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백파] ♣ 낙동강 1300리 종주 대장정(21)
생명의 물길 따라 인간의 길을 생각한다!
☆ [낙동강 종주순례] * 제8구간 (풍산→삼강) ⑤ 풍천 구담교-삼강
2020년 10월 15일 (일요일) [동행]▶ 이상배
(부용대)→ [구담정사]→ [구담교]→ 제방길→ [풍지교]→ 제방길→ [삼강나루]→ [점촌]
[오늘의 낙동강(洛東江) 종주] ― 풍산에서 삼강나루까지 33.6km
* [오늘의 종주 여정] ▶ [풍산 수동]→ 체화정→ 소산마을→ 가일마을→ 병산서원→ 하회마을→ 부용대-광덕교→ [구담교](안동시 풍천면)→ 신풍제→ 말무덤→ 길고 긴 제방길(예천 지보면)→ 나무테크 잔도→ 축동제(긴 제방길)→ ([정묘]→ [석문종택]→ [도남 조윤제 생가])→ 풍지교→ 청감제(의성군 다인면)→ 나무테크 잔도→ 청곡제→ (삼수정)→ 삼거리 쉼터(예천군 풍양군 우망리)-‘독립운동가 추산 정훈모선생 기념비’→ 동래 정씨 영모제 입구→ 뒷재→ 보람요양원(한학수 내외 마중)→ [삼강주막](고윤환 문경시장)→ 용궁(저녁식사)→ [점촌]
[참고 지도]
* [족손(族孫) 오정택(吳柾澤) 내외] ― 아낌없는 정성으로 성원해준 고마움
☆… 족손 오정택[澤孫]은 어제 아침 안동역에서부터 오늘 낮까지, 안동 임청각-풍산 수동(유숙)-풍산 명가 유적지-병산서원-하회마을-부용대-구담정사까지 함께 동행을 하며, 자신의 집에서 숙식을 제공하기도 하고, 가는 곳마다 안동문화에 관련된 자상한 정보를 제공하였으며, 특히 우리 해주 오문(吳門)에 관한 내력과 선대 조상의 묘소를 안내해 주었다. 그 아낌없는 성원에 뜨거운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다. …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안동시 풍천면 ‘구담정사’를 탐방한 후, 오후 2시, 낙동강 구담교 앞에서 본격적인 트레킹에 들어갔다. 원래는 광덕교(구담교에서 5km 상류)에서 출발할 예정이었으나, 이미 시간도 많이 지체되었고 오늘 가야 할 길이 워낙 멀기 때문에, … 구담교 앞에서 ‘택손 내외’의 배웅을 받으며 트레킹에 들어갔다. 우리가 걷는 길은 4대강 공사를 하면서 만들어진 낙동강 바이크 로드(Bike road), 즉 안동댐에서 부산 하구둑까지 장장 389km 이어지는 낙동강 강변을 따라서 나 있는 자전거길이다.
* [신풍제(堤)] ― 풍산 구담교에서… 예천 지보면 도화리까지의 제방 길
☆… 구담마을―구담교에서 오늘의 도착 포인트인 삼강주막까지는 23.4km이다. 그 중 ① 구담교에서 풍지교까지의 예천군 지보면 구간, '신풍제(堤)'-'축동제(堤)'로 이름 붙인 13.1km 강북의 제방길이다. 그리고 ② 옛날의 교량인 예천군 지보면의 풍지교에서 낙동강을 건너면 의성군 다인면인데, 다인의 풍지교에서 풍양면 우망리 삼강주막까지는 '청감제(堤)'-'청곡제(堤)'로 명명된 10.3km의 강남 제방 길이다.
☆… 10월, 가을의 날씨는 더없이 화창했다. 파란 하늘에 가을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지고 있었다. 맑은 가을 하늘 만큼이나 공기 또한 청정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상배 대장과 함께 걷는 길이다. 태백시에서 봉화의 분천역까지 함께 걸은 이후, 이제 다시 동행하는 것이다. 안동(반변천 합류지점)에서 삼강주막까지의 낙동강은 동(東)에서 서쪽으로 흐른다. 지금 낙동강은 우리가 걷는 길의 왼쪽에서 흐른다. 강은 평탄한 모래바닥 위로 아주 느리게 흐르고 있다. 강안의 둔덕은 온갖 수초로 뒤덮여 있는 습지다. 맑은 하늘을 바라보고 또 강을 둘러보며 유유하게 걷는다. '풍지교까지 11km'를 표시한 이정표를 지났다. 조금 나아가니 또 다른 이정표가 있다. 안동댐에서 44km, 부산 하구둑까지는 345km를 남겨두고 있다.
구담교에서 1.6km 내려온 지점, ‘말무덤’으로 들어가는 이정표가 서 있다. 이정표 길 아래 쉼터가 있어 그곳에서 옷차림을 가볍게 했다. 그런데 '말무덤'이라니? … 죽은 말[馬]을 묻은 무덤인 줄 알았더니, 알고 보니 사람의 말[言]을 묻은 무덤이란다. 참 엉뚱하지만, 여기에는 이 지역 특유의 예향(禮鄕)다운 지혜와 내력이 깃들어 있다. 지보면 대죽리에 있다.
말무덤
예천군 지보면은 낙동강이 굽이쳐 흐르는 곳으로 토양이 비옥해서 농사가 잘 되고 인재가 많이 나는 곳이다. 이 고장 사람들은 예천군에서도 기(氣)가 세고 깐깐하기로 유명하다. 선대부터 내려온 그 강한 자질 때문인가 이곳에서 학자와 관인, 선비, 우국지사가 많이 나왔다. 조선 초기 문과 급제자가 14명이나 배출 되는 등 예천이 조선시대 인구에 비해 전국에서 가장 많은 급제자가 나온 것이 이를 증명한다. 예로부터 자존심 강한 여러 성씨가 모여 살던 곳이라 늘 문중 간에 논쟁과 시비가 자주 일어나곤 했다. 감정의 골이 깊어지니 갈등이 심했다. 그래서 지역의 어른들이 지혜를 모아 ‘말[言]무덤’을 만들었다고 한다. 말무덤은, 지형상 개의 이빨에 해당하는 곳에 구덩이를 파고 거기에다 서로 무시하고 비방하고 헐뜯는, 비열한 말들을 뱉어내어 장사(葬事)를 지냈다는 무덤이다. 그리하여 서로 존중하고 포용하는 마음으로, 매사 도리에 맞게, 또 신중하게 말을 하라는 교훈을 담고 있다. … 그러고 보니, 온갖 거짓 정보가 횡행하고, 다른 사람을 속이거나 헐뜯는 말이 난무하는 오늘날에 시사(示唆)하는 바가 크다!
특히 오늘날 우리 정치판에서 난무하는 말의 폐해는 너무나 심각하다. 말로 인한 폐해는 사람 사는 곳 어디에나 발생한다. 누구든 살다보면 말실수를 할 수도 있고 격한 감정으로 인해 험한 말을 하기도 한다. 문제가 되는 것은, 국가 사회에 영향력이 큰 공인(公人)이나 지도자의 입에서 나오는 비열하고 위선적인 말이다. 탐욕을 가장한 이들의 기만적인 말은 우리 사회를 혼란하게 하고 엄청난 갈등을 유발함으로서 국민적 분열을 초래한다.
작금 그 심각성이 도를 넘었다. 예컨대, 겉 다르고 속 다른 조국(趙國)의 파렴치한 ‘내로남불’ 언행, ‘정의와 선행’을 내세우고 자기의 이욕을 챙겨온 윤미향의 양두구육(羊頭狗肉), 최근 살아있는 권력의 비리와 범죄를 덮기 위해 ‘검찰 개혁’이라는 미명하게 독기어린 칼날을 마구 휘두르는 추미애의 막말은 구밀복검(口蜜腹劍)이다. 일찍이 프랑스의 언어학자 뷔퐁이 말했다. “말은 곧 그 사람이다!” 그렇다. 말은 단순히 발음기관에서 나오는 목소리가 아니다. 말은 곧 그 사람의 마음[인간성]을 표현한다. 우리가 말을 문제 삼는 것은 바로 그 인간(人間)이다!
선인들이 만든 말무덤[言塚]의 지혜와 가르침이 신선하게 다가온다. 지금 이 시대에도 말무덤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대중을 현혹하는 선전 선동으로 세상을 뒤엎은 광화문 네거리나, 조삼모사의 기만적인 말로 온갖 악법을 만드는 여의도 국회의사당 광장에 큰 말무덤을 만들어야 한다. 날조된 연동형 비례대표제 선거법으로 다수 의석을 차지한 집권 여당은 의사 결정 과정을 무시하고 편법과 속임수로 독재적 악법을 강행처리 했다. 민주당 단독으로 공수처법, 5·18처벌법, 대북전단금지법을 통과시켜놓고 ‘이제 참다운 민주주의가 시작되었다’고 말했다. 개가 웃는다! 심각한 정신착란적 발언이 아닐 수 없다. 독재 입법을 만들면서 무수히 쏟아내는 그들의 위선적인 말들을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없다. 이런 말들을 다 쓸어담아 말무덤을 만들어야 한다. 무덤을 만드는 것은 국민적 각성과 강력한 분발이 필수적이다. 잘못된 것을 보고도 침묵하는 것은 국민 스스로 자기 무덤을 파는 것이다!
가장 심각한 것은 최고 권력자의 허언(虛言)이다. 2017년 5월 취임식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국민에게 한 말씀을 상기해 보면 얼마나 가증스러운 헛말을 늘어놓았는지 알 수 있다. 대통령은 취임사를 통해, ‘감히 약속드린다. 2017년 5월 10일은 진정한 국민 통합(統合)이 시작된 날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라고 하고, ‘오늘부터 저를 지지하지 않았던 분도 진심으로 우리 국민으로 섬기겠다’고 했다. 그러나 이는 번지르르한 수사(修辭)에 불과한 것이었다. '통합'은 그날로 무덤에 들어갔다. 취임하자마자 ‘적폐 청산’을 내걸고 내 편이 아닌 사람들에게는 무자비한 보복정치를 자행했다. 한번 먹이를 물면 절대로 놓지 않는 맹수처럼 끈질기게 물어뜯었다. 그 특유의 편 가르기 정치는 망국적 국민 분열(分裂)을 초래했고, 특히 '모든 사람들에게 기회는 평등(平等)하고 과정은 공정(公正)하며 결과는 정의(正義)로운 사회가 되도록 하겠다'고 한 다짐이나, ‘사람이 먼저다’라고 한 말은 모두 위장된 것이었다. 그것은 정권의 아류(亞流)들에게만 해당하는 말이었다.
문 대통령의 최고의 특기는 유체이탈화법이다. 정말 황당한 것은, 검찰총장에게 임명장을 주면서 “우리 윤 총장! … 살아있는 권력에 엄정하라”고 해놓고선 권력의 비리를 수사한다고 총장을 찍어냈다.(2020.12.16. 검찰총장 정직 2개월) 역사에 길이 남을 허언(虛言)이다. 협치를 말하고 협치를 한 적이 없다.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없다.
작금의 현실을 보면 맞는 말이 딱 하나 있다. ‘지금까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나라를 만들겠다.’는 말이다. 그가 말한 나라는 '자유민주주의'를 부정하는 불온한 이념의 나라,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라는 이름으로 포장한 종북 프레임 속에서 만들어지는 나라다. 수많은 선열들이 피 흘려 지켜온 ‘자유(自由)’가 차갑게 버려져 신음하고 있다. 자유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역사(교과서) 왜곡으로 기반을 다지고, 최근 북의 김여정의 질책을 받아 만든 대북전단금지법, 국민의 입을 틀어막는 5·18처벌법, 기업을 옥죄는 ‘경제3법’(상법·공정거래법·금융복합기업집단감독법) 등을 일방적으로 통과시킨 것이 그 단적인 예다.
대통령의 취임사는 결국 ‘위선적인 자작극’의 대사 같은 느낌이 든다. 지나고 보니 모두 기만적인 말잔치에 지나지 않았다. 약속을 저버리는 정치는 결국 국민의 신뢰(信賴)를 얻지 못한다. 분명한 것은 지금 나라가 극도로 분열되어 있고, 많은 국민들은 살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정치, 경제, 외교, 안보 등 국가 전반의 모든 상황이 매우 심각하다. 불편하지만 사실이다. 청와대 앞에 말무덤을 만들어 그 허언(虛言)들을 모두 장사지내야 한다. 그리고 지도자는 이 위기의 현실을 직시하고, 국민 앞에 잘못된 것을 정직(正直)하게 말해야 한다. … 대한민국이 어떻게 만들어진 나라인가. 역사에 죄를 짓지 않아야 한다.
☆… 나라를 걱정하면서 다시 길 위에 섰다. 자전거 전용의 널찍한 아스콘 포장길이다. 코로나 염병 때문인가. 길에는 다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파란 하늘 아래 쭉 뻗어있는 앞길, ‘신풍제(堤)’는 거의 직선으로 뻗어 있는 제방 길이다. 띄엄띄엄 서 있는 가로수가 원근법의 풍경화를 그린다. 제방 가까이 다가온 강물은 흐름을 멈춘 듯 호수를 이루고 있다. 그 아래쪽에 작은 보(洑)가 있기 때문이다. 길의 오른쪽에 알알이 익은 누런 벼가 가을햇살을 받아 풍성하게 넘실거린다. 길은 아득한 직선으로 이어지다가 강안 가까이 굽이를 돌고 다시 또 직선으로 이어진다.
* [축동제(堤)] ― 예천 지보면 도화리에서… 풍지교까지의 지보리 제방 길
☆… 오후 2시 53분, 아득한 직선의 길, 부산지방국토관리청에서 세운 ‘축동제(堤)’ 표지석을 지났다. 이상배 대장이 걸어가면서 피리를 꺼내어 분다. 지난 해부터 피리를 배우기 시작하였다는데, 특유의 청승이 깃든 '산타령'을 불고 있는 것이다. 맑은 하늘 아래, 호수 같은 강물을 끼고 백주의 강변 길을 걸으며 피리를 부는 사나이, 허연 구렛나루 수염이 눈부신 사나이 … 낙동강 여정의 색다른 풍경이다. 낙동강 물길은 완만하게 굽이를 돌아서 다시 아득한 직선의 길로 뻗어 있다. 가도 가도 끝이 나지 않을 듯한 길이다. 해가 설핏 서쪽으로 기우니 밝은 햇살이 얼굴 정면에 내린다. 우리가 걷는 제방 길 가장 자리에 군락을 이룬 억새꽃이 역광을 받아 눈부시게 넘실거린다. 아름다운 계절의 정취가 은은하게 느껴진다.
☆… 강안에는 둔덕이 없어 제방 가까이에 강물이 호수처럼 다가와 있다. 앞을 보니 불룩한 암봉이 강에 맞닿아 있고 그 절벽을 돌아가는 나무테크 잔도가 시설되어 있다. 잔도 가기 전에 '죽고서원' 이정표가 있다. 오른쪽으로 난 길을 따라 300m(5분) 들어가면 지보면 신풍리에 죽고서원(竹皐書院)이 있다.
죽고서원(竹皐書院)
죽고서원(竹皐書院)은 파평(坡平) 윤씨, 돈암(遯巖) 윤사석(尹師晳) 공과 죽호(竹湖) 윤섭(尹涉) 공의 학덕을 기리고, 후진 양성하기 위해 영조47년(1771) 지역 유림이 뜻을 모아 세운 서원이다. 고종 5년(1868)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 1911년 죽고서당으로 축소 중건되었다가, 2008년 10월 윤씨 문중에서 죽고서원을 복원하였다.
돈암(遯巖) 윤사석(尹師晳)은 성종 때 관직에 나아가 사헌부 집의에 이르렀으나, 연산군의 무도한 사화(士禍)로 많은 문사들이 화(禍)를 입는 것을 보고 그는 사모(紗帽)와 관복(官服)을 찢어버리고 청주의 옥화대로 내려가 만경정을 짓고 은거하였다. 강직한 성품의 윤사석은, 난세에 쓴 자신의 시문(詩文)마저 부끄럽다고 하여 모두 불살라버렸다. 율곡(栗谷)의 행장(行狀)에 ‘그가 평소에 저술한 것들이 은둔생활 중에 모두 불살라버려 후세에 전하는 것이 없으니 애석한 일’이라고 하였다. 서거정이 엮은「동문선」에 시 한 수가 전한다고 한다.
죽호(竹湖) 윤섭(尹涉, 1550~1642)은 윤사석의 5세손이다. 선조 25년(14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義兵)을 모아 왜적과 싸웠다. 그 공훈으로 장례원 사평(정6품)에 올랐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이곳 고향에 돌아와 망락당(望洛堂)을 짓고 후학을 가르치며 학문 연구에 전력했다.「칠송록 동유록」을 편찬하였으며 문집 2권이 있다.
‘망락당(望洛堂)’은 윤섭이 지은 고택인데, 후손 석남(石南) 윤우식(尹雨植, 1906~1934)이 여기에서 태어났다. 윤우식 선생은 일제강점기에 항일운동단체인 ‘무명당’을 만들어 활동하다가 일제에 체포되어, 고문을 받다가 순국했다. 서원의 바깥마당 가장자리에「獨立志士石南坡平尹公紀蹟碑」(독립지사석남파평윤공기적비)가 있다.
임금의 무도한 정치에 격해 관복을 찢어버린 조상의 기백이, 임진왜란 때 의병을 조직하여 활동하였던 후손 윤섭으로 이어지고, 일제 때 항일운동을 벌이다가 순국한 윤우식 선생으로 계승된다. … 불의(不義)를 보면 참지 못하는 강직한 기개(氣槪), 국난의 위기에서 구국의 선봉에 서는 결연함, 나아가 나라를 위해서 목숨까지 바치는 장렬함! … 지보의 파평 윤씨 집안의 고절한 가풍과 정렬한 선비 정신을 생각하며 숙연히 머리를 숙였다.
☆… 그리고 다시 이어지는 직선의 도로, 길옆의 논에서 이미 벼를 베었고, 농부가 트랙터로 땅을 갈고 있다. [이정표] 풍지교까지 5km를 남겨두고 있는 지점이다. 그 사이 강물은 넓은 습지를 사이에 두고 멀리 떨어져 흐른다. 길가의 감나무, 저 혼자 진홍색으로 곱게 익어 주렁주렁 달려 있다. 그냥 보기만 해도 풍성한 충실(充實)이 가슴을 채운다. 아, 우주의 숨결이 알찬 결실로 맺어 있으니 … 참 오묘하다!
☆… 길은 강안을 따라 완만한 곡선을 이루며 돌아가고 둑방 아래의 논에는 누런 벼들이 들판을 가득 채운다. 조금 나아가니 컴바인으로 벼를 수확하고 있는 광경도 보인다. 강안의 둔덕에 억새가 하얗게 빛나고, 들판에는 누렇게 익은 벼가 풍성하고 길가에는 파란 하늘 아래 붉은 감이 익어간다. 그야말로 ‘충실지미(充實之美)’의 계절이다. 자연 속에서 해마다 느끼는 일이지만 한국의 가을은 이렇게 넉넉하고 평화롭다!
☆… 다시 이어지는 직선의 길, 하늘의 빛나는 태양과 눈부신 억새꽃이 발걸음을 경쾌하게 한다. 넓은 강안의 습지를 사이에 두고 강은 멀리서 흐른다. 오른쪽에는 과수원이 있어 빨갛게 익은 사과가 아주 조밀하게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가을이 풍성하게 익어가는 길목, 때가 되면 이렇게 섭리의 결실을 한다. 우리가 가고 있는 제방 길 주위에는 인가가 없다. 보이는 것은 오직 아득하게 보이는 직선의 도로. 멀리 산 아래 마을이 보인다. 낮고 부드러운 산 능선 아래에 자리잡은 마을을 바라보니 정겨운 생각이 든다. 아, 저기가 동래 정씨의 집성촌이 있는 도장리 마을이 아닌가.
☆… 지금 내가 걷고 있는 ‘축동제(堤)’는 경상북도 예천군 지보면에 있는 낙동강 제방이다. 지보면 도장리에는 동래 정씨 석문종택(石門宗澤)이 있고, 천하 명당 정묘(鄭墓)가 있다. 필자가 석문종택에 대해 관심을 둔 것은 영강[문경중학교]의 친구 정성수 사장이, 나의 낙동강 종주 소식을 듣고 우정 전화를 하여, 예천군 지보에 동래 정씨의 유적이 있다는 것을 귀띔해 주었기 때문이다. … 그리고 사실 예천군 지보면 지보리에는 우리나라 국문학계의 원조 도남 조윤제 박사의 생가가 있다. 오늘 낙동강 지보면 구간을 걸으면서, 동래 정씨 문중의 성세와 지보리에서 태어나신 도남 선생의 학덕을 생각했다. … 밝은 가을 해가 과거로 가는 시간의 문을 환하게 열어 주었다.
석문종택(石門宗澤)과 정묘(鄭墓)
☆… 내가 걷고 있는 낙동강 제방 길, 지보면 황금 들판 저쪽 도장리에 ‘석문종택’과 ‘정묘(鄭墓)’가 있다. 인품이 중후한 친구 정성수에게서 예천군 지보에 세거(世居)하고 있는 동래 정씨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정씨 문중과 그 유서(由緖) 깊은 유적지에 대해 탐구해 보았다.
[정묘(鄭墓)] ― 동래 정씨 직제학공 정사(鄭賜)의 묘소
‘정묘(鄭墓)’는 예천군 지보면에 있는 조선시대 초기 예문관 직제학(直提學), 진주목사를 지낸 정사[鄭賜, 1400년(정종 2)~1453년, (단종1년)]의 묘이다. 동래 정씨 정사(鄭賜)는 결성현감을 지낸 삼수정(三樹亭) 정귀령(鄭龜齡)의 5형제 중 셋째 아들이다. 이른바 ‘정묘(鄭墓)’는 조선 8대 명당 중의 최고로 불린다. 경상북도 예천군 (지보면소재지에서 동쪽으로 3.5km 떨어진) 도장리 태을산(太乙山) 아래에 자리하고 있는데, 풍수적으로 길지 중의 길지로 알려져 있다. 형세를 살펴보면 아름다운 여인이 비스듬히 누워서 낙동강 건너 우뚝 솟은 비봉산(飛鳳山)을 마주 보고 있는 형국[美女側臥形]이다. 비봉산 앞에 낙동강이 굽이쳐 흐르는 절묘한 음양의 조화를 이루고 있다.
정묘(鄭墓)
낙동강 건너 비봉산에서 바라본 정묘(鄭墓)
정묘(鄭墓)에서 마주보는 조산 비봉산(飛鳳山)
풍수가 '하국근'은 정묘(鄭墓)를 이렇게 해설한다. “정사(鄭賜)의 묘는 여성을 닮은 산이다. 전체를 아우르는 수려하고 단정한 주산이 그러하며, 묘소가 들어선 혈처가 그러하다. 반대편에 있는 조산인 비봉산(飛鳳山)은 우람한 남성형이다. 마을 주민들은 탕건을 쓰고 버티고 앉은 남정네라 했다. 그렇다고 이 묘의 주산인 옥녀봉[太乙峰]이 나약하다는 말은 아니다. 작지만 들판에 우뚝 선 힘 있는 산이다. 주위의 산세가 모두 그러하다. 어디 한군데 험한 곳이 없다. 어머니와 같이 한없이 정겹게 느껴지는, 그런 부드럽고도 강건한 산이다. 남녀가 만나 짝을 짓듯 태을봉과 비봉산의 정기가 합쳐 정씨 가문을 조선조 명문(名門)으로 키운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이 묘의 혈장은 여성의 하체를 닮았다. 쭉 뻗은 두 다리며 오목한 혈처(穴處)가 영락없다. 흘깃 돌아다보는 남정네에게 치부가 보일까 부끄러워 청룡을 길게 끌어 가리기도 한다. 이는 여자에게 필요한 거문고다. 이른바 횡금안(橫琴案), 풍수용어로 청룡장안(靑龍長案)이다. 이런 국세에선 뛰어난 인물들이 속출한다고 했다.
산(山)은 물을 만나야 조화를 이룬다. 그것도 직선으로 흐르거나 치고 들어오면 재미가 없다. 둥글게 감싸 안듯 흘러야 한다. 이 묘의 바깥을 감싸 안는 물은 낙동강이다. 큰 명당에 큰 물인 셈이다. 비봉산 아래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낙동강은 말 그대로 환포다. 거기에다 단단한 토질에 꿈틀거리는 내룡맥(來龍脈), 청룡과 백호도 두 팔을 벌려 혈장을 잘 감싸고 있다. 이만한 길지(吉地) 조건을 갖춘 곳도 드물다. 그러기에 8대 명당에 든 것일 게다.
이 묘가 위치한 마을의 이름은 지보리다. 조금은 어감이 이상한 이 지명의 유래가 재미있다. 여자의 하체를 닮은 묘 주변의 생김새에 연유한다는 게다. 이것은 풍수학계뿐 아니라 일반인에게도 널리 알려진 얘기다. ” ― [하국근의 風水기행] ‘玉女端坐形 예천 鄭賜의 墓’ (매일신문 2009.02.21.)
예문관 직제학 정사(鄭賜)는 삼수정(三樹亭) 정귀령(鄭龜齡) 공의 아들이다. 직제학 정사의 둘째 아들 정난종은 성리학자이지만 판서를 거쳐 우참찬에 이르고, 손자 정광필은 영의정에 올랐는데 덕망이 높았다. 그리고 정광필의 손자 정유길은 대제학, 좌의정을 지냈다. 이렇게 정사의 후손에서, 손자 정광필을 비롯하여 정승 13명이 나왔고 문과 급제 123명, 그리고 수많은 청백리를 배출하여, 정묘(鄭墓)는 천하에 둘도 없는 발복터로 알려져 있다. 정묘(鄭墓)는 부산에 있는 동래 정씨 시조 정문도(鄭文道) 공의 묘소와 함께 명당 중의 명당으로 꼽힌다.
마을이름을 익장리(지금은 도장리라 한다)라 한 것도 이 ‘정묘(鄭墓)’의 지형에서 유래한다. 묘터의 지형이 미녀가 비스듬히 누워있는 옥녀측와형(玉女側臥形)이므로 화장(化粧)을 더한다는 뜻으로 ‘익장(益粧)’이라고 하였다가, 너무 직설적이라고 해서 ‘익장(益庄)’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그리고 정묘의 재실을 ‘지보재(知保齋)’라 했고, 후에 석문이 서당의 이름을 ‘지포서실(芝圃書室)’라고 썼다. 지포는 지보의 변용이다. 원래 이곳이 ‘지보마을’인데, 지금은 ‘지보면(知保面)’의 이름이 되었다. 지보는 정묘(鄭墓)의 자리, 옥녀의 혈처를 두고 하는 말이다.
동래 정씨 '석문종택(石門宗澤)'
석문종택(石門宗澤)은 예천군 지보면 도장골의 마을 안쪽에 있다. 정영방(鄭榮邦, 1577~1650)이 세운 것이다. 종택 마을 입구에 ‘석문정선생유허비(石門鄭先生遺墟碑)’가 있다. 정영방은 정사(鄭賜)의 맏형 정옹의 후예이다.
동래 정씨(東萊鄭氏) 정영방(鄭榮邦) 공은 자가 경보(慶輔)이고, 석문(石門)은 그의 호(號)다. 정식(鄭湜) 공의 둘째 아들로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의 제자이다. 당시 상주(尙州)의 우복(愚伏)은 퇴계의 학통을 이은 서애 류성룡의 제자로 이조판서와 대제학을 지낸 영남 유림을 대표하는 학자였다. 석문(石門) 정영방(鄭榮邦)은, 선조 38년(1605년) 진사가 되었으며, 광해군 시절의 혼란한 정치와 병자호란(1636년) 등으로 벼슬을 그만두고 이곳에 낙향하여 학문 연구로 일생을 보냈다. 시(詩)에 뛰어나고 문장(文章)에 능했으며, 덕행(德行)과 효우(孝友)가 매우 돈독하였다고 전한다. 석문종택은 광해군 1년(1609년)에 지었다고 전한다.
정영방(鄭榮邦) 공은 예천군 낙동강 건너 풍양면 청곡리 별실(別室) 출신이다. 정영방은 늘 이르기를 “세상 사람이 공로나 명예를 중히 여기고, 정신을 차리지 못하니 안타깝다. 이는 이기심의 유혹 때문이니, 큰 잘못이다”고 하였다. 특히 공(公)은 고향에 대한 애착심이 강했다. 국가의 과한 노역과 세금으로 농민들의 형편이 어려워지자 용궁현(龍宮縣)의 세금을 줄여달라고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당시 지보는 용궁현에 속해 있었다. 석문(石門)은 『팔악보(八樂譜)』라는 시와 문집 3권, 그리고 『암서만록(岩棲漫錄)』을 남겼다. 나중에는 지보면 도장리 ‘익장(益庄)마을’에서 지포서실(芝圃書室)을 세우고, 독서를 즐기며 제자들에게 글을 가르쳤다. 지보면 마산리의 완담사(浣潭祠)에 제향되었다.
현재 석문종택에는 14대 종부 이필원(78) 여사가 홀로 종가를 지키고 있다고 한다. 아들인 종손 정호윤(52)씨는 일찍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다고 한다.
도남(陶南) 조윤제(趙潤濟)
또 예천군 지보면 지보리에는 우리나라 국문학계의 거두 '조윤제 박사의 생가(生家)'가 있다. 도남(陶南) 조윤제(趙潤濟, 1904~1978) 박사는 우리나라 국문학 연구의 제1세대 개척자로서. 한국 국문학 주춧돌을 놓은 분이다. 나는 대학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하였으므로 도남 선생에 대해서는 각별한 공경심을 갖고 있다. 내가 국문과에 들어가 제일 먼저 전공과목 교재로 손에 접한 것이 조윤제 박사의『국문학개설』과『국문학사』였는데, 그 두 권의 책은 명실공히 우리나라 국문학의 고전(古典)이다. 이를 통하여 나는 우리나라의 국문학의 세계와 흐름을 알게 되었다. 이후에 나온 거의 모든 국문학계의 저술은 이 두 권의 책을 바탕으로 씌어진 것이다. 20세기 최고의 국문학자인 서울대 김윤식 교수가 조윤제 박사의 학통을 이은 고제자이다. 김윤식 교수는 수백 권의 국문학 연구서와 평론을 썼다. 조윤제 박사는 국문학계의 전설(傳說)이다. … 그 전실이 태어난 곳이 바로이곳 예천군 지보이다!
조윤제(趙潤濟) 선생은 본관이 함안(咸安)이요, 호가 도남(陶南)이다. 아호를 ‘도남(陶南)’이라고 한 것은, 퇴계 의 ‘도산서원(陶山書院)의 ‘남(南)쪽’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지었다고 한다. 조윤제 박사가 퇴계 선생을 지극히 존경한 데서 비롯되었다. 조윤제 선생은 생육신 중의 한 분인 조려(趙旅)의 16세손이다. 선생은 1904년, 이곳 경상북도 예천군 지보에서 아버지 조용범(趙鏞範) 공과 청주 한씨(淸州韓氏) 사이에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924년 3월 대구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같은 해 4월 경성제국대학에 예과가 생기자 제1회생으로 입학했다.… 1926년 4월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문학과에 올라 ‘조선어문학’(국어국문학)을 전공한 유일한 학생이 되었다.
조윤제(趙潤濟)는 모든 것이 여의치 않자 우리나라 민족정신의 결정인 ‘고전문학 연구’로 삶의 방향을 튼다. 그는 민족을 위한 학문이 독립을 위한 길이라 여기면서 학문에 몰두했다. … 1931년 ‘조선어문학회’를 조직하여 국문학회 잡지로서는 최초인「조선어문학회보」를 간행했다. 1932년 경성사범학교(지금의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교유(敎諭)에 임명되었으며, 1934년 선생은 계몽주의 사조에서 벗어나 실증(實證)과 과학(科學)을 학문의 뿌리로 삼고자 했다. 이를 바탕으로 일본과 학문으로 겨루고자 이병도, 송석하, 손진태 등과 함께 ‘진단학회(震檀學會)’를 만들고 기관지「진단학보」를 펴낸다.
1937년 조윤제 선생은『조선시가사강(朝鮮詩歌史綱』을 엮어 국문학역사상 개척자로서 업적을 세웠고, 1949년『한국문학사』『한국시가의 연구』『국문학개설』등 4대 저서를 남겼다. 뒤에 서울대, 성균관대, 영남대학 교수 및 대학원장을 거치면서 학계활동에서도 큰 기여를 했다. … 나는 딱 한 번 선생을 뵈온 적이 있다. 어느 해 국문학 학술발표대회에서였다. 그때 조윤제 박사가 기조 강연을 하셨다. … 선생은 1978년에 작고하셨다.
☆… 마전배수장을 지나니 저만큼 다리가 보인다. 정묘(鄭墓)와 석문종택(石門宗澤) 그리고 도남(陶南) 선생을 생각하며 걷는 사이, 낙동강을 가로지르는 다리에 이르렀다. 그곳은 예천군 지보(면)에서 풍양과 의성군 다인으로 넘어가는, 새로 건설한 28번 국도의 지인교이다. 차로인 지인교 옆에는 옛날의 다리 풍지교(豊知橋)가 있다.
* [청감제(堤)] ― (풍지교) 의성군 다인면 용곡리에서… 직선의 제방 길, 한학수 사장의 전화!
☆… 오후 5시 ‘풍지교’에 도착했다. 차가 다니는 지인교 옆에 있는 풍지교는 예천군 지보면과 의성군 다인면을 잇는 콘크리트 교량이다. 지인교는 새로 확장된 도로(28번 국도)에 이어지는 새로 건설한 교량이다. 그러므로 오래된 풍지교는 지금 차들이 통행하지 않는 인도교로, 낙동강 종주 자전거가 다니는 바이크 로드로 활용되고 있다. … 풍지교를 건넜다. 다리 중간에 예천-의성의 경계를 표시해 놓았다. 다리 아래 낙동강 강물은 아주 느리게 흐른다. 해가 서쪽으로 많이 기울었다. 가을의 짧은 해가 함지(咸池)로 떨어지는 시간, 금방 어둠이 몰려올 것이다.
차들이 통행하는 … 지인교
풍지교에서 바라본 삼강 쪽의 낙동강 저녁 풍경
☆… 다리를 건너니 의성군 다인(다인면 용곡리) 땅이다. 여기에서 삼강주막까지는 10km 이상을 걸어야 한다. 이제부터 걸어가는 길은 낙동강의 남쪽 강변이다. ‘청감제(堤)’ 표지석이 있다. 먼 길이 이어진다. 아득한 직선의 도로가 또 가슴을 막히게 한다. 해는 곧 저물어 가는데 갈 길은 멀었으니 마음이 바빠진다. 오직 걷고, 걷고, 걷는 길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아무리 멀어도 가다보면 끝이 있다'는 신념이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게 하는 원동력이다.
풍지교를 건너는 중에 점촌에서 고향의 절친 한학수 사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삼강 도착 시간이 언제쯤인가?’ 마중 나올 준비를 하고 묻는 것이었다. ‘지금은 예천 지보 풍지교인데, 갈 길이 아직 많이 남았으니 좀 더 진행한 후에 연락하겠다’고 말했다. ‘점촌에서 삼강까지는 약 30분 정도면 갈 수 있다’고 하면서 ‘지금 사무실에서 대기하고 있으니 다시 연락을 해 달라’고 했다. 마음 써 주는 친구의 마음이 여간 고맙지 않다. 날이 어두워지는 길목에서!
☆… 오후 5시 30분, 테크 잔도를 지났다. 그 아래로 작은 개천이 낙동강에 유입된다. 길가의 논 가장자리에 벼를 수확하던 컴바인이 멈추어 서 있다.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농부도 하루의 일과를 이미 마친 듯했다. 다시 이어지는 직선의 도로, 길의 양쪽에 억새꽃이 빽빽하게 늘어서 있어 장관을 이룬다. 해가 기울어 밝은 햇살을 받지 못해 억새가 눈부시지는 않아도 가을의 정취가 물씬 느껴진다. 그런데 낙동강에 땅거미가 내리기 시작하더니 서서히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날이 저무니 기온도 뚝 떨어져 차가운 냉기가 온몸에 엄습했다. 이 대장이 방한복으로 갈아입고, 나도 방한복 상의를 챙겨 입었다. 그리고 걸음을 재촉했다. 이 대장은 랜턴을 꺼내어 이마에 장착했다.
* [청곡제(堤)] ― 예천군 풍양면 청곡리에서… 우망리 삼거리까지의 제방 길
☆… 오후 5시 52분, ‘청곡제(堤)’ 표지석을 지났다. 하늘에는 엷은 구름이 드리워져 있고 해는 보이지 않았다. 시간적으로 보아 해는 이미 서산에 진 듯했다. 아직도 갈 길은 먼 데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길은 아득하게 보이고 멀리 보이는 산모롱이를 돌아가면 ‘삼강이 곧 나오겠지’ 기대를 하며 힘을 내어 걷는다. 그런데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이 대장의 상태가 좋지 않다. 젊었을 때 사고로 발목을 다쳐 철심을 넣어 수술한 것이 문제였다. 하루 20km 이상을 걸으면 발목에 통증이 오기 때문에 빨리 걷지를 못하는 것이다.
그 동안 점촌 한학수 친구에게 두어 차례 전화가 왔었다. 그러나 위치를 정확하게 말할 수 없어 다시 연락하겠다고 했다. 괜히 일찍 나와서 기다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 오후 6시 13분, 길의 가장자리에 두 번째 ‘청곡제(堤)’ 표지석이 만났다. 그러고 보니, 두 개의 표지석 사이의 제방이 청곡제이다. 참으로 멀고도 멀게 느껴진 길이었다. 이제 사위는 완전히 캄캄한 밤이 되었다. 오른쪽에 흐르는 낙동강도 보이지 않고 왼쪽의 들판도 어둠 속에 가라앉았다. 한 줄기 랜턴의 불빛으로 길을 밝히고 어둠 속의 길을 걸었다. 한 발 한 발 하루의 고단함이 실린, 무거운 발걸음이다. 그 사이 유서 깊은 '삼수정'을 지나왔다.
☆… 캄캄한 어둠 속에 종주는 계속되었다. 풍지교에서 우망리 삼거리 [청곡제] 사이에 유서 깊은 ‘삼수정(三樹亭)’이 있다. 어둠 속에서 확인하지 못하고 그냥 통과한 것이다. 일모도원(日暮途遠)이다. 날은 저물고 갈 길은 멀다. 이 칠흑의 어둠 속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걷는 것뿐이었다. 말없이 걸었다.
* [삼수정(三樹亭)] ― 예천군 풍양면 청곡리 정귀령(鄭龜齡) 공이 지은 정자
동래 정씨(東萊鄭氏)가 예천 지역에 여러 마을에 집성촌을 이루게 된 연원은 고려 공민왕 때 정승원(鄭承源) 공이 고려 말의 정치적 혼란을 개탄하여 용궁현(龍宮縣) 구담촌(九潭村, 지금의 풍천 구담리)에 낙향하여 터를 잡았는데, 조선 초에 그 손자 삼수정(三樹亭) 정귀령(鄭龜齡)이 예천군 풍양면 청곡리 이곳 ‘별실’ 마을에 정착하게 되었고, 삼수정 정귀령 공의 아들 정사(鄭賜)가 죽은 뒤 강 건너 지보면 도장리(道庄里. 益庄里) 태을산 아래 묘지를 쓰고 난 후, 그 후손들이 낙동강을 건너 지보면에 옮겨 살게 되었다. 삼수정(三樹亭)은 정귀령 공이 청곡리 별실 마을, 낙동강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세운 정자이다. 공(公)이 이를 아호로 삼았다. 이렇게 하여 낙동강(洛東江)을 중심으로 예천군 남쪽의 풍양면 우망리, 청곡리와 낙동강 북쪽의 예천군 지보면 일대가, 동래 정씨가 크게 번성한 세거지가 되었다. 그래서 풍양(豊陽)과 지보(知保)를 잇는 낙동강 다리가 풍지교(豊知橋)이다. 옛날에는 나룻배로 건너다녔다.
* [풍양면 우망리 삼거리] ― 바이크 로드를 따라가는 캄캄한 밤길, 한학수 사장과의 통화
☆… 오후 6시 30분, 예천군 풍양군 우망리 삼거리 포인트에 도착했다. 가까이 ‘독립운동가 추산 정훈모선생 기념비’가 있는 삼거리인데, 여기에서 곧바로 산(대동산)으로 올라가 흥국재를 넘어 삼강나루로 가는 길이 있고, 또, 낙동강 강안을 따라 ‘쌍절암(雙節巖)’—‘삼강주막’으로 가는 길(4.1km)과 좌측의 우망리 도로를 우회하여 가는 바이크로드(4.7km)가 있다. 갈라지는 곳이다. 어둠 속에서 장방형 오석에 새긴 ‘추산정훈모선생추모비’를 찾아 경건한 마음으로 비석을 어루만지며 고개를 숙였다. … 우리는 캄캄한 밤에 강안을 따라서 가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하여 바이크 로드를 따라 길을 잡았다. … 그리고 점촌 사무실에서 기다리고 있는 한(韓) 사장에게 전화를 했다. ‘여기는 낙동강 우망리 삼거리’, 좌측으로 가는 길을 잡아 고개를 넘어서 ‘보람요양원’이 있는 곳으로 가려고 하니, 거기에서 만나자고 했다.
「독립운동가 추산(秋山) 정훈모(鄭燻謨) 선생 기념비」
1888년 3월 20일 예천군 풍양면 이곳 우망리에서 태어난 , 동래 정씨 추산(秋山) 정훈모(鄭燻謨) 선생은 1914년 27세의 나이로 고향을 떠나 남만주 지역에서 독립투쟁을 시작하여, 1918년 대한독립단 창단과 성동학교 설립에 참여하여 청년 광복군 배출에 힘썼다. 1919년 서로군정서에 가입하여, 안동 출신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 지사의 참모로서 활동하며, 일본군 주요시설을 파괴하고 관공서를 불태우는 등 항일무장투쟁에 집중했다.
추산 선생은 1939년 초 일본군과 교전 중 총상을 입고 일본군 헌병대에 체포되어 자무쓰감옥에서 심한 고문을 받고 병보석으로 석방되었으나, 1939년 4월 7일 조국광복을 보지 못한 채, 고문 후유증으로 향년 52세로 25년간의 독립투쟁을 마감하고 순국(殉國)했다.
정부는 1980년 대통령 표창을, 1991년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후손들은 중국에서 고인의 유해를 찾지 못하자, 지난 해 2019년 4월 9일 고인의 위패(位牌)를 우망리에 묻힌 아내의 유해(遺骸)와 함께 국립 서울현충원에 안장했다. 그리고 지난 해 2019년 10월 12일 ‘추산정훈모선생기념사업회’에서는 선생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해 선생의 고향인 이곳 우망리 쌍절암 생태숲길 입구에「독립운동가 추산(秋山) 정훈모(鄭燻謨) 선생 기념비」제막식을 거행했다. 이 자리에는 정지영 후손과 동래 정씨 수찬공파 종친회 정영 회장, 예천군 관계자 등 100여 명이 참석했다. 국가보훈처는 2019년 12월 추산 정훈모 선생 기념비를 현충시설로 지정했다.
☆… 우리는 우망리 쌍절암(雙節巖) 생태숲길 입구 삼거리에서 왼쪽의 길을 잡아, 차들이 다니는 도로를 이용하여, 어둠 속에서 고개(뒷재)를 넘었다. 산록에 동래 정씨 영모재가 있는 완만한 경사의 고갯길이다. 한참을 걸었다. 어두운 밤 가끔 차들이 질주하고 있었다.
* [풍양 '보람요양원' 입구 가로등] ― 캄캄한 밤, 고맙게 마중 나온 친구 내외
☆… 저녁 7시, 드디어 ‘보람요양원’ 입구, 자연석 표지석 앞에 이르렀다. 늦은 시각, 길가의 높은 전주에 희미한 가로등이 하나 매달려 있다. 어둠 속에 말없이 친구를 기다렸다. 목이 마르고 배가 고팠다. 몸은 물먹은 솜처럼 무겁고, 다리는 통나무처럼 뻑뻑하여 잘 굽혀지지도 않는다. 승패도 없이 악전고투를 끝낸 지친 병사처럼 몸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러나 오늘의 포인트(목적지)인 삼강까지 왔다는 자부심과 안도감에 가슴이 뿌듯했다. 동행하고 있는 이상배 대장도 많이 힘든지 아무 말이 없다. … 생각보다 꽤 오랜 시간에 경과한 후에, 한 사장이 환하게 불을 밝히고 우리 앞에 도착했다. 부인 이경임 여사와 함께였다! 밤중에 네비게이션를 따라오다 보니 영풍교로 우회하여 오느라 늦었다고 했다.
나의 친구 한학수
훤출한 키에 준수한 면모를 지닌 한학수(韓學洙) 사장은, 점촌에서 사업을 하며 변함없이 고향을 지키고 있는 친구다. 부인 이경임 여사와는 어린 학창시절부터 눈에 콩깍지가 씌어 알콩달콩 사랑을 시작하여 이쁘게 연애하고 멋지게 결혼까지 했다. … 자녀들을 낳아 훌륭하게 길러서 모두 성혼까지 시켰다. 그리고 일흔이 넘은 지금도 두 사람은 연인처럼 살아가고 있다. 멋진 외양만큼이나 훌륭한 인품을 지닌 한 사장은 지역사회를 위하여 많은 일을 하는 명사(名士)이고, 재덕(才德)을 겸비한 이경임 여사는 지금도 사회활동을 왕성하게 하고 있지만, 경상북도의회 도의원(道議員)을 지낸 분이다.
… 나는 중학교 재학 시절, 두 사람의 ‘수상하고 순정한 사랑’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면서, 나름 그들의 사랑에 일조(?)를 했으므로 여간 특별한 사이가 아니다. 한 사장은 내가 태백에서 낙동강 종주를 시작했다는 소식을 듣고, 점촌에서 가까운 삼강을 지날 때면 반드시 나와 보겠다고 하더니, 오늘 우정 마중을 나온 것이다. … 오늘 두 분의 마중이야말로 나에겐 어둠 속의 빛이었다. 하루 종일 전장에서 지쳐 기진맥진한 병사가 구원병을 만난 것처럼 반가웠다. 거기에다 친구는 부인까지 대동하여 나오니, 황공하여 몸 둘 바를 몰랐다. 미안하고 고맙고 정겹고 반가웠다. 속으로 무엇이 울컥 솟았지만 꿀꺽 삼키고, 밝게 인사를 나누며 승용차에 올랐다.
* [삼강주막] ― 고윤환 문경시장이 보내온 따뜻한 마음
☆… 우리는 한(韓) 사장의 차를 타고서 삼강주막 주차장으로 들어갔다. 거기에는 나의 낙동강 종주를 격려하기 위해, 고윤환 문경시장이 보낸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의 삼강 도착이 늦어지는 바람에 어둠 속에서 많이 기다린 것이다. 고(高) 시장의 따뜻한 성원의 메세지를 받았다. 고마움과 함께 미안한 마음이 더욱 컸다.
고윤환 문경시장은 나의 중·고등학교의 동문 후배로, 나와는 각별한 우정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다. 나의 낙동강 종주 사실을 알고, 문경에서 가장 가까운 삼강을 통과할 때 꼭 나가서 선배님을 응원하겠노라고 말을 했었다. 그런데 오늘 저녁 회의가 있어, 대신 사람을 보내어 그 마음을 전한 것이다. 그 정성과 마음이 고맙기도 하지만 이래저래 번거롭게 폐를 끼친 것 같아 미안하기 짝이 없었다.
문경시장 고윤환
고윤환 시장(高潤煥, 1957)은 본관이 개성 고씨로, 문경중·고등학교 재학시절 성적이 우수한 장학생이었고, 또 학생회장으로 활약하는 등 남다른 자질과 리더십을 가지고 있었다. 대학도 4년 내내 장학금을 받고 다녔다. 1980년 제24회 행정고시에 합격하여 관계(官界)에 진출했다. 특유의 명민함과 탁월한 행정능력을 발휘하여 인천광역시와 중앙부처의 요직을 두루 거치고서 행정자치부 지방행정국장에 올랐고, 이어 부산광역시 행정부시장까지 역임했다. 그 사이 틈틈이 공부하여 행정학 박사 학위까지 받았다. 그리고 30여년의 공직생활을 훌륭하게 마무리했다.
2012년 4월 문경시장에 출마하고 당선되어 지금까지 ‘살기 좋은 일등 문경’을 만드는데 혼신의 노력을 다하고 있다. 나는 그의 청렴하고 헌신적인 공직생활을 존경한다. 고윤환은 아름다운 문경인이다. 그는 비록 유복자로 태어났지만,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용문(龍門)의 꿈을 품고서 성장하였고 사회적 공인(公人)으로서 한결같이 흥덕(興德)의 길을 걸어왔다. 나는 늘, 그가 성공적인 시장이 되기를 기원하며 모든 성원을 아끼지 않는다. 그리고 그의 재능과 덕망(德望)이 더욱 빛을 발하여 세상을 위해 더 많은 일을 해 주기를 바란다. … 고(高) 시장도 나를 각별히 대해 준다. 오늘도 낙동강을 종주하는 나에게 몇 차례 전화를 하고, 삼강 도착시간을 묻는 등 정성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사람을 보내어 그 따뜻한 마음을 전해온 것이다.
* [친구 한학수 내외의 정성] ― 따끈하고 구수한 국밥, 그리고 … 점촌
☆… 한학수 사장 내외는 낙동강 삼강까지 몸소 차를 몰고 나와서, 저녁식사까지 대접해 주었다. 뜨거운 국물이 먹고 싶다는 나와 이상배 대장의 말에 용궁의 ‘순대국집’으로 차를 몰았다. 근래 ‘용궁순대’는 함경도 아바이 순대나 천안 병천순대만큼이나 전국적으로 알려져 있다. 눈물이 날 정도로 정말 맛있게 먹었다. 따끈하고 구수하고 푸짐한 국밥만큼이나 한 사장 내외의 따뜻한 정성이 나그네의 마음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두 분은 우리를 태우고 점촌으로 이동하여 깨끗한 숙소까지 잡아주었다. 두 분의 우정에 뜨거운 감사를 드린다. … 잊을 수 없다!
☆… 오늘의 낙동강 종주는, 족손 오정택의 차편으로 안동 풍산에서 시작하여, 유서 깊은 안동 풍산문화권의 유적을 돌아보고 이어서 풍천 구담교에서 트레킹을 시작하여 예천 풍양의 삼강주막까지 장장 총 34km를 이동해 왔다. 특히 안동을 대표하는 명문 종가의 마을과 세계적인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병산서원과 하회마을을 탐방하고 나서, 멀고 먼 낙동강 제방 길을 걸어서 왔다. 여러 곳을 탐방하고 나서, 또 먼 거리를 주파하기에는 가을해가 너무 짧았다. 정진규 시인의 표현처럼 정말 '가을해는 아깝다!' 날이 저물어 캄캄한 어둠 속에서 삼강에 힘겹게 도착했는데, 정겨운 고향 친구 내외가 마중을 나오고, 또 문경시장의 환대까지 받았으니 참으로 감동적인 여정이었다. 어둠 속에 차를 타고 삼강교를 지나면서 나는 낙동강의 숨결을 느꼈다. 낙동강은 늘 그렇게 살아서 숨 쉬고 있다. …♣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