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류 불문하고 모든 문화재가 다 소중하고, 그래서 종류를 가리지 않고 보러 다니지만 사람마다 보다 더 마음이 끌리는 대상이 있을 수 있다. 나의 경우는 그 대상이 磨崖佛이다. 그런데 마애불은 특성상 산에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상당수는 왕복 몇 시간씩 걸리는 높고, 깊은 산중에 있다. 그 때문에 국보로 지정된 마애불 중에서도 영암 월출산은 가보지 못했고, 보물로 지정된 마애불 중에서는 경주서악동마애불, 합천 치인리, 구미 금오산 등 꽤 많은 마애불을 친견하지 못하고 있다. 아쉬움은 깊어져 病이 되어 가지만 욕심낸다고 다 할 수는 없는 일이니 욕심을 다스리는 쪽이 옳은 방법일지도 모르겠다.
언제인지 정확하게 기억할 수는 없지만 마애불이라는 낱말을 처음 접한 것은 아마도 이른바 ‘백제의 미소’로 불리는 ‘서산마애삼존불’이 최초일 것이다. 하지만 ‘磨崖’가 무슨 뜻일까 별로 생각해보지 못했는데, 바로 이 마애삼존불 설명판의 한자와 영어 표현을 보고서야 정확한 의미를 알게 된 것이 2,000년대 초반의 어느 해였던 것 같다. 안양 석수동의 마애종을 보러 가면서는 문화해설사 할아버지와 잠시 같이 걸었는데 이곳에서는 磨崖의 의미를 정확히 알지 못한 어느 단체에서 ‘마애정신 이어받자’는 캐치프레이즈를 내세운 적도 있었다고 들려준다. 바야흐로 그나마 한자를 조금이라도 이해하는 세대가 점차 퇴장하고 있는 상황에서 문화재 명칭도 조금 더 고민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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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 금학동 마애지장보살입상]
却說하고 이날도 모두 4곳의 마애불을 답사대상으로 삼았고, 그 가운데 둘은 공주시에 있다. 전에 공주시 답사자료를 정리하면서 분명 마애불 두 기가 있는 것을 확인했으나 뒤에 답사계획을 짜면서는 어디에서 보았는지 기억할 수도, 인터넷 검색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던 중 근래에 카페 쥔장님인 선과님의 답사기에서 그때 내가 접했던 그 마애불들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디지털공주문화대전에 이 마애불들에 대한 자세한 자료가 올라와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내가 보았던 자료가 바로 이 디지털공주문화대전이었던 것이다. 선과님의 답사기 덕분에 두 마애불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먼저 찾은 곳은 金鶴洞 日落山 磨崖地藏菩薩立像이었다. 찾아가는 길은 지도를 보며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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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묘암사[지도에 묘암사로 표기된 부분은 잘못이다.]
2: 옥돌돼지갈비 식당
3: 마애지장보살입상[산속에서의 길 및 마애지장보살상의 위치는 부정확하다. 대략적인 개념을 표시한 것이다.]
일단 주차는 골목길에 하기는 조금 곤란하니 공주시청을 이용하는 것이 좋다. 공주시청 좌측(남쪽)과 공주교대 우측(북쪽) 사이는 해지개길인데 이 사이로 올라가면 왼쪽에 너른 주차장을 갖춘 옥돌돼지갈비 식당이 있다. 이 앞에 묘암사 표지판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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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판을 따라가면 곧 일락산 묘암사라는 현판이 걸린 묘암사가 보인다.(蛇足이지만 ‘日落山’이라는 이름이 조금 感傷을 자아낸다. 자꾸 百濟의 멸망이 떠오르는 것은 지나친 것이리라.) 현판 아래 슬래브 옥상이 노출되어 있는 건물도 묘암사 부속건물인 것 같지만 정확하게는 모르겠다. 묘암사는 해지개길 23번지이고, 구주소로는 봉황동 369번지다. 선과님 답사기에서 묘암사 내부에도 마애지장보살상이 있다는 것을 알았기에 혹시나 하고 여러 번 문을 두드려 보았지만 아무런 응답이 없어서 포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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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라브 지붕을 밟고 법당 마당으로 건너간 다음 처음에는 높은 계단 위에 있는 산신각 옆 바위굴 안에 지장보살이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바위굴로 향하는 접근로가 없었고, 산신각 위에 올라가서 봐도 마찬가지인데다 무리하다 보면 자칫 미끄러져 아래로 추락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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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마당으로 내려와 왼쪽의 새로운 탑과 부도 쪽을 바라보니 산으로 향하는 문이 열려 있었다. 저 길일 수 있겠다 하는 마음에 걸음을 옮긴다. 조금 가다 보니 길이 나뉜다. 물론 표지판 같은 것은 없지만 이럴 땐 우선 위쪽으로 올라가보는 것이 대체로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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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걸음 더 걸으니 우측 조금 먼 곳에 바위가 보인다. 저 바위일까? 잠시 후 다시 길이 나뉘는데 이번에도 바위를 향해 우측 길을 선택한다. 맞다. 제대로 찾아왔다. 묘암사에서부터 넉넉잡아도 300m 정도일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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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애지장보살입상은 장방형에 가까운 감실 내에 선각되어 있다. 감실의 깊이는 약 3~5㎝이고, 높이는 126㎝, 너비는 58㎝이다. 감실은 상단이 보주형으로 신광의 역할을 겸하고 있으며, 머리 주변에는 원형의 두광이 선각되어 있다. 지장보살의 머리는 소발이며 오른손에 석장을 들고 연화대좌 위에 선 입상이다. 통견식 대의는 가슴 앞이 U자형으로 늘어졌다. 얼굴은 마멸이 심하여 세부 양식은 확인이 어려우나 목에는 삼도가 표현되어 있다. 수인은 왼손을 가슴 앞에서 손바닥이 위로 향하고 있으며 오른손은 석장을 잡고 있다. 석장의 길이는 80㎝이고, 상단에 삼각형의 장식이 조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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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애지장보살입상의 총 높이는 94㎝이고, 불상 높이는 82㎝이다. 두광은 지름이 37㎝이고, 대좌는 너비 58㎝, 높이 15㎝이다. 입상 오른쪽 윗면에 명문 ‘대자회향성화□년중추(大慈回向成化□年中秋)’라는 글이 음각되어 있다. 이 명문은 내 눈에는 잘 보이지 않았지만 사진을 보니 흐릿하게 글자가 있는 것 정도는 알 수 있겠다. ‘성화(成化)’라는 연호는 중국 명나라 헌종 때의 연호(1465~1487)이므로 이를 근거로, 또한 조각 양식도 고려할 때 조선 전기에 조성된 것으로 판단되며, 이 시기 마애불상 연구의 기준작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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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금학동사지 출토 유물 중 석조여래좌상과 석불 광배편은 현재 공주박물관에 옮겨져 있다. 불상은 얼굴과 손이 마멸되고 오른쪽 어깨 및 불신부가 2등분으로 파손된 것을 제외하면 대체로 양호한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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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공주박물관 소장]
광배는 전체 높이가 209cm로 대형에 속한다. 또한 공주박물관에는 금학동사지에서 나온 것으로 알려진 보살입상과 광배를 갖춘 석불좌상이 더 있다. 하지만 위 정보를 제공하고 있는 사지총람에 나머지 두 불보살상에 대한 언급이 없으므로 사진을 추가하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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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공주박물관 소장]
우금치고개를 넘어 탄천면으로 향한다. 우금치고개 동학혁명기념탑은 전에도 다녀온 일이 있었다. 오늘도 잠깐 들렀지만 답사 주제와 맞지 않으므로 일단 건너뛴다. 한 가지만 적는다. 그때도 비에 젖었는데 오늘도 비가 오락가락하니 마음이 좋지 않다. 게다가 해가 갈수록 어딘지 버려지고 있는 듯한 분위기가 점점 더해지니 그 또한 나를 슬프게 한다.
灘川面 松鶴里 지덕골 磨崖如來坐像은 공주시 탄천면 송학리 지덕골에 있는 고려 전기의 마애불이다. 내비에 광명사, 혹은 탄천면 송학리 14번지를 입력하면 광명사 바로 앞에 도착한다. 하지만 광명사는 언덕 왼쪽 아래에 있는데다 표지판이나 현판도 없어서[내가 발견하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쉽게 알아차리지 못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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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광명사 맞은편으로 난 길로 묘역 앞을 통과해 직진하다 산 쪽으로 우회전한 뒤 왼쪽을 바라보면 마애불을 찾을 수 있다. 현재 산 쪽으로 우회전해 진행하는 길에는 밤나무(?) 묘목이 심어져 있다. 앞서 다녀오신 분이 잘 안내해주셔서 어렵지 않게 찾았지만 풀과 관목이 너무 자라 있어서 길도 희미하고 걷는 것도 힘이 들었다. 선과님께서 먼저 찾아본 뒤 자세한 안내를 남겨주셔서 뒷사람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으니 고마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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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덕골 마애여래좌상은 얕은 저부조와 선각으로 높이 3m 내외의 바위 중앙에 좌상으로 조성하였다. 머리는 나발로 육계가 표현되었으며, 양쪽 귀는 가늘고 길게 조각하였다. 이마에는 백호공이 남아 있으며, 눈은 일직선으로 가늘게 뜨고 있고, 입술은 두툼하게 육감적으로 표현하였다. 옷은 우견편단(右肩偏袒)이며 수인은 오른손은 들어 시무외인을 취하였고, 왼손은 배 앞에서 손바닥이 위를 향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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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은 광대뼈가 돌출되어 턱이 뾰족하게 느껴진다. 목이 짧아 1조의 굵은 선으로 삼도를 대신하고 있다. 의문은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 옆구리 쪽으로 완만한 6조의 선문이 있고, 왼쪽 팔꿈치에는 4조의 선문이 도식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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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상에서 오른쪽 다리를 밖으로 나오게 하는 길상좌를 취하고 있으며, 뒤꿈치가 의문의 표현으로 좁아졌다. 대좌는 표현되지 않았으며, 결가부좌한 다리에는 7조의 선으로 의문을 표현하였는데, 위쪽을 약간 좁게 처리하였다. 전체적인 양식과 도식화된 의문의 표현, 얼굴 조각 수법 등에서 대전 석교동 보문산 마애불좌상과 친연성을 띠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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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 있는 설명판을 보니 이 마애불은 공주시 향토문유적재 유형 제35호로 지정되어 있었다. 조성시기, 현재의 상태, 조각의 수준 어느 면에서나 이보다 높은 등급으로 격상되어도 이상할 것이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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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조불상 조각과 부처의 두 발이 새겨져 있는 대석이 남아 있다는 공주 정치리사지로 향한다. 문화유적총람, 디지털공주문화대전, 한국사지총람 등에 관련 자료가 있는데, 탄천면 정치리 산49번지가 절터다. 사전에 다음 거리뷰를 이용하여 절터 사진과 비교해보니 도로변 절터 입구는 탄천면 정치리 381-6번지에 해당하기에 이 주소를 입력하고 절터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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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터는 현재 논과 밭으로 개간되어 원형이 훼손되어 있다. 자료에는 ‘대석과 불상편은 현재 사역(寺域) 내에 방치되어 있으며, 이중 대석은 마을 주민들이 사지의 왼쪽 끝에 옮겨놓았다.’고 되어 있다. ‘불상편은 석불의 하단 부분으로, 대석 위에 세우기 위한 용도의 촉과 법의(法衣)의 아랫자락 일부를 확인할 수 있고, 대석은 하나의 화강암으로 만든 것으로, 입상을 세우기 위한 용도로 보이는 38×35×25㎝ 크기의 구멍이 뚫려 있다’고 한다. 또 ‘구멍 앞면에는 길이 45㎝, 너비 22㎝의 발이 얕게 돋을새김되어 있으며, 대석의 뒷면에는 광배(光背)를 세웠던 구멍이 뚫려 있다.’는 것이 이 유물들에 대한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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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리사지 불상편과 대석. 사진출처: 문화유적총람]
한국사지총람에는 ‘정치리(鼎峙里)사지는 2단의 대지로 이루어져 있으며, 상하단 사이에 약 4m 높이의 축석이 있다. 상단의 20여평의 평탄면은 금당지로 추정된다. 건물부재와 석탑재 등 각종의 석재와 기와편들이 발견된다.’고 적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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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적 근래의 자료인 디지털공주문화대전에는 ‘사역(寺域)은 약 5,289㎡에 이르는 비교적 넓은 지역으로, 2단의 대지로 이루어져 있으며, 상하단 사이에는 약 4m 높이의 축석이 있고, 상단은 약 661㎡의 평탄면으로 금당 터로 추정된다. 유물로는 각종 석재와 기와편이 발견되었다. 석재는 건물에 이용된 것으로 보이는 장대석과 노반석 및 기단 갑석(甲石) 등 석탑의 파편과 석조 불대석 등이며, 기와편은 무문이 주종을 이루지만 부분적으로 선문이 남아 있고, 간혹 굵은 선조문의 고식(古式) 기와도 발견된다.’고 적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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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아무 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조금 큰 돌이 보이면 달려가 이모저모 살펴보았지만 석불편과 대좌는 고사하고 장대석과 노반석 등도 찾아볼 수 없었다. 절터 오른쪽 너머 마을 입구까지 들어가 보았지만 나와 있는 사람도 없어서 탐문도 불가능했다. 역시 번듯한 석조유물이 아닌 파편만 남아있다고 전해지는 절터에서 그 파편을 확인하기란 쉬운 일이 아님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발걸음을 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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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 설명문 출처: 한국사지총람, 문화유적총람, 디지털공주문화대전]
첫댓글 지덕골 마애여래좌상에서 눈이 번쩍!
지금은 풀과 관목이 자라 길이 험하고요,
단풍이 물들거나 낙엽이 지기 시작할 때 다녀오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저도 보은지방에 몇군데 석조유물이 남아있는 폐사지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혼자는 조금 심심할테고 아들이랑 같이 한번 가을쯤 준비하고 있습니다
시나브로님의 답사열정에 박수를 드립니다...청주...
기대가 큽니다. 하지만 요즘처럼 풀이 웃자랐을 때는 적절한 시기가 아닌 것 같습니다. 저야 시기 따지지 못하고 다니지만요.
저는 사실 폐사지의 경우 뭔가 석조유물이 있는 곳까지만 찾아보려 하고 있습니다.
정치리사지의 경우는 그 존재 여부가 불분명해 찾아본 것이고요.
감사합니다.
캬아..뭔가 찾는다는 기쁨이 가득합니다..
잘 보았습니다
가장 저급한 수준의 답사자인 셈이지요^^
저 좋아서 하는 일이니 그래도 즐겁기만 합니다~~
묘암사에도 지장보살님이 계십니다. 감사합니다.
유일하게 선과님 답사기에만 나오는 내용이지요.
저도 좀 볼 수 있을까 하고 현판이 걸린 건물을 두드려 보았지만 묵묵부답이더군요.
슬라브 옥상이 노출된 건물 안에 있는 건가요?
아뇨!! 옥상에서 전면에 보이는 단층 대웅전? 에 있습니다.
대웅전이 잠기지 않았는지조차 확인하지 않았습니다.
대웅전은 바위벼랑에 붙여짓지 않은 건물이라 여기에 마애불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하지 못했지요.
선과님 답사기에 옮겨온 것일 수 있다는 표현이 있었던 것 같은데 간과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