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에 군산에 갔다왔다.
죽마고우인 홍수의 모친께서 별세하셔서 문상을 갔었다.
문상 마치고 귀가한 시간이 자정무렵.
아내는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늘 고마운 아내다.
들어와 씻고, 거실 내 앉은뱅이 탁자에 아내와 마주 앉아서 복분자주를 한잔 마셨다.
진솔이는 컨디션 조절을 위해 깊은 잠에 빠져들었고,
(수능 2일 전야)
아들은 학원에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문상갔다 온 얘기를 주저리 주저리 나눴다.
친구들의 근황이며, 그곳에서 주고 받은 대화내용들까지.
대화중에 아내가 진솔이 방으로 가더니 큰 쇼핑백 하나를 들고나왔다.
"이게 뭔지 알아요?"
"아니"
아내는 쇼핑백안에 들어있던 내용물을 조심스럽게 탁자위에 꺼내놓았다.
한개에 1200원 하는 허쉬 초콜릿 봉지 40개였다.
수능을 앞둔 반 친구들에게 하나씩 건네줄 선물이라고 했다.
"반장으로서 기특한 생각을 했구나"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러나 더욱 감동적인 것은 그 초콜릿 봉지 하나 하나마다에 노란색 포스트잇 메모지가 전부 붙어있었다.
그 큰 메모지엔 이렇게 씌여있었다.
"우리 반 이쁘니들아. 이 초콜릿 먹고 힘내서 수능 대박을 터트리자. 홧팅. 사랑한다. 우리 반 친구들..... 반장 진솔이가"
한 장 한 장 꼼꼼하게 손으로 직접 쓴 것이었다.
다른 하나에는 이렇게 씌여있었다.
"이건 샘꺼. 샘님. 최선을 다할게요. 고맙습니다"
"후후후...짜식"
기특했다.
수능을 이틀 앞둔 날 밤.
모두 정신 없어하는 그 절박한(?) 시간에 급우들을 위해 초콜릿을 사오고, 포스트잇 메모지 한장 한장에 정성을 담아 좀 두꺼운 플러스 펜으로 직접 글을 써 친구들을 격려하고, 담임 선생님에게까지 감사의 표현을 한 진솔이가 예쁘고 기특했다.
그걸 큰 쇼핑백에 담아 자기 방 책상위에 올려 놓고,
수험생이 용감하게도(?) 자정도 안된 시간에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세상은 온통 치열한 경쟁만을 가르치고, 그것만을 얘기하며,
그게 전부인양 죽을 힘을 다해 앞만 보고 달려간다.
목숨건(?) 레이스에서 잠간 옆길로 비켜나거나 잠시라도 딴 데로 눈길을 돌리면 마치 '낙오자'가 된 듯 난리법석이다.
내 나이 마흔여섯.
그러나 나도 아직 인생을 제대로 모른 채 산다.
다만, 내가 인생에 대해 좀 희미하게 아는 건,
우리 부부도 그렇고, 애들도 그렇고,
능력의 우열 보다는 제대로된 태도와 자세를 위해 더 열심히 기도하고,좀더 자신을 성찰하며, 약간은 가난하고 투명한 마음으로 각자의 삶을 살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깊은 서원뿐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이것 하나만은 제대로 인식하고, 제대로 기억하며 살고 싶었다.
잘 안될 때도 있었지만, 우리 4식구는 그런 컨셉으로 근 20여년을 열정적으로 살아왔다.
세상을 더 아름다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늘 긍정적인 영혼의 눈으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라고 얘기했다.
좀 지면서 살고, 한번 더 하늘을 보면서, 최대한 즐겁게 살라고 얘기했었다.
세상엔 다양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꼭 명심하라 일렀다.
수능이 끝나면 그 결과물에 대해서 또 한동안 세상은 시끄러울 것이다.
쓸데없는 '키재기'를 하면서 엄청난 뒷담화들이 강을 메울 것이다.
그게 세상의 평균이고 그게 상식이지.
점수가 좋은 애들도 있을 것이고, 나름대로 노력했지만 결과가 안 좋은 애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른들이여, 아는가?
우리가 19년전에 저 애들을 낳았을 때, 그 조그만 녀석들이 부모와 처음으로 눈을 맞추며 환하게 웃음 지었을 때, 우리는 그 애들의 부모로서 어떤 각오를 다졌던가?
전 우주를 다 주어도 바꾸지 않을 너무도 소중한 생명체 아니었던가?
부모된 입장으로, 그 초심을 잘 간직하고 유지하면서, 애들 뒤에서서 말없이 기도해 주고, 응원해 주는 그런 부모가 되고 싶다.
(물론,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겠지만)
자식은 건강하게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엄청난 축복이며, 내가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었다.
그런 초심을, 그런 시원적인 감사를 잊지 않는 부모가 되기 위해 내 나름대로 열심히 노력하며 살아왔다.
가족은 회복과 치유 그리고 사랑의 옹달샘이어야 한다.
진솔이의 건승을 기원해 본다.
후회없이 열심히 노력했으면 된다.
인생은....그런 과정 과정속에 진정한 신의 축복이 깃드는 법이니까.
다들 긴장의 눈빛이 역력한 이때에 유달리 미소가 환하고 밝은 진솔이가 더욱 사랑스럽다.
딸의 인생을 믿는다.
부라보.
첫댓글 역시 현해병의 딸일세...남을 배려하고 학급 반장으로서 책임감도 강하고, 수능을 생각하기 전에 세상을 살아가는 리더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었네...난 걱정일세 아들녀석이 고2인데 공부는 안하고 운동하겠다고 하는데 잘할려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