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철호 님의 「수필창작의 이론과 실기」에서
삼성문화사(三星文化社)에서 간행된 「국어대사전」을 보면 수필은 개념과 정의(正義)에 대해, "수필은 형식에 묶이지 않고 듣고 본 것, 체험한 것, 느낀 것 등을 생각나는 대로 쓰는 산문 형식의 짤막한 글, 또는 그러한 글투의 작품. 사건 체계를 갖지 않으며, 개성적, 관조적이며, 인간성이 내포되게 위트(wit), 유우머(humour), 예지로써 표현함. 상화(想華),만문(漫文), 만필(漫筆), 수필문, 에세이(essay)"라고 적고 있다.
이것은 다시 말해 그 형식이 자유롭고 제한이나 구속성이 적으며 다양한 소재와 자유로운 사고(思考)에 바탕을 두고 쓰여지는, 짤막한 분량의 산문 문학이 바로 수필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흔히 "수필은 붓 가는 대로 씌어지는 글"이라고도 말한다. 그리고 이 말의 의미를 잘못 해석하여 '수필은 마음 내키는 대로, 또는 생각나는 대로 종이에 써놓으면 되는 글'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심지어 심심풀이로 끄적거려 놓은 글을 수필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수필의 개념이나 본질을 잘 모르는 데에서 나오는 무지의 소치이다. 또한 마음이 내키는 대로, 또는 심심풀이로 종이에 끄적거려 놓은 글은 어디까지나 낙서에 불과할 뿐 결코 수필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설령 그것이 마음 내키는 대로 아무렇게나 쓴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 정성을 기울여 쓴 글이라고 해도 그 글 속에 수필로서의 문학성과 예술성, 수필로서 갖추어야 할 요소 등이 결여되어 있으면 이것도 결코 수필이라고 할 수 없다. 단지 이것은 잡문에 불과한 글일 뿐이다.
자신의 지식이나 생각, 또는 경험 따위를 충분한 여과 과정도 없이 마구 나열해 놓은 글, 자신의 우월함을 과시해 놓은 글이나 어떤 개인적·이기적인 목적이 담겨 있는 글, 유명한 작가나 사상가 등의 경구나 말을 필요 이상으로 인용하며 짜깁기해 놓은 글, 다른 사람의 시나 소설 등에서 인용해 놓은 듯한 구절이나 아름다운 형용사가 나열된 글, 깊은 상념이나 사고(思考)과정도 없이 주관적인 견해나 생각, 편견, 또는 시시한 주변 얘기들을 아무렇게나 늘어놓은 글 등도 결코 수필이 될 수 없다.
이러한 글들도 역시 잡문이나 낙서, 신변잡기나 자기 선전물, 또는 남의 글을 자기 것인양 도용해 놓은 '짜깁기 글'에 불과한 것이다.
수필을 흔히 "붓 가는 대로 쓰는 글"이라고 하는 것은 결코 수필이 '아무렇게나 쓰면 되는 글'이라거나 '누구나 생각나는 대로 쓰면 되는 글'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수필의 자유로운 형식과 자유로운 사고의 표현, 또는 누구와도 친근한 문학임을 문학적인 표현으로 한 것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말의 의미를 잘못 해석하고 있거나 잘못 생각하여 수필을 너무나 쉽게 쓸 수 있는 글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다는 것은 실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수필을 쓰는 일을 무료한 시간을 달래기 위한 여기(餘技)나 고상한 취미쯤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는데, 이것도 아주 잘못된 생각이다. 수필은 결코 무료한 시간을 달래기 위한 여기나 고상한 취미 정도가 될 수 없는 것이며, 그러한 사고방식을 갖고서는 수필다운 수필은 절대 쓸 수 없다.
수필이 지닌 특성 또는 특질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그 대표적인 것으로는 형식의 자유와 소재의 다양성, 각각의 개성과 사고방식의 적나라한 노출, 자기 고백적 문학이며 작가의 현실적 체험을 표출한 문학이라는 것, 우리의 현실 생활과 밀접한 '생활 속의 문학'이라는 것,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고 누구에게나 친근한 문학이라는 것, 진실에 바탕을 둔 호소력과 감동이 강한 문학이라는 것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날렵하고 경쾌한 듯하면서도 진실의 무게가 실려 있고, 재치와 해학이 넘치며, 고상하고도 우아한 수필의 품위성을 지니고 있는 문학이라는 것도 수필이 지닌 특성이다.
일찍이 수필가 피천득(皮千得)은 그의 수필 작품 「수필」에서,
수필은 청자(靑磁) 연적(宴寂)이다. 수필은 난(蘭)이요, 학(鶴)이요, 청초하고 몸맵시 날렵한 여인이다. 수필은 그 여인이 걸어가는 숲 속으로 난 평탄하고 고요한 길이다. 수필은 가로수 늘어진 페이브먼트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길은 깨끗하고 사람이 적게 다니는 주택가에 있다.……
수필은 한가하면서도 나태하지 아니하고, 속박을 벗어나고서도 산만하지 않으며, 찬란하지 않고 우아하며 날카롭지 않으나 산뜻한 문학이다.……
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 글귀야말로 수필이 지닌 특성과 문학적 품위를 일목요연하게 잘 표현한 것이라 생각된다. 특히 수필이 지닌 경쾌함과 함축미, 그리고 산뜻하면서도 우아한 기품이 선뜻 머리 속에 떠올려지도록 해주는, 멋진 글귀이다.
이렇듯 수필에는 수필로서의 개념이나 본질, 수필만이 지닌 특성이나 개성이 엄연히 존재한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을 분명히 인식하고 그 내용을 명확히 안 다음에 수필을 읽거나 쓰는 것이 올바른 순서요 당연한 과정일 것이다. 또한 그렇게 해야만 수필문학의 올바른 위상이 확립되고, 수필에 대한 편견이나 그릇된 자세도 몰아낼 수 있을 것이다.
2. 수필의 멋과 묘미
이철호 님의 「수필창작의 이론과 실기」에서
수필은 한 마디로 멋과 묘미가 넘치는 문학이다. 이것이야말로 수필이 지닌 또 하나의 특성이요, 수필이 지닌 본질적 요소이다.
만일 '수필'이라는 이름으로 쓰여진 글 속에 수필로서의 멋과 묘미가 담겨 있지 않다면 그것은 이미 수필이라고도 할 수 없으며, 분명한 실패작이다. 또한 이러한 글은 누구에게도 감동을 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관심이나 흥미도 끌지 못한다. 오직 무관심이나 외면만 받을 뿐이다.
이와는 반대로 수필로서의 멋과 묘미가 듬뿍 담긴 수필, 그야말로 수필다운 수필은 누구에게나 감동을 안겨주며, 수필을 읽은 기쁨과 보람을 선사한다. 이러한 수필이야말로 수필로서의 매력과 문학적 가치가 있다.
수필로서의 멋과 묘미가 듬뿍 담긴 한 편의 수필을 읽고 났을 때의 그 무한한 기쁨과 상쾌함, 짜릿한 감동과 마음 속 깊이 파고드는 호소력, 두고두고 잊혀지지 않을 오랜 여운.
이런 것들은 실로 겪어보지 않고서는 결코 알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체험을 해보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참으로 불행한 사람이다.
수필로서의 멋과 묘미가 듬뿍 담긴 수필을 읽고 났을 때의 느낌은 흡사 더운 여름날 더위와 갈증을 느끼며 먼 길을 걷다가 만난 샘가에서 시원한 샘물을 한 사발 마시고, 그때 마침 저편에서 한 줄기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이마에 맺힌 땀을 식혀 줄 때의 그런 상쾌함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그렇다면 수필에 있어서의, 또는 수필로서의 멋과 묘미란 과연 무엇인가.
여기에는 그 수필 작품 속에 담겨 있는 기발한 착상이나 절묘한 표현, 재치와 유우머, 잔잔한 감동이나 포근하게 느껴지는 정감, 전혀 뜻밖의 상황 전개나 역설의 묘미, 삶에 신선한 충격이나 활력을 불어 넣어 주는 묘사, 깊은 깨달음의 경지 등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은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이 일률적으로 적용되는 것은 아니고 사람이나 각자의 처한 상황, 성격이나 자라온 환경, 나이 등에 따라 얼마든지 그 느낌이나 감동, 받아들이는 자세 같은 것들이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비록 사람이나 각자의 상황 등에 따라 그 정도 느낌의 차이는 다소 있을지언정 수필로서의 멋과 묘미를 지닌 수필이라면 근본적으로 누구에게나 감동과 수필을 읽는 기쁨을 안겨주기 마련이다. 마치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누구나 겨울이 되면 추위를 느끼고, 여름이 되면 더위를 느끼는 것처럼.
특히 피천득이나 이양하, 이희승, 김진섭 등이 쓴 수필 작품들 중에는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과 수필을 읽는 기쁨을 안겨주는 수필 작품이 많이 있다. 이를테면, 피천득의 「수필」이나 「오월」「종달새」「맛과 멋」등과 같은 수필 작품과 이양하의 「신록예찬」, 민태원의「청춘예찬」, 이희승의 「오척단구(五尺短軀)」, 김진섭의「생활인의 철학」「인생예찬」등은 얼마나 멋진 수필인가.
아무리 감저이 무디고 문학에 관심이 없는 사람일지라고 이런 수필작품을 읽고 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잔잔한 감동이나 수필을 읽은 기쁨을 느끼게 될 것이고, '아하!'g하는 감탄과 함께 '이런 게 바로 수필이구나'하는 생각도 들게 될 것이다.
이들 수필 작품 중에서 피천득의 「맛과 멋」이란 수필 작품을 보면, "…맛은 몸소 체험을 해야 하지만 멋은 바라다보기만 해도 된다. 맛에 지치기 쉬운 나는 멋을 위하여 살아간다.……"는 구절이 나오는데, 이 얼마나 기발함과 재치가 넘치는, 멋진 표현인가. 또한 그는 그의 「수필」이라는 수필 작품속에서,
……덕수궁 박물관에 청자(靑瓷) 연적이 하나 있었다. 내가 본 그 연적은 연꽃 모양을 한 것으로, 똑같이 생긴 꽃잎들이 정연히 달려 있었는데, 다만 그 중에 꽃잎 하나만이 약간 옆으로 꼬부라졌었다.
이 균형 속에 있는 눈에 거슬리지 않는 파격(破格)이 수필인가 한다. 한 조각 연꽃잎을 꼬부라지게 하기에는 마음의 여유를 필요로 한다.
이 마음의 여유가 없어 수필을 못쓰는 것은 슬픈 일이다. 때로는 억지로 마음의 여유를 가지려 하다가 그런 여유를 갖는 것이 죄스러운 것 같기도 하여 나의 마지막 십분지 일까지도 숫제 초조와 번잡에 다 주어 버리는 것이다.……
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것은 실로 수필이 지닌 멋과 '파격의 묘미' 또는 '역설의 묘미'를 멋지게 승화시켜 표현한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수필에 있어서의 멋과 묘미는 화려하다거나 사치스러운 것, 또는 요란스러운 것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이와는 반대로 수수하면서 소박하고, 은근하면서도 조용하며, 은은한 향취가 풍겨오고, 삶의 진솔한 모습이 꾸밈세 없이 담겨져 있는 것이 수필에 있어서의 참된 멋과 묘미이다.
수필의 멋과 묘미를 꽃에 비유한다면, 그것은 화려한 모습의 장미 같은 것이 아니라 산야에 피어 있는 들국화나 맑은 가을 하늘을 배경으로 하늘거리며 청초한 모습으로 서 있는 코스모스와도 같다. 또 물에 비유한다면, 세찬 물줄기를 뿜어 올리는 분수나 거세게 쏟아져 내리는 폭포수 같은 것이 아니라 깊은 산 속에서 조용히 솟아오르는 맑고 잔잔한 샘물과도 같다고 할 수 있다.
만일 수필에서 멋과 묘미가 상실되어 있다면, 그것은 마치 '향기를 잃은 꽃'이나 '간을 맞추지 않은 음식'이나 다를 바 없다. 그만큼 수필에서의 멋과 묘미는 당연히 갖추고 있어야 하지만, 이를 위해 지나치게 작위적이 되거나 허위나 가식이 개입되어서는 안된다. 이것은 오히려 수필로서의 품위와 문학성을 떨어뜨리고 천박하게 만들뿐이다
이철호 님의 「수필창작의 이론과 실기」에서
문학은 언어를 도구로 하여 작가 자신의 감정이나 사고(思考), 체험, 표출하고자 하는 것 등을 예술적으로 승화시켜 표현하는, 예술 행위이다.
따라서 이런 점에서만 본다면 소설이나 시, 희곡, 그리고 수필 등은 같은 문학 행위로서 다같이 문학의 범주에 속한다. 더욱이 이 중에서 시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산문 형식을 취하고 있으므로 더욱 유사해 보인다.
그러나 소설과 시, 희곡, 수필 등은 분명히 각자만의 고유 영역을 갖고 있고 나름대로의 특징을 각기 지닌, 서로 다른 형태의 문학 장르이다. 이 점은 이미 오래 전부터 구분되어 온 것이고, 어느 정도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소설과 시, 희곡, 수필 등이 같은 문학이면서도 그 형태가 서로 다르다는 것쯤은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과 시, 희곡, 수필 등이 좀더 구체적으로 어떤 점이 다르며 각기 어떤 특징이나 특성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뿐만 아니라 이들의 차이점이나 특성 등을 명확히 구분하지 못하거나 혼동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특히 소설과 수필의 차이점이나 각기 다른 특성을 잘 구분하지 못하거나 혼동하는 사람들을 종종 보게 된다. 이것은 아마도 소설과 수필이 같은 산문 형식을 취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얼핏 보기에는 비슷한 면도 있어 보이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소설과 수필은 분명히 다른 것이다. 마치 사과와 감이 얼핏 보기엔 색깔이 비슷한 것 같아도 이들은 서로 본질적으로 분명히 다른 과일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특히 수필은 작가 자신의 체험이나 생각, 또는 사상이나 표현하고자 하는 것을 사실적으로 그려내는, 문학 행위이다. 즉 수필은 허구 세계가 아닌, 사실 세계를 표현하는 것이다.
물론 근래에 와서는 수필에서의 허구성 문제를 놓고 수필가들 사이에서 많은 논란이 벌어지고 있고, 일부에서는 수필에서 어느 정도의 허구는 용납되어야 한다는 주장도 펴고 있다. 그러나 수필에서는 근본적으로 허구 세계가 용납되지 않고 있다. 또 수필에서의 허구를 어느 정도 인정해야 한다는 사람들의 견해도 수필에서의 허구는 문학으로서의 예술성과 극적 효과 등을 위해 꼭 필요한 경우에만 극히 제한적으로 허용하자는 것이지 소설에서처럼 무한정의 허구 세계를 용납하자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소설에서는 수필과는 크게 다르게 무한정의 허구 세계가 용납된다. 작가의 체험이나 생각, 또는 사상이나 가치관 등을 바탕으로 얼마든지 허구와 가상의 세계를 그려내고 가공 인물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소설이다.
또한 이러한 허구와 가상의 세계, 가공 인물 등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 내고, 이를 통해 작가의 사랑이나 의도를 표출하고 창조적·예술적 문학 행위를 하는 것이 바로 소설의 기본 형태이다.
그러면서도 소설에서는 그 허구와 가상의 세계를 마치 그것이 현실인 것처럼, 또는 작가 자신이 직접 체험한 얘기를 사실 그대로 그려놓은 것처럼 묘사하는 수가 많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소설의 기법이자 특징이며, 또 그래야만 소설로서의 가치가 있고 독자들로부터 공감을 얻는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소설에서의 이러한 허구와 가상의 세계를 실제 상황으로 착각하고, 자신의 체험이나 생각 등을 사실 그대로 묘사한 수필과 유사한 것으로 생각하는 수가 있다.
특히 소설에서는 1인칭 수법으로 '나'라는 주인공이 등장하는 수가 많은데, 소설에서의 이 '나'를 그 소설을 쓴 작가 자신의 모습이나 생각, 또는 체험을 그대로 그려놓은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은 '나'의 형식을 빌어 쓴 소설과 작가 자신의 모습이나 생각 등이 그대로 그려진 수필에서의 '나'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즉 소설 속의 '나'나 수필 속의 '나'를 모두 같은 개념으로 생각하여 소설이나 수필을 비슷한 문학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런 사람들의 숫자는 아주 적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이러한 잘못된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소설 속의 '나'와 수필에서의 '나'는 엄연히 다른 것이다. 소설 속의 '나'는 거의 대부분 소설의 극적 효과와 사실감 등을 높이기 위해 도입된 허구의 '나'일 뿐이다. 반면에 수필에서의 '나'는 어디까지나 작가 자신의 모습과 생각 등이 그대로 투영된, 실제 모습의 작가 자신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소설 속의 '나'는 작가 자신의 인격이나 가치관, 생각, 성격, 또는 교육 수준이나 교양 정도 등과 무관하게 얼마든지 작가의 의도대로 그려질 수 있지만, 수필에서는 그럴 수가 없다. 수필에서의 '나'는 어디까지나 작가 자신의 모습 그대로이기 때문에 그의 인격이나 가치관, 생각, 성격 또는 교육 수준이나 교양 정도 등에 따라 사실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 원칙이다.
따라서 소설 속의 '나'는 저속한 말이나 욕설 따위를 마구 쓰는 등 용어 선택이나 언어 표현 등에 거의 제약이 없다. 그러나 수필에서의 '나'는 곧 작가 자신의 모습이며 작가의 인격이나 품위 등을 나타내 주는 것이기 때문에 이같은 표현에는 제약이 따를 수밖에 없으며, 용어 선택이나 언어 표현 등에 작가 스스로 신중을 기하기 마련이다.
만일 그렇지 않고 수필에서의 '나'가 소설 속에서의 '나'처럼 저속한 표현이나 욕설 따위를 마구 쓴다면 독자들은 그 수필을 쓴 사람의 인격이나 품위를 아주 천하게 여길 것이다. 또 수필에서의 '나'가 소설에서의 '나'처럼 허구적인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거나 그 내용이 허구적이라면 독자들은 그것도 사실 그대로 믿어 버리기 쉽다.
소설과 수필과의 이러한 관계와는 달리 시와 수필은 그 형태부터가 눈에 띄게 달라 보이기 때문에 이를 서로 혼동하거나 동일시 하는 사람들은 적다. 특히 시는 수필에 비해 대체로 분량이 적고 몇 구절의 짤막한 시구로 표현되는 수가 많기 때문에 구분하기 용이한 편이다.
그러나 근래에는 시의 분량이 늘어난 것들도 적지 않고, 산문 형식처럼 쓰여진 시들도 있다. 장편시나 서사시 같은 것들 중에는 수필보다도 그 분향이 훨씬 많은 것들도 흔히 보게 된다.
다라서 이러한 시들과 수필을 자칫 혼동하는 사람들도 있다. 더욱이 최근에는 시인이 쓴 수필이 많이 발표되고 있는데, 이런 수필 중에는 시적인 표현과 시적인 형식이 자주 인용되어 그것이 시인지 수필인지조차 분간하기 어렵게 만드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소설과 수필의 관계와 마찬가지로 시와 수필의 관계도 분명히 다른 것이다. 특히 시는 작가의 사상이나 감정, 생각 또는 체험 등을 사실 그대로 표현하기 보다는 무한한 상상력과 허구적인 요소까지도 가미하여 재구성, 또는 재창조하여 표현하는 수가 많으며, 시적인 언어의 선택과 배열, 구성 등이 독특하기 때문에 수필과는 같을 수가 없다.
또한 희곡은 줄곧 대화체의 문장으로 이어지며, 주로 대화와 행동의 표현 묘사로 쓰여진 문학 장르이기 때문에 그 형식에서부터 수필과는 쉽게 구분괸다. 특히 수필에서는 가능한 한 대화체의 문장은 절제하는 것이 원칙이므로 대화체의 문장으로 이루어진 희곡과는 더욱 잘 구분된다.
'수필'이란 이름으로 쓰여진 글등 중에는 더러 그것이 소설인지 희곡인지조차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대화체의 문장을 많이 쓴 것을 보게 되는데, 이것은 본질적으로 수필이라고 할 수 없다. 수필은 어디까지나 산문 형식의 묘사로 표현하는 것이 원칙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수필은 소설이나 시, 희곡 등 다른 문학 장르와 분명히 다른 것이며, 나름대로의 영역과 갖추어야 할 조건이 있다. 이 점을 망각하고 소설이나 시, 또는 희곡 등의 특성과 마구 혼합하여 수필을 쓴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죽도 밥도 아닌, 이상한 형태의 잡문이 되고 만다.
4. 수필문학의 단점과 한계성
이철호 님의 「수필창작의 이론과 실기」에서
수필문학은 분명히 수필문학으로서의 고유의 영역과 특성, 또는 장점을 많이 지니고 있는 문학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이미 이 책의 여러 부문에서 누누이 언급되고 있다.
반면에 수필문학은 그 나름대로의 단점과 한계성을 지니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흔히 수필문학의 특성이나 장점에 대해서는 많이 언급하면서도 그 단점이나 한계성에 대해서는 잘 언급하지 않거나 애써 축소시키려는 경향이 있는데, 이러한 태도는 옳은 태도라고 할 수 없다.
오히려 수필문학의 특성이나 장점과 함께 수필문학의 단점이나 한계성에 대해서도 자세히 살펴보고 그 개선책이나 보완점 등을 제시하며 개선해 나가는 것이 올바른 태도일 것이다.
특히 수필가들은 자신이 쓰고 있는 글이 수필이라는 이유로 무조건 수필문학의 특성이나 장점만 부각시키고 단점이나 한계성은 애써 감추거나 축소시키려는 자세를 지양하고 부족한 부분에 대한 개선과 보완에 더욱 힘쓰는 자세가 요구된다.
그렇다면 수필문학의 단점이나 한계성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무론 여기에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을 수 있겠으나, 수필문학의 단점이나 한계성에 관한 필자의 견해는 다음과 같다.
1) 적은 분량으로 인한 한계성
물론 수필 작품들 중에는 그 원고 분량이 많거나 장편에 가까운 수필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또한 수필은 그 내용이나 형식, 표현 방법 등에 있어서 제한이 없고 자유로운 것처럼 원고 분량에 대한 제한도 없다. 길게 쓰든 짧게 쓰든, 그것은 어디까지나 쓰는 사람의 자유 권한에 속한다.
그러나 수필은 대개 원고지로 따져서 12~15매 정도의 분량이 보통이다. 여러 지면을 통해 발표되는 수필 작품들을 보더라도 20매를 넘는 분량은 찾아보기 어렵다.
이처럼 수필의 분량은 대체로 적은 편이면서도 그 짤막한 길이 속에 작가의 의도나 생각 등을 모두 함축시켜 표출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알차고 알맹이가 있는 내용이 이 속에 꽉 차 있어야 한다.
만일 짤막한 분량이라고 해서 작가의 의도나 생각 등이 미처 다 표현되지 못하거나 구성이나 짜임새가 엉성하다면, 그것은 이미 수필 작품으로서의 가치가 상실되고 만다. 다시 말해 한정된 분량 속에 최대한의 알찬 내용을 담아야 하는 것이 바로 수필인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한정된 분량 속에 최대한의 알찬 내용을 담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상념의 정제와 압축, 문장 표현의 능숙함과 압축력, 치밀하고도 짜임새 있는 구성, 간결하고도 함축성 있는 문장력, 짤막한 가운데 번뜩이는 재치와 유머 감각 등이 종합적으로 요구되기 때문이다.
또한 한정된 분량 속에 자신의 의도나 생각, 또는 여러 가지 내용을 담으려다 보면 아무래도 무리가 따르고 적절하고도 완벽하게 다 표현하는 데 어려움이 있기 마련이다. 물론 이것은 수필가로서의 뛰어난 능력으로서 극복 될 수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이 또한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분량을 늘려서 수필을 쓰다 보면 자칫 수필로서의 특성이나 묘미를 상실하고 장황해질 수도 있다. 또한 너무 긴 수필은 수필문학의 특징인 간결성과 함축미를 잃기 쉽고, 독자들이 공감이나 호응을 얻는 데에도 어려움이 따른다.
2) 개인적, 제한된 소재에서 오는 한계성
수필의 소재는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다. 또 작가 개인의 일상 생활을 중심으로 하여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보거나 느낄 수 있는, 평범한 일들이나 사소한 것들 중에서 소재가 선택되는 수가 많다.
물론 이러한 개인적이거나 일상적이며, 또는 평범한 일들이나 사소한 것들 중에서 소재를 선택하여, 그것을 가치 있고 의미 있는 문학 작품으로 승화시켜 놓는 것 바로 수필이다.
또한 이것이야말로 수필이 지닌 본질적 특성이며, 또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 수필가의 사명이기도 하다. 흡사 훌륭한 예술가가 별것도 아닌 재료를 가지고 위대한 예술품이나 조각품을 만들어 내듯이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보거나 겪을 수 있는 일이나 소재를 가지고 가치있고 훌륭한 문학 작품으로 탈바꿈해 놓는 것이 바로 수필이요,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이 다름 아닌 수필가인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상당한 어려움이 따르기 마련이다. 별것도 아닌 재료를 가지고 위해한 예술품이나 조각품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듯이 평범하고도 일상적인 소재를 가지고 뛰어난 문학 작품을 빚어내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닌 것이다.
평범하고도 일상적인 소재를 가지고 평범하고도 안이한 자세로 수필을 쓴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평범하고도 대수롭지 않은 수필이 되고 말 뿐이다.
또한 이런 수필은 수필로서의 가치도 없을 뿐만 아니라 독자들로부터 외면당하기 십상이다. 누구나 흔히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할 수 있는 일들을 그댈 그려 놓았다면 누가 관심과 흥미를 갖겠는가.
따라서 이 평범하고도 일상적인 소재, 또는 지극히 개인적이거나 제한된 소재를 가지고 어떻게 훌륭한 문학 작품으로 승화시키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이다.
또한 이로 인한 한계성과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따라 작품으로서의 성패가 달려 있다.
그러나 '평범함' 속에서 '비범함'을 찾아내고, 훌륭한 작품을 창조해 낸다는 것 역시 쉬운 일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수필가로서의 예리한 시각이나 관찰력, 분석력, 뛰어난 표현 능력, 심오한 사상과 수준 높은 지성, 폭넓은 사고 등이 충분히 갖추어져 있지 않으면 이러한 개인적. 제한된 소재에서 오는 한계성을 극복하기도 어렵다.
특히 수필은 개인적인 이야기를 그려놓는 수가 많기 때문에 이로 인한 한계성을 극복하지 못하면 사사로운 신변잡기가 되기 쉽다.
또한 수필의 소재는 평범하거나 일상적이며 제한된 소재 속에서 선택되는 수가 많이 때문에 이에 따른 한계성에 부딪히는 수가 많은데, 만일 이를 충분히 극복해 내지 못하면 다른 사람들이 쓴 수필과 엇비슷하고 특색이나 개성이 없으며, 따라서 문학성과 예술성이 결여된 수필이 되고 만다.
3) 허구의 배제에서 오는 한계성
일반적으로 수필에서는 허구가 용납되지 않는다. 이것이 수필문학이 시나 소설 등과 같은 다른 문학 장르와 크게 다른 점들 중의 하나이다.
이를테면 소설에서의 '나'는 물론 작가 자신을 의미하는 '나'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가공의 '나', 허구의 '나'인 경우가 훨씬 더 많다. 이레 비해 수필에서의 '나'는 어디까지나 그 수필을 쓴 사람 자신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수필에서는 허구나 가공의 '나'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오직 작가 자신의 '나'만 존재할 뿐이다.
물론 최근에는 수필에서의 허구성을 어느 정도 인정해야 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문학적 가치의 향상이나 작품으로서의 극적인 효과, 보다 짜임새 있는 구성과 연관성, 독자의 감동 유발이나 감동의 상승효과 등을 위해 제한적이나마 허구를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또한 수필의 내용이나 형식, 또는 표현양식 등에서 오는 한계성, 이를테면 수필이 사실과 개인적 체험을 바탕으로 쓰여지는 데에서 오는 한계성을 극복하고 보다 큰 문학적 성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약간의 허구는 용납되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이것은 다시 말해 허구의 배제에서 오는, 수필의 한계성을 극복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어느 정도의 허구를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리고 허구의 배제로 인한, 수필의 한계성과 제약이 있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며 이로 인해 수필을 쓰는 것이 시나 소설을 쓰는 것에 비해 작가의 상상력이나 극적인 효과 등을 마음껏 발휘하는 데 어려움이 따른다.
이같은 수필에서의 허구성 인정 문제는 그동안 많은 논란이 있어 왔고, 그 필요성이나 설득력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수필에서의 허구는 인정되지 않는 상황이며, 수필에서의 허구를 찬성하는 견해보다는 반대하는 견해가 훨씬 더 우세하다.
이러한 수필에서의 허구성 문제는 이 책의 다른 부분에서 보다 자세하고도 집중적으로 다루어지고 있지만, 어쨌든 수필에서의 허구의 배제에서 오는 한계성이 있다는 것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것은 바로 수필문학이 지닌 단점이자 한계성이다.
이 밖에도 수필문학이 지닌 단점이나 한계성은 또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수필문학이 지닌 단점이나 한계성, 그 자체보다도 이를 어떻게 극복하여 수필문학의 가치와 위상을 높이느냐하는 것이다.
이철호 님의 「수필창작의 이론과 실기」에서
문학에는 소설. 시. 희곡. 평론. 수필 등 여러 가지 장르가 있지만, 이들 중에서 특히 일반인들이 스스로 가장 읽기 쉽고 이해하기 쉬울 뿐만 아니라 자신이 직접 쓸 때 가장 쓰기 쉬운 것 역시 수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왜냐하면 소설이나 시, 희곡, 평론 등은 아무래도 난해한 부분이 많아 읽거나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는 수가 적지 않고 그것들을 쓰는 데에 있어서도 그 분야에 관한 특별한 소질이나 재능. 또는 전문직인 지식 등이 많이 요구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수필은 이러한 것들에 비해 우선 읽는 데에 어려움이 별로 없고 이해하기도 쉬우며, 그 내용이나 소재 자체가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보거나 듣거나 직접 체험하는 것 등이 만기 때문에 친근감을 느끼며, 자신도 그러한 얘기에 대해서는 쓸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수가 많다.
사실 소설이나 시, 희곡, 평론 등은 그 나름대로의 격식과 구성 요건, 표현 방범, 문장이나 단어의 선택 등에 있어서 많은 것들이 요구된다.
또한 이러한 것들은 허구성이나 독창성이 많이 요구되기 때문에 문학적 상상력이나 허구세계에 대한 묘사 능력, 치밀란 구성이나 추리력, 논리성이나 연결성 등이 많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런한 것들이 결여되어 있으면 문학 작품으로서의 가치가 상실되고 만다.
물론 수필문학에 있어서도 이러한 것들이 요구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수필문학은 다른 문학 장르에 비해 이러한 것들이 적게 요구되는 편이다. 더욱이 수필문학은 원래 그 형식이나 내용, 소재의 선택, 표현방법, 구성 등에 있어 까다롭지 않고 자유로우며 포용력이 큰 특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누구나 쓰기에 용이하며, 따라서 누구에게나 친근감이 드는 문학이다.
피천득이 그의 [수필]이란 작품에서,
.......수필의 재료는 생활 경험, 자연 관찰, 또는 사회 현상에 대한 새로운 발견, 무엇이나 다 좋을 것이다. 그 제재(題材)가 무엇이든지 간에 쓰는 이의 독특한 개성과 그때의 무드에 따라 '누에의 입에서 나오는 액(液)이 고치를 만들 듯이' 수필은 써지는 것이다.
수필은 플릇이나 클라이막스를 필요로 하지 않는가. 가고 싶은 데로 가는 것이 수필의 행로(行路)이다. 그러나 차를 마시는 거와 같은 이 문학은 그 방향(芳香)을 갖지 아니할 때에 는 수돗물같이 무미(無味) 한 것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 수필은 그 쓰는 사람을 가장 높직이 나타내는 문학 형식이다. 그러므로 수필은 독자에게 친밀감을 주며, 친구에게서 받은 편지와도 같은 것이다.......
라고 수필의 특성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
또한 김광섭은 그의 [수필문학 소고]라는 글에서, 수필이란 글자 그대로 붓 가는 대로 써지는 글일 것이.......
...... 우리는 시를 쓰려한다. 소설을 지어 보려 한다. 혹은 희곡을 만들어 보고자 한다.우리는 그때 그 어느 것에나 무심히 달려들려는 무뢰한은 아니다. 동일한 작자이면서도 그 태도가 서로 다르다. 시는 심령과 감각의 전율된 상태에서, 희곡과 소설은 재료의 정돈과 구성에 있어서 과학에 가까우리만치 엄밀한 준비에서 시작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보면, 수필은 달관과 통찰과 깊은 이해가 인격화된 평정한 심경이 무심히 새왈 주변의 대상에, 혹은 회고와 추억에 부딪혀 스스로 붓을 잡음에서 제작된 형식이다. 제작이라고는 하나 수필에 있어서는 의식적 동기에서가 아니요, 결과적 현상에서이다. 다시 말하면 수필은 논리적 의도에서 제작된 일은 없다.
수필은 써 보려는 데서 시작되어 써진 것이다. 어느 작가가 소설이나 희곡이나 시를 써 보 려는 한가로운 마음에서 쓸 것인가.그것들은 작가에게서 의식적으로 제작되었다. 진실로 제작되었다. 그러나 수필은 한가오룬 심경에서의 시필쯤에 그치는 본성을 가지고 있다........
라고 언급하고 있는데, 이것도 수필의 특성과 자유성, 또는 수필이 누구에게나 친근하고 누구나 쓸 수 있는 문학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그가 말한, "수필이란 글자 그대로 붓 가는 대로 써지는 글일 것이다," 또는 "수필은 한가로운 심경에서의 시필쯤에 그치는 본성을 가지고 있다."는 등의 구절을 두고 오랫동안 여러 가지 논란이나 오해가 있어 왔다.
즉, 이 말이 '수필이란 아무렇게나 붓 가는 대로 쓰면 되는 글이냐?' '수필을 너무 가볍게 여기거나 누구나 쉽게 쓸 수 있는 글로 평가절하시킨 말이 아니냐?' 하는 등의 논란과 이 구절을 액면 그대로 받아 들여 '아하, 수필이란 그저 붓 가는 대로(생각나는 대로) 아무렇게나 쓰면 되는 것이로구나' '수필은 할 일없는 사람들이 그저 심심풀이로 쓰는 글이로구나' 하는 따위의 오해나 잘못된 생각을 갖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김광섭이 말한 "수필이란 글자 그대로 붓 가는 대로 써지는 글일 것이다"라거나 "수필은 한가로운 심경에서의 시필쯤에 그치는 본성을 가지고 있다."라고 한 것은 결코 수필은 아무렇게나 써도 된다거나 '할일없는 사람들이 심심풀이로 쓰는 글'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수필의 자유로운 속성과 누구에게나 친근하며 누구나 쓸 수 있을 만큼 '대중적이며 벽이 높지 않은 문학'이라는 사실을 좀더 알기 쉽게, 또 문학적인 표현으로 쓴 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이를 오해하거나 잘못 생각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일종의 '해프닝'이라고 할 수 있다.
어쨌든 소설이나 시, 희곡, 평론 등다른 문학 장르에 비해 수필이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 가장 읽거나 이해하기에 쉽고, 쓰기에 쉬운 것 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를테면 시를 쓰기 위해서는 언어의 압축과 정제된 표현, 시어(詩語), 시로서의 형식과 음률 등에 대한 지식이나 방법, 또는 재능 등이 많이 요구되지만, 수필을 쓰는 데에 있어서는 이런 것들에 대해 잘 알거나 재능이 있으면 더욱 좋지만 설령 그렇지 못하더라도 큰 지장은 없는 것이다.
흡사 그림이나 음악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이나 이론을 잘 모르고도 누구나 그림을 그릴 수 있고 노래를 부를 수 있듯이 수필은 그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이나 이론을 잘 모르고도 얼마든지 쓸 수 있는 것이다.
다만 그렇게 쓴 글이 문학 작품으로서의 가치와 문학성. 예술성이 결여되어 있으면 수필 작품으로서 대접받을 수 없겠지만, 일단 수필의 형식을 어느 정도 갖춘 글이라면 넓은 의미에서 수필의 범주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때문에 수필은 비단 전문 수필가뿐만이 아니라 사무직 근로자, 생산직 근로자, 경찰관, 의사, 운전기사, 상인, 건설 현장 근로자, 학생, 주부 등 누구나 쓸 수 있다. 심지어 나이 어린 국민학교 학생들이나 나이 많은 노인 등까지 쓸 수 있는 것이 바로 수필이다.
또한 굳이 '수필'이란 이름을 붙이지 않더라도 사보같은 곳에 실리는 '사원 문예란'의 글들, 평소 쓰는 일기나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 등도 넓은 의미에서는 얼마든지 '수필'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수필은 어느 특정인들만이 읽고 감상하거나 쓸 수 잇는 문학이 아니라 누구나 읽고 감상하며, 또 쓸 수 있는 문학이다. 그리고 사라들은 거의 대부분 자신이 의식하였든 의식하지 못했든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신문. 잡지. 책 등을 통해 수필과 자주 접해왔고, 학교 다닐 때의 작품 시간이나 일기, 편지, 혼자 사색하며 쓴
글 등 '수필'에 속하는 글들을 이미 써본 경험이 있기 마련이다.
더욱이 소설을 읽자면 아무래도 긴 시간이 요구되고, 시를 읽는 데에는 그 내용이나 의미가 난해한 경우가 많아 망설여지고, 희곡이나 평론은 전문적인 지식이 요구되면 읽고 이해하는 데에 어려움도 따르지만, 수필은 아무 데에서나 간편하고 부담감없이 읽고 감상해도 그 내용이나 의미를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 다름아닌 수필
이다.
이같은 이유와 수필의 특성 때문인지 수필을 읽고 즐기거나 수필을 좋아하는 사람, 또는 자신이 직접 수필을 써보고자 하는 사람은 상당히 많다.
흔히 "우리 나라에서 문학이 외면되고, 특히 시를 읽는 사람은 너무나 적다" 또는 "소설은 소설가가 써서 독자들이 읽고, 시는 시인이 자기가 써서 자기가 읽는다"라는 말을 하지만, 그래도 수필은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여러 사람들이 함께 즐기고 공유하는 문학인 것이다.
이처럼 수필은 누구에게나 친근하고 접근이 용이한 문학이다. 또한 누구나 읽고 즐기고 공감할 수 있으며 누구나 쓸 수 있는, 우리 모두의 문학이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수필을 읽고 즐기고 공감하며, 또 직접 쓰는 것은 아주 좋은 현상일 뿐만 아니라 보다 확산되고 적극 권장되어야 할 일이다.
또한 이것은 우리 나라의 메마르고 소외된 문학 풍토를 기름지게 가꾸고 발전시키는 데에도 큰 역할을 할 것이며, 국민의 정서 함양과 인격 증진, 올바른 가치관의 정립과 의식 개혁, 나아가서는 그릇된 사고 방식의 배격과 추방, 범죄예방 등에까지도 큰 효과를 나타낼 것이다.
그러나 보다 수필을 잘 읽고 잘 감상하며, 좀더 나은 수필을 쓰기 위해서는 수필문학에 대한 공부와 꾸준한 습작, 자기개발과 의식개혁 등의 노력 또한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다.
6. 수필문학의 5가지 특성
수필이 지닌 여러 가지 특성 또는 특징을 좀더 구체적으로 분류해보면, 다음과 같은 5가지로 나눌 수 있다.
1) 무형식성(無形式性)
2) 산문성(散文性)
3) 자기 고백성(自己 告白性)
4) 광범성(廣範性)
5) 창조성(創造性)과 문학성(文學性)
이를 하나씩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무형식성(無形式性)
수필은 이미 잘 알려줘 있는 바와 같이 어떤 형식(形式)으로부터 구속되지 않은 자유로운 문학이다. 즉 일정한 형식이 없는 문학 장르가 바로 수필인 것이다.
이것이 수필문학이 지닌 가장 큰 특성 중의 하나요, 수필문학이 지닌 독특한 개성이다. 수필문학을 가리켜 흔히 '무형식의 형식'이라고 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에 비해 수설이나 시, 희곡 등은 각기 그 나름대로 독특한 형식에 의해 쓰여진다. 즉 소설이나 시, 희곡 드은 각각 정해져 있는 형식이나 제약을 무시하거나 거부해서는 안되며, 최소한도라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소설에 있어서는 허구(虛構)에 기초를 둔 인물과 사건, 배경, 줄거리 등을 설정하고 등장 인물의 호칭 등도 미리 정해 두어야 한다. 이러한 형식의 설정을 무시하거나 거부하고서는 소설이 될 수 없다. 또한 시에 있어서도 운율(韻律)이나 메타포, 시어(詩語)의 선택과 압축 또는 절약 등 시를 쓰는데 필요하고도 요구되는 형식을 무시하거나 거부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희곡에 있어서도 무대나 장면, 출연진, 대화 내용, 연기 방법 등을 세밀히 고려하고 지시하면서 형식의 제약을 받아야한다.
그러나 수필에 있어서는 이러한 형식이나 제약 등에 구애받을 필요가 없다. 그저 쓰고 싶은 대로 자유롭게 쓰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김진섭(金晋燮)은 수필문학의 이러한 '형식의 자유', 또는 '무형식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 바 있다.
...... 시, 소설, 희곡 등 속의 문학이 일견 명료한 형식을 가지고 있는데 대해서, 수필은 문학으로서의 일정한 형식을 갖지 못하고 수필은 그것이 차라리 작품으로서 형식을 갖지 않는다. 그 특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경우에 의해서는 제약도 없으며, 질서도 없으며, 계통도 없이 자유롭고 산만하게 쓰인 모든 문장까지도 포함할 수 있는 까닭으로 주는 것이지만, 사실 문학은 자기의 협애(狹隘)한 영역안에 수필이라 하는 이 자유분방하고 경묘탈려(輕妙脫麗)하고 변화무쌍한 양자(樣子)를 포함하기 어려운 감이 없지 않다......
김광섭(金珖燮)도 그의 [수필문학 소고(小考)]에서 수필문학의 무형식성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문학 형식에서 보면 수필에는 소설이나 시나 희곡에서 보는 바와 같은 어떤 완성된 폼이 없다. 단편 소설을 제작하려면 우리는 적어도 애드거 알렌 포나, 안톤 체홉이나 혹은 모파상에게 잠시라도 사숙(私塾)하여야 하겠고, 시나 희곡을 지으려면 괴테나 사옹(沙翁)이 나 혹은 입센 등에게 완성된 폼은 비록 모델로 삼지 않는다 할지언정 살펴볼 아량쯤은 있 어야 하겠지만, 수필에 있어서는 그 형식을 구하거나, 참고하려고 반드시 찰스 램이나 헤를 릿드를 찾을 필요성까지는 없을 것 같다. 가장 아름다운 수필을 찾아 우리의 문학적 항심 (恒心)을 만족시키며 충족시키는 점은 찬하여 마지 않을 바이나, 그 형식의 섭취에 구속될 바는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형식으로서의 수필문학은 무형식이 그 형식적 특징이다. 이것은 수필의 운명 이요, 내용이다.
이와같은 견해들에 대해 이현복(李賢馥)은 그의 [수필문학 작품을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를 통해 약간 다른 견해를 피력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수필의 형식은 과연 무형식의 형식인가?
'무형식'이란 말은 김진섭의 말처럼 '제약도, 질서도, 계통도 없이 자유롭게 산만하게 쓰여지는 것'이고, 김광섭의 경우처럼 '붓가는 대로 써지는 시필(試筆)쯤에 그치는 것'이며, 피천득의 견해처럼 '누에의 입에서 나오는 액이 고치를 만들 듯이 그렇게 써지는 것'일까?
이 말들을 표면적 의미로 본다면 수필은 낙서요, 잡다한 생각의 산만한 표출이요, 문장 수련의 과정일 뿐이다. 이와 같은 수필관에서 쓰여진 수필은 어의(語義)대로의 수필 일 뿐 문학적 수필은 아니다.
수필문학에서 '무형식'이란 말은 필자의 마음이 형식이라 하리 만큼 일정한 형식이 없다는 의미이다. 수필의 형식에는 인물, 사건, 배경이라는 소설적인 구성도 없고 논거를 제시해야 하는 논문의 제약도 받지 않으며 일정한 사물이나 과제를 쉽게 풀어서 그것이 '무엇'인가를 알게 하는 설명문의 제약도 받지 않는다. 수필은 다만 초점을 향하여 문장이 집결되고 이것으로 말미암아 전문에 생기가 넘치는 글이란 뜻이다. 또한 문장기법상에서 '무형식'이란 말은 자유롭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어 설명, 논증, 서사, 묘사라는 문장의 세가지 기술 양식을 모두 부려 쓸 수 있으므로 그 형식이 자유롭다는 뜻이다.
또 다른 의미로는 '형식적이 아닌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것이 무형식의 내용으로 오직 자신에 충실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결국 무형식이란 말은 붓가는 대로의 무질서한 글이 아닌 것이다. 결국 무형식이란 말은 일정한 틀에 박힌 틀이 없다는 뜻에서 플롯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수필에서 무형식의 '붓가는 대로'를 고쳐 풀이하면 붓가는 대로써도 될 만큼 문장력에 있어 숙련에 들어간 작가가 '한가로운 심경'에서 '마음의 여유'를 갖고 '의지'나 '정감'의 정화를 원숙한 언어로 표출해 낸 것이 수필이라 하여 중년고개를 넘어서 원숙한 글이란 뜻으로 해석된다.
그러므로 수필은 쉽게 쓰여지는 글이 아니라는 뜻이다. 결국 수필은 문장의 수련과 인생의 달관에서 자연히 유로되는 격조 놓은 문학이다....
한편 문덕수(文德守)도 그의 [신문장강화](新文章講話)에서,
...수필은 인간의 본성을 바탕으로 다른 형식의 문학이 형식으로서의 뚜렷한 경계(境界)를 그었을 때 그 어느 형식에도 속하지 않으면서도 모든 형식을 용해할 수 있는 부분으로 남은 것이다.....
라고 하며 수필문학의 넓은 포용성을 강조했다.
조연현(趙演鉉) 또한 그의 [문학개론]에서 '수필은 여러 문학 양식 중에서도 가장 그 형식이 자유롭다. 즉 수필에는 서정시적 정서나 감흥은 물론, 서사시(소설)적 구성이나 희곡적 대화, 그리고 비평적 판단 작용까지도 다 자유로이 이용할 수 있는 구성이다'라면서 수필문학이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다는 데에는 공감을 표시했다.
그러나 그는 곧이어 '...그렇다고 수필이 무형식적 무성격적인 것은 아니다. 서정시적 정서나 감흥을 가지면서 서정시가 아니고, 소설의 구성을 가지되 소설이 아니고, 희곡적 비평적 요소를 가지면서도 희곡도 비평(批評)도 아닌데 수필의 독자적인 양식이 있다'라는 견해를 밝혔다.
그의 이러한 견해는 '수필문학이 무형식의 문학' 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소설이나 시, 희곡 등 다른 문학 장르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것이지 수필이 전혀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즉 수필문학의 영역이 넓기 때문에 다른 문학 장르들에 비해 그렇다는 것이다.
구인환(丘仁煥)과 구창환(丘昌煥)도 그들이 공동 집필한 [문학개론]에서,
...수필도 구성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구성의 진행이나 방법에 별다른 제약을 받음이 없이 씌여진다. 여기에 수필의 무형식적 형식의 특성이 있는 것이다...
라고 하여 수필문학의 형식이 자유롭기는 하지만 전혀 제약을 받지 않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한편 김시헌(金時憲)은 그의 [대중수필과 본격수필]이라는 글에서 수필의 표현 형식과 호칭 문제를 연관시켜 언급하고 있는데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수필은 표현 형식이 자유롭고 대부분 1인칭의 호칭을 사용하고 있다. 다른 문학인 시, 소설, 희곡은 제작 형식이 고정될 뿐만 아니라, 호칭도 여러 가지로 사용되고 있다. 1인칭 호칭을 쓴다해도 그 1인칭은 작가 자신을 가리키지 않고 작품 속의 주인공을 지칭하고 있다.
그런데 수필과 잡문은 다같이 무형식의 형식이라는 자유로운 방법에 의해서 쓰여지고, 회칭도 함께 1인칭을 대부분 쓰고 있다. 꼬 그 1인칭이 작품 소그이 주인공이 아니고 작가 자신을 바로 가리키고 있다....
이와같은 수필문학의 특성이나 특질, 또는 수필의 본질, 그리고 여러 견해들을 종합해 볼 때 수필이 다른 여러문학 장르들에 비해 그 형식이 훨씬 자유롭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수필문학이 이처럼 형식에서 무척 자유롭고 '무형식의 문학'인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그 형식이나 제약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다.
2) 산문성(散文性)
흔히 수필을 가리켜 '산문(散文)문학'이라고 한다. 그리고 수필은 사실 산문으로 쓰여진 글이다.
이것은 대부분의 수필이 산문으로 쓰여졌기 때문에 나온 말이다. 또 수필이란 대부분 산문으로 쓰여지고 있다는 뜻도 된다.
물론 수필 중에는 운문(韻文)으로 쓰여진 것도 더러 있다. 이를테면 [일동장유가](日東壯遊歌)는 원래 운문체로 쓰여진 글이지만, 그 내용을 보면 일기체 형식의 기행문이다. 따라서 이 [일동장유가]는 운문 형식으로 쓰여진 수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수필이란 보통 산문으로 쓰여진 것을 말한다. 즉 적당한 길이의 산문으로 쓰여진 것이 수필의 일반적인 모습인 것이다.
조연현도 그의 [문학개론]에서 수필의 사눔ㄴ성에 대해,
...수필은 산문문학의 대표적 구성이라고 볼 때 수필의 범위는 거의 종잡을 수 없을 정도로 광범해진다...
...엄밀한 의미에 있어서 수필은 전문적 산문(학문이나 과학)이외의 창작적인 요소를 지닌, 모든 산문문학적 문장을 의미한다...
라고 했다.
다시 말해 수필은 산문으로 쓰여진 문학 구성이라는 뜻이다.
김구봉은 그의 [내력과 성격으로 본 수필의 문학성과 창조성]이란 글을 통해 수필이 역시 '산문문학'임을 강조하고 있다. 즉,
...정서나 사상을 상상의 힘을 빌어서 언어 도는 문자로써 그것을 표현하는 예술 작품을 문학이라고 한다면, 수필은 다른 문학 장르와 더불어 예술 작품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전설, 가요, 화술이 언어에만 의존한 구비문학(口碑文學) 또는 전승문학(傳乘文學)임에 대하여 수필은 시, 소설 등과 더불어 문자에 의한 기록문학이며, 그 기록문학 중에서도 순수문학의 영역에 든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수필은 어떤 정치적 또는 계몽적 동기에서 유발된 공리주의적 목적문학에 대하여 가장 순수한 예술적 충동에 의해서 형성된 문학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수필은 문학의 전 기능에 의한 구극적(究極的)인 순수성을 추구하며 사회적 사상적인 색채가 없이 작가의 순수한 예술적 욕구로써 형성되며, 한갓 흥미 위주의 대중문학에 대하여, 미적 정서에 호소하여 인간 탐구를 지향하는 문학인 것이다...
... 그런데 수필은 원래 독립된 문학적 형태로, 하나의 장르를 차지하지 못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다시 말하면, 수필은 각종 기록적 서술의 일보, 즉 속성을 이루고 있는 문학적 표현이거나 순수문학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형식적 기교에 불과했다. 그런데 수필은 여기에서 문학적 속성만을 독립시키고 자기 본연의 모습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형식적인 기교에서 탈피하여 인간 본연의 순수 의식과 정서의 흐름 속에서 새로운 산문의 창작을 시도함으로써 발생한 것이 수필인 것이다....
라고 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그는 '새로운 산문의 창작을 시도함으로써 발생한 것이 수필' 이라며 수필이 새로운 산문을 창작하기 위한 시도에서 발생된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기실 산문은 근대에 와서 발전했다. 또한 근대에 와서 이러한 산문을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새로운 시도에 의해서 태어난 것이 바로 수필문학이다.
옛날에는 서사시와 같은 운문이 널리 성행했다. 또한 옛날에는 음유시인(吟遊詩人)들이 운율에 맞추어서 시를 읊으면 그것을 듣는 사람들은 흡사 노래를 들을 때처럼 장단을 맞추거나 따라서 하기도 하고, 시의 운율에 맞추어 춤을 추기도 했다. 프랑스의 샹송이 원래는 프랑스의 음유시인들이 부르던 시에서 발달된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그런데 이러한 운문은 주관적이고도도 정서적이며 비논리적인 경향이 강하다. 이에 비해 산문은 보다 객관적이고 이지적(理智的)이며 논리적인 경향이 강한 특성을 지니고 있다.
다시 말해 산문은 근대에 와서 과학정신, 합리주의 정신이 등장하고 발전하면서 함께 발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권위적, 보수적, 폐쇄적인 사상이나 가치관이 지배적이었던 중세 시대에서 보다 개방적이며 과학적인 정신과 합리주의 정신 등이 확산되면서 등장하고 발전한 것이 바로 산문인 셈이다.
프랑스의 몽테뉴나 영국의 베이컨이 수필문학을 새롭게 탄생시키며 수필문학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것도 바로 이러한 시기(16~17세기)였는데, 이것도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또 몽테뉴나 베이컨의 수필 작품들이 사람들의 관심과 호응을 얻게 된 데에는 그들의 수필 박품들이 훌륭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와 함께 과학 정신과 합리주의 정신 등이 확산되던 시기와 '산문의 문학'인 수필이 잘 마자 떨어진 것도 큰 이유가 된다.
뿐만 아니라 산문은 그 자체가 과학 정신과 합리주의 정신에 바탕을 두고 있다. 물론 소설도 산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소설이란 옛날의 전설이나 서사시, 중세에 있어서의 이야기 등을 이어 받아 근대에 이르러 발달한 문학 장르로서 작가의 상상력에 의하여 구상되거나 어떤 사실이 각색된 주로 산문체(散文體)의 이야기를 말한다.
그러나 소설은 작가의 생활이 반영되어 있으되, 작가의 상상력에 의한 허구의 세계를 산문으로 표현하는 문학이다. 다시 말해 소설은 '픽션(fiction)의 이야기'인 것이다.
서양에서는 소설을 노블(novel), 혹은 로망(roman)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말들 속에서 '이야기'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프랑스의 문학자이자 평론가였던 띠보데는 그의 [소설의 독자]라는 글에서 로망이라는 말의 유래에 대해서,
,,,로망(즉, 소설)은 그 이름이 보여 주고 있는 것과 같이 승려 문학시대에 있어서 라틴어로 쓰여진 정규적인 적서에 대하여 속어(俗語)로 쓰여진 것을 의미하고 있다. 로망이라는 말이 결국 '이야기'를 뜻하게 된 것은 로망어, 즉 속어로 쓰여진 것 대부분이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것도 소설이 원래 '이야기'에서 파생되어 나온 것임을 보여 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소설(小說)이라는 한자어도 '시중(市中)에 일어나거나 들려오는 여러 가지 일이나 이야기 따위를 기록한 것'이라는 뜻에서 나온 말이다. 또한 옛날에는 소설책을 가리켜 흔히 '이야기책' 이라고 했는데, 이것도 소설과 이야기라는 말이 거의 같은 뜻으로 쓰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예부터 사람들 사이에 입에서 입으로 전해오던 여러 가지 이야기나 구전문학이 그대로 혹은 새로 다듬어지거나 보완되고, 여기에다 작가의 상상이나 허구, 가공 등이 보태어져 산문으로 구성하여 쓴 글이 바로 소설의 시초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특성을 지닌 소설과는 달리 수필은 자가의 생활을 직접 산문으로 구성하여 쓴 것이다. 즉 같은 산문으로 구성하더라도 소설과는 달리 작가의 상상력에 의한 허구가 배제된 거이 수필이다. 물론 최근에 와서는 수필에 있어서도 일부나마 허구가 용납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아직까지 소수 의견에 불과하며 이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다. 뿐만 아니라 수필에서는 근본적으로 허구가 인정되어 오지 않았던 것이 이제까지의 통례이다.
때문에 오창익(吳蒼翼)은 그의 [문장은 주제 의미화의 생명력 요소]라는 글에서 수필이 다른 산문들과는 다리 허구나 과장 등이 배제되고 진솔해야 함을 다음과 같이 역설하고 있다.
...그래서 여타 산문과는 다리 수필의 문장은 효과적인 의미 전달을 위한 솔직성과 진실성, 그리고 상징과 비유, 암시와 상상적 수사기능을 생명시 한다. 자가 자신이 하앙 자기 작품의 주인공이어야 하는 문학이기 때문에 지나친 논리나 주장, 과장이나 미화(美化)로써는 독자의 공감과 감동은 기대하기 어렵다....
또한 이현복은 그의 [수필의 문학성]이라는 글을 통해 수필은 산문의 문학이며 과학 정신과 합리주의 정신에 바탕을 둔 문학정신이 바로 산문정신이라고 역설하고 있다. 그 내용을 살펴 보면 다음과 같다.
흔히 현대를 '산문의 시대'라고 한다.
문학의 양식이 시대의 산물이라고 할 때 현대라는 과학문명의 시대에 적합한 기술양식은 산문이다. 과학정신에 가까운 문학정신은 산문정신이다. 조연현은 '산문정신ㅇ은 토의의 저인으로서 가공 보다는 사실, 주관보다는 지성에 더많이 기초한 합리주의적인 증명정신이다'고 하였다.
근년에 이르러 논픽션(non-fiction)이 많이 읽히고 있는 것은 이런 경향을 말한 것이다. 현대인은 인생 문제에 대하여 직접 그 인격의 체험과 진실을 직접 듣고 싶어하는 요구에 따른 것이라 하겠다. 이와 같은 경향에 편승하여 산문문학인 수필문학은 환영 받는 문학의 한 장르로 정착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아나톨 프랑스(Anatikefrance)는 '수필이 어느 날엔가는 온 문예를 흡수해 버릴 것이다. 오늘이 그 실현의 초기 단계이다' 라고 한 바 있다....
...수필문학은 산문문학이다. 산문정신은 리얼리티를 추구하는 비판정신이다. 여기에서 비판성이란 준엄하고 냉혹한 것이 아니다. 따뜻한 인간미를 풍기는 비판이다. 그 비판은 자유로운 유희의 자세와 분위기에서 이루어진다. 다시 말하면 비판의 기준이 율법이나 윤리적 목적을 벗어나서 오로지 변화하고 있는 그대로의 생활을 사랑하고, 인생의 기쁨을 누리고 싶은 순수한 충동에서의 비판이다...
결국 수필은 독특한 특성을 지닌 산문문학이며, 수필은 원칙적으로 산문으로 쓰여져야 하는 것이다. 더러 운문으로 쓰여진 수필도 있으나 이것을 수필의 본도로 보기는 어렵다. 어디까지나 예외적인 경우로 보아야 할 것이다.
(3) 자기 고백성(自己告白性)
수필은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한 자기 고백적 문학이다. 자신이 직접 보고 듣고 느끼고 겪고 생각한 것 등을 문학적으로 형상화시켜 표출해 놓은 것이 바로 수필인 것이다.
물론 소설이나 시, 희곡 등도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쓰여지는 수가 많다. 그만큼 문학 작품을 쓰는데 있어 체험은 아주 중요하고도 필요한 것이다. 문학 작품과 체럼은 서로 떼어서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나아가서는 체험은 모든 문학의 근원이 된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자연에 바탕을 두고 있듯이, 모든 문학은 체험에 그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체험에 바탕을 두지 않은 문학 작품이란 존재할 수도 없다. 인간이 자연을 떠나서 존재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문학 또한 체험 없이는 존재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소설이나 시, 희곡 등의 문학 장르에서는 작가의 체험이 직접적으로 나타나기보다는 다시 여과되고 변형되어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나는 수가 많다. 즉 이러한 문학 장르들에 있어서는 작가가 자신이 겪은 체험에다 작가 나름대로의 상상이나 허구적 구성들을 더하여 새로운 형태의 작품세계를 펼쳐 보이는 것이 일반적이다.
나아가서는 자신이 겪은 것과는 전혀 다른 세계를 상상이나 허구적 구성 등을 통해 표출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도 그 작품 속에는 작가가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겪은 수많은 체험들이 알게 모르게 개입되어 있기 마련이다.
특히 소설이나 희곡 등에 있어서는 작가의 의도나 필요성 등에 따라 다시 변형되고 이에 적합한 등장인물들이 설정된 후 그들의 행동이나 모습, 체험 등으로 나타난다. 즉 자가의 체험이 원형 그대로 작품 속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변형된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이런 문학 장르의 특성이다.
이에 비해 수필에 있어서는 작가의 체험이나 모습, 또는 행동이나 사상등이 사실 그대로 적나라하게 나타난다. 다시 말해 작가의 체험이나 작가의 여러 가지 모습이 우너형 그대로 작품 속에 그려져 나타나는 것이다. 이것은 수필이 작가의 체험을 직접적으로기록한 '자기 기록의 문학'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수필이 자신의 삶과 사상을 진솔하게 고백하는 '자기고백의 문학'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때문에 수필에서는 소설이나 희곡 등에서처럼 작가가 자신의 체험을 여러 가지 형태로 변형시키거나 확대, 축소하여 표출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또 소설이나 희곡 등에서처럼 등장인물들을 통해 자신의 체험이나 모습, 사상 등을 간접적으로 그려내지도 않는다.
그리고 이것이 수필문학의 특성이요, 수필 작법에 있어서의 기본 수칙이다. 만일 이를 무시하고 쓰여지는 수필이 있다면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수필이라고 할 수 없다.
또한 수필은 이처럼 자신의 체험이나 삶, 사상, 느낌 등을 가식없이 진솔하게 고백하는 문학이기 때문에 그것은 읽는 독자에게 신선한 감동을 선사한다. 그리고 이것이 수필문학이 지닌 특성이요, 수필문학의 가치를 더욱 높여 주는 바탕이다.
그래서 김진섭도 그의 [수필의 문학적 영역]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고백하는 심경(心境)이 고결하면 할수록 그 수필의 문학적 생명이 오랜 것은 두말할 것이 없다. 수필에 있어서 중요한 특징이 되는 것은 숨김없이 자기를 말한다는 것과 인생사상(人生事象)에 대한 방관적 태도, 이 두 가지에 있을 따름이요 이것만을 기초로 삼고 붓을 고요히 듦에 제목 여하(如何)는 물을 필요가 없다...
장백일도 그의 [고뇌와 창조]라는 글을 통해 수필이 '자기 고백의 문학'이요, '자기 체험의 진솔한 밝힘' 임을 강조하고 있다.
한 편의 수필은 작가의 마음을 진정으로 대변해 준다. 진솔한 인간체험에의 언어적 형상화가 그 자신을 진심으로 드러내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필은 곧 작가의 마음이라 함도 그 소이가 여기에 있게 된다. 이 언어적 수필 미학에서 작자의 창작 심리의 번득임을 읽게 될 때 우리는 그이 수필의 특질을 파악하게 될 뿐만 아니라, 그 표현을 통해 작자가 무엇을 구하고 호소하는가를 듣게 된다...
...흔히 수필을 퍼스널 노트로서의 체험의 자조문학(고백문학)임을 강조한다. 이 또한 생명에의 의의있는 가치평가, 즉 새로운 의미 부여로 집약되어진다. 그 점에서 수필은 무엇을 다루었건간에 어디까지나 인간의 영혼을 울려주는 생명의 구경적인 의미 반론과 표현에의 인간학임을 전제한다. 그러기에 수필은 인간 체험에의 언어적 의미화로 시의 가치있는 시사가 아닐 수 없다....
...이제 나(인생)와 수필이 따로 있음이 아니다. 나 자체 속에 수필이 요구됨에 '수필 쓰는 일'이 곧 나의 비판적 고백으로서의 자기 실현을 꾀해가는 그 인간 작업임을 깨닫기에 이른다. 여기에 전심전력으로 수필을 사랑해야 하는 성실한 생활태도가 무엇보다도 절실하게 요청된다. 그 생활태도는 이미 밝힌 바 참(試)이다. 즉 참(試)으로 참(眞)을 찾는 삶이다...
이현복도 그의 [수필의 문학성]에서 수필문학이 작가 자신의 표출이며 자기 괙적 문학임에 동조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수필문학에서는 작가가 직접으로 독자에게 보내는 전달이기 때문에 경험을 전달하는 소설과 다르며 상연과 행위를 강조하는 희곡과 다르며 기분과 감정을 표현하는 시와 다르다고 하였다.
함께 나눈 경험, 목격한 행위, 엿듣는 감정이 수필 문학의 특징이다. 따라서 수필문학에서의 중요한 요소는 주제다. 독자는 표현기교와 수법보다는 작가가 전달하려는 의도에 더 흥미를 갖는 것이다. 수필문학 작품은 작가의 심적과정이며 작가 자신의 표출이며 독백이다. 그러나 그 독백은 작가 한 사람의 독백이 아니요, 여러 사람들에 대한 독백이다.
독백이 독백으로 끝난 작품은 메아리 없는 산울림과 같아서 수필의 경지로 승화될 수 없다. 한 사람의 독백은 다른 사람의 그것과 혼연일체가 되어 대화의 독백이 되어야 한다...
C.카운터 쿨웰은 수필이 작가 자신의 솔직한 표출이며 자기 고백이라는 것을 다음과 같은 한마디로 압축하여 나타내고 있다.
'수필에서의 작가는 작품 속에 함축되어 있다.'
이처럼 수필은 작가 자신의 솔직한 표출이며, 진지한 자기 고백이다. 나아가서는 자신의 삶을 경건히 되돌아 보면서 참회하고 각성하는 문학이다. 도한 이것이 수필문학의 특성이자 참된 가치이다. 그리고 수필문학이 지닌 위대한 힘이다. 독자를 감동시키는 '보이지 않는 힘'도 바로 여기에서 나온다.
그래서 수필에서의 '자기 고백성'은 단순한 독백이 아니라 천주교에서의 '고백성사(고해성사)'와 같이 거룩함마저 있는 것이다.
(4) 광범성(廣範性)
수필문학의 범위는 참으로 넓다. 소설이나 시, 희곡 등 다른 문학장르들보다도 그 범위가 훨씬 더 광범한 것이 바로 수필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소설이나 시, 희곡 등은 각기 그 나름대로의 독특한 형식에 의해 쓰여진다. 또한 이러한 문학 장르들은 각기 정해져 있는 형식이나 제약을 무시하거나 거부할 수 없고 최소한도로라도 받아들여야 한다.
때문에 이러한 문학 장르들은 각기 그 형식에 얽매이거나 제약을 받아 그 장르적 범위가 아무래도 좁아질 수밖에 없다.
이에 비해 수필은 그 형식이나 제약 등에 구애받을 필요가 없는 문학이다. 오히려 어떠한 형식이나 제약 등으로부터 구속되지 않고 자유롭게 쓰는 것이 수필이 지닌 커다란 특성이요, 매력일 만큼 자유로운 것이 수필문학이다.
따라서 수필문학의 범위는 그만큼 더 넓어질 수밖에 없다.
게다가 수필은 문학의 다른 여러 장르들보다도 그 제재(題材)가 다양하고 광범위하다. 우리의 삶이나 우리 주변의 모든 것들이 수필의 제재가 될 수 있을 만큼 수필의 제재는 무궁무진하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흔히 보고, 듣고, 겪게 되는 모든 일들의 아주 사소하고 평범한 일까지도 얼마든지 수필의 제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또 그런 만큼 수필문학의 범위는 더욱더 넓어진다. 물론 소설이나 시, 희곡 등도 제재의 선택에 있어서 제한이나 구속은 없다. 이런 문학 장르들도 작가의 의도나 필요성 등에 따라 우리 삶의 모든 부분에서, 또 아주 사소하고 평범한 일들 속에서도 제재를 선택해 내고 이를 작품화 할 수 있다.
그러나 소설이나 시, 희곡 등은 각기 정해져 있는 형식이나 제약을 회피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 작품 구성상 정리나 압축, 재구성, 허구의 삽입 등이 많이 요구되기 때문에 자연히 제재의 선택 폭 또한 좁아지기 쉽다.
이런 점들을 볼 때 소설이나 시, 희곡 등을 도로가 있어야 달릴 수 있는 자동차나 레일이 있어야 달릴 수 있는 기차에 비유한다면 수필은 항공을 자유롭게 날 수 있는 새나 비행기에 비유할 수 있다. 물론 비행기도 여객기 같은 경우에는 정해진 항로에 따라 가는 것이므로, 여기서 말하는 비행기란 전투기와도 같이 이런 제한된 항로에 구애받지 않는 비행기를 뜻한다.
수필의 종류만 살펴보더라도 문학성을 갖춘 문예수필을 비롯하여 일기문, 기행문, 서간문(書簡文), 감상문, 칼럼, 전기, 자서전, 권두언 등 많은 글들이 수필의 범주에 속한다.
여기에다 옛날에 쓰여진 수필 형식의 각종 글들까지 포함시킨다면 수필의 종류나 범위는 더욱 다양하고도 광범해진다.
그래서 '국문학 산문(散文) 중에서 소설, 희곡 등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이 수필이다' (우리 어문학회[국어학개론])라는 견해마저 있을 정도로 수필의 영역은 실로 넓다.
[세계문예강좌 문학개론]에서도 수필의 영역이 참으로 넓음을 역설하고 있는데,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수필을 산문문학의 대표적 양식이라고 볼 때 수필의 범위는 거의 종잡을 수 없는 정도로 광범위해진다. 그것도 학문이나 과학에 포함되지 않은 모든 일반적 산문, 가령 문학평론, 수상, 일기, 서한, 자서전, 전기, 격언, 각종 의견 등 기타의 창작적 요소를 지닌 일체의 산문 문학적 문장을 총칭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엄밀한 의미에 있어서 수필은 전문적 산문(학문이나 과학) 이외의 창작적인 요소를 지닌 모든 산문 문학적 문장을 의미한다....
김진섭 또한 그의 [수필의 문학적 영역]이란 글에서 수필의 외형적 광범성과 제재의 다양성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 내요의 일부만 살펴보면 이렇다.
...분망(奔忙)중에 쓰인 일편(一片)의 서간(書簡), 남몰래 적힌 일업(一業)의 일기라도 그 문장 속에 필자 그 사람의 생명이 약동하고 있기만 하면 그것이 훌륭한 수필문학 일 수 있는 것은 물론이요...
...그 제재 역시 그것이 바드시 '문학적인 것'일 필요는 조금도 없는 것이니, 여기 가령 과학자가 과학을 말하든, 정치가가 정치를 말하든, 혹은 여행기(旅行記)가 만연(漫然)한 견문(見聞)을 말하든 여하간에 말하는 사람이 누구임과 말하는 대상이 무엇임을 막론하고 말하는 그 사람의 심경이 전인생(全人生) 위에 확충(擴充)되어 있기만 하면 그 말은 반드시 문학적 가치를 갖게 되기 때문이다....
...수필은 무엇이든지 담을 수 있는 용기(容器)라고도 볼 수 있을지니 무엇을 그 속에 담든 그것은 오로지 필자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에 맡길 수밖에 없고 그래서 수필은 그 담는 내용과 그것을 요리하는 필자에 준해서 그 취향이 여러 가지로 변화할 것은 또한 물론이다...
...모든 사람에게서, 그리고 모든 영역에서 볼 수 있는 이 수필의 종별(種別)이 변화무쌍할 것은 이의 당연한 일이다...
일부에서는 연설집이나 설교집, 또는 철학론, 종교론, 과학론 등도 수필의 범주 속에 포함시키기도 한다. 그리고 이런 것들을 가리켜 '종교적 수필'이니 '철학적 수필'이니 '정치적 수필'이니 하고 부르기도 한다.
이것도 수필의 영역이 넓고 외형적으로나 제재상으로나 자유스럽고 폭넓은 문학임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러나 수필의 영역이 이처럼 넓고 외형적, 제재상으로 아주 자유스럽고 폭넓다고는 해도, 그 내용이나, 구성, 문체, 논리성 등이 부족하고 문학성, 작품성이 결여되어 있으면 결코 수필문학 작품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런 것들은 단지 신변잡기나 기록문, 설명문, 비망록, 신상보고서, 또는 낙서 따위에 불과할 뿐이다.
그래서 수필은 그 영역이 아주 넓고 수필처럼 보이는 글들이나 수필이라고 스스로 주장하는 글들은 많지만 정말로 문학적, 예술적 가치를 지닌 '진짜 수필'이 적은 것도 사실이다.
(5) 창조성 (創造性)과 문학성 (文學性)
수필은 다른 문학 장르들과 마찬가지로 창작 예술이다. 따라서 수필은 각 작품마다 고유의 개성이나 독특한 특징이 있어야 하고, 문학으로서의 새로운 면이나 시도도 있어야 하며 문학적인 가치도 지니고 있어야만 한다. 즉 수필은 순수한 창작 예술인 만큼 그에 걸맞는 창조성과 문학성, 또는 예술성을 충분히 지니고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만일 이러한 것들이 결여되어 있다면 그것은 수필이 아니라 잡문에 불과한 것이다. 수필이라는 이름으로 쓰여진 많은 글들이 진정한 수필로서 평가받지 못하고 고작 잡문 대접을 받는 것도 수필이 지녀야 할 창조성과 문학성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수필에 있어서도 창조성과 문학성은 꼭 필요하고도 중요한 것이다. 물론 수필다운 수필, 멋지고 훌륭한 수필 작품이 되기 위해서는 좋은 문장이나 훌륭한 구성, 예리한 관찰력, 상념의 넓은 폭과 깊은 여과 과정, 유머와 해학 등 여러 가지가 요구된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과 함께 창조성과 문학성도 꼭 필요한 것이며, 그 비중 또한 크다. 게다가 좋은 문장이나 훌륭한 구성 등도 넓은 의미에서 보면 창조성과 문학성의 범주에 속한다.
특히 좋은 수필을 쓰기 위해서는 진부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다양한 시각으로 사물을 예리하게 살펴보고, 깊은 고뇌도 있어야 하며,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창조적 사고(思考) 또한 충분히 갖추고 있어야만 한다. 그래야만 독창적이고도 문학성이 높은 수필 작품을 빚어낼 수 있다.
즉 고정관념의 파괴와 창조적 사고가 충분해야만 수필다운 수필을 쓸 수 있는 것이다. 또 문화 예술이란 원래 고정관념을 파괴하고, 새롭고 독특한 사고로서 새것을 창조해 내는 행위이다.
그래서 미국의 시인 에머슨도 일찍이 '새로운 문화예술은 옛것을 파괴한다'고 했다. 또 프랑스의 자가 발자크도 '문화예술의 사명은 자연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새롭게 표현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사실 평범한 사고나 고정관념, 또는 기존의 것들을 그대로 답습하거나 모방하려는 자세로서는 좋은 수필을 쓸 수 없다. 또 이렇게 해서 쓰여진 수필(엄밀한 의미에서는 수필이라고 하기도 어렵지만)은 독자들의 공감이나 갈채도 얻지 못하는 법이다. 때문에 좋은 수필, 독자들의 공감이나 갈채를 받을 수 있는 수필을 쓰기 위해서는 작가 자신이 우선 창조적 사고력이 있어야 한다. 또 이를 위해서는 의식의 변화와 '의식의 담금질'이 계속되지 않으면 안된다.
수필을 쓰는 kr가 자신부터 변해야 창조성과 문학성이 뛰어난 수필 작품을 쓸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평범하고도 흔한, 그저 그렇고 그런 잡문밖에 쓸 수 없다.
또한 수필을 쓰는 작가의 창조적 사고와 의식의 변화는 곧 작품의 창조성과 문학성으로 이어져 나타난다. 그리고 수필 작품에 있어서의 창조성과 문학성도 자연히 훌륭하기 마련이다. 반면에 창조성이 결여되어 있으면 자연히 그 작품의 문학성도 떨어진다.
이 점에 대해 김구봉은 그의 [내력과 성격으로 본 수필의 문학성과 창조성]에서 다음과 같이 잘 설명해 주고 있다.
...문학성이란 소재의 정시화요, 주제의 효율적인 이미지화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창조성이란, 이 문학성에 의해 그것이 문장으로 형상화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수필의 생명은 문장이라할 만큼 창작 기능과 문장과는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수필의 문학성은 곧 창조성이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윤오영(尹五榮)은 일찍이 수필의 창조성과 문학성을 곶감에 비유하여 설명한 적이 있는데, 그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수필은 곶감에 비유될 것이다. 감나무와 고욤나무는 똑같아 보이지만은 감나무는 감이 열리고, 고욤나무에는 고욤이 열린다. 고염과 감은 별개다. 소설이나 시는 잘못되어도 그 형태로 보아 소설이요 시지, 다른 형태의 것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잡문은 감나무롸 고욤나무가 서로 다르듯,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러면 곶감이란 어떤 것인가
감나무에는 아름다운 열매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그 푸른 열매가, 그러나 그 푸른 열매는 풋감이다. 늦은 가을의 풍상(風霜)을 겪어 모든 나무에 낙엽이 질 때 푸른 하늘 찬서리 바람에 비로소 붉게 익은 감을 본다. 감은 아름답다. 이것이 수필이다. 수필의 찬란하고 화려함을 말한다. 그러나 감은 곧 곶감이 아니다. 껍질을 벗겨야 한다. 껍질을 벗겨 찬서리 내리는 데서 말려야 한다. 그리고 여러 번 손질해야 한다.
그러면 당분이 겉으로 나타나 시설( 雪)이 거기에 앉는다. 만일 그 감이 덜 익었거나 상했으면 시설은 생기지 않는다. 시설이 잘 앉은 다음, 그것을 여러 가지 형태로 접는다.
수필은 이렇게 해서 만든 곶감이다...
장백일도 그의 [고뇌와 창조]라는 글에서 수필에서의 창조성과 문학성은 아주 중요한 것이며 이것은 작가의 깊은 고뇌와 창조적 고통에서 비롯된다고 역설하고 있다. 즉,
...그러기에 수필은 구상화(具象化)에의 산문이기도 하다. 또한 여기서 말하는 형상화란 단순한 현실의 재현이 아니라 창조(창작)를 뜻한다. 즉 정서와 상상과 사상을 하나로 융합시키는 창작성을 말한다. 수필은 이데올로기를 위한 선전도구도, 무엇을 위한 계몽 수단도 아닌 오직 인생의 본질적인 나타냄으로서의 창조이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에 수필의 어려움이 있다고 여긴다. 수필이 정서와 상상과 사상 속에 용해되는 문학성을 떠나는 순간, 그것은 한낱 무용의 공염불이나 불모의 사막으로 화하는 신변잡기가 아니면 신변잡사로 추락하고 만다. 거기엔 수필적 진통과 고뇌가 없어서이다. 그 점에서 작자의 수필작업에의 진통과 고뇌는 수필 창작에의 어머니이다.
위대한 생명이 위대한 진통에서 태어나듯 좋은 수필, 훌륭한 수필은 소재를 작자의 정서와 상상 속에서 여과시키는 창작에의 진실한 진통과 고뇌로부터 피어난 꽃이다.
수필의 감동은 그로부터의 결과이다...
...작자의 개성이 갖는 창작은 그 개인으로부터 열리는 존재에 대한 새로운 개명(開明)이요 해명이 아닌가. 그 창작성이 언어 예술화로 꾀해질 때 그것이 바로 수필의 문학성으로 이어진다. 그러기에 진통과 고뇌의 창작성은 수필의 문학성도 더욱 진지하게 고취시킨다. 그래서 진정한 수필은 고뇌로부터 탄생되어진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들을 통해 볼 때 수필가나 수필을 쓰려는 사람들은 문학적 창조를 위한 고뇌와 고통을 더욱 깊이 겪지 않으면 안된다. 또 이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기꺼이 받아들일 때 창조적 사고의 폭이 넓어지고, 또 깊어질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다시 작품의 창조성과 문학성을 높이고 정말 좋은 수필, 수필다운 수필로 태어나게 한다. 창조성과 문학성이 없는 글은 수필도 아니며 죽은 글이다.
이철호 님의 '수필창작의 이론과 실기' 중에서
수필이란 말 대신 '에세이(essay)'라는 말은 서양에서 온 외래어다. 그래서 서양에서는 수필을 가리켜 보통 에세이라고 한다. 그런데 영어인 essay의 원래의 뜻은 '시험'이나 '계획'. 또는 '시금(試金)'이다.
그리고 이 essay는 라틴어인 엑시게레(exigere)에세 다시 파생된 것이다.
라틴어인 이 'exigere'는 '계량(計量)하다. 조사하다, 맛보다' 뜻이다. 또한 고대 불어인 'essai'와 그 어원(語原)이 같은 셈이다.
서양에서 '에세이'라는 말을 가장 먼저 쓰기 시작한 사람은 프랑스의 유명한 사상가였던 몽테뉴(1533-1592)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몽테뉴는 원래 법률을 전공한 법률가였다. 그래서 그는 프랑스의 보르도 법원에서 법관으로 근무했다.
그러나 그는 법관 생활에 싫증을 느끼고 법관직에서 물러났다. 그리고는 지신의 성(城)에 은거하여 사색과 저술 활동에 몰두했다. 이때 그는 저 유명한 [수상록](隨想錄)을 완성하여 세상에 내놓았는데 바로 이 '수상'이 불어로 'Les Essais'인 것이다. 그리고 이 [Les Essais]가 이 세상에 처음 나온 때는 1580년이었다.
이 [Les Essais]의 서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이 실려 있다.
이 글은 애초부터 나의 집안 일이나 사사로운 일들을 말하고자 하는 것 이외의 다른 어떤 목적이 없다....
...만일 내가 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좀더 좋은 평을 얻고자 하는 생각이 있었다면 아마도 나는 내 스스로를 좀더 꾸미고 조심스럽게 살펴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나를 생긴 그대로 도 자연스러우면서도 평범하고 꾸밈이 없는 그리고 특별난 것도 없는 나를 보아 주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내가 그려 놓은 것은,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나의 결점들까지도 있는 그대로 나온다. 또한 터놓고 보여줄 수 있는 범위 내에서 타고난 성품 그대로인 내 모습을 내놓는다.
...나는 나 자신의 모든 것을 기꺼이, 그리고 통째로 그려 놓았음을 장담한다.
이 몽테뉴의 'Les Essais'의 서문에서도 수필의 본질과 특성이 드러나 보인다. 즉 가식이나 꾸밈없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진솔하게 그려내는 것이 바로 수필임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몽테뉴는 그 후 이 'Les Essais'의 서문에서도 수필의 본질과 특성이 드러나 보인다. 즉 가식이나 꾸밈없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진솔하게 그려내는 것이 바로 수필임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몽테뉴는 그 후 이 'Les Essais'를 수정 보완하였으며, 그가 세상을 떠난지 3년 만인 1595년에는 'Les ais'의 결정판이 발행되었다. 이보다 2년 가량 늦은 1597년에 영국의 유명한 정치가이자 철학자이며 세상일에 밝은 문필가이기도 했던 베이컨(1561~1626년)은 수필집 [The Essays]를 출간했다.
이것이 바로 영국에서 최초 'essay'라는 말을 사용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The Essays'에서 베이컨 수필의 개념, 또는 특성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세밀하기보다는 시사적으로 쓴, 짤막한 비망록의 일부를 나는 에세이라고 불렀다. 비록 이 말은 근래의 것이지만, 그 내용은 이미 옛날부터 존재해 왔다. 이를테면 세나카(B.C.4~A.D.65)의 [Lucilius에게 보내는 서간문]과 같은 것이 이에 해당된다. 왜냐하면 이 [Lucilius에게 보내는 서간문]도 자세히 살펴보면 일종의 '명상록'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베이컨의 이 [The Essays]를 보면 이 세상에서의 처세술이나 성공 방법 등에 관한 글들이 많은 것을 보게 된다.
이를테면 이 책 속에 실린 [학문에 관하여 (of studies)]라는 수필을 보면
...어떤 책들은 맛이나 보아야 하고 또 어떤 책들은 삼켜 버려야하며 그리고 일부 소수의 책들은 잘 씹어서 소화시켜야 한다...
는 등의 말로써 야망이 큰 젊은이들에게 책을 대하는 방법과 처세술을 이야기해 주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의 [시민과 도덕에 관한 수필 또는 충고](Essays or Counsels, Civil and Moral)라는 수필은 그 제목을 통해서도 느낄 수 있듯이 어떤 충고를 하기 위해서 쓴 글이다. 즉 그 당시 정치가와 궁정인 등에게 각기 적합한 처세술과 성공 방법 등을 충고하고 제시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 글을 썼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수필들은 높은 문학적 가치도 지니고 있다. 그래서 탁인석은 그의 [수필의 금자탑-프란시스 베이컨론(論)]이란 평론에서 베이컨의 작품세계에 대해서 이렇게 평했다.
...이러한 지적인 관심과는 달리 영국 문학사에 가장 중요한 책 중의 하나가 되는 Essays가 있다. 초판은 1597년에 나왔는데, 거의 20년 동안 자기의 뛰어난 능력을 이 세상에서 출세하는 방법에 쏟아 왔다. 그의 결론은 짧고 요령있는 금언인 경구의 형식으로 정착되었다. 'of studies', 'of Discourse' 혹은 'Speech-making' 따위 소재에 대한 이념을 분류하지도 않았고, 또 따로따로의 사상을 현재의 사건이나 자신의 경험에서 해명 혹은 예시하지도 않았다.
문장은 직재적이요 박력이 있다. 완전한 수사가임을 보여준다. 신축성이나 현대미는 없을지라도 특수한 사상을 전달하는데 박력과 함축성에서 견줄 데가 없다.
라틴 낱말을 많이 썼지만 두 언어의 구조적 차이를 분명히 알고 있기 때문에 부피가 큰 영국 산문이 허술한 긴 문장으로 쓰일 때는 그는 생소하지만 짧고 명랑하게, 또 굳게 이어지는 문장의 유형을 동시에 구사하였다. 미문가의 기상(conceit)이나 지나치게 복잡한 심성을 거부하지만 잘 배치된 수사요 사상을 빛내고 상상의 빛을 더하고 매력을 줄 줄도 알았다…
…다른 어느 작가에서도 우리는 그렇듯 사고와 실용적인 지혜로 가득찬, 간결한 금언들을 찾아볼 수 없다. 그의 많은 말이 격언으로 통하게 되었다. 그의 모든 저술 가운데서 인간적 관심이 가장 훌륭하게 나타난 것은 그의 수필집이다…
1597년에 초판 발행된 베이컨의 「The Essay」는 그 후 1612년과 1625년에 각각 수필 작품들을 추가로 수록하여 발행되었다. 그래서 원래는 10편이었던 수필 작품수가 1625년에는 다시 배 이상으로 늘어난 58편에 이르렀다. 이와 함께 추고(推敲)도 거듭하였다.
이렇게 추고를 거듭하고 수필 작품수를 늘려서 수록한 1625년의 제3판에 대해 탁인석은 다시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
…제3판에서는 'of Gardens'(정원에 관하여)와 같은 essay에서 은퇴의 편함을 말해준다.그의 수필집에 수록된 수필들은 모두 문체가 지극히 간결하고 치밀하여 경구가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것은 과학자에게서나 기대할 수 있을 만큼 그 배열이 정확하고 이론이 정연하다. 그 점에서는 프랑스의 몽테뉴(Montaigne)의 글이 유쾌하고 흉금을 터놓을 만큼 친밀감을 주는 것과는 좋은 대조가 된다. 초판 발행 후에야 그는 프랑스의 몽테뉴의 Essay를 알게 된 것 같다.
몽테뉴는 역사상에서 자기의 개인적인 추억과 의견과 환상이 남의 관심거리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첫 사람이다. 그의 Essay(1580)(필자: 앞서 언급한 몽테뉴의 『Les Essais』뜻함)는 어느 나라에서고 르네상스의 가장 중요한 책 중의 하나요, 또 개인적인 수필이라는 새 유형의 문학장르의 기원이기도 하다…
몽테뉴와 베이컨,
이들은 서로 태어나서 자란 나라도 다르고 문학적 교류도 별로 없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수필작품 세계도 사뭇 다르며, 사상이나 인생관도 다른 면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모두 서양에서 '에세이'라는 새로운 문학장르를 개척한 수필문학의 개척자요, 수필문학의 금자탑을 쌓은 위대한 '에세이스트(essayist)'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