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7.7. 성령강림 후 일곱째 주일, 맥추감사주일
예배 시편 / 시편 139편 1-10절
찬송 / 377장 · 예수 따라가며
성서 / 룻기 4장 13-17절, 누가복음 17:11-19
말씀 /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그러자 이웃 여인들이 나오미에게 말하였다. "주님께 찬양을 드립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이 집에 자손을 주셔서, 대가 끊어지지 않게 하셨습니다. 그의 이름이 이스라엘에서 늘 기리어지기를 바랍니다. (룻기 4장 14절)
그런데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자기의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되돌아와서, 예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그런데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누가복음 17장 15-16절)
김윤식 목사
Ⅰ
마지막 가을 해변에 잠든 산비탈의 생명들보다도/눈 속에 깊이 파묻힌 대지의 씨앗들보다도/난로에서 꺼내오는 매일의 빵들보다도/언제나 변치 않는 온도를 지닌 어머니의 품 안 보다도/더욱 다수운 것은 감사하는 마음이다/감사하는 마음은 언제나 은혜의 불빛 앞에 있다.
지금 농부들이 기쁨으로 거두는 땀의 단들보다도/지금 파도를 헤치고 돌아온 저녁 항구의 배들보다도/지금 산 위에서 내려다보는 주택가의 포근한 불빛보다도/더욱 풍성한 것은 감사하는 마음이다./그것들을 모두 잃는 날에도 감사하는 마음을 잃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받았기에/누렸기에/배불렀기에/감사하지 않는다.
추방에서/맹수와의 싸움에서/낯선 광야에서도/용감한 조상들은 제단을 쌓고/첫 열매를 드리었다.
허물어진 마을에서/불 없는 방에서/빵 없는 아침에도/가난한 과부들은/남은 것을 모아 드리었다
드리려고 드렸더니/드리기 위하여 드렸더니/더 많은 것으로 갚아 주신다.
마음만을 받으시고/그 마음과 마음을 담은 그릇들은/더 많은 금은의 그릇들을 보태어/우리에게 돌려보내신다./그러한 빈 그릇은 하늘의 곳집에는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감사하는 마음 - 그것은 곧 아는 마음이다./내가 누구인가를 그리고/주인이 누구인가를 깊이 아는 마음이다.
김현승 시인의 「감사하는 마음」이라는 시입니다. 시인은 감사에 대한 이 아름다운 노래를 시작하면서, 따스한 것들을 하나하나 펼쳐 보여주지요. 그런데 시인은 눈 속에 깊이 파묻힌 씨앗보다, 갓 나온 빵보다, 어머니의 품보다 더 따스한 것이 은혜의 불빛 앞에 있는 감사하는 마음이라고 고백합니다. 이어서 시인은 이 감사하는 마음은 그 어느 것보다 풍성한 것이라고 고백하지요. 시인이 고백하는 감사는 “받았기 때문에, 누렸기 때문에, 배가 부르기에” 드리는 감사가 아닙니다. 시인은 추방과 맹수와의 싸움과 낯선 광야에서도 감사를 드렸던 믿음의 선조들의 감사를 떠올리고, 허물어진 마음과 불 없는 방과 빵 없는 아침에 드린 가난한 과부들의 정성스런 감사를 기억합니다. 드릴 것이 있어서, 넉넉해서 드린 것이 아니라, 다만 마땅히 드려야 할 분께 드리는 마음이 감사입니다. 시인은 시를 마무리하면서, “감사하는 마음은 내가 누구인지를 그리고 주인이 누구인가를 깊이 아는 마음”이라고 고백합니다.
시인이 말하는 감사란, 내가 얼마나 연약하고 부족한 존재인지 깨닫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많은 것들을 값없이 누리고 살아가는지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고 연약한 나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이 얼마나 큰지 겸허히 깨닫는 마음입니다. 생각해 보면, 부족한 우리가 하루하루 은혜의 불빛 앞에서 살아가는 것은 많은 분의 사랑과 정성과 기도와 눈물과 희생이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오늘도 우리에게 주님께서 생명을 허락하시고, 일용할 양식을 주시며, 아름다운 자연을 통해 주님의 섭리를 깨닫게 하시고,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 교회와 교우들을 통해 하늘의 은총으로 함께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우리가 주님의 은총 안에서 우리의 삶을 따듯하고, 포근하고, 풍성한 감사의 마음으로 채워가도록 인도하시며, 이끌어 주십니다.
오늘은 성령강림 후 일곱째주일이고, 맥추감사주일입니다. 우리는 보리가 무르익어 추수할 즈음인 오늘, 칠월의 첫 주일에 한 해의 절반 동안 지켜주시고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모아 드립니다. 한 해의 절반이 지나는 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우리를 은총 안에서 지켜주시고 인도해 주신 하나님께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의 마음과 찬미를 드릴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Ⅱ
오늘 우리는 구약의 말씀으로 룻기서에서 시어머니 나오미와 며느리 룻의 이야기를 함께 받아 읽었습니다. 룻기의 주인공은 룻이지만, 룻기는 나오미의 고달픈 인생이 룻을 통해서 어떻게 바뀌어 가는지 보여줍니다. 나오미는 정말 박복한 사람이었지요. 나오미가 경험한 일들은 고난의 사람인 욥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스라엘에 흉년이 들어서 먹을 것을 구할 수 없게 되자 나오미는 남편을 따라 모압으로 이주를 하게 되었지요. 그런데 거기서 남편을 잃었습니다. 그 후 두 아들을 장가보냈는데, 두 아들도 죽고 말았습니다(룻 1:1-5). 이주한 지 십 년 만에 머나먼 타지에서 남편도 아들들도 모두 잃고 말았으니, 정말 앞이 깜깜했겠지요.
그러던 중 나오미에게 기쁜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양식을 베풀어 주셨다는 소문입니다(룻 1:6-7).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쩔 수 없이 고향으로 돌아가야 하겠지요. 굶어 죽지 않으려면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나오미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두 며느리를 모압에 두고 가려 합니다. 두 며느리에게 나는 고향으로 가겠으니, 너희는 너희의 고향에 남으라고 말합니다. 그들의 고향에서 다시 잘 살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이었겠지요. 그런데 두 며느리 가운데 룻은 어머니를 따르겠다며 따라나섰습니다. 나오미는 마음을 단단히 먹은 룻을 말릴 수가 없었습니다. 나오미는 그렇게 며느리 룻과 함께 고향 베들레헴으로 향했습니다.
나오미가 고향에 도착했을 때, 온 동네에 난리가 났습니다(룻 1:19). 동네 사람들은 “나오미가 아니냐?”하고 말했지요(룻 1:19). 역설적이게도 나오미라는 이름의 뜻이 “나의 기쁨”입니다. 그러니까 마을사람들이 나오미가 돌아왔을 때 “나오미가 아니냐?” 하고 말한 것은 “정말 기쁘지 않느냐?, 기쁨이 아니냐?” 하고 말한 것과 같은 뜻을 담은 말이었던 셈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나오미를 보고 기뻐하는 마을 사람들의 말에 나오미는 정색을 하곤, 나를 ‘나오미’가 아니라 ‘마라’라고 불러달라고 합니다. ‘마라’란 히브리어로 고난을 뜻하는 단어이지요. 나오미가 이웃에게 말하길 나는 이 고향을 풍족하게 떠났지만, 하나님께서 빈손으로 돌아오게 하셨고, 하나님께서 나를 치셨다고 스스로 말하는 것입니다. 고향의 품으로 돌아온 나오미를 기쁨으로 부르는 마을 사람들과 스스로를 ‘마라’라고 ‘쓰디쓴 고난’이라고 부르는 나오미가 서로 어긋나 보입니다.
그런데 나오미가 룻과 함께 베들레헴에 도착한 때는 보리 추수를 시작할 무렵이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쓰는 나오미는 쉬이 밖을 나서지 못했겠지요. 며느리 룻은 용기를 냅니다. 들판에 떨어진 보리 이삭이라도 주어 오기로 한 것이지요. 이스라엘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이방인과 과부와 고아들을 위해서 이삭을 줍지 않고 남겨 두었기 때문입니다. 룻은 그렇게 이삭을 줍기 위해 길을 나섰습니다. 아마도 마을 사람들이 말을 하진 않아도, 모두가 한 마음으로 룻에게 호의와 친절을 베풀어 주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 룻은 추수하는 사람들을 이곳저곳을 따라다니며 이삭을 주웠지요(룻 2:3-4). 추수하는 사람들의 뒤를 따라가며 이삭을 줍다가 ‘보아스’라는 사람의 보리밭에 이르렀습니다. 보아스는 룻을 눈여겨 보고는 그가 누구인지 종들에게 물었지요. 보아스는 룻에게 여기저기 떠돌지 말고 나의 밭에서 이삭을 넉넉히 거두어 가라고 말하고, 목이 마르면 물통에서 물도 마시며 목을 축이라고 호의를 베풉니다. 룻의 사정을 들은 보아스는 룻에게 “이제 하나님의 날개 아래 보호를 받고자 왔으니, 넉넉하게 하나님께서 갚아주실 것이라고” 안심시키며, 위로합니다. 보아스는 이방인인 룻에게 빵도 나누어주고, 포도주도 나누어주며 점심식사를 함께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보아스는 종들을 시켜, 룻이 이삭이 아니라 알곡을 줍도록 일부러 알곡을 뽑아 룻이 줍도록 하였지요. 룻은 남은 음식과 곡식더미를 가득 챙겨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룻과 보아스의 만남은 결혼으로 이어지게 되지요. 나오미가 이 일에 적극 나서며 응원을 해주었고, 보아스도 신중하게 룻을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그리고 룻은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습니다. 이웃의 여인들은 보아스와 룻에게서 태어난 아이를 보며, 하나님께 찬양과 감사를 드렸습니다. 보아스와 룻 사이에 일어난 일들은 지극히 인간적인 일이지요. 그러나 나오미와 룻의 생애와 그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이웃들은 인간적인 일들 배후에서 그들과 함께하시고, 그들을 지켜주시며, 그들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이제 스스로 ‘마라’라고, 자신의 인생을 쓰디쓴 고난이요, 괴로움이라고 했던 나오미는 비로소 ‘기쁨’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인생을 다시 맞았습니다. 절망 가운데 주저하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온 나오미에게 하나님께서는 이웃들을 통해 환대와 사랑을 베풀어 주시고, 보아스를 통해 그 환대와 사랑이 결실을 맺도록 인도해 주신 것입니다.
비록, 나오미는 빈손으로 고향에 돌아왔지만, 마침내 룻을 통해 그 고향에서 다시 기쁨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룻의 이야기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나오미를 여전히 나오미로 기억하며 환대하는 이웃들이 있었고, 룻의 사정을 알고 친절과 호의를 베푼 마을의 사람들이 있었지요. 하나님께서는 보아스와 마을 사람들의 친절과 호의를 통해 일하셨습니다. 마침내 룻과 보아스가 결혼해서 아이를 낳게 되었을 때, 사람들은 룻과 나오미를 버리지 않으시고, 그들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찬양하며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 아이의 이름은 오벳이었고, 오벳은 바로 이스라엘의 성군인 다윗의 할아버지이지요. 그런데 오벳은 어떤 사람일까요? 성경에 오벳에 대한 기록이 없으니 우리는 오벳에 대해서 알 길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상상해 볼 수는 있겠지요. 오벳은 어떤 아이로 자랐을까요? 다문화 아이라고 차별을 받으며 자랐을까요? 아니겠지요. 할머니의 기쁨으로, 어머니 아버지의 기쁨으로 사랑을 받고, 이웃들의 축복을 받는 아이로 자라지 않았을까요? 그렇게 할머니와 부모님이 자기에게 베푼 한없는 사랑처럼 훗날 다윗에게도 사랑을 베푸는 좋은 할아버지가 되지 않았을까요?
비록, 나오미의 생은 ‘마라’와 같이 쓰디쓴 인생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룻과 고향의 사람들을 통해 나오미를 위로하시고,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기쁨과 감사가 가득 찬 삶으로 이끌어 주셨습니다. 우리의 삶도 작고, 때로 흔들리지만, 그럼에도 우리의 지난한 삶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우리도 보아스와 나오미의 고향사람들처럼 이웃의 기쁨을 함께할 줄 아는 사람들로, 무엇보다 따듯하고, 포근하고, 풍성한 기쁨과 감사로 가득 찬 사람들로 살아갈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Ⅲ
오늘 우리는 복음서의 말씀으로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그러니까 사마리아와 갈릴리를 지나가실 때 나환자들을 만나신 이야기를 함께 읽었습니다. 나환자들이란 어떤 사람들이지요? 마을 밖에 사는 사람들, 사람들에게 가까이 가지 못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어떤 마을을 지나가시다가 나환자들 열 명을 만나셨습니다. 그 사람들은 예수님 멀찍이 서서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하고 소리쳤지요. 예수께서 사람들을 낫도록 하신 소문을 들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향해 가서 제사장들에게 몸을 보이라고 하십니다. 당시 나병의 진단과 완치 판정은 모두 제사장이 감당했기 때문이지요(레 14:2). 복음서의 다른 본문과는 다르게 예수께서는 어떤 치유의 행위도 하지 않으시곤, 그저 제사장에게 가서 몸을 보여주라고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제사장에게 가는 도중에 그들의 몸이 깨끗이 나앗습니다. 놀라운 기적이지요. 그들 중 한 사람만이 가던 길을 멈추고 돌이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자 예수께로 돌아왔습니다. 예수께서는 한 사람만이 돌아온 것을 이상하게 여기십니다. 열 사람이 깨끗해졌는데, 왜 한 사람만 돌아왔냐는 물음입니다. 예수께서는 아홉 사람은 어디에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 마음 깊이 감사를 드리는 사람은 이 이방사람, 이 한 사람밖에 없냐고 물으셨지요. 그렇게 예수께서 당신께 돌아와 감사를 드리며 영광을 돌린 사람이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밝히신 것은 아마도 다른 사람들이 모두 유대인이었기 때문일 겁니다.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들, 은총을 기쁨의 선물과 감사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차별과 오만의 근거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입니다. 예수께서는 돌아온 한 사람을 돌려보내며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고 칭찬해 주십니다. 이제 이방인이면서도 나환자이기 때문에 이중으로 고통을 받아야 했던 사람은 기쁨과 감사의 마음으로 가족에게로 돌아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열 사람이 병에서 나음을 받았지만, 이 한 사람만이 하나님께 벌을 받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믿음의 사람으로 변화된 것이지요.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믿음을 통해서, 바로 그 감사하는 사람만이 한 사람만이 몸과 마음이 모두 온전해진 것입니다.
김현승 시인은 감사하는 마음이야말로 가장 따듯하고, 포근하며, 풍성한 마음이라고 노래했지요. 무엇보다 감사하는 마음이란 나를 알고, 우리의 주인이신 분을 아는 마음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이란 우리의 작고 연약하고 부족함을 아는 것이고, 그렇지만 우리를 통해 일하시는 우리의 주인이신 주님을 아는 마음이라는 고백입니다. 때로 우리는 흔들리며 살아가지만, 우리와 언제나 함께하시고, 우리를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바라볼 때,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갈 때, 주님께서 우리의 삶을 더 큰 기쁨과 감사로 가득 채워주실 것입니다. 지난 한 해의 절반도 함께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남은 한 해의 절반도 기쁨과 감사의 마음으로 하루하루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