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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03월25일(월요일) 해파랑길 10 코스 탐방기
회비 45,000원 3월11일 송금 완료, 25번 좌석 예약
07:00~11:47 "좋은사람들" 버스로 서울 양재역 12번 출구 전방 국립외교원 앞에서 출발하여 울산 북구 정자1길7 번지에 있는 남정자 경로당으로 이동 (369km) [4시간47분 소요]
탐방지 : 해파랑길 10 코스
[해파랑길 10코스는 울산광역시 정자항을 출발하여 경주 나아리 해변까지 이어지는 약 14km의 길이다.
강동 화암 주상절리와 몽돌해변, 경주시 양남면의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주상절리 특히, 부채꼴 주상절리는 가위 주상절리의 꽃이라 할 만하다. 해변도로와 여인의 눈썹 모양 해변을 끼고 휘돌아나가는 환상적 풍경이 걸어가는 어느 한 순간도 한눈을 팔 겨를이 없을 정도이다.
정자항~(2.8Km)~강동화암주상절리~(3.7Km)~관성해변~(6.0Km)~읍천항벽화마을~(1.2Km)~나아해변
[길이 13.0km, 소요시간 4시간 30분, 난이도 보통]
시점 : 울산광역시 북구 정자동 183-1 (정자천교 조형물 부근)
종점 : 경상북도 경주시 양남면 나아리 846 (나아해변 슈퍼 건너편)
코스 개요
- 해파랑길의 열번째 코스이자 경주구간으로 울산 북구 정자동과 경주 양남면을 잇는 길
- 정자항에서 출발해 관성해변과 음청항벽화마을을 지나 나아해변에 이르는 구간
- 몽돌해변과 해안 주상절리 등 다양한 지리적 특성과 벽화마을을 지나는 코스
관광 포인트
- 동해안에서 가장 오래된 용암 주상절리로 꽃무늬 횡단면이 화려한 강동화암 주상절리
- 동해바다 전망과 야간 경관조명이 일품인 파도소리길 주상절리 전망대
- 몽돌해변과 송림이 있어 여름 피서철 명소로 손꼽히는 하서해안공원
- 1주일에 한 번 배달되는 느린 우체통과 마을의 담벼락을 따라 벽화들을 볼 수 있는 읍천항벽화마을
여행자 정보
- 울산시외고속버스터미널에서 도보 250m 이동 고속버스터미널 정류장(월성원자력홍보관 방면)에서 701번 버스이용, 정자 하차
- 경주구간이나 행정구역이 울산에 속한 지점의 경우 코스 문의는 울산 북구청으로 할 것
- 정자항, 정자해변, 강동화암 주상절리, 관성솔밭해변, 하서해안공원, 파도소리길, 읍천항에서 매점과 화장실 이용 가능
- 울산구간과 경주구간의 안내체계가 다르므로 행정구역이 바뀌면 다시 한번 방향을 확인할 것]
탐방코스 : [ 남정자 경로당 ~(530m)~ 정자항 북방파제등대 ~(3.2km)~ 강동화암주상절리 ~(0.9km)~ 신명해변 ~(0.9km)~ 신명항 ~(1.2km)~ 지경마을 ~(1.3km)~ 관성해변~(1.8km)~ 수렴항 ~(1.1km)~ 하서 해안공원 ~(1.5km)~ 율포진리항(하서항) ~(1.2km)~ 경주 양남 주상절리 ~(0.8km)~ 읍천항 ~(1.0km)~ 아진포항 ~(0.2km)~ 나아해변 ] (15.6km)
일시 : 2024년03월25일(월요일)
날씨 : 14시까지는 구름이 낀 날씨였고, 그 이후에는 이슬비가 내린 날씨 [울산 북구 최저기온 10도C, 최고기온 11도C]
탐방코스 및 탐방 구간별 탐방 소요시간 (총 탐방시간 3시간32분 소요)
11:47~12:00 울산 북구 정자1길7 번지에 있는 남정자 경로당에서 탐방 출발하여 정자항 북방파제등대로 이동
12:00~12:04 정자항 북방파제등대(일명 귀신고래 등대)를 사진촬영
[1991년 8월에 첫 불을 밝힌 정자항 북방파제 등대는 처음에는 빨간색 원통형 모양으로 세워졌으나, 2010년 12월 정자항 북방파제 등대를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고자 하는 울산시와 해양수산부가 귀신고래 모양으로 재탄생시켰다.
이 등대는 매일 밤 6초마다 연속으로 2번씩 깜빡이며 동해안을 항해하거나 정자항을 드나드는 선박의 안전을 지켜주고 있다.
또 해안 바위 사이로 나타났다가 사람이 다가가면 사라진다는 귀신고래는 예로부터 포경선이 추격하면 신출귀몰하게 사라지는 바다의 신비한 영물로 알려져 있었다.
귀신고래는 한 때 울산 앞바다에 자주 출몰했었는데, 19세기 말 무분별한 남획으로 우리나라 연안에는 1977년 1월 울산에서 관측된 것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발견되지 않고 있다.
이에 정부는 울산 귀신고래 회유해면(回遊海面)을 천연기념물 제126호로, 귀신고래는 해양보호생물로 지정해 보호하고 있다.]
12:04~12:35 강동화암 주상절리로 이동
[강동화암 주상절리는 신생대 제3기(약 2천만 년 전)에 분출한 현무암 용암이 냉각하면서 열 수축 작용으로 생성된 냉각절리다. 동해가 확장돼 일본이 한반도에서 떨어져 나가던 때이다. 생김새는 돌기둥을 깎아서 장작을 쌓듯 차곡차곡 쌓아 놓은 모습에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걸음 뗄 때마다 마음은 비워지고 눈은 더욱 맑아진다. 마을의 이름인 화암(花岩)은 주상체 횡단면이 꽃처럼 생긴 데서 유래했다.]
12:35~12:42 강동화암 주상절리를 사진촬영
12:42~12:51 강동몽돌해변을 거쳐서 신명 해변으로 이동
[강동몽돌해변에서 북쪽으로 이어지는 자그마한 몽돌해변이다. 편의시설은 멀지만 인접해 있는 강동몽돌해변에 비해 한적하고 조용한 해변이다. 일출을 보기 좋은 곳이고 겨울이면 해변에서 철새 갈매기를 볼 수 있다. 해파랑길 10코스 울산 구간에 속한다.]
12:51~13:03 신명항으로 이동
[신명항(新明港)은 울산광역시 북구 신명동에 있는 어항이다. 2008년 9월 22일 어촌정주어항으로 지정 관리하고 있다. 관리청은 울산광역시 북구청장이다.]
13:03~13:08 휴식
13:08~13:22 지경마을로 이동
[경주 양남 수렴리 지경마을과 바다
영남일보 기사 입력일 : 2023-09-15
글·사진=류혜숙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시선 강탈 그무바위·여기굼바위…있는지 없는지 모를 '지경'
경주의 가장 남쪽 갯마을 지경. 양남면 수렴리의 4개 마을에 속해 있지만 저 홀로 뚝 떨어져 있다. 자근자근 걸을 수 있는 해안 길도 저만 없어 경주 쪽에서 내려가면 없는 듯 작은 곶에 감춰진 마을이다. 또 울산 쪽에서 오르다 보면 강동의 신명마을과 이어져 길의 끝이 되어버리는데, 연안의 형세가 똑 닮아 여기가 신명인지 지경인지, 어디서부터가 지경인지 알 수가 없다. 그러니 쭉 뻗은 동해안로에서 지경교차로를 만나면 곧장 빠져나가 좁은 복개도로를 따라 바다로 갈 일이다. 그러면 몸의 한쪽은 신명, 한쪽은 지경에 놓이게 된다.
◆수렴리 지경마을
복개도로를 따라 바다에 닿으면 왼쪽은 경주의 지경마을, 오른쪽은 울산의 신명마을이다. 옛날에는 마을 뒷산 지경골에서 흘러내리는 실개천이 두 마을의 경계선이었지만 30년 전쯤 복개가 되어 한 마을처럼 되었다. 길 좀 만들어 달라고 사정해 울산시와 경주시가 반반씩 부담하여 공사를 했다고 한다. 오래전부터 물도 나누고 전기도 나눴다니 공적인 영역에서 어떤 교섭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삶의 지속에 있어 신명과 지경은 함께였다. 수렴리의 다른 마을들은 코끝도 보이지 않는데 강동의 긴 해변과 높은 아파트들은 바로 저어기서 번쩍거린다. 모든 커다란 것, 번쩍거리는 것들을 팽개치고 북쪽으로 몸을 휙 돌리면, 작고 고요하고 양지바르고 아늑한 지경마을이 오롯하다. 지경(地境)은 땅의 경계라는 뜻이다.
수렴리 속한 4개 마을 중 홀로 '뚝'
경주 최남단 곶에 감춰진 갯마을
軍 출입통제 풀리며 해변 입소문
온갖 형상 바위들 사진촬영 명소
내항에 몇 척의 배가 정박되어 있다. 선양장이라 할 자갈밭에도 두어 척의 배가 끌어 올려져 있다. 내만이 완만해 마을의 규모에 비해 방파제가 길고 내항이 크다. 등대는 빨간 등대 하나다. 지경마을에는 25세대 정도 산다고 한다. 그 가운데 어업을 하는 사람이 10여 명, 대게, 참가자미, 통발, 유자망 어업을 하는 배가 마을 통틀어 10척 정도 있다고 한다. 미역이나 다시마, 전복 등의 해산물도 많이 나 양식도 하고 채취도 한다. 옛날에는 정어리가 많이 잡혔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때는 바다 쪽으로 정어리기름을 짜기 위한 공장이 있었는데 주로 항공유로 쓰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농사도 짓는단다. 주로 벼농사인데 해풍을 맞은 지경쌀은 차지고 밥맛이 좋아 인근에서도 더 쳐준다고 한다. 아무리 둘러봐도 농사지을만한 땅이 보이지 않는데 대체 어디에 밭이 있는 걸까.
긴 방파제의 외항으로 테트라포드들이 더미로 부려져 있다. 그곳에서부터 이어지는 해안은 자갈밭이고 굵은 모래밭이다. 그리고 온갖 형상의 바위들이 그리스신화 이전 세계의 티탄들처럼 서 있다. 깊은 바다와 하늘로부터 성큼성큼 아주 오래 걸어오다 마침내 이 바닷가에 닿자 기진맥진 서버린 모습이다. 밤에 진지하게 꿈을 꾸는 듯하고, 파도 소리는 내 귓속에 있어 몸이 통째 고둥이 된 듯도 하다. 이곳은 캠핑, 물놀이, 스노클링, 그리고 해돋이 명소로 알음알음 소문이 나 있다. 여름이면 바위 하나씩을 차지하고 있는 텐트들을 볼 수 있다. 이곳에 오는 사람마다 속으로 생각한단다. '다들 어떻게 알고 왔지?'
지경해안은 옛날 군 경계지역으로 출입이 통제되어 있었다. 높은 바위 곳곳에 얕고 좁게 깎아 높은 계단이 보인다. 몇몇 봉우리에는 초소가 남아 있다.
◆지경의 바다
수렴리는 임진왜란 때 왜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수병의 병영을 두었던 곳으로 수용포리라 했다. 지금은 수렴(수용포), 영암, 관성, 지경 4개 부락으로 이루어져 있고 관성과 지경이 수렴2리다. 수렴항 광장에 '무장공비 격멸 전적비'가 있는데 1983년 8월5일 새벽에 수렴리 바다로 침투하던 무장공비 5명을 섬멸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그렇다. 수렴리 바다는 군사지역이었고 지경의 바다 또한 얼마 전까지 출입이 통제되어 있었다. 세상에 드러나지 않았던 이곳은 십여 년 전 군 경계 시설물이 철거되고 개방되면서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다. 높은 바위 곳곳에 얕고 좁게 깎아 높은 계단이 보인다. 구석기인들의 솜씨가 아니라 우리 해병대의 기술이다. 몇몇 봉우리에는 초소가 남아 있고 지경마을 해변 곳곳이 지뢰밭이었다는 소문도 있다.
커다란 바위 꼭대기에 소나무가 멋있게 서 있다. 초소병 같다. 그 곁에 또 다른 바위가 나란히 서 있다. 이곳은 특히 사진작가들에게 유명하다. 12월 초중순경 맑은 날에, 이 두 개의 바위 사이로 떠오르는 해를 볼 수 있다고 한다. 어떤 이는 7월에서 9월 사이 남쪽에서 태풍이 동해로 올라오는 시기가 가장 멋있다고 열변한다. 해변의 모래를 삼키며 거친 파도가 들어올 때, 우의와 가슴장화를 신고 그 바다에 살짝 잠기어 서서 충분한 빛을 기다린다. 그리고 어느 한때를 부여잡아 구름이나 아침노을을 촬영한다는 것이다. 욕심인지, 집착인지, 해탈인지, 뭘 모르는 것인지, 순수하게 미친 건지 알 수 없지만 그 용기는 오죽하다. 오늘도 바위들 사이에 텐트 하나가 조용히 자리하고 있다.
지질시대에는 이 일대가 모두 곶 또는 바다 쪽으로 돌출한 섬이었다고 한다. 긴 시간 동안 약한 것들은 깎여 나갔고 강한 것들만 남은 것이 지경 해안의 바위들이다. 마을의 유래를 보면 '여기굼바위, 그무바위 등 주위의 바위를 이용하여 미역, 전복 등의 양식업을 하고 있다'고 한다. 옛날에는 바위 하나하나마다 이름이 있었을 듯싶다. '여기굼바위에 머릿수건을 놓고 왔네' 혹은 '그무바위에서 빗창을 떨어뜨려 버렸네' 하는 일상적인 이야기들이 있지 않았을까.
코오롱이라 적힌 빈 건물 하나가 스산하게 서 있다. 펜션, 합숙소 또는 하계휴양소라고 불리는 저 건물은 2000년대 초 코오롱에서 임직원용으로 세운 것이라 한다. 가짜사나이 2를 이곳에서 찍었단다. 이곳에 건물을 세운 코오롱도, 이곳을 찾아낸 로케이션헌터들도 참 대단하다. 건물 앞으로 걷기 좋은 산책로가 나 있다. 또 하나의 뒤숭숭한 펜션 건물을 지나면 걷기 좋게 놓였던 길이 끝나고 좀 더 깊숙한 곳과 경계를 이루는 작은 문이 있다. 마을 공동 어장이라는 안내판과 파도가 높을 땐 들어가지 말라는 경고가 있다. 이 안쪽으로 거친 돌밭을 지나 들어가면 사진 포인트라는 굴을 찾을 수 있다. 저곳도 어쩌면 지뢰밭이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오늘은 파도가 높다. 평온을 추구하는 사람은 순수하게 미치는 짓도 평온 속에서 찾는다.
■ 여행Tip
경부고속도로 경주IC로 나가 직진하다 배반사거리에서 우회전해 울산방향으로 간다. 외동읍에서 좌회전해 14번, 904번 도로(외남로)를 차례로 타고 양남으로 간다. 양남사거리에서 우회전해 동해안로를 따라 울산방향으로 가다 지경교차로에서 오른쪽으로 빠져 나가면 된다.]
13:22~13:48 관성 해변으로 이동
[관성해변은 솔숲과 모래밭, 자갈이 함께 공존하는 해변으로 갯바위가 어우러진 바다 풍경이 아름답다. 신라 시대에 별을 관측해 시간을 측정하는 첨성대 같은 시설이 있어 관성(觀星)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13:48~14:04 수렴항으로 이동
[수렴항이 있는 수렴리 바다는 경주 바다 중에서도 백미로 손꼽힌다. 수렴항은 관성해변과 연접해 있으며 경치가 빼어나 특히 여름철 피서객이 많이 몰려드는 경주 대표 미항이다.
‘수렴(水念)’은 임진왜란 때 왜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수병의 병영을 가졌던 곳이라 ‘수영포리’라 했는데 /1914년 행정명을 ‘수렴리’라 했다고 한다.
특히 수렴리 관성바닷가 해안선의 유려함은 매우 아름답다. 청정해역 관성솔밭해변은 맑고 푸르러 인기가 높고 수백년 송림과 해안이 어우러져 독특한 경관을 자랑한다.
관성해변이 이어지는 곳에 수렴항이 있다.
다양한 횟집이 즐비해 먹거리와 볼거리가 풍부한 수렴항 인근에서는 수렴항의 랜드마크인 ‘황새바위(군함바위)’가 눈에 띈다. 섬 같은 검은 바위들은 항구를 에워싸고 파도에 정면으로 맞서고 있다. 바위들은 소나무를 머리에 이고 군락을 이룬다. 이 바위는 화산활동으로 생겨난 바위들로 황새들이 자주 찾아 ‘황새바위’, 군함 모양을 닮아 ‘군함바위’라고 불린다.
수렴 마을에 살고 있는 어르신들은 “수렴은 울산 등 이 인근서는 어업이 가장 활성된 곳이었다"며 "지독한 보리고개 시절에 울산의 온산 사람들이 이곳 수렴에 많이 와서 살았다"고 말했다. 또 "어종이 매우 풍부했는데 갈치, 광어, 낙지, 문어 등이 엄청 잡혔다"며, "이곳 사람들은 생선을 쌀로 바꿔 연명할 정도였고 고기 잡아 배 채우던 시절이었다"고 회상했다.
또한, 수렴2리 해안가에는 1983년 월성해안 침투 공비 격멸을 기념하는 전적비가 세워져 있다.
2021년12월, ‘경주 수렴항 어촌뉴딜 300사업’ 준공으로 수렴마을이 새롭게 단장돼 더욱 살기 좋고 아름다운 어촌마을로 거듭났다.
월파방지 시설 설치로 태풍 등 자연재해로부터 안전한 일상을 누리고 됐고, 관성해변과 수렴항을 단절하고 있던 수렴천에 100미터 수렴천 보행교를 신설해 수렴 1,2리를 연결했다. 관성해변 솔밭쉼터와 황새공원마당 등도 조성해 도로와 항구 경관도 대폭 개선했다.
뿐만 아니라, 슬립웨이를 정비하고 주차장을 확충하고 해양레포츠 체험장을 조성하는 등 관광 기반시설도 확충했는데, 그래서 작은 어촌마을 수렴리는 낭만이 흐르는 거리 경관도 갖춰 자연과 사람이 함께 만들어가는 볼거리와 먹거리 가득하도록 거듭나고 있다.
수렴항은 밤이 더 아름답다. ‘수렴항달빛광장’에서 달빛 따라 수렴항을 걷다 보면 어두운 바다 넘어 조용하지만 화려한 야경이 펼쳐진다.
월성원자력홍보관에서 수렴항으로 가기 위해서는 울산방향으로 길을 잡아야 한다. 홍보관에서 자동차로 약 15분이 걸린다. 4.8㎞에 이르는 수렴항 가는 길은 왼쪽으로 바닷길을 끼고 있다. 해 저물면 하나둘씩 따스한 감귤색 불빛이 켜지기 시작하는 수렴항에서 자연이 내주는 넉넉한 품에 ‘와락’ 안겨 보기를 추천한다.]
14:04~14:20 하서 해안공원으로 이동
[하서해안공원(下西海岸公園) : 경상북도 경주시 양남면 하서리에 위치하는 해안공원.
경상북도 경주시 양남면 하서리 657-27에 위치한 해안공원으로 하서해수욕장과 접해 있다. 공원의 뒷편으로 소나무숲과 유료로 운영되는 솔밭오토캠핑장이 있으며, 공원 내에는 6.25참전유공자 명예선장비와 인어조각상, 나무로 만들어진 솟대 등이 설치되어 있다. 인근에는 양남주상절리, 읍천벽화마을이 위치하고 있다.]
14:20~14:33 사랑의 열쇠 조형물이 있는 율포진리항(하서항)으로 이동
[하서항은 경상북도 경주시 양남면 하서리에 위치하고 있다.
율포진리항으로도 불리는 이곳에는 자물쇠 모양의 조형물인 사랑의 열쇠가 있다. 이 덕분에 조형물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여행객이 많다. 낚시객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많아 연중 많은 사람이 찾는다.]
14:33~14:37 경북 경주시 양남면 읍천리 405-3 번지에 있는 경주 양남 주상절리로 이동
[경주 양남 주상절리는 천연기념물 제536호로 기울어진 주상절리, 누워 있는 주상절리, 위로 솟은 주상절리, 부채꼴 주상절리 등 다양한 주상절리의 모습을 한눈에 볼 수 있다.]
14:37~14:43 경주 양남 주상절리를 사진촬영
14:43~15:02 읍천항으로 이동
[경주 양남면 읍천리의 읍천항. 아담한 항구라 큰 고깃배보다는 작은 고깃배가 많아 외려 정겹다.
낚시인들에게는 고등어, 숭어 낚시 포인트로 정평이 나 있는 곳인데, 관광객들에게는 벽화마을로 익히 알려진 곳이다.
읍천항 벽화마을은 지난 2010년 인근의 월성원자력본부에서 벽화공모전을 열면서 조성되었다.
전국에서 대학생, 작가들이 모여 마을 곳곳에 아이디어 넘치는 벽화를 남겼다. 이후에도 몇 차례 벽화공모전이 더 열려 오래된 그림은 교체되고, 새 벽면에 그림이 추가되기도 했다.
방문할 때마다 새로운 벽화를 찾아 나서는 즐거움도 가져볼 수 있다.
읍천항 벽화마을은 양남 주상절리 파도소리길의 출발점이다.
등대, 소공원이 있는 곳으로 향하면 자연스럽게 해안산책로와 이어진다.]
15:02~15:14 아진포항으로 이동
[신라 제4대 탈해왕(脫解王)의 탄생신화.
석탈해왕에 대한 여러 가지 설화들
《삼국사기》의 〈신라본기〉 탈해이사금조, 《삼국유사》 권1의 〈기이(紀異)〉 탈해왕조와 권2의 〈가락국기(駕洛國紀)〉 등에 실려 있는 신라 제4대 왕이자 석씨(昔氏) 왕조의 시조인 탈해왕의 탄생신화. 그는 원래 용성국왕 혹은 다파나국왕의 아들이라는 고귀한 신분이지만 알에서 태어난 비정상적 출생으로 인하여 버림받고 숱한 시련을 극복한 뒤 결국 신라의 왕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탈해왕은 왜국(倭國)의 동북쪽으로 1000리 떨어진 곳에 있는 다파나국(多婆那國)에서 태어났다. 다파나국의 왕이 여국(女國)의 왕녀를 아내로 맞았는데, 왕비는 임신한 지 7년 만에 큰 알을 낳았다. 왕이 이를 상서롭지 않은 일로 여겨 버리게 하였으나, 왕비는 차마 그러지 못하고 비단에 보물과 함께 알을 싸서 궤 속에 넣어 바다에 띄웠다. 궤는 파도를 타고 가다 먼저 금관국(金官國)의 바닷가에 이르렀으나 그곳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겨 건지지 않았고, 혁거세 재위 39년에 진한(辰韓)의 아진포(阿珍浦) 어귀에 닿았다. 해변에서 아진의선(阿珍義先)이라는 한 노파가 궤를 건져 열어 보니 아이가 들어 있었고, 노파가 기른 아이는 장성하여 키가 9척에 풍모와 지식이 뛰어났다. 그의 이름은 궤가 바다에 떠왔을 때 까치 한 마리가 울며 따라왔다고 하여 '까치 작(鵲)'에서 '새 조(鳥)' 변을 떼어 '석(昔)'으로 성을 삼고, 담긴 궤를 풀고 알에서 나왔다 하여 이름은 '탈해(脫解)'라고 하였다.
탈해는 노파를 어머니로 삼아 고기잡이로 봉양하다가 노모의 말을 좇아 학문에 정진하고 지리를 익혔으며, 나중에 양산의 호공(瓠公) 집을 길지(吉地)로 여겨 계책을 써서 빼앗아 살았는데 그 땅이 훗날의 월성(月城)이다. 남해왕이 그가 현명한 사람이라는 소문을 듣고 그의 딸과 혼인시켜 사위로 삼은 뒤 대보(大輔)로 등용하고 정사를 맡겼다. 유리왕이 임종할 때 나이 많고 어진 사람에게 왕위를 잇게 하라는 선왕인 남해왕의 뜻에 따라 자신이 왕이 되었다며, 자신도 왕위를 탈해에게 물려주겠다고 하였다.
《삼국유사》의 탈해왕조에는 출생지가 용성국(龍城國)이며, 함달파(含達婆) 왕이 적녀국(積女國)의 왕녀를 왕비로 맞아 낳았다고 한다. 용성국은 다파나국과 마찬가지로 왜국의 동북쪽으로 1000리 떨어진 곳에 있으며, 정명국(正明國) 또는 완하국(琓夏國)이라고도 한다. 알로 태어난 탈해는 칠보(七寶)·노비와 함께 커다란 궤에 넣어져 배에 실려 바다를 떠다니다가 혁거세왕에게 해산물을 바치던 아진의선(阿珍義先)이라는 노파에게 발견되었다. 탈해는 키가 9척 7촌, 머리둘레가 3척 2촌에 달하는 거구로 묘사되어 있고, 사후에 문무왕의 꿈에 나타나 소천구에 장사 지낸 자신의 뼈를 들어내어 소상을 만들어 토함산에 안치하라 하였으며 이후 동악신(東岳神)으로 모시게 되었다고 한다.
한편, 《삼국유사》의 가락국기에는 완하국 함달왕의 부인이 낳은 알이 사람이 되어 이름을 탈해라고 하였으며, 키가 3척, 머리 둘레가 1척에 불과한 왜소한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탈해는 바다를 건너 가락국의 수로왕을 찾아가 왕위를 내놓으라며 도술을 겨루었으나 패하고 계림 땅으로 달아났다고 한다.
석탈해신화[昔脫解神話]의 이상한 점들
도술을 부릴 줄 아는 석탈해는 왜 용성국에서 쫒겨 났을까? 그리고 신라에 정착한 이후 원래 자신의 이름을 사용하지도 않았고 용성국으로 돌아가거나 국가간의 관계를 맺지도 않았을까? 박혁거세 치세기간 동안에 여러 전투에 참여했고 2대왕인 남해왕의 사위이기도 한 석탈해가 본명을 밝히지 않고 권력을 잡은 후에도 용성국에 가지 않은 것은 이미 그의 선왕인 함달바왕이 실권을 했거나 석탈해를 반대하는 세력이 있었다고 추측이 된다.
남해왕의 적자도 아니고 유리왕의 아들도 아니어서 박씨가 아닌데 어떻게 왕이 되어서 석씨왕족을 일구었을까? 실제로 김알지의 후손이 왕위이 즉위하기 전까지 석탈해의 후손들이 신라의 왕노릇을 했다. 그런데 석탈해의 부인은 남해왕의 딸이다. 그녀의 성은 박(朴)씨이고 아니부인(阿尼夫人) 혹은 아로부인(阿老夫人)이라고도 한다. 신라 제2대 왕 남해왕(南解王)과 그 비인 운제부인(雲帝夫人) 사이에 맏딸로 태어났다. 남해왕 재위5년 배 안의 괘에서 나온 석탈해(昔脫解)가 슬기롭다는 소문을 듣고 그에게 시집보냈다. 남해왕이 죽은 후 아들 유리(儒理)가 탈해에게 왕위를 사양하려 하자, 탈해가 이[齒]가 많은 사람이 왕이 되기로 하자고 제안하였다. 두 사람이 떡을 물어 시험해본 결과 유리의 이가 많으므로 그가 왕이 되었다. 57년 유리왕이 죽자 그의 유언에 따라 석탈해가 왕위에 오름으로써 아효부인은 왕비가 되었다. 그녀는 각간에 오른 구추(仇鄒)를 낳았고, 구추는 신라 9대 임금 벌휴왕(伐休王)의 아버지이다. 이것은 박씨인 아효부인의 영향력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신라는 여왕을 즉위시킬 정도로 성별의 구애됨 없는 권력의 분산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훗날 김알지의 후손인 미추가 산라의 제13대 왕이 되어 박씨 석씨 김씨 세가지 성이 왕을 차지했는데 그 문을 처음 연 것이 바로 석탈해인 것이다.]
[삼국유사 기행<128>석탈해왕
대구일보 발행일 2021-08-23
강시일 기자
용성국의 왕자 석탈해 신라 남해왕의 사위로 왕이 되다
신라 4대 임금은 2대 남해왕의 사위인 석탈해다. 남해왕의 아들 3대 유리왕이 죽자 왕의 매부였던 석탈해가 62세라는 늦은 나이에 왕위를 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신라의 왕위를 잇는 권력 이양은 서로 양보하는 미덕을 보이며 순조로웠다. 남해왕이 궁중에서 중요한 일을 척척 처리하는 똑똑한 석탈해를 사위로 맞아들여 왕위를 잇게 하려 했지만 탈해는 매부인 유리왕에게 왕위를 양보한 것.
탈해왕은 또 계림에서 김알지를 얻어 현명한 그를 태자로 책봉하고 왕위를 이을 것을 희망했지만 알지 또한 유리왕의 둘째 아들인 파사왕에게 왕위를 양보했다.
박혁거세 이후 남해왕, 유리왕, 석탈해왕, 파사왕으로 이어지는 169년 동안 왕위가 순조롭게 이양되면서 제도적인 정비를 비롯 군사력을 키워 외세의 침략을 막는 등으로 나라의 운영도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았다.
탈해왕은 용성국의 왕자로 신라에서 자리를 잡아 늦은 나이에 왕위에 올라 23년 동안 재위에 있으면서 마한, 백제, 가야, 왜구 등의 침입을 받았지만 나라 이름을 계림으로 고치고 나라를 안정적이며 평화롭게 운영했다.
특히 탈해왕의 백성 사랑은 남달라 죽은 이후에도 나라를 지키는 호국신이 됐다. 신라시대는 물론 고려, 조선시대까지 토함산에 석탈해왕의 사당을 지어 그를 추모하며 제사를 지내왔다.
◆서라벌 입성
석탈해는 용성국의 다섯 왕자 중 네 번째 왕자다. 용성국에서는 왕자가 18세가 되면 군사적 세력이 될 100명의 친위부대를 붙여준다. 그리고 왕위를 이을 제목을 친위부대의 전력과 왕자의 지혜를 평가해 선정했다.
석탈해는 다섯 왕자 중에서 단연히 두드러지는 무위를 가지고 있었지만 실력을 드러내지 않았다. 왕자들 간의 불필요한 견제를 우려했기 때문이다. 탈해의 지혜는 형제들이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나고 깊었다. 왕과 일부 대신들은 이미 이러한 탈해의 자질을 간파하고 있었지만 모른 체하고 있었다.
반면 둘째 왕자 고루는 체격이 우람하고 무술 실력도 상당히 뛰어난 편이었지만 과격하고 저돌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참을성 없는 급한 성격은 직속 친위대 부하들마저 두려워할 정도였다.
탈해가 10살이 되기 전부터 고루는 왕좌에 대한 욕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 미리부터 경쟁상대를 없애려는 기류가 형성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왕과 왕비는 물론 대신들까지 왕자들의 전쟁을 막기 위해 고루의 눈치를 살피는 지경에 이르렀다.
탈해가 성장하면서 뛰어난 자질이 고루의 눈에 드러나 제거될 것을 왕과 왕비는 크게 걱정하고 있었다. 왕은 외부에 알려지지 않은 훌륭한 스승을 탈해에게 보내 무예수업과 인성적인 교육까지 은밀하게 진행하게 했다. 덕분에 탈해는 타고난 자질을 십분 발휘해 그를 가르치는 스승도 깜짝깜짝 놀랄 정도로 빠르게 성장했다.
이 같은 탈해의 놀라운 성장을 스승은 왕에게 은밀히 보고했다. 탈해의 빠른 성장이 화가 될 수 있다는 걱정도 함께 전했다.
탈해는 또 놀라울 정도로 지혜로웠다. 자신이 익힌 무예를 실전에 사용할 수 있는 무술로 둔갑시켜 친위부대원 중에서도 뛰어난 장군 10명에게 아무도 모르게 개별적으로 전수했다.
탈해는 22세가 되던 해 왕과 왕비를 방문해 새해 인사를 드리고, 용성국을 떠나 다른 나라를 건설해 운영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용성국을 이끌 훌륭한 형들이 있고, 형제들과 다투기는 싫다면서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간곡하게 부탁해 허락을 얻어내고는 하직 인사를 올렸다.
탈해는 이미 오래 전부터 자신이 용성국에서는 왕이 돼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하고 다른 나라를 개척할 계획을 친위부대 수석 보좌진과 협의하며 진행하고 있었다. 본격적인 왕위 계승자 결정을 위한 행사가 진행되기 전에 나라를 떠나기로 했던 것이다.
탈해와 100명의 친위부대는 무기와 식량을 5대의 배에 나누어 싣고 항해를 시작했다. 큰 파도에도 견디기 쉽게 바람이 거세어지면 5대의 배를 하나로 결합하는 지혜 또한 탈해의 머리에서 나왔다. 6개월의 긴 항해 끝에 탈해군단은 사계절이 뚜렷하고 아름다우며 농사하기 좋은 땅 서라벌에 당도했다.
하서항에 당도한 탈해는 어민들에게 가져온 보석들을 나눠 주며 친화정책을 펼쳐 함께 살아가기로 했다. 친화력과 리더십이 뛰어난 탈해의 지혜에 토착주민들도 금방 하나가 돼 새로운 기술을 배워 고기를 잡고, 농사를 배웠다.
수시로 노략질하며 사람까지 상하게 하던 왜구들과는 판이하게 다른 탈해군단은 쉽게 토착주민들을 흡수했다. 탈해의 친위부대는 하서지방에 튼튼하게 뿌리를 내렸다.
◆이국에서 온 석탈해 왕이 되다
탈해군단은 하서지방에서 고기잡이와 농사를 지으며 세력을 키웠다. 타고난 무인체질에다 익힌 신출귀몰한 무예실력을 발휘해 마을을 지키는 사병들을 훈련시켜 왜구들의 노략질도 단숨에 차단하며 평화로운 마을을 꾸렸다.
탈해는 세력이 커지면서 점차 서라벌 진출을 꿈꾸게 됐다. 용성국을 떠나오면서 나라를 경영하리라던 꿈을 그는 하루도 잊지 않고 있었다. 토함산 정상에서 사방을 살피며 나라를 경영하는 뜻을 펼칠 대계를 하나하나 구상했다.
탈해는 30세가 되기 전에 하서지방에 든든하게 뿌리를 내리고 서라벌로 들어가 나라를 경영하는 일에 직접 참여하는 기회를 만들었다.
신라 2대 남해왕이 혁거세의 뒤를 이어 나라를 꾸려가고 있을 때였다. 남해왕도 아버지 혁거세를 닮아 우람한 체구에 뛰어난 자질을 가지고 있었지만 육부촌을 포함해 20여 촌을 아우르는 나라를 경영하기에는 여러 가지로 힘겨워 했다. 이때 지혜로우며 뛰어난 전략가 탈해가 신의 게시처럼 떡 나타나 나라를 경영하는 일을 맡겠다고 했다.
탈해가 병력을 기르고, 백성들의 넉넉한 삶을 위한 농사법, 지휘체계를 갖추고, 나라의 위엄을 세우는 법을 만들어 직접 나라를 운영하는 방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남해왕은 똑똑한 탈해에게 나라의 일을 하나씩 맡기다가 끝내 모든 일을 맡기고 의지했다.
탈해는 나라의 중심에서 백성들을 가르치고, 농사지으며 이웃과 화평하게 지내는 일까지 담당하는 관리를 두고 일목요연하게 처리했다. 특히 병사들을 훈련하고 관리 통솔하는 일은 자신의 친위부대 장군이 담당하게 했다. 신라의 실질적인 군사력은 이미 탈해의 손에 들어가 있었다.
남해왕은 당돌하면서도 똑똑하고 지혜로운 탈해를 사위로 삼았다. 그리고는 편안하게 나라일을 맡기고 아들을 제쳐두고 사위 탈해를 태자로 지정해버렸다.
남해왕이 탈해가 왕위를 잇도록 유지를 남기고 죽었다. 그러나 탈해는 남해왕의 큰아들이자 처남인 유리가 먼저 왕위에 오르도록 양보하고 천거했다. 유리도 탈해의 지혜와 능력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라를 경영하는 최고의 리더는 매부 탈해가 맡는 것이 옳다고 우겼다.
그러나 지혜로운 탈해는 아직도 박씨 성을 가진 왕족들의 분위기를 완벽하게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기에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간파하고는 끝내 자리를 사양하고 유리왕이 왕위를 잇도록 했다.
신라 3대 유리왕 대에도 탈해는 나라의 살림을 도맡아 처리했다. 관리의 인사문제는 물론 재정과 군사분야까지 그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다.
유리왕이 33년 동안 재위하고, 석탈해는 62세가 되어서야 4대 왕으로 등극해 그의 꿈을 이뤘다.
석탈해왕은 왕위에 오르자 자신의 오른팔 역할을 하던 친위대장 구파에게 나라의 경영에 대한 상당부분을 맡겼다. 그리고 용성국에 사신을 보내 문물을 교류하기 시작했다.
신라의 용성국과의 교류는 농산물과 각종 제조 특산물은 물론 해외 세력들의 동정까지 파악해 정보를 공유하며 서로 우호국으로 국력을 키워 동반성장하는 계기로 만들었다.
석탈해는 왕위에 오른 늦은 나이에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수련을 이어갔다. 신체적인 수련에 이은 하루 한 시진의 꾸준한 면벽참선은 탈해를 육천통에 이르는 능력을 가지게 했다. 과거와 현재는 물론 미래를 내다보는 능력을 가지게 된 것이다.
탈해왕은 신라가 결국 삼국을 통일하는 큰 나라로 성장 발전할 것으로 내다보았다. 그러나 끝내 왜구들의 침략에 대비하지 못해 백성들이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라 걸 알게 됐다. 이 때문에 탈해는 죽어서 토함산을 지키는 신이 돼 나라를 지키기로 했다.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의 꿈에 나타나 “나는 너희들을 있게 한 탈해다. 내 뼈를 토함산 정상에 묻어라. 왜구들의 침략과 노략질을 막아 백성들을 지켜주겠다”라고 했다. 문무왕은 꿈에서 들은 탈해왕의 분부에 따라 토함산에 왕의 뼈를 화장해 안치하고, 사당을 지어 제를 올리며 백성들의 안녕을 기원했다.
*삼국유사 기행의 내용은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15:14~15:19 경북 경주시 양남면 양남항구길 145 번지에 있는 나아 해변으로 이동하여 탐방 완료
[나아 해변은 경북 경주시 양남면에 자리 잡고 있다. 해변은 몽돌과 모래가 섞여있다.
낚시를 즐기는 사람이 많다. 특히 소나무 숲에는 무료로 텐트를 설치할 수 있어 많은 사람이 캠핑을 즐긴다. 취사는 금지이지만 차크닉과 차박을 즐기기 위해 많은 이들이 찾는다. 주변에 나산들 공원, 경주 문무대왕릉이 있다.]
[나아해변
옛날 신라의 동방에 용성국이라는 나라가 있었다고 전한다. 용성국의 왕과 왕비가 자식을 얻기 위해 기도했는데 왕비가 임신한 지 7년 만에 알을 낳고 말았다. 일관과 신하들이 상서롭지 못한 징조라고 하자 용성국의 왕은 왕비가 낳은 알을 비단에 싸고 궤에 넣어 바다에 띄워 보냈다. 붉은 용의 보호를 받으며 바다를 떠돌던 궤는 먼저 금관국에 닿았지만 사람들은 반기지 않았다. '인연이 있는 곳에 가서 나라를 세우라.' 금관국 사람들은 기도를 드린 뒤 궤를 다시 바다로 띄워 보냈다. 마지막으로 닿은 곳이 신라의 동쪽 포구 아진포(阿珍浦)였다.
어느 날 아진포에 사는 '아진의선(阿珍義先)'이라는 노파가 포구에서 해초를 거두고 있다가 궤를 발견한다. 궤 주위에는 수많은 까치들이 울며 호위하고 있었다. 기이하게 여긴 노파가 궤를 열어보니 허리에 칼을 찬 사내아이와 보물이 있었다. 아진의선은 아이를 거둬 정성껏 길렀다. 그리고 까치 작(鵲)자에서 새 조(鳥)자를 날려 보내고 석(昔)자를 성으로 삼고, 궤를 열고 알을 깨치고 나왔다 하여 이름을 탈해(脫解)라 하였다 한다. 그 아이가 신라 4대 왕인 석탈해 왕이다.
탈해왕이 건져 올려진 아진포가 지금의 경주시 양남면 나아리 앞바다라고 한다. 아진포라는 이름은 고려시대 이후 사라져 전설적인 지명으로 여겨져 왔다. 그러다 1985년경 나아리 주민들에 의해 나아천 하구의 홈바위 언덕에서 조선 헌종 때 세운 '석탈해왕탄강유허비각'이 발견됐다. 탈해왕의 사연이 새겨져 있는 비다. 현재 유허비각은 월성원전 남문 앞의 넓은 공원에 자리해 있다.
나아천은 현재의 나산천인 듯하다. 나산천은 봉길리 서쪽의 상라리에서 발원해 나아리 서쪽의 나산리를 지나고 나아리 솔밭 사이를 흘러 바다에 닿는다. 나아해변에서 물길은 잘 가늠되지 않는다. 알에서 태어나 무럭무럭 자란 아이는 왕이 되었고, 그는 재임 시절 철기를 최대한 활용해 태평성대를 구가한 인물로 기록되어 있다. 탈해왕은 철로 농기구를 만들어 농업을 진작하고 철로 병기를 만듦으로써 훗날 삼국통일을 이루는 힘의 바탕을 마련했다고 전해진다. 나아해변에는 '제철왕(製鐵王) 석탈해'를 소개하는 조형물들이 늘어서 있다.
나아리에는 4개의 자연마을이 있었다. 그중 석탈해가 자란 언덕이라는 '장아(長阿)', 작은 고개와 보리밭이 있었다는 포구인 '모포(牟浦)', 소나무가 많았던 마을 '송하(松下)'는 월성원자력발전소가 들어서면서 헐리었다. 그리고 신라 석탈해를 거두어들인 곳이라는 '수아(收兒)'만 남았다. 예전에는 '나아천 남쪽 나아리 당수 나무가 있는 지역'으로 구분되었지만 지금은 나아리에 사람의 자취가 있는 모든 땅이 '수아'다.
옛날 나아리 사람들은 대부분 물고기를 잡거나 벼농사를 했다고 한다. 더러는 소와 돼지를 키웠고 계절 따라 감이나 엄나무를 내다 팔며 생활했다고 전해진다. 지금 '수아'에는 원전 건설 이후 외부에서 들어온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다. 그리고 주민의 8할 이상이 원자력 관련 종사자이거나 상업에 종사한다. 2천년이 흘러도 이 땅은 여전히 먼 곳의 사람들을 거두어들이는 '수아'다.]
15:19~16:06 나아해변에서 집에서 준비해간 음식으로 식사 후 휴식
16:06~20:27 "좋은사람들" 버스로 경북 경주시 양남면 양남항구길 145 번지에 있는 나아 해변을 출발하여 서울 양재역으로 귀경
(370km) [4시간21분 소요]
해파랑길 10 코스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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