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종열 목사/ 횡성교회
평생을 선교지에서 살며, 마지막 순간까지 파리 한인교회를 개척하다 돌아가신 김현수 목사님을 추모한다. 고인은 한국재림교회의 북방선교에 큰 획을 남겼다. 동중한합회 장안동교회에서 목회하던 고인은 1992년 8월 사할린에 선교사로 파송됐다. 당시 러시아는 공산주의 체제가 붕괴돼 극심한 혼란을 겪고 있었다. 사할린에는 일제시대 강제 징용된 후손들이 다수 거주했고 연해주와 하바롭스크주에는 조선 말에 이주한 고려인들이 다수 정착해 있었다. 고인은 교회에 선교구역반을 조직하고 기존의 한글학교와 더불어 영어학원을 시작했다. 그리고 한국연합회의 북방선교정책의 일환으로 중국과 북한지역의 선교 교두보를 위한 신학교 설립을 추진했다.
고인은 9월에 그 일을 착수했다. 오랜 공산 체제에 익숙한 관료적이고 고립된 사회에서, 그것도 정교회 전통의 국가에서 외국인 신분으로 신학교를 설립하기란 그야말로 계란으로 바위 치기였다. 그는 하나님께 기도로 매달리면서 오늘 거절당하면 내일 다시 서류를 준비해 시장과 주지사를 찾아갔다. 포기할 줄 모르는 그의 모습에 결국 주지사도 시장도 두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 동토의 땅에서 3개월이 채 되지 않아 주정부로부터 북방선교대학으로 신학과 인가를 얻고 그해 12월 1일 개교했다. 그는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연방정부의 공식 인가를 받은 대학으로 키우고자 했다. 당시 러시아에는 기독교 대학으로 연방정부의 공식 인가를 얻은 대학은 한 곳도 없었다. 하지만 고인은 무모해 보이는 그 일에 도전장을 내밀었고 그의 꿈은 1993년 5월에 현실이 됐다. 물론 이 일에 한국연합회와 한국의 삼육대학교의 물심양면의 지원이 있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당시는 그 일이 얼마나 대단한 의미가 있는지 몰랐다. 현재 러시아의 유일한 재림교회 대학인 자옥스키대학이 종합대학으로 인가받을 수 있었던 배경엔 고인이 사할린에 설립했던 러시아 삼육대학의 인가 기록이 결정적인 근거가 됐다.
고인은 훌륭한 선교사였다. 그는 오직 선교를 위해 살다 죽기로 결심한 사람 같았다. 그는 만나는 사람은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도록 초청했다. 그는 사할린의 대학과 교회가 성장하던 1990년대 초중반에도 그 바쁜 시간을 쪼개 매일 성도들을 방문했다. 방문은 자정을 넘기기 일쑤였다. 한국에서 성공했던 구역반을 현지 교회에도 조직해 저녁마다 구역반을 돌았다.
그때, 고인과 동행했던 필자는 그것이 피곤하고 힘들어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시절이 그립다. 아침에 출근해 자정이 다 돼 그분과 함께 찬미 부르며 돌아오던 그 시절이 그립다. 지금도 어느 하늘 아래서 선교사로 일하고 계실 것만 같은 찐(진짜) 선교사가 그립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고 김현수 목사는 파리 한인교회를 개척하던 중 2021년 10월 28일 숙환으로 별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