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신사
혈처의 조건을 잘 형상화 하고 있다.
땅의 지맥을 따라 흐르는 ‘좋은 기운’[보통, ‘지기(地氣)’라고 표현한다]이 발출하는 곳을 보통 혈(穴) 또는 혈처(穴處)라 한다[흔히들 혈처를 명당(明堂)이라고도 하는데, 엄밀하게 말하면 명당은 혈처 앞쪽에 있는 넓고 펑퍼짐한 둔덕을 말하므로, 혈처와는 구분되는 개념이다]. 그리고 ‘풍수지리학(風水地理學)’이란 위와 같은 혈처를 찾아내기 위해 땅의 모습과 지세를 관찰하고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대략 정의할 수 있다. 한편 풍수(風水)라는 말은 장풍득수(藏風得水)를 줄여 일컫는 말로서 바람을 감추고 물을 얻는다는 뜻이다. 보통 지기(地氣)는 땅의 맥(脈)을 따라 흘러가는데, 풍수지리학의 대표적인 교과서 중의 하나인 ‘금낭경(錦囊經)’에 이르기를 “기승풍즉산계수즉지(氣乘風則散界水則止)”라 하여, 지기(地氣)는 바람을 타면 흩어지고 물을 만나면 멈춘다고 한다. 결국 장풍득수란 땅의 맥을 따라 흘러온 지기가 더 이상 나아가지 않게 하고, 머물고 있는 지기가 바람에 의해 흩어지지 않게 하는, 다시 말해 혈처가 갖추어야 할 조건을 나타내는 말이라 하겠다. 사신사의 그림을 보면 이와 같은 혈처의 조건을 잘 확인할 수 있다.
은진당 재무님이 회무침을 만들고 있다.
한편, 풍수 이론에는 크게 3가지가 있는데 형세론, 형국론, 그리고 좌향론이 그것이다. 형세론과 형국론은 터를 정하는 이론이고, 좌향론은 터를 잡은 후에 어느 쪽으로 방향을 정할 것인가를 논하는 이론이다. 형세론(形勢論)은 통일신라 때 중국 당나라에서 수입된 이론으로, 산줄기와 물줄기를 구분해서 좋은 땅과 흉한 땅을 구분한다. 뒷산에서 어떠한 터까지 연결되어 들어오는 산줄기를 파악하고, 그 터를 둘러싼 주변의 여러 산들을 분석하며, 또 산과 산 사이로 흐르는 물줄기를 파악하여 어느 땅이 좋은 곳인가를 알아내는 이론이다. 형국론(形局論)은 오랜 옛날부터 한반도에서 만들어진 자생의 풍수이론으로 산의 모양을 보고서 좋은 땅을 찾는 이론이다. 산의 모양을 봉황, 사람, 소 따위의 형상에 비유해서 파악하고 그 형상에서 핵심이 되는 포인트를 찾아 혈처를 정하는 이론이다. 좌향론(坐向論)은 앞산이나 옆 산을 분석하거나, '나경'이라는 옛날 나침반을 사용하여 건물이나 봉분의 방향을 정하는 것이다.
속리산휴게소에서
이와 같은 풍수이론을 가장 철저하게 구현하고 있는 곳을 꼽으라면 왕궁과 왕릉을 들 수 있다. 특히 조선은 겉으로는 괴력난신(怪力亂神)을 철저하게 거부하고 인문적 합리주의를 옹호하는 유교를 국가의 지도이념으로 내세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음양과(陰陽科)라는 과거시험을 통해 지관을 선발할 정도로 풍수 이론을 신봉하기도 하였다. 조선왕조가 이와 같은 상반된 태도를 취했던 이유는 교묘한 상징조작을 통해 절대왕권의 정당성을 강화하기 위한 의도로 풀이할 수 있을 것 같다. 어쨌거나 최고의 권력과 경제력과 정보력을 갖춘 왕조가 작심하여 물색하고 조성해 놓은 것이 왕릉이니 그 이론적 철저성은 재론의 여지가 없을 것을 것이다. 왕릉을 답사하지 않고 풍수를 논하는 것은 그 자체로 어불성설이다.
동구릉 안내도
동구릉의 제실
학풍회 2010년 4월의 간산지는 서울 근교에 소재한 조선의 주요 왕릉들이다. 1박 2일의 일정으로 태조 이성계가 묻힌 경기도 구리시의 동구릉과 세조가 묻힌 경기도 남양주시의 광릉, 숙종이 묻힌 경기도 고양시의 서오릉을 기본 답사지로 하고, 그 사이사이에 조선 최대의 사찰이었던 회암사지, 율곡 이이의 분묘, 방촌 황희의 분묘를 둘러보는 코스이다.
수릉(綏陵)
2010년 4월 10일 오전 7시 35분 학풍회원 17명이 울산의 신복로터리를 출발해 오후 1시쯤 경기도 구리시의 동구릉에 도착하였다. 버스를 타고 오면서 회 무침을 안주로 몇 잔의 소주를 마시기도 하고 중간 중간에 간식을 먹어서인지 점심때가 지나도 배가 고프지는 않았다.
건원릉(建元陵)
홍살문에서 정자각으로 이어지는 참도
동구릉(東九陵)에는 9릉 17위(位)의 왕과 왕비가 안장되어 있다. 1408년 태조의 왕릉이 자리하고 건원릉(建元陵)이라 이름한 뒤로, 1855년(철종 6년) 익종(翼宗)의 능인 수릉(綏陵)이 9번째로 조성되어 동구릉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59만여 평을 헤아리는 광대한 숲에는 건원릉을 비롯해 제5대 문종과 현덕왕후의 능인 현릉(顯陵), 제14대 선조와 의인왕후, 계비 인목왕후의 능인 목릉(穆陵), 제18대 현종과 명성왕후의 능인 숭릉(崇陵), 제16대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의 능인 휘릉(徽陵), 제20대 경종의 비 단의왕후의 능인 혜릉(惠陵), 제21대 영조와 계비 정순왕후의 능인 원릉(元陵), 제24대 헌종과 효현왕후, 계비 효정왕후의 능인 경릉(景陵), 제23대 순조의 세자인 익종과 신정왕후의 능인 수릉 등 9개의 능이 자리하고 있다.
건원릉
정자각
먼저 건원릉이 조성되기까지의 과정을 보자. 태조 이성계가 1408년 5월 24일 창덕궁 광연루 별전에서 74세로 승하하자, 한 달여 동안의 택지과정을 거쳐 6월 28일에 하륜 등에 의해 지금의 위치인 양주의 검암에 산릉지가 정해졌다고 한다. 그리고 7월 5일에 충청도에서 3,500명, 황해도에서 2,000명, 강원도에서 500명 등 총 6,000명의 군정을 징발하여 7월 말을 기하여 산릉의 역사(役事)를 시작하게 하고 석실을 만들게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9월 7일 임금이 백관을 거느리고 빈전에 나아가 견전례를 행하고 영구를 받들어 발인하였다고 한다. 결국 왕의 사망에서 왕릉이 조성되기까지 3개월이 넘게 걸린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건원릉
한편 태조는 생전에 계비 신덕왕후와 함께 묻히기를 원해 신덕왕후의 능인 정릉(貞陵)에 자신의 묏자리를 마련해두었다고 하는데 그의 뒤를 이은 태종은 부왕의 유언을 따르지 않고 신덕왕후의 능을 도성 밖으로 이장하고, 태조의 능을 지금의 자리에 조성하였다고 한다. 또한 봉분에는 다른 왕릉들처럼 잔디를 심지 않고 억새풀을 덮었는데, 고향을 그리워하는 태조를 위해 태종이 고향인 함흥에서 흙과 억새를 가져다 덮어주었다고 한다.
건원릉
비각
건원릉
신도비
왕릉을 관리하고 수호하는 능참봉이 거주하고 각종 제기를 보관하는 제실(祭室)을 시작으로 반시계 방향으로 순조의 맏아들이자 헌종의 아버지인 문조(文朝)와 신정왕후 조씨가 묻힌 수릉(綏陵), 태조 이성계가 묻힌 건원릉(建元陵),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가 묻힌 휘릉(徽陵), 영조와 그의 계비 정순왕후 김씨 등이 묻힌 원릉(元陵)을 차례대로 둘러보았다.
학풍회 회원들
능의 구조는 기본적으로 거의 같다. 무덤이 있는 능선 양쪽에서 흘러내린 물이 만나는 지점에 위치한 금천교(禁川橋)를 지나면 홍살문이 나오고 이어서 편편한 판석으로 포장한 참도(參道)가 나온다. 참도는 크게 세 개의 길로 구분되어 있는데 가운데 길은 죽은 영혼이 통행한다는 신도(神道)이고, 그 좌우는 왕이 능묘를 참배할 때 걸어가는 어도(御道)라 한다. 참도가 끝나는 곳에 ‘정(丁)’자 모양의 건물이 나오는 데, 이곳이 제물(祭物)을 진설(陳設)하고 제향(祭享)을 올리는 정자각(丁字閣)이다. 그리고 정자각에서부터 제법 가파른 능선의 널찍한 언덕이 펼쳐지고 그 언덕 위에 능이 조성되어 있다. 그리고 정자각에서 오른쪽으로 얼마쯤 떨어진 곳에는 죽은 왕의 일생과 업적을 새겨놓은 신도비(神道碑)와 비각(碑閣)이 세워져 있다.
홍살문 앞의 물길
지기가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도록 막는 역할을 한다.
휘릉(徽陵)
원릉(元陵)
그러나 정자각 너머의 공간은 출입을 통제하고 있고, 또 능원 전체가 울창한 수림으로 덮여 있어 능의 형상이나 석물의 배치, 나아가 산세나 지기의 흐름을 확인할 수는 없었다. 다만, 능 앞에 좌우에서 흘러온 물을 합수시켜 흘러가게 하여 지맥을 따라 흘러온 지기가 더 이상 진행하지 못하도록 조치함으로써 계수즉지(界水則止)의 원리에 충실하고 있음은 모든 왕릉의 공통점임은 확인할 수 있었다.
광릉 안내도
광릉으로 이어지는 숲길
울창한 산림이 우거져 있다.
세조와 그의 부인 정희왕후 윤씨(1418∼1483)가 묻힌 광릉(光陵)은 능 그 자체보다 능을 둘러싸고 있는 울창한 수목이 더 유명하다. 능을 기준으로 반경 10리 내의 땅에 대해 금령을 내려 일반인이 함부로 출입할 수 없게 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광릉
정자각
왼쪽의 세조릉
오른쪽의 정희왕후릉
광릉은 같은 산줄기에 좌우 언덕을 달리하여 왕과 왕비를 각각 따로 봉안하고 두 능의 중간 지점에 하나의 정자각을 세우는 형식인 동원이강(同原異岡)릉이다. 이러한 형식은 이 광릉이 최초라고 한다. 좌측 능선의 봉분이 세조의 능이며 오른쪽의 봉분이 정희왕후의 능이다.
세조릉
광릉은 다른 왕릉에 비해 간소하게 조영되었다고 하는데, 세조는 “내가 죽으면 속히 썩어야 하니 석실과 석곽을 사용하지 말 것이며, 병풍석을 세우지 말라.”는 유언을 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세조의 유언에 따라 이전까지 석실로 되어 있던 능을 회격(灰隔)으로 바꾸어 부역 인원을 반으로 줄이고 비용을 절감하였다고 한다. 또한 봉분 주위에 둘렀던 병풍석을 없애면서 병풍석에 새겼던 십이지신상은 난간석의 동자석주에 옮겨 새겼고, 능 아래쪽의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이르는 참도도 생략되어 있다.
난간석
세조의 능에는 병풍석이 없고 난간석만 있다.
한편, 광릉 자리는 원래 다른 사람의 묘 자리였으나 풍수상 길지(吉地)라 하여 묘 자리의 주인이 세조에게 바쳤다고 전해지는데, 유교적인 효(孝) 사상이 모든 가치체계의 근간이었던 시절에 어느 누가 조상의 묘 자리를 자발적으로 왕릉으로 바쳤을까. 강제로 뺏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인 해석일 듯싶다. 그리고 이러한 사례야말로 조선왕조가 풍수이론을 얼마나 열렬하게 신봉했는지를 보여주는 생생한 증좌가 될 것 같다.
석양과 석호
혼유석
혼유석 받침돌
광릉도 다른 왕릉과 같이 원래는 정자각까지만 개방이 되고 능 자체는 관람이 불가능하다. 그런데 토민 국장님은 어떻게 교섭을 했는지 우리 학풍회원들만의 특별 관람을 허락받았다. 거기다 문화재 해설사로부터 광릉에 얽힌 다양한 역사적 사실들에 대해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토민 국장님의 포스가 강하게 느껴졌다.
장명등
망주석
문인석과 무인석
문인석
무인석
정자각에서 왼쪽으로 제법 가파른 언덕을 올라가자 아래에서는 보이지 않던 광릉이 제 모습을 나타냈다. 왕릉치고는 작고 아담한 봉분 아래 부분에는 병풍석은 없고 12칸의 난간석(欄干石)만 둘러 있다. 원래 병풍석에 새겨져야 할 12지신상이 난간석에 새겨져 있다. 난간석 밖으로는 석호(石虎)와 석양(石羊)이 네 마리씩 교대로 바깥을 향해 배치되어 있다.
무덤 뒤의 곡장(曲墻)
석호는 백수의 제왕으로서 뭇짐승들로부터 왕릉의 보호하고 석양은 온갖 귀신을 제압하는 힘을 가지고 있어 잡신들로부터 왕릉을 수호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지맥이 능으로 내려오는 모습
잘 생긴 잉(孕)
지맥이 곡장을 통과하는 모습
봉분 앞에는 혼유석(魂遊石)이 있는데 혼유석 밑에는 도깨비가 새겨진 북 모양의 고석 5개가 놓여 있다. 일반 무덤에서는 이 자리에 제향을 올릴 때 제물을 진설하는 상석(床石)이 놓이게 되는데 왕릉에서는 정자각에서 제물을 진설하므로 상석 대신에 망자의 혼백이 무덤에서 나와 노니는 혼유석을 배치한다고 한다.
그 한 단계 아래쪽에는 장명등(長明燈)과 석마(石馬) 한 필씩이 딸려 있는 문석인(文石人)이, 그보다 더 아래쪽으로는 역시 석마가 딸린 무석인(武石人)이 양쪽에 놓여 있다. 문석인은 두 손으로 홀(笏)을 모아 쥐고 있는 형상이고, 무석인은 몸 가운데로 칼을 잡고 있는 형상이다. 무석인을 문석인 아래쪽에 배치한 것은 무(武)보다 문(文)을 숭상한 조선의 문치주의(文治主義)를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위와 같은 석물 바깥으로는 둥글게 담을 둘러친 곡장(曲墻)이 설치되어 있는데 바람을 막아 혈처의 모인 지기를 보호하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특기할 것은 곡장이 땅과 만나는 부분인데 땅을 평탄하게 고르지 않고 자연적인 곡선을 그대로 유지한 채 담을 쌓았다는 점이다. 혈처로 이어지는 지맥을 다치지 않게 하려는 배려로 보인다.
봉분 뒤로 돌아가 보니 주산에서 꿈틀거리며 흘러내려온 지맥이 그대로 봉분으로 이어져 있고, 봉분에서 10미터 정도 떨어진 곳은 두툼한 둔덕을 형성하고 있어 잉(孕)의 아름다운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조산(朝山)
석물에 남겨진 탄흔
고개를 들어 앞을 쳐다보니 조산(朝山)이 한 마리의 새가 무덤을 향해 날아오는 모습을 취하고 있고, 무덤 좌우의 산세는 두 팔을 벌려 둥그스름하게 감싸 안고 모습이다. 어디 하나 흠잡을 데가 없다.
능을 내려오면서 다시 한번 석물을 돌아보니 군데군데 움푹 파인 자국이 보인다. 6․25때 양측이 교전을 하면서 남긴 총탄의 흔적이라고 한다.
회암사지
경기도 남양주시 회암동에 있는 회암사지는 고려 충숙왕 15년(1328) 원나라를 통해 들어온 인도의 승려 지공(指空)이 처음 지었다는 회암사(檜巖寺)가 있던 자리다. 지공의 제자 나옹(懶翁)이 “이곳에 절을 지으면 불법이 크게 번성한다.”는 말을 믿고 절을 크게 짓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회암사지
주맥이 들어오는 모습
조선 전기까지도 전국에서 가장 큰 절이었다고 하는데, 태조 이성계는 나옹의 제자이면서 자신의 스승인 무학대사(無學大師)를 이 절에 머무르게 하였고, 왕위를 물려준 뒤에는 이곳에서 수도생활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성종 때는 세조의 왕비 정희왕후의 명에 따라 13년에 걸쳐 절을 크게 넓혔다고 하는데, 그 후 명종 때 문정왕후의 도움으로 전국 제일의 사찰이 되었다가, 문정왕후가 죽은 뒤에 억불정책으로 인하여 유생들이 절을 불태웠다고 한다. 또 회암사는 평지가 아닌 산록에 위치하면서도 평지에 있는 절에서 볼 수 있는 회랑을 배치하고 있어 고려시대의 궁궐이나 사찰 배치형식을 연구하는데 좋은 자료가 된다고 한다.
회암사지
그 규모가 궁궐터를 방불케 할 정도로 어마어마하다
발굴된 회암사 터는 지금까지 보아온 어떠한 절보다 규모가 컸다. 이 절에 무위도식하며 머문 인원이 3,000명을 헤아렸다고 하니 그 경제적인 폐해가 오죽했으랴. 정도전 등 조선을 건국한 세력들이 억불책(抑佛策)을 시행한 이유를 짐작할 만했다.
풍수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회암사 터로 이어지는 조산(祖山)이나 주산(主山)은 굴곡이 심해 능선을 따라 흘러오는 지기가 강력해 보였다. 그러나 절터로 들어오는 몇 갈래의 능선 중 대웅전으로 이어지는 지맥은 그 형체가 희미했다. 오히려 절터의 허리부근으로 들어오는 지맥을 주맥으로 삼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좌청룡, 우백호에 해당하는 능선은 너무 벌어져 있고 안산도 턱없이 빈약해 보였다.
우리가 1박을 한 농원
저녁 어스름이 내릴 즈음 우리가 1박을 하기로 한 농원에 도착하였다. 수 만평에 이르는 광대한 산기슭에 자리한 농원에는 숙소, 식당, 찜질방, 야외수영장에다 미니 동물원까지 갖춰져 있었다.
농원에서의 저녁 식사
닭백숙으로 저녁을 해결하고 숯가마 찜질방에서 몸을 녹였다. 그리고 숙소로 돌아와 서택기 선배님이 준비해온 한우를 불판에 굽고 김치로 구운 고기를 싸서 먹었다. 맛이 기가 막혔다. 술잔이 부은 술이 금방금방 비워졌다. 유난히 심한 코골이로 엄청난 민폐와 원성을 걱정했으나 내 못지않은 강적들이 많았고 방안 여기저기서 합창하듯 들려오는 소음 속에 나의 소음이 섞여 들어가면서 무사히 밤을 넘겼다.
농원의 아침
자운서원 안내도
다음날 아침. 식사를 하고 제일 먼저 도착한 곳은 파주시 법원읍 동문리에 있는 이이(李珥)의 무덤과 그를 배향하고 있는 자운서원(紫雲書院)이다. 먼저 조선 최고의 천재이자 오천 원짜리 지폐의 주인공 이이의 생애에 대해 간단하게 검토해 보자.
비각
자운서원
이이의 본관(本貫)은 덕수(德水)이고, 호(號)는 율곡(栗谷), 석담(石潭)이며, 시호(諡號)는 문성(文成)이다. 조선 중기 학자요 경세가이면서 퇴계이황과 더불어 조선성리학의 거두이다. 사헌부 감찰 이원수와 신사임당의 3남으로 외가인 강릉 오죽헌(烏竹軒)에서 출생했고 본가는 파주시 파평면 율곡리이며 처가(妻家)는 해주 석담이다.
율곡의 장남인 이행림의 묘
13세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22세에 곡산 노씨와 혼인했다. 23세에 예안 도산의 이황을 만나 학문을 논하였고, 또한 그 해 별시(別試)에서 ‘천도책(天道策)’이라는 과거답안으로 장원을 하였다. 이후 29세까지 아홉 차례의 과거에서 모두 장원 급제함으로써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는 명예로운 이름을 얻었다. 같은 파주에 사는 우계(牛溪) 성혼(成渾)과 평생의 친구로 지냈고 ‘성학집요(聖學輯要)’, ‘격몽요결(擊蒙要訣)’ 등의 책을 저술하고, 임진왜란을 예견한 듯 십만양병설(十萬養兵說)을 주장하기도 했다. 선조의 사랑을 받아 병조, 이조 판서 등을 지내다 1584년 1월 16일 49세를 일기로 서거(逝去)하였다.
율곡의 부모인 이원수와 신사임당의 합장묘
관리원이 해설을 하고 있다.
한편, 자운서원은 율곡 사후 그의 후학들이 율곡을 배향하기 위해 건립한 것인데, 자운서원 내에는 율곡 이이와 그 가족들의 묘역이 있다. 원래 율곡의 생가는 자운서원에서 10리쯤 떨어져 있는 파평면 율곡리이다. 그런데 이곳에 율곡의 가족묘가 형성된 것은 이 자리가 원래 율곡이 누나인 매창이 시집간 조씨 집안의 선산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율곡의 큰 형인 이선의 묘
율곡의 가족묘는 원래 한 뿌리에서 발출한 세 갈래의 지능선에 산재해 있는데 가운데 능선에는 위로부터 율곡의 부인인 곡산 노씨묘, 율곡 이이 묘, 율곡의 맏형 이선과 그 부인 곽씨의 합장묘, 율곡의 부모인 이원수와 신사임당의 합장묘, 율곡의 장남인 경림의 묘 순서로 내려오고, 좌측 능선에는 율곡의 둘째매부 윤섭의 묘, 율곡의 5대손 이계의 부인 김씨묘, 율곡의 장손 이제와 부인 정씨의 쌍분묘, 율곡의 둘째부인 김씨 묘가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우측능선에는 율곡의 큰누나 매창의 시부모 묘, 매창과 그의 남편 조대남의 쌍분묘, 매창의 차남 조영의 묘, 율곡의 8대손 이묵의 묘 등이 자리잡고 있다.
율곡 이이의 묘
뒤쪽에 있는 무덤이 율곡의 부인 곡산 노씨의 묘다.
여기서 특기할 사실은 율곡의 묘가 그의 부모의 묘보다 높은 자리에 위치해 있고, 또 곡산 노씨의 묘가 남편인 율곡의 묘보다 위에 있는, 이른바 역장묘(逆葬墓)라는 사실이다.
망주석과 문인석
비석
비문 일부
비문을 쓴 사람이 권상하임을 나타내고 있다.
율곡의 묘를 왜 그의 부모 묘보다 높은 자리에 쓰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남아 있는 기록이 없다고 한다. 다만 곡산 노씨의 묘를 남편인 율곡의 묘보다 위에 쓰게 된 데에는 사연이 있다고 한다. 노씨는 율곡 사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변란을 피해 여종 한명과 함께 신주를 모시고 율곡의 무덤을 찾아왔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 왜적을 만나자 그들을 꾸짖고 자결을 했는데 전란 후 유골을 수습해보니 여종과의 구분이 어려워 그 자리에 함께 장사를 지냈다고 한다.
지맥이 흘러내려오는 모습
율곡의 묘는 그 앞에 한 쌍의 망주석과 문인석이 섰고, 상석 옆에는 율곡의 행장을 기록한 비석이 서있는데, 비문의 끝 문장에는 ‘세자찬선권상하서(世子贊善權尙夏書)’라고 새겨져 있어, 이 비문이 권상하에 의해 씌여졌음을 알 수 있다.
뒤쪽에서 바라본 율곡 묘
조산(朝山)
율곡 묘에서 내려다 본 가족묘
율곡의 분묘 뒤에 잇대어 곡산 노씨의 묘가 있는데, 그 뒤로 주산에서 이어져 온 지맥이 꿈틀거리며 내려오다 두툼한 잉을 형성하고, 다시 곡산 노씨의 묘로 흘러들어가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또 무덤 좌우의 산맥들이 앞으로 길게 이어져 있고 무덤에서 앞으로 바라다 보이는 조산(朝山)도 무덤 쪽을 향해 들어오는 형국이라 혈처의 대체적인 조건을 만족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율곡 묘에 자라난 이끼
수렴과 장곡에 대해 설명하시는 옥상 고문님
그런데 옥상 고문님은 좌청룡 쪽을 가리키며 “주산과 좌청룡, 우백호 사이에 저렇게 깊은 계곡을 형성하고 있는 것을 장곡(長谷)이라고 하는데, 풍수에서는 극히 꺼리는 요소이다”라고 하셨다. 또 율곡 묘의 봉분을 가리키며 “이렇게 봉분에 이끼가 자라고 있는 것은 무덤 안에 물이 차는 이른바 수렴(水殮)이 들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 자리가 결코 좋은 자리는 아닌 것 같다”고 하셨다.
평화의 종각
녹슨 채 방치되어 있는 기관차
자유의 다리
자운서원에서 파주시 문산읍 사목리에 위치한 반구정(伴鷗亭)으로 이동하는 중간에 임진각(臨津閣)에 들렀다. 내국인 관광객보다는 일본, 중국 등 외국인 관광객들이 훨씬 많았다. 우리에게는 현실이 되어 버린 분단이 그들에게는 볼만한 구경거리인 모양이었다.
반구정과 앙지대
반구정
앙지대
반구정은 임진각을 통과하여 서해로 천천히 흘러내려가는 임진강가의 전망 좋은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조선 초기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노력한 유능한 정치가일 뿐만 아니라 청백리의 전형으로서, 조선왕조를 통틀어 가장 뛰어난 재상으로 꼽히는 황희(黃喜)가 1430년 태석균(太石鈞)의 치죄(治罪)에 관여하다가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물러나 잠시 머물렀다고 하는 곳이 바로 이곳 반구정(伴鷗亭)이다.
반구정에서 바라본 임진강과 민통선 철책
그러나 반구정 바로 옆으로 길고, 높고, 튼튼한 민통선(民統線) 철책이 쳐져 있고 군데군데 경비초소가 설치되어 있어 이곳이 분단된 조국의 최전방 전선임을 확실하게 각인시키고 있었다. 저 강위를 유유히 나르는 갈매기만이 자유롭게 남북을 오갈 수 있는 현실. 반구정이라는 정자 이름대로 갈매기와 짝하며 느긋하게 뛰어난 풍광을 완상(玩賞)하기에는 시절이 너무나 수상쩍다.
원모재(遠慕齋)
황희의 묘
비석
문인석
황희의 성격을 닮은 듯 소박하고 교졸한 모습이다.
무덤 뒤의 잉
뒤에서 바라본 봉분
좌청룡 겸 안산
반구정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파주시 탄현면 금성리에 황희의 묘가 있었다. 묘역 아래로 원모재(遠慕齋)란 현판을 단 비각에 신도비가 세워져 있고 그 위로 제법 가파른 경사를 타고 올라가자 황희의 묘가 나왔다. 그런데 봉분이 일반적인 묘에서 찾아보기 힘든 특이한 모양이다. 봉분 앞 좌우(左右)의 가장자리에다 2단의 큰 돌을 약 1m의 길이로 내밀어 쌓아 마치 쇼파의 손 걸이와 흡사하다. 묘소 뒤에서 보면 사각봉분과 합쳐져 요자(凹字)의 형태다.
곡장 넘어에 있는 황희의 증손자의 묘
지맥이 흘러내려오는 모습
지맥이 곡장 아래를 거쳐 황희 묘로 들어가는 모습
무덤 좌우의 산을 살펴보니, 좌청룡 자락은 무덤과 지근거리(至近距離)를 유지하며 길게 이어져 안산의 역할까지 겸하고 있는 반면에 우백호에 해당하는 산자락은 먼 거리에서 휘감아 돌아나가 마치 우백호가 없는 것으로 보아야 할 지경이다. 무덤을 둥그렇게 감싸고 있는 곡장을 돌아 넘어가니 몇 개의 오래된 무덤이 나왔다. 비석을 보니 제일 위에 있는 무덤의 주인공이 황희 정승의 증손이라고 한다. 그런데 주산에서 흘러내려온 지맥이 이 무덤 위쪽에서 왼쪽으로 90도 정도 꺾이더니 황희의 무덤으로 연결되고 있었다.
오뎅탕
황희의 분묘 앞에 조성되어 있는 주차장에서 오뎅탕을 끓여 점심을 먹고 서오릉으로 향했다.
서오릉 안내도
경기도 고양시 용두동에 있는 서오릉(西五陵)은 경릉(敬陵)·창릉(昌陵)·익릉(翼陵)·명릉(明陵)·홍릉(弘陵)을 일컫는데 그밖에도 명종의 큰아들인 순회세자의 순창원(順昌園)과 숙종의 후궁인 희빈장씨의 대빈묘(大嬪墓)도 이곳에 있다.
수경원(綏慶園)
익릉(翼陵)
순창원(順昌園)
일반적으로 왕족(王族)의 무덤은 왕이나 왕비의 분묘인 능(陵), 세자의 무덤인 원(園), 그리고 일반 종친의 무덤인 묘(墓)로 구분되는데, 원이나 묘가 능에 비해 설치된 석물의 종류나 수가 간소하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능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학풍회 회원들
경릉(敬陵)
경릉(敬陵)
여기서도 수목이 울창하고 정자각 위로는 출입이 통제되고 있고 따라서 전체적인 산세나 무덤에 설치된 석물을 직접 구경하기 힘든 것은 동구릉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다만 마지막으로 들른 장희빈의 묘소는 무덤까지 들어갈 수가 있어 자세한 관찰이 가능했다.
대빈묘(大嬪墓)
장희빈은 숙종에 의해 한때 왕비(王妃)의 지위까지 올랐지만 나중에 폐출(廢黜)되어 서인(庶人)으로 강등(降等)되었고 그에 따라 그녀의 무덤은 묘라는 명칭을 부여받았다. 역사에는 그녀가 인현왕후와의 사이에 임금의 총애를 얻기 위해 온갖 질투와 시기와 모략을 일삼은 악녀의 전형으로 묘사되어 있지만, 피 튀기는 당쟁의 와중에서 남인이 패배하고 서인이 득세하자 서인 측에서 남인 출신인 그녀를 모략하기 위해 유포한 흑색선전의 혐의가 짙어 보인다.
대빈묘
무덤 뒤로 잘 생긴 바위가 보인다.
옥상 고문님은 희빈 장씨의 묘 바로 뒤에 있는 잘 생긴 바위를 지목하며 “묘 바로 뒤에 저렇게 바위가 돌출되어 있는 것은 그 바로 앞이 혈 자리임을 말해 주는 좋은 증좌”라고 말씀을 하셨다.
대빈묘에서 풍수강의를 하고 계시는 옥상 고문님
대빈묘를 끝으로 1박 2일 간의 간산(看山)을 마무리하였다. 버스는 서울 외곽 순환도로를 거쳐 중부고속도로를 내달렸고 곧 어둠이 내렸다. 어지럽게 돌아가는 술판 속에서 역사속의 지배층이 남겨 놓은 그 휘황찬란한 무덤들을 보고 가는 이 간산의 의미를 되새겨 보았다.
왕권신수설(王權神授說)을 치장하기 위한 그 교묘한 상징조작들. 그 아래에서 흘러나오는 수많은 민초(民草)들의 신음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우리가 이어받아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사람은 자연에서 와서 자연으로 돌아가며 따라서 자연과 사람은 서로 연결되어 있고 사람이 자연을 거슬러 살 수는 없다는 생각. 그 천인합일(天人合一)의 사상(思想)만큼은 사람들에 의해 짓밟히고 파괴된 자연과 그 결과로 자연이 인간에게 되돌려 주고 있는 끔찍한 재앙(災殃)이 현실이 된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아니 오늘날에야말로 더욱 유용한 생각이 아닐까.
2010년 4월 11일
못은 달을 비추는 거울 月池
첫댓글 조선왕조 40기의 왕릉 중 유일하게 6대왕 단종(장릉)만이 강원도에 있고, 나머지는 모두 서울과 경기도에 있다고 하지요. 학풍회 따라 1박2일 출발하여 첫 날에는 회무침에 소고기 구이 등 화려했는데 다음날엔 오뎅탕..(좀 있다고 팍팍 쓸 때 알아봤다 ㅋㅋ) 그나저나 월지아우, 올해 외유 마일리지 쿠폰 학풍회에서 일찌감치 써먹어가꼬 연하고질 원정산행은 또 물 건너 갔는 거 아닝가?? (나는 산에 가서 텐트 속에 잠을 자면 숙면하고 숙취 없어 맨 땅이 제일 명당이더라.)
월지대사 글을 꼼꼼히 들여다 볼려면 내 수준으로는 2박3일은 걸릴것 같네.... 오늘은 사진만 횡하니 보고 갑니다...
대충대충 잘 보고갑니다.틈틈히 먹는 이야기가 아주 자세히 씌여진건 월지님이 먹는것에도 많은 비중을 두는구나 싶네요.ㅎㅎㅎ.......먹는 입 많으면 하는사람 힘드는데......혹시 석양한마리 따라오려 하지 않던가요? 정원에 있으면 여러모로 참 좋을것 같은데.....깜깜한 밤의 산속처럼 무섭지도 않고.......
여행 중에는 먹는 즐거움이 큰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이지요. 거기다 동호회에 올리는 것이 주목적인 글이다보니 가급적 있었던 일을 그대로 전할 필요도 있고요.
이번엔 멀리 뛰셨네요. 바탕지식이 전혀 없으면 읽어도 재미 없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다녀와서 다시 글로 쓰는 과정에서 정확한 정리가 되는것 같구요. 방대한 분량이라 오늘 하루가 부족할 듯합니다. 일단 1/3정도만 읽고 가렵니다. 솥뚜껑 운전할 시간이라 ㅎㅎㅎ
언제나 그렇듯이 월지님 글은 한번에 다 못보니 다보고나서 답글 적을려면 몇일 걸리겠습니다.최소 두번은 보아야 하니까요.좋은 글과 그림설명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