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한도 목차
1.김준학(金準學_859~1914)의 완당세한도와 글
2. 김정희(金正喜_1786~1856)의 세한도와 발문
3-1. 장악진(章岳鎭_19세기 활동)
3-2 오찬(吳寶_1785~1849)
3-3. 조진조(趙振祚_19세기 활동)
3-4. 반준기(潘遵祁_1808~1892)
3-5. 반희보(潘希甫_1811~1858)
3-6. 김준학(金準學_1859~1914)
3-7. 반증위 (潘會瑋_1818~1886)
3-8. 풍계분(馮桂芬_1809~1874)
3-9. 왕조(汪藻_1814~1861)
3-10. 조무견(曹楙堅_19세기 활동)
3-11. 진경용(陳景庸_1795~1858)
3-12. 요복증(姚福增_1805~1855)
3-13. 오순소(吳淳韶_19세기 활동)
3-14. 주익지(周翼墟_19세기활동)
3-15. 장수기(莊受祺_1810~1866)
3-16. 장목(張穆_1805~1849)
3-17. 장요손(張曜孫_1807~1863)
3-18. 김준학(金準學_1859~1914)
4-1. 오세창(吳世昌_1864~1953)
4-2. 이시영(李始榮_1869~1953)
4-3. 정인보(鄭寅普_1893~1950)
세한도 국보180호이며 감상문을 포함해서 길이가 14.695m에 달한다. 제자 우선 이상적이 보내준 책에 대한 감사의 선물로 그렸다. 서예가가 그린 그림으로 회화적인 작품성보단 그 속에 담긴 뜻이 더 깊다고 하겠다. 우선은 중국에 사절단에 13번 동행면서 16명의 지인으로 부터 讚의 글씨를 받아 온다. 이후 그림은 제자였던 매은 김병선에게 돌아갔고, 1914년 그의 아들 소매 김준학이 표지와 두편의 시를 첨부했다. 이후 여러 사람을 거쳐 경성대학교 교수였던 후지스카에게 팔렸고 그를 따라 동경으로 갔다가 1943년에 소전 손재형이 거금을 주고 다시 사오게 되었다. 소전은 1949년에 오세창, 이시영, 정인보에게 讚의 글을 받아 세편을 추가로 덧붙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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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준학金準學(1859~1914)의 완당세한도와 글
완당세한도,
갑인년 춘정월에 후학 김준학은 삼가 쓰다.
송백은 곧은 지조가 있어 범속한 나무들과는 어울리지 않고 바위 사이에 몸을 숨긴지 오래라도 아무도 부여잡고 오르지 못하네.
완당 노인을 떠올려보면 기이한 기상으로 푸른 절벽에 올랐으니, 문하에는 뛰어난 제자들이 모두들 도의와 문장을 갖추었네.
우선옹이 북경에 가는 날 완당이 정신의 뿌리가 담긴 그림 한 폭 그려주었네.
책 보따리에 넣어 만 리를 달려가니 명사들의 제영을 붙여주었네.
오묘한 솜씨는 미불의 서화를 보는 듯 이리저리 떠돌다 우리에게 왔네.
그럭저럭 60년 세월이 흘러 운수가 쇠하여 인간사도 어긋났네.
한겨울 변치 않는 지조를 본받는 것으로 그저 감회를 부치노라.
세한도의 시에 차운하여 악양 객지에 있는 종숙부 성년에게 부쳐드리고, 아울러 그의 육십년 생신을 축하한다.
갑인년 2월 20일 둔암생이 개성군 북산 채묵헌에서 쓰다.
,
내가 두루마리 첫머리에 크게 다섯 글자를 쓰고 나서 그 끝에 내 시를 덧붙여 썼다.
시는 경정 풍편수의 운을 썼다. 경정은 초서를 잘 썼으니, 우선옹의 회인시에 “휘갈기는 붓은 비바람과도 같아서, 종이 가득 초성의 솜씨 전하네”라고 했다.
지금 내가 병든 팔로 먹칠을 하여 보배로운 두루마리를 더럽혔으니 몹시 부끄럽다.
阮堂歲寒圖
甲寅春正月後學金準學敬書,
松柏有貞慘不與凡俗諧寄迹嚴阿久攀援莫誰階想像阮堂老奇氣蒼 崖及門瑰瑾者道義文章皆藉翁北學日相贈畫根菱藏險走萬里題詠 名士借墨妙看虹月流傳到吾齊往拜六十載運晚人事乖摹此後膠質 聊以寄所懷.
次韻歲寒圖詩,寄贈家從叔星年氏獄易旅次,仍壽其六十初度,時甲寅 仲春之日遊菴生題于開城郡北山彩墨.
余旣書卷首五大字, 今又好錄拙詩於其末, 蓋用馮景亭編修也. 馮善 川書, 蕩翁懷人詩云, 揮 灑如風雨, 滿紙草聖傳.’今我病腕, 塗鴉有汚宝 軸, 殊可也.
(인문印文) 매화서옥梅花書屋, 소매미정초小梅未定艸, 김준학인金準學印, 소매小梅
● 2. 김정희金正喜(1786~1856)의 세한도와 글
지난해에는 『만학집晩學集』과 『대운산방문고大雲山房文遠』 두 종의 책을 부쳐 주었고, 올해에는 또 하장령賀長의 『황조경세문편皇朝經世文編』을 부쳐 주었다. 이 책들은 모두 세상에 흔한 것이 아니라 천리만리 먼 곳에서 사온 것이다. 여러 해에 걸쳐서 얻었으니 한때 이루어진 일이 아니다.
게다가 세상은 도도한 물결처럼 온통 권세와 이익만을 좇는다. 그런 풍조 속에서 이처럼 서책 구하는 일에 마음을 쓰고 힘을 들였는데도, 권세와 이익을 얻게 해줄 사람에게 주지 않고 바다 멀리 초췌하게 시들어 있는 사람에게 보내면서 마치 권세와 이익을 좇는 세상사람처럼 하였다.
태사공(太史公) 사마천(司馬遷)은 “권세와 이익으로 뭉친 자들은 권세와 이익이 다하면 친분이 식는다.” 라고 하였다. 그대 또한 세상의 도도한 물결 속 한 사람이건마는, 권세와 이익을 좇는 도도한 물결 밖으로 초연히 몸을 빼내었구나. 권세와 이익으로 나를 대하지 않았기 때문인가? 아니면 태사공의 말이 그릇되었는가?
공자께서는 “한겨울 추운 날씨가 된 다음에야 송백이 더디 시듦을 알 수 있다.”라고 말씀하셨다. 송백은 본래 계절을 타지 않아 시들지 않는다. 추운 계절이 오기 전에도 송백이요, 추위가 닥친 후에도 여전히 같은 송백이다. 그런데 공자께서는 특별히 추운 겨울 이후의 모습만을 찬탄하였다. 지금 우선(蕅船) 군은 나에 대해 이전이라 해서 더한 것도 없고 이후라 해서 덜한 것도 없다. 그러나 이전의 군에게는 칭찬할 게 없더라도 이후의 군에게는 성인으로부터 칭찬받을 만하지 않겠는가? 성인이 특별히 칭송하신 것은 그저 시들지 않는 곧은 지조와 굳센 절개 때문만은 아니었다. 겨울이라는 추운 계절에 따로 느낀 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 전한시대의 순박하고 도타운 세상에서도 급암과 정당시처럼 어진 사람조차 그들의 형편에 따라 빈객이 모여 들었다가 흩어지곤 하였다. 하물며 하규현의 적공이 대문에 써 붙인 글씨는 인심의 박절함이 극에 이른 것이다. 슬프다! 완당(阮堂) 노인이 쓰다.
去年以晩學·大雲二書寄來, 今年又以藕硏文編寄來,此皆非世之常有, 購之千万里之遠, 積有年而得之, 非一時之事也. 且世之酒涵, 惟權利之 是趨,爲之費心費力如此,而不以歸之權利,乃歸之海外蕉萃枯槁之人, 如世之過權利者. 太史公云, 以權利合者, 權利盡而交疏. 君亦世之消消 中一人, 其有超然自拔於ǎǎ權利之外, 不以權利視我耶? 太史公之言 非耶? 孔子曰, 歲寒然後, 知松柏之後周. 松柏是母四時而不洞者, 歲寒 以前一松柏也. 歲寒以後一松柏也. 聖人特稱之於歲寒之後, 今君之於 我,由前而無加焉,由後而無損焉,然由前之君無可稱,由後之君亦可見 稱於聖人也耶? 聖人之特稱, 非徒爲後周之貞操勁節而已, 亦有所感發 於歲寒之時者也. 烏乎! 西京淳厚之世 以及鄭之賢, 賓客與之盛衰, 如下 亞榜門, 迫切之極矣, 悲夫! 阮堂老人書.
(인문印文) 추사秋史
● 3-1. 장악진章岳鎭(19세기 활동)의 글
도(道)는 높을 때도 있고 낮을 때도 있으며, 시대를 만남은 순탄함도 있고 험난함도 있다. 이것은 모두 하늘의 일이지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도가 높으면 따라서 높고 도가 낮으면 따라서 낮은 것은 사람의 일이지 하늘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전하는 말에, “하늘은 사람이 추위를 싫어한다고 겨울을 끝나게 하지 않고, 군자는 세상이 어둡고 더럽다고 해서 그 품행을 바꾸지 않는다.”라고 했다. 어찌 바꾸지 않을 뿐이겠는가. 오히려 더욱 단단히 지킨다. 단단히 지키고 나서야 높고 낮고 순탄하고 험난함에 능히 대처할 수 있는 것이다. 나아가고 물러나고 살고 죽을 때를 알아서 올바른 처신을 잃지 않는 이는 오로지 군자뿐이다.
道有隆有污,遇有順有逆,此皆天之事,非人所能為也,道隆則從而隆, 道污則從而污,此人之事,非 天之所能主也,傳言天不為人之惡寒而辍 其冬,君子不為世之闇濁而改其行,豈徒不敢改,猶將堅之,堅之而後, 可以隆,可以污,可以順,可以逆,知進退存亡而不失其正者,其惟君子乎!
공자께서는 “겨울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송백이 시들지 않음을 안다.” 라고 했다. 이는 굳건한 절의도 서리와 눈을 겪지 않았을 때는 사람들이 소홀히 여겨 알아봄이 늦고 등용함이 적음을 몹시 아쉬워한 말일 것이다. 그러나 송백의 시들지 않음은 날씨가 추워진 때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다. 군자가 송백의 절조를 배우려면, 먼저 날씨가 추워지기 이전 송백의 절조를 배워야 한다. 그 절조가 변함없기 때문에 사철 내내 바뀜이 없는 것이다. 여느 풀과 잡다한 꽃도 날씨가 추울 때 송백처럼 푸르기를 원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는 것은 평소에 그 절조가 굳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평소에는 절조가 굳건해도 어느 순간 변하는 자가 간혹 있다. 평소에 철조가 굳지 않은데도 어느 순간 변하지 않은 자가 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그렇다면 군자가 송백에게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를 알 수 있다.
절조는 높이 세우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세상을 깔보라는 것이 아니다. 하나라도 신중하지 않으면 여느 잡초들과 같은 무리가 될까 염려되어 그런다. 자신을 굳세게 다잡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그저 옛사람을 본받으려는 것이 아니다. 하나라도 삼가지 않으면 스스로 그 의지를 잃을까 두려워서 그런다. 바위산에서 늙어가도 외롭게 여기지 않는 것은 재능을 길러서 쓰일 날을 기다리기 때문이고, 명장(名匠)에게 버림받아도 원망하지 않는 것은 나의 천성을 온전히 지켜 천수를 누리려 하기 때문이다.
추운 날씨를 만나지 않았을 때는 여느 풀들과 다름이 없으나, 추운 날씨를 여러 번 겪어도 나뭇가지는 조금도 차이가 없다. 세상에 그 절조를 알아주는 자가 있어도 송백은 그 모습 그대로이고, 세상에 그 절조를 알아주는 자가 없어도 송백은 그 모습 그대로이다. 따라서 반드시 날씨가 추워진 뒤에 그 절조를 드러내는 것은 송백이 즐기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그 절조를 알아차리는 것은 송백을 깊이 아는 것이 아니다.
우선(蕅船)이 추사 김 선생이 그린 세한도(歲寒圖)를 보여주었다. 그래서 우선(蕅船)을 격려하면서 동시에 내 처지를 드러내는 글을 그 뒤에 몇 자 적어서 우선(蕅船)에게 질정을 구하고 내 스스로를 다잡는다. 그와 동시에 세상을 등지고 있어도 아무 걱정이 없는지 추사옹에게 받들어 묻고 싶다. 1845년 초봄 양호陽湖 장악진章岳鎭 쓰다.
孔子曰, 歲寒然後知松柏之後周, 蓋深惜夫堅貞之操, 不歷霜雪, 人多含 之, 知之者晩, 而用之者寡也. 雖然, 松柏之後洞, 不自歲寒始也. 君子欲 學松柏之節,當先學松柏未遇歲寒時之節,惟其節有常,故能貫四時而 不改. 彼夫凡雜英, 當歲寒時, 量不願爲松柏. 然而不能者, 素未堅其 節也,節堅於平時,或於頃刻者有之矣,節未堅於平時,而能不渝於頃 刻者, 未之間也. 然則君子之學松柏者, 可知矣.
植節不敢不高, 非以傲世, 恐一不愼, 將下與凡伍也. 自勵不敢不堅, 非云慕古, 恐一不謹, 將自失其志也. 老于山議, 而不以爲孤, 蓋將養其 材以待用也. 棄於匠, 而不以爲怨, 蓋將全吾眞以終古也. 不遇歲寒, 未嘗有殊於凡也; 질經歲寒, 未嘗稍異其枝柯也. 世有知其節者, 而松 柏自若也; 世無知其節者, 而松柏亦自若也. 是故必歲寒而後顯其節, 非 松柏之所樂也; 必歲寒而後知其節, 非深知松柏者也.
蕅船以金秋史先生所作歲寒圖見示,所以蕅船而亦以自況,因書數語 於後, 以質藕船, 兼以自勵, 亦將以世無問之, 仰窺秋史翁也. 乙巳 孟春場湖章岳鎭書.
(인문印文) ○○, ○○이
● 3-2 오찬吳寶(1785~1849)의 글
숲의 나무는 명예와 절조와 같으니 송백은 본연의 절조를 갖고 있네. 군자는 곤궁할수록 더욱 굳세지니 받아주지 않은들 무엇을 걱정하랴? 꽃피고 잎이 지는 것도 우연이니 어찌 여느 풀들과 함께 다투랴? 혹독한 서리와 눈을 만날 때면 천지의 바른 기운을 얻게 되리니 변치 않는 마음을 배우고 익혀 현인이 되고 성인이 되기를 바라네. 세한도(歲寒圖)에 받들어 써서 우선((蕅船) 존형(尊兄)에게 질정해 주기를 바로 청한다. 해우海虞 오찬吳贊 쓰다.
林木似名節松柏有本性君子窮益堅不容復何病榮枯亦偶然
置與凡卉競時護霜雪嚴氣得天地正傳習後影心希賢以希聖,
益堅不容復
奉題歲寒圖即請藉船尊兄大雅正之海虞吳贊呈稿,
(인문印文) 신오찬인臣吳贊印
● 3-3. 조진조趙振祚(19세기 활동)의 글
옛날 굴원(屈原)이 「귤송(橘頌)」을 지었는데, 그 끝에 “품행은 백이(伯夷)에 견줄 만하니, 이 글을 지어 본보기로 삼노라.”라고 했다. 굴원의 생각이 공자(孔子)가 송백을 찬미한 것과 어찌 다르겠는가. 귤을 찬미한 것은 귤이 천명(天命)을 받아 옮기지 않기 때문이고, 송백을 찬미한 것은 송백이 마음을 지닌 듯하기 때문이다. 아! 이것은 모두 감탄할 만한 일이다. 그래서 구장(九章)의 「귤송」을 본떠서 「송백송(松柏頌)」을 지어 완당(阮堂)의 뜻을 부연해보고, 아울러 우선(蕅船)에게 가르침을 구한다. 그 글은 다음과 같다.
하늘과 땅이 씨앗을 내려 타고난 본성을 북돋아주었네. 바위와 벼랑, 봉우리와 언덕에 자리를 잡아 뿌리 내렸네. 서리 맞은 다른 잎은 시들어도 시원스레가지 뻗었네. 올곧은 절개 바꾸지 않으니 그 덕(德)은 옥(玉)을 닮았네. 자연에서 생명을 받아 조금도 굽힘이 없네. 봄바람이 막 불어오면 서로 다투듯 보이지만 서로 맞서 있을 때는 조용하고 반듯하네. 용이 서리고 철사가 굽은 듯 때로는 재목감이네. 빈산이 높이 솟아 있어 까마득히 길도 나지 않았고 비스듬히 누워있어도 그 향기를 내어주기 어렵네. 푸른 잎이 일산처럼 층층이 덮여 결은 성글고 곱네. 꿩이 둥지를 틀지 않는 것은 높은 가지 싫어해서네. 화려한 모습 드러내지 않으니 중시할 일을 잘 알아서니 둥치가 천년이 되면 끝내는 쓰일 곳을 얻으리라. 경지 높은 사람은 고민하지 않고 높은 산처럼 우러러보네. 화목한 소리는 청탁(淸濁)이 어울려 봉황과 화답한다네. 그 아래서 거문고 타며 선왕(先王)의 도를 즐기네. 군자에게 분명히 고하노니 이보다 더 높은 것은 없네.
가시나무 심으면 가시를 얻고 복숭아나무 심으면 복숭아 열매를 얻네. 가을 바람이 한번 흔들고 지나가면 곱든 추하는 함께 시들어 떨어지네. 송백은 모든 나무의 우두머리로 남다른 자긍심을 가지고 태어났네. 좋은 재목은 큰 집을 짓기에 충분하고 아름다운 그늘은 먼 집까지 이르네. 여느 사람들은 화려함과 빼어남을 다투지만 군자는 근본됨과 소박함을 우러르네. 나무는 백년을 계획하지 않으니 대단하게 치켜세운들 무슨 보탬이 되랴. 그래서 위(魏)나라 공자 신릉군(信陵君)이 사마천(司馬遷)의 칭송을 독점했다네. 완당(阮堂) 그림의 뜻을 써서 우선(蕅船)에게 주며 질정을 바란다. 남난릉(南蘭陵) 조진조(趙振祚).
昔靈均作橘頌, 亂曰, 行比伯夷, 制以爲象. 屈子之意, 與夫子歎松 柏異哉! 美橘者, 以其受命不遷, 美松柏者, 則曰如松柏之有心, 於, 是 皆可感也已, 仿九章頌, 爲松柏頌, 以廣阮堂之志, 兼正藕船. 其辭 日,
后皇降種 因才篤 阿 在所託 霜葉零碎 考條沃 堅貞不改 德如玉宁受命大造惟其無曲今春風初來若相競今夫於抗衡靜以正 今螺蟠鐵屈時為枋今空山峨峨吵不可徑今優格天矯芳難贈今翠蓋 層結理睐順今文禽不巢憎其為峻宁文章不露知所重今枝幹千季終 得所用今至人無問高山仰今穆羽清濁和鳳皇今彈琴其下樂先王今 明告君子度無以尙.
種棘得棘刺種桃獲桃實西風一飄蕩美惡同衰歇森森百木長秉性自矜 別名材足大夏嘉蔭到避室恒人競華子 子崇本質樹無百年 豪舉 誠何益所以魏公子獨擅龍門筆,用阮堂繪意 贈萬船正之南蘭陵趙 振.
(인문印文) 조진조인趙振祚印
● 3-4. 반준기(潘遵祁)(1808~1892)
도연명은 소나무 길을 노래하였고 소동파는 측백나무 집을 시로 읊었네. 여느 꽃이 저만 홀로 피고 시들지만 (송백의) 절조의 굳건함은 겨울 되어 더욱 빛나네. 새 그림에 경계와 잠언을 담았으니 오래도록 요구할 것은 잊지 않는데 있네. 경학의 큰 스승은 큰 자라를 잡는 이라 낭환 사는 나는 학맥 이어감을 축하하네.
붓을 휘둘러 곧게 뻗은 나무를 그렸으니 사귄 벗에는 노성한 학자가 많네.이 자잘한 돌 하나도 보태셔서 소매 속에 넣어가 조선(東海)에 보관해주오.우선(蕅船) 존형(尊兄)의 질정을 바라며, 다마산인(茶磨山人) 반준기(潘遵郁)가 쓰다.
淵明賦松徑坡仙欲柏堂凡卉自榮落晚節堅益彰新圖寓規箴久要在不忘 經師釣螯手環祝瓣香放筆為直幹結交多老蒼乞補一卷石袖中東海藏,
萬船尊兄大雅正題茶磨山人潘遵祁,
(인문印文) 등산관매登山觀海
● 3-5. 반희보潘希甫(1811~1858)의 글
예운림(倪雲林)의 필의로 그린 한 폭의 그림 만 리 뱃길 따라 건너왔네.겨울의 절조를 고사(高士)가 전하고 신령스런 물건은 태평세월을 알리네.산골짜기에 있어도 재목은 버리기 어렵고 찬 서리를 맞아도 절개는 더욱 굳어지네.선비의 지조를 기리어 현 밖에 부치니 바다 건너 산속에서 진중하게 지내시라.세한도(歲寒圖)에 시를 써서 우선(蕅船) 존형(尊兄) 문단(文壇)의 질정을 청한다.오현吳縣 반희보潘希甫.
尺幅雲林筆 來從萬里船 冬心高士傳 神物太平年 岩壑材難棄 冰霜節愈堅 賞音寄外 珍重海山顛, 奉題歲寒圖 卽請藕船尊兄詞壇正定. 吳縣 潘希甫
冰霜愈堅
(인문印文) 보지補之
● 3-6. 김준학金準學(1859~1914 이후)의 글
집에 소장한 세한도(歲寒圖)에 추후 시를 쓰다.
몰아치는 거센 바람에 바다도 해도 어둑한데 송백만이 남아 눈앞에 푸르구나.
백년 만에 경학(經學)에 뛰어난 학자라 칭하고 한 시대의 시의 명성은 혜성과 같았지.
은殷나라 유민처럼 어찌 고국을 그리워하지 않으랴만
왕 승상의 신정 잔치는 다시 보기 어려워라.
지금 시들고 마른 모습을 비웃지 말고
용 비늘이 발해(渤海)를 진동시키는 일을 지켜보게나. 후학 김준학金準學은 삼가 쓰다.
捲地風來海日冥猶留松柏眼中青百年經術稱奇士一代詩名見客星 可耐殷民懷故更難王相宴新亭至今枯稿君休唉看龍鱗動渤溪, 华學謹,
● 3-7. 반증위 潘會瑋(1818~1886)의 글
추사는 해외의 뛰어난 선비 예전부터 높은 이름 들어왔네. 높은 이름에는 비방이 돌아오니 문득 속세의 그물에 걸려버렸네. 도도한 세상 풍속을 보라! 선비의 맑음을 누가 알리오. 그처럼 풍진 세상 개탄했으나 어진 벗(이상적)을 일찍 알았네. 숭고한 우정 한결같이 돈독하여 추운 겨울에도 맹세를 변치 않았구나. 저 송백처럼 타고난 성품이 굳고 바르니 한 겨울 푸른 이 나무를 그려 후한 정에 보답하려 하였네. 우선(蕅船) 선생의 부탁을 받아 반증위(潘曾瑋) 쓰다.
金君海外英 夙昔聞盛名 盛名毁所歸 輒爲世網嬰 滔滔視流俗 誰知士之 概念風塵中 早識賢友生 高誼篤終始 歲寒無渝盟 如彼松與柏 本性同堅貞 貌此後彫質 用以答厚情.
藕船先生屬 潘會瑋稿.
(인문印文) 계옥부季玉父
● 3-8. 풍계분馮桂芬(1809~1874)의 글
화려한 꾸밈은 뭇사람의 환심을 사지만 옛스런 용모는 세상과 어울리지 못하네. 바위 틈에서 자기의 뜻 지켜 살면 그게 바로 남들이 꺼리는 것이네. 김 추사는 비범한 선비로 하늘 높이 우뚝 솟은 절벽이네. 높고 밝은 벗을 벗삼아 뛰어나니 모두가 선계의 기질을 갖추었네. 뻣뻣한 기골은 일찍이 심었으니 힘써 노력하여 뿌리를 북돋았네. 화창한 봄날에 꽃이 필 때는 여느 꽃이 함께 피지 않겠냐만 바람과 서리가 한번 사납게 몰아치자 푸르름이 무리 속에서 두드러지네. 들지 않는다는 공자의 가르침 있으니 세상과 어긋나도 탓하지 않으려네. 곤궁할수록 도를 더욱 굳게 지키나니 부디 군자는 그 마음을 펼치시구려. 우선(蕅船)선생의 시정을 바라며 풍계분(馮桂芬) 쓰다.
華飾結衆悅 古兒非世諧 巖阿耿微尙 酒爲群忌階 金君振奇士 嶽嶽青雲崖 端友高亮特 一氣沆瀣皆 勁骨夙所値 努力培根萎 舒萌際春 豈不凡卉偕 風霜一以厲 蒼翠逾等儕 後凋宣聖訓 未嗟時世乖 固窮道彌堅 勖矣君子懷. 藕船先生是正 馮桂芬稿.
(인문印文) 풍계분인馮桂芬印
● 3-9. 왕조汪藻(1814~1861)의 글
사계절이 번갈아 바뀌어갈 때 사람들은 봄의 아름다움을 앞다퉈 탐내네. 봄 모습은 시들 때가 있으니, 추운 겨울을 누구와 함께할까? 드리워진 저 송백의 자태 푸르름으로 혹독한 겨울을 이기네. 어찌하여 굳센 가지를 쭉 뻗어 눈서리 속에 홀로 서있는가. 너는 평소와 다름이 없는데 사람들의 눈이 먼지에 가렸을 뿐이네. 문득 현인賢人의 마음을 생각하니 곤궁과 현달에 관계없이 도를 지키네. 뿌리가 튼튼하여 시들지 않으나 번화함은 중시하지 않네. 대들보감은 오래 기다려야 만들어지니 처음부터 끝까지 잘 지키게나. 우선(蕅船) 선생의 질정을 바라며 왕조汪藻가 쓰다.
四節遞推敗 世人競春容 春容有憔悴 歲寒誰與同 翳彼松柏姿 鬱鬱凌嚴冬 胡爲標貞柯 偏在霜雪中 匪伊異時 俗眼多塵蒙 因思吉士心 守道無窮通 根互不雕落 繁華非所崇 棟梁待晚成 相期保初終. 蕅船先生疋政 汪藻初稿.
(인문印文) 소산한묵小珊翰墨
● 3-10. 조무견曹楙堅(19세기 활동)의 글
추사(秋史)라는 이름 일찍 들었으나 아쉽게도 한 번도 만나지 못했네. 주인(疇人)의 학술에 이미 정통하였고 (저서에 『산학계몽算學啓蒙』이 있다.) 경학과 역사는 더욱 꿰고 있네. 중국의 가의(賈誼)나 동중서(董仲舒) 같은 인물로 그 나라에서 뛰어난 학자이네. 세상은 모나지 않은 태도에 젖어있으나 뜻이 크고 흔들리지 않는 선현도 있네. 우여곡절 끝에 상처를 입었지만 몸은 곤궁해도 도(道)는 변함이 없네. 북경(北京)에 사신이 찾아와 (우선을 말함.) 글과 술로 흥겨운 잔치가 열렸네. 나에게 세한도(歲寒圖)를 보여주니 잡풀 위 추운 숲 한 구석이었네. 봄날 화려함을 뽐내는 복사꽃 배꽃이 왜 없겠는가마는 푸르름이 한 겨울을 품고 찬 서리 속에 꿋꿋이 섰네. 아! 인생 백년은 번개처럼 지나가네. 기약한 일은 천추에 있으니 속세의 번영 따위와 다투지 말지어다. 서로 만날 날 알 수 없으니 먼저 이 시를 전하노라.
1845년 1월 22일 추사의 세한도에 붙여서 우선(蕅船) 선생께 드리니, 질정을 바란다. 오현(吳縣) 조무견(曹楙堅) 간보씨(艮甫氏)
早閒秋史名 惜哉未一面 疇人術既彈 著有算學啓蒙 經史尤貫串 譬我賈 董流 洵彼邦之彦 世事習模棱 先民有狂狷 詰曲傷迷陽 身窮道不變 日下 使車來[謂藕船] 文酒設歡讌 示我歲寒圖 寒林莽一片 豈無桃李姿 三春 露華街 青蒼抱冬心 挺然傲霜霰 烏虐人間世 百年迅飛電 所期在千秋 勿 與榮悴戰 相逢不可知 請以此詩先.
(인문印文) 견인(堅印), 임진제사(壬辰第四), 구사씨(舊史氏)
● 3-11. 진경용(陳景庸_1795~1858)의 글
뿌리 깊이 자란 큰 나무는 잎은 늘 무성하여 떨어지지 않네. 아름다운 명성 후대에 남아 시련으로 인하여 복을 받은 것이네. 여러 번 된서리를 맞아도 가지와 잎은 변함이 없고 온화한 기운이 서려서 이루지 못할 것이 없네. 역림(易林) 8구를 모아 우선(蕅船) 대아(大雅)께 드려 질정을 바라며, 진경용(陳景庸) 쓰다.
大樹百根 常茂不落 芳聲後時 因摧受福,
數被嚴霜 不改柯葉 和氣所居 無所不得,
集易林八句 卽奉藕船大雅是正 陳景庸稿.
(인문印文) 생숙笙赤
● 3-12. 요복증姚福增(1805~1855)의 글
오직 나무가 비범한 절조를 지키니 저 사람은 시들지 않는 소나무를 품고 있구나. 자신의 신세를 먼 상상에 실어 한겨울의 자태를 그려내었네. 바다 밖 나라도 계절과 사물이 같아 자연의 위대한 조화에 머리 숙이네. 또한 온갖 초목이 있어 화사한 봄에 맵시를 뽐내지만 꽃필 때가 잠깐 사이에 끝나고 모든 풀이 한번에 시들어 버리네. 매서운 추위에 아랑곳 않으며 괴로움을 참고 스스로 버티네. 때를 만남에는 늦고 빠른 때가 있으니 남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걱정하지 말구려. 송백을 좋아하며 백년을 기약해 보세.
우선(蕅船) 대아(大雅)의 질정을 바라며, 남사(南沙) 요복증(姚福增)이 쓰다.
維木挺奇節 伊人懷貞蕤 身世託遐想 繪此歲寒姿 海外節物同 甄陶仰大儀 亦有凡草木 争媚及芳時 芳時一以歇 百卉靡然萎 凌兢氷雪中 辛苦強自支 遭逢有早暮 勿慮無人知 相悅松與柏 百歲以爲期.
藕船大雅是正 南沙姚福增稿.
(인문印文) 자여상파字予湘坡
● 3-13. 오순소吳淳韶(19세기 활동)의 글
우연히 훑어보다 찬 숲에 눈길이 이르니 한 폭의 그림은 분명히 좌우명이로구나. 오늘 그림을 펼치고 곧잘 떠오르는 건 옛사람의 마음 닮은 고상한 이의 지조. 눈과 서리 겪을수록 더욱 푸르거니 이러한 절조 누가 가질 수 있을까? 우습구나 어지러운복사꽃배꽃의 아름다움은 봄바람에 기대어 살랑거릴줄만 아는구나.1845년 정월 하순 지어서 우선(蕅船) 선생께 드리며, 질정을 바란다. 귀안(歸安) 오순소(吳淳韶) 쓰다.
偶然點流到寒林 尺幅分明座右箴 今日披圖頻想像 高人節摻古人心
越經霜雪越靑葱 如此堅貞孰與同 堪唉紛紛桃李艷 只知披拂仗春風.
乙巳孟春下浣 題奉蕅船先生雅正.
歸安吳淳韶甫稿.
(인문) 신순소인臣淳韶印
●3-14. 주익지周翼墟(19세기활동) 의글
절조는 예로부터 스스로 지킴을 중시하니 남이 알아주길 애써 기대하랴. 하늘을 찌르는 검푸른 빛이 구름에 닿아 적막한 빈 산에 홀로 서 있네. 오랜 세월 산골에 자취를 두고 고인(高人)의 기상과 절조로 우뚝 서 있네.찬 서리 내린 세월을 겪지 않았다면 따뜻한 봄날 자연의 마음을 어찌 알리요.
1845년 초봄 양계(梁溪) 주익지(周翼墟)가 지어 우선(蕅船) 존형(尊兄)에게 드리며, 질정을 바란다
名節由來貴自持 苦心何必定人知 參天黛色凌雲氣 正在空山寂寞時 寄跡巖阿歲月深高人氣節自森森若非歷盡冰霜劫 那識陽天地心. 乙巳孟春梁溪周翼墀題奉蕅船尊兄大雅是正.
(인문) 익지사인翼堀私印
●3-15. 장수기莊受祺(1810~1866)의 글
세한도(歲寒圖)는 조선의 김추사(金秋史) 군이 그려서 그의 무리 이우선(李鴻船)에게 준 것이다. 저 향기로운 꽃은 고운 빛깔을 자랑해도 추운 겨울에는 꽃을 피우지 못하고, 무성한 나뭇가지는 그늘을 이뤄도 엄동설한에는 잎을 떨군다. 그러나 차가운 싸라기눈이 막 내려도 굳센 가지는 자태가 늠름하고, 해가 바뀌어도 아름다운 둥치는 평소의 모습을 자랑한다. 영고성쇠의 순환 속에서 운수가 기박해도 절조가 드러나고, 추위와 더위가 서로 바뀌어도 때가 되면 평소 지킨 것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겠는가? 세속의 울타리를 멀리 벗어나 부박한 습속에 얽매이지 않는 선비와 군자라면 여기에서 느낀 바가 있을 것이다. 이에 이 그림에 찬(讚)을 짓는다.
동해의 한 모퉁이 대황(大荒)의 산에 신령스러운 나무가 있는데 은둔하는 사람의 세상일세. 서리와 눈이 보살피고 바람과 구름이 오가서 그 본성을 이미 굳건한데 그 모습은 더욱 빛나네. 동량(棟梁)이 될 재목을 알아보고 그 누가 베고 다듬으랴? 산속에서 늙어가니 부여잡고 올라갈 길이 끊겨 있네. 재능이 못나지 않은데 때를 만나기 어렵구나. 이 그림 오래도록 남겨 나약하고 아둔한 이를 일깨우리라.
1845년 정월, 양호(陽湖) 장수기(莊受祺)가 써서 우선(蕅船) 옹께 드리며 질정을 바란다.
歲寒圖者, 朝鮮金君秋史所作, 以遺其徒李子滿船者也. 夫芳藤敷監, 不 榮凌兢之時; 繁條結陰, 或賈嚴凝之侯, 而凉羲甫集, 貞柯挺其姿; 杓樞 再周, 嘉植標其素․ 豈不以剝復相尋, 運窮而節著; 寒煥互易, 時至而守 見耶! 士君子蟬蛻塵網, 不嬰浮俗, 其亦知所感矣. 乃爲 之讚曰,
東海之隅 大荒之山 云有靈木 嘉遯人寰 霜雪滋護 風雲往還 既堅厥性 彌榮厥顔 識爲棟梁 誰石與班 老之巖阿 絶援與攀 匪材之湮 而遇之艱 留此終古 以勵懦頑.
乙巳孟諏 陽湖莊受祺題奉邁翁是正.
(인문印文) 신수기인臣受祺印
● 3-16. 장목張穆(1805~1849)의 글
지난날 서유자(徐孺子)에게서 완당(阮堂)이라는 이름을 들었네. 해외에서 찾아 온 기인(畸人)이 조선에서 빛난 비장의 자료를 가져왔네. 옛 책은 옥감당(玉鑑)을 보완하고 송정(松庭) 주세걸(朱世傑)의 성대한 업적을 넓혔네. (주씨朱氏의 『산학계몽算學啓蒙』은 중국에서 사라진 지 오래 되었는데, 완당(阮堂)이 자기 나라에서 구하여 1838년 봄 북경에 올 때 관찰사(觀察使) 서균경(徐鈞卿)에게 주었다.) 완당이 존경한 완원(阮元)이 그것을 보고 기쁘고 놀라 바로 출판에 부쳤고 제자들의 교정도 정확했네. 원본을 소중히 보관한 곳은 드높은 문선루(文選樓)네. (의진(儀眞) 상공(相公) 완원이 주씨의 책을 얻고 나서 나차구(羅次球)군에게 부탁하여 교정하여 인쇄했고, 원본은 문선루에 보관했다.) 완원은 그 아래 살았는데 노년에 이를수록 저술이 풍성했네. 나이들수록 근면함은 옛날 위무공(衛武公)을 닮아 물려받은 경전을 옛 주석으로 해석했네. (새 저서『시서고훈詩書古訓』이 완성됨.)한 질을 멀리 보내주었으니 속된 귀가 잠깐이나 호강했다네. 을사년 초에 문을 열어 손님을 맞았는데 (대령(大令) 중원(仲遠) 장요손의 집에 터를 마련했다.) 완당의 손꼽히는 제자 이상적이 공물(貢物)을 바치러 북경에 왔네. 내가 완당의 친구임을 알고 가져온 그림을 펼쳐 송백을 보여주었네. 도도한 대해(大海)의 남쪽 멀리 넘실대는 바다를 사이에 두고 삼가 완원 선생의 책으로 완당의 마음을 달래고 싶네. 내가 펴낸 고정림(顧亭林)의 연보(年譜)와 새로 간행한 책이 마침 잘 어울렸네. (내가 『시서고훈詩書古訓』과 『정림연보亭林年譜』를 완당에게 전했다.) 뜻을 이룸과 이루지 못한 것 따위는 따져보면 새털처럼 가벼운 것. 급암과 정당시가 한탄한 일은(그림의 뜻이 그러하다.) 여전히 세상 인연에 매여있는 것이네. 학문을 되돌려 금석(金石)의 노랫소리가 울려 퍼지고 가르침을 넓혀 큰 공적 떨치기를 바라노라.
우선(蕅船) 선생의 부탁으로 시를 짓고, 즉시 완당(阮堂)에게 편지를 올린다. 평정(平定)장목(張穆).
昔從徐孺子 獲耳阮堂名 畸人來海外 祕笈曜東瀛 前編補玉鑑 盛業恢松 庭 朱氏算學啓蒙 中國久軼 阮堂於其國得之 戊戌春來京師 以贈徐鈞卿 觀察 阮堂所慕院 見之喜且驚 趣付等劂氏 及門校算精 原珍弄處 選樓 峙高甍 儀真相公 得朱氏書 屬羅君次球 校算付梓 原本弄文選樓 老阮屋 其下 著述老愈成 耄勤古衛武 舊訓剔遺經 新著詩書古訓成 一函遠相賜 俗耳乍韶韻 端蒙初歲首 觴客拓軒楹 家仲遠大会 阮堂高弟子 納琛達神 京 知我阮堂舊 袖圖出冬榮 滔滔天海南 迢隔一水盈 敬老院書 用慰阮 堂情 亭林顧氏譜 新梓快合并 穆以詩書古訓及亭林譜 寄贈阮堂 得意 與失意 絜量鴻毛輕 區區汲鄭慨 圖意如此 猶然世慮擾 願回竈觚聽 金石 劇歌聲 願擴河汾敎 相業鬱崝嶸․
蕅船先生屬題 卽以奉簡阮堂 平定張穆.
(인문印文) 석주장목(石州張穆)
● 3-17. 장요손(張曜孫_1807~1863)의 글
팔 년 전 이별하던 슬픔은 기억 속에 까마득한데 뜻밖에 만나니 더욱 반갑네. 중국과 조선에 새로운 우정 맺어 백 리 먼 발걸음에 현사(賢士)들이 모였네. 객사(客舍)의 맑은 술 고아(高雅)한 잔치를 여니 서산의 상쾌한 기운이 정자에 내리네. 오랜 벗들 돌아보니 저마다 행운과 불운은 다르지만 북쪽 바다에서 바람을 타고 하늘 높이 오름을 기꺼이 보네. 조각구름 떠 있는 절해고도는 한낮에도 깜깜하고 외로운 나그네는 깊은 시름에 살쩍마저 세었네. 기묘한 바위 높이 뻗은 나무 저토록 빼어난가. 산의 덤불과 습지의 풀은 모두 그 앞에 모두 시들었네. 경전(經典)을 전수한 이야기는 우번 역(易)이고 글을 묻는 의곳은 싸늘한 양자(揚子)의 정자. 한 폭의 그림엔 영원의 뜻 담겨 시들지 않는 절조가 온 누리에 빛나네. (추사가 역(易)을 연구하는데, 나의 선조 『주역우씨의(周易虞氏義)』를 기초로 삼았다.)
우선(蕅船) 인형(仁兄)과 헤어진 지 팔 년이 되었다. 1844년 겨울, 우선이 왕명을 받들고 북경에 사신으로 왔다. 1845년 정월 비부(比部) 오위경(吳偉卿)의 우원(寓園)에 우선을 맞이하여 술자리를 열었는데, 와서 모인 북경의 사대부(士大夫)가 17명이었다. 지난 일을 이야기하고 문장을 논하며 모두 즐거웠다. 우선이 김추사(金秋史) 선생이 그린 세한도(歲寒圖)를 보여주며 제시(題詩)를 부탁했다. 즉시 두 수를 짓고, 아울러 한묵(翰墨)을 통한 추사 선생과의 마음의 교제를 생각한다. 언제 뵐지 몰라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양호(陽湖) 장요손(張曜孫) 병기(幷記)하다.
“왕자매(王子梅)와 장중원張仲遠(필자)의 편지를 받고, 추후에 심양(瀋陽) 도중에서 따라 짓다.”라는 우선의 대작시(大作詩)가 빼어나고 비범하여, 읊느라 입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 시의 운을 따라 시를 지지만 흉내냈다는 비웃음만 크게 들을 뿐이다. 중원이 다시 쓰다.
八載離愁入杳冥 相逢意外眼逾 中朝裙屐聯新雨 百里弧躔聚德星 客 邱清尊開雅宴 西山爽氣落孤亭 舊遊回首升沈異 喜見搏扶起壯溟 孤雲 絶島書冥冥 獨客沈憂髮不靑 奇石喬柯何磊落 山榛隰總零星 傳經消 息虞翻易 問字蒼凉揚子亭 一卷蕭疏千古意 後凋高節著清溟. 秋史治易 宗先世父周易虞氏義.
蕩船仁兄, 別八年矣. 甲辰冬奉使來都, 乙巳春正, 激飮於吳偉卿鄰部寓 園, 京師士夫來會者十七人, 話舊譚文, 相與樂甚. 蕩船出示金秋史先生 所作歲寒圖屬題, 率成二律, 兼懷秋史先生翰墨神交, 識面未知何日, 殊 槍然耳. 陽湖張曜孫幷記.
大作瀋陽道中追賦得王子梅及鄙書詩, 俊逸倜偉, 諷不去口. 因次原韻, 益著效轝之誰矣. 仲遠又記.
(인문印文) 금심琴心, 비왈능지(非曰能之), 중원지장(仲遠之章), 신장요손(臣張曜孫), 후생거사(後生居士)
● 3-18. 김준학金準學(1859~1914 이후)의 글
생일날 아침 세한도(歲寒圖)에 있는 시의 운을 빌려서 짓다. 원래의 시 2수를 덧붙인다. 아버지께서 남기신 가르침 알지 못했고 병들어 좋은 처방도 잘 알지 못했네. 한 달 동안 죽음의 문턱에 도달했다 이제 조금 나으니 이 몸 다시 살아난 때를 잊기 어렵네. 산속 창가에 눈 쌓인 때를 돌이켜 보면 창밖은 단지 측백나무만 빼곡히 서 있었지. 오늘 아침 벗을 만나 봄바람이 따뜻하니 그림을 감상하며 의연히 오래 견디네. 1914년 정월28일 소매(少梅)병든 늙은이 김준학(金準學)이 개성(開城)의 채묵헌(彩墨軒)에서 쓰다.
生朝書事 用歲寒圖中詩韻二首附錄.
先人遺戒未能知 病裡良方亦不知 旬月瀕危今稍愈 此身難忘再生時 回憶山牌臥雪深窗前有柏森森 今朝會友春風煖 讀畫依然耐久心 甲寅春正月廿又八日 少梅病搶金準學 書于崧陽之彩墨軒.
■ 4-1-1. 오세창吳世昌(1864~1953)의 글
완당 김선생이 무고를 당하여 제주도로 귀양 갔을 때, 세한도를 그려 그의 뛰어난 제자였던 이우선 선생에게 보내 경계와 권면으로 삼도록 했다. 학식이 뛰어난 두 선생의 담담한 사귐은 물과 같고 그 향취는 난초와 같았다. 마침 우선이 사신으로 연경燕京에 들어갈 때 이 그림을 가지고 가서 교류하는 여러 벗들에게 보이고 두루 시문을 받았다. 눈앞에 가득한 아름다운 시문은 대체로 오吳, 진晉, 제齊의 명사들이 지은 것이다. 그리하여 조각 종이에 깡마른 글씨로 그린 한 폭 그림은 그 명성이 중국에 널리 알려졌다. 이후에 이 그림은 우선의 제자였던 매은梅隱 김병선金秉善 선배에게 돌아갔고 그의 아들 소매小梅 준학군準學君이 쓰고 읊으면서 보관했으니 그림이 그려진 지 칠십 여년이 흐른 뒤다. 이웃 강대국들이 우리나라를 빼앗아 점령하고 국가와 개인이 소장한 귀중한 서적과 보물을 온갖 수단을 다하여 탈취하니, 이때 이 그림도 마침내 경성대학 교수였던 후지쓰카藤塚를 따라 동경으로 가게 되었다.
粤惟阮堂金先生被誣謫耽羅, 寫寄歲寒圖于其高足李穗船先生, 庸資箴 勉. 蓋學識超群之兩先生, 淡交如水, 其臭如蘭也. 適莉船使輅入燕, 携 此圖, 以示交游諸友, 遍徵題詠․ 滿目琳瑯者, 大抵吳・楚・晉・齊之名 流翰墨,於是乎尺紙枯筆之一圖,其聲價忽騰傳播中原焉.伊圖歸于 藕船及門梅隱金秉善前輩,其嗣小梅準學君,載題載詠而藏之,是爲圖 成後七十餘年也. 治強隣奪據我邦, 凡公私珍籍寶玩, 百計撰取, 于時此 圖, 竟隨京城大學敎授藤塚而去矣.
■ 4-1-2
세계에 전운이 가장 높을 때 소전素筌 손군孫君이 훌쩍 현해탄을 건너가 거액을 들여 우리나라의 진귀한 물건 몇 종을 사들였으니 이 그림 또한 그 가운데 하나이다. 포탄이 비와 안개처럼 자욱하게 떨어지는 가운데 어려움과 위험을 두루 겪으면서 겨우 뱃머리를 돌려 돌아왔다. 슬프도다. 만일 생명보다더 국보를 아끼는 선비가 아니었다면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었겠는가. 훌륭하고 훌륭하도다. 비밀에 붙이고 말하지 않아 사람들이 알지 못한지 이미5~6년이 지났다. 금년 9월에 군君이 문득 소매에 넣고 와서 나에게 보이기에 서로 펴서 읽고 어루만지니 비유컨대 황천黃泉에 있는 친구를 일으켜 악수하는 것과 같아 기쁨과 슬픔이 한량 없다. 수개월 동안 처음부터 끝까지 펼쳐 보아 이처럼 본말을 기록하고 아울러 시 한 수를 쓴다.
완당 옹이 한 자 종이에 명예를 널리 떨쳐 서울 북쪽 동쪽에 돌아다니게 되었네. 인생 백년은 참으로 꿈과 환상이라 슬픔과 기쁨, 얻음과 잃음을 물어 무엇하랴.
대한절大寒節 이틀 뒤, 팔십육세 노우老友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이 발문을짓다.
世界戰雲最高之際, 孫君素筌, 飄然渡玄海, 捨重金贖得吾珍貴品幾種, 斯圖亦居其一者也. 出沒於爆雨彈煙之中, 備嘗艱險獲還航․ 憶, 苟非愛 國寶逾生命之志士,豈能作此行勉, 善哉善哉․ 且而不泄人無知者業經 五六年, 今菊秋 君忽袖此以示余, 相與展讀而摩掌之, 譬如起黃泉之親 朋而据手焉, 喜悲無量. 乃涮覽數月,因記顚末如是幷題一時. 曰
阮翁尺紙也誕譽, 京北京東轉轉餘, 人事百年眞夢幻, 悲歡得失問何如. 歲大寒節後二朝 葦滄八十六老友吳世昌跋.
(인문印文) 신우일실심탁천고身寓一室心托千古, 오吳, 세창중명위창世昌重明葦滄, 갑자중원일생甲子中元日生
■ 4-2. 이시영李始榮(1869~1953)의 글
추사가 탐라耽羅에 있을 때 우선의 편지를 받고, 옛 정이 변하지 않음에 감동하여 이 그림을 그려 세한歲寒의 뜻을 담았다. 추사가 감동함은 마땅하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스승과 친구, 친지들 간의 성패와 부침에 관한 것이다. 산천도 문득 변하고 물건도 변하지 않는 것이 없으니 이때 지조를 지키면서 한겨울의 절의를 대한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내가 이 그림을 보니, 문득 수십년 동안의 고심에 찬 삶을 겪은 여러 선열先烈들이 떠올라서 옷소매로 눈물을 닦고 말았다. 추사에게 지각이 있다면 자신의 감정을 내려두고 나의 감정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소전형素荃兄의 질정을 바라며. 기축년 윤달 이시영李始榮.
秋史在耽羅得穗船書, 感其不改於舊, 而爲此圖, 以寓歲寒之思․ 夫秋史 之感則宜耳. 然是猶師友親志盛衰升沈之故。若乃皐瀆條移, 無一物不隨 以變, 于此時如能保所守, 而對歲寒難矣. 余觀此圖, 忽思數十年間, 苦心 金火之諸先烈, 爲之滋然掩袂. 秋史有志, 其將捨其感而感吾之感與!
素荃兄正之. 己丑閏月李始榮.
(인문印文) 이시영인李始榮印
■ 4-3-1. 정인보鄭寅普(1893~1950)의 글
인생은 지기에 감동하나니 감동이 지극하면 이치가 막히지 않네. 서예가는 지혜를 따름(손과정의 <서보>에 나오는 말)을 귀히 여기니 뜻밖에 얻음이있음을 말하네. 추사는 그림 또한 경지가 높아 이따금 절묘한 작품을 남겼네.이 그림이 한층 더 빼어나니 지기에게 주려고 만들어서지. 그때는 탐라로 귀양 간 처지라 머나먼 하늘 끝에 있었네. 곁에는 파도만 있고 해가 다 가도록찾는 이 없었네. 그 누가 옛정을 담아 멀리 귤밭 깊은 곳에 소식 전할까? 세밑이라 한창 쓸쓸할 때 편지가 문득 앞에 떨어졌네. 굳이 어디서 왔는지 묻지않아도 나를 생각하는 이는 우선(蕅船) 한 사람뿐. 달뜬 마을에서는 지난날을회상하다가 해가 뜨면 범인들과 어울리겠지. 그럭저럭 지금은 어디 있을까?그 사람은 어찌 그리 부지런할까? 손 가는 대로 쓸쓸함을 그리니 쓸쓸하여소리가 나는 듯하지만 쓸쓸함을 그린 것이 아니라 그대의 변함없는 우정을보인 것일세. 흘러가는 물처럼 세월은 빨라 무슨 일인들 상전벽해 아니랴마는 한 조각 옛 글씨 또한 이리저리 굴러다니며 풍상을 두루 겪었네. 손군孫君은 감별에 뛰어나서 언뜻 보고도 오매불망 잊지 못했네. 하늘을 향해 절을 올려서 정성에 신령이 내리기를 바랐네. 기구한 고생을 겪지 않은 것 없다가 하루아침에 바다를 건너갔네. 눈을 들어도 에도(江戶)는 뵈지 않고 오로지 보이는 것은 그림 있는 곳뿐이었네. 스스로를 비웃어 말했네. “고질병이 너무 심하지만 타고난 성품이니 나를 어쩌랴? 전쟁 구름을 너희들 마음껏 즐기거라!천지 사이에 그림 또한 위대한 것이란다!” 그림을 찾아내 거금에 사들이고캄캄한 밤길을 비틀비틀 걸었으니 도랑과 구덩이에 엎어져도 살피지 못했고정강이와 다리 시큰함도 느끼지 못했네. 백방으로 왜놈을 움직여 귀국 배에서 살피고 또 살폈네. 견지繭紙는 많이 넓지 않았고 겨울나무는 듬성듬성 높이 뻗어 스산한 한겨울 분위기가 쓸쓸하게 띠집을 감싸고 있었네. 줄 친 종이에 발문跋文을 이어 놓으니 금예今隸(위진 이후 예서)에서 유래한 줄 알겠구나.일찍이 추사옹이 이 그림을 그릴 때 뜻을 담았을 뿐 솜씨를 보이려 하지 않았네. 깊은 감회로 나타내니 노련한 글씨 오묘함이 끝이 없네. 추사옹이 우선船의 의로움은 알았으나 또 손군孫君의 의로움은 알지 못했네.
그림을 품평하는 안목을 헤아리면 옛날의 이우선이 지금의 손군만 못하리라.어찌 다만 그림만을 위했을 뿐이랴? 정신은 그림 그릴 때의 정경에 깃들었네.이 무한한 감회를 모아본다면 한 덩어리 화기和氣가 추사옹과 함께 영원하리라. 아! 세상이 한 바탕 뒤집혀서 초목조차 제 몸을 보전하지 못했네. 국보가모조리 일본으로 건너가니 지사들이 참담한 심경이었네. 굳센 지사 손군이있어 한 손으로 이무기와 싸워서 엎치락 끝에 이미 삼킨 보물 다시 빼앗으니 옛 보물이 이로부터 온전케 되었네. 누가 알았으랴! 이 한 그림 돌아온 것이지금 강산을 되찾을 조짐이었음을.
人生感知己, 感至理不隔. 書家貴狗知, 謂有想外得. 秋史畫亦高, 往往 留妙絶. 此圖更一層, 爲與知己出․ 是時乇羅謫, 逃矣天之末. 伴人有海 濤, 竟歲無翠音. 誰將舊依依, 遠寄箪橘深. 歲晏正落莫, 緘書忽墮前. 不 須問所自, 念我一蘊船. 月坊往昔感, 日出櫃馬群. 翕翕今何在, 伊人何 其勤. 信手寫蕭瑟, 蕭瑟如有聲․ 不是寫蕭瑟, 見子後凋情. 逝水雙丸疾, 何事不滄桑. 一片舊墨跡, 展轉亦備嘗․ 孫君工鑑別, 乍見耿不忘. 稽首 向冥漠, 庶幾格心香. 崎崛無不曁, 一朝過海去, 擧眼無江戶, 獨見圖在 處. 自笑癖太甚, 性分無我奈. 戰雲從汝醋, 乾坤畫亦大. 趙索重金講, 夜 黑步滿珊. 不省壕坑化, 不覺脛脚酸.百端動卉服, 歸舟看又看. 繭紙無 多闊, 寒林高參差․ 浙瀝大冬意, 歷落擁茅茨. 繼以烏欄跋, 今隸識由來. 嘗翁寫此圖, 寄意非求工. 出之以深感, 老筆妙不窮. 翁知穗船義, 不知 又孫君. 料其品畫眼, 古李遜今孫, 可但爲畫已, 神入畫時境․ 聚此無限 感, 一團與翁永. 嗚呼龍漢劫, 草木不能保. 國寶盡東渡, 志士慘懷抱. 健 者有孫君, 隻手爭蛟螭. 宛轉奪旣吞, 舊物全自玆. 誰知一圖返, 兆今江 山回.
■ 4-3-2
나의 벗 소전素荃 손군이 추사의 세한도를 손에 넣은 뒤 장황裝潢을 하기 전에 나에게 시를 요청하고, 함께 비단으로 가장자리를 꾸미겠다고 하였다. 내가 허락했으나 시절은 도탄에 빠지고 핍박은 갈수록 심해져 후미진 산골짜기로 도피할 것을 꾀하느라 바빠서 시를 지을 겨를이 없었다. 나라가 광복을찾게 되어 손군과 서울에서 다시 만났을 때 다시 이 그림을 내놓고 서로 마주보면서 감개에 젖었다. 이 글을 지어 허락한 책임을 다하고 우리 두 사람이지난날 가깝게 지내면서 서로 가깝게 의지했던 정을 나타냈다. 그 김에 그 시절을 생각해보니, 서화의 명인들을 핍박하여 작품을 내어 대중들에게과시하게 하였다. 시세를 엿보는 무리들은 (일본) 도적의 비위를 맞추기에힘썼다. 소전만은 홀로 “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歲寒然後知松柏之後凋”라는10자의 예서隸書와 간지干支를 썼을 뿐이었다. 어떤 이가 저들에게 그 사실을 알려 하마터면 위험할 뻔했다. 소전은 서법이 뛰어났고 몸가짐이 또 이와같았다. 추사의 그림에 정성을 쏟은 것은 좋아하는 고질병 탓이기도 하고 세한歲寒에도 지조를 바꾸지 않는 기개가 서로 감응하는 탓이기도 하다. 내가특별히 이것을 함께 썼으니 뒤에 글을 보는 이들은 쓸데없이 언급했다고 여기지 말아야 할 것이다.
소전素筌 학형學兄의 부탁을 받아 광복 다음 해 기축己丑년 윤달에 서울의 인경산引慶山 밑에서 짓다.
吾友孫君素荃, 旣得秋史<歲寒圖>, 裝池未就, 求普題詩, 將竝緣以綾. 普諾之, 而時屬玄黃, 遍迫轉甚, 方謨竄走窮峽, 卒卒無暇爲. 治國家光 復, 與孫君會漢京, 復出此圖, 相視感慨, 作此以釋諾責, 且見吾兩人往 時偪側相與之情也․ 因思其時, 迫書畫名人, 出所作, 欲以張示於衆, 窺 勢之徒, 務爲媚敵.素荃獨書「歲寒然後知松柏之後凋」十隸字且干支 而已, 或以告彼, 幾及危. 素筌書法冠絶, 而其自持又如此. 其拳拳秋史 之圖, 不惟癖好所在, 亦以歲寒不改, 氣類相感․ 普特幷書之, 後之見者, 當不以爲漫及也.
素荃學兄屬題, 光復之明年己丑閏月, 作於漢京引慶山下. 薝園 鄭寅普.
(인문印文) 담원인보薝園寅普
담원薝園 정인보鄭寅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