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합시다! 신앙교리
조현권 스테파노 신부 대구대교구 사목국장, CBCK교리교육위원회 위원
개인신심미사의 번성
중세에 들어 성체성사가 가졌던 공동체적인 특성이 갈수록 희박해지고 사제가 홀로 집전하는 사적(私的)인 미사가 더 성행하게 되었습니다. 원래 성찬례는 주교에 의하여 집전되고 사제들은 하나의 사제단으로서 참가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지요. 그러다가 로마와 같이 큰 도시에서는 하나의 성찬례로 모자라 주교가 주례하는 성찬례 외에도 다른 성당의 주임 사제들이 따로 집전하는 미사가 많아지게 된 것입니다.
또한 순교자의 무덤 위에 세워진 제단에서는 그곳을 순례하는 이들을 위한 성찬례가 성행하였고, 큰 수도원의 경우에는 공동집전 외에 개인적으로 성찬례 거행을 원하는 사제가 많아졌습니다. 그렇게 하여 7세기 이후 서방교회에서는 사제들이 성찬례를 공동으로 집전하기보다 개별적으로 집전하는 것이 일반적이 되었고, 이러한 경향이 오늘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이렇게 미사가 사제의 공동집전보다는 개인적으로 거행하는 신심으로 성행하게 된 것은 특히 8-11세기경까지의 미사이해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습니다. 즉 미사가 공동체의 전례가 아닌 개인적인 기도의 장으로서 가장 효과적인 신심행사로 이해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같은 성당 내에 여러 제단이 생기게 되었고, 사제는 신자들과는 무관하게 벽을 보고 혼자서도 미사를 드리게 되었습니다.(한 해 전체의 미사 본문이 담긴 ‘완전한 미사경본’이 생겨남)
미사는 성직자의 전유물이고 신자들은 그 구경꾼?
13세기에 들어서 미사는 전 교회 구성원이 함께 거행한다는 개념이 사라지고 성직자만의 전유물이 된 듯 했습니다. 미사거행에 있어서는 사제가 행하는 것만 ‘유효’하다는 인식이 생겨나, 평신도는 독서낭독도 할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어려운 전례언어가 신자들의 이해를 가로막아버렸습니다. 그리하여 이제 미사는 말씀을 선포하는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고, 말씀보다는 전례 의식과 또 예식에 쓰이는 외적인 물건, 그리고 성사들의 표지가 더 큰 비중을 갖게 되었습니다. 적지 않은 신자들이 미사언어인 라틴어를 잘 이해할 수 없어 미사참여에 소극적이 되었고, 미사를 바라보기만 하는 시청자요 성체성사의 구경꾼이 되어 갔습니다.
또한 성당이 커지면서 신자석은 사제석에서 완전히 분리되었고, 그에 따라 평신도와 성직자 간의 차별도 켜져 갔습니다. 한편 이때부터 그리스도께 대한 기도를 중재해 줄 ‘성모 마리아와 성인들에 대한 신심’이 성행하여 교회력에 성인을 기념하는 축일들이 많이 늘어났습니다. 미사를 거행하는 제단은 공동체의 식탁으로 신자들 가까이 있지 않고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여러 층계와 칸막이와 문턱으로 이루어진 높은 제단이 신자들에겐 근접하기 어려운 대상이 되었습니다.
실체변화교리와 영성체 기피 현상
12세기 말에는 “빵 그 자체가 그리스도 자체로 변화한다.”고 하는 ‘실체변화’(Transsubstantiatio) 개념이 등장했습니다. 실체변화 개념은 ‘성체 안의 그리스도’, 정확히 말하자면 ‘성체이신 그리스도의 실제적 현존’을 강조하는 개념이지요. 그러다보니 이제 미사성제 안에서의 그리스도의 현존이 빵의 형상에만 제한되어 있는 듯이 이해되는 경향이 생겨났고, 이에 따라 눈에 보이는 성체에 대한 구체적이고도 지나친 경외사상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무릎을 꿇고 성체를 영하는 관습이 생겨난 것도 이 때부터입니다.
유감스러운 것은 그리스도의 성체 현존을 강조함에 따라 신자들은 영성체를 더 멀리하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이제 신자들은 ‘성체를 잘못 영하면 스스로를 단죄한다’는 식의 두려움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런 생각은 바오로 사도의 다음 말씀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므로 부당하게 주님의 빵을 먹거나 그분의 잔을 마시는 자는 주님의 몸과 피에 죄를 짓게 됩니다. 그러니 각 사람은 자신을 돌이켜보고 나서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셔야 합니다. 주님의 몸을 분별없이 먹고 마시는 자는 자신에 대한 심판을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가운데에 몸이 약한 사람과 병든 사람이 많고, 또 이미 죽은 이들도 적지 않은 것입니다.”(1코린 11,27-30)
‘적어도 일 년에 한 번’의 영성체 규정
신자들의 영성체 기피 현상이 심화되자 교회는 이제 “신자는 적어도 1년에 한번은 영성체를 해야 한다.” 라는 규정을 발표하였습니다. 1215년의 제4차 라떼란 공의회는 ‘실체변화’라는 표현을 정식으로 이용하여 “미사성제 안에서의 축성으로 빵은 본질적으로 그리스도의 몸이 된다.”고 하면서, 신자들은 적어도 1년에 한번 부활 전에 고해성사를 받고 영성체를 해야 한다고 규정한 것입니다.(1983년, 새교회법 920조의 규정도 그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성체를 위한 교회의 철저한 준비 규정은 신자들의 영성체를 여전히 어렵게 한 면이 있었습니다. 당시 교회는 ‘인간은 죄인’이라는 점을 많이 강조,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철저한 신앙생활이 필요하다고 가르쳤지요. 따라서 신자들은 영성체에 지나친 주의를 기울여야 했고, 그 결과 그들은 성체에서 점점 더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거양성체의 등장
성체에 대한 경외심이 일방적으로 강조되는 분위기 속에서, 미사에 참여하는 신자들은 자신들이 영성체에 초대받고 있다는 의식을 갈수록 덜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라틴어로 거행되는 말씀의 전례를 잘 이해할 수 없어 영적으로 항상 부족함을 느꼈고, 그러다보니 미사전례를 거행하는 사제가 확실한 볼거리를 제공하면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신자들의 요구에 부합하여 생겨난 것이 바로 ‘거양성체’ 의식인데, 미사의 가장 중요한 순간으로 여겨진 ‘성체의 거양’은 12세기 말부터, ‘성혈(성작)의 거양’은 14세기 말부터 행해졌습니다. 게다가 거양성체와 관련하여 일어난 성체기적의 이야기들이 성체에 관한 신자들의 공경심을 자극하였습니다.
이렇게 하여 영성체 대신에 눈으로 성체와 성혈이 담긴 성반과 성작을 우러러보며 성체를 공경하는 신심이 큰 의미를 갖게 되었습니다. 영국의 몇몇 학교의 경우에는 거양성체 때 수업을 중단하고 학생들에게 거양성체에 대한 주의와 공경을 강조할 정도였지요. 거양성체에서 성체를 올려다본다는 것은 구약성경의 ‘구리뱀 이야기’를 상기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뱀에게 물렸을 때 모세가 쳐든 구리뱀을 쳐다본 사람은 죽지 않았듯이, 성체를 올려다보는 사람도 그와 같은 보호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지요.(민수 21,4-9 참조)
이렇게 성체에 대한 과도한 공경심은 영성체 방법의 변화로 이어졌습니다. 즉 신자들은 차츰 성체를 영할 때 더러운 손으로 받아 모시면 불경하니 혀로 (사제의 손에서 바로) 받아 모셔야 한다는 의식을 가지게 된 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