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산교회(金山敎會/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3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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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산교회 평면(자료출처:한국의 건축문화재/전북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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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산교회 전경(자료출처:문화재청)
아래 링크에 김제 금산에 있는 금산교회 소개가 있다. 그 기사는 거부巨富와 종 사이에 시대를 넘어서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실려 있다. 이 기사를 보니 금산교회에 대한 소개가 부족 한 것 같아. 금산교회에 대한 소개를 조금 더 써보기로 한다.
금산교회는 우리나라 개신교 교회건축 발전사를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받고 있다. 금산교회가 세워진 때는 1908년이다. 이때만 해도 아직 남녀유별이라는 유교 덕목이 매우 강고하게 살아있었던 때이다.
내가 어렸을 때도 지금처럼 교회좌석을 남녀 구분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남자와 여자가 앉는 곳은 분명하게 구분되어 있었다. 누가 그렇게 앉으라고 하지 않았지만 남자는 남자끼리 여자는 여자끼리 앉았다. 부부라고 해도 같이 앉는 법이 없었다.
이런 것이 점점 남녀구분 없어지면서 섞여 앉기 시작한 것은 80년대 들어와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니 1900년대 초는 말할 것도 없었을 것이다. 이즈음에는 여자학교에서 선생이 가르칠 때도 선생 앞에 학생을 볼 수 없도록 막을 설치하였다. 그러니 교회에서 남녀가 같은 공간에 앉는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이런 당시 사회분위기 때문에 ‘ㄱ'자 형태의 교회가 나오게 된 것이다. 앉는 곳만이 아니라 출입구도 분리하여 완전히 남녀유별 할 수 있게 한 것이다. 당시 이런 형식의 교회가 많이 있었다고 한다. 평양 장대현교회, 전주 서문교회, 군산 구암교회, 서울 묘동교회 등 있었지만 현재는 금산교회와 익산 두동교회만 남았다고 한다. 그리고 1930년 이후로는 이런 ‘ㄱ'자 형태의 교회가 지어지지 않는다. (한국 건축문화재/전북편/349~350쪽)
1908년에 세워진 이 교회는 전주 선교부 소속인 데이트(Lews Boyd Tate/한국명:최의덕 1862-1929) 선교사가 지은 한옥교회이다. 데이트 선교사가 금산에 처음 왔을 때는 이 지역 부자였던 조덕삼의 사랑채에서 예배를 봤다고 한다. 금산교회부지도 조덕삼이 희사해서 지은 것이라 한다.(아래 링크 참조)
처음에는 1905년에 5칸으로 지었으나, 1908년 배재에 있던 이씨 문중의 재실을 옮겨와서 지은 것이라고 한다.(상기책 : 350쪽) 예전에는 다른 건물을 사서 목재를 활용하는 경우가 많이 있었다. 현재 금산교회 옆으로 1988년에 새로 지은 교회본당과 사택이 들어서 있다.
금산교회는 남북방향으로 5칸⨯3칸인 주구조체에 동쪽으로 2칸을 덧붙여진 것이다. 이 때문에 뒤집힌 ‘ㄱ자’ 형태를 이루고 있다. 남북과 동서의 두 구조가 만나는 곳에 강단을 설치하여 남쪽에 남자석, 동쪽에 여자석을 두었다.
두 구조가 만나는 곳에 기둥을 세웠는데, 이 기둥은 구조적으로나 기능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한옥에서 ‘ㄱ’자로 만나는 부분은 구조가 복잡하고 취약한 부분이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기둥을 세운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단순히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한 것뿐만 아니라 기둥과 ‘ㄱ’자로 만나는 부분 사이에 휘장을 쳐서 남녀석을 구분했다고 한다.
여기서 일자형 평면이었을 경우는 어떻게 남녀를 구분하였을 것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것에 대한 답은 강화성공회성당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성공회 강화성당 실측보고서>에 “수녀 1명과 네블(Nevile)양은 며칠 걸려 온갖 커튼과 발의 바느질을 마치고 칸막이도 만들었는데, 불행히도 칸막이는 남자들 시야에 여자들이 보이지 않도록 하는 구실을 하는 것입니다.”는 내용과 다음으로 “봉헌식에 앞서 다른 신도와 성직자들은 옛 성당에서 새 성당으로 시편 51편을 낭송하면서 순행행렬을 하는 동안, 여신도 들은 미리 안에 들어가 칸막이 뒤 정한 자리에 앉게 한 것이다.”라는 내용이 있다.(66쪽)
이런 것을 보면 중간에 커튼과 발을 설치하여 남녀석을 구분하였고 우선 여자가 입장하여 자리에 앉으면 나중에 남자들이 들어가는 방식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강화도성당에는 측면에 문이 있다. 초기에는 앞서 소개한 것처럼 순차적으로 들어갔으나 후기에는 여성들은 측면 문으로 들어가 자리했을 가능성도 있다.
금산교회가 건축적으로 높은 수준의 건물은 아니다. 그러나 당시의 시대상을 잘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무엇보다 내가 이 글을 쓰게 된 것은 아래 링크의 글 때문이다. 건물은 그 안에 품은 이야기가 있을 때 더욱 가치를 갖게 된다.
아래 글을 보면 당시 시대상을 극복한 아름다운 삶이 있다. 조덕삼 장로가 자기 종을 목사로 만들고, 목사된 후에도 극진히 모셨다는 것이다. 나는 금산교회 스토리의 주인공인 조덕삼 장로나 그의 종으로서 목사가 된 이자익 목사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그러나 시대의 모순을 뛰어 넘은 아름다운 이야기라는 것은 분명하다.
나는 기독계의 거목이 된 이자익 목사보다는 조덕삼 장로가 더 위대해 보인다. 조덕삼 장로의 열린 마음이 이자익 목사를 있게 한 것이고, 한국 기독교가 클 수 있는 밑거름이 된 것이다. 그런 분이 더 칭송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조덕삼 장로 같은 분이 많은 사회가 진정한 열린사회이다.
참고로 아래 글에 의하면 조덕삼 장로 손자가 고인이 된 조세형 국회의원이라고 한다.
자기 집 머슴을 담임목사로 세운 조덕삼 장로
http://m.cry.or.kr/news/articleView.html?idxno=5512
첫댓글 귀신사 갈 때 같이 갔었지요.
일 보시던 분이 매우 친절하시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