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판에 새긴 이름, 편액
독립운동에 앞장선 실천유학자,
회당(晦堂) 장석영(張錫英)
어느 덧 여름 휴가철의 막바지, 무더위가 한풀 꺾이는 8월이 다가왔습니다. 8월 15일은 우리나라가 일본으로부터 광복된 것을 기념하고,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경축하는 광복절이 있는 날입니다. ‘역사를 잊는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는 나라를 위해 헌신했던 분들을 기억하고 늘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합니다.
이번 호는 일제의 침략으로 나라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시종일관 유교적 틀을 고수하며 파리장서 초안을 작성하고 유림들의 파리장서의거를 이끌어 내는데 큰 역할을 했던 회당(晦堂) 장석영(張錫英,1851~1926)이 만년에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지은 회당 편액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주문팔현(洲門八賢) 가운데 한 사람, 회당 장석영
회당 장석영이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지은 녹동서당(甪洞書堂)
(출처: 한국국학진흥원_기탁문중특별전_인동장씨 남산파문중)
장석영(張錫英,1851~1926)은 1851년 경북 칠곡군 약목면 각산리에서 장시표(張時杓)와 청주정씨 사이에서 3남 1녀 중 삼남으로 태어났습니다. 본관은 인동(仁同)이며, 자는 순화(舜華), 호는 추관(秋觀) 또는 회당(晦堂)입니다.
의정부 우참찬을 지낸 여헌 장현광이 그의 6대조입니다. 부는 가선대부 형조참판을 지낸 운고(雲皐) 장시표(張時杓)입니다. 장석영은 위로 두 형이 있었습니다. 맏형 과재 장석신(張錫藎,1841~1923)은 비서원승을 역임하였고, 둘째형 담암 장석훈(張錫勳,1848~1870)은 23세의 나이로 요절하였습니다.
그는 혼인 후 처가에 머물며 수학하였으며, 20세에 이르러 극중(極中) 김건호(金建五)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습니다. 1878년 봄, 회연서원(檜淵書院)에서 선비·유생들이 모여 학덕과 연륜이 높은 이를 주빈으로 모시고 술을 마시며 잔치를 하는 향촌의례의 하나인 향음주례에 참석한 뒤부터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였습니다.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과 이승희, 그리고 이두훈·이덕후 등과 함께 교유하며 학문을 닦았습니다. 1880년 북청부사(北靑府使)로 도임하는 부친 장시표를 따라가 「북정록(北征錄)」을 지었으며, 1882년 5월 자산(慈山)으로 유배 가는 부친을 배행하는 등 견물을 넓혔습니다.
1886년 한주 이진상이 떠난 뒤, 장석영은 허유·곽종석·이승희 등과 함께 『한주선생문집』(1895)·『이학종요』(1897)·『사례집요』(1906) 등의 간행에 참여하였습니다. 1897년 도산서원에서 『한주선생문집』이 배척되고, 1902년 상주 도남서원에서 『한주선생문집』이 불태워지는 사건이 일어나면서 한주 문인의 결속은 더욱 강화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이른바 ‘주문팔현(洲門八賢)’이 형성되었습니다. 학문적 결속은 물론, 혼맥으로 연결된 공고한 관계망을 이루었습니다.
파리장서를 만들어 조선의 독립을 청하다
1919년 독립선언에 이어 3.1운동이 전개되자, 유림들도 독립청원운동을 전개했습니다,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는 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낸 유림들의 이 의거는 ‘파리장서운동’ 혹은 ‘유림단 의거’로 불립니다. 장석영은 독립청원운동의 전개 과정에서 독립청원서의 작성과 서명에 참여했습니다.
장석영의 『흑산일록』에 실린 독립청원서의 내용 중 일부를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한국유생 장석영과 곽종석 등은 파리 회중에 절하며 글을 올립니다. 종석 등은 망국의 비천한 유생으로, 남은 목숨에도 죽지 못하고 십년 동안이나 혀를 감추며, 감히 천하의 사람들이 듣지 못하게 한 것은 타인의 압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말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니 감히 품고 있던 마음을 만국평화회의 자리에 스스로 펴지 않겠습니까? 종석 등이 가만히 듣건대 파리 만국 회의에서는 폴란드 등 모든 약소국의 독립권을 허락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한국의 사정만이 유독 여러분들의 긍휼에 미치지 못하게 되었으니, 이것은 진실로 태양이 하늘에 떠서 만물을 모두 비추는데도, 유독 동이 아래는 비추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장석영이 집필한 독립청원서 초안은 외교문서로는 ‘과격’하여 최종안으로 채택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장석영은 유림 대표로서 김창숙 등과 137명의 서명을 받아 파리장서의거로 이끌어 내는데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1980년 / 훈장:25.5×19.2×3.5, 훈장증:30.0×21.1 / 인동장씨 남산파 회당고택
(출처: 한국국학진흥원_기탁문중특별전_인동장씨 남산파문중)
내면이 아름답고 행실이 바르다
회당(晦堂) / 45.5×75.9 / 인동장씨 남산파 회당고택
(출처: 한국국학진흥원_기탁문중특별전_인동장씨 남산파문중)
남송의 학자인 유자휘(劉子翬)가 주희의 자를 원회(元晦)라 지어 주며 남긴 축사에 “나무는 뿌리에 감추어야 봄의 자태가 찬란히 펴지고 사람은 몸에 감추어야 신명이 안에서 넉넉하다.”라고 하였다. 장석영도 자신의 호를 회당이라 하며 회자를 취하였습니다.
회당명(晦堂銘) / 22.8×41.2 / 인동장씨 남산파 회당고택
(출처: 한국국학진흥원_기탁문중특별전_인동장씨 남산파문중)
<회당명 晦堂銘>
나무는 뿌리에 감추니
봄날에 용모가 빛나게 펼쳐지도다
사람은 몸에 감추니
신명이 내면에 아름답도다
예전부터 회보가
이 격언을 지녔도다
드러나지 않는 가운데서 날로 닦아
우리 후인들을 열어 줄지어다
지금에 나의 벗이여
이 말에 종사할지니
있어도 없는 듯이 꽉 차있어도 빈 듯이 하여
맹세코 스스로를 속이지 말지어다
나에게 처마에 붙일 명銘을 재촉하기에
이에 힘써 주노니
내 그 요점을 말하건대
다만 홀로 있을 적에도 삼가 함에 있도다
경자년 중춘일에 포산 곽종석이 짓다
歲庚子 仲春日 苞山 郭鍾錫 題
木晦於根
春容燁敷
人晦於身
神明內腴
粤昔晦父
佩此格言
闇然日修
啓我後人
今者吾友
從事於斯
若無若虛
矢無自欺
促余銘楣
于以顧勗
余曰其要
只在謹獨
장석영이 ‘회당’이라 이름한 편액에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1846~1919)이 명을 지어 붙인 현판입니다. 면우 곽종석은 1919년 3.1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영남 유림을 이끌고 전국의 유림과 연합하여 ‘파리장서운동’을 회당 장석영과 함께 주도한 인물입니다. 아래 내용으로 보아, 면우 곽종석이 회당 장석영의 수양공부를 높이 평가하고 있으며, 더욱 더 함양공부에 매진할 것을 당부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일본으로부터 독립한 8월의 광복의 의미는 우리들에게 잊을 수 없는 역사적 교훈을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1910년 조국을 빼앗긴 이후부터 1945년 8월 15일 대한 독립까지 많은 애국선열들의 희생이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회당 장석영은 파리국제회의에 청원문 초안을 작성하며 항일투쟁에 앞장섰습니다. 당대의 이름 높은 학자로서 조선의 학맥이 끊어지는 것을 두려워하며, 항일운동과 만세운동 등 나라 지킴에 온 힘을 기울였습니다. 자신을 돌아보는 여유있는 휴가철을 맞아 나라를 지키기 위해 애쓰신 선현들의 ‘애국(愛國)’ 정신을 기려봅니다.
자 문 : 권진호 (한국국학진흥원)
정 리 : 김광현 (한국국학진흥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