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소희는 보이지 않네. 소희가 시장 모퉁이 닭집 효임에게 다녀간 게 지난 토요일이
니까 오늘이 목요일 ······벌써 닷새째야.
소희가 결코 뚱뚱하지 않다는 걸 효임이 증명한 뒤, 소희가 효임네 가게에서 먹어치운 닭
만 해도 계란으로 치면 서너 판은 될 거야. 효임이 단골을 확보하기 위해 소희의 날씬함을
증명한 건 아니야. 그냥 그러고 싶어서였어. 160센티미터의 키에 47킬로그램 나가면서 자기
가 너무 뚱뚱하다고 굳게 믿는 여자가 있을 때, 굳이 거울을 찾아내 그 앞에 세우고 싶어하
는 사람이 있다면 그게 바로 효임이야. 그 오지랖 안 잘라 내면 평생 그 모양으로 살 거라
고 평판이 난 효임이 시장 입구 도서 대여점의 우수 고객이라는 거 아직 말 안 했지? 대여
점 주인 이슬이 엄마는 효임에게는 대여료를 100원씩 낮게 쳐 줘. 이따금 분수에 넘는 걱정
도 하지. 닭 팔아서 우리 이슬이 학원비 댈 일 있냐고.
그날도 효임은 의자에 앉아 계란 공장이며 분식집 등의 스티커가 덕지덕지한 벽면에 머리
를 기대고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를 읽고 있었지. 글썽글썽, 코끝이 찡하게 매워지며 눈
물이 비어져 나오려 할 때, 효임은 우선 눈을 흡뜨고 몇 번 깜짝여 말리려 해보지. 그럴때마
다 눈에 띄는 건, 누릿한 기름 냄새에 전 벽에 붙은 액자야. 네 처음은 빈약하나 네 나중은
창성하리라. 닭집을 개업할 때 누군가가 사다 준 액자. 7년째 같은 자리에서 임대료에 허덕
이다가 문득 액자에 눈이 가면, 어떤 때엔 그 거창한 축원에게 조롱당하는 기분이 들기도
해. 20대 중반부터 음습한 시장에서 보낸 7년은 저런 말로 조롱당할 만큼 만만한 건 아니야.
튀김 기름에 동동 뜬 부스러기를 거름망으로 걷어 내거나 속이 톡 밴 양배추를 송송 채 썰
던 효임이 낯선 눈으로 가게를 둘러볼 때가 있어. 녹꽃을 피운 쇠 파이프 의자와 탁자 몇
개인 실내, 낡은 냉장고를 때맞추듯 위윙, 소리를 내기도 해, 그 소리가 이어지다 한순간 끊
어져 정적에 잠길 때, 통나무 도마 위에 놓인 무쇠 칼이 확대되어 눈에 들어오지 않더라도,
효임은 죽음에 성큼 다가선 느낌을 받아. 유리문 한 겹 바깥에는 사람들이 서로 몸 부딪치
며 오가고 시장 모퉁이 카세트 장수의 리어카에서는 삼바삼바삼바삼바···경쾌한 리듬이
들려 오는데 혼자 빠져든 정적. 얼마인지 모르게 갇혔던 그 정적에서 깨어나는 순간 온몸
쓸어 내리는 한기, 그 한기를 털어 내려 효임은 도서 대여점으로 가곤 하지.
여자는 끝내 남자를 혼자 보내는군. 제 인생을 한 번 들었다가 결국 제자리에 놓고 마네.
하지만 전 같지는 않겠지. 오래 한 곳에 박혀 있던 돌을 들었을 때, 그 바닥에 고여 더 짙어
진 흙빛깔. 여자의 어딘가에 그런 빛깔이 고일 거야. 남자의 차가 멀어지는 걸 보면서 여자
가 울고, 눈거풀의 둑을 범람한 효임의 눈물이 투툭, 책장에 떨어졌어. 눈물방울에 갇힌 글
자가 진해지더니 종잇장이 얼룩지고, 뒷면의 글씨가 은은히 배어 나왔어.
소희가 들어선 건 바로 그때야. 눈물 어릉진 효임의 눈엔 소희가 무언가를 질질 끌고 오는
것으로 보였어. 효임은 무안해져 눈을 씩 훔치며 보았지. 그건 침묵이었어. 하룻밤 사이에
철든 아이들이 갇혀 버리는 묵중함.
"부탁인데·····나 쫌 안아 줄래?"
채 마르지 않은 소설 속의 눈물과 소희의 침묵 사이에 끼인 효임은 아주 느리게 몸을 일으
켰어. 뭉클, 빈약한 몸매에 비해 탄력 있는 소희의 젓가슴. 아기에게 젖을 빨리거나 옷맵시
를 낼 때보다는 남자의 손에 쥐일 때 더 행복할 젖가슴이야.
"그 사람 부인이 다녀갔어. 나더러 쓸개 빠진 여자래. 그런다고 자기 남편이 가정을 포기
할 줄 알았냐고. 내가 쓸개 빠진 년이긴 하지?"
효임이 독신 사진작가와 유부녀의 운명적인 사랑과 이별을 쫓느라 한숨을 쉬던 바로 그 무
렵에, 거기서 10미터도 안 떨어진 민정 혼수방에선 유부남 사진기자와 바느질하는 독신녀의
사랑이 조종에 울리고 있었던 거야. 그놈의 종소리·····효임은 엉뚱하게 종소리를 원
망하지.
"성당 다닌다며? 성당에선 어떤 때 종을 울려?"
깍뚝썰기로 잘게 썬 무를 사카린 탄 물에 담그는 효임 앞에서, 시키지도 않았는데 무청을
쓸어모으며 소희가 다가앉았어. 머무적거리는 손길, 슬몃 비끼는 눈, 그런데도 온몸에 분분
한 꽃가루를 효임은 알아보았어. 또 어떤 놈에 마음이 팔려서 그러나. 그래, 그렇게라도 행
복했으면 됐지, 하고 마음을 돌리다가도, 끓는 기름에 닭을 집어넣은 것처럼 효임의 속이 부
글부글 끓어오르는 걸 어쩌겠어. 끓어오르는 속을 가까스로 맑히면, 꽃술 없이 꽃잎만 오롯
한 꽃 한 송이를 떠오르곤 하지.
효임에겐 세 살 위인 바람둥이 오빠가 있어. 다감하고 잘생긴 오빠야. 바람둥이의 진실은,
자기가 만나는 모든 여자에게 만나는 동안에 최선을 다한다는 거야. 만나는 여자마다 다 다
른 향기로움으로 다가오는데 어쩌겠어. 문제는 여자들이야, 여자들은 그 최선이 오직 자기
한 사람에게만 향한 걸로 알거든. 나를 사랑하나요? 라고 묻지, 나말고 또 누구 사랑하는 사
람 있어요? 라고 묻지는 않잖아.
효임을 찾아와서 울고 간 여자도 그들 중의 한 사람이었어. 식구들이 이민 가는데 오빠가
남으라고 한마디만 하면 남겠다고 하던 여자. 그래도 잡는 사람이 없자 울면서 태평양을 건
너간 그 여자는 자기의 눈물을 지켜본 효임에게 편지를 보냈지. 뭐라고 썼는지는 기억에 없
지만, 그 편지를 보았을 때의 아득함은 효임에게 지금도 선연해. 줄 안 쳐진 편지지 맨 앞머
리에 효임 씨에게, 라고 쓰고 나서 그 아래 그려진 작은 꽃. 수술도 암술도 없이 다섯 장의
꽃잎만 오롯했어. 그 꽃을 보는 순간 효임은 대번에 알아차렸지. 백지를 앞에 두고 멍울지는
말, 서리서리 떠오르는 그리움과 회한을 삭이려는 몸짓, 그 안간힘을 말 대신 꽃을 그리게
했으리라 는걸. 그 안간힘이 피워 낸 꽃이라 는걸.
종소리를 굳이 강조하는 소희의 얼굴엔 꽃술이 화사하고 꽃가루가 난 분분하지. 이런 여자
는 꽃술 없는 꽃 따위는 그리지 않을 거야. 효임은 에두르지 않고 받아 버리지.
"성당 앞에서 누굴 만났는데?"
"응, 사진 찍는 사람. 사진기자. 근데 그 사람하고 눈이 마주치는 순간에 갑자기 성당에서
종이 울리는 거야. 왜 하필 그때 종일 울렸을까."
제 안에서 아직도 공명하는 종소리를 듣느라 소희의 눈이 투명해졌어. 효임은 짐작했지, 이
번 연애가 끝날 때까지, 종소리를 내내 소희의 안에서 우려하게 울리겠군. 때로는 태풍 속에
놓인 듯 거세게 , 때로는 골풀 쓸어 내리는 바람결의 섬세함으로. 연애가 끝나는 순간에는
묘지에서 듣는 종소리처럼 황량하게.
마침내 사랑의 조종 소리를 들은 소희의 가슴이 들먹였어. 이제 소리내어 울 차례야. 연애
가 끝날 때마다 정해진 절차라서, 효임은 소희의 눈물을 맞을 만반의 준비를 했지. 효임의
어깨춤에 습기가 느껴지고 나면 소희는 냅킨을 뽑아 눈물 콧물을 닦으며 비통하게 소리내어
울지.
휴지 더미를 수북이 쌓아 놓고, 쓸개뿐 아니라 내장까지 다 빼버린 걸음으로 허전거리며
걸어 나간 소희는 다음날부터 결근이야.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를 소희의 무단 결근을 민정 한복집 주인인 민정 엄마가 감내하는 건
소희의 바느질 솜씨가 워낙 빼어나서야. 소희가 꿰맨 한복을 다려서 펴 놓으면 어디 한 군
데 들뜬 데 없이 바닥에 착 달라붙는대. 칭찬에 인색한 민정 엄마가 "바느질 솜씨 하나는
인간 문화재급"이라고 말한 걸 보면 알 만하지. 오죽하면 그 옆의 범양 한복집 주인이 저
맵짠 손끝만 보쌈해 오고 싶다고 했을까. 범양 한복집의 쓰린속을 조금 달래 준 건, 잊을 만
하면 무단 결근 하는 소희의 습성이었어. 그 바닥엔 늘 남자가 있었지.
이틀 전부터, 효임은 발탄 강아지처럼 가방 가게를 지나며 혹 장씨가 무얼 알아채지 않았
을까 하고 기색을 살피거나 혼수방 앞을 지나면서 기웃거리게 되었어. 현란하게 드리워진
한복 천 아래 앉아 있는 민정 엄마에게 오늘도 연락이 없었나 물어 볼까 하다가 효임은 슬
그머니 지나쳤지. 소희의 결근에 자기가 기여한 바도 만만치 않았거든.
"책은 왜 그렇게 열심히 읽는데?"
책이라고는 미장원에서 읽는 여성지가 전부인 소희에겐 효임이 신기했나 봐. 어떤 날, 효임
이 잡다한 상식을 쉽게 풀이한 책 같은 걸 넘기고 있으면 소희는 거의 존경스러운 눈빛이
되기도 해.
"심심하니까 읽지. 안 그러면 멍하니 앉아 있어야 하는데·····."
점심때와 저녁때 사이, 바쁜 시간을 비켜서 술을 한잔 하려는 시장 사람이 없는 한, 탁자는
대개 비어 있게 마련이야. 생닭을 사가거나 닭을 튀겨 가는 사람을 맞고 보내는 사이사이에
남는 효임의 시간을 죽이는 데엔 책 읽기가 그만이었어.
"심심하다고 다 책 보나? 그럼 글도 써? 수필이나 일기 같은 거?"
"일기는 무슨. 이 나이에 일기 쓸 일 있냐? 밤이면 씻고 자기도 바쁜데, 자긴 그런 것도
써?"
"아니·····하지만 일기를 열심히 쓰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지 궁금해서. 우리 남
편이 그렇게 열심히 썼거든. 중학교 때부터 쓴 일기를 모아 두었는데, 죽기 전까지도 꼬박꼬
박 쓰데. 그거 태워 버리지도 못하고 두긴 했는데····· 책 읽기 좋아하니까 언제 한번
보여줄까?"
"미쳤어. 남의 남편 일기를 내가 왜 보냐?"
얼결에 밀쳤지만 말하는 순간 효임은 후회스러웠어. 소희보다 여덟 살이나 많았다는 소희
의 죽은 남편이 어떤 사람인지 효임은 처음부터 궁금해했거든.
소희가 처음 효임의 가게에 들어서던 날은 및십 년 만인가라는 무더위가 휩쓸던 몇 년 전
여름이었어. 자고 나면 몸에 땀띠가 솟고 가슴팍 고랑으로 땀이 줄줄 흘러내렸지. 기름 솥만
봐도 더운 날 해질 무렵에, 땀이라고는 한 방울도 안 흘린 얼굴로 여자가 들어섰어. 서른이
채 안 되었을까. 화장기 없는 얼굴이 초라했어.
"저 닭좀 튀겨 주세요. 여기서 먹고 가도 되죠?"
저녁 무렵에 혼자 와서 통닭을 먹는 여자는 흔치 않아서, 효임은 여자의 얼굴을 좀 유심히
보았어. 가끔, 입덧을 하던 여자들이 장을 보러 와서 그렇게 먹고 가는 경우는 있거든. 어떤
땐 시켰다가 막상 튀겨내 오면 튀김기름 냄새가 역하다고, 싸들고 가는 경우도 있지. 여자는
부석부석하고 힘없어 부였어.
"앉으세요."
효임은 벽에 붙은 선풍기 바람이 가는 쪽의 의자를 꺼내 놓으며 말했지. 여자는 다소곳이
앉았어.
"반 마리도 되지요?"
반 마리는 안 되리라는 걸 미리 알면서도 우기는 눈이었지. 유아적인, 꾸중들을 걸 겁내는,
그리하여 제 안의 겁먹음에 대한 반발로 자주 깜짝이는 눈. 무슨 부탁이든 거절하지 못하게
만드는 사람이 있는데 여자도 그랬어. 그렇게 엉기는 게 너무 환해서 오히려 효임은 거절할
수 있었어.
" 반 마리는 안 돼요. 먹을 만큼 먹고 나머지는 싸드릴게요. 냉장고에 두었다가 전자 레인
지에 데워 드시면 좋아요. 아니면 반은 튀기지 말고 드릴 테니까 가져가서 요리하시든가."
"어떡하나. 그럼 한 마리 튀겨 주세요."
여자는 효임이 마늘 소스와 후추가루를 끼얹어 낸 튀김닭에 손대기 전에 묵묵히 바라보았
어. 무구한 식탐과, 그 식탐을 부리는 자기에 대한 경멸 같은 게 여자의 얼굴에서 괴롭게 뒤
섞였어. 그러더니 먹기 시작하더군. 무슨 의식을 거행하는 사람처럼, 자기가 지금 먹고 있는
게 닭고기가 아니라 거룩한 음식인 것처럼. 그런 여자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효임이 그 순간
에 떠올릴 수 있었던 건 "넋 나간 여자"였어. 효임이 냉장고에서 사이다를 꺼내어 한 잔 따
라 내민 건 아마도, 그 나가 버린 넋을 톡 쏘는 사이다의 기포가 되돌릴지도 모른다는 기대
가 이니었을까.
"고맙습니다."
사이다는 효임이 기대한 효과를 거두었어. 사이다를 한 모금 들이켜고 입가를 냅킨으로 닦
은 여자는 효임에게 흐릿하게 웃어 보이며 입을 땠어. 그때쯤엔 여자는 알뜰히 발라 낸 뼈
를 접시 가장자리에 모아 놓고 있었지. 뼛더미가 남은 고기보다 수북했어. 그런데도 먹는 속
도가 여전한 걸로 보아 닭 한 마리가 결코 양에 넘치는 건 아니었어.
"저 너무 잘 먹죠? 그래서 통 살이 안 빠지나 봐요."
살? 효임은 눈으로 여자를 훑어 내렸어. 소매 없는 티셔츠에서 비어져 나온 여자의 팔은,
미끈하기가 왜무 같다고 채소 가게 민지 엄마가 감탄하는 효임의 팔보다 가늘면 가늘었지
두껍진 않았어. 화장기 없는 볼은 정면에서 보면 넓적한 턱뼈 덕분에 통통해 보였지만, 옆에
서 보면 깎인 듯 살이 없었어.
"아가씨가 뺄 살이 어디 있다고·····내 보기엔 더 쪄야겠구만."
"아녜요, 저 뚱뚱해요, 그런데 고기가 자꾸 먹고 싶어지니 탈이에요. 그리구 ·····저
아가씨 아니에요."
그날, 나가다 말고 여자는 말했어. 저기요·····근데 저 닭 말이에요. 꼭 사람들 같아
요. 여자가 가리킨 건 입구에 놓인 진열장을 겸한 냉장고였어. 삼계탕 거리를 찾는 사람이
많아서 닭을 조금 많이 받은 효임은 닭을 모로 뉘어서 차곡차곡 쟁였거든. 털 벗겨 말간 살
빛에 오톨거리는 살갗, 접힌 채 끼워진 날개는 앞발을 보듬는 듯하고, 포개진 다리는 앞 사
람 발에 얹은 발 같긴 했어. 닭은 고단한 하루를 넘기고 단칸방에 끼여 자는 식구들 같았지.
천연스럽게, 잘린 목에서 긴 한숨이라도 한 번 내끼얹고 몸을 뉜 듯. 여자가 간 뒤 진열장을
바라보던 효임은 문득 깨달았어. 홀로된 여자구나. 효임이 여자의 뒷모습을 좇았을 때, 여자
는 민정 혼수방으로 들어가고 있었어.
"저처럼 혼자 와서 닭 한 마리 다 먹는 여자 없죠? 난 왜 이러는지 몰라요."
다름 번에 왔을 때에도 여자는 자기가 잘 먹는다는 사실에 혐오를 느끼는 얼굴이었어. 그
래도 여자는 먹는 틈틈이, 민정 혼수방에 새로 온 바느질하는 사람이라는 것, 효임보다 두
살 아래라는 걸 효임에게 알게 해주었지.
여자가 네 번째 들르던 날, 효임은 여자에게 물컵과 함께 종이를 들이밀었어. 대여점 이슬
이 엄마의 묵인 아래 낡은 여성지에서 떼어 낸 표준 체중표. 다들 모이를 쪼아 먹느라 정신
없는데 혼자 시궁창쪽으로 아기작거리며 다가가는 병아리 한 마리에 눈 못 데는 어미닭의
마음 같은 거였어. 효임이 거스름돈을 찾는 동안, 문간에 걸린 거울을 보던 여자, 소희는 돈
을 건네 받으며 입을 열었어.
"그래요, 어쩌면, 어쩌면 저는 뚱뚱하지 않은지도 모르겠어요. 그래요. 어쩌면 날씬한 축에
들지도 몰라요. 그래도, 그러면 뭐 해요. 저는 안 그런 것 같은데·····."
"도대체 새댁 보고 누가 뚱뚱하다고 그랬어요?"
"남편이오. 저 새댁도 아니에요. 우리 남편, 죽었어요. 저처럼 밥만 축내는 여자 만나서 고
생만 하다 갔어요."
그 남편이 남긴 일기를 효임이 보게 된 시장 상조회의 야유회날이었어. 소희가 수줍어하면
서<만남>을 부르고, 단비를 할머니에게 맡긴 홀아비 장씨가 그런 소희를 장마 직전의 혼몽
한 열기를 담은 눈으로 바라보던 날. 야유회가 끝나자 장씨는 2차를 제의했어. 소희는 몸을
뺐지만, 장씨의 눈이 내내 소희 언저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걸 본 효임이 붙잡았어.
"이소희 씬 그 좋은 목청으로 혼자 늙을 거라예?"
목청과 혼자 늙는 게 어떤 상관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 모르지만, 장씨는 소희의 잔에 술을
따르며 물었어. 아마 저녁 무렵의 공원에서 남자에게 노래를 들려주는 여자, 또는 아기를 업
고 짐짓 고즈넉한 목소리로 자장가를 부르는 여자를 연상했나 봐, 아내가 유방암으로 숨지
기까지, 병석에서 보인 장씨의 정성이 시장 안에 파다할 정도로 순정파였으니까. 오죽하면
민지 엄마가 장담을 했을까. 저 사람, 단비 엄마 가고 나면 뗏장에 풀도 마르기 전에 재혼할
거라, 저리 정 많은 사람이 혼자 우예 살겠노. 혼자 3년 넘기면 내 손가락에 장을 지진다.
민지 엄마의 손가락을 위기에 빠뜨린 줄도 모르고 3년을 넘긴 장씨가 언제부터 소희를 운명
이라고 느꼈는지 모르겠어.
"혼자 늙긴요, 데려가 주겠다는 남자 있으면 가야지요."
"어떤 남성형을 좋아하는데요?"
"어떤 형이라면, 사장님이 그런 사람 데려다 주실래요?"
당돌한 말투였어. 어둑신한 조명 아래, 효임이 들여다보는 술잔속에 조명이 반원의 빛무리
를 퍼뜨렸지. 빛을 헤집을 듯 당돌한 소희의 말투가 낯설어 효임은 은근히 당황했는데, 그럴
수록 장씨는 쩔쩔맸지. 그날, 연거푸 잔을 들이켠 소희는 몸을 가누기가 힘들 정도로 취했
어.
소희가 세들어 사는 집은 큰길에서 조금 들어간 골목에 있었어. 본채에 덧들인 방. 화장실
은 방 안쪽에 붙어 있었어. 소희는 변기를 끌어안고 어깨를 움찔거리며 토했어. 토하고 나서
누웠다가 다시 토하고. 건건이는 다 토해 버려서 이제 분홍빛에 가까운 신물만 흘리던 소희
는 토사물의 질긴 점막처럼 늘어지게 말했어.
"나 이래봬도 남편 잡아먹는 년이라구우·····저 화장대 아래 좀 열어 볼래? 글세 얼
어 보래니까·····."
소희는 손을 허우적거렸어. 달라붙는 낙지를 떼어 내는 것처럼 힘겨운 손짓이 술기운 때문
이라는 걸 알면서도 왠지 효임은 문을 열기가 꺼려졌어. 소희의 화장대는 너저분했어. 제대
로 닫히지 않은 크림통 뚜껑을 닫고 나서 효임은 화장대 아래 문을 당겼어. 돌돌 뭉쳐진 머
릿수건, 드라이어 따위를 헤치자 뚜껑 없는 내의 곽 안에 담긴 공책이 보였지. 이거? 효임이
물으려고 돌아보니 소희는 이미 곯아 떨어져 있었어. 반쯤 벌리고 잠든 소희의 입에서 나는
단내와 시큼한 냄새는, 보일러를 올려서 훈기가 돌기 시작한 방 공기를 섞여들었지. 효임은
맨 위에 놓인, 사무용 다이어리처럼 비닐 커버가 덮인 공책을 펼쳤어.
35세, 36세, 37세, 48세·····.
서른다섯 살부터 일흔다섯 살까지, 일련 번호로 숫자가 씌어 있고, 그 해에 달성할 목표들
이 적혀 있었어. 35세의 가장 큰 과제는 넓은 아파트로 이사하는 거였고, 40세엔 부장이 되
는 거였어. 참 단정한 글씨였지. 펜습자 공책에 연습한 글씨를 보는 것 같았어. 그 글씨의
주인공은 인생도 그렇게 자로 잰 듯이 살려 했던 것처럼 보였어. 남의 남편, 그것도 죽는 사
람의 일기를 읽는다는 석연치 않음을 호기심으로 억누르며 효임은 넘겨 갔어.
오늘 소희를 때렸다. 친구들과의 모임에서 소희가 나섰다. 번번이 타일렀는데 납죽납죽 술
잔을 받아 마시다니. 집에 돌아와서 지적했더니 말대꾸했다. 나도 모르게 때렸다. 지금은 밤,
소희는 내 곁에서 오그리고 잠들어 있다. 소희는 모를 것이다. 저는 때리는 내 손길이 사랑
이었음을. 제 행동을 단정하게 단련시켜 저를 빛나게 하려는 것임을.
동네 여자들과의 쓸데없는 수다에서 얻을 수 있는 게 무엇이겠는가. 그 시간에 내가 사다
준책으로 교양을 쌓을 생각은 안 하고. 오늘도 돌아와서 확인해 보니 겨우 두 페이지 읽고
말았다. 홧김에 책을 내던졌다.
사소한 일에서의 불성실이 나를 화나게 한다. 내 앞에서 발을 뻗고 앉는 버릇을 소희는 아
직도 못 고치고 있다. 텔레비전 보면서 눕는 버릇은 고쳐졌지만, 아내로서의 예의를 다해야
사랑받을 수 있다는 걸 언제 깨달을 것인지.
첫 권의 절반쯤 읽던 효임은 머리가 지끈거리고 가슴이 두근거려서 내의 곽을 밀어 넣고
누웠어. 땅바닥에 등이 닿는 순간 효임의 입이 저절로 뱉어 낸 말은 썩을 놈!이었어. 욕을
잘 못하는 효임으로선 한껏 생각해 낸 욕이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니 욕도 못 되는 것이, 욕
을 먹을 사람은 이미 땅속에서 썩고 있더군. 효임은 잠든 소희의 들을 가만히 쓸어 보았어.
머리맡의 화장대에 놓인 일기장이 소희의 꿈자리를 밟는지, 소희는 이따금 허우적거렸어. 썩
을 인간, 그래서 소희가 그렇게 주눅이 들어 있었구먼, 한 사람에게 콜타르처럼 끈적이며 퍼
부어지는 말의 폭력, 소희의 천진성은 남편의 일기에서는 미숙함이 되었고, 남에게 베풀고
싶어하는 마음은 무분별이 되었으며, 소희에게 다정한 이웃 여자들은 다 생각이라고는 하나
도 없는 여편네들이 되었어. 그날 밤 효임은 결심했어. 죽은 남편의 제단앞에 납작 엎드린
소희를 일으켜 걷게 하겠노라고.
"자기 피부가 원래 그렇게 고왔어? 어쩜 그렇게 환하니? 입술에다 연분홍 립스틱만 바르면
끝나겠다."
가게 안으로 들어서는 소희를 보며 효임은 탄성을 내질렀어. 사람들 앞에 두고 요란스럽게
칭찬하는 건 효임에게 제 낯이 먼저 붉어지는 일이었지만, 효임은 속에서 치받는 메슥거림
을 꿀꺽 삼켰지. 당분간 지침서로 택한 "자신감이 인생을 좌우한다"는 요지의 책을 슬며시
덮어 냅킨을 놓은 선반 위에 치우면서 효임은 자신에게 말대꾸했어. 소희가 고운 건 사실이
잖아? 그 책에 나온, "칭찬은 자신감을 북돋워 준다"는 항목의 실천에 소희는 윗몸을 뒤트는
수줍음으로 대답했어. 저렇게 천진하고 예쁜 사람을····안 하던 짓을 하느라 속으로 머
쓱해 있던 효임은 용기백배했어.
구역질나는 일기장을 태우게 만들겠다고 결심한 다음부터, 효임은 소희에게 지나가는 말투
로 남편이란 작자에 대해서 물었어. 일기를 읽힌 걸 잊었는지, 소희는 짧게 대답했어. 좋은
사람이었어. 입을 다무는 소희의 눈에서, 효임은 입만 떼면 " 좋은 사람"을 뒤집어 말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읽어 냈지.
"그럼 자기 나쁜 사람이고?"
소희는 그 말을 받았지. 낚싯밥인 줄도 모르고 날름 삼킨 거야.
"그럼, 우리 남편이 나한테 해준 거 절반도 못 했어. 생각하면 나 나쁜 년이지."
"남편이 자기한테 어떻게 잘해 줬는데?"
"나같이 못생기고 성질 못된 여자를 우리 남편 아니면 누가 데리고 살았겠어?"
"열녀 났다. 그 남편이 어떻게 잘났는데? 얘기나 들어 보자."
소희의 눈이 깜짝이면서 고개가 한쪽으로 슬몃 기울기 시작했어. 나이를 어디로 먹었는지
무구한 얼굴, 결코 못생기지는 않은 얼굴, 선생님 앞에서 손을 내밀고 매가 떨어지기를 기다
리는 아이의 주눅들림. 가슴이 찡해졌지만 효임은 다그쳤어.
약국집 딸 소희는 그만그만한 여자 대학을 나와 집에 있었어. 대학 시절, 친구들은 소희를
놀리곤 했지. 너는 대학에 다니는 게 아니라 유치원에 다니는 애 같다고. 강의 시간에 빠지
면 큰일나는 줄 알고, 한여름에도 스타킹을 꼭꼭 챙겨 신고 다니던 소희는 같은 과 친구가
"너 버진이니?"라고 물었을 때 버진이 무슨 뜻인지도 몰랐을 정도로 맹한 데가 있긴 했어.
제약 회사 영업사원이던 소희의 남편은 소희보다 여덟 살이나 많았어. 엄격하던 소희의 아
버지, 그런 아버지 앞에서 굽실거려야 하는 처지인 그가 소희에게는 딱해 보였어. 나이 차가
너무 나는 데다 남자에게 부모가 안 계시다는 것, 소희 아버지가 알아본 바에 따르면 처세
에 지나치게 빈틈이 없다는 것 때문에 결혼은 반대에 부딪혔어. 밖에서 그렇게 완벽한 사람
은 집에선 잘 못 한다는 게 아버지의 지론이었어. 식구들이 한 사람도 빠짐없이 반대하는
바람에 소희의 모성애는 집과의 인연을 끓고라도 결혼하겠다고 고집할 만큼 비대해졌어.
결혼하고 나자, 남편은 처가에서 받은 수모를 하나하나 되살려 가며 "귀엽게만 자라서 제멋
대로인" 소희를 가르쳤어. 집안의 모든 물건은 정해진 자리에 놓여야 했고 소희는 남편 앞에
서 꼭꼭 무릎을 끓고 앉아야 했어. 여자가 살이 찌면 돼지비계 냄새가 나는 것 같다는 남편
의 말에 소희는 먹는 즐거움을 잃었어. 그런 것 오리혀 견딜 만했어. 그냥 저를 죽이고 남편
이 원하는 대로 맞춰 가면 되었으니까. 사람이 있고 없고에 따라 달라지는 남편의 태도에
낑겨서 어리둥절한 것에 비하면 쉬웠다는 얘기야.
소희의 남편은 능력 있고 성실한 사람이었어. 사회 생활에서 나무랄 데 없는 모범생이었지.
어쩌다가 친구들의 모임에 나가면 그렇게 소희에게 극진할 수가 없었어. 소희 앞으로 찬그
릇을 당겨 놓고, 냅킨을 뽑아서 그 앞에 놓아주고, 가끔 남들이 보는 앞에서 사랑스러워 못
견디겠다는 듯이 뽀뽀도 하고, 소희가 실수하면 귀엽다는 듯이 보면서, 우리 집사람이 원래
이렇답니다, 감싸주고, 그때마다 소희는 어리둥절해서 인형처럼 웃어야 했지. 저렇게 능력을
갖춘 사람이 자상하기까지 하니 얼마나 좋을까 하는 여자들의 감탄사를 들으며.
남편은 원래 이렇게 자상한 사람이었어, 그런데 내가 못되게 굴어서 집에선 그렇게 무섭게
할 수밖에 없었나 봐. 나는 왜 그럴까.
여자들의 찬탄 앞에서 비타민이 많다는 설명을 곁들여 남편이 입에 대어 주는 키위 조각을
받아 삼키며 소희는 반성했지. 키위는 신물처럼 입 안에 시큼한 맛을 남겼어.
모임이 파하고 집으로 올 때면 남편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말했어. 그렇게 천박하게 웃
지 않을 수 없냐고, 먹는 태도도 품위라고는 하나도 없는데다 자연스럼지 못하고 쭈뻣거린
다고, 당신을 위해서 말하는 거야. 딱딱한 남편의 목소리에 소희는 주눅들었어. 그리고 나서
소희는 자신을 죽여 갔지. 립스틱 하나도 제가 좋아하는 색을 살 수 없었어. 제가 좋아하는
연분홍을 집어 들었다가도 당신은 여전히 그런 천박한 색깔을 좋아하는군, 하는 남편의 목
소리가 귀t전에 들려서 힘없이 놓아 두고, 사람들에게 말을 걸려다가도 문득 왜 그렇게 나
서느냐고 책잡을 남편이 보여서 입을 꾹 다물고 있었지.
"간암으로 뚱뚱 부어 오른 배로 병원에 있으면서도 남편은 날 걱정했어. 내가 자기 없이
어떻게 살아나갈지 암담하다고. 내가 생각해도 못살 것 같았어. 그런데 나, 이렇게 잘살고
있네. 신기한 일이야. 우리 남편 같은 사람이 자기 몸에 생긴 병을 모르고 있었다는 것도 신
기하고."
썩을 인간. 저 없는 세상에서 소희가 잘살 거라는 생각을 하면 견딜 수가 없었겠지. 사과를
깎으며 듣던 효임은 자기가 껍질을 칼로 저며 대고 있는 걸 발견했어.
소희가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일깨우려는 효임의 노력은 나날이 효과를 보았어. 멀쩡한 제
눈 놔두고 남편의 눈으로 자기를 본 소희였으니, 효임의 눈으로 자기를 보는 것도 더 쉬웠
을 밖에. 한복을 만들고 남은 자투리 천으로 조각보를 만들어 구청에서 주최하는 공예전에
서 상을 탄 것도 소희에겐 힘이 되었어. 바늘땀을 박고 나서도 남편의 눈으로 챙겨 보고 마
음에 안 들면 뜯어서 다시 박아 버릇했다니까 오죽 꼼꼼했겠어.
남편이 들이민 거울을 치우고 효임이 내민 거울을 바라보면서 나날이 피어난 소희는 그 천
진한 매력을 햇무리처럼 퍼뜨리기 시작했어. 해가 빛나면, 그 볕뉘를 쬐려 드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지.
"그래서 얼굴이 이렇게 환해졌구나. 누군데?"
괜한 붕어빵을 들고 와서 머뭇거리던 소희가 사실은·····하고 입을 열었을 때, 효임
은 장씨를 떠올렸어. 소희와 효임이 친하다는 걸 안 뒤로 전에 업이 튀김닭을 안주로 술 한
잔하는 취미를 붙인 장씨였으니. 여기 사람은 아니야. 소희는 효임의 기대를 단박에 무너뜨
렸어. 사내에 대해서 들으면 들을수록 다디달던 단팥이 효임의 혀끝에 씁쓸했어. 채 녹지 않
은 사카린 덩이를 씹었나 봐.
소희는 제 역할을 비련의 여주인공으로 고정시켜 놓은 것 같아. 온몸을 내던져 헌신하고
헌신짝처럼 버려지는 여자. 첫 연애부터 일관된 소희의 안목은 번번이 효임의 입맛을 떨어
뜨렸어. 소희를 품고 잔 새벽, 소희가 끓여 놓은 아침상을 외면하고 마누라가 차려 주는 아
침 식사시간에 늦을까 봐 조바심치며 나가는 남자, 만날 때마다 소희에게 술값에 차비까지
당당히 요구하는 남자·····몇 번의 연애를 지켜본 뒤에야 효임은 깨달았어. 그 남자들
이 원래 그런 게 아니었어. 소희가 그들을 그렇게 만들고 있었어. 소희 속에 있는 헌신하고
싶은 열망이 하도 강해서, 남자들은 소희에게 무언가를 요구하면서 시혜를 베푼다는 느낌을
받았을 거야. 벽에 부딪혀 멍들고도 벽보다 자기를 원망하는 여자가 있으면 신기해서 자꾸
멍들게 하고 싶은 사람도 있는 법이거든.
멍든 채 나대는 소희를 지켜보면서 그에 못지않게 멍드는 이가 있으니 장씨야. 천적이란
게 있긴 있나 봐. 소희가 싸늘히 외면하는 유일한 남자는, 바로 소희에게만 목매달고 있는
장씨야. 소박한 소희를 좋아했던 장씨는 눈부시게 피어난 소희에게도 결코 눈 돌릴 순 없었
지. 사람에게 목매단다는 점에서 둘은 참 많이 닮았어. 다른게 있다면 장씨가<일편단심 민
들레>의 민들레라면 소희는 <민들레 홀씨 되어>의 그 민들레라는 거지.
일편단심 민들레가 지친 나머지 결혼할 뻔한 적이 있어. 작년 가을이었을 거야.
"잘됐네요, 장 사장님. 아가씨가 처녀라면서요?"
소희의 목소리가 낭랑했지. 단비가 새엄마를 맞는다는 소문이 시장바닥을 휩쓸 만큼 휩쓸
고 큰길로 빠져 나간 어느 날, 효임이 영업을 끝내려는 참에 들어선 사람은 소희와 장씨였
어. 장씨 깜냥으로는 마지막 확인을 하려 했는지도 몰라.
"무슨예. 지가 뭐 볼 끼 있다고 그러겠심꺼. 결혼도 마 날받아 놓은 것도 아니니 결정된 것
도 아니고예."
처녀 장가를 갈 판인 장씨의 자부심은 소희를 바라보는 애절한 눈초리에 치여 흔적도 없었
졌어. 아이고 저 먹통, 컵을 씻는 척하면서 그쪽으로 신경을 곤두세우던 효임은 장씨의 얼굴
을 한 대 갈길 듯 팔을 움찔하다가 그만 컵을 미끄려뜨렸어. 다행히 설거지통으로 떨어지는
바람에 분위기를 깨진 않았지만, 그렇게 오래 좋아하고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모르는 걸
보면 장씨, 어디가 모자라긴 한가봐. 소희 같은 여자는 머리채 휘어잡고 나서야 한다는 효임
이 푼푼이 일렀건만 또 기도 들어가잖아.
"벌써 소문이 쫙 났는데요? 그 아가씨가 장 사장님과 결혼 못 하면 평생 장 사장님만 바라
고 살수도 있다고 했다면서요?"
장씨는 얼굴이 벌개졌어. 순정파 장씨는 의리파이기도 해서,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 때문에,
소희와 대면도 못한 여자가 소희에게 모욕당하는 건 견디기 어려웠을 거야.
"무신, 말씀이 지나치네예."
간신히 그 말을 한 장씨는 앞에 놓인 소주잔을 드는 동작으로 노여움을 가렸지. 그러나 그
눈에는 어찌할 길 없는 매혹이 들어 있으니, 장씨가 듣기야 야비하기 짝이 없는 말을 하는
그 순간에도 소희는 장씨에게 매혹적으로 비쳐지는 것이었어. 개에게 쫓겨 허덕이며 달아나
던 고양이가 시궁귀 한 마리를 만나 어를 때, 그 동안 개에게 당한 것을 고스란히 갚겠다는
열망으로 한껏 잔혹해질 때가 앙칼진 집중, 근처에 가기만 해도 칼날로 베일 듯 날선 매혹,
그 매혹이 뒷날 장씨를 소리 소문도 없이 파혼하게 했겠지만, 그걸 보는 효임의 가슴은 까
닭 없이 흐득거리며 비 듣는 소리를 내지. 소희가 장씨에게 잔인하게 굴 때마다, 효임은 거
기서 소희의 지난날을 보게 되거든. 그 지난날이, 자꾸만 "사뿐이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라며
소희를 엎드리게 하는 것 같아.
사진기자라는 그 남자, 소희를 발고 지나가는 데 저는 쑥 빠지고 제 아내를 등장시킨 걸
보면 여태까지 소희가 만난 다른 남자와 다를 바가 없는 것 같은데 후유증이 왜 이리 오래
가지? 소희의 말로는 아내가 눈치채고 나선 거라지만, 요즘 들어 소희가 꽃가루 다 날려 버
린 꽃술의 민숭민숭함을 드러내던 걸로 보아, 효임이 보기엔 그 작자도 몸 뺄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게 틀림없어.
"저거 읽어 봤어? 요즘 광고에 많이 나오잖아. 암에 걸려 죽어 가는 아버지 이야기가 나오
는 소설. 저기 두 번째 칸 맨 오른쪽에 꽂힌 책. 그래, 그거 새로 나온 건데 효임 씨가 워낙
빨리 읽으니까."
이슬이 엄마는 빨리 반납해야 한다는 걸 그렇게 말하곤 하지. 책등에 싼 비닐 커버가 투명
한 새 책이야. 아무려나. 효임은 권하는 대로 집어 들고 나오지. 어차피 가게 안에 있기가
심란해서 나온 길이니 효임은 괜히 시장 안을 빙빙 돌았어.
궁륭을 이룬 비닐 천장은 저만큼 높고, 아크릴등을 켠 간판들과 정육점의 창백한 보랏빛
등불이 저만큼 겹치지고 낯익은 풍경이 성큼 뒤로 물러서, 그럴 때 효임은 시간을 성큼 거
슬러 올라가 어린 시절의 시장 풍경 속으로 뛰어들기도 해.
"너 밖에서 누가 부른다."
만화 가게 아저씨가 어깨를 툭 치는 바람에, 공주를 구하는 기사가 되어 성벽을 타넘던 효
임은 덜컹, 떨어져 내렸어. 높은 곳에서 떨어진 충격에서 벗어나려면 시간이 좀 걸려. 효임
은 어릿어릿한 시선을 되도록 천천히 움직여 밖을 내다보지. 구슬을 꿴 발로 가려진 가게
입구, 발 사이로 흐릿한 윤곽이 보이고 그 아래, 무릎이 미어져 나온 골덴 바지가 낯익어.
뒷날 바람둥이가 되는 오빠야.
효임은 밖으로 끌어낸 오빠는 밤이면 유리문에 덧대는 함석 문짝들을 세워 놓은 곳으로 몇
발짝 앞서가지. 효임은 동전을 꺼내 오빠의 손에 올려놓아. 짤랑, 동전이 오빠의 호주머니
속에 떨지는 순간, 효임은 기사와 공주의 앞날이 어떻게 되는지 알려면 앞날을 기다릴 수밖
에 없다는 걸 깨닫지. 만화가 금기이던 그때, 만화 가게에 있는 걸 들켰으니 오빠 입을 막느
라 가진 돈을 다 써버렸거든. 그 무렵, 효임은 자기가 곱슬머리 컬을 완벽하게 그려내는 만
화가가 되거나 글을 쓰는 사람이 될 것이라고 막연히 예감했었어. 여전히 시장바닥에 있을
줄은 몰랐지.
사랑했던 날들보다 미워했던 날이 더 많아. 우리가 다시 저 강을 건널 수만 있다면·
····.
카세트 테이프가 차곡차곡 실린 리어카에서 나오는 노래가 효임을 붙잡았어. 테이프 장수
아저씨는 늘 무표정한 얼굴로 리어카 곁에서 있거나 앉아 있다가 노래가 끝나면 테이프를
갈아 끼워. 탱고 리듬의 노래가 나오든 질질 늘어지는 트롯이든 무표정이야. 삼각파도의 끝
처럼 코끝이 들린 아저씨를 볼 때마다, 효임은 저런 코를 가진 남자가 주인공인 만화를 어
렸을 적에 보았는데·····무언가 떠오를 듯 말 듯해서 안타까워지지. 어떤 기준으로 선
곡하는지를 가늠할 수 있는 아무런 단서도 보여 주지 않는 석회석 같은 아저씨가 고른 노래
를 들으며, 다시 건널 수 없는 강, 흘려 버린 시간이 가슴에 막막하게 부딪혀 와, 효임은 들
고 있던 책을 끌어안고 그냥 서 있지.
하지만 당신과 나는 만날 수가 없기에 당신이 그리워지면 저 강이 야속하다고·····.
노래의 끝부분에 눅진하게 젖은 채 가게 안에 들어서는 효임을, 실내의 침침함이 저만큼
쑥 물러날 정도록 훤한 사내가 맞았어. 효임의 오빠야. 어쩐지 옛 생각이 나더라니, 효임은
속으로 웃었어.
"별일 없었냐?"
"오랜만이야."
여자들로 하여금 침묵으로 꽃잎을 피워 내게 하던 바람둥이 오빠. 언젠가 소희가 보고 나
서 눈을 반짝일 만큼 아직도 용모가 수려한, 그러나 제 안의 바람기에 휘둘리며 살아온 날
들이 배어 나와 허망함이 두드러지는. 그 오빠는 아직도 미혼이고 직장도 없이 떠도는 신세
야. 분위기가 좋은 찻집에서 아무도 위로해 줄 길 없는 중년의 쓸쓸함을 말하기에 어울리는
사람. 그가 시린 가슴을 슬몃 내밀면, 소희같은 여자들은 제 가슴으로 그 허전함을 덮어 주
고 싶어 두근거리겠지. 어디서 매서운 여자한테 걸려들어서 정착했으면 좋으련만.
효임은 말없이 가게에 딸린 방의 장롱 서랍을 열어, 맨 아래 칸에 미리 장만해 둔 봉투를
꺼내어 오빠에게 내밀었어.
"닭 한 마리 튀길게 먹고 갈래?"
"생각 없다."
오빠는 손을 내저었어. 오빠의 손은 칼을 들거나 튀김기름 방울에 덴 자국이 군데군데 흉
터로 남은 효임의 손보다 더 곱고 희지. 아무일도 못할 것 같은 손이야. 돈만 받으면 얼른
나가는 건 미덕일까. 이번엔 얼마나 견딜지 모르겠어. 며칠 전부터 효임의 속에서 일던 조바
심은, 소희 때문만은 아니었던 것 같아.
오빠가 남들처럼 제대로만 대학에 가주었더라면 어쩌면 효임도 대학에 갈 수 있었을지도
몰라. 효임은 국문과에 가고 싶어했어. 어쩌면 여성지의 화보에 나오는, 공원 벤치에서 아득
한 눈으로 무언가를 응시하는 시인이 되었을 수도 있었겠지. 삼수를 한 오빠의 입시와 효임
의 입시가 겹쳤을 때, 한꺼번에 둘은 벅차니 네가 정히 가고 싶다면 내년에 가렴, 효임에게
그렇게 말씀하신 아버지는 효임이 자전거포에서 경리를 보면서 날깃날깃한 교과서를 틈틈이
펼치던 해에 어머니와 3개월 상관으로 돌아가셨어. 이따금 효임은 생각해 보지. 아버지가 살
아 계셨더라면 뭔가가 달라졌을까?
시장 안, 가계들이 내건 아크릴등의 빛살 속으로 오빠는 멀어져갔어. 뭇 여자의 눈엔 헌칠
하겠지만 효임의 눈엔 부실하게만 보이는 뒷모습이 저만큼 환한 곳으로 사라져 가네. 어린
시절, 만화 가게에서 효임의 동전을 받아 가던 그때로부터 얼마나 긴 시간을 흘러 온 것인
지. 어쩐지 이 생을 문턱문턱 뜯어내고 있다는 서러움이 후득이는 빗 낱으로 효임을 때려
오지. 어쩌면, 효임은 오빠를 어느 만큼 사랑하는 것 같기도 해. 오빠에게 돈을 건넬 때, 그
때 비로소 시장안에서 보낸 남루한 시간에 보상을 받는 기분이 들거든. 푸슬푸슬, 한 번도
꽃피워 보지 못한 채 시드는 줄기 같은 효임의 빈약한 가슴에 물이 오르는 기분이야. 그러
고 보니 가을이야. 시장 안에서 자장면으로 늦은 끼니를 때우는 아주머니의 앞에 놓인 알밤
으로나 느껴지는 가을. 몸뻬 차림에 골반이 퍼지는 다리가 굽어 어기적거리는 걸음의 아주
머니들. 생의 가을날을 맞아 바스러지기 직전의 단풍 같은 모습들. 저이들의 생애도 한번은
환하게 꽃핀 날들이 있었을까. 그 기억을 그들은 어떻게 감당하는 걸까. 효임은 멍하니 바라
보지.
만화 가게에 가는 게 금기였던 그때, 어른들이 왜 그렇게 만화며 소설책 읽는 걸 금했는지,
효임은 이제서야 겨우 알 것 같아. 만화는 낯선 곳으로 데려다 주지. 이 생의 남루함에서 건
져내어 화려한 주인공이 되게 하지. 거기선 꽃으로 피어날 수도 있고 멀리멀리 떠나 버릴
수도, 떠났던 곳으로 돌아와 용서받을 수도 있지. 그렇게 만화와 소설 속의 세계에서 떠다니
는 사이에 발은 수소 풍선처럼 조금씩 현실에서 떠오르지. 그래서 그렇게 말리셨던 게야. 하
지만 어른들이 몰랐던 게 있으니, 어디선가 커다란 손이 불쑥 나타나 여기서 건져내 줄지도
모른다는 허무맹랑한 믿음마저 없으면 삭막해서 어찌 살까. 소희가 끝이 뻔한 연애에 텀벙
텀벙 빠져드는 것도 그래서일 거야. 소희는 물가에 내놓은 어린애 같지만, 물가에 내놓은 애
가 다 빠져 죽는 건 아니잖아? 빠졌다가도 허우적허우적, 알 수 없는 힘으로 저 혼자 헤쳐
나오기도 하고, 아슬하게 기우뚱거리면서도 끝내 빠지지 않는 애들이 더 많아. 그러니까 시
장 안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북적이며 사는 거겠지.
가만, 장씨가 가다 말고 왜 저렇게 말뚝처럼 서 있지? 저런, 드디어 나타나시는군. 으이구,
저 웬수, 다 저녁때 아예 꽃으로 피어났군. 저 환한 분홍빛 옷이라니. 비극은 끝나고 이젠
사랑의 예감에 부푼 여인으로 태어났다 이거지. 저 말갛게 씻긴 얼굴을 보면 장씨의 일편단
심도 이해가 가. 아마도<무너진 사랑탑>이라는 노래나 목청껏 불러 젖히거나 그 남자가 찍
어 주었다는 사진 속의 저를 부여안고 글썽이느라 식음을 전폐하다가 점심때쯤 겨우 몸을
일으켜 목욕탕에 다녀왔을 거야. 분명히 혼수방에 얼굴만 비치고 이쪽으로 올텐데, 그러고
보니 튀김기름에 불부터 올려야겠네. 토실한 통닭이라도 한 마리 먹여야 저 반쪽이 된 얼굴
을 어떻게 해보지. 이번엔 몸도 마음도 다 바쳐 헌신할 다른 놈팡이 만나기 전에, 내 장씨
앞에 무릎 꿇리고 말 거야. 그 동안 읽은 어떤 책보다 감동적인 장면을 그려내고 말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