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7일(한국시간) ALCS 7차전,'외계인' 페드로 마르티네스는 5-2로 앞선 8회 갑자기 흔들리기 시작했다. 아니, 7회말 제이슨 지암비에게 연타석 홈런을 내줄 때부터 불길한 기운이 감돈 것이 사실이다.
페드로는 한 타자에게 두번 당하지 않는 무적 '외계인'으로 통해왔다. 지금껏 한 경기에서 한 타자에게 연타석 홈런을 허용한 적 없던 페드로였다. 그런 페드로가 제이슨 지암비에게 연타석 홈런을 맞고 이어 후속타자 엔리케 윌슨과 카림 가르시아에게 연속안타를 내줬으니 7회 이미 구위가 떨어졌다고 봐도 무리가 아니다.
역시나 8회 접어들자 '외계인'은 '지구인'으로 변해갔다. 1사후 데릭 지터의 2루타를 시작으로 버니 윌리엄스, 마쓰이 히데키, 호르헤 포사다까지 연속 4안타를 맞고 동점을 허용했다. 6회까지 3안타 1실점으로 호투하던 투구가 아니었다. 야구팬들 사이에 아직도 식을 줄 모르고 논쟁거리가 되고 있는 이날의 상황을 야구전문가들의 입을 통해 분석해봤다
◆투수는 공을 넘기기 싫어한다
페드로 마르티네스는 8회 마운드에 올라온 그래디 리틀 감독을 밀어냈다. 페드로는 "탱크에 연료가 남았느냐?"는 리틀 감독의 질문에 "충분하다"고 답했다. 그는 경기 후 리틀을 향한 집중포화를 대신 맞겠다며 '내탓이오'를 외쳤다. 하지만 버스는 이미 떠나간 뒤였다.
그렇다. 세상의 어떤 투수도 공을 넘기기 싫어한다. 통산 324승(256패)을 거둔 존 서튼은 마운드에서 모든 투수는 거짓말을 한다고 회고한 적이 있다. "일단 공을 던지라는 임무를 부여받으면 누가 총을 들고와 공을 빼앗기 전까지 계속 던지는 게 당연했다. 그건 아무도 말릴 수 없는 투수의 특권이었다." 1988년 은퇴할 때까지 존 서튼은 178완투에 58완봉이라는 놀라운 기록을 남겼다. 위기가 와도 자신이 경기를 마무리짓겠다는 일종의 책임감이 통산 승수의 반 이상을 완투로 이끈 것이다.
통산 314승을 올리고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게일로드 페리 역시 현역 시절 거짓말쟁이 투수로 유명했다. 휴스턴 시절 연타를 허용한 뒤 감독이 마운드로 올라오면 페리는 별별 핑계와 거짓말로 손에 있는 공을 놓지 않았다. 밥 깁슨이나 톰 시버 역시 감독들에게 욕설을 듣는 데 이골이 난 투수다. "계속 던진다고? 당장 내려와! 선수생활 그만두고 싶어?" 감독의 엄포에도 마운드에서 꿋꿋이 버티던 그들이다.
"무조건 던질 수 있다고 합니다. 그게 투수예요. 물론 공이 나쁜 줄 본인이 더 잘 압니다. 그래도 투수들은 던질 수 있다고 해요. 그게 투수의 타고난 성격이죠." 투수 출신의 차명석 mbc espn 해설위원은 말한다.하지만 마운드에 올라온 감독에게 공을 안 넘기고 이리저리 빙빙 도는 건 그리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라고 덧붙인다.
"팀워크가 망가져요. 계속 던진다고 고집하는 건 항명이죠. 만약 선발이 계속 던지겠다고 버텼다간 불펜 투수들이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그래, 너 잘났다. 계속 완투해라' 그러죠. 어쩌면 그건 다음 투수를 무시하는 행동이 될 수 도 있습니다. 그래도 투수는 공을 안놓으려고 하죠."
◆페드로의 공을 빼앗기는 힘들다?
차명석 해설위원은 챔피언십 7차전 날을 떠올리며 8회가 교체 타임이었다고 했다. 그러나 계속해서 투구를 한 것은 페드로였기에 가능했던 경우라며 예외로 인정했다. "페드로가 더 던질 수 있다는 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만약 다른 선수가 선발이었다면 리틀은 주저없이 교체시켰을 거란 얘기다. 결과적으로 페드로라는 에이스의 이름값이 보스턴을 어렵게 끌고간 셈이 됐다.
김인식 전 두산 감독도 당시 상황에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7차전, 나도 집에서 티비로 지켜봤습니다. 근데 참 곤란하더구만요. 분명 바꿔야 하는 상황인데, 팀의 에이스가 저리 고집을 부리니 리틀 감독도 정말 힘들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요. 원래 마지막 경기는 전원 투입해서 총력전을 펼쳤어야 했는데 아쉬워요."
김인식 전 감독은 투수 교체는 냉정해야 한다고 말했다."꼭 다음 한 타자만 더 상대하고 내려오겠다는 투수들이 있습니다. 바꿔야 될 때 설득이 안 통하지요. 감독이 그냥 올라가는 게 아니거든요. 투수의 볼 갯수, 팔 스윙, 투구 동작 등 여러가지를 판단한 후에 나가는 것이니까 사실 변명이 통하지는 않습니다. 한데 페드로는 미국 최고의 에이스이고 특별한 투수잖습니까. 감독도 답답했을 거예요. 다른 투수였으면 물어보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바로 교첸데…."
◆믿을 선수는 페드로 뿐이었나?
문득 84년 한국시리즈가 떠올랐다. 당시 롯데의 4승을 혼자 책임진 불세출의 투수, 현재 KBS 해설위원으로 재직중인 최동원 해설위원을 만났다. 최동원 해설위원은 84년 한국시리즈 동안 1·3·5·6·7차전을 던졌다. 그 중 1·3·5·7차전을 선발로 나서 완투했다. 3승 1패. 그리고 4차전은 4회부터 등판해 구원승을 올렸다. 총 투구 회수는 무려 42이닝. 야구사에 전무후무한 대기록이다.
당시의 상황에 대해 "하루 쉬고 등판하고 또 쉬고 등판하고. 지치지 않았느냐"고 묻자 최위원의 대답은 간결했다. "투수는 그런겁니다. 본인이 절대 물러나겠다고 하진 않거든요. 손끝에 걸리는 힘이 달라져서 힘이 떨어진 건 본인이 먼저 알지요. 그래도 던질 수 있는 지 물어보면 무조건 던진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때의 상황은 좀 특이한 경우였다며 부연설명했다."강병철 감독이 한국시리즈 전에 이야기 하더군요. '동원아 니가 1·3·5·7차전 맡아다오. 우리가 이때 아니면 언제 우승해 보겠니?'하고 말입니다."
사실 당시 롯데의 전력은 중위권 정도였다. 한국시리즈 진출 역시 기적과 같은 상황이었다. 이에 강병철 감독은 최동원 투수에게 무리한(?) 요구를 했고 최동원도 흔쾌히 승락했다. "힘들었지요. 한데 힘들면 더 조심스러워져요. 돌다리도 두들겨보고 건넌다고 조심하다 보니 오히려 좋은 성적이 나더라고요."
감독은 꼭 잡아야 하는 경기에 평소 가장 믿었던 선수를 내세운다. 그때는 마치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을테다. 그래서 강병철 감독은 무리인 줄 알면서도 에이스 최동원을 내세웠고 따라서 리틀 역시 그랬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최동원 해설위원은 인터뷰를 끝내며 "분명히 리틀 감독도 나름의 이유가 있어서 페드로를 그냥 놔뒀을 것입니다. 지금은 엄청나게 후회하고 있겠지요. 그땐 막말로 눈에 뭐가 씌었던 거예요. 결과가 안좋아서 더 그렇지만, 모두가 완벽할 수 있나요? 다음엔 같은 실수 두 번 안하겠지요."라는 말로 마무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은 뺏어야 했다!
"마르티네스는 시즌 시즌 내내 그 같은 상황을 만났다. 불펜에서 우리가 기용할 수 있는 어떤 선수보다 든든하게 마운드를 지킬 선수였다. 마르티네스는 계속 던지기를 원했다. 시즌 중 여러 차례 그랬던 것처럼 자신이 마무리하고 싶어했다." 경기 후 리틀 감독의 말이다. 감독의 판단보다 페드로의 말이 우선이었다. 그리고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이번 작전은 실패였다. 그 결과 보스턴은 또 다시 1년을 기다려야 한다.
송재우 해설위원(mbc)은 그래디 리틀 감독의 잘못을 크게 3가지로 지적했다. 첫째, 경기를 지켜본 사람이면 모두가 느꼈던 페드로 마르티네스의 구위를 파악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구위가 떨어진 페드로는 더이상 페드로가 이니라는 점을 간과했던 것이다. 둘째, 엄청난 활약을 보여준 불펜을 마지막 순간에 활용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즉 리틀은 가장 어려운 순간, 불펜보다 페드로를 더 믿었고 결과는 역전패로 끝났다. 셋째, 불펜의 정신적 부담을 줄이지 못한 것은 결코 현명하지 못한 대처였다.
"리틀 감독은 에이스의 자존심을 챙길 줄 아는 감독일지는 몰라도 팀을 우승으로 이끌기엔 부족한 감독입니다. 조 토레와 판이하게 다른 투수운용을 보였죠. 조 토레는 4회 로저 클레멘스가 아웃 카운트 하나 잡지 못한 채 난타당하자 클레멘스를 가차없이 강판시켰습니다. 은퇴 경기나 다름없던 클레멘스에게 잔인한 처사였지만 결과적으로 클레멘스에게 다시 한번 등판 기회를 만들어 준 셈입니다. 조 토레의 반박자 빠른 투수교체와 리틀의 늑장 교체가 가져온 결과로 결국 양키스는 웃고 보스턴은 울게 됐죠."
메이저리그에서 감독의 권한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된다. 선발 라인업 구성과 선수교체다. "페드로가 더 던질 수 있다고 말한 것은 어디까지나 참고사항입니다. 당시 현지 방송 해설자도 분명 교체타임이라고 입을 모았습니다. 한데 리틀이 그냥 내려가자 믿을 수 없다며 경악하더군요. 이건 저주가 아닙니다. 다만 보스턴이 승부에서 진 것입니다." 송위원은 페드로의 지나친 승부근성, 그리고 리틀의 판단착오가 불러온 아쉬운 패배였다고 논평했다.
2003년 양대리그 챔피언십시리즈는 그렇게 저물었지만, 투수교체 타이밍을 놓친 그래디 리틀 감독의 실수는 메이저리그 역사에 길이 남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