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MC 송해의 사부곡 “지는 게 이긴다는 걸 깨닫는 데 60년”
글 | 장광팔 만담가 정리 | 박미정 여성조선 기자 사진제공 | 안규림
“얘, 이번엔 조심해라” 그게 어머니와 마지막
장광팔 이북 재령이 고향이라 명절이면 더욱 고향 생각이 나실 텐데, 부모님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더라고요?
송해 6·25 전쟁으로 1·4후퇴 때 생이별을 한 후 한 번도 못 찾아뵌 불효자식이라 부모님에 대해서는 입 밖에 낸 적이 없는데, 오늘이 처음이네요. 마음속으로는 항상 부르죠. ‘아버지! 어머니!’ 아버지는 송재근, 어머니는 박신자! 고향 떠나고 처음 불러보는 어르신 함자네요. 형, 누이동생, 저 이렇게 삼남매였어요. 해방되고 5년 동안은 서너 차례 남북을 오가고 했었어요. 그런데 마지막으로 어머니를 뵌 날 “어머니, 한 며칠 다녀오겠습니다” 하고 인사를 드리니, 혈육붙이 간에 당기는 끈이 끊길 걸 예감하셨는지 사립문을 나서는 저를 부엌문 앞에서 멍하니 바라보세요. 그러고는 “얘, 이번엔 조심해라~” 하셨죠. 이 목소리가 지금도 어려운 일을 당할 때면 귓가에 아련히 들려옵니다.
장광팔 지금은 중단됐지만 1차 금강산 방문단으로 북녘 땅을 밟아보셨고, 또 평양에서 <전국노래자랑>도 진행하셨죠?
송해 1998년 11월 18일 묵호(지금의 동해시)에서 1차 방문단으로 금강호를 타고 떠나는데, 하늘에는 신문 방송 헬기가 새까맣게 덮여 있었어요. 어릴 적에 내금강은 가봤어도 외금강은 난생처음 가보는 곳이었어요. 외금강 온정마을 서쪽에 있는 바위산이 만물상인데, 장갑을 낀 채 빗자루 들고 청소를 하는 감시원인 듯한 친구가 나를 보더니 “보고 싶은 사람이 있습네까?” 하고 물어요. 내가 “있죠, 어머니가 보고 싶어요” 하자, 금강산은 명산이고 특히 만물상 앞에서 빌면 어떤 소원이라도 이루어지니 ‘어머니’ 하고 한번 불러보라는 거예요.
어머니라는 소리에 나도 모르게 무릎을 꿇고 눈을 질끈 감은 채 “어머니~!” 하고 부르자, 홀연히 달덩어리 떠오르듯 어머니 얼굴이 피어오르는 거예요. 놀란 마음에 허겁지겁 일어나서 몇 발자국 물러서니 어머니 얼굴이 거품처럼 사라지더라고요. 그때는 꼭 무엇에 씐 것 같았어요. 뭔가 간절하게 바라면 비록 허상일지라도 보이고 이루어진다는 걸 그때 깨달았어요. 그날 이후 꿈속에서도 어머니를 뵌 적이 없어요. 아버지요? 제가 어려서 더 그랬겠지만, 그저 어렵고 무서운 존재였어요. 그 후 2003년 8월 11일 광복절 기념 <전국노래자랑> 평양 편을 모란봉공원 평화정 야외무대에서 진행한 가슴 설레던 추억도 간직하고 있습니다.
“아내의 빈자리가 너무 커요”
장광팔 고향에서 생이별한 어머니에 대한 사모곡을 들려주셨는데, 얼마 전 사모님을 떠나보내는 아픔을 겪으셨지요. 슬픔이 가시기도 전에 사부곡을 들어봐도 괜찮으시겠어요?
송해 예상했던 질문인데… 괜찮아요(한참 후 방백처럼) ‘서로 감기에 옮아 같이 병원에 입원했다가 나만 먼저 집에 돌아왔는데, 당신은 다시 못 돌아올 먼 길로 떠났구려.’ 빈자리가 너무 커요. 여성의 빈자리는 너무너무 커요. 아내의 빈자리도, 어머니의 빈자리도…. 집에 들어가면 여기저기 손때 안 묻은 곳이 없어요. 늦게 들어가면 “어서 주무슈” 하는 소리가 들려야 깊은 잠에 빠졌고 옷을 골라줘야 입고 나왔는데, 빈자리가 너무 커요. 나는 팔도를 누비옷 누비듯 다니고, 전 세계를 내 집 드나들듯 다녔어도 집사람하고는 국내여행 한 번 같이 못 가봤어요. 바쁘다는 핑계로….
그나마 결혼 63년(2015) 만에 면사포 씌워주길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그저 조금 먼저 간 것뿐이에요. “애들 잘 돌보고 갈 테니 마음 편하게 있어요.”(그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통신병 시절, 6·25 휴전 전보를 직접 친 주인공
장광팔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보실까요? 본명이 송복희이고 해주예술전문학교 성악과를 나오셨다던데, 어떻게 남한으로 내려오게 되셨나요?
송해 노래를 잘 불렀죠. 그런데 재령에는 예술학교가 없었어요. 그 어려운 살림에도 어머니가 아버지 몰래 쌀을 팔아 해주예술전문학교에 보내주셨어요. 당시만 해도 음악한다 하면 집안에서 딴따라 나온다고 내쫓던 시절이었는데, 유학을 보내다니…. 어머니의 힘은, 여성의 힘은 무한한 거예요.
그런데 당시 북한은 예술을 체제선전 도구로만 이용하고 있었어요. 나는 ‘자경단’이라고 요즘으로 치면 자율방범대에 속해 있었는데,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는 거예요. ‘이건 아니다’ 싶어 남한으로 내려가 있다가 안정되면 다시 고향으로 돌아올 요량으로 집을 떠나는데, 그해 눈이 몇 십 년 만에 가장 많이 왔어요. 걷다가 산골짜기에서 앞의 사람이 빠지면 한참을 찾아야 할 정도였지요. 그래서 끈이란 끈은 모두 매어 서로 몸을 묶고 해주까지 오니, 이미 인민공화국 국기가 올라가 있었어요. 때마침 피난을 떠나려고 뱃전에 쌀가마를 쌓아놓은 배를 만났어요. 같이 오던 친구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7명이 손으로 쪽배의 노를 저으며 연평도에 도착하니, UN군 화물선이 뱃전에 그물망을 딱 내려놓고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 12월 2일인가 3일에 떠났는데,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있다가 내려와보니 부산이었어요.
장광팔 그때 통신병으로 군복무를 하셨다지요?
송해 임시 훈련소에서 일주일간 겨우 총 쏘는 법 익히고 전투에 투입될 뻔했는데, 마침 대구 달성에 있는 통신학교에서 통신병을 모집한다는 거예요. 고등학교 이상 나온 사람 손들라 해서 쫓아갔어요. 무선통신과 유선통신 분야가 있다기에 유선보다 멋있을 것 같아 무선통신병을 지원했죠. 그래서 육군본부에서 근무하게 된 거지요.
자랑 하나 할까요? 그때가 1953년 7월 며칠인지는 생각나지 않는데, 전보가 왔기에 영문 모르고 쳤죠. 암호실에 있는 친구 얘기가 ‘1953년 7월 27일 22시 전투 중단’이라고 쓰인 군사기밀이래요. 6·25 휴전 전보를 제가 직접 친 셈이죠.
“한 사람 더 죽이면 무엇합니까. 용서해주었지요”
장광팔 그때 사모님을 만나셨다고요?
송해 네, 달성통신학교 상관의 여동생을 만나 혼례도 못 올리고 신접살림을 차렸지요. 그때가 1952년이었고, 63년이 지나 2015년에야 결혼식을 올린 겁니다. 집사람과 인연이 되어 처가가 있는 대구 달성군 옥포면에 ‘옥연지 송해공원’이 조성되었는데, 이번에 집사람을 그곳에 묻었어요.
장광팔 가족관계는 어떻게 되나요?
송해 집사람, 큰딸, 외아들, 작은딸, 나 이렇게 다섯 식구가 오순도순 살았는데, 외아들은 스물셋(1987)에 공사 중이던 한남대교를 오토바이 타고 가다 뺑소니 사고가 나서 가슴에 묻었어요. 뺑소니친 사람요? 한 사람 더 죽이면 무엇합니까. 용서해주었지요. 이번에 집사람이 먼저 갔으니(다시 눈가에 이슬이 맺힌다) 딸만 둘이 남았지요. 둘 다 도곡동에 이웃해서 살고 있어요.
라디오 방송의 전설이 된 <가로수를 누비며>
장광팔 <전국노래자랑> 전에는 라디오에서 교통정보 방송을 오래 하셨지요?
송해 1960년대 초부터 앞으로 TV시대가 다가오는데 라디오가 살아남으려면 자동차를 잡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신설된 프로지 요. 동아방송에서 <나는 모범운전사>라는 프로를 진행했는데, 술집에 가면 손님들이 블루벨스 4중창단의 시그널 뮤직을 부를 정도로 인기가 좋았어요.
교통방송 프로에서는 교통정보 못지않게 분실물을 찾아주어 칭찬을 많이 받았어요. 전 재산으로 용달차 살 돈을 차 안에서 분실한 분이 스튜디오에서 찾아주신 분과 만나 서로 양보하며 그 돈을 나누던 미담이 생각납니다.
그 후에 1974년부터 TBC 운현궁 스튜디오에서 <가로수를 누비며> 프로를 1988년까지 진행했는데, 단 한 번도 펑크를 내지 않았어요. 어느 날 폭설이 쏟아져 트럭을 타고 간 적도 있는데, 도착하니 마지막 노래를 틀려고 하기에 중단시키고 클로징 멘트를 했으니 펑크는 때운 셈이죠.(웃음) 그런데 아들을 교통사고로 잃고 나니 더 이상 방송에서 “교통안전 지킵시다”라는 말을 못 하겠더라고요. 그래서 그만두었지요.
<전국노래자랑> 최고령·최장수 국민 MC로 기네스북 등재
장광팔 그 후 <전국노래자랑>을 맡아 세계 최고령·최장수 국민 MC로 기네스북에도 등재되었죠? 공연하면서 잊지 못할 에피소드가 있으면 들려주시죠.
송해 <전국노래자랑>은 1980년 시작되었는데, 맹명섭 씨가 진행하다가 1988년부터 제가 맡아 1994년에 5개월 정도 자리를 비웠을 뿐 30년 넘게 지켜왔으니 제 분신과도 같은 프로지요.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요? 미국 이민 111주년 기념 LA공연 때였어요. 후배들과 같이 12만 명이 운집한 가운데 무대에 오르기 전 대기실에서 제가 가장 떨었어요. 이민 1·2세대면 모를까 3·4세대는 물론 외국인까지 많이 왔는데 과연 송해를 알까, ‘웬 할아버지야?’ 할까 봐서요. 황수경 아나운서가 제 소개를 하는데 어찌나 긴장했는지 오줌이 다 마렵더라고요. 그런데 제가 “안녕하세요!” 하며 손을 흔들고 무대에 오르자, 관중석에서 외국인까지 “오빠∼” 하며 환호를 하는 거예요. 하도 놀라서 무대에서 넘어질 뻔했다니까요.
장광팔 군 제대하고, 연예계에 입문하신 건가요?
송해 27살 군 제대하기 전에 지금 명동예술극장 자리인 시공관에서 이동파 선생이 주관하던 예술극장 콩쿠르에서 입상하면서예요. 가수 전영록 부친인 황해(전홍구, 작고)와 부인 백설희(김희숙, 작고) 선생 등이 속해 있던 ‘KSA’라는 악극단이 있던 시절인데, 저는 채랑 선생 추천으로 창공악단에 들어갔어요. 고생이 말도 아니었지요.
그런데 누가 붙잡는 것도 아니고 출연료를 못 받아도 그 생활이 마냥 좋았어요. 스스로 감옥에 갇힌 셈이니, 창살 없는 감옥이라고나 할까요. 그때는 단원들이 말 그대로 모두 탤런트였어요. 노래는 기본이고 연기, 악기, 분장 등 1인 4~5역을 해야 단장한테 인정을 받았어요.
전승 과정 사라진 코미디계 안타까워
장광팔 선생님은 오랫동안 연예활동을 하셨어요. 예전과 현재를 비교하면서 후배들이나 방송계에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실 텐데요?
송해 일제강점기에는 집안에 있던 놋숟가락, 밥그릇 다 빼앗기고 고무신마저 공출당했으니 말할 수도 없이 어려운 시절이었지요. 오죽하면 김해송 선생이 지은 장세정 선배의 ‘단발령’이란 노래가 생겼겠어요? 단발령이란 글자 그대로 머리를 자르는 것이지요. “한 많은 단발령에 검은 머리 풀어 쥐고 한없이 울고 간다” 이런 노래예요. 그러다가 8·15 해방을 맞았지만 또 38선이 그어지고 6·25전쟁이 터졌지요. 제 경우만 해도 1·4후퇴 때 조각배를 타고 얼음물을 손으로 저으며 혈혈단신 월남해서 일가친척 하나 없이 참 외로운 시절을 보냈죠. 그래서 장소팔, 양훈, 양석천, 박시명, 구봉서, 윤인자, 서영춘, 최무룡 씨 등과 모두 형, 누이, 아우같이 동기간처럼 지냈어요. 바로 이 자리 ‘원로연예인 상록회’라는 간판이 붙은 사무실이 모두 이분들과 함께 지내던 사랑방이에요.
후배들과 방송계에 하고 싶은 말은요. (조금 흥분된 목소리로) 저희 세대는 물론 이상룡, 전유성, 김학래, 임하룡, 엄용수 이 친구들 때까지만 해도 선배한테 배우고 후배에게 일러주고 이런 전승 과정이 있었단 말이에요. 그런데 요즘 희극인들은 너무 개인주의적이고 전승 과정이 없어요. 선배들 흉내를 내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어요? 그러고도 뿌리를 인정하려 하지 않으니 문제이지요. 방송국에서도 너무 시청률이나 광고에만 매달리지 말고 재미있는 이야기 문화인 재담이나 만담, 코미디 프로를 제작해야 합니다. 특히 국영방송에서는 상업적인 면으로 접근하면 안 되지요.
작가들도 아무리 세대 간 웃음코드가 달라졌다 해도 말초신경을 자극해서 웃음을 유발하기보다는 스토리텔링에 바탕을 두어야 해요. 선배들 특히 장소팔 선생의 말씀에는 위트 속에도 철학이 있었어요. 전날 저와 과음을 하고 다음 날 제가 “형님, 속 풀러 가시죠” 하면 “속 풀러 갔다가 도로 감기는 거 아냐?”(웃음) 하세요. “만담이 뭐예요?” 하고 물으면 “만담은 재담의 아들이요. 코미디의 아버지”라고 명쾌하게 정의 내리셨지요. 돌아가시면서까지 유언이 “나는 심심해서 죽는다”였잖아요. 요즘 젊은 후배들도 철학이 있는 유머, 그냥 웃고 마는 웃음이 아닌, 자다가도 생각나면 비시시 웃음이 나는 교훈적인 유머를 했으면 좋겠어요.
지금은 연예인이 최고 인기 직종이지만 예전에는 ‘딴따라’라고 해서 사회적으로 대접을 못 받던 시대도 있었잖아요. 그런데 얼마 전(2015) 문학평론가 오민석 교수가 제 이야기를 쓴 <나는 딴따라다-송해 평전>을 보니, 연예인을 가리키는 ‘딴따라’라는 말은 ‘팡파레’에서 나왔다고 하더군요. 어찌 됐든 이제는 개그맨도 대우받는 연예인으로서 또 국민들의 사랑을 받는 공인으로서 사회적 책임을 갖는 예술인이 되었으면 해요.
구봉서 선생은 원래 아코디언 악사
|
종로구 탑골공원 옆에 위치한 송해 동상 |
장광팔 콤비였던 박시명 선생은 소식이 끊겼는데 어떻게 되신 거예요? 서영춘 선생 그리고 얼마 전에 작고하신 구봉서 선생에 대해서도 이야기보따리를 풀어주시죠.
송해 박시명 씨는 정말 대본 잘 쓰고 법 없이도 살 사람이었어요. 술을 너무 좋아해서 필름이 끊기는 게 문제였지만.(웃음) 오토바이광이었어요. 인천 연안부두 벽을 30m나 밀고 나가는 사고로 중상을 입었는데, 응급실에서 양쪽 바지 주머니가 불룩해 꺼내보니 양주 두 병이 나왔다지 뭡니까? 그 이후 후유증으로 연예계에서 모습을 감춘 거예요. 안타까운 일이죠. 아들 하나에 딸 셋을 두었는데, 아들 이름이 포항에서 태어났다 해서 ‘정포’라고 지었대요.
서영춘 그 친구는 정말 타고난 연기자였어요. 코미디 프로를 찍으면서 ‘빚쟁이에 쫓겨 큰 독 안에 숨는다’는 대본을 받고는 스스로 독을 구해서 용달에 싣고 스튜디오까지 왔더라고요. 문제는 그다음이에요. 독 속으로 억지로 들어가기는 했는데, 도저히 나올 수가 없는 거예요. 하는 수 없이 밖에서 우리가 독을 깨서 나왔는데 독으로 억지로 들어갈 때 입은 상처로 피투성이가 되어 있더라고요. 바지를 벗기니 살점이 다 떨어졌는데도 신음소리 하나 안 내고 참고 있었던 거예요.
원로 희극배우들이 다 돌아가시고 구봉서 선생(1926∼2016)과 저만 남았었는데, 얼마 전 구봉서 선생마저 소천하셨으니 이제 저만 남았네요. 구봉서 선생은 원래 태평양가극단에서 아코디언을 하는 악사였어요. 그런데 스케치(단막 희극)를 하던 배우가 갑자기 안 보이니까 김영환 단장이 구봉서 씨한테 “뒤에서 여러 번 봤으니까 대사 알지? 당신이 대신해봐” 하는 바람에 얼떨결에 희극배우가 되었대요. 희극배우가 된 계기까지 아주 희극적이었죠. 김영환 선생은 ‘눈물 젖은 두만강’을 부른 김정구 씨 형으로 만요(漫謠)도 만들고, 만담도 한 만능 예술인이었어요. 지금 장소팔·구봉서·박시명 등 형제들의 자녀들이 인사를 오니, 조카 같은 생각이 듭니다.
종로구 낙원동은 제2의 고향
장광팔 종로3가는 선생님께 아주 특별한 곳이지요?
송해 제게는 제2의 고향과 같은 곳이지요. 특별한 일이 없으면 지하철을 타고 매일 출퇴근하니까요. 과분하게 수표로에 송해길이 생기고, 흉상도 세워졌습니다. 동네에 제 이름이나 사진을 붙인 가게들이 여러 곳 돼요. 로열티요? 그런 거 없어요. 어려운 시기에 장사하는 데 도움이 된다면 그게 로열티죠. 모델료는 IBK에서 한꺼번에 받았잖아요.(웃음) 요 앞에 2000원짜리 단골 국밥집도 제 사진을 붙이자고 해서 이름까지 그냥 쓰라고 했어요. 우거짓국이 기가 막히게 구수하고 맛있죠. 한 그릇에 500원부터 시작해서 1000원, 1500원, 2000원이 되었어요. 자존심 상하게 적선하는 것도 아니고, 떳떳하게 2000원 내고 따뜻한 국에 새로 지은 쌀밥을 먹을 수 있게 하고 있으니 얼마나 훌륭한 일예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박리다매로 큰 재산을 모았다는 사실예요. 잔돈을 아껴야 부자가 된다는 교훈을 우리에게 증거로 보여주고 있잖아요. 종로3가에는 명사들이 운영하던 맛집도 있었어요. 장소팔 선생 부인이 하시던 부산초밥, 경서도소리 명창 정득만 선생 부인이 하시던 물만두집이 단성사 앞에 있었지요.
장광팔 지하철을 타거나 대중목욕탕에 다니시면 불편하지 않으세요?
송해 승객들이 “송해 선생님 아니세요?” 하며 반가워하고, 악수 청하는 분, 사진 찍는 분 모두가 고마운 분들이지요. 귀찮기는요? 인사하는 분도 한참 망설이다가 용기를 내서 하는 것일 텐데요. 그런데 늦은 시간에 약주 한잔하신 분들이 지나치게 스킨십을 하고(웃음) 말을 놓는 경우도 있기는 한데, 이것도 저로서는 고마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단골로 다니는 목욕탕은 ‘에머랄드’라는 상호를 아예 ‘송해사우나’로 바꿨어요. 연유를 모르는 분들은 저한테 “아이구! 목욕탕까지 운영하십니까?” 그래요.(웃음)
필름이 끊긴 채 방송 녹화, 생각만 해도 아찔한 순간
장광팔 송해 선생님 하면 술 얘기를 빼놓으면 안 되겠죠?
송해 그렇겠죠.(웃음) 술은 인생 가는 길에 동무예요. 사이좋게 즐겨야지 싸우면 안 되잖아요. 저도 한때는 술집 주인 내외까지 불러내서 11명이 25도짜리 소주 100병을 비운 적이 있어요. 건강이 받쳐주었을 때 무용담처럼 하는 얘기지만 다 객기일 뿐이에요. 요즘도 안주가 입맛에 맞으면 좀 즐기는 축이지요. 입맛에 맞는 안주가 무엇인고 하니, 남 흉보지 않고 자신을 흉보는 술 상대를 가리키는 말이에요. 그런데 아무리 자기관리에 철저해도 술안주(?)가 좋으면(웃음) 과음을 하게 마련이지요. 진도에서 있었던 일이에요. 다음 날이 공개방송인데, 소위 필름이 끊어질 정도로 좋은 술안주에 홍주를 마셨어요. 어떻게 방송이 끝났는지 몰라 걱정이 되어 뒤에서 지켜본 악단장에게 물었더니, “평소와 같이 하시던데요” 하더라고요. 워낙 몸에 배어 있고 긴장한 덕도 있었겠지만 생각만 해도 아찔한 일이었지요. 과유불급이에요.
“부부간에는 먼저 져주는 사람이 이기는 거예요”
장광팔 91세의 국민 오빠로서 젊은 여성들에게 조언을 하신다면?
송해 세상 일이 뜻대로 되는 게 아니지요. 그런데도 감사해야 돼요. 길게 보면 더 좋은 일이 예비되어 있는 경우가 많거든요. 남편도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잖아요. 항상 남의 편이라 남편이라고 하는 거예요.(웃음) 남자는 나이가 들어도 사랑하는 사람에게 보살핌을 받고 싶어 하는 어린애예요. 제 경우만 해도 부부간에는 먼저 져주는 사람이 이기는 거라는 걸 깨닫는 데 60년이 걸렸어요. 어머니와 생이별을 하고 나니 평생 빈자리가 크더니만, 아내와 사별하고 나니 여생의 빈자리가 너무 크더군요. ‘소지황출금, 소문만복래’라. 집안을 깨끗이 하면 황금이 나오고, 웃으면 복이 들어옵니다. 항상 웃음이 끊이지 않는 가정은 주부가 만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