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0611. 묵상글 ( 성 바르나바 사도 기념일. - 인성적으로나 영성적으로. 등 )
----------------------------------------------------
220611. 성 바르나바 사도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인성적으로나 영성적으로
"바르나바는 착한 사람이며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오늘 축일을 맞이하는 바르나바는 착한 사람에다가
성령과 믿음도 충만한 사람이라고 사도행전은 얘기합니다.
인성적으로도 훌륭할 뿐 아니라 영적으로도 훌륭하다는 완벽한 찬사이겠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착함에 대해서 한 번 성찰코자 하는데
우리말의 착함은 항상 그 번역에 있어서 적절한지 문제의 소지가 있습니다.
한자어가 아닌 순 우리말로 번역하려고 착한 사람이라고 번역한 것 같은데
제 생각에 이것은 착한 사람이라기보다는 선한 사람이라 번역함이 좋을 듯 하고
그래서 200주년 성서도 선한 사람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우리말의 착한 사람이란 윗사람 말을 잘 듣는,
말하자면 순종을 잘하는 사람을 특히 어린이를 많이 일컫지요.
이에 비해 선한 사람은 착한 사람과 좋은 사람을 다 포함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바르나바 사도의 경우는 선한 사람이라고 함이 옳을듯 합니다.
그리고 선한 사람이라고 해야 악한 사람과 비교하여 얘기할 때 분명한 비교가 되고
선과 악과 연관지어 얘기할 때도 개념이 명확해지지요.
제 생각에 선인이나 악인이나 선을 좋아하고 더 나아가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악인일지라도 좋은 것을 소유하려고 하고 자기 자식한테는 좋은 것을 줍니다.
주님께서도 기도에 대해 가르치면서 악한 사람도 자기 자식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아는데 하물며 하늘의 아버지께서는 더 그러시지 않겠냐고 하셨잖아요?
그러므로 선인이나 악인이나 다 선을 좋아하고 사랑하는데
악인은 그 선을 자기 입이나 자기 자식 입에만 집어넣고
다른 사람 입에는 넣어주지 않거나 악을 주는 데 비해
선인은 그 선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것이 차이라 하겠습니다.
선인이라고 하여 선을 자기 입에 넣지 않고 남의 입에만 넣어주는 사람이 아니고,
자기 입에는 나쁜 것만 넣고 남의 입에는 좋은 것을 넣어주는 사람이 아닙니다.
선인도 자기 입에 좋은 것을 넣는 사람인데
악인과 차이는 자기 입에만 넣는 사람이 아닌 거지요.
그러니까 자기 입에도 남의 입에도 같이 넣는 겁니다.
우리말의 콩 하나도 나눠먹는 것과 같은 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잘 알 듯이 나누는 사람이 좋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뭣을 나누느냐,
달리 말해서 어떤 선을 나누느냐에 따라 그 나눔의 의미도 달라집니다.
지상의 선을 나누는 것도 좋고 의미가 있지만
천상의 선을 나누는 것이 더 좋고 의미있지요.
그리고 천상의 선을 나눈다는 것은 복음에서
좋은 것을 주는 하느님 아버지에 대해서 말씀하시며
더 좋은 것 곧 성령을 주신다고 하신 것처럼 성령을 나누는 것이며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나누는 것 곧 선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래서 오늘 사도행전은 바르나바 선한 사람이라고 한 다음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고 덧붙인 것이고 교회는 그를 사도라고 합니다.
어쨋거나 인성적으로나 영성적으로 훌륭한 바르나바를
그의 축일인 오늘 본받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겠습니다.
----------------------------------------------------
220611. 성 바르나바 사도 기념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분부하십니다.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여라.”(마태 10,7)
놀라운 일입니다. 제자들은 유례없는 위대한 직무를 받았습니다. 전혀 새롭고 놀라운 직무와 권한이 주어졌습니다. 감히 그 누구도 할 수 없었던,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직무입니다. 그것은 모세와 예언자들이 받았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기껏해야 지상에서의 일시적 약속에 대한 것들을 선포했을 뿐이었지만, 제자들에게는 바로 “하늘나라”를 선포하라는 직무가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더더욱 놀라운 것은 그들이 그 직무를 수행하는데 있어서 그 어떤 망설임이나 주저함이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특별한 능력이 있던 이들도 아니었는데 말입니다. 사실, 모세와 예언자들은 지상의 약속에 대한 직무를 받았을 때마저 망설이고 꺼려했는데 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위험이나 박해가 없었던 것도 아닌 데 말입니다. 그런데도, 제자들은 오히려 지극한 열정으로 그 직무를 다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고 있는 바르나바 사도도 바로 그러했습니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해서 그들은 그렇게 할 수가 있었을까?
그것은 그들에게 그러할 권능이 함께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곧 하늘나라가 주어졌고, 하늘나라를 선포할 힘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거저 주어진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 10,8)
받아서 가진 것을 주어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꼭 먼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가진 것”, 그것은 그들이 만들거나 획득해서 가지게 된 것이 아니라, 받아서 가지게 된 것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자애로, 거저 주어진 선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주어진 것이라는 사실은 주시는 분이 있기에 받아들일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먼저’, 주신 그분을 만나야만 합니다. ‘먼저’, 그분의 사랑을 만나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그 사랑으로 우리도 ‘거저 줄’수가 있게 됩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아무 거나 주어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거저 받은 것, 바로 그것을 거저 주라’고 하십니다. 그러니, ‘받은 것이 아닌 다른 것’을 주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결코 우리가 만든 그 어떤 것을 주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만약 실제로 받지도 않은 것을 선포하고 증거 한다면, 그것은 거짓 선포요 거짓 증거가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선포해야 할 나라는 우리 자신의 나라가 아니라, “하늘나라”인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마태 10,7)
주님!
가고 싶은 데로 가는 것이 아니라 보내신 곳으로 가게 하소서!
하고 싶은 바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라 하신 바를 행하게 하소서!
아는 것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알려주신 바를 선포하게 하소서!
해야 할 바를 그만두지 않고, 가야 할 길을 멈추지 않으며, 지켜야 할 바를 끝까지 지키게 하소서!
내 나라가 아니라 당신의 나라가 이루어지고 당신의 나라를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
220611. 성 바르나바 사도 기념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주님께서 원하신다면」
‘숲속의 땅’이라 불리는 중앙아메리카의 과테말라는 인구 1천3백만의 소도시입니다. 그냥 보기에는 평화롭고 아름다운 고산지대로 살기가 좋은 곳인데 중남미 국가 중 가장 치안이 불안한 국가입니다. 일일 평균 약 20건의 살인 사건이 발생하여 많은 출산에도 불구하고 인구증가는 없다고 합니다. 문맹율이 80%가 넘는 가난의 고통이 너무도 큰 나라입니다.
이곳에 선교사제로 파견되어 있는 홍 가브리엘신부는 사제생활비 1천불이 너무 과분하다고 생각되어 버림받은 어린이 10명을 데리고 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일이 커졌습니다. 150명이 숙식할 수 있는 고아원 ‘천사의 집’과 250명의 배움을 감당할 수 있는 ‘미리내 초등학교’를 건립하고 그들과 함께 살았습니다. 이제는 중학교도 개설하였습니다. 신부는 미국 뉴저지에 피정을 겸한 후원회원을 모집하러 나섰는데 공항에서 쓰러져 병원으로 실려 가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검진결과 “영양실조”였습니다. 충격이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살려면 그들보다 더 가난한 삶을 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나 먼저 쓰러지면 그들은 어쩌란 말인지요? 오래 전 그와 피정을 함께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는 또 하나의 꿈을 지니고 있었고 지금의 시설에 올 수 없는 그야말로 오지에 버려진 어린이들을 위해 살고 싶다는 마음을 드러냈습니다. 항공요금이 비싸서 고국인 한국에 3년 만에 나온 사람이 돈도 없이 또 다른 계획을 세우는 것을 보고 저는 놀랐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한 번도 굶어 본 적이 없고, 돈 걱정을 한 적도 없다. 필요할 때 필요한 만큼을 주님께서 채워 주셨고 앞으로도 채워 주실 것이다. 주님께서 원하신다면 앞으로도 그 믿음으로 아이들을 사랑하며 살 것이다.” 주님의 일을 하는 성실한 일꾼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은 주님께서 손수 마련해 주십니다.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 돈도 지니지 않았고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않은 채 주님을 차지한 홍 신부는 ‘한 눈 팔지 않고’ 가야할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초대교회 사도들의 열성으로 그는 복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10,8)는 말씀에 따라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몸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온전히 내어놓고 있습니다. 사실 많이 움켜쥐고 많이 지니고 있을수록 하느님께 의지하기보다는 자신의 능력에 기대게 됩니다. 그러나 온전히 주님께 의탁하면 주님께서 원하시는 수확을 얻게 됩니다.
모두가 하느님의 것이고 우리는 잠시 관리자로서 관리하는 것일 뿐인데 왜 욕심을 부리며 사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느님의 섭리와 안배를 몸으로 받아들이며 희생의 삶을 사는 선교사들을 위해 기도하는 오늘이기를 희망합니다.
또한 우리 모두가 사도의 열성으로 선교에 나설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을 우선적으로 배려하면서...... 하느님을 차지하는 기쁨에 감사하기를 바랍니다.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220611. 성 바르나바 사도 기념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자존감이 높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self-esteem’이라는 영어를 쓰는 자존감은 스스로 품위를 지키고 자기를 존중하는 마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나는 괜찮은 사람이다”라는 마음을 가지는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마음을 스스로 가잘 수 있을까요? 옆에 있는 사람이 “너는 참 못났어. 왜 그렇게 사니? 장차 뭐가 되려고 그러니?” 등의 말을 계속하는데도 스스로 “나는 괜찮은 사람이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사랑받아야 괜찮은 사람이라는 감정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랑을 주는 사람이 없다면 자존감 고취는 불가능한 일일까요? 어렵기는 하지만 노력에 대한 성취가 모여지면서 스스로 괜찮은 사람임을 깨닫게 된다고 합니다. 커다란 성공만이 아닙니다. 자그마한 성취를 이뤄나가면서 또 삶의 자그마한 부분에서 의미를 찾아가면서 자신은 괜찮은 사람으로 만들게 되는 것입니다.
자존감이 높아야 지금을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그 방법은 명확합니다. 바로 ‘사랑’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라고 명령하십니다. 사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장점보다는 단점이 더 많아 보이는 사도들의 모습입니다. 학벌이 좋은 것도 아니고, 특별한 능력을 갖추고 있어 보이지도 않습니다. 특별히 의지가 강해서 유혹에 절대로 넘어가지 않는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런 이들에게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라고 하십니다.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라고 하십니다.
그렇다고 특별한 것을 챙겨주시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돈도 지니지 말고,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런 파견에 대해 “저는 못 합니다.”라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요?
이렇게 파견하셨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주님의 사랑만을 바라보고,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만을 간직하라는 것입니다. 주님께 사랑받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불가능해 보이는 것을 충분히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제자들은 성공적으로 복음 선포를 마칩니다. 주님께서 함께하신 자리는 아니었지만, 주님의 사랑만으로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을 체험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괜찮은 사람이다.”라는 자존감을 느끼게 되지 않았을까요?
지금도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세상에 기쁜 소식을 전하라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할 수 없다는 이유를 계속 찾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주님의 사랑에 집중할 수 있다면, 그 사랑에 굳은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충분히 할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자기가 괜찮은 사람이라는 높은 ‘자존감’을 갖게 될 것입니다.
------------------------
생각을 조심해라. 말이 된다. 말을 조심해라. 행동이 된다. 행동을 조심해라. 습관이 된다. 습관을 조심해라. 성격이 된다. 성격을 조심해라. 운명이 된다(마거릿 대처).
------------------------
----------------------------------------------------
220611. 성 바르나바 사도 기념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지금은 모두 은퇴하였지만 피켜 스케이팅에서 자웅을 가리던 선수가 있었습니다. 일본의 아사다 마오와 한국의 김연아 선수였습니다. 주니어 시절에는 아사다 마오 선수가 앞섰으나 성인 무대에서는 김연아 선수가 앞섰습니다. 동계 올림픽은 물론 각종 세계 대회에서 아사다 마오는 김연아 선수의 그늘에 가려졌습니다. 그러나 아사다 마오도 세계적인 기량을 갖춘 뛰어난 선수였습니다. 현 시대를 인터넷으로 묶어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빌 게이츠와 스티브 잡스입니다. 빌 게이츠는 마이크로 소프트라는 프로그램으로 우리들이 쉽게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스티브 잡스는 스마트폰이라는 혁신으로 컴퓨터를 전화기 속에 집어넣었습니다. 모바일을 통한 다양한 어플리케이션들은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 있습니다. 빌게이츠의 우직함과 나눔은 우리 시대의 영웅입니다. 스티브 잡스의 혁신과 창의성 또한 우리 시대의 영웅입니다.
한국 가톨릭에는 3분의 추기경이 있었습니다. 두 분은 고인이 되셨고, 지금은 한 분이 계십니다. 저는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님에게 사제서품을 받았고, 정진석 니콜라오 추기경님이 있을 때 교구 사목국에서 3년 동안 일하였습니다. 지금은 은퇴하신 염수정 안드레아 추기경님이 있을 때 교구 성소국에서 5년 동안 일하였습니다.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님은 교회는 물론 한국사회에서도 존경을 받았습니다. 탄생 100주년을 맞으면서 복자로 추대하려는 움직임도 있습니다. 저도 기억합니다.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님의 낮고 중후한 저음의 목소리입니다. 많은 말을 하지 않지만 깊이와 품위가 있는 말씀이었습니다. 선종 1주기를 맞이하는 정진석 니콜라오 추기경님께서는 카랑카랑한 목소리와 정확한 기억력을 보여주었습니다. 좀처럼 외출을 하지 않았던 정진석 니콜라오 추기경님은 매일 성직자와 신학생을 위해서, 구역장과 반장을 위해서, 북한 교회를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묵주기도를 바쳤습니다. 염수정 안드레아 추기경님은 늘 경청하는 분이었습니다. 교구청 사제들을 믿고 모든 것을 맡겨 주었습니다. 무지개의 색깔이 7가지이듯이 세분 추기경님의 영성도 다양하였습니다.
오늘은 바르나바 사도 기념일입니다. 성령과 은총으로 가득한 바르나바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아사다 마오와 김연아 선수처럼 처음에는 바르나바의 복음 선포가 더 드러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교회를 박해하던 바오로 사도를 부르셨고 교회의 역사에서 아는 것처럼 바오로 사도는 바르나바 사도를 뛰어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바르나바 사도가 감성적이었다면 바오로 사도는 이성적이었습니다. 바르나바 사도는 뛰어난 언변으로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하였고, 오늘 독서에서 읽었던 것처럼 안티오키아에서 처음으로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바르나바 사도의 공이 결코 작지 않다고 하겠습니다. 바르나바 사도가 간 길에 바오로 사도는 신학과 교리의 길을 놓았습니다. 바르나바 사도가 간 길에 바오로 사도는 서간을 통해서 위로와 격려를 공동체에게 주었습니다. 세상의 기준에는 우열의 기준이 있겠지만 하느님의 기준에서 보면 사도들 모두 하느님 정원의 예쁜 꽃들입니다. 모두 무지개의 색깔처럼 하느님의 사랑을 각자의 영성으로 드러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린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하느님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업적과 능력보다는 겸손과 희생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사도는 아니지만, 사도직을 수행함으로써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하신 말씀은 사도들에게 하신 말씀이지만, 오늘 우리에게도 똑같이 하시는 말씀입니다.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집에 들어가면 그 집에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 신앙생활은 물리적인 시간을 흘러가는 대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강물을 거꾸로 흘러가는 연어처럼 의미의 시간, 가치의 시간, 약속의 시간을 사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수 있도록 행동하는 것입니다.
----------------------------------------------------
220611. 성 바르나바 사도 기념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거저 받은 것을 되돌리는 복음선포 ♣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 10,8)
오늘의 시대는 자기 이미지를 지나칠 정도로 중요시하는 시대이다. 이런 세태를 반영하는 것일까? 신앙인들도 자기 선행, 업적을 드러내는데 익숙해져 있는듯하다. ‘나는 얼마를 어디에 기부했다.’ ‘누가 안 돼 보여서 도와주었다.’ ‘어떤 복지시설에 가서 봉사를 했다.’ 등등. 온통 자신이 주인공이다. 조그마한 배려를 하고도 생색을 낸다. 모든 것이 거저 받은 것인데도 말이다. 사도들의 삶은 정반대였다.
요셉이라 불린 바르나바는 키프러스 출신의 유다인으로서 레위였다. 바르나바는 갓 태어난 교회에서 복음선포에 중요한 몫을 한다. 그는 자기가 가지고 있던 밭을 팔아 그 돈을 사도들의 처분에 맡겼다(사도 4,37). 그는 “성령과 믿음으로 가득 찬 훌륭한 사람”(본기도)이었기에 조정과 화해의 몫을 잘 수행하였으며, 그로 인해 많은 이들이 ‘주님께로 돌아왔다.’
바르나바는 과거에 교회를 박해했던 바오로 사도에 대해 여전히 의심하고 적개심을 지니고 있던 유대계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그를 지지하며 중개하였다. 그는 이교인들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한 안티오키아의 형제들을 격려하기도 하였고, 다르소로 가서 사울을 찾아 안티오키아 공동체로 데려와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소개하기도 하였다. 그는 바오로의 제 1차 선교여행에 동행하였으며 49년 예루살렘 공의회에도 참석하였다.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비시디아의 안티오키아에서 추방되었을 때에도 ‘기쁨과 성령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런데 둘은 예루살렘 공의회 이후 그들이 복음을 전한 곳을 다시 방문하려 했을 때, 바르나바가 자기의 사촌이며 복음사가인 마르코를 데리고 가려 하자 바오로가 반대해 서로 심한 언쟁을 했다. 결국 바르나바는 마르코를 데리고 키프러스로 가고(사도15,39) 바오로는 실라를 데리고 시리아로 갔다. 나중에 그들은 화해하였다. 전승에 따르면 그는 키프러스 섬에서 순교하였다.
사도들을 본받아 우리도 예수님께서 하신 것처럼 똑같은 선포를 해야 한다. 지금은 하느님께서 특별히 당신 백성을 찾아보시는 때이며 완성의 때이므로 회개와 참회의 때이다. 사도들은 병자를 낫게 하고, 죽은 이를 살려주며, 마귀를 쫓아낼 권한을 받았다. 우리도 이 사랑의 권한을 통하여 그들은 예수님과 같은 이들이 될 것이다.
복음을 선포하려면 탐욕을 버려야 한다(10,8ㄴ-10).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10,8ㄴ) 복음을 선포하는 것도 사랑 나눔도 ‘내 것’을 전하고 나누는 것이 아니다. 복음선포는 하느님을 전하는 것이기에 이익을 추구하지 않고 행해질 때 사람들의 마음에 불을 놓을 수 있다. 따라서 선교할 때에는 하느님께만 의존하여야 한다.
복음을 선포하는 이들은 사도들처럼 가난과 사랑의 태도를 지녀야 한다. 하느님의 사랑을 나누고 복음을 선포하는 이들은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 돈도 지니지 마라.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10,9-10)고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깊이 새겨야 한다. 곧, 극도의 검소함이 요구된다. 이렇게 복음적인 풍요로움이 자라날 수 있는 자리는 보잘 것 없고 소박한 자리이다.
우리도 가난한 순례자와 나그네로서 복음을 선포하면서 하느님의 평화를 빌어주는 사도가 되자(루카 10,5). 성 바르나바 사도가 이교인들에게 뜨거운 사랑으로 복음을 전했듯이, 우리도 복음을 굳게 믿어 말과 행동으로 선포하자.
----------------------------------------------------
220611. 성 바르나바 사도 기념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믿는 이들의 신원
-주님의 제자, 주님의 선교사-
오늘은 성 바르나바 사도 기념일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는 순간 문득 우리 믿는 이들의 신원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정체성의 위기를, 신원의 위기를 겪는 오늘날입니다. 세상을 성화해야할 교회나 주님의 제자들이 세상에 동화되고 속화되어 세상의 빛으로서, 세상의 소금으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해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제들을 통해 듣는 이구동성의 말은 결국 삶으로 직결됩니다. 사제들의 사제다운 삶이 우선이라는 것입니다. 사제들의 삶을 보고 배우는 것이 거의 절대적이라 합니다. 참으로 세상에 거슬러 예수님을 닮은 정말 영적, 내적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이 우리의 삶을, 신원을 환히 비춰주는 본질적 내용으로 이뤄졌습니다. 복음 선포의 선교는 교회에 속한 우리 믿는 이들의 본질적 사명이자 존재이유임을 깨닫습니다. 안으로는 주님의 제자, 밖으로는 주님의 선교사로서의 우리의 신원입니다.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하고 선포하여라.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환자들을 깨끗하게 해주고, 마귀들을 쫒아내어라. 너희가 거져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예나 이제나 똑같은 시공을 초월한 복음 선포의 명령입니다. 제자들에게 주어진 복음 선포의 사명은 그대로 주님의 일을 계승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을 그대로 물려 받아 실천하는 것입니다. 새삼 화두로 부각되는 것이 하늘 나라입니다.
예수님의 평생 꿈이, 비전이 하늘 나라였습니다. 임박한 하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며 몸소 하늘 나라를 살았던 예수님이셨습니다. 언젠가의 하늘 나라가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살아가야 할 하늘 나라입니다. 바로 이런 하늘 나라 꿈의 상실이, 정체성 위기의 근본적 원인임을 깨닫습니다.
하늘 나라의 도래와 더불어 일어나는 기적이 바로 하늘 나라의 실현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끊임없이 실현되는 하늘 나라의 꿈임을 믿습니다. 하늘 나라의 도래와 더불어 일어나는 기적들입니다. 주님은 앓는 이들을 고쳐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고, 나병환자들을 깨끗하게 해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주라 명령하십니다.
예나 이제나 인간의 비극적 무지의 현실은 그대로 임을 봅니다. 물론 역사의 진보는 믿지만, 여전한 탐욕의 현실에 과연 인간의 진보가 가능한지 문명의 야만시대, 반복되는 역사의 악순환은 아닌가 하는 회의가 들 때도 있습니다.
앓는 이들을 고쳐 주라 하십니다. 세상에 알게 모르게 대부분 앓는 병자들입니다. 참으로 심각한 병이 신앙을, 희망을, 사랑을 잃었을 때 영혼의 질병에 따라 오는 육신의 질병들입니다. 오늘로서 연중 제10주간이 끝나는데 영성체후 기도 첫 대목이 좋아 마음에 새겼습니다.
바로 “주님, 저희 병을 고쳐 주시는 성체를 받아 모시고 비오니”로 시작되는 대목입니다. 우리 병을 고쳐주시는 주님의 성체입니다. 앓는 이들을 고쳐주기에 앞서 우선 우리의 병부터 낫게 하는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다음엔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라 하십니다. 육신은 살아 있어도 영혼이 시들어 죽어가는, 살아있으나 죽어가는 영혼들을 일으키라 하십니다. 희망을, 꿈을, 사랑을 잃고 무기력하게, 무감각하게 살아가는 이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나이 30에 죽어 70에 묻힌다.”,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한, 참 많이 인용했던 말마디입니다. 이처럼 생각없이, 영혼없이 희망을 잃고 죽어 사는 사람도 많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이들을 살려 일으키라 하십니다.
그러기에 앞서 우리가 날마다 미사은총으로 우선 먼저 일어나야 하겠습니다. ‘넘어지는 게 죄가 아니라 절망으로 일어나지 않는 게 죄’임을 일깨우면서 용기를 북돋아 줘야 할 것입니다. 참으로 넘어지면 곧장 일어나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 바로 파스카의 삶입니다.
이어 나병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라 하십니다. 현대판 영적 나병들은, 마귀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삶의 중심을 잃었을 때 그 중심에 자리잡는 온갖 마귀들이요 이어지는 무수한 영적 나병의 질환들입니다. 바로 불가에서 말하는 삼독三毒인 탐진치貪瞋癡, 욕심, 성냄, 어리석음이나 옛 수도교부들이 말한 여덟가지 악덕들인 탐식, 음욕, 탐욕, 분노, 슬픔, 나태, 허영, 교만을 통해 활약하는 마귀들이요 이와 함께 야기되는 온갖 영혼의 나병들입니다.
참으로 총체적 문제덩어리인 인간존재임을 깨닫습니다. 이런 총체적 질병에 대한 유일한 처방은 파스카의 예수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는 것입니다. 이래서 병을 고쳐주는 미사은총이 참으로 고맙습니다.
우리를 다시 살려 일으키시고, 영적 나병의 치유와 더불어 우리 안에 내재해 있는 온갖 마귀들을 일소시켜 주는 성체성사의 은총입니다. 새삼 주님 안에 머물러 지내는 관상기도와도 같은 성전안에서의 성무일도와 미사전례가 우리의 총체적 치유에 얼마나 결정적인지 깨닫게 됩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미사에 참석해 치유받은 우리 모두에게 주어지는 명령입니다. 이어 복음에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무소유의 삶을 명하십니다. 온전히 소유가 아닌 존재의 본질적 삶을, 착한 신자들의 환대에 의지하여 최소한도의 삶을 살라 하십니다.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 돈도 지니지 말라.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철저한 가난을, 참으로 모든 것을 주님께 의탁한 가난한 삶, 존재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늘 나라에 희망을 두었을 때, 하느님께 모든 신뢰를 두었을 때 가능한 무소유의 삶이겠습니다. 문자 그대로의 무소유가 아닌 무소유의 정신을, 집착없는 무욕의 삶을, 이탈의 초연한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 한 분만으로 행복하고 부유하고 자유로운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은 우리에게 직접 해당되지는 않겠지만 그 정신은 중요합니다. 선교사는 거지가 아닙니다. 이리저리 입맛대로 찾아 다니며 민폐를 끼치지 말고, 마땅한 한 곳에 머물라는 말씀이며, 그집에 머물게 되면 참 좋은 선물인 주님의 평화를 선물하라 하십니다. 참으로 자신을 비운 삶의 통로를 통해 이웃에게 선사되는 주님의 평화요, 평화와 함께 가는 영육의 치유입니다.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여라.”
참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 존재 자체가 예수님을 닮아 하늘 나라의 실현입니다. 그 빛나는 선교사의 모범이 오늘 기념하는 성 바르나바 사도입니다. 열두 사도에 이어 사도라 이름 붙이는 이는 단 둘, 바르나바와 바오로입니다. 이 두 사도의 관계와 영적 우정이 참 각별합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신망을 한몸에 받았던 바르나바였습니다.
다음 대목이 바르나바의 인품을 잘 보여 줍니다. 원래의 이름은 요셉이었지만 그 넉넉한 인품에 ‘위로의 아들’이라는 바르나바 이름을 갖게 된 사도입니다. 바오로의 부족한 면을 완전 보완해준 바르나바 사도였습니다.
‘그곳에 도착한 바르나바는 하느님의 은총이 내린 것을 보고 기뻐하며, 모두 굳센 마음으로 주님께 계속 충실하라고 격려하였다. 사실 바르나바는 착한 사람이며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수많은 사람이 주님께 인도되었다.’
참으로 협조적이며 낙관적인 누구에게나 호감을 주는 그리스도의 향기와 같은 바르나바 사도였습니다. 특히 오늘 제1독서에서 보다시피 타르수스에 피신해 있던 바오로를 불러내어 1년간 그와 함께 안티오키아의 복음화를 위해 헌신했습니다. 바로 그 중요한 순간에 바오로를 교회에 복귀시켰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바르나바는 ‘이방인들의 사도’를 교회에 선사한 것입니다.
그러나 성덕의 여정에서도 마찰의 순간이 뒤따를 수 있습니다. 베네딕도 16세 전임 교황은 2007년 1월 31일 일반 알현을 통해 하신 말씀이 잔잔한 감동을 줍니다.
“바오로와 바르나바, 이 두 사람은 두 번째 선교여행의 시작부터 갈등을 겪었습니다. 바르나바가 요한 마르코를 동료로 같이 데려가려 했던 반면, 바오로는 동의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전의 선교여행동안 요한이 자기들을 떠나 함께 일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인들 사이에서도 대립, 불화, 논쟁이 일어납니다. 바로 이런 모습이 저에게 많은 위안을 줍니다. 성인들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성인들도 복잡한 문제점을 가지고 있는 우리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성덕이란 절대 잘못을 저지르지 않고 죄를 짓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성덕은 회심과 참회의 역량 안에서 자랍니다. 성 바오로의 후기 서한에서 마르코는 ‘나의 협력자’로 나옵니다. 그러므로 절대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것이 아니라, 화해와 용서의 역량이 우리를 성인으로 만듭니다.”
참 우리에게도 위안이 되는 베네딕도 16세 전임 교황의 두 성인의 관계에 대한 통찰입니다. 회개한 성인은 있어도 부패한 성인은 없다 합니다. 사실 무소유의 삶보다 더 힘든 것이 공동생활이요 서로간의 관계입니다. 새삼 공동생활의 관계에는 정답이 없음을 봅니다.
서로 끊임없는 회개로 겸손히 자기를 비우고 늘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요, 이런 지칠줄 모르는 不退轉의 용기로 한결같이 파스카의 삶을 사는 이가 진정 성인이요 하늘 나라의 실현이자 참으로 주님의 제자이자 선교사라 할 수 있겠습니다. 바로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파스카의 꽃으로, 성인으로 살게 합니다.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