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화군 여행] 이시대 마지막 선비의 집 송석현고택...........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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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알리아 꽃말 : 감사, 우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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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군 여행] 이시대 마지막 선비의 집 송석현고택...........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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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자는 이제 이 시대 마지막 선비의 집 송석현고택을 찾아가는 길이다. 낯선 땅 봉화를 찾아 헤맨 지도 9일째
를 맞이하고 있는 것 같다. 본시 여행자는 외롭고도 고독한 법이다. 길에서 자신을 찾고 또한 묻고 싶을 때가 있
다. 내가 지금 서 있는 이 길이 어디쯤인지. 내가 찾고 싶은 것은 무엇인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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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인생길과도 같은 신작로新作路를 걷는 느낌이랄까 암튼 습관처럼 주섬주섬 짐을 챙기고 방황했던 유랑
자의 유랑의길.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 가는 풍광風光들은 무더운 삼복더위의 끈적끈적함을 여실히 보여주며,
연일 계속되는 찜통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날씨는 여행자의 마음을 더욱더 지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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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알리아설화 : 나폴레옹의 첫 황후 조세핀은 저택 정원에 여러 가지 종류의 다알리아와 장미를 수집해 놓고 많은 사람들에게 자랑
을 하고 살았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심은 품종은 절대로 남에게 주지 않았습니다. 시녀 중 한 명이 다알리아 한 송이를 갖고 싶어했지
만 황후는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시녀는 정원사를 매수해서 황후의 정원에 있는 다알리아 구근을 몰래 빼내어 그것을 심어 자기 정원에도 화려한 다알리아 꽃
을 피웠습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황후는 모든 다알리아를 뽑아 버리고 그 시녀도 내쫓아 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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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석헌은 선돌 마을 입구에 산을 등지고 남동 향으로 자리 잡은 이 집은 조선 후기 영남지방 사대부 저택의 다양한 기능과 면모를 잘
보여 준다. 특히 지반의 경사가 심한 곳이어서 건물의 앞쪽 기단을 높게 했고, 안채와 사랑채가 나란히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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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봉화는 우리나라 오지 중의 오지로 손꼽히는 곳 중 하나로, 조선 시대에는 지 한 몸 살겠다고 난세를 피해
이곳에 은둔한 선비들의 몸과 마음을 따뜻하게 품어주었다. 그래서 봉화에는 오늘날 구중궁궐九重宮闕처럼 첩
첩산중 깊은 계곡속에서 아름다운 자연을 벗 삼아 수양하고 공부하던 선비들이 살던 고택들이 곳곳에 많이도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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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유랑자가 찾아가는 고택은 국가지정문화재 국가민속문화재 249호로 2007년 지정된 선돌마을 입구에 자
리 잡은 송석헌 고택이다. 송석헌松石軒은 1700년경 사복시 정(司僕侍 正: 임금이 타고 다니는 말, 수레 등을
관리하는 관청인 사복시의 최고위 관원)으로 추증追贈된 동암東巖 권이번權以番(1678-1763)선생이 그의 둘째
아들 선암仙巖 권명신權命申, 증 좌승지(1706-1778 )에게 지어 준 산림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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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채는 축대가 높아서 마당에서 바라보면 건물이 매우 커 보이지만 기둥의 높이는 낮다. 이는 가옥을 지을 때 권이번이 벼슬을 하
고 있지 않았으므로 당시의 가옥 규제에 따라 낮게 설계를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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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돌마을 입구에 자리 잡은 이 집은 경사진 지반을 이용하여 ㅁ자형 정침과 영풍루, 산암재, 방앗간, 대문, 사당
등 7동으로 구성된 영남 지방 사대부 저택의 면모를 고루 갖추고 있는 가옥 이면서도 다른 곳에서 찾아볼 수 없
는 독특한 구조의 주택이다. 경사지반을 이용하여 정침을 세웠다. 정침 우측에는 사랑을 두고, 사랑과 연하여 2
층의 영풍루와 연결시키는 구조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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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루에서 지붕까지의 높이가 집에서 벼슬을 지낸 지위 고하에 따라 다르게 지어야 하기 때문에, 높은 벼슬이 나
올 것을 예상하고 마루를 높여서 지은 다음 마루를 낮추어 공간을 넓히려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까, 마당에서 보면 기단이 어른키만큼의 높은 기단 위에 누각처럼 높이를 높여 지어졌으며, 아래를 내
려다보는 시야를 확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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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채와 연결하여 계단을 단 영풍루(迎風樓)는 한옥에서는 볼 수 없는 2층 구조로 되어 있다. 영풍루의 특이한 한옥구조 때문에 건
축을 공부하는 이들이 이곳을 자주 방문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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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채는 측면의 영풍루와 계단으로 연결된 마치 구름다리 같은 모습이 상 당히 독특하여 지금도 특별히 기억
에 남는다. 이 송석헌은 조선후기 영남지방 사대부 저택의 다양한 기능과 면모를 잘 보여주고 있으며 특히 지
형의 표고차를 이용한 높은 기단과 특이한 평면 배치, 완벽에 가까운 민구民具등 전통적 풍습을 잘 담고 있는
격조 높은 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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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자는 먼저 고택 솟을대문으로 들어선다. 서너 명의 조사원들이 고택의 이곳저곳을 자로 재면서 기록에 여
념이 없다. 집수리를 위한 사전 답사일까. 조심 스럽게 물어 보았다. 역시 집의 구조를 기록으로 남기기 위한 사
전 기록을준비 중이라는 것이다. 유랑자는 그들과 함께 이곳저곳을 둘러보기 시작한다. 그런데 집주인은 보이
지 않고 객들만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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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사랑 채로 보이는 2층의 건물은 영풍루(迎風樓)이며,정면 2칸 측면 1칸의 다락집으로 아래는 수장 공간과 손님을 접대하는 용도
로 사용 되었다. 특이한 점은 구름다리 처럼 사랑채와 연결되어 있어 독특한 건축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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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풍루 중층의 마루방 앞에는 "석남정사(石南精舍)"의 현판이 걸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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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풍루 1층의 손님용 방의 문 위에는 문원산방(文原山房)의 현판이 걸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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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풍루 2층에는 사방 돌아가면서 쪽마루가 가설되어 있고 마루에는 난간이 있으며, 2층의 마루방은 앞뒤로열고 닫을 수 있는 창을 내
어 바깥 풍광을 즐길 수 있도록 하였고, 북쪽 부분으로는 계단을 통해 사랑채로 연결되게 해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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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옛 말에 부富라는게 삼대가 못 간다고 했던가 이집의 주인도 기구한 운명일까 지은 지 300여년된 종택
이긴 하지만 7대 권덕진까지 이 집을 지키고 살다가 가세가 기울어 약 40여년간 홍 씨와 강 씨 집안에 너머 갔
다가 각고의 노력 끝에 타 성씨가 살았던 집을 권헌조씨의 아버지 권정선씨가 다시 사들여 종가를 오늘날까지
지키며 유지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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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다. 봉화 송석헌에는 21세기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한 줄기 맑은 바람과도 같은 선비 한 분이 살
고 있었다. 그 이름은 권헌조權憲祖이다. 일제강점기 때 부친의 반대로 초등학교만 다닌 권헌조옹은 할아버지
밑에서 한학을 공부해 이 지방에서 마지막 남은 선비이자 한학자로 통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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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영남지방 사대부 저택의 다양한 기능과 면모를 잘 보여주고 있으며 특히 지형의 고저차를 이용한 높은 기단과 특이한 평면
배치, 완벽에 가까운 민구(民具)등 전통적 풍습을 잘 담고 있는 격조 높은 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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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들이 도시로 모시고 가겠다고 해도 권헌조옹은 그때마다 부모님께서 살던 이 집에서 떠날 수 없다며 이곳
에서 생을 마감하겠다고 하면서 결국은 그의 뜻대로 이곳에서 남은 생을 마감했던 분이다. 결국 8대조부터 300
여 년을 지켜온 이 집에서 동애 권헌조(權憲祖, 83세로 2010년 12월 13일 작고) 옹翁이 갓 쓰고 도포 입고 80여
년을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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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일을 하루같이 매일 아침과 저녁에 의관을 갖추고 정갈한 마음가짐으로 부모님과 조상님들의 산소가 있는
집 뒷산에 올라 문안을 드리고 산소를 돌아보았다고 한다. 암튼 어려운 생황 속에서도 300여 년의 세월 동안
한집안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송석헌. 그 집에 마지막 살았던 종손 권헌조씨와 관련한 이야기를 두서없
이 정리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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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문 옆 방문 위에는 "안수순청와(安受順聽窩)"의 편액을 볼수 있다, 안수순청와(安受順聽窩)는 안분지족(安分知足,편한 마음으로
자기 분수를 지키며 만족할 줄 앎)하면서 평안하게 살자는 의미를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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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헌조씨는 어려서부터 20살까지 할아버지(조부) 권종도씨로부터 집에서 한학을 배웠다. 때론 문장을 다 외우
지 못하여 종아리에 피가 마를 날이 없을 정도로 엄하게 공부 하다가 공부가 싫어서 농사를 하였다고 한다. 일
제 때 한학과 유교는 쓸모없는 학문에 불과하였고, 당시에 헌조씨도 상투를 베고 머리를 잘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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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로 빡빡머리로 돌아가실때까지 상투를 튼 아버지와 대조를 이루며 한 집에서 살았다. 그 엄했던 한학자 할
아버지는 1953년에 세상을 뜬다. 그 할아버지의 학문은 퇴계선생의 글을 고칠줄 아는 당대의 알아주는 큰 한학
자였다고 한다. 그러고보면 헌조씨는 참 훌륭하신 독선생 문하에서 공부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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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채를 앞에서 보아 사랑채의 왼쪽에 걸려있는 송석헌(松石軒) 현판이며, 안쪽에는 성극재(省克齋)의 현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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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석헌(松石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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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석헌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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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극재(省克齋)성극재는 집 주인의 공부방인 서실이며 자기 수양의 중요성을 알리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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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양친을 모시고 농사를 하며 자식을 키우고 가르치며 그렇게 살았다. 세월이 흘러 살던 집 송석헌 고 건
물이 낡아서 2010년 6월 25일부터 12월 21일까지로 계획하고 보수공사를 하였다. 그 기간 중 권헌조씨는 병환
으로 병원에 입원하였다가 집수리가 완성되기 전 2010년 12월 13일, 8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 시대를
살아온 선비 권헌조씨의 마지막 살아온 이야기는 감동적이고 교훈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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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유교적 선비로서 생활에서 엄격하게 효孝와 경敬과 성誠을 실천하였기 때문이다. 1992년 12월 13일에
그의 부친 권정선씨가 8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집 뒤에 부친을 모셨다. 시묘살이를 하거나 적어도 하루
세 번씩 배례를 올려야 할 것이기에 나이를 고려한 궁여지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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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살면서 출필고 반필면出必告 反必面을 실천하였다. 즉 대문밖을 나설땐 꼭 절을 하며 행선지를 알렸고 돌
아와서는 다녀왔던 이야기를 상세하게 고하였다. 양친이 병환에 계실때에는 자리를 깔지도 않고 양말도 신고
옷을 입은 채로 잠자리에 들었다. 무슨 일이 있을지 몰라 깨어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즉 효를 기쁨
의 수단으로 여기고 살았다. 그는 가장이기에 앞서 한사람의 주부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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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시 세끼 손수 밥을 짓고 반찬을 만들어 아버지께는 독상을 차려 드리고 본인은 어머니와 겸상하여 식사를 하
였다. 세탁에 방청소에 집 관리에 농사에 얼마나 힘들고 무거운 짐이었겠는가? 어머니와 부인역시 병환으로 몸
져 누워있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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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문을 통해 안채로 들어가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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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살아오는 동안 한 번도 부친의 뜻을 거역한 적이 없었다고 한다. 바로 승안순지承安順志(웃어른의 명령(命
令)을 좇음)의 가르침이다. 이 얼마나 대단한 효행인가? 이는 배웠다고 해서 어찌 실천할 수 있단 말인가? 아무
나 하는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도 학문은 계속되어 작문과 번역과 후배양성을 계속하였다. 인근지역의
유림들과의 교류도 계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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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회마을의 류씨네, 순흥 금성대군의 제사때에 참석을 하였다. 조문, 제문, 축문, 상량문. 등을 작문할수 있는 이
시대의 몇 안 되는 한학자이자 양반이자 선비였다. 머슴도 없이 일꾼도 없이 직접 농사하여 번 것으로 병든 어
버이를 모시며 자식들을 기르며 살았던 종손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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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채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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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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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석헌 고택은 이곳의 주인이었던 권헌조 옹의 이야기로,"오래된 집과 노인의 삶이 가르쳐 주는것"의 내용으로 국내 모 방송국에서
특집으로 다루었고, 또한 " 아버지의 집" 이란 책으로 인해 널리 알려진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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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어서 죽을 때까지 정성을 다해 아침저녁 문안을 하며 효를 다했던 효자. 종손으로서 누릴 것은 하나도 없이
그 무거운 종손의 의무를 홀로 다했던 양반. 이 집의 마지막 주인으로 살았던 권헌조씨가 불쌍한 이야기를 조
사원들에 듣고 유랑자의 발걸음은 무거워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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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헌조 옹은 삼년 탈상 후에도 이어지던 그의 효성! 이 시대에 마지막 남았던 진정한 참 선비중 한사람이었다
고 영남의 유림들은 오늘날 까지도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그러던 그도 세월의 강을 건널수는 없었던 것일까,
자신의 몸을 기억하고 이승에서의 역할을 다한 것이라 느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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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우측으로 나란히 선암재(仙巖齋)가 있고 그 뒤로 사당이 있다. 선암재는 정면3칸 측면 2칸반으로 좌우협간에 방을 드렸고 나머
지는 마루이다. 방 사이 마루에 분합을 달아 폐쇄할 수 있게 한 점이 특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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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바라기 '테디베어' 꽃말 : 당신을 바라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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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디베어 해바라기 (소파 박선미)
해따라 둥근얼굴 황금빛 털복실이
바람에 익은털보 겹겹이 복덩어리
라인도 없는자리 노랗게 서성이다
기다란 그리움에 당신만 바라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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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는 어느 날 맏아들 아들 동재를 불러놓고 이렇게 말한다. "내가 죽거든 삼일 탈상을 하던 백일 탈상을
하던 니 형편대로 해라. 시대의 조류를 따라야지 그렇지 않으면 남들에게 웃음거리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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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태가 변한 것이다. 요즘 세태에 위 아래도 몰라보고 스승 알기를 우습게 알고 황금만능[黃金萬能主義 주위에
빠져있는 교육방식, 과연 이런 변화가 옳은 것인지는 유랑자도 아직은 잘 모르겠다. 결론적으로 이는 우리 기
성 세대들이 풀어야 할 숙제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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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cafe.daum.net/b2345/9toB/2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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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봉화군 봉화읍 선돌안길 10
(지번)봉화읍 석평리 320
소개 :권이번선생이 아들인 선암 권명신에게 지어준 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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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상세한 설명과 함께 사진을 보니 직접본것 같은 기분입니다.
잘보았습니다. 감사드려요.
감사 합니다.
이것도 병이지요? ㅎㅎ
오지랍이랄까, 암튼 궁금증은 풀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라 ...저도 답답 합니다.
원놈의 고생인지.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