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의 단아한 기품을 보여주고 있는 운암종택(글/사진/정연상_안동대 건축공학과 교수) |
![]() 신덕리 신당의 의성김씨 운암종택을 찾아서 35번 지방도로 주변에는 임하초등학교, 임하우체국, 임하치안센터, 임하면사무소, 임하하나로마트 등 주요 시설이 있으며, 도로의 남측 산자락에 신덕1리 가옥들이 자리하고 있다. 도로 북서 측에는 농경지가 있고, 농경지 너머에는 길안천이 남측에서 북측으로 흐르고 있다. 그리고 북측에는 길안천이 동서로 흐르는 반변천과 합수한다. 의성김씨 운암 종택은 신덕1리의 가옥들과 같이 서측 산자락에 있으며, 진입은 35번 지방도로에서 동남 측으로 난 마을길을 이용한다. 마을 안길 동측 변에는 길안천 보의 물이 남북으로 흐르고 있다. 신덕리의 마을 이름은 마을 앞의 연못과 길안천 건너 추월과 같이 동제를 지내던 당나무가 있어서 붙여졌다고 한다. 그래서 마을 지명은 신당(新塘)의 ‘신’자와 인덕(仁德)의 ‘덕’자을 따서 신덕리(新德里)라 하였다고 한다. 신덕리 일대는 조선시대 임서면에 속해 있었으며, 1914년에는 신당동, 인덕동, 평지동, 남선면 이곡동 일부, 추월리 일부를 합쳐 신덕동이라 했으며, 1931년에 안동군 임하면에 편입했다. 이후 신덕리는 1995년 안동군과 안동시가 통합하면서 안동시 임하면 신덕리가 되었다. |
![]() 운암종택이 있는 신덕1리는 자연마을 신당으로 이루어졌다. 신덕2리는 구이덕, 신이덕, 옹기점, 장승 등으로 이루어졌다. 신당 앞에는 앞들이 가까이 있고, 남측에 윗들, 동측에 뱃날들, 북측에 벗남들이 있다. 이들 들녘에는 비닐하우스를 조성하여 다양한 농작물을 재배하고 있다. 마을 뒤 서측에는 수박산(수박재)이 있으며, 서측의 해발고도 300미터 미만의 산들은 마을의 배경이 되고 있다. 그리고 신당과 남측의 금소는 신당교가 서로 연결하고 있다. 신당의 구성원은 안동 의성김씨 운암종택을 중심으로 의성김씨 집성촌을 형성하고 있다. 의성김씨의 신덕리 입향은 천전리에 살던 청계공 김진(金璡)의 셋째 아들 김명일(金明一)이 신당에 살고 있던 영양남씨 남두공의 사위가 되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후 후손들은 의성김씨 운암파(雲巖派)를 형성하여 신당에 약 450년 동안 세거하고 있다. 신덕리 입향조 김명일은 자가 언순(彥純)이고, 호가 운암(雲巖)이며, 청계 김진과 민세경(閔世卿)의 딸 여흥민씨(驪興閔氏)사이 셋째로 태어났다. 김명일은 형 김극일(金克一), 김수일(金守一), 동생 김성일(金誠一), 김복일(金復一)과 함께 ‘김씨오룡(金氏五龍)’으로 불렸다. 김명일은 대종가가 있는 임하면 천전리에서 태어났으며, 형 김극일의 벼슬길을 따라 다니면서 학문을 닦았으며, 20세에는 소수서원에서 풍기 출신 황준량(黃俊良)과도 학문을 교류하였다고 한다. 또한 김명일은 퇴계(退溪) 이황(李滉) 문하에서 형 김극일과 아우 김성일과 함께 학문을 닦았다. 이후 후손과 후학들은 1685년 김진과 네 형제와 김명일을 추모하고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사빈서원(泗濱書院)을 세워 그들을 배향했다. |
![]() 운암 종택의 배치 및 주변 경관 운암종택 앞에는 아스콘 포장을 한 마을 안길과 수로가 남북으로 지나가고 있으며, 마을 안길을 따라 토석 담장을 쌓아 놓았다. 출입문은 담장의 중간부분을 터 사용하고 있으며, 현재 대문의 문짝이 없는 상태다. 북측과 남측에도 토석담장을 쌓아 이웃과 경계로 삼았고, 담장 위에는 한식기와를 올리고 흰 아귀토로 수키와 끝을 마감했다. 종택은 대문을 들어서면 블록을 깐 진입로를 중심으로 북측에 텃밭을 꾸며 놓았고 남측에 창고를 지어 놓았다. |
![]() 토석 담장의 트인 대문을 들어서면 대지 안쪽 ‘口’자형 안채와 ‘一’자형 사랑채가 있으며, 안채의 북측과 남측에는 담장을 쌓아 별도의 영역을 구획하고 있다. 안채 북측에는 장방형으로 긴 텃밭을 꾸민 후 북측과 동측에 토석담장으로 감싸 구획했다. 텃밭의 출입은 사랑채 북측과 연결된 담장에 협문을 꾸며 이용하고 있는데 현재 문짝이 없는 상태다. 협문 안쪽의 북측 벽에 화장실을 꾸며 놓았는데 현재 사용하지 않고 있다. 텃밭의 북측 담장 너머에도 넓은 텃밭이 있으며, 담장과 산자락에 빈 축사가 있다. 협문 밖 담장 벽면에도 화장실을 꾸며 놓고 사용하고 있다. |
![]() 안채의 남측에도 북측처럼 토석 담장을 동측과 남측에 쌓아 별도의 영역을 구획했다. 담장 내에는 수도시설과 장독대가 있으며, 서쪽 산자락에는 슬레이트를 올린 맞배지붕의 헛간채가 있다. 이곳의 출입은 북측처럼 안채에서 남쪽으로 쌓은 담장에 협문을 꾸며 이용하고 있는데, 현재 문짝이 없는 상태다. 수도시설은 협문 남측 구석에 있는데 겨울철 동파를 막고 편하게 사용하기 위하여 비닐하우스로 꾸며 놓았다. 장독대는 남측 담장 중간에 콘크리트로 단을 꾸며 놓았다. 남측 담장 넘어 남측에는 장방형의 마당과 헛간채가 있다. 안채 뒤쪽은 산자락에 인접하고 있는데, 산 끝자락은 암반이 건물과 나란히 있다. 이 암반은 종택 뒤편의 주산에서 내려온 내룡이라고 한다. 이 암반은 단단한 바위가 아닌 푹석푹석한 떡바위로 바위 속에 둥글둥글한 강돌이 박혀 있어 독특한 지질을 보여 주고 있다. 지질학자는 지질학적으로 가치가 있기 때문에 이곳을 지금도 방문한다고 한다. 이런 모습은 과거에 이곳 땅이 어떤 곳인지를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 종택의 형국은 종택을 중심으로 좌측 청룡과 우측 백호의 나지막한 능선이 감싸고 있으면서 가까이 농경지와 멀리 하천이 흐르는 것을 볼 수 있는 전형적인 배산임수 명당지다. |
![]() 종택의 안채와 사랑채 평면 구성 사랑방은 일반적으로 가로로 길게 간살을 잡는데, 운암종택의 사랑채는 동서 세로방향으로 길게 잡았다. 따라서 사랑방은 남쪽으로부터 좀 더 많은 햇빛을 받을 수 있다. 사랑방은 정면 툇마루와 정칸 마루에 띠살문을 달았고, 내부 마루방쪽에는 4짝 들문을 달아놓았다. 그리고 남측 벽면에는 두 짝 여닫이와 외여닫이문을 달아 남측의 햇살을 받도록 하였다. 사랑방은 남측면 정간 쪽마루 아래 기단위에 아궁이를 꾸며 불을 지피도록 하였다. 사랑방은 안채쪽에 벽장을 달아 사랑방의 수장공간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안채로의 출입은 안채와 면한 칸에 외여닫이문을 달아 놓았다. 안채와 사랑채는 독립된 채가 맞닿은 모습을 하고 있다. 사랑채 마루방은 정면에 4짝 들문을 달아 놓았고, 배면에는 두짝 판문을 달아 앞쪽과 뒤쪽이 열고 닫을 수 있도록 꾸며 놓았다. 책방은 마루방과 정면 마루간, 북측 벽면에 띠살문을 달아 삼면을 열 수 있도록 했다. |
![]() 사랑채의 기단은 자연석과 시멘트로 쌓아 마감했으며, 주초는 자연석이다. 기둥은 정면 열 4개만 원기둥이고 나머지는 사각기둥이다. 기둥 상부는 소로 수장을 한 굴도리 구조를 하고 있으며, 보아지의 외부는 직절하여 마감했고 내부는 초각을 하여 보를 받도록 하였다. 내부 가구는 오량가구이다. 처마는 홑처마이며 서까래 끝에 붉은 페인트칠을 한 합석을 달아 놓았다. 지붕은 팔작지붕이며, 추녀 뒤초리 부분은 눈꼽천정으로 마감했다. 안채는 정면과 측면 모두 5칸으로 ‘口’자형을 하고 있으며, 안채 출입은 사랑채 왼쪽에 접한 주간에 꾸며 놓은 중문을 이용한다. 안채는 안대청을 중심으로 남쪽에는 윗방, 안방, 부엌이 있으며, 북측에는 윗고방, 마루, 안사랑방, 아궁이간이 동측으로 뻗어 있다. 안방과 윗고방은 대청쪽 외여닫이문을 이용하고 있다. 현재 윗고방과 안방의 벽체는 기존의 벽체를 헐어 3칸의 온돌방을 꾸미고 절반으로 나눈 후 미닫이문을 달아 아랫방과 윗방으로 사용하고 있다. 특히 윗방은 고방의 흔적을 알 수 있는 판벽이 남측과 서측 벽면에 그대로 남아 있다. 안방의 부엌간은 2칸으로 안마당쪽과 남쪽에 판문을 달아 출입하도록 하였다. 현재 안방쪽 아궁이간은 상부에 다락을 꾸며 안방에서 사용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기존에 나무간은 찬장과 같은 살림살이를 놓는 장소로 사용하고 있다. 부엌간과 직교 중문간열은 중문간, 외양간, 찬방이 일렬로 배열되어 있었다. 찬방은 부억칸쪽에 아궁이를 꾸미고 출입문을 달아 출입하도록 하였다. 찬방은 원래 단간이었는데, 현재 구유를 걸어 놓은 외양간을 개조하여 두간의 온돌방으로 사용하고 있다. |
![]() 대청마루 북측에는 윗고방, 마루, 안사랑방, 부엌간이 있다. 윗고방은 단간 마루구조를 하고 있으며, 출입은 마루간쪽 판문을 이용하고 있다. 안사랑방도 마루간을 이용하고 있는데, 안마당쪽 쪽마루를 꾸미고 띠살문을 달아 부 출입구로 사용하고 있다. 원래 안사랑방은 중앙에 미닫이문을 달아 공간을 둘로 나누어 사용했는데, 현재는 하나로 터서 사용하고 있다. 안사랑방의 아궁이는 중문간과 면한 모서리간에 꾸며 놓았으며, 북측 벽면에는 북측 텃밭으로 출입하도록 두 짝 판문을 달아 놓았다. 안사랑방의 굴뚝은 북측 기단 위에 꾸며 놓았다. 안채와 사랑채는 모두 자연석 기단 위에 자연석 초석을 놓고, 주초 위에 기둥을 세웠다. 기둥은 모두 사각기둥이며, 기둥 상부는 사각의 도리와 창방, 보아지가 짜 맞춤을 하고 있다. 대청 상부의 가구는 5량이다. 지붕은 홑처마 선산각지붕이며, 한식기와를 올린 후 아구토로 마감했다. |
![]() 주거관련 건축문화유산의 진화과정 현재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주민들의 많은 노력으로 기존 문화유산의 보존 및 유지관리가 진행되고 있다. 주거와 관련 고택에 대한 바람은 젊은 층을 수용할 수 있는 주거환경을 조성하여 역사문화가 살아 있는 주거공간이 되는 것이다. 과거의 고택들이 지속 가능한 요소로서 존재하기 위해서는 오늘날 주생활을 수요할 수 있는 주거환경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
![]() 운암고택의 난방은 연탄과 연탄보일러로 난방을 하고 있는데, 가스 배출과 보일러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문화유산의 가치를 떨어트리고 있다. 이런 것에 대한 바람직한 유지관리는 경제적으로 어렵고 고령화된 거주민이 해결하기는 어려운 점이 많다. 그리고 제대로 된 목욕시설의 필요는 삶의 질을 높이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운암종택은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아 아쉽다. 따라서 문화유산의 가치를 지속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거주민의 주생활문화를 존중하면서 문화유산을 훼손하지 않는 범주 내에 설비시설을 개선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리고 이런 설비시설은 고택의 이미지를 고려한 디자인 가이드라인을 설정하고, 이를 지키는 것이 바람직하다. 운암고택도 단아한 고택의 이미지와 문화유산의 가치를 유지하기 위한 디자인 가이드라인 마련과 이를 실현하기 위한 지원 프로그램이 필요하다. <안동> |
안동 통권133호 - 사람 따라 옛집 따라 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