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 - 서울시 동작구 노량진 사육신공원(死六臣公園)
내가 군 복무를 했던 수도경비사의 경례 구호는 ‘충정(忠正)’이었다. 본래 충(忠)이란 임금이나 국가 따위에 충직함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충정이라는 말은 없다. 다만 내가 복무할 당시 상관들의 설명에 의하며 충정이란 ‘대통령과 나라에 충성한다’는 뜻이라고 했으니 그렇게 알아들었을 뿐이다. 그리고 군에서 제대하고 난 뒤 사회생활을 하는 동안 충절, 충성, 충의, 충정이라는 말을 까맣게 잊고 살았다. 6월은 호국.보훈의달이다. 호국보훈의달을 맞아 서울시 동작구 노량진에 있는 사육신공원(死六臣公園)을 찾았다. 사육신공원은 한강대교와 노량진역 사이의 언덕에 있는 조선조 초기의 대표적 충신이었던 사육신묘역 일대 약 5만㎢의 면적을 성역으로 가꾸어 문을 연 공원이다.
사육신(死六臣)은 ‘죽은 여섯 신하’라는 뜻으로,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 사전에 발각되어 처형당한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응부와 자살한 유성원을 일컫는다. 이들은 단종 3년(1455)에 단종의 숙부인 수양대군(뒤의 세조)이 왕위를 빼앗고 단종을 영월 청령포로 유배 보내자 이에 분개하여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발각되어 참혹한 최후를 맞았다. 이들은 거사 동지이며 집현전 출신인 김질 등이 세조에게 단종복위 계획을 밀고하여 연루자들이 모두 붙잡혔다. 그리고 혹독한 고문 끝에 일가족과 함께 새남터에서 참수형을 당했다. 당시 시체는 처형장인 새남터에 그대로 버려졌으나, 생육신 중 한 명인 매월당 김시습에 의해 한강 건너 노량진 언덕에 몰래 매장되었다고 전한다.
사육신은 처형당한 지 100년이 지난 중종 때 가서야 복권의 움직임이 시작되었고, 현종 때 송시열, 김수항 등이 사육신의 복권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래서 숙종은 사육신의 충성심과 장렬한 의기를 추모하기 위해 묘역 인근에 ‘민절서원(愍節書院)‘을 세워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 그리고 영조는 성삼문에게 충문(忠文), 박팽년에게 충정(忠正), 이개에게 충간(忠簡), 하위지에게 충열(忠㤠), 유성원에게 충경(忠景), 유응부에게 충목(忠穆)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관작을 복구시켰으며, 정조는 묘역 근처에 ’조선육신(朝鮮六臣)‘이라는 신도비를 세웠다. 반면에 거사 계획을 밀고한 김질을 비롯하여 신숙주, 정인지, 정창손 등 세조에 찬동한 신하들은 조선조의 대표적인 변절자로 낙인찍혔다.
원래 사육신묘역에는 성삼문·이개·박팽년·유응부의 묘만 있었으나 후에 하위지·유성원의 가묘를 만들어 함께 모셨다. 당시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처형당한 사람들은 모두 70여 명이나 된다. 그들 모두가 역모의 죄목으로 참혹하게 처형당했으며, 그들의 가족들도 관에 끌려가 죽거나 노비로 전락하는 등 멸문의 화를 당했다. 그러므로 당시 처형당한 사람들 모두가 지위의 높고 낮음을 막론하고 충절이 대단했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6명을 따로 떼어 사육신이라 명명한 것은 생육신 중 한 사람인 남효온의 소설 육신전(六臣轉)에서 비롯됐다. 남효온은 처형당한 사람들 가운데 개인 기준에 따라 주요 인물 여섯 명을 선정하여 그들이 태어나 처형당하기까지의 전기를 소설로 출간했다.
그런데 사육신 사당인 의절사(義節祠)에 봉안된 위패가 7개나 되며, 사육신 묘역에도 무덤이 7개가 조성돼 있다. 어찌된 영문일까? 1970년대에 사육신묘를 대대적으로 정비할 때 당시 공조판서이자 삼군도진무였던 김문기가 사육신에 해당한다는 새로운 주장이 제기됐다. 그래서 관계기관에서 이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여 결국 사육신에 김문기를 추가로 헌창했다. 사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지금껏 많은 논란이 있다. 비록 김문기의 충절이 사육신에 못잖으나 정조가 단종 복위 사건으로 처형당한 신하들에 대해 '장릉배식록'을 편정할 때, ’사육신‘에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응부, 유성원을 선정하고 김문기는 이조판서 민신, 병조판서 조극관과 함께 ’삼중신‘에 포함시켰기 때문이다.
충(忠)과 효(孝), 그리고 예(禮)는 유교의 도덕규범 가운데 가장 중요한 3가지 덕목으로 동양적인 윤리의식의 근본이 되었다. 특히 예로부터 우리나라를 가리켜 ‘동방예의지국(東方禮義之國)’했듯 이 세 가지 덕목은 조선시대의 통치이념이었으며 사회질서를 유지시키는 정신적 기틀이었다. 그러나 갑오경장(甲午更張) 이후 우리사회가 서구문물의 급격한 유입으로 급변하면서 그동안 우리의 정신적 지주였던 전통적 가치관이 완전히 무너지고 물질적 가치를 중시하는 시대로 바뀌었다. 나라도 군주제에서 민주제로 바뀌었으며 가부장적 대가족제는 부부 중심의 핵가족으로 변했다. 세상이 바뀌어도 너무 많이 바뀌었다. 그러니 어찌 젊은 사람들에게 고루한 유교적 실천윤리를 강요할 수 있을 것인가.
어디 사육신뿐이랴!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기까지 많은 사람이 나라를 위해 피를 흘렸다. 우리는 비록 목숨을 잃을지언정 나라를 위한 절의를 끝까지 지키며 희생한 사람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세조가 왕위를 찬탈한 뒤 김질을 박팽년에게 보내 술을 권하며 속마음을 떠봤을 때 박팽년은 자신의 절개를 굽힐 수 없음을 드러내 다음과 같은 시조 한 수를 남겼다. ‘까마귀 눈비 맞아 희는 듯 검노매라/ 야광명월이 밤인들 어두우랴/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변할 줄이 있으랴’ 한편 사육신공원에는 사육신 묘와 함께 홍살문과 불이문, 사당인 의절사. 신도비와 비각, 육각비, 사육신역사관 등이 있다. 그리고 의절사에서는 매년 10월 9일에 이들 7명의 위패를 모시고 추모제향을 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