도 이치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굴가」는 단가인 시조의 형태로 볼 수밖에 없다. 단지 전승과정에서 다소의 첨삭이 있었다 하더라도 현전하는 문헌상으로 나타난 형태는 평시조와는 달리 중장이 늘어나 있고 초장과 종장의 형태가 평시조의 꼴을 갖추고 있으므로 장시조(사설시조)로 보아야 한다.
2) 사설시조(辭說時調)의 효시「불굴가」
「불굴가」는 시조집 김천택의 <청구영언(靑丘永言)>, 이형상의 <악학습영(樂學拾零)>, 김수장의 <해동가요(海東歌謠)>, 박효관·안민영의 <가곡원류(歌曲源流)>, 일본인 전간공작(前間恭作)의 <교주가곡집(校註歌曲集)> 등에 장시조로 고루 실려 있다. 「불굴가」를 사설시조로 볼 경우, 「불굴가」가 고려말에 나타났으므로 사설시조 효시의 시기는 당연히 고려말로 보아야 한다.
지금까지는 일반적으로 사설시조의 효시작으로 선조 때 정철의 「장진주사」를 꼽아 왔다32) . 그런데, 「불굴가를 사설시조의 효시작으로 설정할 경우, 「불굴가」(대은작)의 작시 연대가 고려말이고 「장진주사」(정철작)의 작시 연대가 16세기 중후반 경이니 약 180년 내외의 시차가 있다. 그러므로 갑자기 나타난 선대의 「불굴가」에 대하여 과연 그러한 설정이 타당성이 있는지 살펴봐야 한다. 「장진주사」를 제치고 「불굴가」를 사설시조의 효시작으로 정론화시킬 경우 다소의 반론도 있을 것으로 안다. 이를 위해서 우선「불굴가」와 「장진주사」의 시가 형태를 먼저 비교·분석해 보기로 하자.
A
① 가슴에 / 궁글 / 둥시러케 / 고
② 왼기를 눈길게 너슷너슷 와 그 궁게 그 너코 두 놈이 두 긋 마조자바 이리로 훌근 져리로 훌젹 훌근훌젹 져긔 나남즉 대되 그는 아모로나 견듸려니와
③ 아마도 / 님 외오 살라면 / 그 그리 / 못리라.
- 「불굴가」(진본 청구영언․ 549) * 빗금은 필자
B
① 잔(盞) / 먹새근여 / 잔 / 먹새근여.
② 곳 것거 / 산(算) 노코 / 무진무진(無盡無盡) / 먹새근여.
③ 이 몸 주근 후(後면) 지게 우 거적 덥혀 주리혀 여 가나, 뉴소보장(流蘇寶帳)의 만인(萬人)이 우러녜나, 어욱새 속새 덥가나모 양(白楊) 수페 가기곳 가면,
누른 , 흰 , 비 굴근 눈, 쇼쇼리 불 제, 뉘 잔(盞) 먹쟈 고.
④ 믈며 무덤 우 나비 불 제야, 뉘우 엇더리.
- 「장진주사」, 성주본 * 빗금과 밑줄은 필자
글 A를 우선 형태면으로 고찰해 볼 때, ①은 초장, ②는 길어진 중장, ③은 종장으로 파악될 수 있다. ①의 초장에서 3.2.4.2의 음수율을 보였지만, 고시조에서 황진이의 ‘어져 내일이야’가 첫 구에서 2.4음수를 보였으며, 김종서의 시조 ‘朔風은 나모 긋 불고 明月은 눈 속에 / 萬里 邊城에 一長劒 짚고서셔’에서도 그 음수율이 초장 3.6.3.5, 중장 2.3.3.4로 2음수 및 6음수까지 등장한 예가 많았었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볼 때, 시간의 등장성 원리에 따라서 율독을 하면 큰 문제점은 없었으리라 본다. ③종장의 ‘아마도~못리라’의 꼴은 3.6.4.4.로 시조의 율격으로서는 무난하며, 이 글이 사설시조로서의 형태로서는 충분한 조건을 갖추었다고 본다.
반면에, 「장진주사」는 「장진주사」의 ‘사’자가 가사의 ‘辭’일 뿐만 아니라, 성주본(星州本) 「송강가사」에 가사(歌辭)로 실려 있고33) , 황주본, 이선본, 관서본 등에는 가사와 단가 구별 없이 실렸으며, <문청공유사(文淸公遺事)>34) 에도 가사로 수록되어 있다. 이 밖에 송강별집추록(松江別集追錄)>(권1)에도 가사와 단가의 명확한 구별은 하지 않았기에 그동안 여러 학자들이 가사라고 지적하여 왔다.
글 B 「장진주사」의 형태를 놓고 종장 외에, 초장과 중장이 길어진 형태로 분석하는 경우가 있는데 무리가 있다고 본다. 그렇게 보는 견해는 ①과 ②를 합쳐 초장으로 보고 ③을 중장, ④를 종장으로 보는 견해일 것이다. 그러나 이 글을 굳이 장시조(사설시조)로 분석하려 한다면 / 표로 음보를 나누어 본 것같이, ①을 초장으로 보고 ②는 중장으로 보아 초장과 중장은 평시조형이고(이렇게 보는 이유는 ①과 ②의 음수율이 초, 중장에 매우 적합하다) ③이하는 종장이 길어진 형태로 볼 수도 있다.(그러나 이렇게 볼 경우, 3음수로 고정되어 있는 종장의 첫 음보 ‘이 몸’이 2음수로 문제가 된다)
만약 종장을 ④로만 본다면 밑줄 친 둘째 음보(주로 5~7음수율의 자리)가 12자로 너무 길어서 시조 종장으로서의 구비조건에 도달되지 못한다. 가사의 기본형이 3.4 또는 4.4조의 연속체라는 점과 이러한 여러 가지 형태를 고려할 때, 「장진주사」는 작가가 시조라는 개념을 염두에 두지 않고 이백의 「장진주」를 은연 중에 생각하며 흥취 중에 가사 풍류의 작시풍으로 지은 짧은 형태의 글임이 분명하다.
「불굴가」는 형태적으로 「장진주사」보다 훨씬 더 단가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 엄연히 <청구영언>과 같은 시조류의 가집에 모두 실려 있고 「장진주사」는 가사의 아류(亞流)로서 취급되어 왔다는 사실만을 보더라도「불굴가」가 지금까지 나타난 최초의 사설시조라는 점은 설득력이 있다. 이에 대하여 김종(金鍾)은 고려말 쯤에는 사설시조와 평시조가 공존하면서 서민생활이나 귀족들에게까지 생활현장에서 불렸을 것으로 보고, 「불굴가」를 들어 사설시조의 거취 문제를 거론하면서, “사설시조는 고려 중엽부터 서민들의 생활 현장이나 굴러다니며 불리던 것이 평시조의 틀이 마련된 고려 말엽에는 이미 귀족들의 생활 현장에까지 불릴 수 있었던 증좌로 이 「불굴가」가 뒷받침해 준다는 확신이 간다”고 하였다.35) 이에 대하여 황충기도 장시조의 발생 시기를 여말 「불굴가」를 논거로 삼아, 고려말 발생설에 동의하고 있다.36)
그러나, 효시문제와 관련하여 이동영은 「불굴가」를 가지고 사설시조의 발생시기를 논거로 한 견해37) 를 수긍할 수 없다 하며 국문학사에서 사대부가 사설시조를 원가(原歌)로 한역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유의할 것이며, 영조시대에 오면 사설시조의 대두에서 평민들이 사대부의 문자를 상투어화 하여 대화에서 농짓거리를 나누기도 하고 또 어떤 일에 비유하여 표현하기도 하였다고 하며 반론을 폈다.38)
이러한 문제는 사설시조의 발생과 향유층을 전고하면서 살펴 나아가야 한다. 사설시조는 18세기초 김천택이 편찬한 <진본 청구영언>의 「만횡청류(蔓橫淸類)」에 116수가 실림으로써 그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역대시조전서>(심재완 편저)에 수록된 3,335수 중 장시조(사설시조)의 작품수는 525수인데 이중 작가를 알 수 있는 것은 40명 선이고 나머지는 작자미상이다. 그나마 40명 가운데 신빙성이 있는 사람은 21명에 불과하고 이 21명의 작품수는 131수이다39) . 이들의 대부분은 중인 계층의 가객이 많은데 이러한 점은 영조시기에 중인계층의 부상(浮上)이 있었음을 드러내 주는 것이다. 그러나 전성기인 숙종 이전의 사설시조 작가는 21명 중 5명(고응척,정철,강복중,백수회,채유후)인데 이들은 전부 사대부들임40) 에 주목해야 한다.
여기서 종래에 일반적으로 여겨져 왔던 사설시조의 향유층이 서민층이나 중인층이었다는 설41) 은 재고를 해 봐야 한다. 사설시조의 발생도 평시조와 마찬가지로 대부분 그 창작자들은 사대부들이었다고 본다. 우선 사설시조의 효시작으로 논의되고 있는 정철과 변안열 모두 사대부들이 아닌가! 물론 전반적으로는 다 그런 것은 아니겠으나, 사대부층에 비해 서민층은 학문적 기반이 약했을 뿐만 아니라, 의식주의 당면 문제 해결 때문에 한가하게 풍류하며 화답하거나 습작할 기회도 흔히 주어지지 않았으리라 본다. 이러한 면은 평민보다는 사대부들과의 풍류 교유의 기회가 많이 주어진 기녀(妓女)들이 명시조를 많이 창작해 냈다는 사실로만 미루어 보아도 짐작할 수 있다.
변안열의 「불굴가」로부터 정철의 「장진주사」 시기까지는 약 180년 전후의 시차가 있으나, 시조문학과 관련된 시가문학의 흐름은 꾸준했다고 본다. 사설시조의 향유층이나 작가들 특히 창작자의 경우에는 사대부들이 더 많았었다고 짐작된다. 그러나 사설시조가 풍자적, 해학적, 야화적, 폭로적인 성향을 띠게 되면서 사대부로서 함부로 읊조린 노래에 대하여 자기의 명예에 혹시 지장이 있지 않을까 해서 작가미상으로 발표한 경우도 많았으리라 본다.
변안열 이후, 숙종대 이전에도 고응척, 정철, 강복중과 같은 사대부들의 사설시조가 있었다는 점을 상기해야 된다. 그러나 구전되어 오던 노래들은 18세기 영조대에 <청구영언>과 같은 가집을 편찬하면서 널리 취합, 채록하면서 그때까지 잠자던 각종 노래들이 나타나게 되었고, 그에 따라 많은 가객과 중인 작가층이 부상(浮上)되어 작품의 기록시에도 부분적으로 원전과는 달리 첨삭된 부분도 많이 있으리라 본다. 그러므로 영조 대를 전후한 시기가 특별히 사설시조의 전성기인 것처럼 인정되어 온 것은 시류상(時流上)으로 어느 정도 타당성은 있으나 완전한 논리는 아닐 것이다. 사설시조의 창작주체는 당초에 변안열, 고응척과 같은 사대부였지만, 채록과 가창은 주로 중인 계층이 담당하면서 영조대에 널리 일반 서민들에게까지 퍼져나간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향가(鄕歌)에서부터 그 뿌리를 찾아낼 수 있는 시조는 고려 중엽에 우탁(禹倬)과 같은 성리학자들에 의해 그 얼개가 형성되고 고려말에 완전한 모습을 드러내었다. 이 과정에서 유학자다운 고매한 풍격을 드러내는 평시조와 함께, 무신들이나 소탈한 귀족층 일부에서는 평민들의 입장에서 자유스러운 사설조의 장시조형도 읊었을 것이라 본다.
「불굴가」와 관련된 장시조(사설시조)의 사대부 발생설에 대하여 보다 더 구체적으로 긍정론을 편 이들은 김대행, 김학성이다. 김대행은 장시조의 작자를 ‘상층’이라고 전제하면서, ‘실명씨(失名氏)라고 된 작품들은 평민이라서 이름을 적어 놓지 않은 것이 아니고~(중략)~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그리 된 것42) ’이라고 하였으며, 김학성도 사설시조의 향유층이 처음에는 ‘서민층’이라 하였다가43) 다시「사설시조의 장르형성 재론」에 와서는 사대부 계층이라44) 고 재론하여 피력하였다.
필자는 시조시인으로서 「불굴가」와 「장진주사」를 면밀히 분석하고 여러 자료들을 검토함으로써 「불굴가」가 사설시조의 효시작으로서의 구비조건을 갖추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지금까지 발표한 검증된 논문자료들을 종합해 보아도 대은의 「불굴가」가 사설시조의 효시작이라는 것은 신빙성을 더해 준다. 대은의 「불굴가」는 문헌적 근거나 문학적 형태, 그리고 작가층의 형성 등 여러 논거들로 미루어 보아 「장진주사」에 앞선 사설시조의 효시작으로 일컫는 데는 이론(異論)의 여지가 없다고 본다.
3)「불굴가」와 「단심가」의 비교
필자는 앞에서 시조가 고려 말에 완전한 모습을 드러내면서 일부 귀족층 중에서는 평민스럽고 자유스러운 사설조의 노래도 불렸을 것이라 추론하였다. 여기서 일부 귀족층이라 함은 문반 측도 물론 해당되겠으나 문반보다는 무반 측에 더 무게를 두고 하는 말이다.
논의되고 있는 대은공은, 유학의 거두요 사대부의 표본인 포은과는 그 품성이나 성향이 상당히 달랐을 것이라 판단된다. 포은과는 달리 수하의 많은 장졸들을 거느리면서 서민적 심성을 체득하였고 무장 출신에다 오로지 임금만을 향한 충직한 심성이기에 포은보다는 서민적 풍모가 많이 풍겼을 것이며, 그러기에 「불굴가」는 「단심가」와는 다른 형태인 장시조로서 불렸을 것으로 짐작된다.
진본 <청구영언>에 전하는 「단심가」와 「불굴가」를 여러 가지 각도로 분석해 보자.
<단심가> 이 몸이 주거 주거 一百 番 고쳐 주거
白骨이 塵土 되어 넉시라도 잇고 업고
님 向 一片丹心이야 가싈 줄이 ①이시랴.
<불굴가> 가슴에 궁글 둥시러케 고
왼기를 눈길게 너슷너슷 와 그 궁게 그 너코 두 놈이 두 긋 마조자바
이리로 훌근 져리로 훌젹 훌근훌젹 져긔 나남즉 대되 그는 아모로나 견듸려니와
아마도 님 외오 살라면 그 그리 ②못리라.
「단심가」와 「불굴가」는 역사의 변환기에 나타난 시조형식의 노래라는 점에서 그 사상이나 표현기법 등 국문학사적 가치가 매우 높다. 두 노래를 비교한 결과를 보자.
구 분 | 단 심 가 | 불 굴 가 |
작가유형 | 문신(文臣) | 무신(武臣) |
주 제 | 忠臣不事二君(“向主 一片丹心”) | 忠臣不事二君(“奪吾主 吾不屈”) |
형 식 | 평시조 | 사설시조 |
성 격 | 정적(靜的), 관념적(觀念的) | 동적(動的), 감각적(感覺的), |
언술기법 | 직설적 | 비유적 |
배경어투 | 귀족적, 고백적이고 지극하다 | 서민적, 담대하고 결의에 차 있다 |
종 결 | ① 사고의 여지를 남긴 설의적 표현 | ② 굳센 각오의 결의적 표현 |
위에서 분석해 본 것과 같이, 두 노래의 공통된 주제는 모두가 ‘忠臣不事二君’이지만 여타 다른 면에 있어서는 많은 차이를 보인다. 이러한 차이는 각각 문무(文武)라는 출신 성분이 달랐던 원인이 컸을 것으로 추측이 되며, 아마도 두 사람은 당시에 시대 환경에 대응하는 방식에 있어서도 많은 차이를 보였을 것이다.
두 노래의 형식에 있어서도 「단심가」는 평시조를, 불굴가는 자유스럽게 사설조를 읊어 각각 정적(靜的)인 면과 동적(動的)인 면의 차이를 보였다. 「불굴가」가 「단심가」에 비해 자유스런 형태를 보이고 있는 것은, 고시조의 형태 중에 자수율 파괴가 많았는데 그것은 그 당시에도 관례의 틀에서 벗어나 자유스러움을 추구하고자 했던 서민스러운 일탈적 심리가 있었을 것이라고 판단되며, 시조의 틀이 잡힌 고려말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라고 본다. 언술기법 면에 있어서도 「단심가」가 직설적 기법을 쓴 데 비해, 「불굴가」는 가정하여 비유적 기법을 쓰면서 어떠한 고통이라도 인내하며 몸 바쳐 충성하려는 의지를 드러내면서 충절심(忠節心)의 극치로써 결의에 찬 면모를 보여 주었다.
그리고 특히 주의 깊게 관찰할 것은 「불굴가」에 나타난 시어(詩語)들이다. 「단심가의 내용이 유학의 거두가 표현하여 관념적이라면, 「불굴가」는 서민적인 어투에 구체적이면서도 감각적이다.「불굴가」의 한역문에 보이는 ‘藁索’과 ‘斗’와 같은 시어는 농경사회에서나 나오는 농물(農物)들로서 임금에게 충성심을 맹세한 「불굴가」의 작가는 전장의 무장으로서 병사들의 고통과 함께 하면서 서민들의 애환을 잘 아는 사대부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필자는 대은의 「불굴가」는 시조사적으로 장시조로서의 면모를 충분히 갖춘 사설시조의 효시작(嚆矢作)이며 그 문학사적 가치도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고 본다.
4. 맺음말
대은(大隱) 변안열(邊安烈)은 무장으로서 험난한 격전지에서 수많은 외세의 침략을 막아내어 일찍이 공훈 일등에 책록되고 여러 단계의 국가중책을 거쳐 말년에는 이성계(李成桂)가 시기할 정도로 영삼사사(領三司事)의 자리에까지 올라 임금의 신망이 두터웠던 인물이다. 그는 격변하는 고려 말 역성혁명(易姓革命)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변절하지 않고 임금에 대한 충성심을 끝까지 지키다가 반대파에 의해 간신(奸臣)으로 정죄되어 희생된 충신이다.
그에 대한 평가는 그의 업적이나 충절로 미루어 포은(圃隱)과 쌍벽을 이룰 만큼 추앙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비정(非情)하고 부정(不正)한 역사의 그늘에 가려 그 자취마저 빛을 보지 못했음에 원주변씨 후손은 물론, 관심 있는 사가(史家)들은 안타까움을 금치 못하였다. 왜곡된 정죄(定罪)로 소중한 사실이 묻혀지고 왜곡된 역사로 진실이 구부러진다면 이것은 미래를 위해서 크게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필자는 그동안 공(公)에 대한 역사적 사실(史實)과 「불굴가(不屈歌)」에 대한 정당한 인식이 미흡하였다는 점을 인식하고, 연구자의 눈으로 그에 대한 제반 사료들을 수집․탐색하고 고구(考究)함으로써 공(公)의 위상을 정당하게 회복시키고「불굴가」의 문학적 가치를 밝혀 주는데 조금이라도 힘이 돼 보고자 궁구(窮究)하였다. 그 결과 대은은 엄청난 위인이며 문학사적으로도 크게 족적을 남긴 인물이라는 점을 확인하였다. 필자의 논지에 이견(異見)을 보이는 논자도 많을 것으로 안다. 문헌에 의한 정의는 새로운 결정적 단서가 나타나면 언제든지 바뀔 수 있다는 점도 있음을 미리 밝혀 둔다.
대은공은 비록 비운의 역사적 그늘에 가려서 희생된 인물이지만, 충신으로서 그가 남긴 충정과 절의 정신, 그리고 국문학사(國文學史)에 끼친 자취가 너무나 크기에, 그에 대한 인식이나 문학적 업적은 마땅히 제자리를 찾아 새로이 평가를 받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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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박사, 시조시인, 문예창작 교수, 신한대 외래교수, 한국시조사랑시인협회 회장.
한국가곡작사가협회 명예회장, 강동문인협회 고문, 세종문학회 고문 등
1) <고려사>,권 126 열전39, 奸臣 2,변안열 참조.
2) 윤근수(尹根壽)는 그의「월정만필(月汀漫筆)」에서 “고려사 간신전에 실린 조민수,변안열로 말한다면 그들의 일과 행동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간사스러운 증상이 있음을 알지 못한다.”라고 했으며, 가정(柯亭) 조진관(趙鎭寬)도 “원천부원군(변안열)은 곧 고려말의 위인이다. 그의 공훈은 김취려(金就礪)와 같고, 그의 절조(節操)는 우현보(禹玄寶)와 같으며, 그의 충정은 최영(崔瑩)과 같으니, 국승(國乘)에 두드러지고 야사에 상세해 가히 고구(考究)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대은실기pp.210~211,이성무,「변안열의 생애와 평가」,지식산업사,2013.p.16참조). 안정복(安鼎福)도 “조민수, 변안열이 간신전에 들어 있는데, 이는 공정한 기록이 아닌 것 같다”(曺敏修 安烈 皆入奸臣傳 似非公筆, 順菴集, 卷10, 東史問答) 라고 지적하였다.
3) 1949년 楊州省澆會에서 刊行한 2권1책의 木板 線裝本
4) 황패강 「대은 변안열과 불굴가」, 단국대학교 논문집, 1968.
5) 강전섭,「傳邊安烈의 不屈歌 贋作論」, 충남대학교어문연구회, 1983.
6) 이동영,「不屈歌 贋作論의 辨正」, 한국문학논총 제8,9집, 1986.
7) 조규익,「장시조의 장르형성 과정 및 그 성격」,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91.
8) 황충기,「장시조의 발생고구(發生考究)」, 어문교육연구회, 1983.
9) 이성무,「대은 변안열의 생애와 업적」, 지식산업사, 2013,
10) 김학성,「사설시조의 장르형성 재론(再論)」,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 1986.
11) 이성무의 앞의 책(p.46)과 <원주변씨세보(首卷)> 冶隱 吉再 遺事편(pp. 231~232) 참조.
12) 圃隱歌曰 此身死復死復死一百回 白骨化塵土 魂魄有無 向君一片丹心 那有磨滅理.
13) 府院君歌曰 穴吾之胸如斗 貫以藁索長又長 前牽後引磨且戞 任汝之爲吾不辭 有欲奪吾主此事吾不從.
14) 황패강, 앞의 논문 p.61.
15) 圃隱先生集 續錄 歌條.
16) 황패강, 앞의 논문, p.63.
17) 강전섭, 앞의 논문, pp.132~133.
18) 이동영, 앞의 논문, p.25.
19) 봉화 변우룡씨 소장본.
20) 國譯冶隱吉先生文集(고려서적, 1965년)과 한국명저대전의 冶隱集(대양서적, 1978) 참조.
21) 변영석씨의 필사본.
22) 변덕우씨의 소장 필사본.
23) 강전섭, 앞의 논문, p.133
24) 심광세(1577~1624)의「해동악부」에는 정몽주가 이성계의 집을 나온 후 술친구네 집앞을 지나게 되었는데, 주인은 외출하고 뜰엔 꽃이 만발했는데 술을 청하여 마시며 ‘오늘은 날씨가 사납구나’ 하며, 꽃 사이에서 춤을 추었다는 일화로 이어진다.(정구복 편, 심광세의 해동악부 집성1, 여강출판사, 1988, pp.90~91참조)
25) <순오지(旬五志)>는 ‘십오지(十五志)’라고도 하는 문학평론집으로, 조선 중기의 학자 홍만종(1642~1725)이 보름 만에 책을 완성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26) <원주변씨세보(首卷)>, p.232~237.
27) <원주변씨 세보>와 이성무의「대은 변안열의 생애와 업적」(지식산업사,2013) p.46 참조.
28) 강전섭 앞의 논문, p.126.
29) 이동영, 앞의 논문, P.26.
30) 황패강 국역 : 한 가슴에 구멍 뚫어 동아줄 꿰어 / 앞뒤로 끌고 당겨 이 한몸 가루된들 / 내님 앗는 일만은 굽힐 줄이 없어라.(황패강, 앞의 논문, p.67 참조), * 황패강 국역의 이 글은 종장의 첫 음보가 탈격되는 등 시조로서의 형식 조건에는 맞지 않는다(필자 주).
31) 가사문학의 효시작을 여말선초의 나옹화상의 <서왕가>로 보는 견해도 있음.
32) 정철의 「장진주사」를 사설시조의 효시작으로 잡는 이는 최동원(<고시조론>, 삼영사, 1986, P.12)과 조윤제(<한국문학사>, 동국문화사, 1963, P.371)등이다.
33) 김강기 옮김, <송강가사>, 지만지, 2008, p76 참조.
34) 사계(沙溪) 김장생이 송강 정철의 행적을 기록한 책.
35) 김 종, 「사설시조의 연원고」, 한국언어문학, 1980, P.251~252.
36) 황충기, 「장시조 주해」, 국학자료원, 2006, p.12.
37) 이와 관련된 논문에는 김종의 「사설시조의 연원고」(한국언어문학 제16집, 1978), 김학성의 「사설시조의 장르형성 재론」(대동문화연구 제20집, 1986), 황충기의 「장시조의 發生考究」(어문연구 제36~37, 1983) 등이 있다.
38) 이동영, 앞의 논문, p..26
39) 최동원, 앞의 책, P.80.
40) 최동원, 위의 책, P.72
41) 고정옥(고정옥, <古長時調選注>, 정음사, 1949), 고미숙(「사설시조의 역사적 성격과 그 계급적 기반 분석」, 어문논집, 1991.), 강명관(「사설시조의 창작 향유층에 대하여」, 민족문학사 연구소, 1993)등은 사설시조의 작가가 중인계층이라고 주장하였다.
42) 김대행, <시조유형론>,이화여대출판부,1986,p.307~308.
43) 김학성, 「조선후기 시가에 나타난 서민적 미의식」,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 1984
44) 김학성, 「사설시조의 장르형성 재론」, 대동문화연구 제20집,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 19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