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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을 보냅니다. 코로나19도 이렇게 지나가버리면 좋겠습니다. 설날은 내년에도 오겠지요. 그러나 코로나19는 오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기야 누가 압니까? 희망사항입니다. 그런데 자꾸 변장하고 있네요. 어쩌려나, 벌써부터 걱정입니다. 그 동안 걸맞는 백신이 나오면 다행일 텐데. 가능성은 있습니다. 잘 되고 있는 듯합니다. 제발 금년 내로 끝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감기처럼 늘 우리 곁에 머물러 있을 가능성도 있다고 합니다. 거참! 맘에 들지 않는 사람이 곁에 붙어있고자 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 하던데, 즐길 수 있는 대상인지, 거참!!
날씨 포근해서 좋기는 한데 웬 먼지가 하늘을 버리네요. 좋은 명절을 바이러스가 망치더니 하늘도 이 모양입니다. 아까운 시간만 가네요. 그런데 고향은 못가도 여행들은 잘만 갑니다. 어디를 가든 제발 바이러스 동행하여 오지 않기를 바랍니다. 연휴 지나면 봄은 조금 더 가까이 오겠지요. 시간은 정해진 길을 가고 있는데 이 바이러스는 정해진 길도 없습니다. 감이 안 잡히네요. 그럴 바에는 쫓아내버려야 하는데 21세기 문명도 따라가기 힘든가 봅니다. 눈에 뵈지도 않는 것이 사람 잡네요. 하기야 보이지도 않으니 싸우기 힘들지요. 아무튼 봄이 오면 철새 떠나듯 코로나19도 떠나가기를 바랍니다. 보고 싶은 사람들 늙어만 가는데, 어서 봐야 할 텐데 말입니다.
일단 건강해야지요. 그래야 희망도 유효합니다. 건강하게 복된 주말을 빕니다. ^&^
2021년 2월 13일 김종우 목사
첨부 : 21-02-07주일설교(하늘의 뜻)
성경 창세기 1 : 27 - 28 2021년 02월 07일
설교 : 하늘의 뜻 김종우 목사
세상에 종교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따르는 종교는 몇 안 됩니다. 우리가 아는 것으로는 우리 기독교(천주교 포함)를 비롯하여 불교 회교 유교 힌두교 등입니다. 우리나라 안에 종교 분포도를 보면 기독교 불교 유교 천도교 원불교 등등 많습니다. 최근 우리나라에도 이슬람교(회교)가 그 세력을 확장하고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습니다. 아무튼 이러한 종교에는 그 종교를 대변하는 경전이 있게 마련입니다. 경전은 바로 그 종교를 안내하는 길잡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무엇을 믿는지, 어떻게 섬겨야 하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등등 그 종교에 관한 모든 것을 설명해줍니다. 그러므로 그 종교를 믿고 따른다면 먼저 그 경전을 알고 따르는 것이 순서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보면 그렇게 하는 사람들 즉 신자들이 얼마나 될까 궁금합니다. 예컨대 저 자신도 기독교에 입문하면서 성경을 한 번 읽은 것은 몇 년이 지나서였습니다. 차츰 그 횟수가 늘어났지만 그래도 아는 것보다는 모르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다른 종교는 차치하고라도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 백성이라고 자처하는데 하나님이 주셨다는 성경을 얼마나 읽고 또 알고 하나님을 섬기는지 걱정스럽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출석하는 교회의 목자가 전하는 부분적인 성경의 말씀을 받고 신앙생활 합니다. 한 주 내내 설교를 듣는다 해도 지극히 일부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신앙을 지키고 있는 것인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어쩌면 궁금하기보다는 걱정이 되지요. 걱정해야 정상일 것입니다.
종종 예를 드는 이야기입니다. 자식이 성장하면 독립해 나가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렇게 떨어져 살아도 키워주신 부모님에 대하여 감사하는 마음을 늘 지킵니다. 그래서 다른 때는 몰라도 무슨 특별한 때가 되면 찾아뵙기도 하고 그것이 어려우면 선물을 보내드립니다. 그런 때가 아니더라도 효도하는 마음으로 필요하다 생각되는 요긴한 것들을 구입하여 보내드리지요. 그런데 과연 부모님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아니면 자기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인지 재고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기껏 어렵게 장만해서 보내드린다 해도 현장에서 부모님이 탐탁치 않게 여기실 수 있습니다. 부모님은 가스난로를 필요로 하시는데 전기난로를 보낸다고 하면 크게 반겨하지 않을 것입니다. 난로보다 보일러를 고쳐주기를 바라셨다면 더욱 거리가 멀겠지요. 우리가 신앙생활 하는 것이 그런 식이 되고 있지 않은가 하는 염려가 듭니다.
왜 이런 현상이 생기는지는 확실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믿음은 이미 하나님 말씀인 성경에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문제는 그 말씀은 제쳐두고 자기 나름대로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새겨두어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호 6 : 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아멘! 하나님 앞에 제사 드리는 것, 오늘날로 말한다면 예배드리는 것이지요.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드린다는 것은 아마도 하나님을 섬기는데 있어서 가장 우선하는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하나님은 예배보다 먼저 하나님을 알라고 하십니다. 그 얘기는 무엇입니까? 나를 섬기는 법을 제대로 알고 해라 하는 말씀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 제사 드리는 절차와 방법도 이미 다 알려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레위기’입니다. 하나님 백성의 하나님 섬기는 제사법과 절기법이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은 이 말씀대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어쩌면 우리 신약의 백성보다도 더 말씀에 철저했다고 봅니다. 하나님 율법을 곧 그들의 생명과도 같게 여겼으니까요.
오늘날 우리는 어떠한가요? 물론 우리는 율법시대의 하나님 백성과는 다릅니다. 히 10 : 1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아멘! 말씀대로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이 섬기던 예는 그림자일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율법의 실체이신 하나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셨습니다. 히 9 : 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아멘! 그래서 이후로 짐승을 잡아 피를 뿌리는 제사는 더 이상 행하지 않습니다. 이제 우리가 하나님 섬기는 법,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법은 그 때와 다릅니다. 요 4 : 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아멘! 여기 ‘진정’이란 단어는 ‘진리’로 해석하는 것이 원문에 맞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제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때는 영과 진리로 드려야 한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이 영이시니 우리 또한 영으로 드려야 합니다. 흔히 육신을 가리켜 영혼을 담고 있는 그릇이라고 표현합니다. 마찬가지로 마음은 영을 담고 있는 그릇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없는 예배는 헛것입니다. 우리가 예배드린다고 예배당에 앉아 있기는 하지만 종종 마음은 다른 데 가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한 율법사가 예수님에게 와서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냐고 믈었지요. 예수님이 대답하셨습니다. 마 22 : 37 - 38“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아멘! 첫째 되는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데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느냐 하는 점에서 우선 “마음을 다하고”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나님이 걱정스럽게 말씀하신 것도 그것입니다. 사 29 : 13 “주께서 가라사대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아멘! 하나님을 섬긴다 한들 마음이 떠났으니 그것은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그렇게 하여 예배를 드린다 한들 그것은 예배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받지도 않으십니다. 처음 가인이 하나님께 드린 제사가 그런 제사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마음이 없는 예배, 하나님이 그 예배를 받으실 리 없지요.
그리고 하나님께 예배드리는데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진리입니다. “진리로 예배할찌니라” 하지요. 진리가 무엇입니까? 요 17 : 17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아멘! 예, 아버지의 말씀 곧 하나님 말씀이 진리입니다. 말씀이 없는 예배는 상상할 수 없는 것이지요. 우리는 마음을 드리고 하나님 말씀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 뜻을 이 땅에서 이룰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그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왜냐하면 반드시 이루어야 할 우리의 사명이니까요. 마 6 : 10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아멘! 우리가 바라고 소망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여기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냥 기도만 하고 가만있으면 이루어집니까? 입시생이 기도원에 들어가서 기도만 하면 합격은 저절로 이루어집니까? 그게 아니지요.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믿음은 행동이고 실천입니다. 누가 움직이는 겁니까? 하나님이십니까? 우리는 가만 앉아있고?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기도하였으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루어야지요. 이루도록 움직여야 합니다. 그런데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아야 그대로 움직일 거 아닙니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요? 물론 성경에는 직접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표현한 곳도 있습니다. 살전 5 : 16 - 18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아멘! 요 6 : 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아멘! 앞의 것은 우리 삶의 지침인 듯하고 뒤의 말씀은 우리를 구원코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말씀하십니다. 그것으로 다인가? 아닐 것입니다. 간단히 말한다면 성경 전체가 하나님 뜻입니다. 말은 간단하지만 참 힘들지요. 어쩌면 그래서 성경은 제쳐두고 적당히 믿는 태도가 생겼는지도 모릅니다. 예배나 잘 참석하고 헌금 잘 하고 능력이 되면 봉사도 하고 그러면 되겠지, 그 정도 아니겠습니까? 과연 하나님이 그 정도로 눈감아주실까요?
처음부터 생각합니다. 사람을 가리켜 ‘만물의 영장’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알고 말한 것인지 모르고 말한 것인지 따지지 않겠습니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이겁니다. 사람은 여타 피조물과는 다르다는 것이지요. 아주 특별합니다. 우리는 무엇보다 창조주 하나님의 형상을 입을 수 있는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특별한 사명을 가질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그렇게 하셨습니다.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셨고 특별한 사명을 주셨습니다. 창 1 : 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아멘!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것이지요. 잘 생각해보면 이 말씀이 좀 지나치다고 여겨집니다. 분명 아직 죄가 들어오기 전의 일입니다. 그런데 구태여 정복하고 다스려야 할 일이 있겠는가 하는 것이지요. 아담이 죄 지을 것을 미리 예견하고 말씀하셨다고 생각해야 합니까? 어느 아비가 자식이 배반하리라 생각하고 키우겠습니까? 하나님이 당신을 배반할 자식을 창조하셨다고 생각해야 합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이 악을 창조하셨다는 말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럴 리가 없겠지요. 전도서에 열쇠가 있습니다. 전 7 : 29 “나의 깨달은 것이 이것이라 곧 하나님이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은 많은 꾀를 낸 것이니라” 아멘!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에 악한 것은 없습니다. 다만 악하게 변질된 것이지요. 그것이 세상에서가 아니라 처음에는 영계에서 발생하였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사 14 : 12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그가 하나님 나라에서 쫓겨나 마귀가 되었고 그 후로 땅을 지배하게 되었지요. 예수님이 마귀에게 시험 받으실 때 그 이야기가 나옵니다. 마 4 : 8 - 9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가로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마귀가 그렇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천하만국이 자기 손안에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이 세상을 걸고 세상을 구원코자 오신 메시야를 유혹한 것입니다.
자 이 세상이 누구의 지배하에 있습니까? 마귀의 지배하에 있습니다. 본래 이 세상은 누구의 것입니까? 하나님 것입니다. 그런데 마귀가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합니까? 당연히 되찾아야지요. 그래서 아담을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명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복이면서 또한 사명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이 세상을 당신 나라로 회복하는 것입니다. 사람들도 당신의 형상을 잃고 사망의 그늘로 쫓겨나 멸망의 구렁텅이로 빠져들고 있습니다. 그러니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십니까. 어서 되찾아야 합니다. 어서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래서 아담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명하셨지요.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을 정복하고 다스려라. 그런데 아담이 이 하나님의 주신 사명을 제대로 이루었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배반하였습니다. 그리고 아담의 세대가 하나님을 등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서 경건한 사람 노아를 택하시고 그 아담 세계를 심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다시 복과 사명을 주십니다. 창 9 : 1 - 2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바다의 모든 고기가 너희를 두려워하며 너희를 무서워하리니 이들은 너희 손에 붙이웠음이라” 아멘! 그런데 노아의 세대도 문제를 일으킵니다. 얼마 안 되어 자기 잘났다고 탑을 세웁니다. 창 11 : 4 “또 말하되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그것은 땅에 충만하라는 하나님의 뜻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을 흩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후손 가운데 다시 한 사람을 택하십니다. 창 12 : 1 - 3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아멘! 아브라함은 큰 민족을 이루게 되고 복의 근원이 되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예언하신 대로 그 자손은 애굽에 내려가 큰 민족을 이룹니다. 때가 되어 모세를 보내어 그 백성을 건져내십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그 백성 이스라엘에게 역시 복과 사명을 주십니다. 출 19 : 5 - 6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찌니라” 아멘! 아담으로부터 우여곡절을 지나 이제 하나님 나라와 백성이 형태를 만들어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애굽에서 나온 당신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며 다시 언약하십니다.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따르면 너희를 세상에서 제사장 나라로 만들어주마 그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말합니다. 세상 정치적으로 표현하면 왕이고 영적으로 표현하면 제사장입니다. 한 마디로 백성을 지도하고 다스리는 자입니다. 하나님 백성은 이 세상의 제사장이 되어야 합니다. 왕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세상을 정복하고 다스려야 하지요.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우리 하나님 백성이 이루어야 하는 사명입니다. 이 세상이 지금 누구의 수중에 있다고 하였습니까? 마귀입니다. 그것을 쳐서 물리치고 하나님 나라로 회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당신 말씀을 주시고 잘 따라오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뜻대로 되지를 않았지요. 호 6 : 7 “저희는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 거기서 내게 패역을 행하였느니라” 그것이 이스라엘의 결과였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솔로몬 때 나타났습니다. 왕상 11 : 9 “솔로몬이 마음을 돌이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떠나므로 여호와께서 저에게 진노하시니라 여호와께서 일찌기 두 번이나 저에게 나타나시고” 결국은 나라를 둘로 찢으십니다. 11 - 13절 “여호와께서 솔로몬에게 말씀하시되 네게 이러한 일이 있었고 또 네가 나의 언약과 내가 네게 명한 법도를 지키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결단코 이 나라를 네게서 빼앗아 네 신복에게 주리라 그러나 네 아비 다윗을 위하여 네 세대에는 이 일을 행치 아니하고 네 아들의 손에서 빼앗으려니와 오직 내가 이 나라를 다 빼앗지 아니하고 나의 종 다윗과 나의 뺀 예루살렘을 위하여 한 지파를 네 아들에게 주리라 하셨더라” 솔로몬 왕까지 해서 통일 이스라엘은 끝나고 그 후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분열됩니다. 그래도 역시 정신 차리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계속하여 당신 종들을 보내어 경고하십니다. 이 분열왕국 시대는 다른 한편 선지시대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당신 나라를 만드시기 위한 그 열심을 가지고 선지자들을 보내어 당신 뜻을 전해주십니다. 거기에는 심판에 대한 경고와 미래에 대한 구원의 희망이 함께 서려 있습니다. 그러나 두 나라는 계속하여 하나님을 등지고 결국 모두 멸망하고 말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약속하신 대로 메시야를 그 백성 가운데 보내주십니다. 문제는 또 일어납니다. 요 1 :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예, 자기 백성 가운데 오셨음에도 정작 자기 백성은 영접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혈통으로 당신 백성을 삼으셨던 때를 끝내십니다. 12 - 13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아멘! 이리하여 육적 이스라엘의 역사는 끝나고 예수님으로 시작하여 영적 이스라엘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뜻입니다. 아담을 창조하신 것도 그 다음 노아를 부르신 것도 그리고 아브라함을 택하신 것도 또한 모세를 부르신 것도 모두가 하나님 나라를 세우기 위한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시대마다 당신의 목자를 불러 세우시고 부단히 당신 나라를 회복하려 열심을 내십니다. 그러나 아직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그 아들 예수님이 오셔서 다시 시작한 영적 이스라엘에게도 하나님은 똑같이 복과 사명을 주셨습니다. 벧전 2 : 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멘! 잘 생각해보면 하나님이 불러 세우신 그 사람들에게는 한결같이 왕 같은 제사장의 복과 사명이 주어졌던 것입니다. 아담으로 시작하여 노아, 아브라함, 모세까지 그리고 오늘날 우리에게도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무엇을 말해줍니까? 그것이 곧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소망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인생을 구원하시는 일과 더불어 하나님 나라를 회복하는 일이지요.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지 그것을 생각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본래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자녀 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보혈의 공로입니다. 엡 1 : 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아멘! 우리는 이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은혜를 잊는 것과도 같지요. 그러나 거기에 매여도 안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은혜로 하나님 자녀 곧 하나님 백성이 되었습니다. 여태 말한 대로라면 영적 이스라엘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백성을 세우신 하나님의 뜻은 바로 하나님 나라의 회복입니다. 우리는 그 사명을 이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지요. 마 6 : 10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아멘!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입니다. 하나님 주신 사명이니 천명입니다.
그냥 건성으로 사는 인생이 아닙니다. 그래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자고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신 것도 그 값으로 우리를 부르신 것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참으로 대단한 존재들입니다. 하늘의 사명을 짊어지고 있는 인생들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결코 순탄한 길이 아니지요. 예수님도 진작 말씀하셨습니다. 마 7 : 13 - 14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아멘! 마귀와 싸우는 일인데 만만하겠습니까? 힘들기에 좁은 길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롬 8 : 18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할! 천명, 하늘의 뜻을 잘 감당하여 주님과 함께 그 영광을 누리기를 축원합니다.
<아이>
‘인생이란 갈 고(Go)가 아니라 쓸 고(苦)야.’ 하기야 누구는 ‘고해’(苦海)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쉽지 않습니다. 먹을 것 쌓아놓았다고 쉽습니까? 그야 먹을 것 걱정 하나 던 것만도 다행이기는 합니다. 가장 기본적인 조건 가지고 허우적거리는 것이 가장 딱한 일이기는 하지요. 아무튼 일단 살고는 봐야 하니까 말입니다. 세상에는 아직도 이 기본 생존조건마저 해결하지 못해 하루벌이에 목숨을 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먼 나라 이야기도 아닙니다. 선진국을 향해 가고 있는 우리 주변에도 있습니다. 그러니 이야기 속의 가상현실도 아닙니다. 그 하루를 살려고 새벽을 깨우는 사람들, 하루 일자리를 얻으려고 줄 서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습니다.
‘보호종료아동’이란 말이 생소하기도 합니다. 그런 제도가 있다는 것은 들어보았습니다. 나라에서 보호해주는 기간이 만료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혼자 알아서 살아가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혼자 살아갈 준비는 되었나요? 준비가 되지 않았다면? 그래도 그곳에 머물 수는 없습니다. 어쩌면 그 자리를 기다리고 있는 아이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일단 나가야 합니다. 물론 그런 아동들이 임시 거처할 곳을 마련하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무한정 사용할 수는 없겠지요. 가능한 빠른 시간 내에 독립해야 합니다. 준비된 돈이 있는 것도 아니고 어디서 선뜻 일자리를 내주는 것도 아니고 때가 가까울수록 불안과 걱정이 커질 것입니다.
보육교육을 받았습니다. 친구의 도움으로 아기를 맡아 돌보는 자리를 찾았습니다. 한 6개월 된 아기를 돌봐주는 일입니다. 아직 젊은 엄마는 야간업소에 나가서 일합니다. 엄마가 밤늦게 퇴근하여 오면 그 때 퇴근하는 것입니다. ‘어, 생각보다 어리네.’ 당연하지요. ‘보호종료아동’이니 말입니다. 아직 ‘아동’이란 딱지도 안 떨어졌습니다. 그래도 홀로서기를 해야 합니다. 무엇이라도 해야 하는 마당에 그래도 배운 대로 아기를 돌보는 자리가 생겼으니 다행일 수 있습니다. 미심쩍은 엄마는 망설이다 그런대로 쓸 만하다 싶어 맡깁니다. 그렇게 ‘아영’이와 초보 아기 엄마 ‘영채’의 인연이 시작됩니다. 시간이 흐름에 아기 ‘혁’이는 엄마보다 아영이가 가깝게 느껴지나 봅니다. 그럴 수밖에 없겠지요. 많은 시간을 아영이와 지내니 말입니다.
손님 접대하는데 자꾸 젖이 나오니 문제입니다. 어서 끊어져야 하는데, 그래서 아기 먹을 모유를 많이 받아둡니다. 아영이에게 시간과 수유 방법을 잘 일러줍니다. 젖은 마음대로 중단되지 않습니다. 이런 저런 방법을 사용해도 쉽지 않습니다. 아기는 밤새 울어대고 피곤한 엄마는 짜증만 늘어가고 벌이는 해야 되고 하루하루가 전쟁터와 같습니다. 먹을 것도 제대로 챙겨 벅지 못하니 엄마 자신의 영양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그 젖을 먹는 아기의 영양 상태가 좋을 리 없습니다. 받아둔 모유를 모두 씽크대에 쏟아버립니다. 어쩔 수 없이 분유를 사야 합니다. 부가적 지출이 생깁니다. 보육비 줘야지, 생활비 해야지, 아기 분유 사야지 등, 삶이 쪼그라들 지경입니다.
어느 날 늦게 돌아오니 아영이는 소파에서 자고 있습니다. 아기 침대에 누워있는 혁이를 안아봅니다. 자기보다 아영이를 따르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픕니다. 잠시 안아보다 아기침대에 뉩니다. 보호대를 제대로 잠그지 않고는 외출을 합니다. 그 사이 혁이가 낙상을 합니다. 급히 응급실로 갑니다. 머리를 다쳤지만 크게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된답니다. 그 때 발견한 것이 아기의 영양부족입니다. 아무튼 모든 것은 아영이가 뒤집어쓰고 해고당합니다. 아영이는 자기 잘못이 아니라고 항변합니다. 돈에 궁해진 영채는 소송까지 해서 역시 궁한 아영이를 궁지에 몰아넣습니다. 정신 사나워진 영채는 운전하다 사고를 당해 입원까지 합니다. 영채는 더 견딜 수가 없어 아기를 입양시키려 아는 사람에게 보냅니다.
떠나도 마음이 떠나지를 못합니다. 힘들어하는 초보 엄마 영채가 미덥지도 않습니다. 결국 영채가 혁이를 입양 의뢰하여 보냈다는 사실을 알고 쫓아가서 빼앗아 옵니다. 글쎄 아직도 아기를 가지고 장사하는 사람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옥신각신 하지만 영채는 잘 압니다. 혁이가 다친 것이 자기 잘못이라는 것을. 아영이가 미운 것도 아닙니다. 자신이 모자란 것과 직업에 대한 자격지심도 있기에 혁이를 돌볼 자신이 없는 것이지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영채가 혁이를 안고 흐느낍니다. 혁이가 자기처럼 될까 마음이 아파서 그랬는데 영채의 마음과 처지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영채 뒤로 와서 기댑니다. 내가 도와줄게요.
업소 사장인 언니가 그래도 영채를 아끼고 있기에 이래저래 돕고 있습니다. 그렇게 세 사람이 한 마음이 되어 혁이를 맡기로 합니다. 이렇게 되면 가족이 아닌가요? 보육원에서 자란 아이, 이제는 보호 종료가 되어 사회에 나왔지만 아직 미숙합니다. 혹 사회적응도 하기 전에 사망하면 너무 쉽게 처리합니다. 무연고자. 장례식도 없이 화장하여 처리합니다. 함께 지내며 자란 보육원 친구들이 우리가 가족이라고 우기며 장례식이라도 치르게 해달라고 아우성을 쳐봐도 소용없습니다. 법이 그렇다네요. 그렇게 가까운 사람을 떠나보내는 마음들이 어떻겠습니까. 내가 죽어도 저 꼴이 되려나, 하는 마음이 들지 않겠습니까? 영화 ‘아이’(I)를 보았습니다. 아프지만 따뜻한 이야기입니다. 영어 제목이 또 다른 의미를 생각하게 합니다. 인생이 쓸 고(苦)이지만 함께 하면 갈 고(Go)입니다.
<얼라이드>
‘런던에 가서 내 아내가 돼줘.’ 그렇게 사랑은 결실을 맺었습니다. 그리고 깨소금 맛의 결혼생활이 이어집니다. 세상은 아직 전쟁 중입니다. 공습을 받으면서도 예쁜 딸을 낳아 가족이 더 생깁니다. 두 사람의 사랑의 열매가 첫걸음을 떼고 얼마 후 ‘맥스’는 상부의 부름을 받습니다. 일반 명령이 아닙니다. 웬 조사실 같은 곳으로 안내됩니다. 그리고 낯선 상관의 비상한 눈빛을 마주합니다.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듣습니다. 귀국 후 너무 행복한 결혼생활이 과분했던가? 어쩌면 2년도 안 되는 부부생활이 큰 위기에 부딪치게 됩니다.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을 마주합니다. 그러나 상부의 눈은 의심을 넘어 확신으로 차 있습니다. 사흘의 기간, 그 안에 무혐의를 증명해야 합니다.
아내의 이름은 ‘마리안 부세주르’입니다. 그런데 그 여자는 이미 죽은 사람이랍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이전에 수행했던 카사블랑카에서의 독일 대사 암살 사건도 조작된 것이랍니다. 오히려 이쪽의 주요 인사를 저격했답니다. 그러니 그 때의 요인 저격사건도 오히려 적의 농간에 이용당한 셈이지요. 그러면 그 때 함께 동조했던 아내도 적의 첩보원임을 숨기고 함께 했다는 것이고 자기는 그들에게 이용을 당한 셈입니다. 오래지도 않은 당시의 사건을 생각해봅니다. 어쩌면 너무 쉽게 수행된 임무였습니다. 사실은 그 임무 수행하며 죽을 각오로 임했는데 말이지요. 총격전이 격해지고 있는데 어떻게 적은 쉽게 추격을 포기했을까 생각했어야 했습니다.
맥스는 요인 암살의 임무를 띠고 독일군이 점령하고 있는 아프리카 북부 모로코 사막지대에 낙하산으로 투하됩니다. 이미 준비된 요원의 안내를 받아 카사블랑카로 들어옵니다. 그곳에서 아내가 기다리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예정대로 파리에서 온 사업가가 기다리던 아내를 만납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부부임을 확실하게 각인시켜줍니다. 그것도 대단한 잉꼬부부로 말이지요. 그러나 어디까지나 임무 수행일 뿐이지 부부는 아닙니다. 특히 맥스는 철저히 임무에 충실하고자 합니다. 파트너와 잠자리를 함께 하면 둘 다 죽기 십상이랍니다. 대부분 그렇게 됩니다. 임무보다 사랑에 정신을 빼앗기게 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두 사람이 부부로 지내며 적군의 요인들과 접속합니다. 이미 주변사람들과 친분 관계를 많이 형성해놓은 아내 ‘마리안’ 덕에 어렵지 않게 교제가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중요 파티의 초대장도 구할 수 있게 됩니다. 바로 그 파티에서 임무가 수행되도록 계획이 짜져 있습니다. 시간에 착오가 생긴다면? 상대가 약속과 일에 철저한 독일인이니 그럴 가능성은 없습니다. 이미 파티장 안에 총기도 비밀리에 모두 장치되어 있습니다. 맥스와 마리안 부부만 알고 있습니다. 신호와 더불어 탁자를 엎어버리고 그 뒤에 붙은 총기를 취하여 대상자를 향해 발사하면 됩니다. 군사들이 닥칠 것입니다. 알아서 처리하며 빠져나오면 됩니다. 과연 빠져나올 수 있을까요? 일단 임무가 수행되면 그 다음에는 죽어도 상관없습니다.
내일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바로 전날 두 사람은 진짜 부부처럼 세상에서의 마지막(?) 쾌락을 향유합니다. 사실 함께 임무를 수행하며 이미 두 사람의 마음은 가까워져 있었습니다. 이대로 그냥 죽어야 한다면 얼마나 생명이 아깝겠습니까? 그런데 일은 계획대로 잘 끝나고 두 사람은 생존하였습니다. 나와 같이 런던에 가서 내 아내가 돼 줘요. 마리안 입장에서는 어쩌면 기다렸던 말입니다. 이미 사랑하게 되었으니 말이지요. 더구나 생명을 걸고 함께 하였으니 더 이상 가까워질 다른 길이 있겠습니까? 그렇게 두 사람은 런던에 와서 축하 받으며 결혼하여 아주 행복하게 삶을 이어갑니다. 그리고 예쁜 딸까지 가집니다. 때로는 근처 보모에게 아기를 맡기고 부부 데이트도 하면서 신혼의 기쁨을 연장하여 누립니다.
아무 변고 없이 행복한 날들이 이어집니다. 그러던 어느 날 호출입니다. 그리고 조사를 받게 됩니다. 아내 마리안의 이름이 그 이름의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러면 여태 누구와 사랑하고 살았다는 말인가? 정보부의 조사로는 그 이름의 여자는 이미 독일군에 의해 사살되었답니다. 도무지 믿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 아무런 일 없이 둘이 아니 아기와 셋이서 잘 살고 있는데 그게 무슨 말인가? 그렇다면 72시간 여유를 줄 테니 증명할 증거를 가져오랍니다. 그리고 아내를 시험할 암호를 줍니다. 맥스는 스스로 적지로 날아가서 증인 될 사람을 찾아 아내의 사실여부를 확인합니다.
믿어지지 않는 일이 사실로 드러납니다. 아내가 고백합니다. 진작 그 환경을 벗어나려고 함께 런던으로 온 것입니다. 첫째 사랑해서 그리고 스파이 생활을 벗어나려고. 그런데 쫓아와서 이번에는 아기를 미끼로 여자를 위협하는 것이었습니다.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사실을 알고는 보모를 비롯하여 접촉자들을 찾아 처단합니다. 그래도 이중첩자라는 사실을 벗어날 수는 없는 일이지요. 그래서 스스로 선택합니다. 한 사람이라도 남아야 사랑하는 자식을 기를 테니까요. 영화 ‘얼라이드’(Allied)를 보았습니다. 2017년 작이네요. 마음이 짠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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