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용한 글 : 빨간색
▶진한의 이동에 대한 보충 설명
독자는 진이 진한의 전신(前身)이고, 요동반도 내륙에 있다가 평안도를 거쳐 예성강/한강 유역으로 내려왔다는 내 설명(「▩백제인 이야기」26회 참고)에 의문을 품을 것이다. 진한이 경상북도인 듯한 곳에 있었다는 기록(『후한서』/『삼국지』)은 남아있지만, 경기도에 있었다고 말하는 기록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최치원이 남긴 기록으로 보다 쉽게 풀 수 있다. 그는 진한인이 거주지 이름을 자신들의 근원지 이름을 따 ‘탁수(涿水)’라고 지었는데, ‘탁’을 중국음으로 읽지 않고 ‘도(道)’라고 읽었다고 증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약 평안도와 경기도에 ‘탁수/도수’라는 발음을 지닌 땅 이름이 나타난다면, 그것은 진인(진한인)의 평안도 통과와 경기도 정착을 설명하는 증거로 손색이 없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지도를 펼치고 한국(:이남)과 조선(:이북)에서 탁수계 지명이 나타나는 곳이 어딘지를 살펴보자. 지금까지 확인된 탁수계 지명의 분포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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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수계 지명 분포도(제주도와 경상북도는 뺌)
▣평안도 : 1개
- 평안남도 평원 덕수리
▣함경남도 : 2개
- 함경남도 영흥 두무리
- 함경남도 홍원 두무산
▣황해도 : 7개
- 황해도 곡산 두무리
- 황해도 평산 두무리
- 황해도 서흥(瑞興) 두무리
- 황해도 옹진 두모포
- 황해도 김천(金川) 두모산
- 황해도 김천 두모리
- 황해도 수안 덕문리
▣경기도 : 11개
- 경기도 광주군 도수리
- 경기도 광주군 도마리
- 경기도 강화(江華)도 두모천
- 경기도 가평군 두밀리
- 경기도 이천시 두미산
- 경기도 개풍 덕수리
- 경기도 양평군 덕수리
- 경기도 고양시 덕수원
- 경기도 옹진 덕적면
- 경기도 장단(長端) 덕적리
- 경기도 개풍 덕적산
▣서울 : 1개
- 서울 두모포
▣강원도 : 5개
- 강원도 철원 도밀리
- 강원도 속초시 도문리
- 강원도 양구군 두무리
- 강원도 홍천군 두미리
- 강원도 인제군 덕적리
▣충청북도 : 4개
- 충청북도 청원군 두모리
- 충청북도 옥천군 덕수원
- 충청북도 단양 덕문곡리
- 충청북도 제천군 두모곡산
▣충청남도 : 3개
- 충청남도 대전시 도마동
- 충청남도 부여시 두모곡
- 충청남도 서산(瑞山) 덕마리
▣전라북도 : 1개
- 전라북도 전주시 두모천소
▣전라남도 : 2개
- 전라남도 강진군 도무
- 전라남도 여천군 두모리
* 두 = 도
* 덕 = 닥 = 탁
* 적 = 전 = 천川 (최치원은 탁수가 탁천에서 비롯되었다고 설명했음)
* 마 = 말 = 물
* 문 = 물 = 수水
* 밀 = 물 =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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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시피 탁수계 지명이 가장 많이 모인 곳이 경기도다. 그리고 황해도가 그 다음이고 강원도는 3위이며 충청북도는 4위, 충청남도는 5위를 차지한다. 이는 탁수라는 땅 이름을 쓰는 사람들이 황해도에 있다가 경기도로 내려와 정착했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당시 황해도는 낙랑국이 차지하고 있었고, 따라서 진이 그곳에 오래 머무를 수가 없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강원도에 탁수계 땅 이름이 남아있는 까닭은 ― 횡성군의 태기왕 이야기에도 나오듯이 ― 진이 삼랑진 전투에서 진 뒤 진나라 사람들이 살 길을 찾아 강원도로 달아났기 때문이며, 경상도가 진한인의 최종 정착지가 된 까닭은 태기왕이 덕고산(태기산)에서 혁거세거서간과 싸우다가 패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한인의 이동은 탁수계 땅 이름이 있는 곳과 역사의 기록/전설이 일치하기 때문에 의심할 필요가 없는 사실로 봐야 할 것이다.
그래도 의심하는 독자를 위해 한마디만 더 하자. 앞에서 이야기한 가설이 사실이라면, 충청도 - 좀 더 구체적으로 가리키자면 금강 유역 - 에 있는 탁수계 땅 이름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역사서나 전설에는 진한 유민이 백제에 정복당했다는 말이 없고, 따라서 이를 ‘백제가 진한을 치고 포로로 삼은 진한인들을 금강 유역으로 끌고 간 증거’로 볼 수는 없다(만약 백제의 진한 정복이 정사正史에 실리지 못했다면 태기왕 이야기나 위례성의 우물 이야기처럼 전설로라도 남아야 하는데, 그렇지가 않은 것이다).
또 백제의 적은 마한의 잔존세력과 가야/서나벌/고구려였지 서나벌에게 쫓기는 진한 유민은 아니었으며,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여 있어 우군이 아쉬웠을 백제가 자신의 적(:서나벌)에게 쫓기는 난민들을 다시 공격했을 리는 없다.
그래서 나는 이 사실을 ‘백제(삼한백제)의 회유를 받아들인 진한인들이 스스로 백제의 중심지로 옮겨와 그 신민이 된 증거’나, 아니면 ‘광개토왕의 공격을 받고 살아남은 진한계가 금강 유역으로 옮겨와 새로운 지배층이 된 증거(나중에 자세히 설명)’로 받아들이며, 개인적으로는 후자일 가능성이 높다는 의견을 덧붙이는 바이다.
▶ 백제가 진한을 늦게 받아들인 까닭 - 말갈의 공격과 후한과의 전쟁
탁수계 땅 이름의 분포도와 진한인의 이동 경로가 일치한다고 해서 의문이 다 풀리는 건 아니다. 위 이론은 진한이 ‘왜’ 삼한 가운데 가장 나중에 백제의 신민이 되었는지를 설명해주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마한이야 백제에게 제일 먼저 당했으니 첫 번째로 복속되는 것은 당연하고 변한도 서나벌이 충청북도로 달아나자마자 백제에 편입되었는데(「▩백제인 이야기」25회 참고), 진한은 어째서 변한이 편입된 지 86년이 흐른 다음에야 백제의 일부가 되었는가? 그 까닭을 알려면 『삼국사기』의「고구려본기」와「백제본기」를 살펴보아야 한다.『삼국사기』를 펼치고 서기 61년(변한이 편입된 해)부터 서기 146년(진한이 편입되기 시작한 해)까지를 다룬 부분에 백제와 십제가 진한에 신경을 쓰지 못할 정도로 중요한 정치적 사건이 일어났는지를 확인해 보자.
서기 61년 ~ 서기 97년 : 백제[십제 포함]와 서나벌의 전쟁
→ 이 무렵에는 백제가 서나벌과 전쟁을 하느라 다른 일에 신경 쓸 여유가 없다. 따라서 경상북도로 달아난 진한 유민들은 백제를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서기 97년 ~ 서기 107년 : 백제로부터 독립한 십제가 백제와 대립하고 있다(「▩백제인 이야기」19회 참고). 따라서 이 때에도 백제는 진한 지역으로 갈만한 여유가 없다.
서기 108년 : 말갈의 약탈
“가을 7월, 말갈이 우곡에 침입하여 약탈하였다.”
―『삼국사기』「백제본기」기루왕 32년 조
→ 건국 이래 백제를 괴롭혔던 말갈군(고구려군)이 국경지대에 침입하고 있다. 가장 강한 적인 이들을 맞아 싸우던 백제군은 진한에 관심을 기울일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서기 114년 : 고구려와의 화해/후한과의 싸움
“왕이 가을 8월에 남해로 순수하여, 겨울 10월에 돌아왔다.”
―『삼국사기』「고구려본기」태조왕 62년 조
→ “후한과 대결하고 또 수세에 몰리는 국가적 위기의 상황에서 고구려의 왕이 무려 3개월이나 수도를 비우고 장기 순수를 다녀온다. 왕이 3달이나 수도를 비우고 있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고 아주 멀리 갔다는 뜻이다. 후한의 위협 속에 단행된 장기 순수는 후한에 대한 대응의 성격을 띤다. 그런데 고구려에서 남쪽 바다는 어디인가(김상 교수. 이하 존칭 생략)?” 바로 백제다. 고구려의 왕은 도읍을 비우고 백제의 도읍으로 ‘정상회담’을 하러 간 것이다. 그 증거로 “이 순수 이후 한반도에서는 말갈이 백제에 대한 공격을 멈추고, 요서에서는 마한(:삼한백제 - 옮긴이)이 고구려와 연합하여 후한과 전쟁을 치른다(김상).”
이 때 백제는 “고구려에 새로운 왕통이 등장하여 과거와 단절하였으므로, 건국기에 발생한 두 나라 사이의 해묵은 감정(내전 때문에 생긴 악감정과 백제가 세워진 이후에 일어난 두 나라의 대립 - 옮긴이)을 털어 버리고 후한의 공격에 대해서 서로 협력하기로 한 것으로 보인다(김상).” 이 화해가 이루어진 지 8년 만인 서기 121년, 고구려는 “마한과 예맥”과 함께 한나라의 현도성을 치는데, 이 때 백제(마한)와 예맥이 동원한 군사는 “1만여 기병(『삼국사기』)”이었으므로, 백제가 후한과 싸우는 고구려를 지원할 때 많은 힘을 쏟아 부었음을 알 수 있다(오늘날의 한국은 인구가 4300여만 명이고, 군대는 68만 명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라).
이처럼 대규모의 전쟁을 치르면서 동시에 다른 곳에 관심을 기울인다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더군다나『삼국사기』「고구려본기」태조대왕 조에 따르면 고구려 - 마한 - 예맥 연합군은 “크게 패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다시 대군을 일으켜 다른 곳을 칠 수는 없었을 것이며, 패전의 상처를 추스르고 다시 나라의 힘을 키우는 데만도 몇 년은 걸렸을 것이다. 이 기록은 백제가 진한을 포섭하는 데 시간이 걸린 이유를 설명하는 몇 안 되는 기록이다.
결국 백제의 진한 포섭(내지는 흡수)은 서기 131년 이후에야 시작되는데(이 무렵 십제가 독립을 잃고 백제의 속국이 되었기 때문이다. 자세한 내용은「▩백제인 이야기」19회 참고), 말갈(고구려)이 신라를 공격하는 마지막 해가 서기 140년이고 3년 후 “왕이 여러 대신들을 불러 말갈을 칠 것을 논의하였으나 이찬 웅선이 옳지 않다고 하여 그만두었다(『삼국사기』「신라본기」일성이사금 9년조)”는 기사가 나오는 점으로 미루어볼 때 고구려는 신라를 치려면 마한(:백제)을 뚫어야 하는데, 모처럼 맺은 우호관계를 다시 깨뜨릴 순 없기 때문에 더 이상 공격하지 않은 듯하며, 웅선도 서나벌(신라)이 백제와 고구려를 동시에 상대할 힘이 없기 때문에 일성이사금을 말린 듯하다는 의견을 내놓는 바이다.
“이후 신라본기를 보면 진한지역이 공격받는 분위기를 느끼게(김상)”되는데, 백제는 이 때부터 진한지역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하여 서기 146년에는 압독국이 항복을 취소하고 다시 튀어 나가려고 할 정도로 활발한 활동을 한다(「▩백제인 이야기」26회 참고).
“그러면 진한의 병합은 언제 끝났을까? 삼국사기를 보면 신라는 벌휴이사금 7년(190, 초고왕 25년) 진한지역에 마지막으로 진출한다.
․ 벌휴이사금 7年(190) ; 가을 八月, 百濟襲西境<圓山鄕> 又進圍<오谷城> 仇道率勁騎五百擊之 百濟兵佯走仇道追及<蛙山>爲百濟所敗
이후 (경기도에 있던 - 옮긴이) 백제(한성백제 - 옮긴이)는 진한지역을 자유롭게 통과하나 신라는 더 이상 진한지역에 나가지 못한다. 이로부터 마한이 진한을 병합한 것은 2세기 중/후반으로 약 50년 걸렸음을 알 수 있는데, 이 기간은 후한서와 삼국지가 한예(삼한백제 - 옮긴이)가 강성해졌다고 한 시기와 정확히 일치한다. 삼국지나 후한서 한전은 “桓/靈 之末(146~189) 韓濊疆盛 郡縣不能制”, 즉 2세기 중/후반에 해당하는 시기에 한예가 강성해져서 군현이 제어할 수 없었다고 하고 있다(김상).”이로써 우리는 백제의 진한 병합이 서기 146년 이후부터 시작되어 서기 190년에 끝났다고 계산할 수 있으며, 백제는 서나벌과의 전쟁이나 고구려와의 대립, 후한과의 전쟁이라는 더 큰 일을 눈앞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오랫동안 진한에 발을 뻗치지 못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참고 자료
―『삼국사기』
―『삼한사의 재조명』(김상, 북스힐, 서기 2004년)
―『비류백제와 일본의 국가기원』(김성호, 지문사, 서기 198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