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권 답사는 결국 묘역 답사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내 결론이다. 오늘 걸음을 옮기고 있는 부평-부천-구로 쪽은 더욱 그러하다. 부천시 오정구 작동, 까치울에는 왕의 여인이나, 왕의 딸들이 묻혀 있다. 경숙옹주묘는 작동 산57-2에 소재한다. 골짜기로 들어가면 여러 음식점들이 있는데 산마루촌이라는 음식점 앞에서 왼쪽으로 난 길로 간 뒤 오른쪽으로 조금 가다 다시 왼쪽으로 갈라진 길에 들어서면 곧 묘역이 보인다.
현재 이곳에서는 공사가 계속되고 있다. 언덕 너머는 바로 서울시 양천구 신정동이고 市界까지 도로가 개설되어 있다. 서울 쪽으로 연결되는 도로를 내는 것인지, 다른 공사인지는 알아보지 못했다.
옹주의 묘는 부군의 이름과 함께 민자방 경숙옹주묘(閔子芳·敬淑翁主 墓)라고 불린다. 경숙옹주(敬淑翁主)[1485~?]는 성종과 숙원김씨 사이에서 태어난 다섯째 딸이다. 민종원(閔宗元)의 아들 민자방(閔子芳)과 혼인하여 아들 1명을 낳았다. 울산시 울주군에 남아 있는 태실과 태실비로 1485년(성종 16)경에 출생한 것은 알 수 있으나 사망 연대는 알 수 없다. 민자방(閔子芳)은 본관은 여흥(驪興)이며, 성종의 부마(駙馬)가 되면서 봉헌대부(奉獻大夫)로 봉해졌으며, 여천위(驪川尉)라는 작위를 받았다.
묘는 남편 민자방 묘와 쌍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봉분은 근래 새로 조성한 호석으로 둘러져 있다. 묘역은 1단으로 조성되어 있으며, 묘비·혼유석·상석·향로석·망주석·장명등·문인석의 석물이 갖춰져 있다. 묘비는 이수 부분에 용과 구름 모양이 새겨져 있다. 비좌는 방형으로 상부에는 복련문(覆蓮文), 측면에는 안상이 표현되어 있다. 비신의 규모는 높이 116㎝, 너비 55.5㎝, 두께 23㎝이고, 비좌의 규모는 가로 90㎝, 세로 59㎝, 두께 33㎝이다.
장명등은 팔작지붕형 옥개·화사석·기단부가 모두 갖춰져 있으며, 높이는 190㎝이다. 옥개석의 크기는 가로 75㎝, 세로 72㎝이고, 화사석의 크기는 가로 35㎝, 세로 30㎝이며, 화창의 크기는 가로 11㎝, 세로 13㎝이다. 화사석 하단부와 기단부에는 사면에 안상이 음각되어 있다. 장명등의 중간 부분에는 45°로 절단한 흔적이 남아 있다. 문인석은 복두공복 차림으로 높이는 각각 160㎝, 168㎝이며, 망주석 1쌍의 높이는 각각 175㎝, 170㎝이다.
경숙옹주묘는 현재 남아 있는 옹주묘 가운데 비교적 이른 시기인 조선 전기의 분묘로 묘비·문인석·장명등 등 각종 석물이 잘 남아 있어 조선 전기 유력한 가문의 묘제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고 한다.
이 산줄기의 맞은편 산줄기에는 신생옹주(新生翁主) 묘가 있다고 하는데 찾아보지 못했다. 현재 묘비만 남아있으며, 이후 찾은 화유옹주의 언니로 추정하고 있다고 한다. 사전에 열심히 자료를 찾아보았지만 제대로 찾을 수 있다는 자신이 없었고, 그것은 현장에 직접 가서 봐도 마찬가지였다.
[묘역 건너편 산자락에 신생옹주묘가 있다고는 하지만 위치를 짐작할 수 없어 포기했다.]
골짜기에서 나오는 길에 淸州韓氏 묘역도 잠깐 들렀다. 골짜기 기준 북쪽의 여러 곳에 위치하는데 그중 한 곳만 가보았다. 산새울 음식점으로 들어가는 길목 우측에 있는 계단으로 올라가면 된다. 나는 그 계단을 발견하지 못해 안쪽까지 들어간 뒤 한씨 후손을 만나 물어본 뒤에야 찾을 수 있었다.
이 영역에는 한홍연묘, 한세보묘 등이 있다. 제일 상단에 있는 한홍연 묘는 아래에서 만난 후손분의 말로는 이 묘역에서 제일 윗대의 어르신이라고 한다. 여흥민씨와의 쌍분으로 조성되어 있으며, 묘비의 너비는 51㎝, 높이는 135㎝이며, 비좌의 상단부에는 복련문이 베풀어져 있다. 망주석 1쌍과 복두공복 차림의 문인상 1쌍이 갖추어져 있다. 정확한 조성연대를 알 수는 없지만 석물 모두 최소한 근래의 것은 아니다.
한홍연의 묘비에는 앞뒷면에 비문이 음각되어 있는데, 앞면에는 ‘숙인여흥민씨부좌어모장군행중부장한홍연묘(淑人驪興閔氏祔左禦侮將軍行中部將韓弘演墓)’라고 되어 있고, 뒷면에는 ‘숭정후83년 경인 개립(崇禎後八三年庚寅改立)이라고 씌어져 있다.
한홍연묘 아래에 있는 한세보 묘는 부인 전주이씨와의 합장묘이다. 묘비는 원수방부형으로, 너비 57㎝, 높이 129.5㎝이며, 3면에 비문이 음각되어 있는데, 손주 사위인 통정대부 사간원대사헌 이유신(李裕身)이 서(書)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청주한씨 묘역에서 서쪽으로 3km 정도 가면 화유공주묘와 귀인조씨묘가 있다. 이 묘소들은 부천시 오정구 여월동 산32번지, 전주이씨 司直公內洞宗中 先塋 내에 위치한다.
화유옹주(和柔翁主)[1740~1777]는 영조와 귀인조씨(貴人趙氏) 사이에서 태어난 열 번째 옹주이다. 황인점과 혼인하였다. 오정구 작동 126번지에 있었던 묘역은 1991년 6월 도로 확포장 공사 때문에 작동 산28-6번지로 이장하였다. 2차 이장 이후 묘비나 석물 없이 봉분 1기만 방치되어 있다가 2005년 6월에 현재의 위치로 이장되었다.
본래 위치했던 묘역에는 곡장(曲墻)이 둘러져 있었고, 옥개형 묘비와 혼유석, 상석, 향로석 등이 배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장(移葬) 발굴 조사에서 장신구와 도자기류, 생활 용품 등 궁중과 양반가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수습된 유물은 황인점의 8대손 황선욱이 기증함에 따라 국립고궁박물관과 부천향토역사관에서 전시하고 있다. 현재 어머니인 귀인조씨묘 왼쪽에 위치하는데 곡장을 새로 둘렀고, 망주석은 어머니와 묘와 함께 설치했다.
귀인조씨(貴人趙氏)[1697~1780]에 대한 사항은 사위인 창원황씨 가에 전해 오는 『영세보장(永世寶藏)』에 수록된 귀인조씨의 묘표(墓表)를 통해 알 수 있다. 귀인 조씨는 1697년(숙종 33) 10월 16일 아버지 풍양조씨와 어머니 밀양박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1716년 10세의 나이로 입궁하여 29세인 1726년(영조 2)에 숙원(淑媛)이 되었다. 1740년(영조 16) 영조의 열 번째 딸인 화유옹주(和柔翁主)를 낳았다. 이후 숙의(淑儀)가 되었다가 1778년(정조 2) 귀인(貴人)이 되었다. 1780년 8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정조는 화성행차를 위해 부평을 지나며 귀인조씨묘와 화유옹주묘에 관원을 보내 제를 올리기도 하였다.
귀인조씨묘는 본래 오정구 작동 산112-19에 조성되었으나, 2005년 4월 현재의 위치로 이장되었다. 이장하기 전 작동에 있던 묘는 남향의 배치에 묘 주변을 거대한 돌이 에워싸는 명당에 위치했기 때문에 이 묘를 통해 당시 왕실 묘의 위용과 풍수관념을 볼 수 있었으며, 인근에는 신생옹주묘가 있었다고 한다. 묘비는 옥개형으로 높이는 149㎝이며, 상석의 크기는 가로 131㎝, 세로 88㎝, 두께 42㎝이다. 묘표는 귀인조씨가 세상을 떠난 지 17년만인 1797년(정조 21)에 세워졌으며, 글은 사위인 황인점이 지었다. 도시개발로 이 두 분의 묘가 설 자리를 잃은 것은 분명한 것 같은데 어떤 연유로 이 선영으로 옮겨온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전주이씨 司直公內洞宗中 先塋 은 16세기에서 19세기까지 조성된 전주이씨의 가족 묘역이다. 귀인조씨묘와 화유옹주묘를 보기 위해 들어간 것이기 때문에 전주이씨 묘역은 제대로 둘러볼 수 없었다. 포털 위성지도를 보면 내가 진입한 앞쪽 뿐 아니라 뒤쪽으로도 매우 많은 묘소들이 조성되어 있다.
이후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04호 부천석왕사목조관음보살좌상(富川釋王寺木造觀音菩薩坐像)을 보기 위해 지근거리인 원미구 원미동 산29-30, 석왕사로 향했다. 그러나 우려했던 대로 이 불상은 볼 수 없었다. 처음 주불전인 육화전으로 가보았으나 다른 관음보살이 모셔져 있었고, 이 불전의 아래층에 조성해둔 관음전이 있기에 기대를 부풀렸지만 역시 다른 관음보살만 볼 수 있었을 뿐이다.
망설이다 종무소에 가서 물어보니 박물관이나 그런 곳이 없어 공개된 장소에 모시지 못하고 주지스님 방에 있다는 것이다. 문화재청 자료를 보니 보살상의 크기는 높이가 48㎝, 무릎의 폭이 31㎝라고 한다. 비교적 소형 불상인데 도난우려 때문에 공개를 하지 않는 것 같다.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지만, 아쉬운 것은 아쉬운 것이다. 내가 파악한 부천시 관내 유일의 불교문화재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언제 이 불상을 볼 수 있을지 기약할 수 없으므로 할 수 없이 문화재청의 사진을 싣는다.
[사진출처: 문화재청]
그래도 거짓말을 하지 않고 솔직하게 대답해 준 것은 고맙다. 석왕사는 대형 불상, 석탑 등이 조성되어 있고, 많은 신도들이 찾고 있는 절집이었다. 한편 문화재청 홈페이지의 이 불상에 대한 설명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무슨 석관을 설명하는 전혀 엉뚱한 것이었는데 이번에 찾아보니 바로잡혔다. 하지만 그 때 설명을 긁어 붙인 글들이 여전히 인터넷을 떠돌고 있다.
부천은 아니고, 석왕사 다음에 곧바로 간 것도 아니지만, 왕가 여인들의 유택이란 주제에 맞춰 정선옹주 묘역(貞善翁主 墓域 서울시 구로구 궁동 산1-64)을 이어간다. 묘역은 궁동생태공원 왼쪽(서쪽) 산줄기에 있다. 포털지도에서 위 주소를 입력해보면 묘역보다 북쪽 산속을 가리키는데 이 때문인지 내비도 서서울생활과학고등학교 입구로 안내한다. 차를 돌려 큰 길로 나온 뒤 생태공원을 끼고 우회전하니 옹주의 시할아버지 권협의 신도비가 먼저 보이고 묘역으로 향하는 입구가 나타난다. 묘역의 실제주소는 궁동 산 1-16, 입구 신도비 인근 주소는 궁동 252번지다.
정선옹주(貞善翁主)는 조선 제14대 임금 선조의 일곱 번째 딸로써 정빈(貞嬪) 민씨(閔氏)의 소생이며 안동권씨 권대임(權大任)과 결혼하여 지금의 구로구 궁동 67번지 일대에서 거주하였다. 이런 이유에서 이 지역의 동명이 ‘궁동’으로 정해졌다고 한다. 정선옹주를 비롯하여 그의 남편 권대임 등 안동권씨가 매장된 이 묘역은 흔히 풍수가에 의해 명당 중의 명당으로 꼽힌다.
묘역 가장 상단에는 권대임의 조부인 길창군(吉昌君) 충정공(忠貞公) 권협과 정경부인 전주최씨(全州崔氏)의 무덤이 있다. 그 아래에 부마도위(駙馬都尉) 길성군(吉成君) 권대임과 정선옹주의 무덤이 있는데, 권협의 무덤보다 규모는 크지만 비석이 작고 비문도 간략하다. 권대임의 아래에 아버지인 길흥군(吉興君) 권신중(權信中)과 부인 전주이씨(全州李氏)의 무덤이 있다. 그 아래는 권대임의 아들 권진(權瑱)과 부인 남양홍씨(南陽洪氏)의 순서로 되어 있다.
조선 왕조에서 옹주나 비빈이 아닌 왕의 부인들의 유택이 그리 대접받는 상황은 아니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귀인조씨나 화유공주 묘는 도시개발로 옮겨졌다는데 寡聞의 所致이겠지만 현재 묻혀있는 곳의 주인인 전주이씨 사직공파와 무슨 관련이 있는지 잘 모르겠다.
[인용 설명문 출처: 문화재청, 디지털부천문화대전, 디지털구로문화대전]
첫댓글 왕과 왕비릉이 아닌 옹주릉에도 혼유석을 두나요? 석왕사는 매스컴에도 자주 오르내리는 절집이더군요. 우리 카페에 부천에 거주 하시는 분이 석왕사와 교류가 깊어든데...
그저 돌아다니기만 하므로 묘의 석물 법도에 대해 잘 모릅니다. 처음부터 설치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을테고요.
사전에 석왕사 검색해보니 직접 찍어 이 불상을 올린 개인블로그나 카페글을 발견하지 못해 큰 기대 없이 갔습니다.
혹 그 회원님께서 주선해주실 수 있다면 참 좋겠습니다만 주지스님이 촬영을 허락할지는 미지수이겠습니다...
여긴 잘 몰랐어요...
윤관장군 묘 소개할까요?
이것도 한 7-8 년 전 꺼예요^^
네, 선생님. 파주의 윤관장군묘는 두 번 갔습니다.
원래 뒤에 심지원신도비와 묘가 있었는데 두번째 갔을 때 없어져서 깜짝 놀랐어요.
알고보니 서로 산송을 벌이다 결국 심씨집안이 인근으로 묘역을 이전했더군요.
요건 흥선대원군이고요^^
대원군묘도 두 번요^^
감사합니다~~
석왕사 목조보살좌상은 1755년 진주 용화암에서 봉안되었던 보살상으로 18세기 불세출의 조각승 상정비구 작품입니다...주지스님 방 책장 위에 있어서 사다리까지 놓고 사진찍었던 추억이 떠오르네요...
흔별님 세부전공이 조선후기 목조불보살상이시라고 했던가요?
연구자라도 볼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잘 보존되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하기는 하는데 그래도 아쉽긴 합니다~~
혹시 사진이 필요하시다면 보내드리겠습니다...소형 불상은 도난이 많아 꼭꼭 숨겨두는 경우가 많습니다..저도 허락받지 못해 못보는 경우도 많습니다...
아닙니다, 흔별님.
내부에 모셔진 불상은 조명이 약해서 찍어도 제대로 나오지 않습니다. 그저 제가 직접 찍은 사진이다라는 정도의 의미를 부여하고 있을 뿐입니다. 제가 연구자도 아닌데 사진을 모아서 뭘 할 것도 아니고요.
마음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귀인 조씨묘 원위치;오정구 작동112-19 주소없슴
정선옹주貞善翁主묘역;서울 구로구 궁동 산 1-66
신도비;궁동 2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