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사도(生死島) 1-45
육초량의 창백하던 얼굴이 조금씩 붉어져 가기 시작했다. 멈춘
듯 가라앉아 있던 숨이 점점 거칠어지더니 급기야 풀무의 바람처
럼 급해졌다. 심마(心魔)의 극성을 제어하지 못한 것이고, 주화입
마(走火入魔)의 징후였다.
그의 이마에 터질 듯 혈관이 부풀어 올라왔다. 곧 얼굴 전체와
목, 가슴에 이어서 팔다리에 이르기까지 부풀어 오른 그것이 굵
은 지렁이처럼 꿈틀거렸다. 몸 안의 기혈이 마구 들끓었고, 날뛰
는 피가 심장을 압박했다. 그의 내면에 잠자고 있던 마성(魔性)이
의식의 두터운 각질을 깨고 솟구쳐 올라온 것이다. 걷잡을 수 없
는 고통으로 가슴을 쥐어뜯으며 몸부림치던 육초량이 벌떡 일어
섰다.
『우와악-!』
상처 입은 야수의 울부짖음처럼 한 소리 고통스럽게 포효한 육
초량이 놀라운 힘으로 펄떡펄떡 뛰기 시작했다. 붉게 충혈된 그
의 눈이 금방이라도 터져서 핏물을 쏟아 낼 듯 부릅떠져 있었다.
『이 땡중 놈! 어서 모습을 보여라. 네놈의 늙은 머리통을 당장
쪼개 놓고 말 테다!』
마음 속에 억눌려 있던 분노가 그것을 터뜨릴 대상으로 노승을
선택했다. 걷잡을 수 없는 힘으로 분출되는 분노의 불길이 금방
이라도 육초량을 태워버릴 듯했다. 내부에서 경락들을 불태우며
미친 듯 치달리는 난마와 같은 힘이 그를 한 마리 성난 야수로,
악귀 나찰로 만들어 버렸다.
육초량은 그가 알고 있는 모든 욕설을 동원하여 노승을 욕하고
저주했다. 그러자 까닭 없이 자신을 가두어 놓은 그에 대한 증오
가 더욱 증폭되었다. 욕설이 분노를 부추겼고, 그것을 더 지독한
욕으로 토해 놓았다. 그러면 분노는 또 증폭되었다.
육초량은 온 몸에 피멍이 들고 어깨가 으깨질 때까지 석벽에
몸을 부딪치며 발광했다. 광기에 사로잡힌 그는 순식간에 끔찍하
고 처참한 몰골로 변해갔다. 맹렬하게 끓어오르는 기혈이 삼백
육십 경락을 제멋대로 달려갔다.
『끼야아- 소림의 땡중들은 다 어디 갔느냐? 모두 나와라, 통쾌
하게 죽여 버리겠다!』
핏빛으로 번들거리는 그의 눈에서 인성(人性)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오직 광기만이 가득 차 쏟아져 나왔다. 그의 발광이
극에 달했을 때,
『시끄럽다! 대체 어떤 빌어먹을 꼬마 놈이 노부의 잠을 깨운단
말이냐!』
석벽 반대편에서 무겁고 카랑카랑한 음성이 들려왔다. 육초량
의 살기로 번들거리는 눈이 그곳을 바라보았다. 자기말고도 누군
가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이 반가웠다. 분풀이를 할 대상이 있는
것이다.
『크흐흐... 어떤 쥐새끼 같은 놈이냐! 이리 오너라. 갈기갈기 찢
어 버리고 말 테다!』
석벽을 두드리며 쉰 목소리로 으르렁거리자, 석벽 저쪽에서 갑
자기 커다란 웃음이 터져 나왔다.
『크하하, 통쾌하다, 통쾌해! 노부가 오늘 쥐새끼라는 욕을 얻어
먹으리라고 감히 어떤 놈이 상상했겠나? 가슴의 체기가 쑥 내려
가는 구나. 기다려라 어린 놈, 노부가 곧 가마!』
통쾌한 대소와 함께 무엇으로 석벽을 치는지 굉장한 소리가 쿵
쿵 울리기 시작했다.
멀리서 폭약을 터뜨리는 듯한 그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더니,
쿠아앙-!
동굴 전체를 뒤흔드는 엄청난 소리와 함께 눈앞의 석벽이 산산
조각으로 부서져 터져 나갔다. 자욱한 먼지와 바위 덩이들이 우
박처럼 쏟아져 내렸고, 감당할 수 없는 기파가 육초량의 몸을 가
랑잎처럼 말아 올려 반대편 석벽에 처박아 버렸다.
『크으으...』
육초량은 온 몸이 부서지는 듯한 고통에 이를 갈면서도 그 믿
을 수 없는 광경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석벽이 시커먼 입을 쩍
벌린 채 붕괴되어 버리고 만 것이다. 일시에 천 근의 화약을 터
뜨린 것 같은 모습이었다.
자욱한 먼지 속에 한 사람이 우뚝 서 있었다.
봉두난발한 머리카락 사이로 태양처럼 강렬한 안광이 쏟아져
나왔다. 육초량은 혼란한 의식 속에서도 저 괴인이 자신의 내력
으로 이 두터운 석벽을 깨뜨려 버렸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머리
를 마구 저었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한동안 멍하니 괴인을 바라보던 육초량의 눈이 다시 광기에 사
로잡혀 번들거렸다. 드디어 마음껏 마음 속의 살기를 쏟아 부을
상대가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크으... 죽여 버리겠다!』
입가의 선혈을 거칠게 닦아 낸 육초량이 벌떡 일어섰다. 괴인
이 통쾌하다는 듯 다시 크게 웃었다.
『크하하... 노부 단목굉(檀木宏)을 죽이겠다고 하는 자가 있을
줄이야... 공지 그 개 같은 중놈도 노부에게 이런 일이 있으리라
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단목굉이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육초량의 눈에서 잠깐 광기가
걷혔다. 그가 크게 놀란 눈으로 괴인을 바라보았다.
(북천일마 단목굉?)
그는 철협 강사옥이 천하제일 고수로서 중원 대륙에 명성을 날
리기 전에 천하제일마로 손꼽히며 종횡무진 강호를 휩쓸었던 전
대의 거마(巨魔)였다.
누구도 그의 삼초지적이 되지 못했고, 누구도 감히 그의 일장
을 버텨내는 자가 없었다. 천하무적이라는 말이 그의 이름 앞에
붙었다. 하지만 그는 마두였다. 그의 무시무시한 힘은 곧 그 만큼
의 두려움이었다.
단목굉은 천하를 좁다고 휘저으며 정사(正邪)를 가리지 않고
자신의 기분 여하에 따라 죽이고 살리는 것을 결정했다. 그의 손
아귀에 강호인 모두의 목숨이 쥐어진 셈이었다. 그의 육장(肉掌)
에 죽어간 무림의 명숙, 고수들이 얼마인지 헤아릴 수조차 없었
다. 하지만 아무도 나서서 그를 막으려 하지 못했다. 북천일마(北
天一魔) 단목굉(檀木宏). 그 이름이 곧 죽음의 공포였고, 동시에
경외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그러던 그가 어느 날 갑자기 세상에서 종적을 감추었다. 벌써
삼십여 년 전의 일이었다. 이제는 사람들의 머리 속에서 기억하
고 싶지 않은 전설로 자리한 인물 단목굉. 그가 믿을 수 없게도
육초량 앞에 불쑥 나타난 것이다.
그 이름 앞에서 잠시 정신을 차린 듯하던 육초량의 눈이 다시
흐릿해졌다.
『죽엇!』
사납게 외친 그가 성난 황소처럼 돌진해 갔다.
꽝-!
봉두난발한 단목굉의 정수리 위에 육초량의 무쇠 같은 주먹이
떨어졌다. 바위 덩이라도 단번에 박살내고 말 힘이었다. 그러나
단목굉은 눈만 끔벅거릴 뿐, 꼼짝도 하지 않았다.
(주화입마의 전조.)
그는 한 눈에 육초량의 상태를 파악하고 내심 고민하고 있는
중이었다.
꽝, 꽝, 꽝-!
두 눈을 멀뚱멀뚱하게 뜨고 우뚝 서 있는 단목굉의 정수리 위
로 육초량의 주먹이 거푸 떨어졌다. 반드시 그것을 깨뜨려 부수
지 않고서는 멈추지 않을 듯했다. 오직 그의 정수리만 내리치겠
다는 고집이었고, 누구의 살과 뼈가 더 단단한지 겨루어 보자는
오기였다.
일백 근의 철퇴로 내리치는 듯한 주먹을 고스란히 받고 있으면
서도 단목굉은 여전히 눈만 끔벅거리고 있을 뿐, 움직이지 않았
다. 그러던 어느 순간 단목굉의 눈에 강렬한 신광이 번쩍였다.
빠악-!
턱뼈가 부서지는 듯한 충격에 이어서 복부에 무서운 힘이 부딪
쳐왔다. 육초량은 제대로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날아가 한 구석
에 처박혔다. 지독한 고통 속에서 그는 새우처럼 허리를 꺾고 뱃
속에 든 것을 다 토해내야 했다. 그리고 나자 정신이 한결 맑아
졌다.
『일어나라 꼬마 놈.』
성큼성큼 다가온 단목굉이 육초량의 멱살을 잡아 번쩍 들어올
렸다.
퍽, 퍽, 퍽!
그의 전신에 무지막지한 주먹이 떨어졌다. 벽에 기대어 세워진
육초량은 쓰러질 수도 없었다. 왼쪽으로 휘청거리며 넘어지면 단
목굉의 주먹이 그를 쳐서 바로 세워 놓았고, 오른 쪽으로 넘어져
가면 또 주먹이 그를 바로 세워 놓았다.
온몸으로 그 주먹질을 고스란히 받아들이고 있는 육초량은 숨
도 쉴 수 없었다. 뼈를 부수는 듯한 고통에 머리 속이 하얗게 비
어갔다. 그의 내부에서 들끓던 기혈들도 그 충격을 견디지 못하
고 잠잠해졌다.
묘하게도 몸에 가해지는 충격이 크면 클수록 정신이 맑아지고
마음이 상쾌해져 갔다. 그것을 느끼기 시작하자 오히려 고통 속
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육초량이었다.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단
목굉이 조금 더 세게 때려 주었으면 하고 생각했다.
『칠살성(七殺星)의 기운에 혼원지기(混元之氣)를 지닌 놈이라...
흐흐... 공지 그 늙은 여우같은 놈의 꿍꿍이를 이제야 알겠군.』
죽도록 얻어맞고 실신해 늘어져 있는 육초량을 바라보던 단목
굉이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의 눈에 기광(奇光)이 일렁였다.
삼십 년 전, 단목굉은 홀연히 그를 찾아온 꾀죄죄한 화상 하나
를 만난 적이 있었다. 소림의 공지라고 자신을 소개한 화상은 대
뜸 북천일마 단목굉에게 비무를 청했다. 손가락을 한 번 퉁겨도
쓰러져 버릴 듯한 초라한 중의 말을 듣고 단목굉은 어이가 없었
다.
그러거나 말거나 공지는 단목굉에게 패자는 승자의 부탁 한 가
지를 무조건 들어 준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단목굉은 그런 화상
을 보며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자기에게 정면으로 도전해 온 자
는 처음이었던 것이다.
『그래? 너 비루먹은 중놈이 이긴다면 한 가지 아니라 열 가지
소원이라도 들어 주마.』
마음껏 가지고 놀다가 싫증이 나면 죽여 버려야겠다고 가볍게
마음먹고 싸움을 시작했다. 그러나 초수가 거듭될수록 단목굉의
놀라움은 커져갔다.
초라한 중의 한 몸에서 쏟아져 나오는 엄청난 소림의 절기들이
그를 처음으로 당황하게 했다. 그것들은 하나 같이 보기 힘든 소
림의 칠십이종 절학들이었다. 그는 소림사에 칠십이종 절학을 깨
우친 자가 있다는 말을 소문으로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싸우면
싸울수록 단목굉의 놀라움은 더해갔다.
첫댓글 감사.
감사 ㅎ
즐독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