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 사도행전 2:42-47
제목 : 행전강해(5) 샘의 근원으로 돌아가자 2(Ad Fontes)
42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46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귀한 날 복된 날 주님의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찬양하며 예배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이제 우리가 또 아버지의 말씀을 듣습니다.
성령님, 지금 이 자리에 우리와 함께하시고 임재하시니 감사합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심령 속에 성령님 친히 말씀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1. 들어가는 말 : 우리가 돌아가야 할 교회
종교개혁가 칼빈은 오늘 사도행전 2장 42절을 가지고 예배에는 불변의 네 가지 요소가 있다라고 이야기했지요.
제가 지난주에 말씀드렸는데,
첫째는, 말씀. 설교. 가르쳤다 그랬지요.
그리고 떡을 뗐다. 성찬을 했어요. 그리고 기도했다.
칼빈은 '찬양을 노래로 하는 기도라' 그래서 찬양을 기도에 포함시켰어요.
그리고 교제 - '코이노니아'가 있었다.
예배는 이 네 가지 요소가 반드시 있어야 된다라고 칼빈은 이야기했습니다.
지난주에 우리는 우리가 돌아가야 할 원천인 이 초대 교회는 이렇게 예배하는 공동체로서
모여서 예배할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배우는 그런 성경적인 공동체였고, 또 매주 성찬식을 받으면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과 은혜를 기념하고 감사하는 성례전적인 공동체였다 라고 하는 것을 말씀을 드렸습니다.
또, 두 주 전에는 예루살렘 교회는 모이기에 힘쓰고
모이면 한마음으로 성령님의 오심을 간구하는 기도하는 공동체였다 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이제 오늘 우리가 사도행전에 나타난 초대 교회를 바라볼 때에 가장 충격적이고 또 아름다운 모습은
그들이 서로 진정한 사랑으로 교제를 나누는 그런 공동체였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은 우리가 돌아가야 할 Ad Fontes,
아드(Ad)는 무엇 무엇을 향하여, 폰테스(Fontes)는 화운튼 '원천', '근원'이라고 그랬어요.
근원으로 돌아가야 할 이 초대교의 본래 모습들 가운데 사랑으로 교제하는 모습과 더불어 두 가지를 더 살펴보면서
우리도 사도행전에 나타난 아름다운 초대교회 공동체와 같은 모습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2 코이노니아 : 사랑으로 교제하는 교회
먼저, 우리가 돌아가야 될 초대교회의 모습은 서로의 사랑으로 교제를 나누는 교회였습니다.
오늘 본문은 저들이 서로 교제하며 떡을 뗐다 그랬고,
44절 45절은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주었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 "교제하며"라는 단어가 그 유명한 '코이노니아'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코이노니아' 헬라 말이죠. 원래 이 말은 '관대하다'라는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초대교회 교인들은 가난한 사람들, 필요한 사람들에게 자기들의 것을 나누어 주는데 매우 관대했다라고 하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 코이노니아라는 말에는 자발성의 의미가 그 속에 깃들어 있어요.
즉, 사도들이 명령해서 성도들이 가진 것을 내어놓은 것이 아니라
성도들이 자발적으로 자신들의 가진 것을 나누어주기 시작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당시 예루살렘교회의 성도들은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매우 가난했습니다.
또, 그들 가운데는 디아스포라 유대인(세계에 흩어져 있는 디아스포라) 흩어진 유대인들로서
3대 절기가 되면 반드시 에루살렘에 와서 예배를 드리게 돼 있었어요.
그런데, 오순절이 되었습니다. 오순절 때,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예배를 드리러 올라왔는데,
그때에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이 일어난 겁니다.
그리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제자들이 각 나라 말로, 각 방언으로 설교하기 시작했지요.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죠.
그래서 예루살렘으로 오순절 절기를 지키러 왔다가 복음을 전해 듣고
예수 믿기로 결심한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주저앉게 된 거지요.
그러므로, 그들은 가진 것이 없었지요. 잠시 여행 왔다가 거기에 주저앉게 된 거예요.
따라서 저들은 가진 것이 없었고, 이 초대교회 성도들은 힘 닿는 대로 그런 사람들과 나누어 가지기를 즐겨했던 것입니다.
46절에 의하면, 저들은 이 일들을 기쁘고 순전한 마음으로 감당했다 기록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자원하는 마음으로 그 일을 감당했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46절의 말씀을 보면, 저들은 집에서 떡을 뗐다 그랬어요.
따라서 이 집에서라는 말을 통해서 모든 사람들이 자기의 소유를 팔거나 집을 판 것은 아니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지요.
즉, 사도들이 '집이 있는 사람들은 다 집을 팔아라'라고 명령을 하든지 하는 그런 획일적인 모습은 없었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분명히 여러 사람들이 여전히 집을 가지고 있었어요.
초대교회 예루살렘교회는 전부 가정 교회였습니다. 그러니까 많은 가정에서 예배를 드렸을 거예요.
그리고 안식일이 되면 그들의 관습에 의해서 성전에 모여서 성전에서 기도하고, 그리고는 주일이 되면 집에서 모여서 떡을 뗐다,
예배하고 성찬식을 했다라고 하는 거죠. 그러므로, 분명히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집을 가지고 있었다 하는 걸 알 수 있지요.
그런데 45절에 나오는 두 개의 동사가 있어요.
'팔았다'. '나누어 주었다' 그런데 이 동사들이 시제가 미완료형에요. 아직 안 끝났어요.
이 말은, 집을 팔아서 나누어주는 행위가 단 한 번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특별한 필요에 의해서 계속적으로 일어난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도들의 명령에 의해서 한꺼번에 집 있는 사람들 모두가 다 집을 팔아서 나누어 가져라' 그것이 아니고,
그때 그때 정말로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나타날 때에 자원하는 분들이 기꺼이 자신들의 집을 내어 놓아서
그것으로 함께 위기를 넘기고, 진정한 사랑과 나눔을 실천하는 코이노니아, 진정한 교제의 삶을 살았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가 깨닫게 되는 귀한 영적인 교훈은 뭐냐 하면,
역시 누가 뭐래도 교회는 이렇게 사랑과 나눔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가진 것을 서로 나누는 사랑과 지혜가 필요하지요.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나눈다고 할 때에, 꼭 물질적인 것만을 나눈 것으로 해석하면 안됩니다.
여러분, 오늘 이 시대는 물질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서로에 대한 사랑과 관심이 부족해서 아파하는 시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오늘 이 시대는 물질적으로는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풍족한 시대가 됐어요.
그러나 우리의 정신적인 세계와 더 나아가 영적인 세계는 너무나 핍절한 시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 옆 사람이 어떤 고통을 겪고 있는지 무관심한 가운데 살고 있어요.
그런데 만일 우리가 교회들조차도 내 옆의 형제 자매들의 아픔에 무관심하고
저들의 필요에 무관심하다면 우리도 세상 사람들과 별반 다를 것이 하나도 없지요,
오늘 하나님의 말씀은 이것을 우리에게 지적하고 있는 겁니다.
물질적인 어려움이든, 정신적인 아픔이든, 신앙적인 고민이든,
우리가 아픈 사람들의 신음소리를 외면한다면, 그건 주님을 따르는 신앙공동체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은 내 옆의 형제 자매들의 신음소리에 민감했습니다. 저들의 아파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어요.
형제들의 물질적, 영적, 정신적 필요에 민감했습니다. 그리고, 주 안에서 교제하면서 서로의 필요를 기꺼이 채워 주었어요.
그래서 바로 그곳에 우리 주님의 놀라운 위로와 은혜가 차고 넘쳤던 거지요.
초대교회 교부였던 크리소스톰이 초대교회 교인들의 삶의 모습을 이렇게 기록으로 남겨 놓았습니다.
"초대교회는 자기 것을 아무것도 자기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 천사와 같은 단체였다.
곧 악의 뿌리가 잘려나간 단체였다. 아무도 비난하지 않았고, 아무도 시샘하지 않았으며 아무도 인색하게 굴지 않았다.
거기에는 교만도 치욕도 없었다. 가난한 사람들은 부끄러움을 몰랐으며, 부자들은 거만함을 몰랐다."
- 초대교회 교부 존 크리소스톰 -
가난한 사람들은 뭔가를 남으로부터 받을 때 부끄럽지요. 수치스럽지요. 그런 모습 있잖아요.
그런데, 가난한 사람들이 뭘 받을 때,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게 해줬다는 거예요.
주는 사람들은 교만하게 거만하게 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내가 주니까' 그러지 않았다는 거예요.
그래서 주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모두가 다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고 교만함도 없고
그래서 서로 사랑하는 가운데 아름다운 교제가 이루어졌다는 거예요. 그러니,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여러분, 이게 바로 우리 교회가 돌아가야 될 교회 초대교회 본래적인 모습이었어요.
바라기는, 성령의 능력에 힘입어서 우리 주안교회 공동체가 이런 귀한 나눔의 공동체가 되고, 또 갈한 심령들이
사랑을 공급받을 수 있고, 상하고 상처받은 심령들이 위로받고 싸매움을 받을 수 있는 귀한 사랑의 공동체 되기를 죽원합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가 주님의 귀한 희생과 사랑을 나눔으로 실천할 수 있는 선교적 교회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제가 오늘 보니까, 오늘 제가 1부예배 주안성전에 가서 예배 인도하고 왔는데,
주안도 마찬가지고, 부평 성전에서도 우리 여전도회가 지금 구정을 맞이해서 떡국떡을 팔고 여러 가지를 지금 하더라고요.
그게 왜냐하면, 그건 지금 여러분 장사하는 거 아닙니다. 그거 제가 허락했어요. 선교하고 구제하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아름다운 사랑의 나눔의 공동체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요?
우리가 필요한 것만 한 봉다리 사면 될까요? 아니지요. 여러분 주변에 기억나는 사람들 있지요?
그분들 위해서 2개, 3개, 4개, 5개 사세요. 그래서 나누세요.
지금 주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말씀하시는 것은, '야, 너도 집 팔아 내놔' 이거 말하는 게 아니에요.
정말 사랑한다는 건 뭐냐 하면, 그렇게 거창한 걸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지금 그걸 우리에게 요구하는 게 아니라고요.
내 옆에 있는 형제에게 내가 먹고 있는 거 하나라도 같이 떡 하나라도 나누어 먹는 것, 그것을 지금 주님께서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걸 요구하는 거지요. "그런 사랑의 공동체가 돼라"
그런 내 옆에 있는 사람의 아픔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지고 귀를 기울이는
그런 공동체가 되라고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런 사랑의 공동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3. 경건한 두려움 : 하나님을 향한 경외감이 있는 교회
두 번째, 예루살렘 초대교회는 본문 43절 말씀처럼 "사람마다 두려워했다" 그랬어요. 두려움이 있는 교회였어요.
우리가 돌아가야 될 초대교회는 하나님의 임재로 인한 경건한 두려움이 있던 교회였다 하는 말씀입니다.
여기 "두려움"(포보스)(43절)란 말은 거룩한 존재를 느끼면서 가지게 되는
거룩한 두려움이요, 경외감의 태도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즉,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때 가지게 되는 경건한 두려움을 말하는 거지요.
이 단어가 마가복음 4장 41절에 "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하신 예수님을 보고" 가졌던
제자들의 영적인 두려움을 표현할 때 이 단어가 사용됩니다. 두려움이란 단어가 거기 있어요.
또, 누가복음 7장 16절 보면 예수님께서 한 과부의 죽은 아들을 일으켰을 때에
사람들이 가졌던 마음을 이 단어로 표현을 했어요.
"어떻게 죽은 자가 일어나나? 도대체 예수라는 저분은 누구신가?"
두려운 마음, 경건한 두려움을 이야기하는 것이지요.
바로 이런 거룩한 두려움을 세상 사람들이 초대교회 공동체를 바라보면서 가지게 됐다는 거예요.
그리고 이는 교회 안팎의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세상 사람들은 사도들을 통해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이적과 표적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고 두려워했다는 것이고,
또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교회의 교인들도 사도들을 통해 일어나는 이적과 기사를 보면서 영적 두려움을 느꼈다는 거예요.
결국 이것은 그들이 가지게 되었던 신령한 두려움을 말하는 것입니다.
분명히 43절 말씀은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적과 표적이 많이 나타났다고 그랬어요.
그들은 사도들을 통해서 나타나는 여러 가지 이적과 기사들을 바라보면서 뭘 느꼈냐? 하나님의 임재를 느꼈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것이 그들에게 하나님 앞에서 신령한 두려움을 가지게 만들어 주었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누구인들 두려워하지 않겠습니까?
여기서 중요한 건 뭐냐 하면, 저들 눈앞에 보여지는 이적과 기사 그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이적과 기사들 속에서 나타나고 있었고, 드러나고 있던 하나님의 임재였습니다. 이게 중요한 거예요.
이적과 기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계시는구나, 아! 하나님이 여기 계시는구나, 그거를 체험하게 되었을 때에
경건한 두려움과 경외감을 가지게 되었다 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교회 나올 때마다 이런 신령한 두려움을 가지고 나왔어요.
이런 경건한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나왔다 그 말이에요.
"하나님이 지금도 우리와 함께 계시구나!" "주의 성령이 우리 가운데 임재하고 계시는구나!"
그런 경건한 두려움을 가지고 예배에 임했고 예배의 자리로 나왔다는 거예요.
오늘도 우리가 교회에 올 때 초대교인들이 가지고 있던 이런 경건한 두려움이 우리에게 있어야 돼요.
왜? - 우리도 교회 나올 때 여기에는 하나님의 임재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전도서 5장 1절에 "너는 하나님의 전에 들어갈 때 네 발을 삼갈지어다" 그랬어요.
그리고 모세는 하나님의 그 거룩한 불 앞에서 그 신을 벗어야만 했던 거지요.
그런데 오늘 우리 한국교회를 바라보면, 교회 안에서 점점 이런 경건한 두려움이 사라져 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교인들이 교회 나오는데 별 감정이 없이 나와요. 습관적으로 교회에 나와요.
의무감으로 나옵니다. 그래서 몸만 와서 앉아있는 경우도 있어요. 하나님의 임재의식이 부족한 거지요.
그러다 보니까 심지어 교회 안에서 교인들끼리 갈등하고 싸웁니다. 다툽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코람데요,
내가 지금 하나님 앞에 있다라고 하는 하나님의 임재의식이 부족한 거지요.
예배를 드리면서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예배를 받고 계시고,
주님의 영이 지금 이 자리에 함께 하신다라고 하는 걸 잘 느끼지 못하는 거예요.
그러니 예배의 자리에 어떤 감사도 감동도 감격이 없는 거죠.
그렇다면 여러분, 이런 교회 이런 교인들에게서 어떤 생명의 역사를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요즘 저는 우리 한국교회를 바라볼 때에 두려운 생각마저 좀 들어요.
주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초대교회 일곱 교회를 향해서 책망하셨던 것을
오늘 한국 교회를 향해서도 말씀하는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어요.
계시록 2장 4절,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구나"
계시록 3장 16절,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계시록 3장 1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의 모습이구나" - '네가 죽었구나 실제는'
- 주님이 그렇게 말씀하는 건 아닌지...
계시록 2장 5절,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져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너에게 가서 너의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주님이 오늘 한국교회를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실 것 같아 두려워요.
만일 한국교회가 계속해서 하나님의 임재의식 없이 뜨겁지도 않고 차갑지도 않은 모습으로 형식적인 경건의 모양만 하고 있다면,
주님께서는 신앙의 촛대를 저 인도네시아 혹은 브라질 같은 곳으로 옮기실지도 모릅니다.
지금 브라질 같은 곳에 개신교회가 얼마나 뜨겁게 폭발하고 있는지 몰라요. 주님이 그런 곳으로 촛대를 옮기실지도 몰라요.
그러므로, 우린 정말 교회에 나올 때마다 주님의 임재를 바라보고
경건한 두려움, 신령한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올 수 있어야 돼요.
계시록 2:1절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가 있습니다.
계시록 2:1절에,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걸 한마디로 이렇게 표현했어요.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촛대에 다니시는 이" 그랬어요.
여기, "일곱 별 일곱 금촛대" 이것은 다 초대교회, 터키 소아시아 지역에 있던 초대일곱 교회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런데 에수님이 그 일곱 별을 붙잡고 계시고, 일곱 금촛대 사이에 다니신대요.
이것이 무슨 말이에요? 예수님은 저 하늘 높은 곳에 우리와 무관하게, 저 높은 곳에 그냥 따로 계시는 분이 아니라
오늘도 지금 이 순간에도 성령으로 우리 함께 임재하시면서
교회의 세밀한 부분까지 다 보고 계시고 역사하시고 함께 하시는 분이시다 그 말이잖아요.
제가 전에 여러분들한테 한번 소개했을 거예요.
『3분』이라는 책을 읽고 참 많은 은혜를 받았어요.
"3분" 책의 원제는 『HEAVEN IS FOR REAL』 『천국은 실제다』 하는 책입니다.
그 내용이 콜튼이라는 네 살짜리 남자아이가 맹장히 터졌어요.
그런데 그만 그 부모님들이 그 사실을 모른채 시간을 5일이나 지체하는 바람에
아이의 배 안에 독이 가득 차고 그로 인한 농양이 생겨서 아이가 사경을 헤매게 됩니다.
그때 아이가 천국에 갔다 온 경험을 이 책에 지금 이야기하고 있어요.
이 아이의 아버지는 토드 목사님인데 시골의 작은 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도 암에 걸리셨어요. 그래서 목사님도 암을 비롯한 여러 가지 병마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아이마저 그렇게 사경을 헤매게 되니까, 이 목사님이 하나님을 원망하면서 부르짖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목사님과 교인들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고
병원에서도 별 가망이 없다고 한 이 아이를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때 아이가 천국을 갔다 온 경험을 이야기하는데, 이 아버지 목사님이 여러 가지로 놀라는 거예요.
아이가 깨자마자 뭐라 그러냐 하면, 아빠가 병원의 한 작은 방에서 자기를 위해서 기도하는 걸 봤다는 거예요.
그리고 예수님께서 '네 아빠의 기도를 응답하기 위해서 네가 돌아가야 된다'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 이야기를 들은 아빠 목사님이 깜짝 놀라지요.
아이가 전신 마취를 하고 수술 중에 있었고, 그리고 목사님은 조그만 방에서 아이를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마취한 채로 수술대 위에 올라 수술 받던 아이가 어떻게 자기가 저 방에서 기도하고 있는 모습을 어떻게 알았냐 말이지요.
그런데 아이가 아빠가 그렇게 기도하는 걸 봤다는 거예요.
그러고 예수님이 '네 아빠의 기도를 응답하기 위해서 네가 돌아가야 된다' 그러셨다는 거예요.
이 목사님이 깜짝 놀라죠. 이때부터 아이가 천국 갔다 온 경험을 하나씩 하나씩 이야기하는데,
이 아이는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 예수님을 보았고, 성령님이 자기와 함께 친히 함께 계셨었고,
또 자신이 예수님의 무릎 위에 앉아 있기도 했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천국에서 그동안 이 땅에서는 한 번도 뵌 적이 없는 외증조 할아버지를 만났다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사진을 보여주는데, 이 할아버지가 맞다는 거예요. 목사님이 깜짝 놀랬지요.
이 아이가 외증조 할아버지를 본 적이 없는데, 이 아이가 탁 보고 이 할아버지라고 이야기하니까 놀랄 수밖에..
그리고 천국은 어둠도 없고, 하나님의 밝은 빛으로 가득 차고,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결코 천국에 갈 수 없다고 이야기하는데,
병원에 장례식장이 있는데, 거기서 장례식 절차가 진행되는데 이 아이가 너무너무 안절부절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죽은 사람이 예수를 안 믿고 죽은 사람이었던 것 같아요.
그랬더니, 예수 안 믿고 죽으면 지옥 가는데 그러면서 아이가 막 발을 동동 구르는 거예요.
그리고는 아이가 아빠가 설교할 때 하나님이 능력을 내려주시는 것도 보앗다라고 말합니다.. 아빠가 물었어요.
"하나님이 어떻게 능력을 내려주시느냐?" 물었더니, 성령께서 아빠가 설교할 때 도와주시는 걸 봤다는 거예요.
여러분, 이 시간에 성령님께서 우리 가운데 역사하십니다.
여러분, 진실로 우리 주님께서 오늘도 우리 주안교회와 함께하시고
특별히 우리가 함께 모여 예배드리고 말씀을 들을 때에 우리 가운데 임재하십니다. 아멘!
지금 이 순간에도 주님의 영혼이 우리와 함께 계시고, 제가 말씀을 전할 때 도와주시고 계시고,
여러분들이 말씀을 들을 때 깨우쳐주시고 감동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 올 때마다, 그리고 예배를 드릴 때마다
우리 가운데 임재하시는 주님께 대한 경건한 두려움을 가지고 예배에 임해야 되고,
그런 마음으로 사모하는 마음으로 예배에 임해야 됩니다.
경건한 영적인 두려움이 있는 교회, 이것이 바로 우리가 회복하고 돌아가야 할 초대교의 모습입니다.
저는 진정 바라기는, 수많은 분들이 우리 주안교의 부평성전 주안성전 그리고 송도 예배처소에 들어오는 순간
각 처소에서 하나님의 임재와 만져주심을 통한 치유와 회복의 은총을 경험할 수 있게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 아멘! 믿음대로 될지어다!
4. 칭송을 받음 : 매력있는 교회
세 번째, 우리가 돌아가야 될 초대교회는 매력있는 교회로 세상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는 교회였다는 사실입니다.
초대교회 공동체는 안 믿는 세상사람들로부터 칭찬과 존경과 사랑을 받았어요.
쉽게 말해, 안 믿는 이웃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는 말씀입니다.
이는 오늘 세상 사람들로부터 개독교라고 비난 받고 있는 한국교회와는 많이 다른 모습이지요.
여기 "칭송"이란 말은 '좋은 평판' 내지는 '호감'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원래 유대인들은 결코 자신들과 다른 종교인들을 칭찬하는 법이 없었습니다.
얼마나 교만한지,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유대교 외에 다른 종교는 다 거짓 종교라고 낙인 찍고 배척했어요.
그러기에 그들은 예수님도 이단자로 낙인 찍고 비난하고 조롱하고 핍박했던 겁니다.
그런데 초대 교회 공동체가 그런 완악하고 교만한 유대인들의 칭찬을 받았다는 거예요.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초대교회 성도들의 삶은 정말 세상 사람들과는 딴판이었고,
그들의 삶 자체가 안 믿는 사람들이 보기에도 충격적이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앞에서 보았듯이, 일단 예루살렘 공동체는 모든 물건을 서로 유무상통했어요.
사랑의 교제는 말과 혀로만 나누는 사랑이 아니라 자신들의 지갑을 송두리째 열어 젖힌 그런 사랑의 교제였습니다.
그들은 세상 사람들이 가장 귀하게 여기고 소중하게 여기는 돈, 재물, 부동산을 공동체를 위해서 기쁨으로 내놓았어요.
다른 사람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재물과 부동산을 아낌없이 양도하는 그런 초대교회 교인들의 모습은
유대인들에게는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온 거지요. '어떻게 저렇게 살 수 있지?'
더 나아가 초대교회는 교인들만이 아니라 불우한 이웃을 구제하고 나누는 일에도 힘썼습니다.
초대교회는 성도들이 교회에 드린 재물로
당시 로마 식민지 아래 굶고 있던 헐벗은 이웃들을 구제하는 선하고 아름다운 사역에 힘썼어요.
사도행전 6장 보면, 초대교회가 구제하는 모습을 우리가 볼 수 있지요.
'가난은 나라님도 해결하지 못한다'고 그러죠
그 당시 로마 제국에 수탈당하고 있던 유대 민족은 거의 다 가난한 상태에 있었어요.
그런 비참한 상황을 헤롯 왕도 산헤드린 공회의 지도자들도 제사장들도 해결하지 못했어요.
그런데 예루살렘 교회가 자기들의 것을 아낌없이 나누면서 구제사역을 했던 겁니다.
그러기에 초대교회 성도들의 이런 모습은 안 믿는 사람들에게 충격적으로 다가갔고,
그것이 결국 그들에 대한 칭송으로 표현되었던 겁니다. 그리고 초대교인들의 이런 모습을 보고
"당신들의 삶을 보니 나도 예수를 믿고 싶소"라고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되었다는 거예요.
그게 오늘 47절에서 이렇게 증언합니다. [온 백성에게] [온 백성에게], 그리스도인들을 통해서만이 아닌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느니라" 아멘!
여기서 '칭송'이란 단어를 좀 더 우리가 생각해야 되는데,
'칭송을 받았다' 이와 똑같은 단어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마태복음 5:16절에도 등장합니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여기서 "착한 행실"(마 5:16)에서, '착한'이 '칼로스'란 말입니다.
오늘 본문(행 2:47)의 "칭송"(칼린)이라는 단어와 어근이 같습니다.
"착한"(칼로스)이라는 단어는 "매력있고, 아름다우며, 그래서 사람의 마음을 끄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믿는 이의 착한 행위는 어떤 매력이 있어서 사람들의 마음을 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마태복음에서 착한 행실은 곧 다른 사람들로부터 칭찬 들을 만한 행동을 이야기하는 거죠.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의 착한 행실 매력적인 칭찬을 들을 만한 행실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는 겁니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가 그랬다는 것입니다. 그 칭송을 받았다는 거예요, 같은 단어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종교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삶의 모든 면에 있어서 본을 보이는 삶을 살았고,
자신들도 가난하고 힘든 삶을 살면서도 자신들의 것을 아낌없이 가난한 이웃과 나누고 베푸는 삶을 살았기에
그들의 그런 삶의 모습이 정말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그 말이지요. 그래서 안 믿는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게 되었다는 겁니다.
2세기 철학자인 '아리스타드'라는 사람이, 그가 변증문을 남겼는데,
초대교회 성도들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호감을 사는 삶을 살았다고 하면서
초대교회의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기록해 놓은 문서가 발견됐어요.
2세기 문서인데, 2세기 문서면 주후 100년에서 200년 사이, 한 150년 경의 문서일지도 모르지요. 그 문서가 발견되었어요.
어떤 기록이 있냐 하면,
"초대교의 성도들은 간음하지 않았고, 거짓 증거하지 않았으며, 남의 것을 탐하지 않았다.
그들은 부모를 존경하였고, 그들의 이웃들에게 선한 일을 하였다.
그들이 재판을 할 때에는 공정하게 판결하였고, 그들은 인간의 형상을 만든 우상을 섬기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들이 원하지 않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시키지 않았다."
내가 원하지 않는 거면 다른 사람도 원하지 않을 거니까, 내가 원하지 않는 건 결코 시키지 않았다.
"그들은 적에 대해서도 선을 행하였고, 그들의 아내들은 처녀처럼 정결하였고, 그들의 딸들은 정숙하였다.
(나중에 로마 시대가 너무 타락했을 때 로마의 귀족들이 그리스도인 며느리를 얻기를 원했다고 합니다.)
기독교인들은 정결하고 정숙한 사람들이라는 걸 알았다는 거지요.
그래서 로마의 귀족들이 나중에는 기독교인 며느리를 찾았다는 거예요.
또, 남녀 노예와 그들의 아이들이 예수를 믿고 교인이 되면, 그 어떤 차이를 두지 않고, 노예들을 형제들로 받아들였다."
이천 년 전에 있을 수 없는 얘기입니다. 노예를 형제로 받아들이다니,
"그들은 서로 사랑하였고, 과부의 필요가 무시되지 않았으며 고아들을 돌보았다.
그리고 교인들이 나그네를 발견하면, 그를 집으로 데리고 와서 참 형제들로 대접을 하였다.
그들은 혈연으로 이어진 사람들만을 형제라고 부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모두를 형제로 받아들였다.
가난한 사람이 죽으면 성도들은 매장지를 제공해 주었고,(가난해서 묻힐 곳도 없으니까 매장지를 제공해 주고)
형제들 가운데 메시아의 이름(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핍박 받거나 감옥에 갇힌 형제가 있으면,
그의 모든 필요를 제공하였고, 함께 그가 풀려날 수 있도록 노력했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 가난한 사람을 발견했는데, 자신들도 남은 음식이 없으면,
그들은 2-3일 금식하면서 가난한 사람의 필요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 The Apology of Aristides -
옆에 정말 뭐가 필요한 사람이 있는데, 자신들을 가진 게 없어요. 먹을 게 없어요.
그러면, 이틀 삼일을 금식하면서 남을 도왔다는 거예요. 이런 게 초대교회였어요.
이게 초대교회 성도들이었어요. 실질적으로 있었던 것을 기록한 자료입니다.
여러분, 이게 바로 초대교회 성도들이 세상과는 다른 삶을 살았던 아름답고 귀한 모습이고,
그들은 세상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매력적인 삶이 모습이었습니다.
바울이, 믿음의 아들 디도에게 한 번 이렇게 권면한 적이 있습니다.
디도서 2장 10절 보면, "우리 구주 하나님의 교훈을 빛나게 하려 함이라" 그랬어요.
여기, "빛나게 하라"는 단어가 "코스모신"이란 단어인데, 헬라말로 '화장하다', '단장하다' 하는 단어입니다.
(이 말에서 화장품을 의미하는 "코스메틱(cosmetic)"이란 단어가 왔어요.)
그러므로 "하나님의 교훈을 빛나게 하다" 라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즉 하나님의 복음을 "단장하다" "아름답게 하다"라는 말입니다.
즉, "복음을 아름답게 만들어라", "복음을 매력적으로 만들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 어떻게 우리가 복음을 아름답게 매력있게 만들 수 있습니까?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매력있게 만들 수 있습니까?
바로 우리의 빛 된 삶, 우리의 착한 행실을 통해서 만들 수 잇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세상 사람들의 삶의 방식과는 완전히 다른 매력적인 삶을 통해서입니다.
앞서, 착한(칼라) 행실은 매력이 있어서 사람들의 마음을 끄는 행동이라고 그랬어요.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착한 행실을 통해서 사람들의 마음을 끌고,
결과적으로 우리의 그 착한 행실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고 하나님의 나라를 증거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이게 바로 초대교회 예루살렘교회의 모습이었고, 우리가 돌아가야 할 초대교회의 삶의 모습입니다.
미셔널 라이프(Missional life) - 선교적 삶
그래서 우리 교회가 선교적 삶을 그렇게도 강조하는 거예요.
말로만 '믿는다', 그거 소용없단 말이죠. 우리의 삶으로 이어져야 된다는 거예요.
5. 나가는 말 : 구원받는 사람이 날마다 더해지는 교회
사랑하는 여러분,
처음에 우리 초대교회는 정말 보잘 것 없는 작은 공동체였어요.
그러나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에 그들은 성령님의 능력에 힘입어 변화됐어요.
성령으로 충만한 교회였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겸손하게 배우기에 더욱 열심을 냈고,
성찬을 통해서 십자가의 사랑과 은혜를 늘 끊임없이 확인하면서
자기가 누구인지 정체성을 굳게 했고 경건한 두려움을 가지고 나와 예배하고,
자신들이 가진 건 하나도 내 것이라 하지 아니하고 함께 나누고 베푸는 교제의 삶을 살았고,
그런 자신들의 선교적 삶을 통해 복음을 매력적으로 만들어 전했습니다.
결국은 그들에게 날마다 구원 받는 사람들의 수가 늘어났다, 결과적으로 수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성경 그렇게 증언해요.
그렇습니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는 성도들의 매력적인 삶을 통해,
선교적인 삶을 통해 구원 받는 사람들이 결과적으로 늘어나는 그런 교회였다라고 오늘 본문은 47절은 분명히 증언하지요.
저는, 우리 주안교회가 인천에서 성도들이 제일 많이 모이는 교회여서가 아니라
저는, 우리 주안교회가 인천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성전을 가진 교회여서가 아니라
저는, 우리 주안교회가 인천에서 아름다운 찬양대와 오케스트라가 있는 그래서 아름다운 예배가 진행되는 곳이어서가 아니라
주안교회가 인천에서 익명의 그리스도인들이 나와 예배드리기에 가장 좋은 곳이기 때문이 아니라
주안교회가 인천에서 아이들 교육을 위한 시스템이 가장 잘 되어 있는 교회여서가 아니라
이곳에 나오면, 하나님의 임재하심과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은 이적과 기사를 경험할 수 있고,
하나님의 만져주심을 통한 치유와 회복이 있기에 우리 주안교회에 나오시게 되길 축원합니다.
이곳에 오면 하나님을 만날 수 있으니까, 이 처소에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경험할 수 있으니까,
그래서 나는 주님을 찾을 수밖에 없고 이곳에 나올 수밖에 없는 그런 교회 되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인천의 주안교회, 인천에 가 보면 주안교회라는 교회가 있는데,
'그 교회 성도들은 뭔가 다르더라', '확실히 다르다 말이야.' 그런 얘기를 듣고,
'성도들의 삶이 아름답고 인천 주안교회 성도들의 삶이 참 매력적이더라'
그 얘기를 듣고, 이곳에 많은 성도들이 나올 수 있게 되길 축원합니다.
그래서 '이곳에 가보자' 그래서 이곳에서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고, 날마다 순간마다 구원 받는 이들이 늘어나고,
하나님의 나라가 주안교회를 통해서 확장되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 아멘!
†
아버지, 감사합니다.
주안의 모든 성도들이 성령님의 도우심에 힘입어
아름다운 사랑의 교제를 나누는 공동체, 거룩한 영적 두려움이 있는 공동체,
선교적 삶으로 복음을 매력있게 만드는 공동체 되어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데 쓰임 받는 귀한 교회, 귀한 성도들 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