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마저 적이 된 태종
1407년 7월, 태종이 왕위에 오른지 7년째, 세자가 왕세자에 오른지, 3년째에 태종의 처남이자, 왕세자의 외숙부인 민무구, 민무질 형제가 의금부에 붙잡혀가는 사건이 발생한다. 왜 이 사건이 일어난 원인이 무엇인가? 시간을 거슬러, 1400년, 태종이 왕위에 즉위할 때로 돌아가도록 하자. 1,2차 왕자의 난을 진압하는데, 앞장선 태종이 마침내, 오랜 인고 끝에 마침내 정종의 선위를 받고, 왕위에 올라간다. 이렇게 어렵게 받았던 왕위를 남에게 쉽게 빼앗기지 않게 해야겠다고 생각하여, 왕권강화에 주력하게 된다. 당시 의정부 서사제에서, 육조 직계제로 바꾸어, 모든 정사 결재를 의정부를 거쳐가도록 했던 것을 육조가 직접 임금에게 올리도록 했다.(하지만, 이 제도는 세종 말년에 다시 폐지되고, 의정부 서사제로 환원된다)
하지만, 제도만으로서는 왕권강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왕권에 위협될만한 세력을 모두 제거해야 하는 것.. 하지만, 자신의 왕권에 도전할 만한 세력은 보이지 않았지만, 자신의 세자, 어린 세자인 양녕대군에게는 있었다. 다름 아닌 세자에게 외삼촌이 되는 민무구, 민무질이었다. 세자인 양녕대군은 어렸을 때, 외가에서 오랫동안 지냈으며, 외가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자라왔다. 그러다보니, 외삼촌들과 친하게 지냈고, 민무구, 민무질 등은 태종의 왕비인 민씨와 양녕대군을 보기 위해 자주 궁궐을 출입했다.
하지만, 태종은 이것을 그다지 좋게 보지 않았다. 왕권이 강해지려면, 임금이 강해야 하고, 임금이 강하게 되려면, 사사로운 정을 단칼에 잘라낼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자기가 혹시 죽을지 모를 사후를 대비하기 위해, 외척세력을 무슨 수가 있어도 제거하고, 그 후세 사업을 세자에게 넘겨야 하겠다고 믿었다. 태종은 아직 나이가 40도 안된 상태에서 세자에게 양위(자위를 넘김)하겠다고 충격선언하게 된다. 그러자 온 조정은 발칵 뒤집히며, 궁궐 앞에서 반대 상소를 해야 했다. 헌데 이것은 태종의 숨은 뜻이 있었다. 바로 민무구, 민무질 형제의 제거, 자신을 별로 좋게 보지 않을 처남들을 죽이기 위한 포석이었다.
태종은 당시 원경왕후 민씨와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다. 태종이 정도전의 사병철폐 정책으로 인하여, 궁지에 몰릴 때, 원경 왕후 민씨가 집안에 숨겨놓았던 군사와 무기를 꺼내주며, 이를 독려했다. 그뿐이 아니라, 처남들은 제 2차 왕자의 난, 즉 방간의 난 때 혁혁한 공적을 세워 정사공신까지 책봉된 자들이었다. 당연히 원경 왕후 민씨와 민씨 형제들은 태종에게 걸맞는 대접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태종이 왕위에 오르자, 태종은 왕비 민씨를 멀리하고, 후궁들을 가까이했으며, 민씨 형제들한테 그렇게 생각만큼 대접을 못 받자, 태종에게 불만이 생겼다. 따라서 당연히 자신들과 가까운 세자와 왕자들에게 기대를 걸었으며, 태종은 세자와 지나치게 친한 민씨 형제들을 견제했다.
여러 신하들의 반대상소로 인하여, 결국 선위를 철회한 태종은 1407년 영의정 부사 이회의 상소문을 받았다. "태종이 세자에게 양위한다고 했을 때, 민무구, 민무질 형제가 웃음을 지었으며, 거짓으로 반대 상소를 했다."면서, 탄핵을 상소했다. 원래 무고(남을 음해함)죄가 거짓일 경우, 반좌율(무고된 사람의 죄목에 해당하는 형벌를 되돌려 받는 것)에 의하여, 무고자가 처벌받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정확한 근거 없는 풍문만으로 민무구, 민무질 형제는 의금부에 갇히게 되었다. 옥에 갇힌 지 2일 만에 연안으로 유배되었고, 그로부터 19일후 공신녹권을 회수하게 되고, 4개월 후 공신첩마저 빼앗고 서인으로 만들고 만다. 그 후 여흥으로 다시 유배간다.
그로부터 2개월 뒤 태종은 민무구 형제들의 죄를 인정하는 발언을 하지만, 왕비 민씨, 장모 송씨, 장인 민제의 면목을 봐서 처벌을 완화하려고 했으나, 이미 그들의 죽음은 이미 예정된 수순이었다. 장인인 민제가 죽은 뒤, 그들은 귀양가고서도 대간들의 탄핵(어떤 신하가 잘못하면, 비판하는 제도)을 받았고, 제주도로 귀양간 뒤, 태종의 명으로 자진(남에 의하여 억지로 자살함)하게 된다. 그로부터 5년 뒤 민무휼, 민무회 형제의 옥이 일어나고 만다. 자기 형인 민무구, 민무질 형제가 억울하다며, 탄원소를 올린 것이었다. 하지만, 이 역시, 태종은 묵살하고, 오히려, 그들을 귀양보내어 다시 자진시킨다.
연이은 왕비의 동생들을 죽인 태종, 당연히 원경왕후와 사이가 좋을 리 만무했다. 태종과 원경왕후는 원경왕후가 죽는 1420년까지 거의 남남처럼 지냈다. 전에 KBS<용의 눈물>에서처럼 원경왕후가 죽을 때, 태종이 찾아가 사과했다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런 기록은 조선왕조실록에서 찾을 수 없었다. 왕비인 민씨마저 멀리하며, 왕권 강화에 주력한 태종, 하지만, 그에게는 남모를 시련이 많았다.
양녕대군 폐세자 사건과 세종의 즉위
1418년 4월, 태종이 즉위한지 18년 되는해, 세자였던 장남 양녕대군 이제는 폐세자가 된다. 그 뒤를 충녕대군 이도가 잇는다. 왜 양녕대군은 폐세자가 되는가? 양녕대군, 야사나 실록이나 그의 행적이 괴이하고, 방탕했다고 기록되어있다. 다만 야사에서는 양녕대군이 형제간의 싸움과 외삼촌의 죽음으로 인한 충격으로 세자 자리가 싫어서 일부러 그렇게 했다고 한다. 과연 그랬을까? 1415년, 민무휼, 민무회의 옥이 일어났다. 이 사건이 일어났던 원인은 다름 아닌 양녕대군이었다. 양녕대군이 태종에게 말하기를 "소자가 일전에 민무휼과 민무회가 어머니와 얘기를 하는 것을 들었는데, 아바마마께서 민무구 형제를 죽인 것에 대해 불만을 토했습니다. 그러자 소자가 "그들은 죄가 있어 죽은 것이다."라고 하니, 그들이 "세자께서는 우리 집에서 자라시지 않았습니까?"라고 했습니다."
이 세자의 진술로 조정은 발칵 뒤집히고, 민무휼, 민무회 형제를 탄핵하는 상소가 끊이지 않았다. 민무휼 형제는 의금부에 하옥되고, 그들은 무죄를 주장했지만, 이미 대세는 기울어 그들은 귀양가게 된다. 왜 세자는 외삼촌인 그들을 밀고했을까? 세자가 밖을 자주 돌아다니며, 사고를 치고 다녔기 때문이었다. 태종 14년 정월에 양녕은 밤에 기생을 끌어들이면서 세자궁의 종을 시켜 김한로의 집에서 말을 끌어냈다. 김한로는 다름 아닌 양녕의 장인이란 점에서 문제는 심각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녕은 그해 10월에는 부마 청평군 이백강의 집에서 연회하면서 밤이 깊도록 기생 초궁장을 끼고 공주의 대청으로 들어가 술을 마셔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태종은 세자의 잦은 월장을 막기 위해 재위 16년에는 창덕궁에서 종묘로 통하는 세자전 서쪽에 담장을 쌓기도 했으나 소용없었다.
이 사건으로 궁지에 몰리자, 궁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민무휼의 말을 끌어낸 것이었다. 이렇게 외삼촌을 죽이면서까지 사건을 무마하고자 했으나, 이 사건 이후 양녕대군의 행실은 나아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심각해져만 갔다. 더구나 큰 사건은 유부녀였던 어리를 납치한 사건이었다. 곽선의 첩인 어리를 데리고 가기위해, 양자인 이승을 위협해, 어리를 잡아간 것이다. 어리가 당시 "자신은 병이 있으며, 유부녀이므로 안 된다."라고 했음에도 일으킨 사건은 양녕대군이 세자지위를 잃게 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태종이 아무리 여색을 좋아하는 군주라도, 세자를 용서할 길이 없었다. 세자의 장인인 김안로를 변방에 부차하고, 어리와 양녕대군을 떨어뜨리는 방법으로 이 사건을 넘어가고자했다. 그러자 양녕대군은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려 반항한다. "전하의 시녀는 궁중에 받아들이면서 신(양녕)의 여러 첩은 내보내 곡성이 사방에 이르고 원망이 나라 안에 가득 차게 하십니까? 한나라 고조는 산동에 있을 때 재물을 탐내고 색을 좋아하였으나 마침내 천하를 평정하였으나, 진왕 광은 비록 어질다고 칭하였으나 즉위한 후 몸이 위태롭고 나라가 망하였습니다. 전하는 어찌 신이 끝내 크게 효도하리라는 것을 알지 못하십니까? 이 첩(어리) 하나를 금하다가 잃는 것이 많을 것이요, 얻는 것이 적을 것입니다 "
이 글을 받아본 태종은 탄식하면서 정승을 불러들여 말했다.
"세자가 여러 날 동안 불효하였으나 집안의 부끄러움을 바깥에 드러낼 수 없어서 항상 그 잘못을 덮어두면서 다만 잘못을 뉘우치고 깨닫기를 바랐는데, 이제 도리어 원망하는 마음을 가짐이 이런 지경에 이르렀다. 내가 어찌 감히 숨기겠는가?" 이것이 세자의 폐위를 염두에 둔 말임을 알게 된 신하들은 태종에게 세자폐위를 건의하고, 이에 태종이 윤허함으로써 마침내 양녕대군은 세자자리에서 쫓겨나고, 태종의 셋째 아들인 충녕대군이 왕세자에 올라간다. 그럼 둘째인 효령대군은 왜 올라가지 못하는가? 전교에 보자면, "술을 못한다."는 이유였다.
결국 세자가 된 충녕대군은 두 달 후 왕위에 올라가니, 이 분이 바로 조선 4대왕 세종이었다. 세종이 즉위한 후에도, 양녕대군의 기행은 멈추지 않았다. 유배가 있던 광주에서 담장을 넘어서 도망가, 상왕인 태종과 세종이 방을 붙여서, 상금을 걸고 찾을 정도였다. 그뿐이 아니라, 양녕대군의 기행은 세조 조까지 이르러, 대간들의 탄핵대상이었다.
하지만, 단종을 죽인 세조도 양녕대군에 대해서 쉽사리 건들릴 수 없었다. 최고의 종실어른이었고, 더구나 자신을 지지해준 얼마 안 되는 왕족이었기 때문이었다. 한때의 세자였지만, 풍류왕자인 양녕대군은 결국 1462년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왕위에 올랐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연산군을 능가하는 최악의 폭군이 아니었을까?
대마도 정벌
조선사에서 조선 건국부터 태종 시대까지는 '창업의 시대'라 부르고, 세종시대부터는 '수성의 시대'라고 부른다. 특히 세종 조는 조선역사를 통틀어 문화적으로 가장 융성했던 시기로, 과학이나 문화면에서 가장 획기적인 발전을 이른다. 더구나 함흥 이남에 불과하던 영토를 두만강과 압록강 유역까지 확대시킴으로써 지금의 우리나라 영토를 확정시킨 시대이기도 했다. 세종대왕은 수많은 치적을 남겼지만, 3대 치적으로 구분했다. 첫 번째 치적이 바로 4군 6진을 통한 영토 확장과 왜구 정벌, 두 번째 치적이 집현전을 통한 문화 창달, 훈민정음, 세 번째가 장영실, 이천 등 과학자를 등용한 활자나 측우기, 앙부일귀 등 과학 기술의 발전이다.
태종은 세종에게 선위를 하면서, 병권은 자신이 맡겠다고 했다. 따라서 군권은 태종에게 가있었다. 따라서 대마도 정벌은 세종이 아니라, 상왕이었던 태종의 구상이었다. 대마도는 왜구의 소굴이었다. 고려 말부터 조선 초까지 왜구 침략은 그야말로 절정을 이루던 시대였다. 고려 멸망 중 하나가 왜구들의 기승이라는 점을 들 때, 왜구는 이성계 일파에 의해 위화도 회군의 명분으로도 쓰이기도 했다. 위화도 회군 이후 1388년에는 박위를 중심으로 대마도 정벌이 단행되기도 했다. 조선 초에도 왜구가 극성부려서, 태조 때는 문하우정승 김사형을 시켜, 대마도 정벌을 추진하기도 했다. 하지만, 1418년 기해년에 왜구가 또다시 비인과 해주를 공격해 왔다. 이에 상왕이었던 태종은 대마도 정벌을 단행한다. 이때의 기록을 이수광의 지봉유설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대마도는 전에 신라에 속했던 땅인데 언제부터 왜놈이 차지했는지 알 수 없다. 세종 기해년 5월에 왜선 30여 척이 비인ㆍ해주 등지에 노략질하러 왔었다. 임금께서는 이틈을 타서 무찌르시려고 영의정 유정현을 도통사로, 최윤덕을 도절제사로 명하시고, 몸소 한강까지 납시어 전송하셨다. 그리고 경상ㆍ전라ㆍ충청도 등지의 병선 327척에 17,000명을 내어 65일치의 양식을 가지고 바다를 건너 대마도의 두지포에 다다랐다. 적들은 모두 도망갔으므로 적선 129척을 빼앗고, 적의 소굴 2,000 군데를 불태우고, 적의 우두머리 200여 명을 목 베었다. 이 전역(戰役)은 5월 스무하루에 출정하고 6월 열이레에 닿을 올려서 7월 초사흘에 돌아왔다. … 이로써 조종(祖宗) 때의 병력의 강성함을 알 수 있다. "
위 기록에서 보다시피, 대마도 정벌은 (음)6월 13일에 시작되어, 7월 3일 끝났다. 그렇다면, 한 달도 채 못 되어 끝난 것이었다. 아무리 대마도가 조그만 섬이라고 하지만, 한 달 가량의 정벌로 가지고는 왜구를 정벌하기 힘들었다. 왜 그랬을까? 음력 6월 13일을, 양력으로 환산하면, 7월 하순정도이고, 음력 7월 3월이면, 8월 중순 정도이다. 일본은 그때 태풍이 한창 밀려올 때였다. 원나라가 일본을 정벌하러 갔을 때, 태풍으로 인하여, 큰 피해를 보아, 결국 일본 정복에 실패했던 경험이 있었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그때의 밀려온 태풍을 신풍이라 부르고, 태평양 전쟁 때 자살특공대를 신풍, 즉 가마가제로 불렀던 것이다.
이런 사실을 알고 있던 조선 정벌군은 오랫동안 머물렀다가, 배가 태풍에 의해 피해입어서, 돌아가지 못할지 모를 지경이었다. 더구나 패배한 왜군들이 전열을 가다듬고 반격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에 더 이상 머물러야 별 소득이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더구나 대마도주가 항복을 청해오자, 더 이상 머물 이유가 없었던 조선 정벌군은 이에 응하고, 회군하게 된다. 하지만, 왜군의 뿌리를 완벽하게 소탕하지 못했기 때문에, 조정에서는 이를 소탕해야 한다고 논의가 되었다. 이를 강력히 주장하던 인물은 바로 박은이었다. 하지만, 우의정 의원은 "예기가 쇠하고, 선박의 장비가 파손되었으며, 날씨가 나빠져, 정벌을 무리하게 추진했다가, 실패할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 또한 옳은 말이라, 태종이 박은에게 말하니, 박은은 시기를 놓치면, 안된다면서, 추진할 것을 주장했다. 결론이 나지 않는 판국에 결정적으로 정벌이 재차 추진되는 것이 중지되는 사건이 일어났으니, 바로 정박 중이던 선박이 태풍을 만나 침몰한 것이었다.
대마도 정벌로 인하여, 백성의 피해는 심각했다. 한창 농사철이던 음력 6월에 정벌을 추진했으니, 농사를 제때 짓지 못하여, 흉년이 들었다. 뿐만 아니라, 염전이 제대로 되지 않아서, 조정에서는 정벌군으로 참전한 사람에게 염전을 받지 않도록 명을 내렸다. 백성은 전쟁에서 승리해도, 패배해도 피해보는 것은 매한가지이다. 조선 역사에서 거의 드문 정벌의 역사중 하나인 대마도 정벌, 그 뒤에는 백성들의 고통과 눈물이 숨어져있는 것이다.
첫댓글 .
즐감
한 번에 읽어보는 조선사[3]를 읽으면서
양녕대군 폐세자 사건과 세종의 즉위 및 대마도 정벌에 대하여
공부 잘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