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사도(生死島) 제2권
제 1 장 옥풍규(玉風揆)
<1>
한 줄기 바람이 비릿한 혈향을 싣고 불어갔다. 음침한 숲 속에
갑작스럽게 정적이 찾아들었다. 섬서성 남쪽에 위치하고 있는 종
남산(終南山) 기슭이었다.
울창한 송림에 둘러싸인 공지를 가운데 두고 수많은 사람들이
살벌한 긴장을 간직한 채 침묵하고 있었다. 동쪽에 위치하고 있
는 일단의 무리들은 비천맹(飛天盟)의 천지쌍검(天地雙劍)과 이
십여 명 문도들이었고, 그들과 마주 대하고 있는 서쪽의 무리들
은 귀문(鬼門)의 사귀(四鬼) 중 삼귀(三鬼)인 흡혈귀(吸血鬼)와,
사귀(四鬼)인 음소귀(陰笑鬼), 그리고 십이사신(十二死神) 중 사
인이 포함된 역시 이십여 명의 문도들이었다.
좌우에서 그들을 견제하듯 은연중 압박을 가하고 있는 무리들
은 저마다 제각각인 복색으로 미루어 보아 각처에서 몰려든 군웅
들이 분명했다.
그들이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공지의 중앙에는 십여 구의 처참
한 시신들이 아직도 더운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최후에 숨
진 자인 듯, 간간이 잔 경련을 일으키고 있는 사십대 장한의 손
에 한 권의 얇은 책자가 굳게 움켜쥐어 있었는데, 유마검급(幽魔
劍級)이라는 네 글자를 삐죽이 드러나 있었다.
혼원장(混元掌)이 출현한 이후 두 번째로 나타난 비급인 그것
은 다시 한 번 천하 군웅들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기에 충분한 것
이었다. 그것들이 모두 최고의 기보로 꼽히고 있는 천제무황경
(天帝武皇經) 상의 일부였기 때문이다.
그 속에 수록된 일초 삼식의 유마검결(幽魔劍訣)을 터득하는
자 능히 천하 검문의 종주가 되리라는 절세의 검서가 지금 질퍽
한 피 속에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비급을 코앞에 두고 군웅들이 서로 견제하며 눈치만 살피는 이
유는 간단했다. 그것을 손에 넣는 즉시 모두의 표적이 되어 처참
한 죽음을 당하기 때문이었다. 지루하도록 무거운 침묵이 계속되
던 어느 순간,
『더는 못 참겠다!』
한소리 호통과 함께 남쪽의 이십여 군웅들 속에서 한 인물이
비호처럼 몸을 날려 비급을 잡았다. 그와 동시에 사방에서 고함
소리가 터져 나왔다.
『산동흑웅(山東黑熊), 네놈은 자격이 없다!』
그를 뒤쫓아 십여 명의 인영이 뛰어들었다. 일시에 소강상태를
깨고 허공 가득 권장과 삼엄한 경기가 난무했다. 고요하던 숲이
다시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끄아아악-!』
처절한 비명과 함께 산동흑웅이 온몸에 십여 개의 살격(殺擊)
을 맞은 채 그 형체마저 알아볼 수 없도록 처참한 죽음이 되어
눕는 데는 촌각의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그 혼란을 틈탄 자가 재빨리 비급을 낚아채 신형을 날렸다. 그
순간, 비천맹 쪽에서 벼락 같이 쳐 나온 검광 하나가 그 자의 허
리를 동강내고 돌아갔다. 천검(天劍) 호소청(胡召靑)의 비검 절
기였다.
그것을 신호로 삼은 듯, 비천맹의 이십여 고수가 동시에 몸을
날렸다. 그들은 마주쳐 오는 귀문의 고수들과 각처의 군웅들을
향해 무자비한 살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도검이 부딪치는 소리와
비명 소리, 호통 소리들이 정신 없이 들끓었다. 그 틈을 탄 호소
청이 비급을 낚아채려고 손을 뻗는 순간이었다.
『호소청, 너무 날뛰지 마라!』
양쪽에서 그를 쳐오는 맹렬한 수강(手 )이 있었다. 귀문의 삼
귀인 흡혈귀와 사귀인 음소귀가 동시에 호소청을 노리고 달려든
것이다. 호소청은 손가락 끝에 비급을 두고 부득이 물러서지 않
을 수 없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비천맹과 귀문, 군웅들 사이에서는 피아를 가
릴 수 없는 혼전이 더욱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가슴을 쥐어
짜는 듯한 비명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터져 나왔다. 그윽한 운치
를 보여주던 송림 사이의 공지가 순식간에 아수라 지옥도로 변해
버리고 말았다.
『크하하하, 비급은 본 맹의 것이다!』
지검(地劍) 왕필(王弼)이 신형을 빼내며 떨어진 비급을 집어들
었다.
『개소리!』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무시무시한 철사장의 일격이 측면에서
왕필을 때렸다.
『흥!』
냉랭한 코웃음을 날린 왕필이 지체 없이 검을 휘둘러 그것을
쪼개갔다. 뜨거운 선혈이 확, 퍼지며 하북 녹림을 주름잡던 철사
장 우곤의 허리가 꺾였다. 피를 보자 더욱 광분한 무리들이 왕필
을 향해 벌떼처럼 달려들었다. 비천맹의 고수들이 일제히 달려와
그들을 막아섰다. 천검 호소청은 귀문의 흡혈귀와 음소귀에게 붙
들려 왕필을 도와줄 수 없었다.
군웅들을 노려보며 왕필이 검을 들어 올렸다.
『버러지 같은 놈들!』
냉랭한 일갈과 함께 왕필이 검을 휘둘러 군웅들을 쳐나가기 시
작했다. 그의 절학인 지검삼십육예(地劍三十六藝)가 눈부신 검광
을 뿌리며 군웅들의 기세를 압도했다.
그의 검격은 화려하면서 악독했다. 삽십육초의 검격이 일시에
서른 여섯 개 방위를 점하며 줄줄이 구슬을 꿰듯 도도한 연환검
세를 쏟아냈다. 그의 완벽한 연환검 아래 순식간에 다섯 명이 피
를 뿌리고 쓰러졌다.
비천맹도들의 목숨을 건 호위 속에서 비급은 이제 왕필의 것이
된 듯 싶었다. 그가 신형을 뽑아 올리려고 무릎을 살짝 굽혔을
때였다.
『물건은 놓고 가라!』
벼락같은 일성과 함께 비천맹의 고수 셋을 찍어 넘기고 날아드
는 맹렬한 도(刀) 한 자루가 있었다.
『헛!』
왕필이 다급성을 터뜨리며 검을 휘둘러 그것을 받았다.
쨍-!
날카로운 쇳소리가 터져 나왔다. 왕필 앞에 눈을 부릅뜨고 내
려선 자는 귀문의 십이사신 중 지옥신(地獄神) 이추전이었다. 고
작 십이사신 중의 한 명에 불과한 자의 칼 힘이 뜻밖에 굳센 것
이어서 잠시 주춤거렸던 왕필이 이를 악물었다.
『놈!』
그가 지검 삼십육예 중 쾌검 절초인 파홍자(破汞刺)의 검초로
지옥신의 인후를 뚫어갔다. 번갯불이 눈앞에서 번쩍이는 듯한 강
렬한 검광이 쭉, 뻗어 나갔으나 그것은 지옥신 이추전의 인후에
미치지 못하고 곧 사라졌다.
푸욱, 하는 소리와 함께 기척 없이 다가온 검 하나가 그의 등
을 꿰뚫고 가슴으로 빠져나온 것이다. 왕필이 그 검봉을 바라보
다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하남의 탕아로 악
명 높은 섬전검 팽목기가 차갑게 웃고 있었다.
다시 측면에서 날아든 검이 눈을 부릅뜨고 있는 왕필의 목을
날려 버렸다. 귀문의 염라신 장적이었다.
팽목기가 쓰러지는 왕필의 손에서 재빨리 비급을 빼냈다. 그러
나 그보다 더 빠른 일수의 수강이 정수리 위로 떨어지고 있다는
것을 팽목기는 미처 알지 못했다. 빠지직, 하는 섬뜩한 기음과
함께 팽목기의 두개골이 간단히 바수어지고 말았다.
천검 호소청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비천맹의 사검 중 일인이
자, 자신과 천지쌍검으로 불리며 지난 삼십여 년 간 강호에 명성
을 날려 왔던 지검 왕필의 덧없는 죽음을 목격한 때문이었다.
『끼야압-!』
호소청이 엄청난 기합을 터뜨렸다. 왼 발을 번쩍 들어 흡혈귀
의 일권을 쳐냄과 동시에 혼신의 힘을 다한 추풍일식(秋風一式)
으로 음소귀를 쳐갔다.
차차창-!
음소귀가 다급히 철조(鐵爪)를 휘둘러 호소청의 일검을 막았으
나 역부족이었다. 열 개의 철조를 간단히 끊어버린 호소청의 검
이 그대로 음소귀의 목을 긋고, 그 여세를 몰아 다시 휘어지며
흡혈귀의 어깨 위로 떨어져 내렸다.
크게 놀란 흡혈귀가 연달아 다섯 번의 주먹질과 세 번의 발길
질을 우박처럼 퍼부으며 몸을 뺐다. 그러나 그는 채 세 걸음도
걷지 못했다. 호소청의 손을 떠나 번개처럼 쏘아져 나간 비검이
여지없이 그의 허리를 동강낸 것이다.
비급은 여전히 누구의 차지도 되지 못한 채 난전 속에 떨어져
피를 빨아들이고 있었다. 그것을 두고 이제는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이 얽혀버린 비천맹과 귀문 그리고 군웅들이 누가 누구인지
도 가리지 않고 서로를 죽이고 죽는 일을 계속했다.
* * * *
『저들은 하찮은 짐승들이다.』
음침한 그늘 속에서 한껏 경멸을 담은 냉랭한 음성이 들려왔
다. 언제부터인가 송림 깊은 곳의 어둠 속에 서서 그 처절한 싸
움을 차갑게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죽립을 깊이 눌러
써서 얼굴을 가린 삼 인의 사나이와, 그들의 호위를 받으며 오만
하게 서 있는 백의 미공자였다.
입가에 싸늘한 조소를 띄고 있는 옥인(玉人)처럼 수려한 미공
자는 바로 남장여인인 냉여옥이었다. 그녀가 더욱 차가워진 눈으
로 참상의 현장을 바라보며 조롱했다.
『그래, 그렇게 싸워라. 더 열심히, 더 치열하게, 그래서 모두
죽어 버려.』
냉여옥의 눈이 점점 새파란 요기(妖氣)를 띄고 빛났다.
『내가 손을 댄 이상 무림인이라면 누구도 벗어나지 못한다!』
첫댓글 감사 ㅎ
감사.
즐독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