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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산천 스크랩 종가기행 20 영일 정씨(迎日 鄭氏) 하곡 정제두- 강화학파의 개창자
무구MKee 추천 0 조회 19 09.06.11 16:3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霞谷 鄭齊斗 - 정몽주 11대손… 강화학파의 개창자
[종가기행 20] 영일 정씨 하곡 정제두 1649년(인조27)-1736년(영조12)
본관은 영일(迎日), 자는 사앙(士仰), 호는 하곡(霞谷), 시호는 문강(文康)

▲ 친필

하곡은 포은 정몽주의 11대손으로 서울에서 태어나 5세 때 부친을 여의었다. 우의정에 이른 명신 조부(鄭維城, 忠貞公)에게 길러졌다. 부평위(富平尉) 정제현(鄭齊賢)의 종제(從弟)이기도 하다. 큰어머니는 인조 때의 충신 삼학사(三學士)의 한 명인 홍익한(洪翼漢)의 딸이다.

성장해서는 남계 박세채(朴世采,1631-1695), 명재 윤증 등 당대의 대학자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경학은 물론 병학, 의학, 지리 등 폭넓은 지식과 '사람됨이 공근했다(爲人恭勤而已)'는 그의 학문 태도는 이 무렵을 전후해서 배양되었다.

그는 당초 주자학을 공부했으나 일찍부터 양명학에 심취해 많은 저술을 남겼다. 평생 존경했던 박세채의 지적까지 받았지만 그는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생애의 전환점은 숙종 15년(41세, 1689)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이 문묘에서 축출된 일이었다. 그는 벼슬을 그만두고 서울을 떠나 안산 추곡(楸谷)으로 낙향해 20여 년을 생활했다.

하곡은 처음부터 관료의 길을 걷지 않았다. 회갑년에 좌의정으로 있던 만정당(晩靜堂) 서종태(徐宗泰, 1652-1719)가 추천해 세자익위사 익위(정5품)에 제수되었고, 그해 8월부터 강화도 하곡(霞谷, 霞逸洞)으로 터를 잡아 은둔했다.

그에 대해서는 만정당 뿐 아니라 이조판서 명곡 최석정, 이조판서 여성제, 호조판서 유상운 등 많은 사람들이 학문이 있다고 추천해 마지 않았다. 그는 문과에 급제한 이가 아니다. 그럼에도 이러한 대신들의 추천과 국왕의 신임으로 후일 종1품직인 우찬성(86세, 1734년)에 까지 이를 수 있었다.

또한 그의 관직 이력을 보면 78세 때 맡은 좨주(祭酒, 종3품 직)라는 직함이 눈에 띈다. 이는 조선 중기 이후 산림처사의 다른 명칭으로 유림에 가장 영향력을 크게 끼친 이에게만 특별히 주어지는 일종의 명예직이다. 우암 송시열, 동춘당 송준길 등이 모두 좨주를 역임한 유림의 종장(宗匠)이었다.

하곡은 88세를 살았다. 당시에는 이례적인 장수다. 기질적으로 벼슬을 싫어했다. 그럼에도 유림의 중망과 조정의 기대는 컸고 그래서 30여 차례나 벼슬이 내려졌으며 쉼없이 사양하다 벼슬에 나가도 2, 3개월만 봉직하고 다시 향리로 돌아오곤 했다.

당시 국왕인 영조의 은애 의지가 어떠했는가는 그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인 88세 때 왕세자의 책례를 마치자 세자를 보양할 관리로 다시 요청했는 사실로도 알 수 있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영조는 시장이 작성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시호를 내렸을 정도였다.

그러나 학문을 즐겼던 하곡의 삶은 순탄하지 못했다. 23세와 52세 때 두 번이나 상처(喪妻)했다. 이 점은 퇴계 이황과 유사하다. 지금 하곡을 지칭하는 호는 61세 때 선영이 있는 강화도 하곡으로 자리잡으면서부터 사용했다.

하곡을 이야기하자면 양명학을 피해갈 수는 없다.

조선 시대에 양명학은 정통으로 대우받지 않았을 뿐 아니라 해서는 안 될 학문으로 여겨졌다. 그래서 이러한 금기를 깨고 접근했을 때는 맹렬한 경보음이 울렸고 그래도 더 나아가면 이단, 또는 사문난적으로 몰렸다. 지금 시각으로 보면 하곡은 오로지 양명학을 연구하지도 않았음에도 양명학자로 몰린 느낌이다.

양명학은 뜻밖에 왕가에서도 관심을 가졌다. 특히 왕실 인사였던 경안령(慶安令) 이요(李瑤)가 대표적이다. 그로 인해 국왕인 선조도 호기심을 가졌다. 선조가 임진왜란의 참담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부심할 때 양명학을 내세운 경안령이 등장했다. 경안령은 동강(東岡) 남언경(南彦經:1528-1594, 서경덕, 이황의 제자)의 학문적인 영향을 받은 이다.

선조는 최측근 신하인 류성룡에게 우선 경안령과 양명학에 대해 자문(諮問)했다. 서애는 남언경과 이요 그리고 양명학 모두를 부정하고 폄하했다.

서애는 심지어 "양명이 말한 양지(良知, 선천적으로 타고난 도덕성과 인식 본능)를 이룬다는 것은 어떠한 것인가?"라는 선조의 물음에 "그 말은 거짓입니다"라고 답했다. 서애는 이어 "왕양명의 학문은 그래서 배우면 해롭다"고 말하자 선조는 "양명학을 하는 것이 전혀 배우지 않는 것보다 나을 것이다"라며 못내 아쉬움을 표했다고 한다.

사실 양명학에 대한 선조의 관심은 스승인 한윤명과 한윤명이 존경한 소재 노수신(1515-1590)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노수신은 영의정에 이른 이로 유배지인 진도에서 명나라 학자인 나흠순(羅欽順)의 곤지기(困知記)를 열심히 읽었다. 곤지기는 양명학의 문제를 지적하기 위한 책이다. 그러나 이 책은 정통 정주학자들에 의해 바르지 못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양명학을 비판하기 위한 책이 도리어 주자학의 잣대로 비출 때 문제가 된 것이다.

노수신은 유배지에서 주자학을 보다 정확히 인식하기 위해 당시로서는 최신 자료인 곤지기를 입수해 미리 읽었던 것이다. 왕조실록 졸기에 "노수신은 유독 육학(陸學)의 종지(宗旨)를 참작하여 사용했는데, 후인들이 더러는 추모하여 칭술(稱述)하기도 했다"는 평이 있는데, 그가 음으로 양으로 주자학의 문제에 대한 고민을 풀어가는 과정에서 국왕에게 영향을 끼치지 않았을까 짐작된다.

하곡은 과연 양명학자였을까? 이를 설명하기 위해 주로 인용되는 구절이 있다.

"좨주 정제두는 정주의 학문을 완전히 배반하고 육왕(陸王, 육상산과 왕양명)의 학설을 대강 답습하여, 이에 감히 말하기를 '육왕과 정주는 비록 다같이 대도(大道)에 들어갔다고 할 수 있지만, 육왕의 학문은 숭례문과 같고 정주의 학문은 돈의문과 같다'고 했으니, 대개 육왕을 정도로 삼고 정주를 방기로 여긴 것입니다."

사헌부 지평으로 있던 이정박이란 이가 정제두를 논핵한 내용 일부다. 내용 중에 하곡이 말한 것으로 되어 있는 것이 과연 자신이 직접 언급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참 흥미로운 비유라고 생각된다. 숭례문은 남대문으로 모든 사람들이 드나드는 문임에 비해 돈의문은 서대문을 말한다. 묘하게도 지금은 돈의문 자체가 남아 있지 않다.

학문의 중점은 남대문에 두어져 있음이 분명하다. 이러한 표현을 실제로 했다면 후인들이 말한 이단이니, 혹세무민이니, '매우 왕양명의 학문을 좋아했다(酷好王陽明之學)'이라는 평이 일어날 수 있는 시대적 상황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끊임없이 청아한 절조가 있다느니 하는 상반된 평가가 이어졌기에 진실을 판단하기란 쉽지 않다.

그가 남긴 글은 불행하게도 이러한 학문 갈래에 대한 논란 때문에 진작 문집으로 간행되지 못했다. 그래서 후손과 학자들의 편집 및 산삭(刪削)을 거쳐 여러 형태의 필사본으로 남아 전한다.

특이한 점은 이 자료들은 일제 강점기 때 학자들의 눈에 띄어 다시 필사가 이루어졌고 일본으로 반출되었다가 돌아오기도 했다. 이것이 지금 우리가 영인본으로 볼 수 있는 국립중앙서관 소장본 22책이다.

▲ 문집

하곡집은 그 일부가 번역되었는데, 그중 '가법(家法)'이라는 글이 주목된다. 양명학자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보아서인지 오히려 정통 주자학자 이상으로 가문의 전통과 질서 계승에 유의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친히 가르치고 독려하거나 책망하지 말고 스승을 얻어서 그에게 자식을 맡기라." 자식을 가르치는 법이다.

'임술유고(壬戌遺敎, 아우 齊泰와 아들 厚一에게 준 글)'는 유언장과도 같은 당부의 글이다. 34세 때(숙종8, 1862년) 쓴 글인데 이 무렵 더욱 몸이 불편해지자 자신의 후일을 당부한 내용이다. 그는 여기서 "후세의 학술은 의심이 없을 수 없다"고 고백한 뒤 자신의 양명학설 관련 저술을 소개한 뒤, 소학이나 논어, 맹자 등 사서를 열심히 배우고 이어서 시경, 서경을 반복해서 읽되 경서를 떠나지 말 것을 당부했다.

여기서 누누이 강조하는 것은 '실학'이었다. 이 글을 통해 보면 그가 했던 양명학은 주자학을 더욱 공고하게 하기 위해 학문적으로만 접근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하곡집을 읽으면서, 국왕인 선조가 양명학에 관심을 가졌을 때 신하들이 그러한 학문의 갈래를 겸허하게 인정하고 그것을 하나의 방편으로 연구하게 하거나, 하곡이 살았던 숙종, 경종, 영조 시대에도 양명학을 살펴 부국강병의 길을 모색했다면 하는 아쉬움이 생겼다.

하곡에게는 시호와 아울러 국왕의 치제(致祭, 영조26년 1월 5일)가 있었다. 일반적인 기준으로 보면 불천위에 해당한다. 그러나 현재 불천위로 모셔지고 있지는 않다. 묘소는 인천시 강화군 양도면 하일리 산62-6에 부인 한산 이씨와 합장이다. 묘비는 신대우(申大羽)가 짓고 서영보(徐榮輔)가 글씨를 썼다.

강화학파(江華學派)

조선 후기에 정제두를 비롯한 학자들이 강화도를 중심으로 형성해 이어진 학문 유파(流派)다. 하곡은 자신과 가까운 소론(少論)들이 정치적으로 어려움을 당하자 강화도로 물러나 은거했는데, 그 뒤 친인척인 이광사, 이광려, 신대우, 심육, 윤순 등 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형성한 이 학단은 이후 200여 년 동안 이어졌다. 강화학파는 구한말 영재 이건창과 위당 정인보, 단재 신채호, 백암 박은식, 창강 김택영에 이르러 꽃을 피웠다.



[종가기행 20] 迎日 鄭氏
유가의 반듯한 삶과 철학으로 산업현장 지킨 '우리시대 선비'

9대 종손 정시종(鄭時鍾) 씨 - 시골읍 서기에서 대기업 사장까지… 종손의 격조 잃지 않아

▲ 숭모비
▲ 묘소

격조가 있는 사람은 어떤 분일까? 요즘은 격(人格) 또는 품격(品格)을 논한다는 자체가 무의미할 정도다. 그래서 우리 사회에 존경 받는 원로는 드물고, 설령 있다 해도 제대로 인정하지 않는 세태다. 물건에 대해선 품질을 따져 명품이란 이름을 붙이길 좋아하지만 사람의 품격에 대해선 존경은커녕 헐뜯기가 다반사다.

'사람의 격조'를 말할 때면 생각나는 야화(野話)가 있다.

조선 말 흥선대원군은 왕족이면서도 세도가들에 밀려 지방을 떠돌았다. 사실은 후일을 도모하기 위해 인재를 만나기 위함이었다. 당시 인재들은 서울에 몰렸고 또 그 대부분은 세도가인 안동 김씨 주변에 기웃거렸다. 그러나 대원군은 참 인재를 찾고자 했다. 그래서 영남을 지나던 중 상주 낙동의 강고(江皐) 류심춘(柳尋春)을 만났다.

강고는 대원군을 만나자 예의와 당당함을 잃지 않고 빈한한 시골 선비이지만 심오한 학문을 바탕으로 시대를 논했고, 때가 되어 소반에 음식을 장만해 내놓았다. 음식이란 게 보잘 것 없어 김치에 멀건 된장, 간장 한 종지 그리고 보리밥이 전부였다. 반가(班家)에서는 국(羹)이 없을 수 없었는데, 가난한 살림에 장만할 도리가 없자 맹물을 끓여 떠놓았던 것. 그것이 글자 그대로 그 유명한 '백비탕(白沸湯)'이다.

그러나 강고는 조금도 미안해 함이 없었다. 며칠을 그렇게 머문 대원군은 강고의 격조에 감동했어도 현실적 고통을 견딜 수 없자 예정보다 일찍 작별을 고했다. 그때 강고가 노자를 대원군의 손에 쥐어 주었는데, 그 돈은 마침 시댁을 다녀온 며느리가 가져온 몇 푼 안 되는 것이었다.

작별 후 얼마쯤 가다 대원군은 뒤따라온 강고의 하인을 다시 만났다. 하인은 대뜸 주인의 말을 전하기를, 미안한 일이나 그 돈을 다시 달라는 것이었다. 의아해 하는 대원군에게 하인은, 막 손님을 보내고 나니 사돈이 운명했다는 전갈이 와 가난한 살림이지만 부의를 전하지 않을 수 없어 보다 중한 예를 표하기 위해 부득이 귀빈에게 실례를 범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대원군은 혀를 차며 강고의 당당함과 인간미에 반했고, 후일 그의 아들 낙파(洛坡) 류후조(柳厚祚)를 중용해 정승에까지 이르게 했다는 이야기다.

강고는 가난할망정 학문을 즐겼고 가문의 긍지 때문에 불의와 타협하거나 비굴해 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자신에게는 엄격하지만 주변에는 훈기를 풍기는 그런 격조를 지닌 선비였다. 하곡(霞谷) 정제두(鄭齊斗) 선생도 그러한 부류에 속한다.

인간미 넘치는 세련된 노신사

하곡의 종손을 만나기 전 먼저 그가 어떤 인물인가에 대해 그림을 그려보았다. 하곡은 조선 후기에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학자요 정치가다. 그는 왕조실록에서조차 이단(異端)으로 낙인 찍혔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하곡 선생'이라 불리며 추앙받은 사람이라는 평도 함께 실려 있어 그에 대한 평가는 극단으로 갈린다. 이는 이례적이다. 그만큼 논하기에 간단한 선비가 아니라는 의미다.

하곡은 영일 정씨다. 독자들은 영일(迎日) 정씨(鄭氏)와 연일(延日) 정씨(鄭氏)의 표기에 대해서 혼란스러울 것이다. 행장을 보면 관향을 영일(迎日)로 적고 있다. 그리고 어떤 경우는 연일로도 표기했다. 문중과 영일 정씨 포은공파 종약원(1981년부터 영일로 통일)에서는 '영일'로 쓰고 있다. 하곡은 포은 정몽주의 11대 손으로, 양명학자요 강화학파의 개창자로 일반에 알려져 있다.

하곡의9대 종손인 정시종(鄭時鍾, 1933년 생) 씨. 피는 못 속이는지 그는 외교관 출신이라고 느낄 정도로 모든 면에서 세련된 노신사다. 이지적이며 단정한 태도를 지녔으면서도 인간미가 넘친다. 그래서 불현듯 대원군의 야사가 생각난지도 모르겠다.

만나자마자 종손은 "자손으로서 훌륭한 조상을 모시게 된 것이 영광스럽습니다"라고 말문을 연다. 현재 종손은 인천시 남동구 간석3동 27-11번지에 살고 있다. 중학교는 서울에서 다녔고 용산고를 나온 뒤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충북 진천으로 내려가 진천읍 서기를 하기도 했다.

남보다 조금 늦게 서울대학교 상과(12회)에 진학했다. 대학을 졸업 후 삼미그룹에 입사해 종합특수강 전무, 계열사 사장을 역임했고, 1986년 퇴사해 포항제철의 협력회사를 운영, 지금까지 현역으로 일하고 있다.

종손은 한눈 팔지 않고 평생 산업현장에서 일했지만, 태도와 구사하는 말에는 유가(儒家)의 격조가 짙게 남아 있다. 하곡으로 시작해 자신까지 9대의 이름자를 막힘 없이 외운다. 그 내력이 궁금했다.

▲ 종손 정시종 씨

"제가요, 사업을 하다보니 책 볼 시간이 없어요. 돌아서면 노사협상하랴, 납품 계약하랴, 월급 지급하랴 정신이 없었죠. 공장이 창원에 있고 한 달에 네 번 정도 비행기를 타고 다녔는데, 버스와 별반 시간 차가 없겠다 싶어 요즈음은 버스를 탑니다. 5시간 이상 타는데, 세 시간은 책을 봅니다. 할아버지 글도 읽고 한문책도 보죠. 한시도 외우고요. 조식(曹植)의 칠보시(七步詩)도 외워요. 배운다는 것이 너무 즐거워요."

그래도 상과를 나왔기에 한문책을 보기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제가 진천에서 면서기 할 때 거처가 마땅치 않아 향교(鄕校, 조선조 지방 국립 교육기관)에 살았어요, 그곳에 삼종조(三從祖) 한 분이 계셨는데 '너는 나이나 학벌로 보나 천자문이나 동몽선습 읽기는 그렇고 하니 맹자를 읽어라'라 해서 맹자를 1년간 읽었어요. 맹자를 3,000번 읽었더니 문리(文理)가 터지더라는 말이 있잖아요."

젊은 시절 읽었던 맹자가 평생의 자양분으로 작용했음을 알 수 있다. 요즘, 명문대를 졸업한 수재 중 어느 누가 20대 나이에 1년여를 투자해 동양 고전에 빠져들까.

덕치를 강조한 맹자를 읽은 덕분일까, 종손이 경영하는 회사 직원은 90명 정도 되지만 아직까지 노사 분규가 없다고 한다. 투명경영을 실천하려고 했고 항상 변화하려고 노력한 결과일 것이다. 이야기를 듣다보니 맹자 7권이 종손에게 경영학개론 몇 권 이상의 영향을 준 듯하다.

그러나 종손에게 고민이 없는 것은 아니다. 전통 계승 문제다.

종손은 지난 6월 초 일본 후꾸시마 현(福島縣)을 방문했는데 거기에서 고이즈미 총리를 만난 적이 있었다. 고이즈미 역시 그때 종손과 마찬가지로 일본 1,000엔권 지폐에 나오는 인물인 노구치 히데요(野口英世, 1876-1928, 저명한 세균학자)의 생가를 찾았던 것이다. 종손은 초등학교 2, 3학년 때 노구치의 일화에 감명받은 적이 있었다.

고이즈미는 일본의 전통에 깊은 관심을 갖고 틈만 나면 유명 역사인물의 유촉지를 답사한다고 한다. 지금 한국의 정치지도자들은 어떤가. 서글픔이 느껴졌다고 종손은 말한다.

종손이 하곡의 삶을 반추하고 남긴 글을 읽는 것은 그래서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는 여러 역사적 사실이나 일화를 꿰고 있었다. "할아버지께서는 청렴하고 강직했어요. 양명학을 하였고, 그것이 실학에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합니다. 이론보다는 실천을 항상 생각했던 분이셨죠. 조부께서 우의정까지 지냈지만 집안은 정말 가난했어요."

필자는 하곡이 양명학자나 반(反)주자학자가 아니라 '참학문이 무엇인가 고민하고 그것을 실천한 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시각으로 보면 종손의 삶의 철학은 하곡과 얼마간 닮았다.

종손은 2남 1녀를 두었다. 맏아들 이한구(李漢求, 1959년 생) 씨는 창원특수강 차장이고, 둘째인 한남(漢南, 1961) 씨는 공학박사로 포항제철에 근무하고 있다. 두 사람 모두 소위 '실용지학(實用之學)'을 전공했고 그 분야로 회사와 사회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본래 가난한 종가였지만 더욱 어렵게 된 것은 증조부(鄭元夏)가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자 중국으로 가솔을 이끌고 망명했기 때문이다. 선친(鄭在忠, 1902년생)은 부친을 따라 온갖 고생을 하면서 만주 생활을 했다. 선친은 그후 중동학원을 다녔고 92세까지 사셨다.

증조부는 영재 이건창의 동생 이건승과 함께 나라가 망하자 음독 자결을 단행했다. 그때 식구들이 약사발을 빼앗아 뜻을 이루지 못하자 칼을 뽑아 자결하고자 했고 억지로 막는 과정에서 한 손을 크게 다쳐 평생 불구로 지낸 지사(志士)였다.

종손과 인터뷰를 한 뒤 3번 전화통화를 했는데, 그때마다 거듭 조금이라도 과장하거나 자랑은 빼고 그저 수수하게 써달라고 당부했다. 그래서 더욱 짙은 '인간미'가 느껴졌다.



입력시간 : 2006/10/02 14:37
수정시간 : 2006/10/02 14:40


서수용 박약회 간사 saenae61@hanmail.net
· 사진=남정강 한얼보학 연구소 소장

 출처:http://blog.naver.com/sudony  

        http://blog.naver.com/sudony/100029279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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