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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환 시인의 18번째 시집 [산복도로]/신국판 144면/값 8,000원/발행일 2009. 5. 10/발행처 책펴냄열린시
□발문을 대신하여
산복도로 단상
조송현(국제신문 문화부 기자)
최학림(부산일보 문화부 기자)
최영철(시인)
1. 내 문학의 요람<4>…시인 강영환의 초량동 산복도로/ 조송현
초량 산복도로 길옆에 망초꽃이 피었다
우리나라 각지 들이나 길가에
저절로 피는 망초꽃이 나와 이웃하여
빈손으로 태어나도 꽃을 피울 줄 아는 민망초
길경이와 이웃하여 보내는 작은 눈짓을
내게도 보내어 준다
오늘날 우리에게 사랑한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우리나라 각지 망초꽃이 핀다
산복도로
길옆에 나와 이웃하여
작은 사랑이 핀다
강영환의 시 「망초꽃 사랑」
`산복도로' `이웃하여' `사랑'이란 단어는 시인 강영환의 시에 빈번히 등장하는 시어들이다. 특히 `산복도로'는 연작시의 제목으로 쓰였는데 그의 첫시집 『칼잠』(도서출판 詩路.1983)에 열 다섯 편이 실려 있기도 하다.
인터뷰를 위해 강 시인을 만난 것은 지난 주말 오후 부산 중구 중앙동의 `책펴냄열린시' 사무실. 부산컴퓨터과학고(옛 선화여상)교사이자 `책펴냄열린시'주간인 그는 이곳을 제2의 근무처로 삼고 매일 오후 6시쯤이면 출근하고 있다.
강 시인을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술이나 한 잔하자며 불문곡직 기자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그와 대작을 하면서 훔쳐 본, 밭이랑 같은 눈가의 주름살에도 소년처럼 해맑은 그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짐을 느꼈다.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시 얘기를 좀 들려달라고 하자 그는 책상 위에 올려놓은 시집들을 가리키며 "내 시는 이 시집들을 보면 될 거고 어디 가서 술이나 한잔 하지 뭘…" 하며 쑥스러워 했다.
해가 지기 전에 사진을 찍기 위해 초량동 산복도로를 향했다. 택시가 메리놀 병원 앞을 지나 산복도로로 접어들 무렵 그에게 물었다. "어떤 계기로 산복도로 같은 소재로 시를 쓰게 됐습니까."의외로 대답은 간단했다. "거기서 오래 살다보니 그렇게 됐어요." 경남 산청에서 태어난 그는 초등학교 시절 경찰공무원인 부친을 따라 전남 여수에서 잠시 살다가 초등학교 6학년 때 부산 영주동 산복도로 근처로 이사 왔다고 했다. 그리고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는 줄곧 초량동 산복도로 근처에서 살았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는 `산복도로 키드'였던 것이다.
초량동 산복도로 금수사 근처에 왔을 무렵, 기자는 자작 애송시 한편을 들려달라고 청했다.
옆으로 누워 드는 잠은
무너지기 쉽다
…
이웃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이웃들의
엎어지지 않고 뒤집어지지 않고
용케 드는 잠
마루바닥에 날을 세워
차가움은 뼈 속 깊이 사무쳐도
이웃과 이웃의 어깨에 부딪혀
끈끈한 체온 속으로 실어 나른다
호명 당하여 떠나간 이웃
돌아오지 못할 때
오, 옆으로 누워 드는 잠은
자주 자주 목이 마른다
강영환 첫 시집의 표제시 「칼잠」 전문
차가운 마루바닥에 칼잠을 자면서 이웃 간의 체온의 나눔이 없다면 추위에 얼마나 떨 것인가. 이웃과의 관계를 이 시만큼 감동적으로 노래하고 있는 시는 흔치 않을 것이다.
"산복도로의 서민들은 모두 나의 이웃이고 친구였지요. 시인인 내가 우리 이웃들의 얘기를 시로 쓰는 것은 당연했지요." 시인은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 이웃과 체험을 공유하고 보다 나은 삶을 지향하는 우리의 동료라는 얘기다. 그의 이 같은 이웃사랑은 첫 시집 『칼잠』에 이어 『불순한 일기 속에서 개나리가 피었다』『이웃 속으로』『황인종의 시내버스』 등으로 거의 모든 시집을 망라한다.
그는 현실의 고난과 장벽을 극복하기 위해서 이웃과 삶을 함께 하려는 의지를 보이지만 섣불리 현실에 분노를 터뜨리거나 개혁해야 한다고 외치지는 않는다. 왜 그랬을까.
"`산복도로 서민들의 삶은 불행하다'고 단정 짓는 것은 평지사람들의 편견일 수 있지요. 그들 속에 있는 나는 그들을 인간적인 시선으로 봤어요."
산복도로를 내려와 우리는 부산역 앞의 한 한식집에 들렀다.
반주를 주고받는데 기습하듯 그가 물었다. "오늘날 우리에게 사랑한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머뭇거리는 기자에게 그는 자답했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 아닐까요." 순간 머리를 스치는 생각. 자신과 이웃이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인 사랑을 고집스럽게 노래하는 것이 바로 강시인의 휴머니즘이 아닐까.
`사랑이여, 그것은 뜨거운 나의 살이다
풀숲을 헤치는 바람같은 그대 손길에도
터억 막히는 숨을 어쩔 수 없나니
아픔 없이는 그대와 나눌 수 없는 사랑
…
강영환의 시 「겨울도시에서 띄우는 편지·43」중에서
어느새 자정을 넘긴 시각, 머리 속에 떠오른 강 시인의 사랑 노래가 취기와 함께 혈관 속으로 따뜻하게 흘러드는 느낌이었다. <국제신문, 2000/07/19일자>
2. 부산, 창작의 샘터⑧-시인 강영환과 초량 산복도로/ 최학림
그날 강영환 시인의 삶이 나부꼈다. 부산 동구 초량 6동 산복도로에는 오후의 바람이 불었다. 날씨는 우중충 눈이 올 듯 을씨년스러웠고, 바람은 시인의 입술에 메마른 흔적을 남기며 스쳤다. 집 위의 집, 골목 사이의 골목, 사람 사이의 사람, 그 속에서 그는 40여년을 살았다. "말뚝 체질인가 봐요." 초등학교 6년 때 경찰공무원이던 아버지를 따라 전남에서 부산으로 이사 와 영주동, 수정동에서 살았고, 고교 1년 때인 1967년부터서 살고 있는 곳이 지금의 초량 6동이다. 당시 산 5번지 판자촌이었다.
"루핑 집이라고 압니까? 콜타르 기름을 묻힌 종이를 지붕으로 얹은 판잣집이었죠." 우장창 가재도구 부서지는 이웃의 싸움 소리와 울음소리가 가슴을 할퀴던 곳, 택시 기사도 올라가기를 꺼리던 곳, 그곳에 산다는 것이 부끄러웠던 곳…, 그곳이 부산의 산복도로였다. 그러나 그때 누가 '부산의 산복도로'를 마저 알았겠는가?
그는 "'산복도로'라는 단어는 사전에 없다"라고 말했다. 83년 첫 시집 『칼잠』에 '산복도로' 연작을 실었는데 다른 지방의 문우들이 "산복도로가 뭐냐"라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것은 차라리 부산의 역사 속에 있고, 삶 속에 있고, 그리하여 그의 시 속에 있다. 50년대 한국전쟁으로 피난민들의 물결이 국토의 끄트머리 부산에 밀려왔고, 그 처절한 아우성들이 매달린 가파른 경사가 산복도로의 비탈이었다. 그러나 그 비탈이 삶의 심부에 적중하는 각도라는 걸 누가 알았겠는가? 그는 산복도로를 "부산을 이룬 것의 고갱이가 엉겨있는 곳"이라고 애써 말하지는 않았다. 다만 그는 "산복도로의 집 방 마다에서는 바다가 훤히 다 보였다"고 말했다.
고단한 삶과 시원한 전망이 얽혀 있는 곳…. 그는 "고단한 삶이 생의 진수"라고 했다. 산복도로에 서면 고단한 삶이 종내는 시원한 전망이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그는 "그것이 부산이 부산일 수 있고, 삶이 삶일 수 있는 이유"라고 말했다. 왜 이사하고 싶지 않았겠는가. 하지만 그는 "이게 사는 거다. 이런 게 사람이구나라는 걸 산복도로에 살면서 차츰 알게 되었다"고 말했다. "내 시의 영원한 주제는 이웃입니다.”
살아 있음이여 살아 있음이여
칠흑의 벌판에서 눈으로 만나는 우리
불로 춤추려 한다
(중략)
멀리 있는 이웃을 부른다'
강영환의 시 「늑대의 춤」중에서
이곳에서는 삶의 가장 기본적인 수신호를 스스럼없이 나눈다. 아래윗집 간에 떡과 음식도 여전히 나눠먹고, 돈도 급할 때는 기십만 원 씩 빌려주기도 한다. 물론 떼먹는 경우는 전혀 없다. 외출했을 때 비가 오면 이웃에 전화해 빨래 좀 걷어달라는 부탁도 하는데 그것은 옥상이 다닥다닥 붙어있다고 가능한 게 아니다. 어떤 냄새 때문에 가능하다. '작은 눈 서로 맞추고 있을 때/ 말없는 눈빛 속으로 흐르는 냄새 그것'(「하산- 열린도시·1」중에서) 때문이다. "3년 전 아들 혼자만 있는 집에 세탁기 모터 과열로 불이 났어요. 외출 나갔다가 화들짝 놀라 달려와 보니 이웃들이 소방차도 오기 전에 불을 완전히 다 껐더군요." 시인의 이웃에는 시인보다 이곳에 더 오래 살아온 터줏대감들이 많다고 한다. 그는 "동네를 옮겨서 아름답게 꾸미기보다 자기가 살고 있는 동네를 아름답게 바꾸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그는 이 동네에 발목 잡혔다(?). 예전엔 이사하려고 하면 동장이 나서서 막았다. 지금은 이웃의 한 대학생이 "강 선생님도 이곳에 살고 있다"며 다른 데 이사 가지 않겠다고 말할 정도이다. 한때 택시기사도 올라오기를 꺼렸던 곳이 이렇게 변한 것이다.
우리말 '함께하다'에서는 '함께'와 '하다'를 띄워 쓰지 않는다. 말 그대로 '함께하기' 때문이다. 그는 "미우나 고우나 함께 가야하는 것이 사람이다"라고 했다. 그는 몇 해 전부터 부산민예총의 회장 일을 맡고 있다. 기관지를 만들었는데 제호를 '함께가는 예술인'이라고 만든 이는 그이다. 함께 가고, 함께하는 것이 이웃이고, 사람이며, 그리고 예술이라는 것이다. 그는 11권의 시집과 2권의 시조집을 냈는데 여태껏 빠지지 않는 것이 산복도로 시이다. '밟을수록 솟아오르는 길이 있다/ (중략) 눈물겨운 피난살이 오르막길 범냇골에서 성북고개를 넘어 범일, 좌천, 수정동을 지나 한숨 돌리는 곳, 초량 조그만 산동네 나는 거기에 산다'. 이 시가 실린 시집 이름은 '눈물'이다. 그는 부산컴퓨터과학고에서 교사로 26년째 재직하고 있는데 그 학교도 집에서 1㎞ 남짓 떨어진 산복도로 주변에 있다. 그 일대가 '부산'이다. <부산일보 2005/03/02일자 025면>
3. 최영철 시인이 쓰는 작품 속 부산<18> - 강영환 시 '산복도로'
산복도로는 지상의 길이지만 지상이 아닌 허공을 달린다. 길은 하늘에도 있고 바다에도 있지만 지상의 길은 층층으로 겹을 이루고 있다. 지하와 평지와 고가와 산복으로 뚫려 있다. 그 길들은 제각기 따로 떨어져 있지 않고 언젠가는 다시 만난다. 올라갔던 길은 내려오고 내려왔던 길은 다시 올라간다. 하늘의 정점에 창공이 있고 바다 저 아래 심해가 있으나 길들의 높낮이는 우열이 없다. 시작과 끝이 없다. 높이 올랐다고 으스댈 즈음이 곧 하강의 지점이고 캄캄한 나락이라고 여겨진 순간이 곧 상승의 지점이다. 평지가 순탄한 평화에 젖어 있을 무렵 길은 여지없이 하강하거나 상승한다.
부산은 이 층층의 길들을 모두 얼싸안고 있다. 하늘길 바닷길은 물론이고 지하와 지상과 고가와 산복도로를 함께 거느리고 있다. 기질 역시 여러 갈래다. 부산의 기질을 탁 트인 해양성만으로 가늠하는 것은 충분치가 않은 듯하다. 대범하고 활기찬 바다의 기운 못지않게 세심하고 내면적인 내륙의 기운 또한 병존한다. 또 그 상반된 두 기운이 섞여 만들어내는 미묘한 성향이 혼재한다.
산복도로는 부산이 만든 길 중 가장 상부에 위치한 길이다. 위치로는 높은 길이지만 경제 가치로는 낮은 길이다. 낮은 길이어서 가장 나중의 길인 듯 하지만 가장 처음의 길이다. 오륙십 년대 부산에 정착한 사람들이 가장 먼저 둥지를 틀었던 처음의 길이다. 고향산천 일가붙이를 떠나 빈손으로 배수진을 친 곳이다. 그런 점에서 산복도로는 가장 막다른 길이다.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가장 나중의 길이다.
그런 산복도로는 높지도 낮지도 않은 중심에 있다. 산의 복부, 산의 허리, 산의 중간을 관통하는 도로다. 이쪽저쪽 위아래에 사람들의 마을을 옆구리에 끼고 있다. 오늘의 부산을 땀 흘려 일군 주역들이 살고 있다. 돈 모아 일찌감치 저 아래 동네로 내려간 사람도 있고, 산동네 달동네의 인정이 좋아, 저 아래 탁 트인 넓은 시야가 좋아, 그대로 눌러 사는 사람도 있다. 어서 부지런히 돈 모아 반듯한 제 집을 가지려고 땀 흘려 가파른 비탈길을 오르내리는 사람들이 있다.
좌판 위에서 종일토록
가랑비를 맞고 있다
내장에까지 젖는 빗소리
맨살에 닿는다
매서운 눈 꼬리를 치켜뜨고
산을 넘고 넘어서
사람들은 그냥 지나가 버리고
일어설 수 없는 비늘
터지면서 부러지면서
끝끝내 까무라친다
껍질 벗긴 꼼장어가 맨살로 엉겨
꼬무작거리고 있다
좌판 위에서 최후까지
목이 쉬어 남아 있는 바다
천천히 토해내면서
이글이글 불타고 있다
여름 햇살
붉은 팔뚝으로 남정네들이 떠나간 바다
떠나서 돌아오지 않는 바다를
큰물로 앉아 꿈틀거린다
-강영환 시 「산복도로·10 -생선장수」 전문
좌판 위에 내리는 가랑비는 산복도로 사람들의 순탄치 않은 세월처럼 추적추적 내린다. '내장에까지 젖는 빗소리'는 혹독한 삶의 시련과 매정하게 지나치는 사람들의 차가운 시선이다. 터지고 부러지고 까무라치는 비늘은 좌절하는 산복도로의 일상이다.
그러나 산복도로는 새벽마다 다시 깨어나고 있다. 껍질 벗겨진 꼼장어들이 맨살로 엉겨 꼬무작거리며 살아나듯이. 좌판 위에서 최후까지 목이 쉬어 이글이글 불타고 있다. 산복도로 주민으로 첫 시집부터 지금까지 30여 편의 산복도로 연작시를 써 온 시인 강영환의 산복도로 순례는 이렇게 진행 중에 있다.
산복도로의 근육은 단단하다. 구비치는 2차선으로 부산의 허리를 질끈 동여매고 달린다. 산복도로는 부지런했으나 가난했다 가난했지만 쉽게 낙담하지 않았다. 무슨 술수를 부리지도 않았고 널뛰기를 해 공과를 부풀리지도 않았다. 저 아래 평지의 삶을 부러워하지도 않았다. 아픈 허리를 곧추세우며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저 아래 평지를 아우르며 살았다. 산복도로의 그런 넓은 아우름은 무동을 타고 바라보는 세상과 같다. 산복도로에 산다는 것은 아래의 시처럼 무동을 탄 높고 넓은 시야를 가진다는 것이다.
무동을 타고 아이야
바다를 보아라
네 눈의 높이까지 바다를 이끌고
바다 속 깊이까지 속속들이
제방을 타고 넘는 속마음을
무동을 타고 아이야
우리들이 지닌 수족으로 갈 수 없는
수면 위로 명멸하는 금은의 나라
지켜 선 등대
담 너머에서는 무엇이 이루어지는가를
꿀 먹은 눈으로 손짓해
키 작은 아이에게 일러주며
무동을 타고 아이야
-강영환 시 「산복도로․4-明童이」
산복도로에는 권영술 그림 '달동네'(캔버스에 유채,117×91㎝,1986)에서 보듯이 위아래 이쪽저쪽으로 포개어져 살 부비는 삶이 있다. 달은 해처럼 떴다 지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그 자리에 있다. 다만 태양이 잘 지나가도록 잠시 고개를 숙였을 뿐이다. 달은 태양처럼 으스대지도 않고 어둠과 그늘을 밀어내지도 않는다. 묵묵히 제 자리에서 그 빛과 기운만으로 은은하다.
달동네 사람들은 달의 부름을 받고 일어나 이제 막 떠오르고자 하는 해를 지상으로 등짐 져 나르는 사람들이다. 산동네 사람들은 그렇게 쏘아올린 해를 저녁이면 다시 공손히 받들어 등짐 지고 돌아온다. 산복도로에는 그 일을 수행하는 달동네 사람들이 산다. 권영술의 그림 속에 그들의 집이 있다. 그림 속에서 아른아른 피어오르는 훈김과 구수한 된장국 냄새를 맡았다.
그 처소는 궁색할 수는 있으나 옹기종기 붙어사는 살가움이 있다. 불편할 수는 있으나 불안하지는 않다. 남루할 수는 있으나 걸릴 것 없는 자유가 있다. 달동네와 산복도로는 두둑한 배짱이 있다. 씩씩하다. 걸걸하다. 달의 부탁을 받아 해를 운반하고 있는 신성한 과업이 있다. 달은 그렇게 하루 일과를 마치고 오르막길을 올라오는 사람들을 따스하게 비추고 있다.
<부산일보, 2006/07/0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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