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불붙는 정열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아리땁던 그 아미
높게 흔들리우며,
그 석류 속 같은 입술
죽음을 입 맞추었네
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흐르는 강물은
길이길이 푸르리니
그대의 꽃다운 혼
어이 아니 붉으랴
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 논개, 변영로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변영로시인하면 나로서는 학창시절에 배웠던 ‘논개’가 먼저 떠오른다. 수주(樹州) 변영로(卞榮魯)[1897~1961]는 부천시가 자랑하는 인물 중 하나다. 그의 동상이 서 있고, 시비가 있으며, 묘역이 있고, 이 근처를 지나는 대로의 이름을 ‘수주로’라고 붙여 놓았다. 부천중앙공원 내에는 ‘논개’를 새긴 시비(詩碑)가 있다고 하는데 찾아보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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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봉오대로와 수주로가 만나는 고강지하차도 인근, 도로 안의 섬으로 향한다. 접근이 쉽지 않은 곳이다. 이곳에 대형 아치 등 기념물을 만들어놓았는데 그 가운데는 수주 변영로선생의 동상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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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상 앞에는 시비도 있는데 이 시비에는 ‘봄비’라는 시가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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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비
나즉하고 그윽하게 부르는 소리 있어
나아가 보니, 아, 나아가 보니 ㅡ
졸음 잔뜩 실은 듯한 젖빛 구름만이
무척이나 가쁜 듯이, 한없이 게으르게
푸른 하늘 위를 거닌다.
아, 잃은 것 없이 서운한 나의 마음!
나즉하고 그윽하게 부르는 소리 있어
나아가 보니, 아, 나아가 보니 ㅡ
아렴풋이 나는 지난날의 회상(回想)같이
떨리는, 뵈지 않는 꽃의 입김만이
그의 향기로운 자랑 앞에 자지러지노라!
아, 찔림 없이 아픈 나의 가슴!
나즉하고 그윽하게 부르는 소리 있어
나아가 보니, 아, 나아가 보니 ㅡ
이제는 젖빛 구름도 꽃의 입김도 자취 없고
다만 비둘기 발목만 붉히는 은(銀)실 같은 봄비만이
소리도 없이 근심같이 나리누나!
아, 안 올 사람 기다리는 나의 마음!
변영로선생이 묻혀 있는 고강동 일대는 선생의 집안인 밀양변씨들이 누대로 살아왔고, 또 묻혀 있는 곳이다. 변영로선생 역시 이곳에서 살았으며, 1997년 7월 10일 한국문인협회는 ‘문화유산의 해’를 맞이하여 SBS문화재단의 후원을 받아 생가 앞에 ‘卞榮魯 生家 記念標石’을 세워두었다. 오정구 고강동 313-2번지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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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표석에서 안쪽으로 조금 더 들어가면 정면에 ‘수주도예연구소’가 보이고, 우측에 우물과 설명판, 표지판 등이 있다. 표지판에는 왼쪽으로 가면 변영로기념비가, 오른쪽으로 가면 공장공변종인신도비가 있다고 되어 있다. 실제로는 신도비 쪽부터 갔지만 변영로 기념비 쪽부터 보인다. 밀양변씨 묘역 중 접근한 곳에 제일 가까운 곳에 변영로, 영태, 영만 삼형제의 묘소가 있고, 그 앞에 樹州 卞榮魯 詩碑가 있다. 시비는 1969년 5월 건립되었으며, 높이 180㎝, 너비 166㎝ 규모다. 밀양변씨 종친회에서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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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비 앞면에 변영로가 1924년 『폐허 이후』 창간호에 발표한 「생시에 못 뵈올 님」의 앞부분이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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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시에 못 뵈올 임을
꿈에나 뵐까 하여
꿈 가는 푸른 고개
넘기는 넘었으나
꿈조차 흔들리우고 흔들리어
그립던 그대
가까울 듯 멀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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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비 뒷면에는 다음의 글이 새겨져 있다. “우리 세대에 나타난 변문(卞門)의 세 별 산강(山康) 영만(榮晩), 일석(逸石) 영태(榮泰), 수주(樹州) 영로(榮魯)의 백중계(伯仲季)는 그 표일(飄逸)한 재질과 대쪽 같은 지조와 청렴 개결한 품성이 일세의 범이 되엄즉하나 이는 그 엄친 변정상공(卞鼎相公)의 엄격한 훈육과 청순한 덕행에 말미암은 바라 하겠다. 계씨 수주(樹州)는 이밖에 해학과 풍자를 곁들여 담소 중 분방한 재기를 발산시켜 듣는 이로 하여금 종종 분반의 폭소를 터뜨리게 하였다.
시와 수필에 재화를 보였고 영문학에도 능하여 고전 시조의 영역으로 사람을 놀라게도 하였다. 교육가로서 언론인으로 성문을 높였으며 거의 일생을 술과 더불어 시종하였으니 남달리 예리한 감각의 소유자로서 36년간 가혹한 왜정의 질곡 속에서 생생한 본정신을 가지고는 비분강개한 나머지 실신 지경에 이르지 않을 수 없었던 탓으로 호리건곤 도피하여 세간의 갑자(甲子)를 망각하려 하였든 것이 아니었든가.
명정 40년이란 그의 저서는 이를 증명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인생은 가고야 마는 것 수주도 63세를 일기로 그 유해가 여기 잠들고 있으나 그 정혼은 광복된 조국을 천상에서 굽어 살피며 계실 것이다. 영원히, 또 영원히. 일석 이희승(李熙昇) 찬(撰), 일중 김충현(金忠顯) 서(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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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도면 수주 변영로선생의 일생에 대해 따로 이 공간에 더 적을 것은 없을 것 같다. 묘소는 질박한 편인데 묘소 우측에 樹州誕生百週年記念碑가 서 있다. 사실 현장에서 이 비석이 기념비인지 알지 못해 제대로 찍지 못했다. 비석 앞면에 [밀양변공영로 남원양씨창희 지묘]라고 쓰여 있어 ‘묘비가 둘이나 있네’라고 생각했고, ‘앞쪽에 있는 시비를 기념비라고 하나 보다’고 생각했을 뿐이다.(사실 시비에는 ‘수주변영로선생기념비’라고 쓰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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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비는 변영로가 태어난 지 100주년이 되는 1998년 4월에 복사골 문학회에서 심포지엄을 마련했고, 변영로를 존경하며 따르던 이용상이 변영로 묘 앞에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묘비를 세우고 비문을 썼다.
변영로선생 묘소를 포함하여 이 산 이쪽저쪽이 모두 密陽卞氏 墓域이다. 묘역에는 변종인의 신도비를 비롯하여 변삼근의 유사비, 변혁조의 의헌비, 변영로의 시비가 있으며 변종인, 변삼근, 변혁조, 변영만, 변영태, 변영로, 변정상, 변강지, 변건원, 변해준, 변극찬, 변응모, 변희천, 변희눌, 변충원, 변희겸 등의 묘가 있다.
변영로시인 묘소 영역에 있는 변삼근의 묘 앞에는 3기의 묘비와 망주석 2기, 문인석 2기가 있는데, 문인석은 좌우의 모양이 서로 다른 점으로 미루어 제짝이 아닌 듯하며, 호석에는 연꽃무늬가 음각되어 있다. 중앙에 있는 가장 오래된 묘비의 크기는 높이 133㎝, 너비 59㎝, 두께 18.5㎝이다. 호석을 비롯한 대다수 석물은 근래 다시 만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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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말한 표지판에서 오른쪽으로 가면 변종인신도비 등이 있다. 변종인 신도비는 처음에 세웠던 곳에서 이전하였는데, 그 이유는 변종인 신도비가 세워진 직후부터 고강리 일대에 원인 모를 화재가 빈발하여 재산상 많은 피해를 초래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주민들이 의논을 하여 현재의 위치로 옮기자 화재가 진정되었다고 전한다. 변종인 신도비에는 비문 훼손을 방지하기 위해 1996년 2월 비각을 설치하였다. 이 비각 역시 무척이나 비좁아 답답한 마음 지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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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종인 신도비는 백색의 대리석제이며, 비신은 높이 155.5㎝, 폭 75.5㎝, 두께 20㎝이다. 비좌는 높이 67.5㎝, 너비 107㎝, 두께 56㎝이다. 비좌하엽(碑座荷葉) 양식으로 개석부(蓋石部)가 하엽형으로 구성되어 있다. 신도비는 부천시 향토유적 제1호로 지정되어 있다. 비문은 당대의 문장가 성현(成俔)이 지었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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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종인 묘는 정부인 이천안씨와 쌍분이며 봉분에는 호석을 둘렀다. 묘역은 2단으로 조성되었으며 하엽형의 묘비와 상석, 장명등, 문인석 2기를 갖추고 있다. 문인석의 크기는 가로 51㎝, 세로 42㎝, 높이 200㎝인데, 복두공복 차림을 갖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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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 설명문 출처: 디지털부천문화대전]
첫댓글 논개, 봄비 다 기억 나는 시군요. 근데 봄비가 훨 낫네.
저는 봄비는 다 잊고 있었습니다...
수주를 생각하면 진주성이 먼저 떠오릅니다.
촉석루 앞에 서서 논개를 생각했는지, 논개를 읊은 수주를 생각했는지 가물가물합니다.
저도 수주 변영노~ 하면 거룩한 분노.....
처음 진주 남강변 망경동 촉석루 건너편에 갔을 때부터,,,,
실은 망경북동이 장가들고 한 10여년 처가 동네였어요^^
물론 장인도 그곳이 고향은 아니고 원 고향은 평안도 삼수갑산이 있는 곽산이라고 하더군요^^
사모님께서 진주분이셨군요.
곽산이 어딘가요? 평안도에서도 북도 어드메쯤 될 것 같은데요.
한 번 가봐야 할텐데요... 묘향산 8각13층석탑도 봐야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