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리 신재효의 활동과 업적
신재효는 19세기 후반(후기8명창시대) 지방향리 출신으로 광대가 아니면서도, 판소리의 심취
한 후원가로서, 판소리 사설의 집성자로서, 이론가 비평가로서, 그리고 판소리의 지도자로서
창단의 바깥에서 당대에 가장 심대하게 판소리 광대들과 그 향유자(어전을 포함하여)들에게
영향을 미친 문제적 개인이다. 문제적 개인이란, 사회의 변화에 따라 당대에 사회적·문화
적·철학적으로 떠오른 문제에 대해서 새로운 사고의 영역을 개척하고 해법을 제시함을 통
해서 후대에까지 전망을 열어주는 인물을 말한다. 신재효는 근대적 비평가가 작가와 독자를
매개·유통시키고 문학을 바라보는 관점과 안목을 제시하고 작가에게는 지적인 거울을 제공
함으로서 어떤 방향을 제시하듯이, 광대들과 그 향유자들 사이에 개입하여 광대들에게는 자
신들을 뒤돌아볼 수 있는 사회적 거울을 제공하고 또 향유자들에게는 판소리 예술에 대한
규범과 비평적 안목을 제시함으로서 판소리를 지적인 예술의 차원으로 끌어올렸으며, 어찌
되었든 상하층을 아우르는 판소리의 국민예술화에 크게 기여했던 사람이다.
신재효가 활동하던 시기는 판소리의 역사에서 “후기8명창시대”로서 판소리가 무르익어 예
술적 완숙기에 접어들어 있었다. 어떤 예술장르든지 완숙기에 접어들면 이론적 점검을 통하
여 현재의 모습을 파악하고 새로운 발전과 중흥의 전망을 발견해나가기 위하여 수준높은 감
식안과 비평으로서의 사회적 담론을 형성하기 마련이다. 신재효가 어떠한 활동과 업적을 통
해서 이와같은 문제적 개인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는지, 몇 개의 항목으로 나누어 살펴보자.
1. 시대적 배경과 지방 향리로서의 신재효
신재효가 살았던 시대는 주지하다시피 조선봉건사회가 막바지에 이르러 사회변동을 예시하
는 사건들이 가시화되면서 봉건적 가치체계에 무너지고 사회적 급변이 진행되던 시대였다.
그가 태어나던 해(순조 12년, 1812)는 홍경래가 세도정치의 전횡과 부패관료의 횡포에 신음
하던 백성을 모아 관서지방을 뒤흔들며 일어나서 조선왕조의 지배질서에 정면으로 도전한
해였으며, 이러한 왕조 말기적 사건을 시작으로 가렴주구와 불법적인 수탈에 못 이긴 백성
들이 곳곳에서 무리 지어 일어나 혹독한 수탈을 일삼던 관리를 쫓아내기도 하여 동학농민봉
기의 조짐을 보이기도 하고, 천주교가 일부 지식인과 민중들 사이에 광범위하게 퍼져 장차
서양문화가 우리나라에 크게 영향력을 미치게 될 것을 예고하던 시기였다.
앞 코너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 시기에 신재효 가계는 그 아버지 대에 고창으로 이주함으로
서 고창지방에 터를 잡게 된다. 그의 아버지는 지방관청의 서울 일을 대신 해주던 경주인
노릇을 하다가 고창으로 내려 와서 관약방을 했던 사람이다.
신재효의 향리활동은 그의 아버지가 고창지방에서 닦아놓은 기반 위에서 이루어졌던 것으로
생각된다. 비록 임진왜란 후부터는 그 지방의 토박이 세력 출신이 아닌 향리의 수가 많아지
게 되었지만, 서울에서 옮겨온 이주민의 아들인 그가 고창지방에서 토호세력을 제치고 향리
의 직임을 맡기란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의 아버지 신광흡은 같은 성씨의 연고가
있는 신광택, 신성, 신백록, 신약문 등이 고창 현감으로 내려 간 것을 계기로 그 지방의 경
주인 자리를 얻어서 그의 아들인 신재효가 장차 고창 지방의 향리로 활동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을 것이라 짐작된다. 고창향토문화연구가 이기화 선생에 의하면, 신재효는 그의 아버
지가 마련한 토대 위에서 철종 때의 고창 현감이었던 이익상 밑에서 이방으로 일하다가 호
장에 오른 것이라 한다. 그가 이방으로 활동하고 있었던 40세 전후에 이미 곡식 1천 석을
추수하고 50가구가 넘는 세대를 거느린 부호로서 확고한 기반을 닦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모양성 기슭에 터 잡았던 그의 집의 크기만도 2천 평이 넘었다니 그의 살림 규모를 알 수
있다.
지방향리의 역사적 변천과정을 보면, 향리는 지방의 토호세력으로서 지방의 문화·행정 전
반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집단이었다. 그런데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조선왕조는 모든
권력을 중앙정부에 집중시키는 정책을 계속 밀고 나갔기 때문에, 지방호족의 세력을 꺾기
위해서 고려왕조에서는 그 지방에서 주인행세를 했던 토박이 세력이 맡았던 향리직을 하급
관리직으로 밀쳐 내려뜨렸던 것이다. 그 결과 조선조의 향리직은 신분직으로는 하찮은 것으
로 여겨지게 되었다. 또 향리에게 일정한 급료를 지불하지 않았던 제도적 장치 때문에 이들
은 먹고 살아가기 위해서 부정을 저지르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조에서 향리는 중앙정부의 서리, 역관, 기술관료, 서얼, 군교 등과 함께 중인층을 구성하
고 있었다. 이조 후기에 이를수록 이들은 여전히 양반사대부에게 천대받는 위치에 있었지만,
사회적 변화의 과정, 즉 반상제도가 유명무실하게 되고 이에 따라 상업을 근간으로 한 근대
의식이 싹트기 시작하면서 이들은 실리를 추구하여 상당한 부를 축적하고 현실적인 힘을 쌓
아갔던 계층이었다. 문화와 예술의 중심도 점차 양반 사대부의 현실성 없는 한문학 중심에
서 치열한 삶의 과정 속에서 문화생산자들의 삶의 한가운데에서 퍼 올려진 문화로 점차 문
화적 중심의 대이동이 시작되고 있었다. 판소리는 그 생동하는 문화적 힘으로 기층민중에서
시작하여 양반, 어전에까지 침투해간 대표적인 예술로 잘 알려져 있다. 여기에 신재효와 같
은 후원자이자 이론·논평가들이 크게 영향력을 행사했음을 말할 것도 없다.
예술가들이 부유한 재산가의 지원을 받아 활발한 예술활동을 벌여 왔음은 세계사의 전개과
정에서도 확인되는 일이다. 조선조의 예술활동도 양반사대부를 비롯한 재산가의 지원에 크
게 힘입었음은 물론이다. 특히 민간부분에서 예술을 지원한 쪽은 돈많은 재산가들이었을 것
이고, 이들 중에 서민자와 중인층이 상당한 몫을 차지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실제로 18·9세
기에 이르면 중인층 출신의 예술활동 지원가뿐만 아니라 예술활동가의 활약이 두드러졌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시조가인으로 활동하였던 김천택, 김수장이 중인출신이었다는 점이
그 좋은 보기이다. 향리 출신의 신재효가 판소리를 지원하고, 판소리의 이론 정립과 비평 확
립에 열성을 다한 것도 이런 측면에서 이해되어야만 한다.
2. 판소리 후원자 및 지도자로서의 신재효
신재효가 명실상부한 판소리의 후원자이자 지도자였다. 그런데, 신재효가 판소리의 후원자였
다 데는 아무런 이의가 없으나, 후원자이면서 지도자, 다시 말하면, 광대들의 교육도 담당했
다고 보는 견해에는 학계에서 많은 이의와 반론이 제기되어 있다. 왜냐하면, 신재효는 자신
이 창을 하는 광대가 아니었고 따라서 구체적으로 창을 지도했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
다. 여기서 판소리의 지도자로 볼 수 있는 소위 “지도”의 수준과 내용이 문제가 된다. 여
기에서 지도를 스승이 제자에게 하는 것과 같은 창악의 구체적인 지도만을 가리킨다면, 신
재효는 지도자로서는 자격미달에 해당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와 같은 지도는 당시 동
리정사에 초빙되었던 몇몇 8명창들이 수행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판소리를 예술의
반열에 등록시키는 자로서 그 예술적 지위를 부여하고, 광대가 갖추어야할 법례를 마련하는
한편, 지적인 소산으로 그 바탕인 사설을 개작하는 등, 구체적인 창악의 지도의 범위를 훨씬
넘어서는 의미심장한 지도를 함으로서 당대의 광대들과 그 향유자들에게 심대하게 영향을
미쳤다면, 그는 분명 명실상부한 지도자임에 틀림이 없는 것이다. 그가 만약 구체적인 창악
의 지도자였다면, 유파의 한계를 뛰어넘어 동·서편을 아우르는 판소리 후원과 지도는 수행
하지 못했을 것이다.
처음에 어떤 동기로 신재효가 판소리를 지원하게 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예술작품을 사들일 수 있다는 점에서 그의 판소리 지원동기를 막연하게 설명
할 수 있다. 또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18·9세기에 이르면 중인층 출신 예술애호가들이
예술사의 주동세력으로 등장하게 되었다는 점도 신재효의 판소리 지원 동기를 설명하는 데
에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런데, 그가 향리의 직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판소리를
지원하게 된 동기가 생기가 되었다고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신재효는 향리의 직무를 수행
하면서 고창 지방관청에서 열렸던 잔치에 판소리 창자를 포함한 예능인과 기생들을 동원했
을 것이다. 그러는 동안에 차차 판소리에 심취해 갔으리라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러나 보다 세심하게 여러 자료와 현지민들의 증언을 살펴 볼 때, 신재효가 판소리를 지원
하게 된 개인적인 동기를 조심스럽게 찾아낼 수 있을 듯하다. 그는 중인층이라는 신분의 제
약을 벗어나려고 대단히 노력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양반사대부적인 교양을 넓
히며 고창향반의 일부와 사귀었고, 신분동요라는 사회적 현실과 공명첩발부라는 당대적 조
처에 힘입어 명목상으로는 신분상승을 이룩하게 되었다. 그가 쌓은 양반사대부적인 교양은
그가 판소리 사설을 가다듬을 때 판소리 창자들이 소리하기엔 너무 ‘뜻이 센’것으로 바꾸
게 만드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또 그가 굶주린 사람을 구제하여 포상받은 일은 그로 하
여금 향리라는 직임이 일반적으로 지니게 마련인 부정적인 평판에서 벗어나게 하였고, 판소
리를 지원하고 양반사대부와 사귀는 일을 신분에 비해 지나친 일이라는 비난에서 빠져나가
도록 해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신재효가 그의 신분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노력은 일정한 한계에 부딪치게 되었을 것
이다. 그의 집안의 통혼권이 향리 가문에 국한되었던 사실이며, 그의 집 기둥 생김새가 신분
에 벗어났다고 암행어사 어윤중에게 지적당했다는 일화 등이 이를 잘 보여준다. 이 때문에
신재효의 의식에는 신분상승의지와 이를 제약하는 현실 사이의 갈등이 빚어내는 긴장이 크
게 작용하게 된다.
사나이로 조선에 생겨/ 장상댁에 못생기고/ 활 잘 쏘아 평통할까/ 글잘 한다 과거할까.
자신의 심경을 잘 노래하고 있는 자서가의 일부인 위의 작품에서 신재효는 그의 신분상승의
지를 가로막는 현실적 제약 앞에 서 있음을 절실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그가
현실적으로 충족시킬 수 없었던 욕구를 판소리 지원활동을 통하여 실현시키려 했던 것이 아
닌가 하는 설명이 가능해진다.
그는 판소리를 즐기는 행동을 통하여 양반사대부적 풍류를 과시하고, 판소리를 지원하는 활
동을 통하여 후덕한 대인의 도량을 내보임으로써, 명분을 앞세워 허세를 부렸던 향반보다
우월한 생활태도를 지속해 나갔던 것이다. 향반세력이 다른 지방보다 드셌다는 고창 지방에
서 들츩나무로 집 출입구를 낮게 만들어서 자신을 찾아오는 향반이 몸을 구부려 들어오게
하고 그보다 높게 지은 정자 위에서 내려다보면서 손님을 맞았다는 그의 자세도 이를 잘 보
여준다 하겠다. 결국 우리는 신재효의 판소리 지원활동이 그의 신분상승의지를 대신해서 충
족시키는 대상행동의 결과라는 점에서 그의 판소리 지원의 개인적 동기를 찾아보게 된다.
이제부터는 신재효가 어떤 방식으로 판소리를 지원했으며, 그가 판소리 창단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를 살펴볼 차례이다. 우선 주목할 것은 그가 판소리 전문교육을 실시했다는 점이다.
신재효가 판소리를 배우고자 하는 수습창자를 모아서 잠재워 주고 먹여 가면서 전문교육을
실시했다는 사실은 『교방가요』를 엮은 정현석이 써보낸 만장에서도 확인된다. 또 그가 지
은 짧은 노래의 ‘너도 공부하랴기면 가끔가끔 차저오서’라는 구절에서도 이점은 잘 나타
나 있다. 몇가지의 자료를 검토해 보면 그가 지원한 판소리 전문교육기관을 중심으로 공동
생활체의 형성이 이루어졌다고 생각된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 자신이 일년에 1천석을
거두어들이는 대재주였으니까 그러한 공동생활의 운영은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
다.
지금까지 검토해 온 사실에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일이지만, 신재효는 전문적이고 직업
적인 판소리 창자는 아니었다. 따라서 판소리 전문교육을 실시하기 위해서는 전문적이고 직
업적인 판소리 창자를 소리선생으로 초청해야 했을 것이다. 현지조사에 따르면 신재효에게
소리선생으로 초청되어 오랫동안 그의 판소리 전문교육을 도운 사람은 당시 동편제 소리의
명창이었던 김세종으로 알려져 있다. 뿐만 아니라, 그의 남다른 판소리 지원과 판소리 이해
가 판소리 창단에 알려지자, 당시의 명창들은 그에게 인정받기를 원하고 또 이론적인 지침
을 받고자 하였다. 실제로 당대의 쟁쟁한 판소리 명창인 이날치, 박만순, 전해종, 김수영, 정
창업, 김창록 등이 그의 지원과 이론적 지도를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외에 판소리 창
단의 최초의 여류명창인 진채선과 허금파 등도 신재효 판소리 전문교육 실시에 따라 나타날
수 있었던 셈이다.
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당시에 신재효가 판소리 창단에 미친 영향은 절대적이었다 해도 지
나친 말은 아니다. 이날치, 김수영, 정창업 등이 서편제의 명창이고, 그 밖의 창자들이 동편
제의 명창이었다는 사실은 그가 판소리의 유파에 관계없이 판소리 창단에 광범위한 영향력
을 행사하였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판소리 창단에 끼친 그의 영향은 구체적으
로 무엇이었는가를 알아 볼 필요가 있다.
당시 동편제의 명창으로 이름이 드높았던 김세종이 신재효에게 소리선생으로 초빙되어 판소
리 교육에 참여했다는 사실을 알아 본 바 있다. 김세종은 당시의 판소리 창자 중에서 그의
이론과 비평을 따를 사람이 없을 정도로 실력을 갖춘 명창으로 전해진다. 그가 신재효로부
터 판소리의 이론적 영향을 받았으리라는 점은 의심할 바 없는 사실이다. 실제로 김세종이
남긴 판소리의 이론은 표현내용과 표현동작의 일치성, 사설의 내용과 음악적 표현의 통합성,
음악적 표현의 구체적 형상력 등에 걸쳐 정연하게 전개되어 있다. 그런데, 그의 이론에서 주
목할 수 있는 것은 판소리 창자의 표현동작인 발림을 강조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신재효의
이론적인 영향의 결과라 보지 않을 수 없다. 동편제에서는 판소리 장단에 충실하고 박자의
변화를 엄격히 제한하는 창법 때문에 창자가 표현 동작을 할 여유를 찾기 힘들지만, 서편제
에서는 잔가락이 많고 작자의 변화가 많은 창법 때문에 표현동작이 쉽게 이루어진다. 이점
을 고려하면 동편제에 속한 김세종이 판소리 창자의 표현동작을 역설했다는 것은 그의 창법
의 보완점을 이론적으로 지도한 신재효의 영향을 받은 결과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
다.
3. 이론가 및 논평가로서의 신재효
판소리 이론가로서의 신재효의 면모를 가장 잘 보여주는 글을 신재효가 지은 단가 「광대
가」에서이다. 이 작품에서 신재효는 판소리의 4대법례를 제시하고 있는데, 이는 일종의 배
우·연기론에 해당하며, 또 가객이라는 명칭, 시김새, 조, 장단론 등에 있어 비교적 초기의
이론을 피력하고 있어 판소리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4대법례를 제시하고 있는 부
분을 보면 다음과 같다.
·······광대행세 어렵고 또어렵다 광대라 하는 것이 제일은 인물치레 둘째는 사설치
레 그 직차 득음이요 그 직차 너름새라. 너름새라 하는 것이 귀성기고 맵시있고 경각의 천
태만상 위선위귀 천변만화 좌상의 풍유호걸 구경하는 노소남녀 울게하고 웃게하는 이귀성
이맵시가 어찌아니 어려우며 득음이라 하는 것은 오음을 분별하고 육율을 변화하여 오장에
서 나는 소리 농락하여 자아낼제 그도 또한 어렵구나 사설이라 하는 것은 정금미옥 좋은 말
로 분명하고 완연하게 색색이 금상첨화 칠보단장 미부인이 병풍뒤에 나서는 듯 삼오야 발근
달이 구름밖에 나오난 듯 새눈뜨고 웃게하기 대단이 어렵구나 인물은 천생이라 변통할 수
없거니와 원원한 이속판이 소리하는 법례로다······
이상의 내용을 살펴보면, 신재효는 이 작품을 통하여 광대를 중심으로 판소리에 대한 이론
을 펼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판의 중심을 창자 중심으로 이해하고 광대가 갖추어야 할 네
가지 조건, 인물, 사설, 득음, 너름새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판소리의 이해는 그가
판소리 공연방식이 판소리 창자 한 사람에 의해 주도되고, 소리판 전체가 그러한 축 위에서
열리고 닫힌다는 점을 투철하고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와같이 판소리의 공연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점은 신재효가 네 가지 요건 중에 인물을 제
일로 거론한 것에서도 드러난다. 인물을 단지 얼굴의 생김새에 국한시킨 나머지 인물이 현
저하게 뒤쳐지는 사람도 명창의 반열에 오른 예를 들어 4대법례의 허구성을 논하기도 하지
만, 여기에서 인물이란 빼어난 용모를 포함하는 창우로서의 자질을 말하는 것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판에 광대로서 현현할 때의 갖추어야할 자질 말이다. 인물에 조합을 이루고 있는
‘치레’란 말은 이와 같은 해석이 정당함을 입증해 준다. 신재효의 지적대로 인물이란 변
통할 수 없는 것임에 틀림없는데, 치레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러나 이 불리한 약점을
극복하고, 오히려 이 약점을 역이용하여, 즉 인물치레를 잘하여 광대로서 이름을 날린 사람
은 얼마든지 있었던 것이다. 그러기에 ‘치레’란 말은 얼굴의 생김새뿐만 아니라 판에 현
현했을 때의 인물의 자질을 말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광대가 구비해야할 두 번째 조건으로 꼽고 있는 것이 사설치레의 능력인데, 광대는 “정금
미옥 좋은 말로 분명하고 완연하게 표현해서 관객으로 하여금 새눈뜨고 웃게”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설의 온전한 구사의 문제는 신재효와 같이 비평적 지도의 입장의 논자들에게 있
어서 중요한 지도의 대상이었으며, 가장 치중한 부분이기도 하다. 문자성에 입각한 지적인
사고의 주인공들에게 있어서 사설의 의미는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광대들은 달랐다. 엄
청난 양의 사설을 기억에 의존하는 광대들에게는 뜻과 발음이 부정확한 부분이 많았고 그런
부분은 술렁술렁 넘어가기 마련이었지만 주로 구술성의 기억에 의존하는 백성들에게는 나름
의 구술언어의 규칙이 있었으며, 그렇더라도 아무런 문제가 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판
소리가 전 계층으로 확산되면서, 사설의 불명확성은 의미전달의 장애가 되고, 보다 정확하고
아름답고, 그럴듯한 사설의 구사가 필수적인 요건이 되었던 것이다.
광대가 구비해야할 세 번째 조건으로 꼽고 있는 것이 득음이다. 즉, “오음을 분별하고 육률
을 변화하여 오장에서 나는 소리 농락하여 자아”내는 능력이다. 판소리에서 득음이라 함은
타고난 목성을 가지고 오랜 독공의 과정을 거쳐 마침내 사물/사건의 이면을 자유자재로 표
현해 낼 수 있는 경지를 말한다. 신재효는 득음을 통해 얻게 되는 소리치레의 경지를
‘조’ ‘목’ 등의 용어를 써서 표현하고 있다.
영상초장 다스름이 은은한 청계수가 얼음 밑에 흐르는 듯, 끄을러 내는 목이 순풍에 배노는
듯, 차차로 울리는 목 봉회노전 기이하다. 도도와 울리는 목 만장봉이 솟구는 듯, 툭툭 굴러
내리는 목, 폭포수가 소치는 듯 장단고자 변화무궁 이리농락 저리농락······.
진양조는 달아두고 놓아두고 걸리다가 둘치다가, 청청하게 도는 목이 단산의 봉의 울음, 청
원하게 뜨는 목이 청천의 학의 울음, 애원성 흐르는 목 황영의 비파소리, 무수히 농락변화
불시에 튀는 목이 벽력이 부딪는 듯, 음아질타 호령소리 타산이 흔드는 듯, 어느덧 변화하여
낙목한천 찬바람이 소슬케 부는 소리······.
광대가 구비해야할 네 번째 조건으로 꼽고 있는 것이 너름새다. 그 중요도 상에 있어서는
제일 끝에 위치하고 있지만, 그 어려움을 논하는 대목에서는 제일 먼저 논의되고 있다. 신재
효는 너름새라 하는 것은 “귀성기고 맵시 있고 경각의 천태만상 위선위귀 천변만화 좌상의
풍유호걸 구경하는 노소남녀 울게하고 웃게하는” 것이며 그 “귀성(천연덕스럽고 멋지
다)” 그“맵시”가 매우 어려움을 역설하고 있다. 이와같이 신재효는 너름새라는 것이 구
경꾼들을 웃게하고 울게할만큼 극적으로 중요한 것임을 인식하고 너름새가 판소리에서 차지
하는 위치와 역할을 중요시하고 매우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론가/논평가로서의 또 다른 면모가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곳은 신재효가 실제개작을 하면
서 기존의 작품을 논평하고 개작의 의도와 방향을 밝히는 부분에서다. 이는 “사설 개작자
또는 집성자 혹은 창작자로서의 신재효”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4. 단 잡가 창작가로서의 신재효
동리 신재효는 판소리사설 6마당 외에도 20여편이 넘는 단·잡가(단가·잡가·가사 등) 작
품을 남겨 놓았다. 신재효가 정리·창작한 단·잡가는
<허두가> 안에도 <①대관강산> <②역대가> <③궁장가> <④역려가> <⑤소상팔경> <⑥
고고천변> <⑦새타령> <⑧달거리> <⑨금화사가> <⑩숭유가> <⑪태령가> <⑫효도가>
<⑬북정가> 등 13편의 독립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신재효는 기존에 불려지던 단가를 개
작·정리하여 <허두가>라는 제목으로 제목없이 묶어놓은 것이다. 이 작품들을 살펴보면 다
음과 같다.
1. <허두가>: 이 허두가 안에는 13편의 기존의 단가들이 개작·정리되어 있다. 이들 단가의
대충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대관강산>: 4구 46행의 분량이며 등용되지 못함을 함하며 강산을 둘러보고자 하나, 그도
또한 쉽지 않음을 탄식하는 내용이다.
<②역대가>: 역대의 치란 흥망과 제왕이나 성현의 사적을 노래했다. 중국 상고시대부터 청
나라까지의 사적을 읊는 것이 보통이고 우리나라의 역대사를 붙이기도 한다.
<③궁장가>: 일종의 도덕가이다. 공부자(孔夫子)의 집을 구경가자고 한 뒤 유교가 성립된
내력을 주나라 주공에서부터 시작하여 공문의 70제자까지 소개하고 있다.
<④역려가>: 역대 영웅 명기의 덧없음으로 시작하여 중국의 인물과 고적을 장황하게 읊고,
우리나라의 명산과 그곳의 역사적 사실을 나열하고 있다.
<⑤소상팔경>: 이것은 작가연대미상의 가사 <소상팔경가>가 단가로 불린 것이며, 현존 작
품과도 동일하다. 19세기 명창 정춘풍의 더늠으로 알려져 있다.
<⑥고고천변>: 이것은 고종 대 명창인 송만갑이 잘 부른 단가이다. 이 작품은 원래 판소리
<수궁가>의 일부였으나, 신재효가 개작한 <토별가>는 상이한 내용을 담고 있다. 즉 이 부
분에 <고고천변> 대신 명산과 그에 얽힌 고사를 나열한 것이다. 별주부가 수국풍경은 조석
으로 보았기 때문에 산중을 찾아가 천봉만학을 편답한다고 설명하고는 역산(歷山)·도산(塗
山)·태악(泰嶽)·이구산(尼丘山) 등 무려 35개의 산과 고사를 열거하였는데, 구절이 <천봉
만학가>와 비슷하다.
<⑦새타령>: 이것은 신재효가 개작·정리한 다른 단가들과 마찬가지로 서사-본사-결사의
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신재효는 원래 결사가 없는 기존의 <새타령>에 결사를 첨가했다. 서
사에서는 간단히 뭇 새들이 짝 지어 날아든다고 하고는 바로 시들을 열거하는 본사로 들어
간다. 총23마리의 새들을 4구식 맞추어 노래했다.
<⑧달거리>: 이것은 월령체를 취하여 그 달의 풍속과 사친의 정을 노래하여, <사친가>로도
불린다. 1월에서 7월까지는 비교적 상세하나 8월부터는 1행으로 간단히 나열했다. 그리고 12
월령 뒷부분은 고적을 따라가며 고사를 노래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⑨금화사가>: 이것은 다른 본에 전해지는 것과 비슷하며, 금화사를 찾아가는 내용과 금화
사 안에 안치된 영웅과 미인들, 그리고 인생의 허망함으로 끝맺고 있다.
<⑩숭유가>: 이것도 현존하는 것과 대동소이하다. 꽃구경을 가자고 한 뒤, 유가 즉 공부자
의 꽃이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창기를 꽃이라 하는 경박자들을 경계하는 내용으로 구성된다.
<⑪태평가>: 중국의 천지 창조부터 대명이 일어낫다가 胡人(청나라)이 끊어 놓은 것까지를
말하고 뒤이어 우리나라의 역대사를 읊은 후, 성군의 태평성대를 기원하는 것으로 결사를
삼았다. <⑫효도가>: 초당에 누워 평생을 돌아보다가 자신의 불초함을 깨닫는다는 것으로
시작하여 젊은날 불효했던 것을 일일이 들어가며 후회한다. 결사에서는 다른 사람의 효성스
러움을 칭송하고 자손들에게 효도하기를 당부한다.
<⑬북정가>: 만고영웅을 데리고 북정 가자는 내용이 서사를 이룬다. 본사는 중국의 영웅 장
수로 군대를 구성하고 뒤이어 우리 장수 6인을 세웠다. 또한 중국 사적에 나온 장수들의 전
법을 활용하여 호쾌하게 전투하는 모습을 그렸다. 결사는 태평했던 옛시절 다시 보기를 원
하는 것으로 맺고 있다.
2. <성조가> : 원래의 성조가는 성주굿의 내용을 담고 있는 일종의 고사 소리인 <성주풀이
>의 형식을 취하여, 집 안팎을 관장하는 여러 신들에게 기원하는 내용이다. 그러나 <성조가
>는 경복궁과 왕실에 대한 찬양과 축원의 성격이 강하다. 이와 같이 민간요의 내용을 개작
하여 왕실에 맞게 ‘번안’하듯 개작한 것은 경복궁 낙성식에서 제자 진채선이 부르도록 하
기 위해 신재효가 직접 지은 작품이라는 사실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경복궁 중건을 기
념하는 자리에서 불릴 노래이므로 단순한 집안이 아닌 왕실의 안과태평을 비는 내용을 담는
것으로 개작해야 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참여하는 좌상객의 신분을 고려하여 신재효 자신
의 지식을 동원한 내용으로 꾸민 것이다. 진채선으로 하여금 경복궁 낙성연에서 부르게 한
노래는 이 <성조가>와 <방아타령>, <고사>이다.
3. <어부사> : 12가사의 하나로 전해지는 <어부사>는 그 기원을 고려에 두고있다. 작가 미
상으로 <악장가사>에 수록되어 전해오던 12장의 장가 작품을 조선 명종 때에 이현보가 9장
으로 개작하였다. 윤선도 역시 <어부사>를 썼으며, 이것을 가사창 곡조에 얹어 불러 12가사
의 하나로 전해지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은 <어부사>의 문학적 답습은 계속 이어져 문학적
흥취가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어부사>를 짓거나 습작용으로 베끼면서 그 맛
을 즐기는 것이 하나의 관습화되었다. 신재효도 이런 점에서는 예외가 아니었을 것이다. 어
느 정도의 문식과 문재를 지닌 그가 <어부사>에 관심을 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런 현상이
다. 그가 남긴 <어부사>도 앞의 두 <어부사>와 다르지 않다. 단, 12가사의 <어부사>는 7
언32구인데, 신재효본은 총 41구로 늘어난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4. <호남가> : 이 노래는 호남 각 지방의 이름을 동음이의어가 갖는 묘미를 살려 나열하는
방법으로 지은 것이다. 신재효는 기존의 단가들이 가졌던 사설 창작의 원리나 관습을 따라
단가들을 창작했다. “함평천지 늙은몸이 광주고향 바라보니 제주어선 비러타고 해남으로
건너올제 흥양의 돋는해는 보성에 비쳐있고 고산의 아침안개 영암에 둘러있고 태인하신 우
리셩군 예악을 장흥하니" 로 시작하는 <호남가>는 명창 임방울이 잘 불렀던 단가이다.
5. <광대가> : ‘이론가·논평가로서의 신재효’에서 살펴본 것처럼, 신재효는 광대가 갖추
어야할 4대법례를 이와 같이 단가의 형식으로 제시하고 논했다. 그는 광대가 되는 것이 쉽
지 않음을 말하고 광대가 갖추어야 할 덕목을 제시하고 설명을 곁들였을 뿐 아니라, 판소리
명창들의 특징을 당송의 유명한 문인들의 작품세계의 성격과 대비시키고 있다. 즉 판소리
명창들이 도달했던 독자적인 예술세계를 양반사대부들이 최고의 가치를 부여했던 한문학의
대가들이 이룩했던 문학적 세계와 나란히 견주어서 품평을 했다는 점은 그가 판소리의 예술
성을 매우 값지게 평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6. <고사> : <고사>는 일명 명창축원이라고도 한다. 1868년(고종5년)에 있었던 경봉국 중건
기념 민족예술 큰잔치에서 신재효가 <성조가>·<방아타령>과 함께 지어 자신의 제자인 여
류명창 진채선에게 부르게 한 작품이다. 전반부에서 국토의 형세와 한양에 도읍한 것을 찬
양하고 전국의 명당과 지세를 하나하나 열거하며 축원하였다. 마지막으로 자손이 번성하는
명당을 들어 왕조의 무궁함을 기원하였다.
7. <단잡가>: <단잡가>는 <권유가>의 내용과 같은데 뒤에 <방아타령>이 붙어 있으며, 신
재효 자신의 본관과 명·자호·생년으로 내용을 삼았다.
8. <치산가> : 신재효가 70이후에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치산가>는 평균 4구 194구에 달
하는 장편이다. 젊어서 방탕하여 ‘긔한 노인’이 된 자신을 비웃지 말라하며 사치하기 쉬
운 ‘소년’들에게 경계의 이야기를 하는 방식으로 되어 있다. 농사와 잠업을 중심으로 실
질적인 방법을 나열하여 치산하기를 권장 한 후 가세의 흥망이 모두 가모(家母)에게 달려
있음을 일깨우고 가모로서 해야 할 일을 상세히 알려 주었다. 또한 노복(奴僕)을 인격적으로
대우하여야 심복한다고 하였다. 후반부로 넘어가면, 앞에서 말한 치산이 욕심에 의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하며, 무엇보다 부모님의 봉양과 형제간의 우애 위에서 치산이 이루어져야
할 것을 부각시켰다. 후반부에는 다시 한번 제가(齊家)와 치산(治産)을 모두 이루는 방법을
나열하여 강조하였다.
9. <십보가> : ‘예의동방 죠흔나라에 삼강오륜 없어’진 세태를 한탄하는 것으로 시작한
<십보가>는 <괴심한 사영되놈>과 함께 신재효의 구국사상을 드러내는 작품으로 평가되었
다. <구구가>와 마찬가지로 숫자 어희요 형식을 취하고 있는 이 작품은 한 걸음에서 열걸
음까지 단락을 구분지어 치란 흥망과 중국 사적에 관련된 성어를 나열하기도 하고, 뜬끔없
이 ‘오만돌변 다난대도 오입부디 하지마소’ 하면서 신소리를 늘어놓기도 한다. 처음에는
나름의 의식을 드러내려 하였으나 숫자 어희요가 갖는 말의 형식에 얽매이다 보니 희작으로
흐른감이 없지 않다.
10.<권유가> : 이 노래는 ‘에라만수 에라태신’으로 시작하는 민간의 <성주풀이>에 , 신
재효가 고금사의 영웅호걸과 절대가인의 죽음을 일일이 나열하고는 ‘부유갓튼 우리인생’
이니 ‘주야장상 논다한들 다놀고 도라갈까 놀고놀고 놀아보세’라고 하며 인생무상의 회한
을 읊은 것이다.
11.<오섬가> : 오섬가는 신재효가 지은 가사 중에서 가장 긴 분량을 가진 작품이다. 또한
그 구성의 독특함으로 인해 다른 가사 작품들에 비해 일찍 주목 받았다. 서두에서 서술자가
앞으로 진행될 사설이 황당하게 들릴 수 있으나 속뜻을 알면 그렇지 않다라고 하며 금오(金
烏, 까마귀)와 옥섬(玉蟾, 두꺼비)을 소개한다. 마치 판소리 초두에 창자가 등장인물을 소개
하는 것과 같다. 본사에 가면 소년부부인 금오와 옥섬이 자신들이 본 역대사 중에서 사랑
애(愛)자와 슬픈 애(哀)자에 얽힌 것을 말해 보자고 한다. 이 부분에서 창자의 목소리로 추
정되는 서술자는 금오와 옥섬으로 왔다갔다하며 사설을 전달한다. 사설의 내용이 완전한 하
나의 서사체계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다양하고 독립적인 삽화와 이야기가 愛와 哀라
는 공통된 인간의 정을 중심으로 얽혀져 나가는 방식으로 짜여져 있다.
12.<방아타령> : 방아타령은 본래 하층의 삶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민중의 노래이다. 특히
방아라는 것이 갖는 비유적 의미가 남녀간의 성생활과 관련이 있어서, 문학사에서 주로 육
담을 담는 형식으로 사용되어 자유롭고 발랄한 성의식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신재효 작
방아타령은 성조가와 함께 경복궁과 왕실에 대한 찬양과 축원의 성격이 강하다. 진채선으로
하여금 경복궁 낙성연에서 부르게 한 노래는 이 <방아타령>과 <성조가>, <고사>가 있다.
13.<도리화가>: 이 노래는 신재효가 59세 되던 1870년(고종7년)에 경복궁 낙성식 이후로 서
울에 있는 24세의 여제자 진채선에게 보낸 것으로 더욱 유명해진 작품이다. 스승과 제자라
는 관계와 35년이라는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신재효가 자신의 연정을 담았다 하여 중세
서양문학에서나 볼 수 있는 일종의 연애문학으로 평가받았다. 또 관습에서 벗어난 만남과
이별을 소재로 하여 그것을 다시 관습화된 문학적 표현을 통해 합리화하고 해결하려는 모습
을 보이기도 했다. 이 노래는 명창이 된 채선이 공연하는 모습을 몰래 지켜 본 공연과정이
숨어 있으며, 절대가인의 풍류가 없었던 것을 한하고 여창자를 역대 풍류가객과 견주어 보
려는 신재효의 긍지가 나타나 있다.
14.<구구가> : <구구가>는 일종의 어희요로 구구단에 맞추어 말장난(fun)을 하는 것이다.
경상북도 안동에서 전해지는 동요와 그 내용이 같다. <구구가>는 구구셈을 하는 앞부분과
끝말의 동음어를 이어 문장을 자는 뒷부분으로 나뉜다.
5. 사설 개작자 또는 집성자 혹은 창작자로서의 신재효
신재효가 해놓은 작업 중에서 가장 높이 평가받을 일은 자기 나름대로 판소리 사설을 고치
고 가다듬어서 정착시킨 일이다. 보는 관점에 따라 그의 개작작업의 가치와 의의에 논란이
여러 가지로 있을 수 있겠지만, 그의 판소리 사설은 오늘날까지 남아 전해지는 판소리 사설
가운데 사설의 정착과 개작과정에 대한 가장 확실한 정보를 제공하는 자료라는 점에서 아무
도 이의를 달지 못할 것이다. 더구나 그가 남긴 판소리 여섯 마당의 사설중 <변강쇠가>는
그가 아니었다면 그 구체적 내용이 전해지지 못할 뻔하였던 작품이다.
그가 판소리 여섯마당을 개작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소요되었다. 개작작업은 40세(1852)를
전후하여 판소리에 심취하기 시작해서 1864년경 토별가의 정리를 시작으로 1884년 유명을
달리하기까지 이어진 인생의 대기획이었으며, 마침내 그가 죽기 전에 판소리 여섯마당의 정
리작업을 마칠 수 있었다. 그 작업과정이 어떠했는지는 자세히는 알 수 없으나, 기존에 판소
리소설이 있었다손 치더라도 구비전승되는 판소리를 기록하고 서로 대조하고 개작하고 정착
시키는 작업은 매우 수고로웠을 것이다.
그가 판소리 이론가로서 일정한 판소리상을 정립하고 있었던 만큼 판소리의 개작작업은 필
연적인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그의 이상형에 맞추어 판소리사설을 함부로 가위
질하지 않았다. 그는 사설이 사실성에 부합되지 않는다고 판단될 경우, 그 부분을 없애지 않
고, 이러저러한 논평을 가한 후에 자신이 개작한 부분을 병기해 놓았다. 이로서 독자/창자로
하여금 스스로 판단할 수 있게 하였던 것이다.
그가 판소리 사설을 개작하는 축으로 삼은 것은 사설이 갖추어야 할 정합성(整合性), 즉 표
현하려는 내용과 표현되는 언표(言表)사이의 일치성에 있었다. 말하자면, 사설과 ‘이면’을
일치시키려는 그의 합리적 개작의도에 따라 개작작업이 진행되었던 것이다. 이를 분명히 알
아보기 위하여 춘향이 신임 남원부사의 수청을 거절하다가 매를 맞게 되는 부분에 나오는
십장가의 개작과정을 보면 다음과 같다.
춘향의 곧은 마음 아프단 말하여서는 열녀가 아니라고 저렇게 독한 형벌 아프단 말 아니하
고 제 심중의 먹은 마음 낱낱이 발명할 제, 십장가가 길어서는 집장하고 치는 매에 어느 틈
의 할 수 있나 한귀로 몽구리되 안짝은 제 글자요 밧짝은 육담이라, 일쨋 낫 딱 부치니 일
정지심 있사오니 이러하면 변할테요 매우 쳐라 예이 딱 이부아니 섬긴다고 이 거조난 당치
안소, 세쨋 낫 딱 부치니 삼강이 중하기로 삼가히 본받았소, 넷째 낫 딱 부치니 사지를 찟드
래도 사또의 처분이요, 오쨋 낫 딱 부치니 오장을 갈라 주면 오죽히 좋소리까 육쨋낫 딱 부
치니 칠사 중의 없는 공사 칠대로만 쳐 보시오 팔쨋 낫 딱 부치니 팔면부당 못될 일을 팔짝
팔짝 뛰어보오, 구째 낫 딱 부치니 구중분유 관장되어 굳은 짓을 그 하오 십째 낫 딱 부치
니 십벌지목 믿지마오 십은 아니 줄 터이요.
여기에서 고딕 부분은 십장가를 개작 변용하려는 신재효의 태도와 개작의 방향을 나타낸 것
이다. 즉 그는 십장가가 길어지는 것은 춘향이 매맞는 정황의 ‘이면’에 맞지 않게 서술되
는 것이라고 비판하면서 이 부분을 짧게 줄이고 있다. 그는 한자로 된 어휘로 한짝을 만들
고, 구어로 된 육담 등으로 다른 한짝을 맞추어서 독특한 십장가를 만들어 낸 것이다.
이것은 신재효의 판소리 개작의 하나의 예에 불과하며, 6마당에 이르는 신재효의 판소리개
작작업은 매우 방대한 것이었고, 각 작품에 대한 평가도 다르다. 그가 개작한 판소리의 내역
과 특징을 보면 다음과 같다.
춘향가(남창 춘향가/동창 춘향가) : 신재효가 가장 심혈을 기울여 개작한 것으로, 그는 춘향
가를 남창 춘향가와 동창 춘향가로 판을 분화시킴으로서 판소리사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
다. 이러한 분화의 구체적 내용을 보면, 남창은 기존의 판소리를 현저하게 개작한 것으로 영
웅소설의 골격을 갖추고 있으며 방자적 존재들이 소거되고, 규범적 인간형이 제시되어 있다.
반면에 동창은 기존의 판소리적 형식과 내용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으며, 방자적 존재들이
존속하고, 욕망을 추구하는 세속적 인간형이 제시되어 있다. 이와 같은 개작에 대하여, 여자
가 창을 할 수 없었던 관습에 도전하여 새로운 판소리 영역을 개척하려는 의욕적 태도로 해
석하고, 공연예술로서의 판소리를 잘 이해한 소산으로 풀이되기도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남창 춘향가는 양반취향에 맞도록 개작한 것에 지나지 않고, 동창 춘향가는 당대의 춘향가
를 기록한 데 지나지 않는다는 부정적 평가도 있으며, 상하층의 양극적 의식을 최대한 포용
융화시키고 있는 것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이와 같은 그의 판의 분화에는 그의 사회적 계층으로서의 이중의식이 내재되어 있다. 즉 어
전층은 양반 관료의 지배에 제어되어 사회적 상승을 억제 받으면서도, 그 지배질서를 승인
하고 유지하여야 자신의 안정과 이익을 얻을 수 있었던 계층이었던 만큼, 계층적 자기모순
내지 갈등이 사고와 문화에서도 드러나는데, 남창과 동창의 분화는 이러한 상반된 관심과
태도의 표출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남창 춘향가에는 유교적인 질서의 감각과 가치의식에
투영되어 있으며, 반면에 동창 춘향가는 판소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골계, 풍자, 갈등을 통
하여 새로운 질서에로 나아가려는 감각과 가치의식이 투영되어 있다는 것이다.
박흥보가 : 신재효 개작의 박타령은 놀부와 흥보를 중심으로 신재효의 현실의식이 잘 드러
나고 있는 작품이다. 놀부는 단순히 악하고 부자이며, 흥부는 단순히 착하고 가난하다는 전
통적 의미에만 머무르지 않고, 놀부는 대사회 봉사의식이나 윤리적 측면에서는 부정적이지
만, 물질의 필요성을 철저히 인식하여 부를 획득한 현실추구의 인간이며, 흥부는 윤리적 측
면에서는 훌륭하다 할지라도 현실을 외면한 생활로 최대의 고통을 최대한 겪는 고난 속의
인물임을 보여주고 있다. 빈부의 격차를 양극화시키면서도 이를 사실적으로 묘사함으로서
그 개성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신재효는 이 둘의 인간형을 불구의 인간상으로 제시함으로서 그 현실인식과 주제의식을 명
확히 한다. 즉, 어떤 한편을 완전한 인간상으로 제시하지 않고, 놀부와 흥보로 대표되는 물
질과 윤리의 불균형의 인물에 현실상황을 제시함으로서 이 둘의 조화에 의한 현실의 극복이
라는 매우 현실주의적이고 합리적인 인간상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심청가 : 심청가 또한 소위 그의 합리적 개작의 흔적이 여러 곳에서 보이는 작품이다. 심봉
사가 개천에 빠지던 날 심청이 늦게 들어온 이유를 ‘장승댁의 생일잔치에 음식준비를 거들
다가 늦어’지게 되었음을 밝히는 것에서부터, 심봉사가 왕후가 된 딸을 상봉하는 장면에서
딸에게 극존칭으로 말버릇을 바꾸게 한다든지, 심봉사가 자기를 구해준 화주승에게 공양미
삼백석을 약속하는 부분을 심청이 스스로 그 약속을 하는 것으로 고쳐 딸의 효행을 더욱 돋
보이게 하고 심봉사로 하여금 딸을 희생시켰다는 비난을 면하게 하는 등, 대체적으로 어떤
합리적 근거를 제시하면서도 결국은 유교적 윤리의식에 경도되는 개작을 보이고 있다. 그러
나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한편으로는 이러한 유교적 합리성과 한문 투의 표현방식 이면에
이와 상반되는 성격이 분명하게 드러내기도 한다. 예를 들자면, 심봉사의 호색행각을 적나라
하게 그려나가는데, 심봉사는 동네 과부있는 집을 공연히 찾아다니면서 호색행각을 벌이는
가 하면, 자기 정력을 자랑하면서 뺑덕어미를 만나서 갖은 장난질을 치느라고 약간 남은 재
산을 탕진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퇴별가 : 보통의 판소리 수궁가에 있어서 토끼는 당시 서민적인 민중층의 형상이며, 용왕과
자라는 귀족적인 지배층으로 형상화되며, 이둘 사이의 갈등의 심화는 그대로 당시 사회현실
의 반영이 되며, 토끼 우위의 입장에서 용왕과 자라를 모욕 질시하고 야유 조롱하는 경우,
주제가 서민층의 양반 지배층에 대한 풍자 비판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신재효의 개작본의
경우에는 시종일관 충의 주제를 내세우는 입장을 취하는 방향으로 개작되어 있다. 따라서
자라는 불멸의 충신으로, 토끼는 꾀 많은 책사로 고정되어 있다. 작품의 대단원 종결부분에
서도 신재효는 자라를 충신이라 결론짓고 충신을 본받아야 된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그
의 개작본을 자라 중심의 이야기로 끝을 맺고 자라의 충성으로 주제적 귀결을 지으려는 의
도의 표현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작품 전반에 걸쳐 모본류의 이본들에서 나타나는 속어, 욕
설, 음담 등이 거의 완전히 제거되어 있고, 대화나 사건 중에 나타나는 성적으로 외설한 부
분이 깨끗이 삭제되어 있다. 이야기를 합리적으로 다듬고 산만한 내용을 통일성 있게 간추
리는 입장을 취하여, 축약과 삭제가 많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손 치더라도, 이와 같은 개
작의 의미는 명약관화한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조선 후기의 정치관료사회의 모순과 비리를 비판적 안목으로 해부하여 이
를 작품화한 것은 높이 평가해야 할 부분이다.
적벽가 : 신재효의 비판의식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는 이 적벽가에서이다. 그는 적
벽가에서 비판적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하여 적벽가에 등장하는 인물을 변모시켜 새로운 인
물을 등장시키고 있는데, 그가 바로 정욱이다. 정욱이라는 인물은 적벽가에서 권력의 상층을
대표하는 조조라는 인물과 일반민중을 형상화한 군사들 사이에 위치하는 중간자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는 자로서 ‘방자적 성격’이 강화된 인물이다. 여기서 신재효의 계급적 성격이
향리라는 중인층에 속한다는 사실과, 그이 비판적 관점이 중간자적인 성격을 지닌 정욱이라
는 작중인물의 목소리를 빌어 나타난다는 점 사이의 상관성을 주목되어야 한다. 즉 신재효
는 정욱이라는 자신과 유사한 중간자적 인물을 창조함으로써 그의 비판의식을 십분 발휘하
고 있는 것이다. 정욱은 적벽강 전투에서 크게 패하여 간신히 화용도를 달아나는 조조를 조
롱하고 풍자하는가 하면, 화용도 장승에 놀라는 조조를 풍자함으로서 대부분의 이본에서는
조조의 비참한 패주 묘사에 그치고 있는 것과는 달리, 신재효본에서는 가면극의 말뚝이나 <
배비장전>의 방자와 같은 날카로운 풍자와 비판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이와 같이 정욱이란 인물의 방자적 기능이 강화되고 상대적으로 조조란 인물이 그렇게 풍자
되고 공격당하고 있는 것은 신재효가 향리 활동을 통하여 당대의 집권세력의 온갖 불의와
부패를 직접 체험했기 때문에 그것을 조조라는 인물을 통하여 풍자하고 공격하려 했다는 점
에서 이해될 수 있다.
변강쇠가 : 변강쇠가는 신재효에 의해 사설이 정착됨으로서 판소리 연창으로서의 전승은 이
어지지 않고 사설만이 현재에 전하고 있는 판소리의 한 마당이다. 변강쇠가는 죽음과 치상
을 다룬 판소리 사설이다. 여기에 죽음에 대한 이항대립으로서 적나라한 사랑과 성행위, 그
리고 성적인 비유가 등장한다. 옹녀는 남쪽으로 가고, 변강쇠는 북쪽으로 가다가 도중에서
만나 궁합을 보고 지리산에 들어가 살게 되는데, 어느 날 변강쇠는 장승을 패어 때다가 동
티가 나서 죽고 만다. 이 죽음을 처리하는 과정에서도 숱한 죽음과 외설이 등장한다. 기왕에
전해 온 것은 성적 표현이 지나치게 비속하여 전승이 끊겼다고 알려져 있으나, 이념과 체제
에 대한 인정이 없으며 그 권위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배계급에 수용될 수 없어, 전
승이 끈긴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이 작품은 이와 같은 극단적인 상황전개에 따라 매우 외
설적인 내용을 가지고 있으나, 신재효는 이를 유교적 개작의식에 의해 음란을 징계하는 교
훈적 내용으로 끝을 맺고 있다.
그러나 신재효의 이와 같은 개작은 근본적으로 판소리의 전승과는 그 맥이 다른 것임을 간
과해서는 안 된다. 판소리의 전승은 구비전승/행위전승에 의한 것인데, 신재효의 개작은 이
러한 구비전승/행위전승에서 일어나는 변이와는 달리, 이러한 전승의 바깥에 있는 문제적
개인에 의한 사설의 문학적 개작/정착에 가깝다. 그러므로 판소리의 변이에서 스승과 제자
사이의 구전심수식의 방법에 의해서 수개월에서 수년간에 걸쳐서 전승형의 전수가 이루어진
후에 창조적인 제자에 의한 독공의 과정 속에서 선율, 성음, 너름새 등 광대가 판소리를 실
연하기 위하여 고려하는 모든 고려를 통하여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변이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개작/정착인 것이다.
이와 같은 이유 때문에 그의 판소리 개작은 위의 예에서처럼 합리적 개작/문학적 성취라는
호평에도 불구하고 많은 문제점 또한 제기되어 있다. 그의 개작에 대한 평가를 항목별로 나
누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사설의 언어구사 : 신재효의 사설에서는 특히 남창 춘향가에서 판소리가 원래 지니고 있던
육담이나 욕설 등이 사라지고 한문 투의 표현으로 다량 바뀌고 있다는 점이 지적된다. 이는
판소리의 발랄성을 상실하게 만들었으며, 따라서 이는 퇴행적 개작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변강쇠가의 경우에는 유랑민의 삶을 비참하고 농도 짙게 묘사해서 평민의식을 잘 나
타내고 있음이 평가되기도 한다. 또한 신재효의 여섯마당 가운데 토별가는 아전으로서의 의
식이 적벽가는 평민적 의식이 다른 이본에 비해 확대되어 있음이 평가되고 있으며, 여섯마
당 전체적으로 볼 때 아정과 비속이, 그리고 외설과 강조가 균형있게 섞여 있어서 긴장과
이완의 기본 구조를 언어 구사에서 드러내고 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이는 구성의 문제로
확대되는데, 구성의 문제에 있어서도 상반된 평가가 제기되어 있다.
구성의 문제 : 판소리는 원래 현장성·즉흥성에 강한 장르인데 신재효가 사설을 일단 정리
함으로써 위에서 지적한 것과 같이 통일성·균형성을 갖는 대신 발랄성과 현장성을 상실하
고 화석화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이는 쟁점이라기보다 오히려 동전의 양면을 말하는 것으로 기록문학이 되어버린 이
상 통일성·균형성을 갖는 반면 그 상대되는 현장성·발랄성은 당연히 거세될 것이 자명한
일이기 때문이다.
합리성의 문제 : 합리성의 문제는 사설의 언어구사와 구성의 문제 등과 일맥상통하는 문제
이며, 이들보다 보다 근원적인 것으로 이들을 가름하는 차원의 문제이다. 여기서 합리성의
문제는 신재효의 계급적 성격이 향리라는 중인층에 속한다는 사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신재효가 추구하고, 결과적으로 그의 작품을 통해서 드러나는 합리성이란, 유교적 합리성이
다. 그러나 그의 합리적 사고는 액면 그대로 양반사대부의 의식이라기보다는 그들을 비판적
으로 바라보는 중간계층의 합리성인 것이다. 즉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어전층은 양반 관료
의 지배에 제어되어 사회적 상승을 억제 받으면서도, 그 지배질서를 승인하고 유지하여야
자신의 안정과 이익을 얻을 수 있었던 계층이었던 만큼 계층적 자기모습 내지 갈등이 사고
와 문화에서도 드러나는데, 그의 유교적인 합리성에는 질서의 감각과 가치의식에 투영되어
있으면서도 새로운 질서에로 나아가려는 감각과 가치의식이 투영되어 있다는 것이다.
음악적 성격 : 신재효는 광대가에서 뿐만 아니라, 춘향가 사설의 남창·동창의 분화, 단가의
창작과 <고사>, <방아타령>, <성조가> 등을 진채선으로 하여금 공연하게 한 점등을 볼 때
실질적으로 음악적 고려와 지도를 수행했음을 알 수 있다. 창작에서부터 연창을 시켰었던
것에 이르기 까지 소리판에 대한 고려가 신중하게 행해졌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역설
적으로 오늘날 전하고 있는 것은 찾아보기 힘들며, 오히려 그 사설이 문학적 연구의 대상으
로 주요하게 남아 있다.
6.신재효 활동의 현대적 의의
지금까지 우리는 신재효를 ‘판소리 후원자 및 지도자’, ‘판소리의 이론가·논평가’,
‘단잡가 창작자’, 그리고 ‘판소리사설의 개작자 또는 집성자’로 항목으로 나누어 매우
방대하기 이를 데 없는 그의 활동과 업적을 살펴보았다. 그의 활동과 업적에 대하여 여러
가지 비판과 혹평 또한 제기되어 있으나, 그는 사회의 변화에 따라 당대에 사회적·문화적
으로 떠오른 문제에 대해서 새로운 사고의 영역을 개척하고 나름의 해법을 제시함을 통해서
후대에까지 전망을 열어주는 문제적 개인으로서 그의 영향과 활동은 쉽게 간과할 수 없는
것이다.
여기에 덧붙여 판소리의 개작자이자 후원가였던 그에게서 지금 우리가 새롭게 조명해보아야
할 지점은, 현대적 관점에서 볼 때 무엇보다도 그가 위대한 문화행정가였다는 점일 것이다.
그는 일개 아전출신으로서 판소리를 예술적으로 이해했고 연구했으며, 판소리 미학을 정립
했고, 판소리가 발전할 수 있도록 광대들을 후원했다. 중요한 점은 그가 훌륭한 조력자로서
광대들을 이해하고 돌봐주며, 질타하고 다독거리면서 판소리를 연구하여 판소리가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함으로서 이미 문화행정이 해야 할 일을 이미 100년 이상 앞서 실천에 옮겼다
는 점이다. 덕분에 고창은 판소리의 중심이 되었고, 수많은 명창들이 운집하고 이들 속에서
새로운 명창이 배출되었으며 “어전광대가 되려면 고창 신재효 문하를 거쳐와야 한다”는
말이 정설처럼 떠돌았다. ‘문화’라는 화두가 사회의 중심적인 가치가 되고, 문화강국으로
서의 전망과 도약을 시도하고 있는 이 때에, 문화를 제대로 이해하고 지원하며 그 방향을
제시함으로서 문화를 꽃피우게 하는 신재효와 같은 문제적 인물은 우리시대에 하나의 귀감
이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