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상의 응축과 여운의 미
김 석 철
(전 한국시조시인협회 부이사장)
시조는 우리 민족 고유의 전통시다. 시조가 중국 한시(漢詩)의 절구(絶句), 일본시의 하이쿠(俳句), 서구시의 소네트(sonnet)에 비견되는 우리 문학의 대표적 문학 양식임은 두 말할 나위가 없는 일이다. 시조는 장구한 세월을 지나오면서 우리의 호흡으로 정제된 고유미학의 결정인 것이다. 우리 것이 세계적인 것이라고 했지 않은가. 이제 시조는 우리 문학의 정수(精髓)로 거듭나서 당당히 국가 브랜드가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온 국민이 시조를 아끼는 마음으로 생활화하여, 대중화, 세계화가 되도록 힘써 나가야만 할 것이다.
필자는 본지의 계간평에서 이미「시조의 형식과 내용 문제」,「시조의 다양한 무늬와 깊이」에 대해서 언급한 바가 있기에, 이번호에는 「시상의 응축과 여운의 미」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정형시로서의 시조는 마땅히 그 운율적 형식이 올바르고, 시로서의 정제미와 함축미를 갖추고 있어야만 한다. 그렇게 되면 자연히 시상의 응축과 여운의 미도 살아나게 된다. 주로 표현방법에 의해 좌우되는 이 응축(凝縮)은 상징성과 암시성을 동반하기 마련이며, 한편으론 사유의 깊이도 심어주고 긴장의 묘미도 살려 주는 것이다. 대부분 시어나 문맥 또는 행간 속에 작자의 의도를 숨기는 수법을 사용하므로 독자들은 보물찾기처럼 호기심으로 그 실체를 찾아 나설 수밖에 없다. 이렇게 시상의 응축과 여운의 미는 작자의 기량과 창작기법에 따라 그 솜씨가 다르겠지만 시조창작의 요체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면 이번에는 지난 봄호 『시조문학』의 <신작특집>과 <단시조단>, <봄시조단>의 작품을 중심으로 짚어보기로 한다.
(중략)
때 없이 서는 날(刀)에 가슴을 베인다
내가 나를 보이는 일이 왜 이리 힘든 걸까
삶이란 리허설 없는 서툴기만한 연극무대
한 가닥 풀고 나면 또 한 가닥 맺어진다
가쁘게 골라온 길 크게 한숨 돌리던 날
내 삶의 소중한 것들을 잃어야만 했었다
다 주지 말아야지
다 알려고도 말아야지
너무 많은 굴레를 스스로 만들고 산다
이제는 짐 벗고 싶다
훌훌 벗어 던지고 싶다
이렇게 아무 것도 손에 잡히지 않는 날
무대 밖 객석에 앉은 관객이고 싶은데
앞마당 야윈 가지에
봄, 너 온 줄도 몰랐다.
- 김영주, 「쓸쓸한 날의 모노드라마」전문
김 시인은 시조의 전통적 형식과 내용에서 창조적 계승을 꾀하고 있음을 짐작하게 한다. 시조의 일반적 관행에 얽매이지 않고 엇비슷한 시조의 목소리에서 벗어나려는 태도를 감지할 수 있는 것이다. 평범한 일상에서 참신한 시상을 재치 있게 포착한 자기성찰의 시조다. 시상을 네 수 연시조로 이끌어간 그 호흡과 기량이 돋보인다. 어쩌면 현실에 대한 개성적 접근이라고 할까. 인습적 타성에서 벗어나 대상의 본질을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시적으로 형상화하여 새로운 세계를 열어 보이고 있다.
시인은 항상 대상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새로운 해석을 하는 예술인이다. 이제 우리에게는 기존의 생각과 개념의 틀에서 벗어나 시적 대상을 새롭게 보는 탈관념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우리의 삶이 다 그러하겠지만 문학, 특히 시조에선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창조해 내려는 각고의 노력이 없이는 아무런 발전도 기대할 수가 없다. 과거의 고정관념에서 탈피해야 새로운 미래를 열어갈 수 있다 는 말이다. 새로움을 추구하는 실험정신이 없는 예술은 죽은 예술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이상으로 계간『시조문학』의 지난 봄호에 발표된 작품을 중심으로 ‘시상의 응축과 여운의 미’를 살펴보았지만, 주마간산 격이 되고 말았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본지에 실리는 시조들은 다른 시조전문지나 문예지에 비해선 시조의 기본틀은 비교적 잘 지키고 있다고 본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아쉬운 점이라면, 아직도 형식에 끌려가며 율격을 살리지 못하는 경우와, 평이한 내용을 행만 바꾸어 시조처럼 조립한 경우, 소재나 주제를 비롯해서 그 내용이나 표현이 새롭지 못한 경우 등이 있다는 점이다. 이 모두 우리 자신들의 책임이 아니겠는가.
다음에는 모쪼록 시조다운 맛과 멋을 주는 시조, 개성이 뚜렷한 시조, 시혼이 깃든 참신한 시조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이 글을 맺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