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 시편 / 시편 85편 7-13절
찬송 / 468장 · 내 맘에 한 노래 있어
성서 / 미가 4장 1-5절, 요한복음 4장 13-24절
말씀 / 자기 포도나무 아래 앉아서
사람마다 자기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문 아래 앉아서 평화롭게 살 것이다.(미가 4장 4절)
하나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요한복음 4장 24절)
‘피로스의 승리’라는 말이 있습니다. ‘상처뿐인 승리’ ‘보잘것없는 성공’을 뜻하는 말이지요. 옛날 고대 그리스에 피로스라는 왕이 있었습니다. 피로스는 군사를 일으켜서 로마에 쳐들어갔습니다. 그가 전쟁을 벌인 것은 그만큼 승리할 자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군대는 당시로 보면 엄청난 규모였습니다. 기원전 279년에 2만 5천 명 대군을 이끌고 로마로 진격했지요. 그런데 피로스 군대는 단지 그 규모만 큰 게 아니었습니다. 병사들이 갖춘 무장도 우수했지요. 특별히 피로스에게는 천하무적의 코끼리 기병대가 있었습니다. 큰 나무도 그냥 밀어붙여 넘기는 코끼리의 위력은 얼마나 대단합니까? 그의 코끼리 부대는 탱크처럼 적진을 휩쓸며 짓밟아버렸습니다. 전율, 공포 그 자체였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 많은 군대가 엄청난 장비를 가지고 장거리 출정을 가는 것입니다. 그리스 반도에서 로마까지 산 넘고 물 건너 코끼리 부대가 이동해야 합니다. 이 코끼리가 얼마나 많이 먹습니까? 하루에 풀을 250kg이나 먹어대지요. 그렇게 먹고 또 싸기는 얼마나 싸댑니까? 매일 50kg의 똥을 싸지요. 그의 코끼리 부대는 20마리 정도였다니까, 하루에 5톤을 먹고 1톤을 싸는 겁니다. 이리저리 도망치고 숨어서 수비만 하는 로마 군대를 공격하자니, 코끼리들은 얼마나 많은 똥을 싸야 했을까요? 그래도 피로스의 군대는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로마에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문제는 자기들도 피해가 엄청났지요. 유능한 참모들이 대부분 전사했고, 막강한 첨단 무기들도 모두 쓰레기가 되어 버렸고, 코끼리들은 뭐 하나 성한 데가 하나 폐물이 되었습니다. 말 그대로 상처뿐인 승리였습니다. “이런 승리를 또 했다가는 남는 것이 하나도 없겠다!” 승리자 피로스의 탄식입니다.
이쯤에서 피로스가 전쟁을 멈추었으면, 그랬다면 어땠을까요? 불행하게도 피로스는 또다시 로마를 완전하게 굴복시키겠다고 출정했다가 대패하였고, 나라는 완전히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피로스는 결국 ‘피로의 승리’라는 교훈만 남겼습니다. 전쟁뿐 아니라 모든 싸움과 경쟁에서도 마찬가지지요. 정치가 그 본분을 잊고 정쟁에만 몰두한다면 결국 망하고 만다, 기업과 기업이 적대적 경쟁에 매몰되면 다 죽을 수 있다, 피로스의 승리가 주는 교훈입니다.
오늘은 유월 마지막 주일입니다. 지난 화요일은 6.25 한국전쟁을 기억하는 날이었지요. 74년 전에 이 땅에서 참담한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그리고 전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생각해 보면, 한국전쟁은 아무도 승자가 없는, 그야말로 상처뿐인 전쟁이었습니다. 우리는 한국전쟁을 ‘동족상잔의 비극’이라고 말합니다. 동족끼리, 같은 민족끼리 싸운 비극적인 전쟁이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한국전쟁은 그저 단순한 집안싸움이 아닙니다. 세계전쟁이지요.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로 동서 이데올로기 대립을 벌이던 세계가 우리 땅 한반도에서 우리를 볼모로 끔찍한 전쟁을 벌였습니다. 사실 미국과 소련이 전범국인 일본이 아니라 우리 땅을 두 동강 낼 때부터 이미 전쟁은 시작되었습니다. 정말 분한 것은 동서 냉전 이데올로기 체제는 이미 오래전에 무너졌는데, 정작 우리 민족의 분단은 여전하다는 것입니다. 여전한 정도가 아니라 요즘은 오히려 더 강화되고 있지요. 정말 조심해야 합니다. 상상하기도 싫지만, 이 땅에서 다시 전쟁이 일어난다면, 또다시 이 땅에 일본군과 미군이 들어오고 러시아와 중국군이 들어온다면, 설사 전쟁에서 이겨도 ‘피로스의 승리’ 정도가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의 평화가 이 땅을 든든하게 감싸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오늘 우리는 평화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미가 예언자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함께 받았습니다. 예언자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평화의 나라를 노래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화, 그것은 어떤 것입니까? 그 평화는 무엇보다 폭력에 의해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는 ‘힘이 있어야’ 평화가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칼과 창’이 곧 평화라는 것입니다. 오늘도 ‘핵무기’가 평화라고 목소리 높이는 자들이 있지 않습니까?
사실 우리나라 극우파들은 예전부터 ‘폭력/무력’으로 평화를 이루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생각하는 그 ‘폭력/무력’이라는 것은 ‘남의 폭력’입니다. 나에게 힘이 있어서, 내가 힘을 키워서, 평화를 이루겠다면 그나마 조금은 이해하겠는데, 그게 아닙니다. 이승만 때는 ‘북진 통일’을 주창했었지요. 그들은 무슨 힘으로 북진하자는 것이었을까요? 미국의 힘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미국의 힘으로 북진하면, 그러면, 평화가 이루어질까요? 아니지요. 실제로 미국의 폭격기가 평양을 폭격해서 초토화하니까,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중공군이 밀물처럼 몰려 들어왔지요. 남의 힘을 빌리니까, 또 다른 남의 힘이 벌떼처럼 밀고 들어온 것입니다.
정말 경계해야 합니다. 실제로 예전에 미국의 카터 전 대통령이 황급하게 방한해서 북한을 전격 방문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 미국에서 북한 핵 문제로 선제공격하는 계획을 세우고, 실제로 전쟁 과정을 미리 재현해보았다고 하지요. 가상 전쟁을 실험해본 것입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나왔을까요? 누가 이겼을까요? 당연히 우리가, 아니지요, 미국이 이기는 것으로 나왔습니다. 그러자 극우파들이 흥분해서 공공연히 전쟁을 지지했습니다. 승리한다니, 그래서 통일을 이룬다니, 얼마나 들떴겠습니까? 그렇게 전쟁을 부추기는 극우 원로에게 어느 기자 질문했지요. 가상 전쟁으로 민간인 2백만 명 이상이 죽는다고 나왔는데, 이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런 물음이었습니다. 존경받는 학자라던 그 사람이 뭐라 대답했을까요? 그 정도의 희생도 없이 어떻게 승리할 수 있겠느냐, 그의 대답이었습니다.
정말 너무 참담한 생각 아닙니까? 전쟁으로 희생당하는 그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언제나 희생자들은 아무런 힘도 없는 약자들이겠지요. 그리고 무엇보다, 그 승리는 도대체 누구의 승리일까요? 우리의 승리일까요? 아니지요. 어림없는 일입니다. 그것은 미국의 승리입니다. 그런데 또 그렇게 미국이 승리하면, 그것으로 전쟁은 종결되어서 끝날까요? 아닙니다. 또다시 이 땅은 강대국들의 패권전쟁 소용돌이에 휩쓸리고 말 것이 뻔합니다. 정말 평화를 위해 기도하는 일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해졌습니다.
얘기가 좀 많이 곁길로 갔지요. 다시 미가 얘기로 돌아오면, 당시 이스라엘도 그랬습니다. 사람들은 바빌론 포로기를 겪으면서 민족 역사에 대해 깊이 성찰했습니다. 왜 우리 민족이 패망했을까? 왜 우리가 분단 되어서 강대국의 노예로 살아야 했는가? 묻고 또 물었지요. 그리고 결론은 한가지로 좁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에게 힘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칼과 창이 부족했다는 것입니다. 나라가 힘이 없으니, 강력한 영도자가 없으니 분열되고 무너졌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다시 일어서려면, 힘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지요. 우리에게 힘이 없다면 다른 나라의 힘이라도 빌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언자 미가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미가는 먼저,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외쳤습니다. 무슨 말이니까? 먼저 근원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먼저 기본을 되찾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왕좌왕하지 말고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깊이 성찰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생각을 버리고, 우리의 이해관계를 떠나서, 정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평화의 길이 무엇인지 들어보자는 것입니다. 그렇게 백성을 하나님 앞으로 부른 미가는 평화에 이르는 하나님의 길을 보여줍니다. 사람이 생각하는 평화는 칼과 창으로 만드는 것이었지요. 군사를 훈련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미가가 말하는 하나님의 평화는 달랐습니다.
“나라마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나라와 나라가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않을 것이며, 다시는 군사훈련도 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마다 자기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 앉아서, 평화롭게 살 것이다. 사람마다 아무런 위협을 받지 않으면서 살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미가가 불렀던 평화의 노래입니다. 그런데 여기 평화의 노래에서 한 가지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미가는 ‘한 나라의 평화’와 ‘한 백성의 평화’를 나란히 놓고 있다는 점입니다. 평화로운 나라는 어떤 나라입니까? 평화로운 사람들이 사는 나라입니다. 나라와 나라 사이에 왜 전쟁이 일어날까요? 남의 나라의 것을 빼앗으려 하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왜 싸움이 일어날까요? 남의 것을 탐하기 때문이지요. 사람들이 자기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 앉아서 평화롭게 산다면, 사람들이 누가 내 것을 빼앗을까 위협을 받지 않는다면, 사람들이 그렇게 평화롭게 살아간다면, 나라도 평화로워진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기 포도나무 아래 앉아서 평화롭게 산다’는 이 말은 지독한 개인주의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안보의 근본은 民生이다, 그 말입니다. 한 사람의 평화를 지키는 것이 곧 나르이 평화를 이루는 토대요 실체입니다. 거꾸로 생각하면, 나라의 평화를 위해서는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절실하다, 그 말입니다.
오늘 우리는 요한복음에서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님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이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님의 대화는 그저 단순한 대화가 아닙니다. 여인이 말한 대로, 예수님은 유대인 남자고 여인은 사마리아인 여자입니다. 서로 상종하지 못할 사람이라는 얘기입니다. 남쪽 유다와 북쪽 이스라엘은 분단의 갈등을 겪고 있었지요. 이 대화에서 사마리아 여인은 북 이스라엘을 대변하는 상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야곱의 우물에 대단한 자부심이 대단했습니다. 우리에게는 이스라엘의 조상 야곱이 있고, 야곱보다 더 위대한 사람은 없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이 야곱의 우물에서 대대로 물을 길어 마시는 사람들이다, 그러니 정통성은 너희 유대 사람이 아니라 우리에게 있다, 그런 투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자랑하는 여인에게 예수님은 내게는 그보다 더 좋은 물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물을 마시면 다시 목이 마르겠지만, 그러나 예수님이 주는 물을 마시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인은 그런 물이라면 내게도 좀 줘보라고 말하지요. 세상에 그런 물이 어디 있겠냐는 투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느닷없이 여인에게 남편을 불러오라고 하십니다. 여인은 남편이 없다고 말하지요. 예수님은 너에게는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고, 지금 사는 남자도 네 남자가 아니니, 남편이 없다는 말이 옳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 여인이 사마리아 곧 북 이스라엘을 상징한다면, 남편은 또 무엇일까요? 그것은 어쩌면 북 이스라엘이 의지했던 강대국들이 아닐까요? 실제로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은 위급할 때마다 주변 강대국에 의지했습니다. 남의 나라를 내 남편으로 삼은 셈입니다. 이집트에 몸을 맡기고, 아시리아를 의지하고, 바빌론을 따르고, 페르샤에 기대고, 그리스에 굴복하고, 마침내 로마에 빌붙었지요. 그러나 그들이 의지했던 강대국들은 결코 이스라엘의 남편이 아니었습니다.
여인과 예수님의 대화는 마지막으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문제에 이릅니다. 여인이 먼저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북쪽 사람들은 사마리아의 그리심 산에서 하나님을 만났는데, 남쪽 사람들은 하나님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하지 않느냐, 어느 곳이 맞느냐, 하나님은 어디 계시냐, 그런 질문입니다. 어느 곳일까요? 용산일까요? 평양일까요?
이 산도 아니고 저 산도 아니다, 예수님의 대답입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은 장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영은 장소에 매이지 않지요. 자유롭습니다. 인간에게는 장소가 중요하지만, 영이신 하나님께는 장소가 아무런 문제도 아닙니다. 하나님께 중요한 것은 어느 장소에서 예배를 드리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는 것이다, 그 말입니다. 유다와 이스라엘은 야곱의 우물이냐 예루살렘 샘물이냐 서로 다투고 갈라졌습니다. 유대 사람이냐 사마리아 사람이냐, 남자냐 여자냐 하며 분열했습니다. 그리심 산이냐 예루살렘 산이냐 하며 분단되고 전쟁을 치렀습니다. 그런데 그 유다는 누구고 이스라엘은 또 누구입니까? 그들은 아비와 아들 아닙니까? 또 그들은 모두 다 하나님의 백성이요 자녀가 아닙니까? 그들이 다시 화해하는 길은 어디에 있을까요? 어떻게 이스라엘이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하나가 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그들이 ‘인간의 장소’에 가두어 버린 허깨비 신이 아니라, 영이신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병사 한 명 죽었다고 사단장을 바꾸면 누가 사단장 하겠습니까?” 누가 격노하면서 지른 말이랍니다. 무슨 말입니까? 어떻게 누군가의 생때같은 자식을, 천하보다 더 귀한 생명을 이토록 가벼이 말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이런 자가 대통령이 되었을까요? 정말 이건 아닙니다. 안 됩니다. 제게는 한 가지 꿈이 있었습니다. 은퇴하면 지일 먼저 동해에서 기차를 타고 북한을 거쳐 러시아를 횡단해서 유럽까지 가겠다는 꿈입니다. 참 야무진 꿈이었지요. 저만 그런 게 아닙니다. 선배 목사님도 꼭 같이 가자고 손가락을 걸었었지요. 그런데 지금은 우리 하늘로 똥물이 떠다닌답니다. 휴전선에는 온갖 비방이 넘나들고, 아예 벽을 친다는 얘기도 들립니다. 서울에는 백 미터짜리 태극기 게양대를 만든다지요? 우리나라 군사력이 세계 5위니까, 36위에 불과한 북한을 선제공격하자는 자도 출몰하고, 아예 우리도 핵무기를 보유하자고 선동하는 정치인도 나댑니다. 정말 정신 차려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언자 미가는 평화의 희망을 노래하면서, 무엇보다 평화의 사람들을 노래했습니다. 뭐 국제 평화를 기획하고 우주의 평화를 도모하는 평화 사업가가 아닙니다. 남의 것 탐하지 않고 자기 나무 아래 앉아 평화롭게 사는 사람들입니다. 스스로 평화를 누리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우리의 세상은 어떻게 되어 버렸습니까? 남의 것을 빼앗고 삼키는 것을, 그러고도 뻔뻔하게 법망을 빠져나가는 것을 능력으로 아는 사람들, 심지어 자기 남편을 살해하고 부모를 해쳐서 대박을 치려는 사람들은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요? 어쩌다가 자기 포도나무 아래 앉아 평화를 누리는 사람들이 무능하고 어리석은 낙오자가 되는 것일까요? 그러나 이런 때일수록 더욱 평화의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우리의 마음에 평화를 내려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가 평화롭게 살아가며, 평화를 노래하고 평화를 기도하며 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가정을, 우리의 일터를, 우리의 길을 평화의 성령께서 언제나 감싸 지켜 주시기를 바랍니다. 무엇보다 이 땅 한반도를 평화의 영으로 든든히 지켜 주셔서, 우리가 다시 평화의 길을 찾아갈 수 있도록 은총 내려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날마다 평화의 하나님께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며 살아갈 때, 주님 주시는 평화가 우리 안에서 샘물처럼 솟아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