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조금 딱딱한 글이 될 수 있음을 미리 알려드리고, 시작할까합니다.
부산 사상구 덕포동의 한 여학생이 성폭행 후 살해당한 사건이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이미 이 사건은 모든 국민들의
초유의 관심사가 되어, 모든 언론 및 대중 매체들은 이 사건에
너나 할 것 없이 달려 들고 있다. 비슷한 말과 이미지들을 나열해가며
사건을 재구성하는 방식이 너무나 진부하기에 나는 이 사건이 전혀 센세이션하지 않다.
김길태가 짜장면을 먹고 샤워를 한 일들을 중요한 보도자료로 내보내는
9시 뉴스의 태도를 우리는 뭐라 말하면 좋을까.
국민의 알 권리를 충실하게 보장해주는 훌륭한 언론. (지랄)
나는 이러한 보도 방식 자체의 문제점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여론몰이식 언론사의 행태들은 너무나 상투적인 일이기에
거기에 대해서 다시 말을 덧붙이는 것은 불필요한 일이라 생각된다.
또한 이 글은 일본의 보수언론이라 할 수 있는 요미우리, 아사히 신문에서
전한 '이명박 대통령 각하'에 대한 어처구니 없는 소식에 대한 진위여부를
밝히기를 꺼려하는 권력집단이 정치적으로 김길태 사건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냐
하는 의문에 몇 글자 보태려는 의도 또한 가지고 있지 않다. 이것 또한 너무나
분명한 윤곽을 보이기에 말을 덧붙여 봐야 그 나물에 그 밥 정도밖에 되지 않을 것 같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말하면, 난 김길태 사건에 대해서 아무런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12분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런데, 내가 김길태 사건에 주목하게 된 이유는 바로 오늘 아침에 우연찮게
보았던 인터넷 기사문 때문이다. 메일을 확인하려는데, 검색어 순위에
<김길태 변호사>가 1위에 오른 것이 눈에 띄었고,
나는 당연히 습관적으로(!) 그 기사를 클릭해서 읽었다.
기사의 내용은 간단하다. 변호사 윤모씨가 김길태의 변호를 맡게 되었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사건은 국선변호사가 변호를 맡는다. 그러나 정확하게 말하면
국선변호사가 수행하는 변호인의 역할은 사실상 전무하다. 그가 하는 역할은 합법적 살인,
혹은 합법적 폭력에 필요한 절차를 대신 수행하는 정도의 역할을 맡는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범죄자들은 자신들에게 가해지는 폭력이 까다로운 절차를 걸친 후 매우
고상한 옷을 걸친 폭력으로 자행된다는 사실을 그저 희미하게 감각하는 것만 가능할 뿐이지,
그러한 법적 절차를 착실하게 밟으며 고상한 폭력을 스스로 만들어 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역할을 하는 자가 국선변호사이다.
어쨋거나, 그러한 국선변호사가 아니라, 정말, 변호사다운(돈을 받고 직업적으로
변호를 한다는 의미) 변호사가 김길태의 변호를 맡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윤모 변호사라는 사람이 스스로 그러한 결정을 내린 것은 아니다.
윤모 변호사가 변호를 맡게 된 데 결정적인 이유는 (사실상 이것이 사태의 전적인 이유이다.)
이름 밝히지 않은 홍모씨로부터 김길태 변호를 맡아달라는 의뢰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홍모씨는 변호사 수임료를 의뢰 직후 바로 지불하였고, 윤모씨는 이 사건에 대한 변호를
맡기로 결정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당사자인 김길태 또한 윤모 변호사가 자신의 변호를
맡도록 허락한 상태이다. 홍모씨가 김길태의 변호를 의뢰한 이유가 중요한데, 언론사의
표현을 빌어 잠시 언급하자면, '그의 불행한 과거가 마음에 걸려서' 였다고 한다.
매우 짧막하게 의뢰 이유를 밝혔는데,
바로 이 지점에서 나는 매우 흥미로운 사실 하나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의도하지 않은 반응이 툭 불거져 나왔을 때의 그 혼란스러움이란,
자칫 사소해 보일 수도 있지만 우리가 딛고 서있는 논리가 사실상 매우 모호한 지점에
놓여있다는 사실을 열어젖히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사소한 것은 때론, 결정적이다.
여기서 말하는 의도하지 않은 반응이란, 다들 예상할 수 있듯이 언론-권력이
김길태 사건을 보도하는 방식에 내재한 의도에 빗겨난 반응이라는 소리이다.
매우 진부한 방식으로 범죄자의 삶을 재구성하는 이야기는 분명한 의도를
내포하고 있는데, 9시 뉴스에서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이야기를 반복적으로
내보내지는 않을 터이니, 우리는 이 사건의 의도를 얼마든지 상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시시껄렁한 이야기라도 9시 뉴스에 나오면 이야기의 무게는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증폭된다.
(1년 전에 전직 대통령을 살해한 것은 다름 아닌 이야기였다.)
각설하고, 뉴스에서 전했던 김길태 이야기를 재구성해보자.
김길태는 평범한 아이였다. 그러다 어떤 사건(주로 가정사)을 계기로 삐닥한 길을
가게 되었고, 그 삐딱한 길을 가는 와중에 어느 누구도 그에게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다.
이러한 시간 속에서 김길태는 점점 범죄의 나락으로 빠져들고, 결국은 '극악무도'한
범죄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김길태 사건은 우리 사회의 어두운 면을 보여줍니다.'라는
(매우 모호하고도 추상적인) 멘트로 마무리 되는 이러한 이야기는 휴머니티에 호소하면서도
다분히 의도적으로 구성된 것이다. '우리 사회의 어두운 면, 혹은 문제점'이라는 두루뭉술한
멘트를 첨가함으로써, 뉴스는 자신들이 사회의 문제점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 날카로운
비판의 시선을 가졌음을 광고한다. 그러나 정작 뉴스가 만들어낸 <김길태 이야기>는
휴머니티에 의거한 소외된 계층을 적극적으로 감싸안을 수 있는 제도마련이라는 방향으로
여론을 수렴하기보다, 그러한 척만 하다가, 결국에는 경찰권력과 감시권력을 보다
철저하게 강화해야 한다는 논리로 귀결된다. 의도는 분명해졌다.
휴머니티에 위반되는 행위를 저지를 자를 맹목적으로 처단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충분한 인간애를 발휘하여, 그의 불우한 생활환경을 걱정함과 동시에 그를 다른 사람들의
휴머니티를 보장하는 차원에서 엄격하게 처리할 것이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우리주위에
이런 김길태류의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환기하도록하는 수사는 결코 빠지는 일이 없다.
뉴스는 모든 시청자들에게 속삭인다.
"우리 사회가 당면한 위험은 '독도 발언의 진위' 따위에 걸린 것이 아니라! 휴머니티가 상살되는
이러한 사건이 언제든지 일어 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잠재적 김길태가 거리를 활보합니다.
여러분들은 그깟 4대강이 중요하며, 독도발언의 진위, 세종시가 지금 중요합니까? 피부로 직접
와 닿은 위험을 감지하세요. 저희 뉴스가 적극적으로 그런 위험을 감지하도록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엉뚱하게 그러한 척만 하려했던 의도가 빗나가 버렸다.
휴머니티에 대한 호소가 김길태에게 보내진 것이다.
(사실상 언론-권력의 의도는 절대 이런 것이 아니었다. 적어도 이것만은 확실하다.)
상황을 설명하는 차원에서 '엉뚱하게'라는 부사어를 사용했지만, 사실상
휴머니티에 대한 호소가 김길태에게 보내진 내적논리는 전혀 엉뚱한 것이 아니다.
보편적 휴머니티가 근거하는 지점은 인간이라는 존재 그 자체에 내재해있는
것이기에(천부인권-이데올로기) 김길태 또한 그러한 휴머니티에 의해
구제될 수 있는 '인간'인 것이다. 그리고 그를 '인간적으로' 구제해주고자 하는
하나의 시선이 존재한다면, 그 시선은 모종의 당위성을 획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제시한 방법 또한 합법적인 테두리 안에 놓여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그 자를 얼마만큼 비난할 수 있겠는가?
많은 네티즌-대중들을 당혹 시켰던, 휴머니티-이데올로기의 모순점들.
내가 이 사건에 흥미를 가지게 된 것은, 이러한 일련의 사태가
우리가 생각하는 법이 보호해주는 보편적 휴머니티의 존재론적
층위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끔 하기 때문이었다.
(- 나는 법이 휴머니티라는 가면을 쓰고 작동하는 폭력의 논리라는 측면이 강하다고 생각한다.
첨언하자면, 내가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휴머니티라는 가면이 그저 가짜에 불과한,
허울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매우 미약한 방식으로나마 법이 작동하는 폭력의 논리에 균열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가면으로 덮어 썼던 휴머니티라는 허울이 실질적으로 어떤 기능을
수행해버리는 이러한 상황. 나는 이 점에 흥미를 느끼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정말 흥미를 느꼈던 것은 그 기사에 달렸던 댓글인데,
그것은 '법 위에서 작동해야하는 당위로서의 폭력'이였다.
이것은 분명한 논리를 가지지 못한 것이자, 동시에 사회적으로 구성된 폭력에 대한 집단적 공감이었다.
쉽게 말하면, "저런 개새끼를 옹호하는 저 새끼, 지 딸도 강간당하고 죽어봐야 해"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는 일련의 댓글들이었다. 물론 지금도 댓글의 수는 증가하고 있다.
우리는 김길태의 사건을 어떻게 바라봐야하는가?
이 질문은 단지 김길태라는 사람을 옹호하는/ 비방하는 차원이 아니라,
강간-살인 사건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이 지금 현재 객관적인 거리를 유지할 수 있는 상황인가,
혹은 현재 한국사회에서 그 사건에 대해 거리를 두고 관찰하는 것이 가능이나 한가, 아니면
카메라를 김길태의 얼굴에 가까이 들여대는 방식으로 우리는 객관적 거리를 잃고
폭력의 논리에 심정적으로 동의하는 사람으로 구성되어 있지는 않는가. 혹은 언론-권력의 기막힌
각본 아래, 우리는 열심히 놀아나고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과 함께
다시 세력을 확보한 사형제도 찬성 여론의 이후의 향방과
너무나 이슈화된 성폭력의 문제, 그리고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있는 인권문제라는 매우 미묘하고도 복잡한 지점들이 김길태 사건으로 한 데 응축되어
나타난 현상이 흥미롭다는 것이다.
(덕분에 나는 해야할 공부를 못하고 한 시간 동안 글을 쓰고 있다. ㅜㅜ)
첫댓글 그렇죠. 어떤 중간단계도 없이 거대함으로 치닫것이 옳은것만은 아니다라고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사소한 것이 결정적인 것이 되지 못하리란 법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말씀하신 일련의 추측의 상황들은 분명 중간단계로서 합당한 근거가 될 수도 있다고 봐요. 과한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개인적으로는 김길태사건은 국민을 갖고놀기위한 하나였다고만 생각됩니다. 국가권력이 써먹을 만한 그럴싸한 일들은 왜그렇게 딱딱 터져주는지 모르겠습니다..ㅋㅋ 역시나 가끔은 이명박을 사랑하고 싶고, 조중동을 찬양하고 싶습니다..ㅋㅋ
그 보편적인 인간휴머니티란것은 현실세계에선 존재하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불가능한건 아닌가하고 의문이 듭니다. 제아무리 천부인권을 말하고, 그곳에 기초를 두고 무엇을 창출한다해도, 결국 허울뿐이고, 실상에서 인간을 지배하는 논리로서 의미는 없어진건 아닌가합니다. 인간은 이상적인 제도와는 틀려서 헛점투정이이죠. 그런 인간이 보편적인 휴머니티에 대해 진정 언행일치를 한다는건 불가능한게 아닐까해요. 다만 그런 인간의 취약한 부분을 파고들어 이용하려는 '무리'들이 악인인거겠죠. 결론적으로 말하면 그 수많은 댓글들은 어쩔수 없는 군중들의 방법일지도 모르겠어요. 솔직히 이용된 "김길태사건"은 그간 많았잖아요
사형제도가 왜 있어야 하는지, 어느 정도까지 빅브라더 출현을 눈감아줘야하는지 생각해봐야 할 때 입니다
되게 흥미로운데요ㅎㅎ 원래 이런 생각은 뭔가 다른 할 일이 있을 때 더 잘 써지기 마련ㅎㅎㅎ
음, 뭐라할까. 좀 더 객관적으로 김길태 사건을 바라봐야하지 않을까합니다. 폭력단체를 고용해 50대 가장 7명을 살해한 용산의 사건과, 한 범죄자에 의해 성폭행 후 죽음을 당한 이번 사건과의 관계를 객관적인 지표로 비교한다는 것이 참으로 위험하지만, 7명의 가장이 살해된 용산의 사건과 한 소녀가 살해된 사건을 다루는 태도가 너무 이질적이란 생각이 드네요. 7명의 가장들의 목숨은 <순결>한 표상을 가지지 못해서 그다지 협소하게 이슈화된 것인지.. 여러모로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정말 동등하게 소중한 생명이라면, 언론사의 태도에는 분명 문제가 있는 것 같네요.
그게 언론의 역할이자 한계라는 생각도 들고요ㅎ 김길태 사건이 국민들의 감수성을 자극한 건 사실이고, 이처럼 과민반응하는 국민들에게 어떤 '리액션'이라도 취해야 하는 게 언론이기에...ㅎ 다만 그 방향을 옳은 지점으로 잡아가기 위한 노력은 많이 필요 한 듯 보입니다ㅎㅎ
언론의 역할이자 한계라는건 있습니다 분명. 하지만 애초부터 어떤 목적을 품고 사건을 다루었느냐가 중요한 포인트라 생각합니다. 미도링님 말씀처럼 예상보다 과민반응하는 국민들에게 어떤 리액션이라도 취해야 하는게 언론이라서, 시작되었다면 여러의혹들은 잠잠했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이번 김길태 사건은 기묘하게 일그러졌습니다. 의문이 드는것은. 결국 그 애초의 의도라는 것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번 김길태사건은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구렁내가 풀풀 난다는 것이겠죠. 단순한 언론의 역할이자 한계로만 보기에는 그렇다는 생각이 드네요. 어떤 다른 의도가 끼어든것이 아닌가 합니다.
간만에 집중해서 읽어본글...잘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