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도 어김없이 ‘마스터즈 오브 호러’가 부천을 찾아왔다. 이번엔 시즌2다. 호러영화의 전설적 거장들이 뭉쳐 시즌1보다 유려한 완성도를 보여준다. 이와 더불어 독특한 기획력으로 승부하는 ‘야쿠자 23구 컬렉션’을 소개한다.
빠밤. 이 정도 사람들을 한 자리에 모아 소개할 때면 <스타 워즈>의 메인테마 음악이라도 터져 나와야 마땅하다. 일단 숨 크게 한 번 들이쉬고. <텍사스 살인마>의 토브 후퍼와 <런던의 늑대인간>의 존 랜디스, <할로윈>의 존 카펜터, <서스페리아>의 다리오 아르젠토, <사탄의 인형>의 톰 홀랜드, <그렘린>의 조 단테, <크리터스 2>의 믹 개리스, <좀비오>의 스튜어트 고든 등 피비린내 풀풀 나는 세계적 공포영화 거장들이 하나의 기획아래 뭉쳤다. 2년 전만 하더라도 “뭐야, 새로운 ‘환상특급 Twilight Zone’ 시리즈라도 만드는 걸까?" 따위의 의문을 품었겠지만 이젠 상황이 다르다. 여기, ‘마스터즈 오브 호러’의 두 번째 시리즈가 도착했다. 미국 케이블TV 채널 쇼타임에서 기획한 공포영화 거장들의 프로젝트 시리즈다.
사실 이름값이야 빠지지 않는 구색 좋은 감독들이지만 토브 후퍼처럼 기복이 심한 노땅들도 섞여 있다보니 겉만 보고 혹하는 건 섣부른 판단이다. 하지만 시즌1이 증명했듯, ‘마스터즈 오브 호러’는 단순히 옵션만 요란한 똥차가 아니다. 이 기획을 통해 거장들은 자신들이 과거에 구축한 장르 관습을 적절히 답습하고 변용하고 파괴하면서, 장편 극영화에서 시도하기 힘들었던 실험을 자유롭게 구사했다. 뿐만 아니라 TV 배급이라는 새로운 윈도우 모델을 마련함으로써 저예산 호러영화의 활로를 개척하기도 했다. 시즌1에서 최소한 절반은 볼만했고, 그 가운데 절반은 꽤 흥미로웠으며, 특히 존 카펜터의 <담배자국>은 명예의 전당에 오를 만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명예의 전당에 진입할 작가가 당신의 예상보다 더 많을 것이라는 것 정도는 약속할 수 있다. 올해 부천판타스틱영화제는 지난해에 이어 ‘마스터즈 오브 호러' 시즌2의 13개 에피소드를 전부 상영한다. 프로그램 책자를 아무리 뒤져봐도 볼만한 영화를 고를 수 없다면, 이 중에서 아무거나 하나를 골라잡아도 무방하다. 뭘 고르던 심심하진 않을 테니까.
더불어 올해 부천판타스틱영화제에는 ‘마스터즈 오브 호러’만큼 독특한 기획력이 돋보이는 특별전 하나가 관객을 기다리고 있다. ‘야쿠자 23구 컬렉션’이 그것이다. ‘마스터즈 오브 호러’가 공포 장르면 뭐든지 좋다는 조건으로 거장들에게 연출을 부탁했듯, ‘야쿠자 23구 컬렉션’은 “도쿄에 있는 23개의 구를 배경으로 야쿠자가 주인공이기만 하면 된다”는 대전제 아래 만들어진 스물네 편의 단편영화로 구성돼 있다. 4분에서 최대 17분을 넘기지 않는 이 작품들은 코미디에서부터 SF에 이르기까지 장르를 불문한 자유로운 상상력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이 시리즈는 최초 <야쿠자 23구>라는 제목으로 인터넷을 통해 공개되면서 반향을 일으켰는데 야후 저팬에서 수주 동안 검색어 순위 1위를 기록했다. 인터넷 시대의 새로운 배급 모델을 설정했다는 점에서 각별한 의미를 갖는 작품들이다.
두려운 모든 것들의 귀환 ‘마스터즈 오브 호러’
‘마스터즈 오브 호러’ 시즌2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역시나 다리오 아르젠토의 <죽음의 모피코트 Pelts>다. 세월이 무상하게도 이젠 ‘아시아 아르젠토의 아버지’라는 수식어로 더 자주 거론되는 다리오 아르젠토지만, 시즌1의 <제니퍼>로 거장의 자존감을 과시했던 전력을 무시할 순 없다. <록키 호러 픽쳐 쇼>의 영원한 ‘에디’ 미트로프가 주연을 맡고 있으며 <나이트메어>의 질기고 질긴 ‘낸시 아빠’ 존 색슨이 조연으로 등장해 반가움이 더하다.
영화는 신성한 너구리를 도륙해 가죽을 얻었다가 저주를 받게 된다는 오래된 동화를 모티브로 하고 있다. 모피코트를 만드는 공장주인 주인공이 저주받은 너구리 가죽을 손에 넣는데, 이 가죽에 접촉하는 사람들은 살인충동을 느끼게 된다. 결국 주인공과 그가 사랑했던 스트리퍼 모두 끔찍한 파국을 맞이하게 된다는 내용이다. 아르젠토의 전성기 시절 작품에서도 쉽게 볼 수 없었던 강도의 고어 신들이 화면 위로 흘러내리듯 피를 토하는 <죽음의 모피코트>는, 기대에는 다소 미치지 못하더라도 표현의 강도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작품이다. 특히 미트로프가 결말에 이르러 보여주는 신체해체(절단이 아니다!)의 이미지는 단연 압권이라 할 만하다.
이미지의 과잉보다 재기발랄한 이야기의 힘을 원한다면 존 랜디스의 <패밀리>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시즌1에서 섹스와 공포와 웃음이 종횡무진 뒤섞인 역작 <사슴 여인>을 선보였던 존 랜디스는 이번에도 확실한 믿음과 신뢰를 보장하고 있다. 내러티브 짜임새와 기발한 결말만 따진다면 이만한 작품을 찾기 힘들다. <패밀리>는 사람들을 납치해 염산으로 살을 녹인 뒤, 그 뼈를 다시 조립해놓고 가족처럼 데리고 사는 중년의 외로운 남자 ‘해롤드’를 비춘다. 어느 날 옆집에 젊은 부부가 이사 오게 되고, 해롤드는 젊은 부인을 잡아다 새로운 가족으로 삼겠다는 계획을 세운다. 뭔가 일이 착착 진행돼가는 듯싶지만 종반에 이르러 벌어지는 의외의 상황은 명쾌한, 그러나 헤모글로빈이 분수처럼 작열하는 파괴적 결말로 이어진다. 언뜻 <매니악> 유의 전형적인 사이코패스 스릴러를 답습하는 듯하다가 뒤통수를 후려치는 <패밀리>는 이번 시즌에서 최고의 에피소드로 자웅을 겨루기에 부족함이 없다.
공포영화 마니아의 입장에서 가장 크게 환호할 만한 작품은 스튜어트 고든의 <검은 고양이>다. 이 분야에서 성서보다 더 유명한 에드가 앨런 포의 원작을 바탕으로 한 에피소드지만 소설을 그대로 영화화한 건 아니다. 생활고에 시달리던 포가 집에서 기르던 검은 고양이 때문에 아내를 죽인 뒤 지하실에 암매장했다가 발각되는 끔찍한 꿈을 꾸고, 이를 소설로 쓰게 된다는 간단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하지만 <검은 고양이>의 진짜 재미는 에드가 앨런 포 역을 누가 연기했느냐에서 나온다. 누가 캐스팅됐을까? 스튜어트 고든의 해묵은 페르소나, <좀비오>의 제프리 콤즈다. 살짝 불어난 몸무게와 콧수염 분장 때문에 쉽게 알아보긴 힘들지만, 제프리 콤즈와 스튜어트 고든 콤비의 화학작용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결과물을 선보이고 있다. 특히 스튜어트 고든이 H.P. 러브크래프트의 소설을 영상화하지 않더라도 괜찮은 영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했다는 점이 가장 중요하다.
시즌2의 가장 흥미로운 에피소드면서 명예의 전당에 오를 만한 가장 강력한 후보는 다름 아닌 조 단테의 <스크루플라이 The Screwfly Solution>다. 시즌1에서 이라크 참전 병사들이 좀비가 된 채 돌아와 선거에 참여한다는 내용의 <병사들의 귀환>을 선보였던 조 단테는 정치적 자의식을 감추지 않기로 작정한 모양이다. 다만 달라진 게 있다면 <병사들의 귀환>이 흥미로운 메시지에 비해 빈약한 내러티브를 보여줬던 반면 <스크루플라이>는 도발적인 정치성 외에도 이야기가 주는 쾌감과 힘에 무심하지 않다는 점이다. <그렘린>을 포함한 조 단테의 전작들과 비교해도 무게감과 재미가 떨어지지 않을 만큼 유려한 풍자적 공포물 <스크루플라이>는 여성을 죽이도록 충동질하는 바이러스에 감염된 남자들의 지옥도를 그리고 있다.
누군가의 의도로 인해 남성의 성적 충동이 살인욕구로 대체되면서 벌어진 상황이다. 병은 미국 전역으로 퍼져나가고, 여자들은 남장을 하고 다니거나 대피하는 식으로 목숨을 부지해보지만 결국 멸종의 위기에 처한다. <스크루플라이>가 오싹한 지점은 병에 걸린 남자들의 행동양식이 현실세계의 남성 본위 이데올로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평소 하는 생각과 말을 ‘병에 걸린’ 남자들이 내뱉는 걸 보면서 남성관객들이 느끼게 될 공포는 각별하고도 역설적인 성질의 것이다. 특히 한국 공포영화였다면 분명히 바이러스의 정체에 대해 위악적이라도 대사를 통해 다 설명해주고 말았을 것을, 뚜렷한 서사의 기승전결 없이 그저 현상의 나열을 통해 직접 그 공포에 동참하게 하는 화술이야말로 주목할 만하다. 이런 건 보고 배워야 한다.
도쿄 천일야화 ‘야쿠자 23구 컬렉션’
앞서 설명했다시피 길어봐야 십 분 남짓인 ‘야쿠자 23구 컬렉션’의 작품들은 인터넷용 기획물인 만큼 형식적, 내용적 강박과 한계를 탈피해 그야말로 자유스러움의 절정을 보여주고 있다. 대부분의 작품들이 장르 혼합적인 특성을 드러내고 있으며 장편 극영화를 지배하는 원칙과 기준 대신에 꼭 그만큼의 상상력과 실험성을 점유하고 있는 듯한 모양새다. 어쩌면 이것은 현시간대에 만나볼 수 있는 가장 급진적인 형태의 영상 언어일지 모른다.
구라모토 마사유키가 연출한 12분짜리 단편 <춤추는 복수 Revenge>는 전체 컬렉션 시리즈의 색깔을 어느 정도 대표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만화적 상상력과 혼란스러운 편집, 언뜻 츠카모토 신야의 초기작들을 연상시키는 기괴한 이미지들의 향연으로 이뤄진 <춤추는 복수>는 애인의 복수에 나선 여인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특이한 건 이 여인 역시 방금 전에 자살한 사람이라는 점이다. 죽었지만 죽지 못한 여인이 저지르는 파괴의 양상은 비슷한 종류의 영화에 이미 익숙해 있는 관객들에게마저 꽤나 참신하게 비춰진다.
간단한 플롯의 9분짜리 희극 단편 <야쿠자! 배달되다 Yakuza>(스기하라 노리아키)는 야쿠자를 사라져가는 과거의 봉건적 유산에 은유하고 있다. 어느 날 신혼부부의 집에 큰 상자가 배달되는데, 이 안에는 험상궂은 인상의 야쿠자가 들어 있다. 이날부터 야쿠자는 부부의 살림을 돕기 시작하지만, 마을사람들은 야쿠자 따위 마을에서 사라져달라며 매일 데모와 시위를 거듭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야쿠자는 자신을 받아준 이 집에 충성을 다하려는 눈치다.
<야쿠자 트라이앵글 Beyond the FOREST of the MAN>은 이번 컬렉션 목록 가운데 가장 실험적인 작품으로 꼽을 만하다. 다케토미 후리가 선보이는 이 4분 분량의 강렬한 단편은 절망에 휩싸인 야쿠자와 그의 인식의 흐름을 좇는다는 말만으론 그 내용을 온전히 설명할 수 없는 영화다. 불길한 빛과 색채, 떨리는 카메라의 시선과 찢어지는 음향효과를 통해 독특한 하드보일드 감수성을 형상화해 보이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