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우와 함께 해인사를 빠져나온 성철은 양산 통도사 내원암에 들었다. 청정승가 복원을 서원했던 성철은 그곳에서 도반들을 찾았다. 성철은 부처의 가르침을 제대로 설파하고, 그 가르침대로 살고 싶었다.”
세간에 성철은 딸 하나만을 둔 것으로 알려졌지만 사실은 두 딸이 있었다. 성철의 큰 딸 도경은 예쁘고 똑똑했다. 집안 어른들은 도경을 끔찍이 아꼈고 어디를 가든 데리고 다녔다. 식구들은 아버지 성철이 없었기에 더 애틋한 정을 쏟았을 것이다. 동생 수경(불필 스님)은 언니를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언니는 할아버지의 훤한 인물을 닮아 이마도 반듯하고, 콧날도 오똑하고, 눈도 크고 아름다웠다. 키도 늘씬하게 커서 모두들 미인이라고 했고, 성격도 좋아 집안 식구들, 특히 할아버지 할머니의 총애를 받았다.”
도경은 동생이 밖에서 놀다가 돌아오면 옷차림부터 살폈다. 동생은 활달해서 사내아이들과 놀다가 곧잘 옷고름을 떨어뜨렸고 도경은 말없이 그걸 달아주었다. 또 어른들 말씀에 순종하는 착한 맏이였다. 그러던 도경이 경허 스님의 ‘참선곡’을 읽었다. 추측컨대 아버지를 그리다 아버지가 빠져든 불교에 관심을 가졌음직하다. 당시 열심히 절에 다니던 할머니의 영향을 받아서 아버지의 출가를 이해하고 종국에는 동경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참선곡’은 이렇게 시작된다.
‘홀연히 생각하니 도시 몽중(夢中)이로다 / 천만고(千萬苦) 영웅호걸 북망산(北邙山) 무덤이요 / 부귀문장(富貴文章) 쓸데없다 / 황천객을 면할소냐 / 오호라 이내 몸이 풀끝에 이슬이요 바람 속에 등불이라’
초등학교 졸업을 앞둔 도경이 ‘참선곡’을 가슴에 담고 있었다는 것은 자연 성철의 유년시절을 떠올리게 만든다. 어린 나이지만 아버지처럼 ‘영원한 삶’을 찾으려 했을 것이다. 성철이 훗날 딸(불필 스님)에게 준 법문 노트의 머리말을 보면 마치 ‘참선곡’의 변형처럼 느껴진다.
‘초로인생(草露人生), 풀잎의 이슬 같은 인생! 들판의 저 화초는 겨울에 죽었다가 봄이 오면 다시 꽃이 피건마는, 오직 이 인간은 한 번 죽으면 아주 가서 몇 천 년의 세월이 바뀌어도 다시 돌아오는 이 없으니, 우주는 인생의 분묘라 함은 이를 두고 이름이라. 참으로 영원한 비극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도경은 절에 가서 입을 것이라며 손수 바지를 지었다고 한다. 그리고 아버지가 정진 중인 대승사에 편지를 보냈지만 위에서 이미 살핀 것처럼 성철의 손에는 닿지 못했다. 도경은 ‘큰 중이 되려면 공부를 해야 하니 학업을 마치고 오라’는 노스님의 답장을 받고 실망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출가를 꿈꾸며 열심히 공부했을 것이다. 도경은 집안 어른들의 바람대로 반듯하게 자랐다. 그리고 진주여중 입학시험에 합격했다. 집안뿐만 아니라 묵곡리 일대에서도 처음 있는 경사였다.
1946년 추석이었다. 열네 살 도경이 밖으로 놀러나갔다가 돌아와 갑자기 아프다며 자리에 누웠다. 그리고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동생 불필의 얘기를 옮겨 본다.
‘(언니는) 자기 손바닥을 한 번 쳐다본 후 엄마를 향해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엄마, 나를 믿는 모양이지? 나를 믿지 마.” 언니는 사흘 후 거짓말처럼 저 세상으로 가고 말았다. 예쁜 중학교 교복을 맞춰 놓고 한 번도 입어보지 못한 채 언니가 그렇게 가버리자, 할아버지 할머니의 슬픔은 물론이고 어머니의 비통함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누구 하나 입을 열어 말하는 사람이 없을 만큼 집안은 정적에 잠겨 있었다.’
집 앞 강가에서 화장을 했다. 어른들은 수경에게 언니의 마지막 모습을 보지 못하게 했다. 도경은 숲 속 큰 소나무 밑에 한 줌의 재로 묻혔다. 정말이지 믿기지 않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할아버지 이상언은 비탄에 빠졌다. 딸이 죽었건만 그림자도 비추지 않는 성철은 정녕 자신의 아들이 아니었다. 도경은 죽은 지 7일째 되던 날 어머니 꿈에 나타나 교복이 입고 싶다고 했다. 어머니는 그 교복을 도경이 묻힌 소나무 아래서 태웠다.
사십구재를 지낸 날 밤에는 고모의 꿈에 나타나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를 스님으로 만들어주었으면 죽지 않았을 텐데…. 나는 이제 천상으로 갑니다.”
그리고 불이 난 것처럼 환한 숲속으로 사라졌다고 한다.
그 무렵 성철은 하안거를 마치고 파계사 성전암에 머물고 있었다. 대승사가 선방 문을 닫았고, 그곳에 있던 선객들은 다시 구도처를 찾아 흩어졌다. 성철은 석암 스님과 함께 파계사 산문을 넘었다. 홍경, 자운, 종수, 청담, 도우는 희양산 봉암사로 거처를 옮겼다, 봉암사 주지 최성업이 선방을 열겠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이듬해 1947년, 동안거를 마친 선승들에게 반가운 소식이 날아들었다. 해인사에 가야총림을 세운다는 것이었다. 종단을 접수한 소위 개혁승들은 삼보사찰(통도사, 해인사, 송광사)을 총림으로 만들자고 주창했고, 그중 해인사를 가장 먼저 총림 시범사찰로 지정했다. 총림이란 선원, 강원, 율원을 갖춰야 했다. 중국의 총림을 본떴으니 나무들이 모여 숲을 이루듯 각기 다른 소임의 승려들이 모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곳이었다. 가야총림은 효봉 스님을 방장으로 추대했다. 정든 송광사를 떠나오는 노장의 눈에 이슬이 맺혔다고 한다. 효봉은 그 아쉬움을 시에 담았다.
‘내가 송광사에 온 지 어느덧 10년 / 옛 어른들 품 안에서 편히 먹고 자랐네 / 한데 오늘 조계산을 떠나는 까닭은 무엇인가 / 인간과 천상의 큰 복밭을 갈기 위해서라네’
효봉은 해인사를 복밭으로 갈겠다는 원을 세웠다. 그것은 결국 인재양성이었다. 사찰에서 술 냄새와 비린내를 없애려면 술 마시고 고기 먹는 승려들을 추방해야 했다. 해인사로 가는 길은 멀었다. 나흘 동안 걷고 또 걸으면서 효봉은 조선불교를 새롭게 일으킬 수좌들이 한 자리에 모여 정진하는 광경을 그렸다. 생각만 해도 장엄했다.
선방을 찾아 이리저리 떠돌던 선승들이 가야산으로 향했다. 청담, 홍경, 종수가 봉암사를 나왔다. 봉암사에 있던 수좌들은 막 사다놓은 커다란 목간통을 걸어보지도 못하고 그냥 짊어지고 내려와야 했다. 성철도 소식을 듣고 성전암을 나섰다.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수좌들이 100명도 넘었다. 이리저리 쫓겨 다니며 눈칫밥을 먹던 선승들은 제대로 실컷 공부 한번 해보자며 해인사에 모였다. 하지만 총림을 세우겠다는 뜻만 높았을 뿐 현실은 무엇 하나 준비된 것이 없었다. 총림 운영을 어떻게 할 것인지 의견만 분분했다. 종단 측에서는 최범술, 해인사 측에서는 주지 환경, 그리고 수좌들을 대표해서는 청담과 성철이 수시로 협의를 했다. 사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총림의 재정 문제였다.
종단에서는 총림 예산을 따로 마련해 주지 못했다. 대신 해인사의 논밭을 대처승들과 총림이 반반씩 나눠 갖도록 했다. 그런데 정작 소출이 많은 멀쩡한 논밭은 대처승들이 차지하고, 재 밑의 천봉답이나 산간벽지의 척박한 밭은 총림에 주었다. 해방공간에서도 대처승의 입김은 여전했다. 입은 많은데 양식이 부족했다. 한창 수행 정진해야 할 수좌들이 바랑을 짊어지고 동냥질을 해야 했다. 마음껏 공부만 해보겠다는 수좌들의 원이 자고나면 조금씩 부서졌다.
성철과 청담이 구상한 총림 속의 계(戒)살림도 그리 여의치 않았다. 여러 색깔의 대중이 어떤 규약이나 약조 없이 모여 살다 보니 중구난방이었다. 가야 총림은 성철과 청담의 ‘대승사 구상’과는 너무도 다른 모습이었다. 종단과 총림이, 해인사와 선승들이, 비구와 대처승이, 또 비구와 비구가 다퉜다. 적폐(積弊)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비록 명분으로 가렸지만 그 속의 욕심이 훤히 보였다. 성철은 낙담했다. 어정쩡하게 서산으로 넘어가는 하루 해가 아깝기만 했다. 도우에게 말했다.
“내가 보기에 이곳은 싹수가 노라네. 우린 공부나 하러 가세.”
성철은 청담에게도 함께 떠나자고 했다. 하지만 청담은 그래도 종단에서 하는 총림이니 한 철은 있어야겠다며 해인사에 남았다. 불교개혁의 서원은 간절했지만 아직 시절인연이 닿지 않았음이었다. 그 후 가야산에는 총을 든 사람들이 자주 나타났다. 일제가 떠났지만 세상은 여전히 험했다. 가야총림은 제대로 서보지도 못하고 스러졌다. ‘최초의 총림’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도우와 함께 해인사를 빠져나온 성철은 양산 통도사 내원암에 들었다. 청정승가 복원을 서원했던 성철은 그곳에서 도반들을 찾았다. 성철은 부처의 가르침을 제대로 설파하고, 그 가르침대로 살고 싶었다. 조선시대 500년 동안은 반유반승(半儒半僧), 반승반속(半僧半俗)의 풍조를 당연시했다. 일제시대에는 온갖 잡동사니가 유입되어 정체성마저 잃어버렸다. 이제 선종의 맥을 잇고 선풍을 다시 일으켜야 했다. 성철은 봉암사를 바라봤다.
김택근 언론인·시인 wtk222@hanmail.net
[1305호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