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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 스크랩 제주전통
위듀 추천 0 조회 60 08.11.21 18:2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제주의 민속과 풍물은 섬지방의 특성이 베어 있어 다른 지역에 비해 독특합니다 제주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전통과 생활문화정보를 제공해드리고 있습니다.

갈옷 - 풋감을 즙으로 염색한 옷

갈옷은 풋감을 즙으로 만들어 옷에 염색을 한 것이다. 빛갈은 적갈색, 흑갈색으로 처음에는 뻣뻣하나 자주 이용할수록 부드럽고 색감도 연해진다. 활동적으로 남녀가 가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땀이 묻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더우기 모시로된 적삼과 바지에 감을 염색하여 착용하면 여름에는 더 없는 피서용 의류가 된다.

물옷-제주해녀들이 입던 옷

1970년대 초기 일본에서 검은 고무옷이 들어오기 이전에 제주 해녀들이 입던 해녀옷이다. 해녀옷은 상의를 물적삼, 하의를 소중이, 머리에쓴 물수건을 포함한다. 해녀옷에는 제주여인의 근면성과 편리성과 합리성을 느낄 수 있다. ※ 해녀복 → 물옷 (민속연구원 김동섭)

봇태창옷(소중이) - 영아에게 약1개월동안 입히는 옷

봇태 창옷은 영아에게 약1개월 동안 입히는 옷으로서 홑겹이며 삼배를 이용한다. 소매는 손보다 길게하고 허리는 트게하며 옷고름은 실로하는 데 자라나서 장수하도록 하는뜻이다. 이 옷은 첫아이가 입고 나면 동생이 입기도 하고 동네에서 빌려 입기도 한다.

우장- 비를 가리는 비옷

우장은 비를 가리는 비옷의 하나다. 띠를 곱게 손질하고 띠로 가늘게 새끼를 꼬아 지정된 틀에 맞게 제작하는데 띠가 아래로 향하기 때문에 빗물이 속으로 스며들지 않는다. 비바람이 많은 곳이기 때문에 더욱이 이용도가 많았다.

감티- 동물가죽으로만든 모자(가죽감투)

재료는 노루,오소리, 토끼 가죽등을 이용하여 태양없는 모자로서 털이있는 곳을 밖으로 나오게 하며 귀나지않게 4각으로 만든다. 방한모로서 주로 목자들이나 고노들이 이용한다. ※ 가죽감투 →감티 (의견:민속연구원 김동섭)
제주도의 주거문화는 독특하다. 한국 본토의 민가와는 전혀 다른 유형을 하고 있다. 우선 배치형식이 매우 독특하다. 다른 지방의 겹집은 예외 없이 단동일체형의 살림집이지만 제주도만은 마당을 중심으로 안거리, 밖거리, 목거리 등으로 분리된 살림집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제주도 민가는 ‘一’자 겹집을 기본으로 분할식으로 간 나누기를 하고 있기 때문에 공간을 넓히고자 할 때는 새 한 채를 더 지어야만 했다. 그래서 안거리를 기준으로 하고 밖거리, 목거리 등은 마당을 중심으로 ‘ㅁ’자로 구성해 나갔다.
  안거리 한 채와 농사일을 위한 마구간과 헛간 등으로 구성된 부속채인 목거리로만 이루어진 집을 ‘외거리집’이라 하고, 안거리와 밖거리 두 채를 갖춘 집을 ‘두거리집’이라고 한다. 이때 안거리와 밖거리는 마당을 중심으로 ‘二’자로 마주보기도 하고 ‘ㄱ’자로 배치되기도 한다. 민가가 규모를 갖추게 되면 안거리와 밖거리, 목거리를 포함해 세 채나 네 채로 이루어진다.

이런 독특한 주거문화를 형성한 배경에는 무속신앙과 풍수지리, 바람 많은 기후에 대한 적응, 제주섬에만 있는 특이한 가족제도 등 여러 가지 문화적 요인이 담겨져 있다.

제주도는 아들이 결혼하면 안거리에는 부모세대가, 밖거리에서는 아들세대가 산다. 그리고 일정기간이 지나면 부모세대가 밖거리로, 자식세대가 안거리로 들어간다.
  안거리와 밖거리에는 저마다 상방(마루), 구들(방), 정지(부엌), 고팡(창고)이 있지만, 조상의 제사를 지내는 일(상방-문전신), 제사를 준비하는 일(정지-조왕신), 제수용 제수를 보관하는 일(고팡-안칠성) 등은 안거리에서만 할 수 있다. 그리고 안거리에 속한 안뒤에만 밧칠성(칠성눌)이 있다. 친족의 일, 부조, 공동재산권, 당에 가는 일들 역시 안거리에 사는 사람들만 하는 등, 안거리는 밖거리에 비해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밖거리에 살던 자식이 안거리로 옮겨 산다는 것은 그 집안을 주도하는 세대가 바뀌었다는 뜻인 것이다.
  두 세대는 부엌과 장독대 등이 따로 마련되어 먹고 자는 것은 물론이고 생산경영을 두 단위로 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주거단위로 보면 한 가족이지만, 경제단위로는 두 가족이 사는 것이다.


제주초가에는 오랜 세월 바람과 싸우고 적응해온 제주사람들의 삶의 역사와 지혜가 담겨있다.

세계 모든 지역의 초옥지붕 꼭대기에는 지네모양의 덮개를 씌운 ‘용마름’이 있는데, 제주초가에는 그게 없다. 구조가 다른 미끈한 ‘상모루’가 있을 뿐이다. 게다가 ‘띠’라고 부르는 새를 꼬아서 만든 ‘집줄’로 지붕 전체를 바둑판 모양으로 얽어맸다. 그래서 제주초가 지붕은 아무리 강한 돌풍이 휘몰아쳐도 날아가거나 뒤집어질 염려가 없다.

다른 지방의 초가는 흙으로 외벽을 두른 ‘토담집’이지만, 제주초가는 돌로 외벽을 두른 ‘돌담집’이다. 제주에서는 바람이 비까지 데리고 불어 닥칠 때면 비가 하늘에서 내리는 게 아니라 세상의 옆구리에서 튀어나오듯 하는데, 제주에서는 이를 ‘우친다’고 한다. 그런 비바람에 견디기 위해서 흙 대신 돌로 외벽을 만들었던 것이다.

집을 둘러싸는 울담은 처마 높이만큼 올려 쌓았는데, 바람이 통할 수 있도록 얼기설기 쌓았다. 아무리 독한 바람이라도 돌담의 구멍들에 걸러지면서 기세가 꺾이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제주초가에는 굴뚝이 없다. 난방용 아궁이인 ‘굴묵’ 속의 연료가 되도록 천천히 타들어가게 하기 위해 아예 굴뚝시설을 하지 않았다. 바람 때문에 높은 굴뚝을 할 수도 없었고, 낮고 허술한 굴뚝은 오히려 역풍을 받아 이롭지 않기 때문이다. 굴묵 안에 연료를 담고 나면 입구를 판석으로 막고 그 틈새조차 재로 꼭꼭 틀어막아 바람을 철저히 막았다.
제주 전통민가에는 대문이 없다. 그 대신 정낭과 올레가 있다. 정낭과 올레가 어우러져 있는 주거경관은 한국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유일하게 제주도만이 갖고 있다.

‘올레’는 길에서 마당으로 이어지는 좁은 진입로다. 올레의 바깥 끝인 출입구 양 옆 입구에 구멍 세 개를 뚫은 돌기둥을 세워놓는데 그게 ‘정주목’이다. 그 정주목에 끼워놓는 통나무 세 개가 바로 ‘정낭’이다.
  왜 제주에는 대문이 없고 정낭과 올레가 있게 됐을까. 대륙지방과는 달리 제주도에는 사람과 가축을 해치는 호랑이, 늑대, 곰 따위의 맹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정낭은 왜 필요했을까. 소와 말 때문이다. 제주에는 소와 말을 방목해 키워왔기 때문에 산과 들, 마을 할 것 없이 집 밖은 모두 방목장이었다. 그러다 보니 길에서 어슬렁거리던 소와 말들이 집 마당에서 말리는 곡식이나 우영밭에 심어진 채소며 묘종들을 먹어치울 염려가 있다. 그래서 소와 말이 집 마당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통나무를 가로질러 걸쳐놓는 정낭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리고 제주사람들은 정낭을 서로의 바쁜 생활을 배려하는 정보수단으로 삼기도 했다. 곧 통나무가 하나만 걸쳐져 있으면 주인이 잠깐 외출한 것으로, 두 개 걸쳐져 있으면 좀 긴 시간을 외출했다는 신호로 삼았으며, 세 개가 다 걸쳐져 있으면 종일 출타중이라는 신호로 삼았던 것이다.
 
올레는 왜 있게 된 걸까. 올레의 구조를 살펴보면 반드시 곡선을 이루고 있으며 집안이 들여다보이지 않게 되어 있다. 제주도처럼 우영밭, 장팡뒤, 눌왓 등을 대지 안에 함께 배치하는 경우는 다른 지역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집을 지을 때 문이나 울타리를 먼저 쌓으면 좋지 않다는 게 제주사람들의 공통된 인습이다. 그래서 먼저 안거리가 앉을 자리를 정해 완성한 다음, 안거리와 마당을 둘러싸게끔 밖거리나 우영밭, 장팡뒤, 눌왓 등을 배치하는 과정 중에 입구인 올레를 정하는 일은 각별한 것이 된다.
경사가 완만한 지형을 이용해 쌓아진 밭담이나 이웃집 울담을 이용해 곡선의 형태를 갖게 만들어야 안정되게 쌓을 수 있는 것이다. 굽은 판자가 세우기 쉬운 이치와 같다.

마당은 농작업 외에 갖가지 가정의례가 치러지는 공간이다.

집 전체를 마당 하나를 중심으로 배치하는데 안거리와 밖거리 사이가 칠팔 미터 정도 떨어지도록 해 마당의 폭이 결정된다. 그것은 일조와 통풍을 만족시킬 수 있는 최적거리일 뿐만 아니라, ‘따로, 또 같이’ 사는 가족들의 생활을 최대한 고려한 가장 알맞은 거리이기도 하다.

사람 사이의 거리는 9미터 이상이 되면 보통 목소리로 하는 말소리를 또렷하게 알아듣기 어렵고, 얼굴 표정의 미세한 변화도 느낄 수 없게 된다고 한다.

제주 전통민가의 마당은 안거리와 밖거리에서 가족들이 서로 난간에 앉은 채 일상적인 목소리로 대화가 가능하고 얼굴 표정으로 기분을 읽을 수 있는 딱 알맞은 거리이면서, 내부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생활은 서로 부담감을 갖지 않아도 되는 최상의 거리가 되는 것이다. 제주선인들의 지혜가 그저 놀랍기만 하다.

그런가 하면 마당 폭과 집 높이가 2:1 정도의 비율로 돼 있어서 안팎거리 두 건물은 보기에 둘 사이의 친밀감을 느끼게 하는 한계거리가 된다.
지역에 따라 ‘뒤’ 또는 ‘뒷우영’이라고도 하는 ‘안뒤’는 안거리 뒤쪽에 있는 공간이다. 안뒤는 안거리 뒷벽 한쪽 끝에서 다른 쪽으로 담을 쌓아 마당에서는 직접 드나들 수 없게 만들었다. 담도 주위의 담들보다 높게 쌓았을 뿐만 아니라 대나무, 동백나무, 조록나무 등을 심어 외부에서 들여다볼 수 없도록 막았다. 이곳에 들어가려면 상방(마루)에 있는 뒷문이나 정지(부엌) 뒷문을 이용해야 한다.

이렇게 폐쇄적인 공간, 안뒤에는 무엇이 있을까. 칠성눌, 촘, 장항굽 등이 놓여있다.

‘칠성눌’은 집안의 곡물과 부를 이루어준다고 믿는 ‘밧칠성’을 모시는 눌(낟가리)이다.
 
‘촘항’은 넉넉지 못한 물 사정을 해결하기 위해 빗물을 받아놓는 장치다. 잎이 넓은 상록수인 동백나무나 조록나무에 띠를 댕기모양으로 짜서 매달아 빗물이 모여지게 하고, 그 아래는 항아리를 땅 속에 묻어 고정시켜 놓았다. 더불어 항아리 속의 물은 늘 살아있게 된다.

‘장항굽’은 된장, 간장 등을 담은 항아리들이 놓여있는 장독대다. 제주에서는 장과 관련된 일련의 일들을 할 때 일일이 날을 봐서 길일을 택하는 등 유난히 신경을 쓴다. 다른 지방의 개방된 장독대와 달리 제주의 장항굽이 폐쇄적인 공간에 놓이게 되는 것도 부정한 것들을 막기 위해서다.
  결국 안뒤는 집안의 안주인인 여성의 독자적인 영역으로 신성시하는 공간인 것이다.

‘우영’은 집 주위를 두르고 있는 텃밭이다. 안거리를 기준으로 동서, 앞뒤로 구분해 동녘우영, 서녘우영, 앞우영, 뒷우영이라 부른다. 우영으로 자기네 밭이 이어져도 사이에 담을 쌓고 우영과 밭을 구분해 불렀다.

우영은 일상생활에 유용한 공간으로 주로 채소를 심거나 과일나무를 심는 텃밭이다. 사시사철 신선한 채소류를 생산해낼 뿐만 아니라 제수용 과일을 위한 귤나무, 갈옷을 만들기 위한 감나무, 죽제품을 만들기 위한 대나무도 심고, 묘종을 재배하기도 했다.
‘통시’는 변소와 돼지막이 함께 조성된 제주의 전통측간이다. 안거리 정지(부엌)와 멀리 떨어진 밖거리 옆 울담에 덧붙여 만들어지는데, 건물의 한 쪽 옆을 돌아가서 설치해 마당에서는 직접 보이지 않도록 했다.



통시에는 돼지를 길러 인분을 처리하도록 했다. 변을 보는 곳은 땅에서 세 단정도 높게 두 개의 긴 돌을 놓고, 돌담을 지붕 없이 쌓았다. 바닥은 마당보다 낮게 파서 오수가 흘러나오지 않게 했으며 수시로 보리짚 등을 깔아주었다.
  돗통시는 우선 일을 보는 사람에게 참으로 쾌적하고 안전한 자연화장실이다. 허리 아래까지 쌓아진 돌담이 외부의 시선을 막아주고, 지붕이 없어 일을 보는 동안 세상을 시원하게 감상할 수 있다. 오물이 튀어오를 염려도 없고, 발을 헛디뎌 빠져죽을 염려도 없다.

무엇보다 돗통시의 가장 큰 중요성은, 최상의 퇴비를 생산하는 공간이라는 데 있다.

돼지는 인분은 물론 온갖 음식찌꺼기를 처리해줄 뿐만 아니라 ‘돗거름’이라는 최상의 퇴비를 생산해 주었던 것이다.

사람이 일을 보는 공간은 지붕이 없지만, 돼지가 자고 새끼도 낳고 하는 공간은 지붕을 만들어 덮었다. 그리고 돌로 깎아 만든 ‘돗도구리’를 넣어주어 음식찌꺼기를 담아 먹였다.

짚이 깔린 바닥에는 농작물 가공과정에서 나오는 쓰레기와 소똥, 말똥까지도 수시로 집어넣어 돼지 배설물과 섞여 완전히 발효되도록 했다. 그게 바로 최상의 퇴비인 돗거름이다. 통시를 설치해 돗거름을 생산하는 방법은 제주선민들이 독창적으로 개발한 제주만의 지혜로운 농법이다.

제주초가의 평면은 ‘一’자형의 겹집으로 곱은 집이 없다는 게 특징이다.

상방(마루)을 중심으로 한편에는 구들, 다른 한 쪽에는 정지가 있는데, 구들에는 난방을 위한 공간인 굴묵이 붙어있고, 뒤쪽으로 고팡(창고)이 있다. 세칸집의 경우 정지 내부에 작은 구들이 덧붙여지기도 하고, 네칸집은 작은 구들과 챗방이 추가된다.

제주에서는, 음식을 만드는데 쓰이는 그릇, 살림살이, 도구들을 통틀어 ‘정지세간’이라고 한다.

도구로는 ‘?래’ 라 부르는 맷돌, 절구, 기름틀인 ‘봉애기’, 술을 빚는 ‘고소리’, 두부틀, 국수틀 등이 있는데, 정지가 좁은 집에서는 주로 앞마당을 이용해 작업을 했다. 국수틀이나 소줏고리는 정지에 놓인 솥에 걸고 쓰기도 하고 마당에다 화덕을 만들어 쓰기도 했다.

제주도의 살림도구는 돌을 재료로 만든 게 많다. 그릇은 나무를 깎아 만든 것과 옹기가마에서 생산된 오지그릇을 많이 이용했는데, 특히 물허벅, 장항, 물항, 씨앗보관 항, 고소리 등의 옹기는 없어서는 안 될 요긴한 생활도구였다.

‘살레’는 식기를 놓아두는 나무로 만든 장이다. 석 단으로 짜서 쌍여닫이문을 달았다. 각 단의 바닥은 대나무나 억새로 발을 만들어 깔아 물이 잘 빠지게 했고, 맨 아랫단은 바닥에서부터 30센티미터 정도 높게 만들었다. 정지 뒤편에 놓고 썼는데, 챗방이 있는 집은 챗방에 놓기도 한다.

제주에서는 맷돌을 ‘?래’ 라고 부른다. 단단하고 둥근 돌 두 짝을 위아래로 포개 손잡이로 돌려 보리, 조, 콩, 팥 등의 곡식의 껍질을 벗기거나, 가루를 낼 때 사용했다. 제주현무암으로 만든 제주?래는 맷돌 가운데 최상품이었다. 그래서 제주?래는 돌로 만든 일상용품 가운데 유일하게 다른 지방으로 유출됐던 물건이기도 하다.

제주여인들이 맷돌을 돌리며 불렀던 ‘?래 ?는 소리’에는 고단하고 힘겨운 제주아낙들의 삶의 애환이 담겨있다.

콩 등 젖은 것을 가는 데는 ‘풀?래’를 사용했다. 풀?래는 아래짝의 밑이 높게 도드라지고 코가 흘러 내리 듯 달려 있어 국물이 있는 것을 갈아서 받아내기 쉽게 만들어졌다.

뒤주는 곡식을 간수하는 도구다. 네모난 상자모양인데 습기를 막기 위해 발이 달려 있다. 괴목이나 사오기 같은 결이 좋고 단단하거나 좀에 강한 나무로 만들었다. 주로 뚜껑을 위로 여닫게 되어 있고, 궤처럼 앞으로 된 ‘궤뒤주’도 있다.

한반도에서는 뒤주를 마루에 놓는데, 제주에서는 ‘고팡’에 놓았다. 뒤주가 있는 집은 농사를 많이 짓고 살림형편이 비교적 넉넉한 편이었다.

흙으로 빚어 구운 옹기는 생활필수품이었다. 정지세간으로 쓰이는 옹기만도 시루, 확, 고소리, 큰장태, 솥뚜껑 등의 제작기, 춘두미, 양춘이, 허벅능생이, 쌀독, 술둑, 단지, 수저통 등의 보관기, 독사발, 버럭지, 작은장태, 펭 등의 음식기, 허벅, 죽절펭 등의 운반기 등 그 용도와 종류가 매우 다양했다.
  그 가운데 물을 긷고 다니는 허벅은 제주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옹기로, 용도에 따라,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 다양한 종류가 있었다.


제주에서는 대나무로 결은 장방형의 바구니를 ‘구덕’이라고 한다. 다른 지방의 둥그런 바구니와 달리 바닥이 네모지며 속이 깊다.

구덕은 물건을 나를 때, 간수할 때 등 다목적으로 사용하는데, 허벅을 담는 ‘물구덕’, 채소를 담는 ‘송키구덕’, 빨랫감을 담는 ‘서답구덕’, 떡을 담는 ‘떡구덕’ 등 그 용도에 따라 다른 이름을 갖고 있다.

구덕이 헐거나 구멍이 생기면 헝겊이나 종이로 안팎을 발라 가루 등을 담는데 사용했는데, 그것을 ‘바름구덕’이라고 했다.

그리고 젖먹이 아이의 요람인 ‘애기구덕’이 있다. 일이 많아 아기와 놀아줄 시간이 없었던 제주여인들은 애기구덕에 아이를 눕히고 집에서는 한쪽 발로 흔들어 가면서 집안일을 했고, 밭에 나갈 때는 구덕 채 들고가 그늘진 곳에 놓아두고 밭일을 했다.

‘차롱’은 대나무로 짠 바구니지만 구덕과 다르다. 구덕에 비해 깊이가 반쯤 얕고 뚜껑이 있다.

차롱에는 떡을 만들어 간수하기도 하고 이웃이나 친척집에 부조할 일이 생기면 음식을 만들어 담아가지고 갔다. 조그마한 것을 ‘밥차롱’이라고 하는데 밭에 갈 때 점심도시락으로 사용하기도 하고, 여름저녁에 밥을 담아 마당 빨랫줄에 매달아 놓아 밥이 쉬는 것을 막는데 사용하기도 했다.


‘동고량’은 대나무로 짠 도시락바구니다. 장방형으로 뚜껑이 있다. 들일을 나갈 때 가지고 가고, 특히 마소를 돌보는 테우리들이 많이 들고 다녔는데, 짚으로 엮은 망태기에 넣어 가지고 다녔다.

밥을 담는 함지다. 통나무를 둥글고 움푹하게 파내어 만들었는데, 밥을 떠 담아 온 식구가 둘러 앉아 식사를 했다.

밥도고리는 주로 굴무기(느티나무)로 만들었는데, 솔비나무, 동백나무, 멀구슬나무로도 많이 만들어 썼다.

나무를 깎아 만든 함지박으로 ‘낭밥그릇’이라고도 한다. 윗부분이 바닥보다 넓어 전체적으로 넓은 감을 준다. 놋양푼과 같이 밥이나 고구마, 감바, 범벅 등 조금 많은 양의 음식을 담는데 사용했다. 식구가 한꺼번에 전부 먹을 수 있는 양의 음식을 담았다.

대접 모양의 큰 뚝배기다. 고등어죽을 담아서 먹고, 나물을 무칠 때나 양념을 만들 때 썼다.

나무를 깎아 만든 평평한 쟁반으로 접시용도로 썼다. 굴무기(느티나무), 멀구슬나무, 사오기나무, 솔비나무, 소나무 등으로 만들었는데 둥그런 모양이 많다.

굽이 달린 것은 제사음식을 담는 제기인데, 적이나 떡을 고이는 것은 직사각형으로 만들었다.

나무를 타원형으로 둥글게 판 그릇으로 곡식을 퍼내는데 쓰는 농가의 도량용구다. 한 솔박은 보통 한 되 정도 된다.

솔박과 모양은 비슷한데 좀 작은 것은 ‘작박’ 또는 ‘좀팍’이라고 부른다. 좀팍은 밥을 지을 때 양을 요량하는 용구로 긴요하게 쓰였다.

제주에서는 도마를 ‘돔베’라고 한다. 직사각형의 두꺼운 나무판으로 발이 달려 있다. 채소나 고기를 썰고 여러 가지 반찬거리를 장만할 때 사용한다.

참나무나 박달나무 등 목질이 단단한 나무로 짜는데, 여유 있는 집에서는 생선용, 채소용, 고기용을 따로 마련해두고 썼다.

뜨거운 물에 삶아낸 떡을 건지는 데 썼다. 손잡이가 긴 국자처럼 생겼는데, 둥글고 넓적하면서도 둘레가 오긋하고, 예닐곱 개의 구멍이 뚫려 있어 국물이 빠지게 되어 있다.

소나무와 솔피나무 등으로 만들었다.

작은 옹기단지 세 개가 붙어 있는 양념단지는 ‘세성제단지’, 네 개가 붙어 있으면 ‘네성제단지’라 불렀다. 형제처럼 오순도순 정답다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

술을 빚는 소줏고리다. 악기인 장구처럼 생겼는데 위아래가 하나로 되어 있고 소주가 흘러내리는 코가 달려 있다. 바닥은 평평한데 무쇠솥에 얹을 수 있도록 되어 있고, 윗부분은 냉각수를 담는 장탱이를 얹을 수 있게 했다.


가루를 곱게 쳐내거나 액체를 받아내는 데 쓰는 용구다. 잘 휘는 자귀나무를 얇게 저며 쳇바퀴를 만들고, 말총으로 쳇불을 맸다.

주로 ‘빙떡’을 부치는 데 많이 쓰여서 ‘빙철’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떡이나 전을 부치는데 쓰는 둥근 철판으로 쓰지 않을 때는 걸어둘 수 있게 손잡이가 달려 있다. 빙철이 없는 집에서는 무쇠솥 뚜껑을 뒤집어놓고 썼다.

참깨, 들깨, 콩, 동박(동백열매) 등의 식물을 원료로 기름을 짜는 틀이다. 돌을 깎아 만들었는데 기름이 빠지기 쉽게 홈을 파서 연결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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