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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 3사는 ‘고구려 전성시대’다. SBS의 <연개소문>, MBC의 <주몽>, KBS의 <대조영> 등 방송 3사의 주요 드라마가 모두 고구려를 다루고 있다. 중국의 동북공정 때문에 고구려 역사에 대한 관심이 고조된 결과다. <주몽>은 고구려를 창건한 추모왕(동명성왕)의 건국기를 다룬 사극이고, <연개소문>은 고구려 말기를 배경으로 연개소문의 권력 창출 과정을 다루며, <대조영>은 연개소문이 영류왕을 살해한 이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들 모두 ‘고구려’ 시대를 중심에 두고 있다. 역사 기록에 부합하는지 여부를 떠나 그동안 잊고 지내던 고구려 역사를 안방에서 만날 수 있다는 점에서 고무적이다. 그러나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응하는 데 치우쳐, 우리가 역사에서 배워야 할 교훈은 정작 뒷전에 밀렸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고구려 역사에서 배워야 할 것은 무엇일까? 세계화, 개방화로 명명되는 현대사회에서 한반도가 취해야 할 개방적이고 포용적인 자세일 것이다. 우리 사회엔 이주노동자를 마녀사냥식으로 검거하고 욕설과 폭행 등 반인권적 태도를 보이며 색안경을 끼고 혼혈인을 바라보는 경향이 강하다. 사회 저변에 깔린 백인 우월주의와 스스로 백인인양 인식하는 B급 인종우월주의, 그리고 폐쇄적 민족주의가 강하게 작동하고 있다. 고구려의 시조 주몽이 북부여를 탈출한 인물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고구려가 계승한 고조선과 부여는 예맥족이 세운 국가다. 중국은 옛날부터 자신을 제외한 종족을 방향에 따라 동이(東夷), 서융(西戎), 남만(南蠻), 북적(北狄)으로 불렀다. 표현은 다르지만 오랑캐라는 뜻이다. 우리나라는 중국의 동쪽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동이(東夷)라 불렸다. 동이에는 여러 종족이 세운 나라들이 있었는데, 이 중 고조선과 백제를 세운 사람들을 예맥족이라 불렀다. 고구려는 예맥족이 건국했지만 한족(韓族), 선비족, 한족(漢族), 거란족 등 여러 계통 사람들을 주민으로 거느리고 있었다. 고구려 건국 후 북방 유목민이 세운 전연과 후연, 저족이 세운 전진, 갈족 계통의 후조, 한족이 세운 진, 한족이 양자강 이남에 세운 동진 등 여러 왕조가 흥망성쇠를 거듭하며 고구려와 접촉했다. 그밖에도 국가를 형성하지 못한 숙신족, 거란족 등 다양한 종족이 존재했다. 고구려가 동북만주를 장악한 뒤 이들은 자연스럽게 고구려에 편입됐다. 중국의 변화에 따라 망명해온 이들도 상당했다. 북연의 왕 풍홍, 북연 왕 풍발의 동생 풍비, 요동 서북부에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선비족의 일파인 우문부의 왕 일두귀, 동이교위(중국이 동이족을 통제할 목적으로 만든 관직) 최비, 선비족 고위 관료인 동수, 전연의 최고 실권자 모용평 등 왕족과 고위직들이 중국의 혼란을 피해 고구려에 망명했다는 문헌기록도 남아있다. 안악 3호분 각저총 벽화에 코가 큰 서역인이 씨름하는 모습이 보일 정도로 고구려는 다종족국가였다. 고구려는 수․당과 끊임없는 전쟁을 벌여야 했다. 이 과정에서 자주 거론되는 종족이 말갈족이다. 당나라는 태종 이세민이 진두지휘한 645년 침략전쟁에서 말갈족 군대가 눈부시게 활약하자 말갈병사 3천명을 생매장하기도 했다. 말갈족은 고구려 패망 후 부흥운동에 나서기도 했다. 대조영이 세운 발해도 고구려 후계국임을 분명히 했다. 말갈족도 엄연한 고구려인이었다. 말갈족은 발해 멸망 후 여진족이라는 이름으로 금나라, 청나라를 세우면서 우리 역사에서 멀어졌다. 고구려가 불교를 가장 먼저 받아들인 것은 4세기 소수림왕 때다. 국사교과서에는 불교를 받아들여 왕권을 강화하고 국가통합의 기틀을 마련했다고 간략하게 설명돼 있지만, 소수림왕이 불교를 받아들인 것은 다종족국가인 고구려 사회를 정신적으로 통합하기 위해서라고 봐야 한다. 계속되는 정복전쟁으로 요동까지 거느린 고구려는 개별 종족의 문화와 생활을 인정하는 간접지배방식을 취했다. 고구려가 요동의 대국으로 호령할 수 있었던 것은 이민족들을 흡수, 통합해 다인종, 다문화정책을 폈기 때문이다. 역사학자 김현숙 박사는 <다시 보는 고구려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고구려는 자신과 다른 존재에 대해 그다지 배타적인 시각을 갖고 있지 않았다. 물론 신분제 사회이고 예맥족이 중심인 나라였기 때문에 그에 따른 차별은 있었겠지만 다른 왕조에 비해서는 확실히 열린 나라였다. 이러한 점에서 고구려는 대국적 기질을 가진 나라였다고 볼 수 있다. 강했던 옛 시절에 대한 그리움으로 우리는 늘 고구려를 꿈꾼다. 하지만 오늘을 사는 우리가 고구려로부터 정작 배워야 할 것은 이같은 개방성, 열림, 대국적 기질이 아닐까.” 고구려의 역사는 중국의 동북공정 덕에 다시 생명력을 얻고 있다. 이는 오래전부터 외세의 침략이 잦았던 우리 역사에서 적극적으로 영토를 확장하고 동북아를 호령한 시기에 대한 역사적 향수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고구려 역사에서 배워야 할 것은 대국이었다는 점만은 아닐 것이다. 고구려는 세계화 물결 속에서 폐쇄적 민족주의를 보이는 우리가 미숙성을 극복하고 세계로 나갈 발판이 무엇인지를 말해주고 있다. 동북아 중심국가에 대한 언급을 차치하고라도 동북아 평화국가를 조성하기 위해서도 고구려의 개방성은 우리가 배워야할 덕목일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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