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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거지 집성촌 종가 스크랩 국보70호 훈민정음 해례본의 원조 광산김씨 긍구당 고택
이장희 추천 0 조회 134 14.10.07 22:2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국보70호 훈민정음 해례본의 원조 광산김씨 긍구당 고택


임청각을 나와 안동댐의 경치를 감상하면서 청량산 방향으로 잡았다. 길을 따라가다 보니 이정표에 예안이라고 적혀 있다. 예안을 보는 순간 퇴계선생의 예안 향약이 머리에 떠올랐다. 예안이 어떤 동네인지 항상 궁금하던 터라 방향을 예안 쪽으로 돌렸다.

정말 한적하고 조용한 시골 길이다. 4km 쯤 들어가니 왼쪽에 광산김씨 긍구당 고택이라는 안내판이 있었다. 내게는 그 동안 여행을 하면서 생긴 습관이 하나 있다. 새롭게 난 길은 반드시 길 끝까지 가봐야 되고, 유서 깊고 오래된 곳은 일단 들어가 봐야 직성이 풀리는 버릇이 그것이다.

마을 안쪽으로 들어가니 대문 입구에 있는 경운기는 논에 물을 대느라고 돌아가고 있는데 집은 빈 집이었다. 안내판을 보고 있으니 이 집 종손 김대중옹께서 논에서 일을 하시다가 멈추고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광산김씨  긍구당고택

 

당호인 긍구당은 유일재(惟一齋) 김언기(金彦幾, 1520-1588)선생의 현손(玄孫)인 김세환(金世煥, 1640-1703)공의 호를 따서 붙인 것이라 한다. 이 집은 원래는 아흔 아홉 칸에 이를 정도로 규모가 컸다.

김대중옹의 설명에 의하면 이 집이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이유 중 가장 큰 공헌을 한 것은 양쪽 문 사이 가운데를 나무로 분리시켜 놓은 점이라고 한다. 이러한 창호 구성 수법이 16세기 건축물임을 입증하는 좋은 자료라고 하였다. 이러한 양식이 다른 곳에서는 본 기억이 없다.

 긍구당고택의 문 

김대중옹은 비록 옷차림은 일을 하느라 볼품이 없었지만 그 품격은 내면의 조용한 카리스마가 있었다. 안동양반의 전형을 보는 것 같았다.

팔순이 다 되었다는데도 정정하시고, 어찌 그리도 조용하면서도 차분하게 알아듣기 좋도록 말씀을 하시는지, 사랑스런 여인에게 말하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나는 이때껏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을 만나보지 못했다. 경상도 바닷가 말과는 그 품격이 달랐다. 오늘 나는 아주 소중한 교훈을 얻었다. 바로 언어의 겸손이다. 진짜 양반의 말은 겸손하다는 것을!

 긍구당고택과 김대중옹

 

김옹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내가 몰랐던 중요한 사실을 하나 알게 되었다.

국보 70호로 현재 간송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훈민정음해례본(訓民正音解例本)’이 대대로 이 집에서 전해 내려오던 서적이었다고 한다.

이 ‘훈민정음해례본’을 김대중 옹의 고모부인 이용준이 가져가 간송 전형필에게 팔아넘겼다는 것이 김옹의 설명이다.

국보 70호 ‘훈민정음해례본’의 마지막 쪽 여백에 낙서처럼 쓰여진 수결이 광산김씨 안동 종가 긍구당 소장의 분재기(分財記)에 나오는 수결과 일치한다는 데서 증명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를 동래여자중학교 박영진 교사가 가장 먼저 주장을 하고 건국대학교 박종덕 교수가 그의 논문에서 진실을 밝혔다는 것이다.

김옹의 모습을 보니 아마 이 내용은 진실일 것이다. 5백년을 이어온 종가집의 종손이라면 어딘가 모를 교만과 아집이 나타날 만도 한데도 전혀 그런 점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런 분은 내가 아는 관상 지식으로는 절대로 남에게 누가 되는 짓은 하지 않는다. 여름 방학에 선생님들을 모시고 오면 언제라도 잠자리는 제공한다면서 꼭 한번 오라고 하신다.

다음 목적지가 어딘가를 묻기에 퇴계선생의 예안향약이 생각이 나서 예안에 간다고 하니, 지금의 예안은 옛날의 예안이 아니고 안동댐 이후에 새로 생긴 예안이라 아무런 유적지가 없으니 이 동네를 지나서 계속 가면 도산서원 가는 길과 마주친다며 마을 안으로 가라고 한다. 김옹과 아쉬운 작별인사를 나누고 긍구당 고택을 나왔다.

긍구당고택 앞으로 난 길을 따라 나와 긍구당고택 전경을 멀리서 바라보았다. 양택풍수로 보면, 다른 것은 다 갖춘 것 같은데 뒷산의 기세가 힘이 좀 약한 것 같아 안타까웠다. 긍구당고택은 안주인이 없어서 정리가 되지 않아 이런 곳으로 우리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봉사활동을 하면서 김옹의 이야기도 듣는다면 일석이조의 공부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국보 70호 ‘훈민정음해례본’의 원래 소장처가 이곳이라는 것이 올 사월에 밝혀진만큼 하루 빨리 국가에서 공인된 결정이 나와 훔쳐간 고모부 소장이 아니라 이곳 긍구당고택의 소장이라는 것이 만천하에 밝혀지기를 바라면서 오천 군자리와 국학진흥원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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